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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6 02:28
행맨루스터
행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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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미국의 어느 지역에 어느 시간대에 제이크 세러신이 살았다. 남들과 비슷한 삶을 영위하며 큰 일 없이 살았다. 한 때는 뜨거운 연애를 했을 부모님은 중년의 위기를 겪으며 별거 중이었다. 바쁘고 피곤한 직장인인 제이크는 방황의 시기를 자체적으로 건너뛰었다. 한 집 건너 별거나 이혼을 한 가정은 많았다. 제이크도 그 표본 집단의 하나를 맡고 있었다. 세러신 가족은 서로 다른 집에서 각자의 삶을 살았다. 명절이면 제이크가 유년 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그의 어머니만 남은 집으로 모여 어색하지만 형식적인 가족 식사를 했다. 예외 없이 신년에도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일은 잘 되어 가는지 물었다. 주머니 두둑하게 받은 성과금과 돌아가는 경제 상황을 꼽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만나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물었다. 두 달 전까지 만나고 있던 사람과는 헤어졌다고 알렸다. 어쩌면 올해 식사에는 제이크의 연인도 참석할 뻔 했다. 권태기나 진심, 열정 같은 단어들을 나열하며 그녀가 이별을 고하지만 않았다면.

 
 

너도 슬슬 정착할 때가 되지 않았니?”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려야지.”

 
 

 그리고 말년에는 별거해서 명절에나 만나는 사이가 되면 되나요. 제이크는 부모의 직언을 한 귀로 흘리며 묵묵히 식사를 마쳤다. 매년 듣는 소리에 새삼 발끈할 기운도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기다란 소파에 앉아 저녁 뉴스를 보던 세 사람은 간다 온다 말 한마디 없이 어느 순간 조용히 자리를 떠 본인에게 배당된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제이크가 독립한 후에도 그의 방을 보존해 놓고 있었다. 열두 개의 달을 보내는 동안 제이크가 이 방에 머무르는 기간은 한 달 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방은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나가던 마지막 날과 동일했다. 늦은 시간에 마신 커피가 원인인지 오늘따라 제이크는 잠이 오질 않았다. 직장인에게 불면증은 낯선 존재가 아니지만 벌써 두 시간째 잠을 이루질 못하고 있었다. 가족이 다 잠들었을 시간에 결국 몸을 일으킨 제이크가 침대 옆의 무드등을 켰다. 잔잔한 빛이 방을 밝혔다. 우선 손에 잡히는 핸드폰을 열어 아무 어플이나 눌러보았다. 지금 시간에 전 여친에게 문자를 보낸다면 답이 올까. 새해부터 악담을 듣고 싶지 않았던 제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제이크를 찾는 새로운 알림도 없고 남들의 sns를 보자니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핸드폰을 다시 뒤집어 협탁에 올려놓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학창시절에 읽었던 만화잡지도 꺼내보고 채 버리지 못한 교과서도 살짝 훑었다.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금방 덮었다. 그러다 집어 든 게 졸업 앨범이었다. 초중고, 대학교까지 순차적으로 꽂힌 앨범들 중 중학교 졸업 앨범을 꺼내 책상 앞에 앉았다. 이제는 흐릿하다 못해 낯설기까지 한 학교의 전경 사진을 넘기니 차례로 학생들의 증명사진이 있었다. 제이크는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앳된 자신의 사진 앞에서야 손이 멈추었다. 졸업 사진은 유치하다고 생각하지만 못나게 나오는 건 싫어서 나름 때 빼고 광 낸 자신의 모습이 필름에 담겼다. 어린 제가 얼마나 유치했는지 떠올린 제이크가 피식 웃으며 반대편 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루스터.”

 
 

 제이크는 막대 사탕을 물어 볼록한 한 쪽 볼을 가진 소년의 사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카메라 앞이라 긴장했는지 눈썹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브래들리 브래드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잊을 만 하면 생각나는 제이크의 첫사랑이었다.

 
 

그렇게 친구들을 몰고 다니더니 동창회 한 번을 안 나오냐.”

