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애니
- 애니
view 1839
2025.09.28 19:16
퇴고 안함 맞춤법 띄어쓰기 엉망임...ㅎㅎ
(⬆️ 이 두 곡을 제일 많이 들어서 첨부함)
1 : https://hygall.com/641356621


"안녕하세요."
"어?"
"여기 사시는구나."
"네. 근데 왜 거기... 올라가 계세요?"
"또또 할머니... 그러니까... 여기 사시는 할머니께서 티비가 잘 안 나온다고 해서요."
"티비도 고쳐요?"
"전문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요. 대충."
호열은 대만을 쳐다보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저 사람 여기 사는구나. 그나마 이 동네에 있는 빌라 중 제일 최신식이다. 저쪽에 있는 아파트에 살 줄 알았는데. 호열은 목을 가다듬더니 크게 소리쳤다.
"티비 틀어봐요! 잘 나와?"
대만은 창문으로 호열을 지켜봤다. 호열이 티셔츠를 연신 펄럭인다. 작업복인지 꽤나 지저분한 바지에 머리에 두른 수건, 검은색 민소매 티셔츠엔 페인트 같은 게 묻어있었다. 사장님은 잘 안 타는 편인가. 대만은 핑크빛으로 물든 호열의 어깨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호열이 밑을 보곤 활짝 웃더니 손가락을 동그랗게 구부렸다. 지붕 위에 널부러진 공구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사다리를 타고 슉, 대만은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흰 수건을 계속 쫓았다. 자신도 모르게 슬리퍼에 발을 끼워넣은 뒤 집을 나선 대만은 호열이 있는 옆집 대문에 도착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검은색 철문 사이로 보이는 호열이 어슬렁거리는 대만을 발견하곤 씩 웃었다.
"들어올래요?"
"네?"
"할머니 이 사람이랑 인사했어요? 최근에 이사 온 옆집 남자! 체육선생이래."
대만은 자신의 키 보다 낮은 대문에 고개를 숙였다. 허연 털뭉치가 발발거리며 대만의 발목을 핥아대자 대만이 작은 강아지를 들어올렸다. 북슬북슬한 생명체를 습관처럼 쓰다듬자 할머니가 싱긋 웃더니 호열에게 눈짓을 한 후 대만을 쳐다봤다. 불쑥 내밀어진 주름진 손에 대만이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정대만입니다. 청화초 체육교사예요."
"반갑다고 하시는데? 음? 잠깐 기다리래요. 매실차 타오신다네. 나는 조금만!"
대만이 목덜미를 살짝 만졌다. 호열은 그런 대만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후 입을 열었다.
"말을 못 하세요. 그리고 부끄럼도 많으시고."
대만은 말 없이 마당을 둘러봤다. 작지만 깔끔한 마당 한 켠에 놓인 작은 강아지 밥그릇과 물그릇. 호열이 그런 대만에게 슬쩍 말을 흘렸다.
"강아지 이름이 또또예요. 할머니 친구. 그래서 다들 또또 할머니라고 불러요."
"또또 안녕."
털뭉치, 그러니까 또또가 대만을 빤히 봤다. 촉촉한 코가 킁킁거리며 움직였다. 대만이 귀 뒤를 긁어주자 만족스러운지 고개에 힘을 뺀 또또가 혀를 낼름거렸다.
"강아지 되게 잘 안으시네요."
"예전에 키웠었거든요. 허스키."
"허스키 되게 크지 않아요?"
"어릴 때 키웠어서 진짜 크게 느껴졌어요. 가슴에 올라오면 숨을 못 쉴 정도로."
대만은 어린 시절 키운 허스키 별이를 떠올렸다. 북슬북슬하고 커다란, 꼭 자기 침대 위로 올라와 잠을 자던 그 강아지를. 13년을 살고 간 착한 아이.
대만이 어렸을 때, 옆집에 살던 남자는 이상한 남자였다. 집에 오는 사람들이 매일 바뀌었고 성별도 나이도 다 달랐다. 어느 날, 그 남자는 아주 작은 강아지를 데려오더니 며칠 살지도 않고 야반도주를 했다. 강아지만 덜렁 남기고. 남자가 떠나고 며칠 뒤, 남자건 여자건 할 것 없이 여러 명이 남자의 집을 찾아왔고 주인이 없는 집을 샅샅이 뒤졌다. 안에 있던 강아지를 짐짝 취급하며 마당으로 내던진 후에도 한참이나 큰 소리가 났다. 대만은 어른들의 볼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어린 대만이 알아듣기엔 힘든 내용들이 오고 간 후 어른들은 대문을 열어둔 후 떠났고 대만은 어른들이 사라지자마자 강아지를 찾으러 들어갔다. 마당은 방치한지 오래라 풀이 무성했고 그 사이에서 작은 강아지가 오들오들 떨고있었다. 강아지가 몸을 떨자 풀도 같이 움직였다. 대만은 작은 강아지를 들어올렸다. 갈비뼈가 훤히 보이는 강아지를 품에 안은 대만은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옆집인데도 한참 멀게만 느껴져 발을 빨리 했다.
강아지야, 강아지야 부르며 물그릇과 소세지를 들고 온 대만은 옆집 남자가 부르던 강아지 이름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애초에 마주친 적이 별로 없어 이름이 기억나진 않았다. 이름이 있긴 했을까. 어린 대만은 힘이 없는지 축 늘어진 강아지를 한참 보다 별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새 이름을 지어주면 강아지도 지난 일들을 잊을까 싶어서였다. 집에 돌아온 부모님께 조르고 졸라 주인이 오기 전까지만 키우자는 허락을 받아낸 대만은 별이를 꼭 껴안았다. 그 남자는 다시는 오지 않았다. 대신 옆집엔 젊은 부부가 들어왔다. 그렇게 별이도 쭉 대만과 살았다.
걔도 너처럼 작았었는데. 대만은 이미 오래 전 이별을 한 별이를 쓰다듬었을 때처럼 손을 움직였다. 또또도 대만의 손길이 괜찮았는지 이쪽을 만져달라며 몸을 반대로 했다.
할머니가 쟁반을 들고 오자 또또가 대만의 품을 벗어났다. 자기 물그릇으로 간 또또의 뒷모습을 보던 대만이 쟁반으로 시선을 돌렸다. 매실차 두 잔과 정갈하게 잘린 청사과. 호열과 대만은 사과를 보자마자 웃기 시작했다. 이유모를 웃음소리를 들은 또또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멍! 하고 큰 소리를 냈다.
#
호열은 드리퍼에서 떨어지는 커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형네 마트로 출근하지 않는 날은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데. 호열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이른 아침인데도 햇빛이 따가웠다. 호열이 신문을 펼치자 띠링-, 핸드폰이 반짝였다.
[가지 좋아하세요? -선생님]
[사실... 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윤호네 어머님이 주셔서... -선생님]
호열은 핸드폰 문자를 보고 소리내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그것도 아침부터. 아마 냉장고를 열었다가 가지를 본 김에 문자를 한 게 분명하다. 지금 내 냉장고 속에 들은 가지들을 보면 슬퍼하겠는데. 호열이 큭큭 웃으며 키패드를 눌렀다.
[어쩌죠. 저도 윤호 어머님께 받았어요. -사장님]
어떤 표정일지 뻔했다. 아마도 비 맞은 강아지마냥 눈썹이 축 처졌을 거다. 대만을 알고 지낸 건 얼마 안됐지만 표정이 다양하다는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아차렸다. 호열은 재빠르게 다음 문자를 보냈다.