 
 

 애석하게도 졸업 후 브래들리와 만남을 가진 적은 없었다. 애초에 만남이라는 단어가 성립할 수 없는 관계이긴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비를 걸고 싸우는 것 외에 정상적인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모든 건 제이크가 미성숙한 청소년이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춘기를 겪는 소년은 갑작스레 찾아온 첫사랑을 마주하기가 무척 겁이 났다. 딱히 동성애를 배척하는 동네도 아니었는데 브래들리에게 좋은 말을 건네기가 어찌나 어렵던지. 그 때의 제이크는 입을 열면 미운 말만 골라 하는 재주가 있었다. 브래들리도 조용히 당하는 성격은 아니라 제이크가 한 마디 던지면 두 마디를 받아치고, 말싸움이 주먹싸움이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얼마나 싸워댔는지 전교생이 보도록 운동장 한 복판에서 의자에 앉아 손을 잡는 벌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한 번 틀어진 관계는 재정립이 어려웠고 그들은 졸업할 때까지 전교가 아는 원수로 살았다. 어중간한 사이가 되느니 기억에 단단히 박힐만한 놈으로 남겠다는 발상은 대체 왜 했는지 과거 자신의 어리석음을 진심으로 탄식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야구나 같이 했겠지.”

 
 

 워낙 접점이 없는 사이였다. 같이 다니는 친구들도 달랐고 관심사도 멀었다. 브래들리가 야구에 매진할 때 제이크는 농구를 하고 있었다. 같은 학급은 딱 1학년뿐이었고 졸업까지는 서로 거리가 제일 먼 반으로 배정되었다. 그 당시 교사들도 둘의 싸움을 손 놓고만 보지는 않았는지 교권이 개입한 당연한 처사였다. 다만 멀어진 브래들리에게 닿기 위해 제이크가 더 열심히 트집을 걸게 되는 상황을 초래할 뿐이었다. 추억에 잠겨서 무엇 하랴. 다 지난 과거의 일이었다. 당사자인 브래들리가 지독한 놈에게 잘못 걸렸었다고 제 졸업 사진을 칼로 파내지 않았으면 다행이었다. 어쩌면 벌써 20년이나 지났으니 자신을 깔끔하게 잊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브래들리 브래드쇼가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하다못해 전화번호조차 제이크는 알지 못했다. 결국 풋내기 시절의 짝사랑일 뿐이었다. 동창들에게 물어물어 안부를 확인하거나 인터넷을 뒤져 계정을 찾아낼 만큼 절절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의 말간 얼굴이 어떻게 자랐는지는 궁금해서 혹시나 이번에는 올까 꼬박꼬박 동창회를 참석했지만 야속하게도 브래들리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제이크는 매번 문가만 바라보며 술을 마시다 집에 돌아갔다. 그런 날이면 없던 숙취가 꼭 생겼다. 종일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탔다. 다음 날이면 평범한 제이크의 인생으로 돌아왔다. 딱 그만큼의 관계였다. 상념에 잠겨 있던 제이크가 앨범을 덮었다. 여전히 브래들리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글쎄.’ 제가 아는 브래들리는 중학교 시절 그 모습뿐인데 짝사랑이라는 이름에 20년의 세월을 갖다 붙이기에는 괴리감이 너무 컸다. 그냥 살다가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길을 걷다가, 하늘을 보다가, 아침에 불쑥, 저녁에 가끔, 네가 내게로 오는 순간이 있었다.

 

 

 




 

 

1. 부고 문자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모든 죽음이 기약 없다지만 브래들리 브래드쇼의 죽음은 재난처럼 제이크를 덮쳤다. 처음에는 질이 나쁜 장난이라며 무시했다. 업무를 보는 도중에 다시 내용을 확인하고 아무도 오지 않는 비상 통로로 가 동창인 제이비에게 연락했다.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브래들리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여전히 브래들리의 얼굴을 보지 못해 제이크 상상 속의 그는 중학 시절 앳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관에 누웠다. 전화를 끊은 제이크는 눈을 감았다. 땅이 꺼지는 기분에 잠시 휘청거렸다. 벽을 짚고 복도를 걷는 동안 전면창 너머로는 비행기가 하늘을 가로 질렀다.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자리로 돌아온 제이크에게 동료가 안부를 물었다. 고개를 내저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째깍째깍 사무실의 시계 초침 소리가 오늘따라 크게 들렸다. 여전히 세상은 돌아갔다. 제이크는 상사에게 장례식 날짜에 맞춰 휴가를 신청했다. 업무를 위해 거래처와 통화하고 이메일을 주고받는 사이 점심이 되었다. 동료들이 식사 자리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제이크는 가까운 매장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사 벤치에서 먹었다. 업무에 쫓기다 보면 가끔씩 사먹는 메뉴였다. 발치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기 위해 비둘기들이 돌아다녔다. 제이크는 반도 먹지 않은 샌드위치를 잘게 쪼개 뿌렸다. 남은 쓰레기를 버리고 남들보다 이르게 사무실에 복귀했다. 가만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던 제이크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노란 위액이 나올 때까지 속을 게워낸 후 찬물로 입가를 닦았다. 내친 김에 세수도 했다. 거울 속 자신이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얼굴이 뜨거웠다. 브래들리 브래드쇼가 죽었다.

 
 

여기까지 발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이 많았다. 삼촌이라는 사람이 안내를 담당하고 있었다. 진짜 삼촌은 아니고 브래들리 아버지의 친구라고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오늘에야 제이크는 브래들리가 오래 전에 가족들을 잃었음을 알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졸업 직후 어머니까지 여의느라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이사 간 이유도 들었다. 위의 삼촌이 브래들리를 거둬 성년이 될 때까지 키웠다고 다들 칭찬이 자자했다. 온통 몰랐던 얘기였다. 남들은 이미 알고 있던 그의 과거가 제이크에게만 새로운 소식이었다. 제이크는 관이 놓인 장소로 향하는 동안 시선을 느꼈다. 동창회에서 봤던 녀석들이 자신을 보고 숙덕이고 있었다. 제 정체를 아는 다른 사람들도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앙숙처럼 싸우더니 그래도 명복은 빌어주러 온 모양이라고 떠들어댔다. 무시하고 앞만 보며 걸었다. 관은 복도의 제일 끝에 놓여 있었다. 기구하게 살다가 사고로 죽어버린 청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리가 그나마 적게 들리는 곳이었다. 관이 놓여있는 중앙으로 발을 내딛을 때 모서리의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초췌한 얼굴이 고개를 숙였다. 반짝이는 다이아 반지가 끼워진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브래들리.”

 
 

 그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손 틈새로 새어나왔다. 제이크는 관 속에 누운 브래들리의 얼굴보다 먼저 그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다. 약혼자가 있었나. 이번에도 제이크 혼자만 몰랐을 사실이었다. 제이크는 손에서부터 시선을 올려 천천히 브래들리의 얼굴을 마주했다. , 너는 이렇게 자랐구나. 학창시절 차사고로 입었던 흉터가 아직도 뚜렷하게 뺨에 남아있었다. 제이크가 알던 브래들리였다. 젖살이 빠지며 골격은 더 다부져지고 키도 훨씬 자랐지만 그 브래들리 브래드쇼가 맞았다. 콧수염까지 길렀을 줄은 몰랐는데성장 과도기를 훌쩍 건너뛰어 마주한 브래들리는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제이크는 눈을 감고 있는 브래들리를 보아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한 편의 쇼가 방영되는 듯 했다. 멀리 떨어진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제이크는 비치된 꽃다발에서 장미를 하나 꺼내 브래들리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꽃을 놓으며 그의 손과 자신의 손이 스쳤다.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았다. 제이크는 그제야 다시는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마주할 기회가 없음을 깨달았다. 굳은 얼굴로 뒤돌아 나왔다. 아직 추모가 한창이었지만 더는 그 장소에서 머물 수가 없었다. 제이크는 바삐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의 하늘은 매우 맑았다. 성당의 십자가 너머로 새들이 날아갔다.

 
 

아무 말도 못했어.”

 
 

 집에 도착한 제이크는 가지고 있던 술 중 가장 독한 녀석을 집어 들었다. 원액으로 한 잔 들이키자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지지며 위장까지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이번 새해에 이상한 변덕을 부려 본가에서 챙겨왔던 중학교 앨범을 서재에서 꺼내왔다. 테이블에 올려 브래들리의 사진이 보이는 페이지를 펼쳤다. 실물을 보고 왔음에도 제이크에게는 아직 어린 브래들리의 얼굴이 익숙했다. 통통한 젖살이 남아있고 콧수염이 없는 브래들리. 나를 보는 갈색 눈동자. 살아있던 너. 제이크는 연거푸 술잔을 들었다. 온몸이 후끈해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렇게라도 마시지 않으면 맨정신의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가늠되지 않았다. 차라리 술이라도 취해 손가락질 받을 만행을 저지르는 게 나았다. 적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던가 알코올에게 책임전가를 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취기가 한껏 돌고 나서야 제이크는 아직도 장례식장에 자리를 지키고 있을 그의 삼촌과 약혼자가 생각났다. 오늘날까지 브래들리와 함께 한 그들이 겪는 슬픔이 클 텐데 위로 한마디 해주지 못하고 나왔다. 브래들리는 가족사를 얘기하는 법이 잘 없었다. 같이 몰려다니는 친구들조차도 그의 집에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제이크가 언뜻 들은 내용은 아버지는 군인이라 자주 못 보고 어머니는 몸이 연약해 집에만 계신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적나라한 속사정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잠시나마 입을 놀리던 사람들을 추하다 생각했던 자신이 역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그들은 현재의 브래들리를 떠올리며 애도했다. 자신이 20년의 세월의 취해 있는 동안 브래들리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 하나 없었다.