[근데 전 가지 좋아해서요. 저녁에 가지러 갈게요.-사장님]
[네!!! -선생님]
호열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며 크게 웃었다. 알면 알수록 재밌는 사람이다.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가지는 뭐... 어떻게든 전부 먹을 수 있겠지. 호열은 커피를 마시며 머릿속으로 가지요리를 떠올렸다. 안되면 갈아서 주스로라도 만들어야지... 가지주스는 처음인데... 호열이 옅게 웃었다.
[그럼 저녁에 봬요. 출근 잘 하시구요. -사장님]
대만은 펄쩍 뛰었다가 전등에 부딪힌 머리를 꾹꾹 눌렀다. 냉장고에 들은 8개의 가지와 드디어 이별을 할 수 있다니. 주신 성의를 생각해 꾸역꾸역 2개는 먹었는데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애초에 혼자 사는데 10개나 주셨으니 좋아했어도 다 못 먹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대만은 핸드폰 화면에 뜬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곤 괜히 양호열이란 이름을 속삭여봤다. 입에서 한 번 굴려본 이름 석 자에 대만의 입끝이 붉어졌다.
#
또또할머니 댁에서 간식을 얻어먹은 날, 호열은 대만에게 뒤에 일정 없음 또또랑 같이 산책할래요? 하고 물었고 대만은 호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강아지 산책이라니. 대만의 얼굴이 삽시간에 밝아지자 낮게 웃은 호열이 그럼... 15분 뒤에 데리러 갈게요. 또또랑. 참 바지는 긴 걸로 갈아입으시는 게 좋아요. 요즘 모기 독하거든요. 하고 대만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그럼 집에 가 계세요. 대만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올라온 대만은 손을 씻고 양말을 신은 뒤 호열의 말대로 바지도 갈아입은 뒤 멍하게 시계를 쳐다봤다. 사실 오늘은 가구 배치도 바꾸고 시내에 가서 필요한 물건도 사 올 예정이었다. 근데 왜 저 남자가 말을 하면 다 끄덕이게 될까. 대만은 다리 한쪽을 달달 떨었다. 대만은 이건 전부 또또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니까, 또또는 귀엽고... 강아지 산책도... 오랜만이고... 대만은 고갤 끄덕였다.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속으로 이리저리 변명을 늘어놨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다니. 간만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행위는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대만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거울을 한 번 더 보기도 하고 옷에 구겨진 곳은 없는지 세 번은 확인했다.
똑똑똑.
왔다.
대만이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또또야 제발 이리 와."
또또는 생각보다 고집이 센 강아지였다. 갑자기 주저앉아 안가겠다 버티기도 하고 물웅덩이에 들어가려는 걸 세 번이나 말렸으며 물 좀 마시라고 줘도 흥흥거리기만 했다. 지금은 풀숲에 들어가 온몸을 부비며 대만을 흘끗 흘끗 쳐다봤다. 대만은 리드줄을 꼭 잡은 채 애원하다싶이 또또에게 말을 했다. 가지 말라는 곳으로만 가고 하지말라는 것만 하고. 별이는 안 그랬는데. 대만이 뒷머리를 꾹꾹 눌렀다.
"말 진짜 안 듣죠? 저도 처음 산책시킬 때 말을 너무 안 들어서 주저앉은 적도 있어요."
"이렇게 말 안 듣는 강아지는 처음이에요."
"이제 슬슬 가야하니까 제가 할게요."
호열은 대만의 손에 걸려있는 리드줄을 가져갔다. 줄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줄이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또또 이리 와."
호열이 목소리를 낮게 내자 또또가 금세 풀숲에서 나왔다. 머리에 달린 나뭇잎을 떼주던 대만이 너 진짜 너무한다. 어떻게 이 사람 말은 바로 알아들어. 라며 입술을 삐죽이자 호열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야 저랑은 4년째 아는 사이니까요. 그치 또또? 멍! 또또가 대답을 하자 대만이 졌다는 듯 고갤 저었다.
"근데 원래 또또 산책도 시켜주세요?"
"가끔요. 문자가 와요. 오늘 애기 산책해 줄 수 있냐고요. 그럼 산책 시켜주고 저는 밥 얻어먹고."
호열이 말을 이었다.
"비 올 거 같은데 이제 갈까요?"
"그러네요. 얼른 가야겠다. 쏟아질 거 같은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또또는 여러 번 주저앉아 결국엔 호열이 안고 돌아갔다. 편안한지 몸을 축 늘어뜨린 또또는 중간 중간 호열의 자세가 틀어질 때마다 호열의 팔을 핥아댔고 대만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심상치 않게 꾸물거리는 구름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또또는 마당에 발이 닿자마자 물그릇으로 향했다. 한참을 챱챱거리던 또또는 만족스럽게 수분을 섭취했는지 곧바로 호열의 다리에 붙어 애교를 떨었다. 간식을 달라는 듯 재촉하는 발짓에 호열이 알겠다며 간식을 꺼냈다. 호열은 대만에게 간식을 쥐어주곤 앉아 손 기다려는 해요 하며 눈썹을 올렸다. 대만은 간식을 손에 들고 천천히 앉아 손 기다려를 순서대로 했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내가 해주는 거라는 느낌으로 거드름을 피우던 또또는 대만이 간식을 주자 대만에게 엉덩이를 붙이고 열심히 턱을 움직였다.
"다음에 또 같이 산책해요. 또또가 선생님을 꽤 마음에 들어하는 거 같거든요."
호열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대만은 자연스레 호열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꾹꾹. 11개의 숫자를 누르고 통화 버튼까지 누른다. 대만은 호열의 숫자 11개를 받고 난 후에 핸드폰을 돌려줬다.
"기다릴게요."
대만이 핸드폰을 흔들며 웃었다. 턱 밑에 난 작은 흉터가 움직였다.
#
대만은 아이들에게 미니게임을 시킨 뒤 반대편 코트에 대충 앉아 일지를 작성했다. 선생이 되고나니 신경 쓸 게 한 두개가 아니었다. 특히나 이렇게 작은 학교면 대만의 할일이 아닌데도 하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대만은 손으론 오늘 한 연습경기를 적었지만 머릿속으론 언제까지 제출을 해야하는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있는 농구부 수업을 어떻게 진행을 해야할지로 가득 찼다.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들은 개인적인 일에도 손을 뻗었고 종국엔 왜 양슈퍼 사장님은 자신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까 까지 닿았다. 진짜 또또 산책할 때만 연락하려고? 그냥 해도 되는데. 보통은 그냥도 하지 않나? 바쁘다더니 구라 아냐? 대만의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생님! 선생님!"
"어?"
"게임 끝났어요. 서준이네 팀이 이겼어요."
"아 그랬어? 미안. 잠깐 일 때문에 생각할 게 있어서. 오늘... 짝수날이니까 짝수번째가 농구공 정리하고 홀수번째가 먼저 씻어."
대만은 아이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무데나 널부러진 농구공 하나를 주워 3점 라인에서 던졌다. 림을 통과한 농구공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퉁퉁 튕겨졌다.
대만은 방과 후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날이 더워지니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말을 아무리 잘 들어도 애들은 애들이라. 대만의 머릿속이 점점 캔맥주로 가득 찼다. 그러고보니 장을 본지 좀 됐는데 뭐가 있긴 한가. 대만은 낯설게만 느껴지는 크림색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런..."
우리 집 냉장고인데도 낯선 이유가 있었다. 냉장고 안에 들은 건 회를 사면 같이 오는 미니간장 뿐. 물도 맥주도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당장 마실 수 있는 액체가 수돗물이라니. 집 오지말고 장부터 볼 걸. 대만이 삐딱하게 서서 냉장고를 노려봤다.
대만은 오히려 이걸 기회로 삼자 마음을 먹었다. 슈퍼에 가면 사장님도 있을 거고 항상 말을 거는 사장이니 대화도 나눌 수 있지 않나? 대만이 차키를 챙겼다. 걷기엔 너무 더웠다.
평소와 다르더니만. 대만은 슈퍼 문에 붙어있는 종이를 보고 혀를 찼다.
[개인 사정으로 쉽니다.]
대만이 다시 차 안으로 몸을 구겨넣었다. 선글라스 밑에 숨겨진 올리브색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대만은 마트 입구부터 느껴지는 에어컨 바람에 몸을 살짝 떨었다. 은행 보다 더 시원한 거 같아. 카트를 느릿느릿 끌며 생수 묶음을 담은 대만이 매대를 쳐다보며 어슬렁거렸다. 이리저리 재고 또 쳐다보고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결국은 또 비슷하게 담게 됐지만. 생수, 단백질이 될 만한 육류나 해산물, 과일 몇 종류. 그리고 이온음료. 대만이 포카리 스웨트로 손을 뻗자 익숙한 목소리가 대만의 귀를 통과했다.
"또 포카리?"
아,
사장님이다.
"여기가 더 비싼데. 슈퍼에서 사시지."
소근거리느라 공기가 많이 섞인 목소리에 대만이 홀린 듯 포카리를 내려놨다. 장난스레 웃는 얼굴에 대만은 자기도 모르게 투정섞인 말을 뱉었다.
"아까 갔는데"
"네에."
"아무도 없길래요."
"아... 여기 일손이 부족하대서... 그냥 안에 들어가서 물건 고른 다음에 돈 놓고 나오면 되는데... 미리 말을 해줄 걸 그랬네요."
호열이 미안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머쓱한지 머리에 뒤집어 쓴 수건을 만지작거린다. 수건 매듭 부분을 만질 때마다 불룩하게 튀어나오는 근육에 대만이 티 안나게 고개를 돌렸다. 날이 더워져서 그런가 오늘도 반소매 티셔츠의 팔 부분을 둘둘 말아올리셨네. 운동 뭐 하는지 물어볼까... 대만은 호열의 팔뚝으로 가는 시선을 꼭 붙들었다. 아니 붙들고 싶었다.
"그렇게 쳐다보시면 곤란한데요..."
호열이 붉어진 얼굴로 소매를 내렸다. 잔뜩 구겨진 티셔츠 소매가 팔뚝을 완전히 가리자 느릿하게 시선을 옮긴 대만이 필사적으로 고갤 저었다.
"아아!!! 그게 아니라 일단 죄송해요!! 진짜로!!"
터질듯한 얼굴로,
그러니까저번에봤을때도느꼈는데요 몸이되게탄탄해보여서요 운동뭐하시나하고... 절대다른뜻은없어요진짜예요믿어주세요 정말진심으로무슨운동하시나궁금했어요! 그것뿐이에요!
저런 말을 하는 게 꽤 귀엽다. 우물거리는 윗입술이 몇 번 더 움찔움찔 움직이는 걸 본 호열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나보다 적어도 15센티미터는 더 큰 거 같은데 하는 행동은 몇만 배나 더 귀엽다. 호열은 대만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뒤늦게 귀가 빨개졌다.
"운동... 안 하는데... 딱히..."
"아하..."
대만은 호열의 말에 그럼 가보겠다며 카트 손잡이를 잡았다. 정말 미안하다는 사과는 덤이다. 호열은 멀찍이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만 봤다. 저녁 안 먹었음 같이 먹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어그러졌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호열은 벗어놨던 목장갑을 다시 꼈다. 창고 정리나 마저 해야겠네. 호열이 숨을 깊게 쉬었다.
#
[오늘 저녁에 만나요. -사장님]
[비 올지도 모르니까 우산 챙기시구요. -사장님]
호열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몇 번이나 어그러진 끝에 잡은 귀한 약속이었다. 호열은 몇 번이나 타이밍이 맞지 않아 깨졌던 약속들을 떠올렸다.
가지를 받으러 대만의 집으로 간 날, 대만은 그동안 도움 받았던 일에 대한 보답으로 밥을 한 번 사겠다는 말을 했다. 호열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가지 먹어주는 게 그렇게 큰일은 아닌데요 하고 말하자 대만은 가지뿐만이 아니라! 하고 웃어댔다. 호열은 자신이 자주 가는 술집 중 가장 깔끔한 곳을 얘기했다. 사실 자기야 아무 곳이나 가면 그만인데. 이 남자는 그런 부류가 아니니. 호열은 대만에게 데리러 갈게요. 선생님 집에서 별로 안 멀거든요. 하며 가지가 든 쇼핑백 손잡이를 매만졌다.
"주말에 갈까요?"
"그럼 토요일에 데리러 올게요."
"네. 그럼 들어가세요."
호열이 쉬세요. 하고 몸을 돌리자 대만은 호열이 아주 작은 점처럼 보일 때까지 빌라로 들어가지 않았다.
토요일 약속은 성사되지 않았다. 또또가 아프다는 할머니 말에 대만과 호열 둘 다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동물병원으로 차를 몰았고 그 후에 다시 잡은 약속도 조카가 아파서, 방과 후 활동 중 아이가 다쳤다는 이유로 밀리고 또 밀렸다. 둘 다 바빠 연락도 안 하는 날이 많았고 지난 주엔 대만의 집 근처 폐건물에 숨어든 10대 청소년들이 버린 담뱃불 때문에 불이 크게 나 약속을 취소하게 됐다. 사이렌 소리때문에 헐레벌떡 뛰어온 호열은 혼자 앉아있는 대만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보니까 저희 빌라까지는 안 왔고..."
대만의 말을 끝으로 둘은 동시에 서로를 마주봤고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이쯤되면 밥 먹지 말라는 신호 같은데요?"
"그러게요. 다음 주에도 안되면 없던 일로 해요."
"하하, 큰일이네. 별일 없게 해달라고 빌어야겠다."
호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확인이 끝났으니 집에 들어가도 좋다는 소방대원의 말이 떨어졌다. 들어가보겠다며 일어선 대만은 호열이 거꾸로 신은 신발을 가리켰다.
"조심히 가세요."
호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렇게 잡은 약속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렇기에 호열은 지난 번, 대만에게서 온 문자 덕에 행복했던 아침을 그대로 따라하기로 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징크스가 있던데 오늘부터 만들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지난 번처럼 똑같이 신문을 읽고 커피를 내렸다. 이쯤 문자가 와야 하는데. 아무래도 실패다. 호열은 눈썹을 한 번 움직인 후 7시쯤 만날 남자에게나 충실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평소보다 더 신경을 쓴 호열은 괜히 이랬나 싶은 후회가 밀려왔다. 오시는 어르신들마다 감나무 집 딸이랑 드디어 만나냐는 질문을 했고 호열은 글쎄요 하고 웃어넘겼다. 집에 들르라는 말엔 내일 가겠다며 미소지었다. 그 집 여자분도 괴롭겠다. 호열은 미용실 사장이 놓고 간 포도즙을 괜히 꾹꾹 눌렀다. 평소에도 시간이 잘 안 간다 생각했는데 오늘은 더 그렇다. 아직도 오후 1시라니. 호열은 괜히 잘 정리된 매대를 한 번 더 정리했고 아까도 파악한 재고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리곤 끄적끄적 화이트보드에 뭔가를 적었다.