 
 

내가 가진 건 가짜야.”

 
 

 그를 사랑했다고 여겨서는 안됐다. 브래들리의 단편만 가지고서 이루어지지 못한 외사랑을 곱씹으며 즐긴 자신이 얼마나 추한가. 제이크는 감출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경멸과 분노를 술과 함께 삼켰다. 후회와 슬픔, 자기혐오가 뒤섞여 제이크의 속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술병은 빠르게 비워졌다. 다른 병을 가져와 더 마셨다. 내일이면 땅에 묻혀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브래들리가 자꾸 떠올라서 그를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애석하게도 그럴수록 브래들리는 더 또렷해져만 갔다. 그에게 바친 장미보다 붉었던 뺨이 떠올랐다. 자신을 바라볼 때 찌푸려지던 표정이 기억났다. 지우려고 할수록 브래들리가 생생해졌다. 병을 뒤집어 털어도 더 이상 나오는 술이 없었다. 제이크는 더 많은 술을 가져오기 위해 일어났다. 술을 머금은 몸이 축축 처지며 내딛는 발마다 휘청거렸다. 제이크는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식탁 곁을 지날 때 삐져나온 의자 하나가 있었다. 몸을 지탱하려 의자 머리를 붙잡은 순간 발이 꼬이며 무거운 몸이 쓰러졌다.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지고 골이 울렸다. 대리석 식탁 모서리에 머리를 박아 이마가 찢어졌다. 뜨끈한 피가 얼굴을 줄줄 타고 흘렀다. 하하. 실소가 터져 나왔다. 개 같은 하루였다. 바닥에 쓰러진 몸을 일으킬 시도조차 하지 않고 제이크는 웃었다.

 
 

미안해, 브래들리.”

 
 

 너를 좋아했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어. 네 옆에 함께 했다면 그날의 너를 살릴 수 있었을까.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놓치지 않을 텐데.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염치없음을 알지만 꿈에라도 브래들리가 나와 주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브래들리. 브래들리.”

 
 

 제이크는 그의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끊어졌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낄 때에도 중얼거렸다. 누군가 물었다. 브래들리가 누구야? 제이크가 답했다. 브래들리 브래드쇼. 이번에는 더욱 또렷한 목소리가 물었다. 브래들리가 누구라고? 제이크는 신경질이 나 손을 휘저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날 좀 내버려 둬. 술이나 더 달라고. 갑자기 귀청 떨어지는 고함이 제이크의 정신을 깨웠다. 더불어 거친 손길이 그의 몸을 흔들었다.

 
 

제이크 세러신! 너 술 마셨니?”

 
 

 몸이 먼저 반응하며 벌떡 일어났다. 제이크가 놀라 고개를 들자 잔뜩 뿔이 난 어머니가 옆에 서 있었다.

 
 

대답해, 세러신. 너 엄마 몰래 술 마셨어?”

, 어머니. 언제 이렇게 젊어지셨어요?”

제이크, 혼나기 싫어서 말 돌리는 거니? 아무리 아부해도 미성년 음주는 안 돼. 게다가 어머니라니? 네가 언제 존칭을 썼다고?”

 
 

 제이크는 어리둥절하며 주위를 살폈다. 자신이 언제 본가로 돌아왔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잠깐만. 본가? 제이크는 손에 잡히는 이불의 감촉이 매우 빳빳하다는 걸 느꼈다. 마치 중학교를 올라간 기념으로 침구를 새로 사주었을 때처럼. 그래. 눈 앞의 어머니의 얼굴도 그 때쯤과 같이 젊었다. 제이크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동자를 굴리며 경직되어 있는 동안 술냄새가 나지는 않는지 그의 어머니가 곁에서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는 안 나는데. 제이크, 솔직하게 말하렴. 너 정말 엄마 몰래 술 마셨니? 그래서 늦잠을 잔거야?”