<포카리 스웨트는 생각보다 잘 나가니 더 들여놓을 것.>
#
이렇게까지 한다고? 호열은 깜깜해진 가게 안을 보다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정전. 좋다. 호열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카운터 밑 서랍을 뒤적였다. 손전등이 손에 걸렸다. 약속시간까지 20분도 채 안 남았는데. 두꺼비집을 확인하러 가게 문을 열자 호열은, 정말 몸에 힘이 쭉 빠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를 느꼈다. 장난하나? 호열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온 동네가 다 깜깜했다. 정말 안 맞나보다. 호열은 지금 절실하게 점쟁이라도 만나고 싶어졌다. 세상이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는 기분. 호열은 뒷머리를 만지다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도 만나는 건 못 하겠네요. -사장님]
[없던 일로 해야겠어요. -사장님]
호열이 핸드폰 플립을 닫자마자 벨소리가 울렸다. 선생님. 호열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크흠. 담배를 끊어야겠는데.
"여보세요?"
"사장님 저 정대만입니다."
"네."
어차피 저장명이 뜨니 누군지 아는데. 호열은 놀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여기 정전되면 젊은 사람들끼리 순찰 돈다면서요?"
"맞아요. 그래서 저도 이제 나가볼려구요."
"잘됐다. 같이 돌까요?"
"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찾았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전 아직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니 여길 잘 아는 사람과 다니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해서요."
대만의 말에 호열이 아 그렇겠네요 하고 고갤 끄덕였다. 대만은 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오늘 약속을 없던 일로 하고 싶지 않거든요."
호열은 대만의 말에 숨을 참았다 뱉었다. 짧게 이어진 침묵에 대만이 사장님? 하고 되묻자 호열이 셔츠 앞자락을 펄럭였다.
"그...럼 제가 데리러 갈게요. 지금 갈테니까... 20분 정도 후에 나오세요."
"네. 조심히 오세요."
호열은 뚝 끊어진 핸드폰을 쳐다봤다. [선생님] 세 글자가 호열을 놀리듯이 둥둥 떠있었다. 이 남자는 정말 갑작스럽다. 연고도 없는 이 동네에 온 것도, 가끔씩 던지는 시선도, 지금 이런 것들도. 그냥 안되면 안되는 대로 되면 되는 대로 흘러가는 스타일일 줄 알았는데 예측하기가 힘들다. 호열은 손전등을 두어번 껐다 켰다. 오늘이 기회가 아닌 거 같으면 만들면 된다. 언제부터 하늘을 그렇게 믿었다고. 호열이 집 열쇠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온 세상이 자신을 상대로 말리는 것만 같았다. 접고 싶다는 마음이 안 들었던 건 아니다. 자꾸만 틀린 결정이라는 듯 온 힘을 다해 말리려고 드는 세상의 외침이 대만의 마음을 흔들어댔다. 하지만 한 번 시작했음 끝을 봐야하지 않나 하는 이상한 승부욕이 도졌다.
대만의 이런 승부욕은 대만에게 흉도 남겼지만 보상도 톡톡하게 줬다. 체대입시를 준비할 때, 대만은 자신을 깔보던 재수생 형을 이기기 위해 기를 쓰고 훈련하다 앞니가 박살났지만 그해 대만만 대학합격증을 받았다. 또, 넌 죽어도 선생은 못된다는 전애인의 말에 죽어라 공부해서 선생이 됐다. 이번에도 그렇다. 그런 촌구석으로 왜 가냐는 지인들 말 속에는 걱정이 아닌 무시가 섞여있었고 대만은 적어도 5년 동안은 도시로 가지 않겠다는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도 안다. 안 맞으면 다시 올라가면 그만이고 몇 번 싫은 소리 들으면 끝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보상에 가까운 남자를 만나게 되는 일이 생기니 대만의 마음이 점점 기울었다.
대만은 확신을 갖고 싶었다.
대만은 호열과의 통화가 끝난 후 곧바로 집을 나섰다. 캄캄해진 집에 있어봤자 가만히 기다리는 거 밖에 할 게 없었다. 가로등도, 집안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도 하나 없으니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대만은 자신의 차 보닛 위에 살짝 걸터앉아 호열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손전등을 딸깍거리자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양호열이다. 손전등에 달린 끈을 만지작거리던 대만이 보닛에서 일어났다.
"왜 나와계세요?"
호열이 왼손에 들린 포카리를 내밀었다. 덥죠? 호열이 대만에게 웃어보였다.
"...방금 나왔어요."
"거짓말 같은데?"
"...진짜로요."
"그럼 저쪽으로 갈까요? 이쪽은 제가 오면서 확인했거든요."
호열의 주도하에 둘은 20분쯤 걸으며 집 4곳을 살폈다. 오로지 그 일만 하라고 입력이 된 기계처럼 대문을 두드리고 괜찮냐고 묻고 다시 집을 나선다. 사실 대만은 하는 일이 없었다. 이미 안면을 튼지 오래인 호열이 대화를 주도하고 대만은 그저 꾸벅 인사만 했을 뿐. 대만은 호열의 뒤에 서서 움직임을 좇았다. 어르신 농담에 웃느라 불룩해지는 광대도, 중간중간 움직이는 눈썹도, 쉼없이 움직이는 입술도, 어르신들 앞에선 좀 더 높아지는 목소리도. 대만은 괜히 초조한 마음이 들어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마지막 집을 나서며 이제 끝났어요 하고 웃는 호열이 대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주택가에서 좀 떨어진 언덕배기에 있는 집이라 고요했다. 호열은 대만에게 잘 보고 걸어야 한다며 자신의 손전등으로 땅을 비춰줬다.
"아 참."
호열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손전등을 내려버린다. 여기서 별 잘 보이거든요. 하늘을 향해 팔을 쭉 뻗은 호열이 밝게 빛나는 별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대만도 손전등을 내렸다.
"저기 보여요?"
대만은 하늘 대신 호열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네 보여요. 하고 거짓말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딜리 눈이 간다. 밍숭맹숭한 두부 같은 얼굴이. 그러니까 이건 내 잘못은 아니다. 달도 이 남자도 자길 부추기고 있다.
"제일 위에 있는 게 데네브예요."
대만은 결심했다. 역시 우물쭈물거리는 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른쪽에 있는 게 베가고."
심장이 지금이라며 말을 걸었다. 바지 옆 솔기를 매만지던 대만의 상체가 살짝 내려갔다.
"맨 밑에 있는 게 알타이... 르..."
대만이 슬쩍 호열의 볼에 입술을 부딪혔다. 촉- 소리가 나며 떨어진 입술에 호열이 눈을 크게 뜨자 대만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도 못 봤을 걸요. 이렇게 캄캄한데 누가 봤겠어요."
쪽 소리가 나게 떨어진 입술 위로 긴장감이 걸린다.
"달이 이렇게나 밝은데... 생각보다 응큼한 면이 있으시네."
호열이 피식 웃었다. 분명 빨개졌을 귀를 슬쩍 만지자 대만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달님도 눈 감아주시겠죠. 지금 좋은 거 구경시켜줬는데."
"와... 진짜 아저씨 같다. 선생님 저랑 몇 살 차이 안 나지 않아요?"
호열이 웃자 대만이 입술을 뾰족하게 만든 채 꿍얼거리기 시작했다. 툭 튀어나온 입술에 호열이 손전등을 완전히 꺼버렸다. 뒤이어 대만의 손에 들린 손전등도 불이 꺼졌다.
하금리 주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금일 정전이 해제되었으니...
끝!
너무나도 뒤죽박죽이라 올리기도 민망하지만 끝은 봐야지 싶어서 올림 봐줘서 고맙다!
슬램덩크 호열대만
(⬆️ 이 두 곡을 제일 많이 들어서 첨부함)
1 : https://hygall.com/641356621


"안녕하세요."
"어?"
"여기 사시는구나."
"네. 근데 왜 거기... 올라가 계세요?"
"또또 할머니... 그러니까... 여기 사시는 할머니께서 티비가 잘 안 나온다고 해서요."
"티비도 고쳐요?"
"전문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요. 대충."
호열은 대만을 쳐다보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저 사람 여기 사는구나. 그나마 이 동네에 있는 빌라 중 제일 최신식이다. 저쪽에 있는 아파트에 살 줄 알았는데. 호열은 목을 가다듬더니 크게 소리쳤다.
"티비 틀어봐요! 잘 나와?"
대만은 창문으로 호열을 지켜봤다. 호열이 티셔츠를 연신 펄럭인다. 작업복인지 꽤나 지저분한 바지에 머리에 두른 수건, 검은색 민소매 티셔츠엔 페인트 같은 게 묻어있었다. 사장님은 잘 안 타는 편인가. 대만은 핑크빛으로 물든 호열의 어깨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호열이 밑을 보곤 활짝 웃더니 손가락을 동그랗게 구부렸다. 지붕 위에 널부러진 공구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사다리를 타고 슉, 대만은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흰 수건을 계속 쫓았다. 자신도 모르게 슬리퍼에 발을 끼워넣은 뒤 집을 나선 대만은 호열이 있는 옆집 대문에 도착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검은색 철문 사이로 보이는 호열이 어슬렁거리는 대만을 발견하곤 씩 웃었다.
"들어올래요?"
"네?"
"할머니 이 사람이랑 인사했어요? 최근에 이사 온 옆집 남자! 체육선생이래."
대만은 자신의 키 보다 낮은 대문에 고개를 숙였다. 허연 털뭉치가 발발거리며 대만의 발목을 핥아대자 대만이 작은 강아지를 들어올렸다. 북슬북슬한 생명체를 습관처럼 쓰다듬자 할머니가 싱긋 웃더니 호열에게 눈짓을 한 후 대만을 쳐다봤다. 불쑥 내밀어진 주름진 손에 대만이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정대만입니다. 청화초 체육교사예요."
"반갑다고 하시는데? 음? 잠깐 기다리래요. 매실차 타오신다네. 나는 조금만!"
대만이 목덜미를 살짝 만졌다. 호열은 그런 대만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후 입을 열었다.
"말을 못 하세요. 그리고 부끄럼도 많으시고."
대만은 말 없이 마당을 둘러봤다. 작지만 깔끔한 마당 한 켠에 놓인 작은 강아지 밥그릇과 물그릇. 호열이 그런 대만에게 슬쩍 말을 흘렸다.
"강아지 이름이 또또예요. 할머니 친구. 그래서 다들 또또 할머니라고 불러요."
"또또 안녕."
털뭉치, 그러니까 또또가 대만을 빤히 봤다. 촉촉한 코가 킁킁거리며 움직였다. 대만이 귀 뒤를 긁어주자 만족스러운지 고개에 힘을 뺀 또또가 혀를 낼름거렸다.
"강아지 되게 잘 안으시네요."
"예전에 키웠었거든요. 허스키."
"허스키 되게 크지 않아요?"
"어릴 때 키웠어서 진짜 크게 느껴졌어요. 가슴에 올라오면 숨을 못 쉴 정도로."
대만은 어린 시절 키운 허스키 별이를 떠올렸다. 북슬북슬하고 커다란, 꼭 자기 침대 위로 올라와 잠을 자던 그 강아지를. 13년을 살고 간 착한 아이.
대만이 어렸을 때, 옆집에 살던 남자는 이상한 남자였다. 집에 오는 사람들이 매일 바뀌었고 성별도 나이도 다 달랐다. 어느 날, 그 남자는 아주 작은 강아지를 데려오더니 며칠 살지도 않고 야반도주를 했다. 강아지만 덜렁 남기고. 남자가 떠나고 며칠 뒤, 남자건 여자건 할 것 없이 여러 명이 남자의 집을 찾아왔고 주인이 없는 집을 샅샅이 뒤졌다. 안에 있던 강아지를 짐짝 취급하며 마당으로 내던진 후에도 한참이나 큰 소리가 났다. 대만은 어른들의 볼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어린 대만이 알아듣기엔 힘든 내용들이 오고 간 후 어른들은 대문을 열어둔 후 떠났고 대만은 어른들이 사라지자마자 강아지를 찾으러 들어갔다. 마당은 방치한지 오래라 풀이 무성했고 그 사이에서 작은 강아지가 오들오들 떨고있었다. 강아지가 몸을 떨자 풀도 같이 움직였다. 대만은 작은 강아지를 들어올렸다. 갈비뼈가 훤히 보이는 강아지를 품에 안은 대만은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옆집인데도 한참 멀게만 느껴져 발을 빨리 했다.
강아지야, 강아지야 부르며 물그릇과 소세지를 들고 온 대만은 옆집 남자가 부르던 강아지 이름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애초에 마주친 적이 별로 없어 이름이 기억나진 않았다. 이름이 있긴 했을까. 어린 대만은 힘이 없는지 축 늘어진 강아지를 한참 보다 별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새 이름을 지어주면 강아지도 지난 일들을 잊을까 싶어서였다. 집에 돌아온 부모님께 조르고 졸라 주인이 오기 전까지만 키우자는 허락을 받아낸 대만은 별이를 꼭 껴안았다. 그 남자는 다시는 오지 않았다. 대신 옆집엔 젊은 부부가 들어왔다. 그렇게 별이도 쭉 대만과 살았다.
걔도 너처럼 작았었는데. 대만은 이미 오래 전 이별을 한 별이를 쓰다듬었을 때처럼 손을 움직였다. 또또도 대만의 손길이 괜찮았는지 이쪽을 만져달라며 몸을 반대로 했다.
할머니가 쟁반을 들고 오자 또또가 대만의 품을 벗어났다. 자기 물그릇으로 간 또또의 뒷모습을 보던 대만이 쟁반으로 시선을 돌렸다. 매실차 두 잔과 정갈하게 잘린 청사과. 호열과 대만은 사과를 보자마자 웃기 시작했다. 이유모를 웃음소리를 들은 또또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멍! 하고 큰 소리를 냈다.
#
호열은 드리퍼에서 떨어지는 커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형네 마트로 출근하지 않는 날은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데. 호열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이른 아침인데도 햇빛이 따가웠다. 호열이 신문을 펼치자 띠링-, 핸드폰이 반짝였다.
[가지 좋아하세요? -선생님]
[사실... 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윤호네 어머님이 주셔서... -선생님]
호열은 핸드폰 문자를 보고 소리내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그것도 아침부터. 아마 냉장고를 열었다가 가지를 본 김에 문자를 한 게 분명하다. 지금 내 냉장고 속에 들은 가지들을 보면 슬퍼하겠는데. 호열이 큭큭 웃으며 키패드를 눌렀다.
[어쩌죠. 저도 윤호 어머님께 받았어요. -사장님]
어떤 표정일지 뻔했다. 아마도 비 맞은 강아지마냥 눈썹이 축 처졌을 거다. 대만을 알고 지낸 건 얼마 안됐지만 표정이 다양하다는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아차렸다. 호열은 재빠르게 다음 문자를 보냈다.