아니요.”

 
 

 제이크는 우선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일련의 상황들로 인해 추측되는 바가 있었다. 꿈이구나. 브래들리가 나오길 바랐지만 그렇다고 중학교 시절까지 돌아가는 꿈일 필요는 없었는데. 하지만 적어도 학교에 간다면 브래들리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퍼뜩 미치자 제이크는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튀어 올랐다. 아들의 돌발행동에 깜짝 놀란 어머니가 뒷걸음질 했다.

 
 

제이크! 어디 가니!”

학교요!”

 
 

 제이크는 재빠르게 계단을 타고 내려가 현관문 앞에 걸린 거울을 마주했다. 중학생 제이크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진짜 꿈이구나. 그 다음에는 신발장 위에 놓인 접시에서 차키를 집어 들었다. 아버지가 몰고 다니던 트럭의 키였다. 이 맘 때쯤에는 아직 면허를 따지 않았지만 꿈에서까지 면허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제이크는 열심히 악셀을 밟았다. 무사고 경력이 무색하지 않게 정문에 도착할 때까지 어떠한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보통 꿈에서 차를 타면 추격전이 벌어질 법도 한데 그런 종류의 꿈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트럭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는지 학생들은 차에서 내리는 제이크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제 먼허를 땄대? 웅성거리는 학생들을 뒤로 하고 제이크는 익숙한 뒷통수를 향해 달려갔다.

 
 

브래들리!”

 
 

 제이크의 목소리에 뒤돌아보는 눈과 마주쳤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이크는 그에게 달려가 와락 껴안았다.

 
 

브래들리.”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얼굴을 묻은 어깨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그러나 곧 거세게 밀쳐졌다.

 
 

뭐야, ? 미쳤어? 내 이름은 갑자기 왜 불러?”

보고 싶었어, 브래들리.”

행맨, 너 뭐 잘못 먹었어?”

 
 

 오랜만에 듣는 별명이었다. 제이크는 종종 이름 대신 행맨 게임 교내 챔피언을 먹고 얻은 별명으로 불렸다. 사이가 좋지 않은 브래들리는 더욱 그의 별명을 애용했다. 브래들리는 갑자기 자신에게 포옹을 시도한 제이크에게 화를 냈다. 두 사람이 접촉할 때는 싸움이 벌어질 때 밖에 없었다. 신종 시비냐고 물으려던 브래들리가 곧 말을 더듬었다.

 
 

, 너 울어?”

 
 

 브래들리의 지적에 비로소 제이크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알았다. 손등으로 쓱 눈물 줄기를 닦아낸 제이크가 괜찮다고 말했다. 어느새 모여든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브래들리가 글쎄 제이크를 울렸대. 쟤네는 하루라도 안 싸우면 입에 가시가 돋나? 그렇게 싸워도 우는 건 못 봤는데 아침부터 얼마나 심한 말을 한 거야? 온갖 억측에 휩싸인 브래들리가 억울함에 잔뜩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그런 거 아니야! 얘가 혼자 질질 짰다고!”

. 내가 그랬어.”

 
 

 순순하게 인정하는 제이크 때문에 의혹은 오히려 가중되었다. 기쁨에 그치지 않는 눈물을 찍어내던 제이크가 야, 너도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재촉하는 브래들리의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이 꿈이 깨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제이크는 성큼 브래들리에게 다가갔다. 그의 양 팔을 붙잡고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잘 들어, 브래들리. 앞으로 20년 후 가을 중순에 절대 워싱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

?”

가능하면 집에만 있어. 아니, 집 밖으로는 나가지도 마.”

너 어디서 꿈이라도 꿨냐? 아침부터 개소리를.”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고!”

 
 

 제이크의 외침에 브래들리의 안색이 변했다. 브래들리는 거칠게 손을 떼어 내고 제이크가 닿았던 자리를 툭툭 털어냈다.

 
 

나한테 아침부터 악담하려고 학교에 다니냐? 헛소리 좀 작작해.”

 
 

 브래들리는 자신의 친구들을 이끌고 자리를 떴다. 제이크는 자신의 경고를 믿어주지 않는 브래들리가 안타까웠다. 진짜야! 정말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브래들리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을 지켜보던 학생들도 하나둘 걸음을 옮겼다. 운동장에 혼자 남은 제이크는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자각했다. 중학교 시절 제이크와 브래들리는 둘도 없는 원수였다. 제이크가 하는 말에 브래들리가 신빙성을 가질 이유는 하등 없었다. 하다못해 시험 기간 범위도 아니고 20년 후의 생사에 대한 말은 가족이 한다 해도 믿기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정말로 20년 후의 너는.”