[근데 전 가지 좋아해서요. 저녁에 가지러 갈게요.-사장님]
[네!!! -선생님]
호열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며 크게 웃었다. 알면 알수록 재밌는 사람이다.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가지는 뭐... 어떻게든 전부 먹을 수 있겠지. 호열은 커피를 마시며 머릿속으로 가지요리를 떠올렸다. 안되면 갈아서 주스로라도 만들어야지... 가지주스는 처음인데... 호열이 옅게 웃었다.
[그럼 저녁에 봬요. 출근 잘 하시구요. -사장님]
대만은 펄쩍 뛰었다가 전등에 부딪힌 머리를 꾹꾹 눌렀다. 냉장고에 들은 8개의 가지와 드디어 이별을 할 수 있다니. 주신 성의를 생각해 꾸역꾸역 2개는 먹었는데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애초에 혼자 사는데 10개나 주셨으니 좋아했어도 다 못 먹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대만은 핸드폰 화면에 뜬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곤 괜히 양호열이란 이름을 속삭여봤다. 입에서 한 번 굴려본 이름 석 자에 대만의 입끝이 붉어졌다.
#
또또할머니 댁에서 간식을 얻어먹은 날, 호열은 대만에게 뒤에 일정 없음 또또랑 같이 산책할래요? 하고 물었고 대만은 호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강아지 산책이라니. 대만의 얼굴이 삽시간에 밝아지자 낮게 웃은 호열이 그럼... 15분 뒤에 데리러 갈게요. 또또랑. 참 바지는 긴 걸로 갈아입으시는 게 좋아요. 요즘 모기 독하거든요. 하고 대만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그럼 집에 가 계세요. 대만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올라온 대만은 손을 씻고 양말을 신은 뒤 호열의 말대로 바지도 갈아입은 뒤 멍하게 시계를 쳐다봤다. 사실 오늘은 가구 배치도 바꾸고 시내에 가서 필요한 물건도 사 올 예정이었다. 근데 왜 저 남자가 말을 하면 다 끄덕이게 될까. 대만은 다리 한쪽을 달달 떨었다. 대만은 이건 전부 또또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니까, 또또는 귀엽고... 강아지 산책도... 오랜만이고... 대만은 고갤 끄덕였다.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속으로 이리저리 변명을 늘어놨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다니. 간만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행위는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대만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거울을 한 번 더 보기도 하고 옷에 구겨진 곳은 없는지 세 번은 확인했다.
똑똑똑.
왔다.
대만이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또또야 제발 이리 와."
또또는 생각보다 고집이 센 강아지였다. 갑자기 주저앉아 안가겠다 버티기도 하고 물웅덩이에 들어가려는 걸 세 번이나 말렸으며 물 좀 마시라고 줘도 흥흥거리기만 했다. 지금은 풀숲에 들어가 온몸을 부비며 대만을 흘끗 흘끗 쳐다봤다. 대만은 리드줄을 꼭 잡은 채 애원하다싶이 또또에게 말을 했다. 가지 말라는 곳으로만 가고 하지말라는 것만 하고. 별이는 안 그랬는데. 대만이 뒷머리를 꾹꾹 눌렀다.
"말 진짜 안 듣죠? 저도 처음 산책시킬 때 말을 너무 안 들어서 주저앉은 적도 있어요."
"이렇게 말 안 듣는 강아지는 처음이에요."
"이제 슬슬 가야하니까 제가 할게요."
호열은 대만의 손에 걸려있는 리드줄을 가져갔다. 줄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줄이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또또 이리 와."
호열이 목소리를 낮게 내자 또또가 금세 풀숲에서 나왔다. 머리에 달린 나뭇잎을 떼주던 대만이 너 진짜 너무한다. 어떻게 이 사람 말은 바로 알아들어. 라며 입술을 삐죽이자 호열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야 저랑은 4년째 아는 사이니까요. 그치 또또? 멍! 또또가 대답을 하자 대만이 졌다는 듯 고갤 저었다.
"근데 원래 또또 산책도 시켜주세요?"
"가끔요. 문자가 와요. 오늘 애기 산책해 줄 수 있냐고요. 그럼 산책 시켜주고 저는 밥 얻어먹고."
호열이 말을 이었다.
"비 올 거 같은데 이제 갈까요?"
"그러네요. 얼른 가야겠다. 쏟아질 거 같은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또또는 여러 번 주저앉아 결국엔 호열이 안고 돌아갔다. 편안한지 몸을 축 늘어뜨린 또또는 중간 중간 호열의 자세가 틀어질 때마다 호열의 팔을 핥아댔고 대만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심상치 않게 꾸물거리는 구름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또또는 마당에 발이 닿자마자 물그릇으로 향했다. 한참을 챱챱거리던 또또는 만족스럽게 수분을 섭취했는지 곧바로 호열의 다리에 붙어 애교를 떨었다. 간식을 달라는 듯 재촉하는 발짓에 호열이 알겠다며 간식을 꺼냈다. 호열은 대만에게 간식을 쥐어주곤 앉아 손 기다려는 해요 하며 눈썹을 올렸다. 대만은 간식을 손에 들고 천천히 앉아 손 기다려를 순서대로 했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내가 해주는 거라는 느낌으로 거드름을 피우던 또또는 대만이 간식을 주자 대만에게 엉덩이를 붙이고 열심히 턱을 움직였다.
"다음에 또 같이 산책해요. 또또가 선생님을 꽤 마음에 들어하는 거 같거든요."
호열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대만은 자연스레 호열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꾹꾹. 11개의 숫자를 누르고 통화 버튼까지 누른다. 대만은 호열의 숫자 11개를 받고 난 후에 핸드폰을 돌려줬다.
"기다릴게요."
대만이 핸드폰을 흔들며 웃었다. 턱 밑에 난 작은 흉터가 움직였다.
#
대만은 아이들에게 미니게임을 시킨 뒤 반대편 코트에 대충 앉아 일지를 작성했다. 선생이 되고나니 신경 쓸 게 한 두개가 아니었다. 특히나 이렇게 작은 학교면 대만의 할일이 아닌데도 하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대만은 손으론 오늘 한 연습경기를 적었지만 머릿속으론 언제까지 제출을 해야하는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있는 농구부 수업을 어떻게 진행을 해야할지로 가득 찼다.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들은 개인적인 일에도 손을 뻗었고 종국엔 왜 양슈퍼 사장님은 자신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까 까지 닿았다. 진짜 또또 산책할 때만 연락하려고? 그냥 해도 되는데. 보통은 그냥도 하지 않나? 바쁘다더니 구라 아냐? 대만의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생님! 선생님!"
"어?"
"게임 끝났어요. 서준이네 팀이 이겼어요."
"아 그랬어? 미안. 잠깐 일 때문에 생각할 게 있어서. 오늘... 짝수날이니까 짝수번째가 농구공 정리하고 홀수번째가 먼저 씻어."
대만은 아이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무데나 널부러진 농구공 하나를 주워 3점 라인에서 던졌다. 림을 통과한 농구공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퉁퉁 튕겨졌다.
대만은 방과 후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날이 더워지니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말을 아무리 잘 들어도 애들은 애들이라. 대만의 머릿속이 점점 캔맥주로 가득 찼다. 그러고보니 장을 본지 좀 됐는데 뭐가 있긴 한가. 대만은 낯설게만 느껴지는 크림색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런..."
우리 집 냉장고인데도 낯선 이유가 있었다. 냉장고 안에 들은 건 회를 사면 같이 오는 미니간장 뿐. 물도 맥주도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당장 마실 수 있는 액체가 수돗물이라니. 집 오지말고 장부터 볼 걸. 대만이 삐딱하게 서서 냉장고를 노려봤다.
대만은 오히려 이걸 기회로 삼자 마음을 먹었다. 슈퍼에 가면 사장님도 있을 거고 항상 말을 거는 사장이니 대화도 나눌 수 있지 않나? 대만이 차키를 챙겼다. 걷기엔 너무 더웠다.
평소와 다르더니만. 대만은 슈퍼 문에 붙어있는 종이를 보고 혀를 찼다.
[개인 사정으로 쉽니다.]
대만이 다시 차 안으로 몸을 구겨넣었다. 선글라스 밑에 숨겨진 올리브색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대만은 마트 입구부터 느껴지는 에어컨 바람에 몸을 살짝 떨었다. 은행 보다 더 시원한 거 같아. 카트를 느릿느릿 끌며 생수 묶음을 담은 대만이 매대를 쳐다보며 어슬렁거렸다. 이리저리 재고 또 쳐다보고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결국은 또 비슷하게 담게 됐지만. 생수, 단백질이 될 만한 육류나 해산물, 과일 몇 종류. 그리고 이온음료. 대만이 포카리 스웨트로 손을 뻗자 익숙한 목소리가 대만의 귀를 통과했다.
"또 포카리?"
아,
사장님이다.
"여기가 더 비싼데. 슈퍼에서 사시지."
소근거리느라 공기가 많이 섞인 목소리에 대만이 홀린 듯 포카리를 내려놨다. 장난스레 웃는 얼굴에 대만은 자기도 모르게 투정섞인 말을 뱉었다.
"아까 갔는데"
"네에."
"아무도 없길래요."
"아... 여기 일손이 부족하대서... 그냥 안에 들어가서 물건 고른 다음에 돈 놓고 나오면 되는데... 미리 말을 해줄 걸 그랬네요."
호열이 미안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머쓱한지 머리에 뒤집어 쓴 수건을 만지작거린다. 수건 매듭 부분을 만질 때마다 불룩하게 튀어나오는 근육에 대만이 티 안나게 고개를 돌렸다. 날이 더워져서 그런가 오늘도 반소매 티셔츠의 팔 부분을 둘둘 말아올리셨네. 운동 뭐 하는지 물어볼까... 대만은 호열의 팔뚝으로 가는 시선을 꼭 붙들었다. 아니 붙들고 싶었다.
"그렇게 쳐다보시면 곤란한데요..."
호열이 붉어진 얼굴로 소매를 내렸다. 잔뜩 구겨진 티셔츠 소매가 팔뚝을 완전히 가리자 느릿하게 시선을 옮긴 대만이 필사적으로 고갤 저었다.
"아아!!! 그게 아니라 일단 죄송해요!! 진짜로!!"
터질듯한 얼굴로,
그러니까저번에봤을때도느꼈는데요 몸이되게탄탄해보여서요 운동뭐하시나하고... 절대다른뜻은없어요진짜예요믿어주세요 정말진심으로무슨운동하시나궁금했어요! 그것뿐이에요!
저런 말을 하는 게 꽤 귀엽다. 우물거리는 윗입술이 몇 번 더 움찔움찔 움직이는 걸 본 호열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나보다 적어도 15센티미터는 더 큰 거 같은데 하는 행동은 몇만 배나 더 귀엽다. 호열은 대만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뒤늦게 귀가 빨개졌다.
"운동... 안 하는데... 딱히..."
"아하..."
대만은 호열의 말에 그럼 가보겠다며 카트 손잡이를 잡았다. 정말 미안하다는 사과는 덤이다. 호열은 멀찍이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만 봤다. 저녁 안 먹었음 같이 먹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어그러졌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호열은 벗어놨던 목장갑을 다시 꼈다. 창고 정리나 마저 해야겠네. 호열이 숨을 깊게 쉬었다.
#
[오늘 저녁에 만나요. -사장님]
[비 올지도 모르니까 우산 챙기시구요. -사장님]
호열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몇 번이나 어그러진 끝에 잡은 귀한 약속이었다. 호열은 몇 번이나 타이밍이 맞지 않아 깨졌던 약속들을 떠올렸다.
가지를 받으러 대만의 집으로 간 날, 대만은 그동안 도움 받았던 일에 대한 보답으로 밥을 한 번 사겠다는 말을 했다. 호열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가지 먹어주는 게 그렇게 큰일은 아닌데요 하고 말하자 대만은 가지뿐만이 아니라! 하고 웃어댔다. 호열은 자신이 자주 가는 술집 중 가장 깔끔한 곳을 얘기했다. 사실 자기야 아무 곳이나 가면 그만인데. 이 남자는 그런 부류가 아니니. 호열은 대만에게 데리러 갈게요. 선생님 집에서 별로 안 멀거든요. 하며 가지가 든 쇼핑백 손잡이를 매만졌다.
"주말에 갈까요?"
"그럼 토요일에 데리러 올게요."
"네. 그럼 들어가세요."
호열이 쉬세요. 하고 몸을 돌리자 대만은 호열이 아주 작은 점처럼 보일 때까지 빌라로 들어가지 않았다.
토요일 약속은 성사되지 않았다. 또또가 아프다는 할머니 말에 대만과 호열 둘 다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동물병원으로 차를 몰았고 그 후에 다시 잡은 약속도 조카가 아파서, 방과 후 활동 중 아이가 다쳤다는 이유로 밀리고 또 밀렸다. 둘 다 바빠 연락도 안 하는 날이 많았고 지난 주엔 대만의 집 근처 폐건물에 숨어든 10대 청소년들이 버린 담뱃불 때문에 불이 크게 나 약속을 취소하게 됐다. 사이렌 소리때문에 헐레벌떡 뛰어온 호열은 혼자 앉아있는 대만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보니까 저희 빌라까지는 안 왔고..."
대만의 말을 끝으로 둘은 동시에 서로를 마주봤고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이쯤되면 밥 먹지 말라는 신호 같은데요?"
"그러게요. 다음 주에도 안되면 없던 일로 해요."
"하하, 큰일이네. 별일 없게 해달라고 빌어야겠다."
호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확인이 끝났으니 집에 들어가도 좋다는 소방대원의 말이 떨어졌다. 들어가보겠다며 일어선 대만은 호열이 거꾸로 신은 신발을 가리켰다.
"조심히 가세요."
호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렇게 잡은 약속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렇기에 호열은 지난 번, 대만에게서 온 문자 덕에 행복했던 아침을 그대로 따라하기로 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징크스가 있던데 오늘부터 만들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지난 번처럼 똑같이 신문을 읽고 커피를 내렸다. 이쯤 문자가 와야 하는데. 아무래도 실패다. 호열은 눈썹을 한 번 움직인 후 7시쯤 만날 남자에게나 충실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평소보다 더 신경을 쓴 호열은 괜히 이랬나 싶은 후회가 밀려왔다. 오시는 어르신들마다 감나무 집 딸이랑 드디어 만나냐는 질문을 했고 호열은 글쎄요 하고 웃어넘겼다. 집에 들르라는 말엔 내일 가겠다며 미소지었다. 그 집 여자분도 괴롭겠다. 호열은 미용실 사장이 놓고 간 포도즙을 괜히 꾹꾹 눌렀다. 평소에도 시간이 잘 안 간다 생각했는데 오늘은 더 그렇다. 아직도 오후 1시라니. 호열은 괜히 잘 정리된 매대를 한 번 더 정리했고 아까도 파악한 재고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리곤 끄적끄적 화이트보드에 뭔가를 적었다.