 
 

 툭. 모래 바닥에 방울이 떨어졌다. 제이크가 다시 눈가를 닦았지만 눈물은 이미 그친 후였다. 투둑. 고개를 숙이자 빨간 방울들이 모래 위로 튄 자국이 보였다. 속이 울렁거리며 몸이 휘청거렸다. 제이크는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 모래 바닥에 누워 본 파란 하늘은 쨍한 햇볕으로 눈을 따갑게 괴롭혔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뒤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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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루프? 클리셰 맛잇지~~~~

2023.02.06 02:3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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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친 대작의 시작에서 센세를 뵙습니다
[Code: bed5]
2023.02.06 02: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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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면 없던 숙취가 꼭 생겼다. 종일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탔다.
길을 걷다가, 하늘을 보다가, 아침에 불쑥, 저녁에 가끔, 네가 내게로 오는 순간이 있었다.

그렇게까지 절절한 건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존나 절절해보이는데ㅠㅠㅠㅠ아이고 바보야...20년동안 어린 브래들리의 허상만을 좇고 있었고 그동안 브래들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몰라서 그 괴리때문에 자괴감가지고 괴로워하는것마저 ㄹㅇ사랑인디....ㅠㅠㅠㅠㅠㅠ...
[Code: bed5]
2023.02.06 02:5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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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싸워댔으면 장례식장에 찾아간걸로 쑥덕대냐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하이고ㅠㅠㅠㅠㅠ루스터 결혼했었나 어쩌다 왜 죽은 거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행맨 슬픔이 너무 절절하다...이번에는 같은 실수 반복하면 안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하 센세 개재밌어요 배틀호모(였던) 청게최고에ㅠㅠㅠㅠ브래들리가 제이크 반응때문에 당황하는거 너무 맛있다....
[Code: bed5]
2023.02.06 02: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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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다 나 어나더만을 기다릴게요 센세
[Code: cdfb]
2023.02.06 04:1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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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붕키가 타임루프에 환장하는 거 어떻게 알고ㅜㅜㅜㅜㅜㅜ센세의 어나더만을 기다리겠어ㅠㅠㅠㅠㅠㅠ
[Code: 5e6d]
2023.02.06 06:4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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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타임루프 존잼ㅠㅠㅠ브래들리도 살리고ㅠ짝사랑 이뤄져보자고
[Code: 1afc]
2023.02.06 09:3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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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뒤에 1이라는 숫자가 이렇게 가슴 설렐 줄이야... 대작의 시작에서 찰칵📸📸📸📸📸📸📸📸📸 제이크가 브래들리 회상하는 순간이 너무 마음 아리고 쓸쓸해서 ㅈㄴ 슬퍼ㅜㅜ 이렇게 절절한데 어떻게 사랑이 아니야? 꼭 브래들리 살리는 것도 성공하고 첫사랑도 성공했으면 좋겠다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Code: 2b93]
2023.02.06 10:2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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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하늘을 보다가, 아침에 불쑥, 저녁에 가끔, 네가 내게로 오는 순간이 있었다. ㅠㅠㅠㅠㅠㅠㅠㅠ 본인도 모른채 너무 절절하게 그리워하고 있잖아 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a29b]
2023.02.0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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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쳤다 이거 진심 대작...센세 나 마지막까지 존버야ㅠㅠㅠㅠㅠㅠㅠ
[Code: c022]
2023.02.0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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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와 대작의 시작이라니 너무 기대돼요 센세!!!!!!
[Code: 0cba]
2023.02.07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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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이다
[Code: 1793]
2023.02.09 23:0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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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영화 본것 같아 너무너무 재밌다 행맨 타임루프 부작용으로 쓰러진건가? 모두가 앙숙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짝사랑한 상대라니 맛있다 정말
졸업 후 본적도 없는 그 첫사랑을 살리기 위해 어떻게 고군분투할까 넘나 기대돼
[Code: 459b]
2023.04.0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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념념굿
[Code: 915e]
2023.04.10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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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존나 대작의시작....... 와
[Code: 747f]
2023.04.17 12:0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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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흥미진진해
[Code: f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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