<포카리 스웨트는 생각보다 잘 나가니 더 들여놓을 것.>
#
이렇게까지 한다고? 호열은 깜깜해진 가게 안을 보다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정전. 좋다. 호열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카운터 밑 서랍을 뒤적였다. 손전등이 손에 걸렸다. 약속시간까지 20분도 채 안 남았는데. 두꺼비집을 확인하러 가게 문을 열자 호열은, 정말 몸에 힘이 쭉 빠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를 느꼈다. 장난하나? 호열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온 동네가 다 깜깜했다. 정말 안 맞나보다. 호열은 지금 절실하게 점쟁이라도 만나고 싶어졌다. 세상이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는 기분. 호열은 뒷머리를 만지다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도 만나는 건 못 하겠네요. -사장님]
[없던 일로 해야겠어요. -사장님]
호열이 핸드폰 플립을 닫자마자 벨소리가 울렸다. 선생님. 호열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크흠. 담배를 끊어야겠는데.
"여보세요?"
"사장님 저 정대만입니다."
"네."
어차피 저장명이 뜨니 누군지 아는데. 호열은 놀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여기 정전되면 젊은 사람들끼리 순찰 돈다면서요?"
"맞아요. 그래서 저도 이제 나가볼려구요."
"잘됐다. 같이 돌까요?"
"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찾았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전 아직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니 여길 잘 아는 사람과 다니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해서요."
대만의 말에 호열이 아 그렇겠네요 하고 고갤 끄덕였다. 대만은 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오늘 약속을 없던 일로 하고 싶지 않거든요."
호열은 대만의 말에 숨을 참았다 뱉었다. 짧게 이어진 침묵에 대만이 사장님? 하고 되묻자 호열이 셔츠 앞자락을 펄럭였다.
"그...럼 제가 데리러 갈게요. 지금 갈테니까... 20분 정도 후에 나오세요."
"네. 조심히 오세요."
호열은 뚝 끊어진 핸드폰을 쳐다봤다. [선생님] 세 글자가 호열을 놀리듯이 둥둥 떠있었다. 이 남자는 정말 갑작스럽다. 연고도 없는 이 동네에 온 것도, 가끔씩 던지는 시선도, 지금 이런 것들도. 그냥 안되면 안되는 대로 되면 되는 대로 흘러가는 스타일일 줄 알았는데 예측하기가 힘들다. 호열은 손전등을 두어번 껐다 켰다. 오늘이 기회가 아닌 거 같으면 만들면 된다. 언제부터 하늘을 그렇게 믿었다고. 호열이 집 열쇠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온 세상이 자신을 상대로 말리는 것만 같았다. 접고 싶다는 마음이 안 들었던 건 아니다. 자꾸만 틀린 결정이라는 듯 온 힘을 다해 말리려고 드는 세상의 외침이 대만의 마음을 흔들어댔다. 하지만 한 번 시작했음 끝을 봐야하지 않나 하는 이상한 승부욕이 도졌다.
대만의 이런 승부욕은 대만에게 흉도 남겼지만 보상도 톡톡하게 줬다. 체대입시를 준비할 때, 대만은 자신을 깔보던 재수생 형을 이기기 위해 기를 쓰고 훈련하다 앞니가 박살났지만 그해 대만만 대학합격증을 받았다. 또, 넌 죽어도 선생은 못된다는 전애인의 말에 죽어라 공부해서 선생이 됐다. 이번에도 그렇다. 그런 촌구석으로 왜 가냐는 지인들 말 속에는 걱정이 아닌 무시가 섞여있었고 대만은 적어도 5년 동안은 도시로 가지 않겠다는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도 안다. 안 맞으면 다시 올라가면 그만이고 몇 번 싫은 소리 들으면 끝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보상에 가까운 남자를 만나게 되는 일이 생기니 대만의 마음이 점점 기울었다.
대만은 확신을 갖고 싶었다.
대만은 호열과의 통화가 끝난 후 곧바로 집을 나섰다. 캄캄해진 집에 있어봤자 가만히 기다리는 거 밖에 할 게 없었다. 가로등도, 집안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도 하나 없으니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대만은 자신의 차 보닛 위에 살짝 걸터앉아 호열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손전등을 딸깍거리자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양호열이다. 손전등에 달린 끈을 만지작거리던 대만이 보닛에서 일어났다.
"왜 나와계세요?"
호열이 왼손에 들린 포카리를 내밀었다. 덥죠? 호열이 대만에게 웃어보였다.
"...방금 나왔어요."
"거짓말 같은데?"
"...진짜로요."
"그럼 저쪽으로 갈까요? 이쪽은 제가 오면서 확인했거든요."
호열의 주도하에 둘은 20분쯤 걸으며 집 4곳을 살폈다. 오로지 그 일만 하라고 입력이 된 기계처럼 대문을 두드리고 괜찮냐고 묻고 다시 집을 나선다. 사실 대만은 하는 일이 없었다. 이미 안면을 튼지 오래인 호열이 대화를 주도하고 대만은 그저 꾸벅 인사만 했을 뿐. 대만은 호열의 뒤에 서서 움직임을 좇았다. 어르신 농담에 웃느라 불룩해지는 광대도, 중간중간 움직이는 눈썹도, 쉼없이 움직이는 입술도, 어르신들 앞에선 좀 더 높아지는 목소리도. 대만은 괜히 초조한 마음이 들어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마지막 집을 나서며 이제 끝났어요 하고 웃는 호열이 대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주택가에서 좀 떨어진 언덕배기에 있는 집이라 고요했다. 호열은 대만에게 잘 보고 걸어야 한다며 자신의 손전등으로 땅을 비춰줬다.
"아 참."
호열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손전등을 내려버린다. 여기서 별 잘 보이거든요. 하늘을 향해 팔을 쭉 뻗은 호열이 밝게 빛나는 별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대만도 손전등을 내렸다.
"저기 보여요?"
대만은 하늘 대신 호열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네 보여요. 하고 거짓말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딜리 눈이 간다. 밍숭맹숭한 두부 같은 얼굴이. 그러니까 이건 내 잘못은 아니다. 달도 이 남자도 자길 부추기고 있다.
"제일 위에 있는 게 데네브예요."
대만은 결심했다. 역시 우물쭈물거리는 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른쪽에 있는 게 베가고."
심장이 지금이라며 말을 걸었다. 바지 옆 솔기를 매만지던 대만의 상체가 살짝 내려갔다.
"맨 밑에 있는 게 알타이... 르..."
대만이 슬쩍 호열의 볼에 입술을 부딪혔다. 촉- 소리가 나며 떨어진 입술에 호열이 눈을 크게 뜨자 대만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도 못 봤을 걸요. 이렇게 캄캄한데 누가 봤겠어요."
쪽 소리가 나게 떨어진 입술 위로 긴장감이 걸린다.
"달이 이렇게나 밝은데... 생각보다 응큼한 면이 있으시네."
호열이 피식 웃었다. 분명 빨개졌을 귀를 슬쩍 만지자 대만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달님도 눈 감아주시겠죠. 지금 좋은 거 구경시켜줬는데."
"와... 진짜 아저씨 같다. 선생님 저랑 몇 살 차이 안 나지 않아요?"
호열이 웃자 대만이 입술을 뾰족하게 만든 채 꿍얼거리기 시작했다. 툭 튀어나온 입술에 호열이 손전등을 완전히 꺼버렸다. 뒤이어 대만의 손에 들린 손전등도 불이 꺼졌다.
하금리 주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금일 정전이 해제되었으니...
끝!
너무나도 뒤죽박죽이라 올리기도 민망하지만 끝은 봐야지 싶어서 올림 봐줘서 고맙다!
슬램덩크 호열대만
[Code: 336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