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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요, 여기 봐주세요."

"자. 정면 입니다. 네, 다음은 왼쪽 보실 게요."

"정대만 씨, 이쪽도 봐주시죠."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는 언제 받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정대만이었음. 번쩍번쩍 수많은 플래시가 눈을 공격하니 절로 얼굴이 찡그려지는데 역시 타고난 스타는 다른건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온 몸으로 플래시 세례를 버텨내는 서태웅은 이젠 뭐 거의 존경스러울 지경이었지 
 

웃는 방법을 잊어버린 건 아닌지 착각이 들 만큼 무뚝뚝한 얼굴, 지겹도록 다물어진 입매, 차가운 시선, 손 한 번 흔들 줄 모르는 딱딱한 성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그게 매력이란다... 나 참. 그 매력에 2년을 헤어나오지 못한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치사들 하다. 치사해. 하고 생각하는 정대만이었음 악을 쓰고 농구 코트를 뛰어 다니는 국내 선수들한텐 차갑기만 했던 시선들이 서태웅한텐 뭐가 그렇게 따사롭기만 한지. 이게 다 외모지상주의의 폐해다. 뭐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옆구리에 거짓 연인인 정대만을 끼고 서태웅이 행차하신 곳은 농구 영화의 VIP 시사회였음 소재가 농구라고 해도 농구 선수를 직접 시사회에 초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겠지 있다 해도 끽해야 도움 준 농구계 고위 관계자 정도. 그런데 이렇게 둘 앞으로 초대장이 날아온 이유는 탱댐이 농구 선수라서가 아니라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셀레브리티 서태웅과 그의 연인 정대만이란 이유였을듯 

다른 행사와 마찬가지로 서태웅은 흔쾌히 시사회에 참석했음 그것도 선배의 손을 꼭 붙잡고 

 

'거짓 연애를 들키지 않는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가요, 여기 말고도 다른 데도.'

 

애초에 사태웅은 이런 자리에 참석하지 않기로 유명했음 사람 많은 곳을 즐기지도 않을 뿐더러 언론이나 방송 출연도 선수로써 어울리지 않는다며 마다했었음 그런데 왜 그 놈의 스캔들 이후로 안 다니던 행사마저 쫓아다니면서 비싼 제 얼굴을 헐값에 팔고 있는 건지 정대만은 이해할 수가 없었음
 

사진 한 장 더 찍겠다고 몰려드는 기자들, 눈빛 한 번 교환해보려 애를 쓰는 다른 셀럽들, 어떻게 알고 왔는지 입구를 가득 채운 팬들....그걸 다 알면서도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냉혈한 서태웅 그리고 그 옆에 서서 역할극에 충실하고 있는 제 모습까지 환멸이 났음 현타가 오고 싫증이 나고...원래 여름이 이렇게 뜨거웠나...정대만은 딱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음

 

"사람들 없다고 이렇게 쌩하게 굴 필요 있나요?"

"어, 있어. 안 그래도 지겨운데 내가 커튼콜 후에도 너랑 연기할 이유가 있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포토타임을 견뎌내고 그제야 입에 경련이 날 것 같았던 미소를 지우고 어색하게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린 정대만이었음 그럼 아쉽다는 듯한 서태웅의 시선이 들러붙겠지

 

"너무해요 선배." 
 

말과는 달리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얼굴에 얼마 전까진 농구공만 붙잡고 있었던 제 큰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 서태웅을 뒤로하고 정대만은 제 앞에 잘 차려진 케이터링을 즐겼음 무알콜 와인, 폭신한 시폰 케이크, 치즈와 햄이 겹겹이 쌓인 샌드위치를 차례로 입에 넣으니 어느새 바짝 다가온 서태웅이 냅킨으로 제 입술을 닦아주고 있었음
 

어, 어어... 너무 가까운 거리라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그 또한 우스운 꼴이라 그러지 못했겠지 와중에 마주친 태웅이 얼굴은 한 폭의 그림이라 쓴소리도 못한 채 그대로 올려다봤을듯 짜증날 정도로 잘 조각된 얼굴을 감상하느라 말을 비운 것 뿐인데 서태웅은 이제 선배가 손길을 피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셔츠에 치렁치렁 달려있던 실크 리본도 손봐주고 다 됐다며 가슴을 가볍게 쳤음
 

어어, 그래 고맙다. 얼빠진 멘트. 천만에요. 여유 있는 답변. 지금 이게 딱 서태웅과 저의 관계.

 

어색하기만 했던 셀럽 행세에 서태웅의 연인이라는 역할 놀이. 보통의 비 시즌이었으면 집 스킬 트레이닝 센터 그리고 병원을 오가는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제가 하루아침에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음
 

헐렁한 트레이닝복에서 VVIP도 줄서서 산다는 디자이너의 옷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빼입은 농구하는 인형....다행히도 서태웅한텐 조금 맞나. 아무튼 서태웅보단 좀 부족할지 몰라도 어딜가서 못생겼다 소리 안 듣고 자란 30년, 여심을 사로잡는 프로농구 간판스타로 지낸 9년. 뭘 입어도 잘났고 뭘 발라도 잘난 그 인형 SNS 팔로워 수는 벌써 70만 명. 방송 출연 요청은 여기저기서 쏟아졌고 광고 문의 역시 줄지어 이어져 구단의 홍보팀이 난처할 정도였음 게다가 저를 부르는 행사나 축제는 뭐가 이렇게 많은지...
 

유명이라는 건 좋구나, 인기라는 것은 좋구나... 싶어도 사실 정대만은 개인의 인기나 돈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음 단순히 서태웅의 꼬임에 넘어간 연기자일 뿐

 


 

"태웅아, 우리 헤어진 지 10년이 넘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다시 만나요. 서로 알아가는 단계."

"철 좀 들어라 서태웅."

"그냥 하는 소리 아니에요. 이번에 이 얘기 하려고 귀국했어요."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

"좋아해요. 다시 만나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아니야."


태웅이의 말이 끊기기도 전에 정대만은 먼저 말을 쳐냈음 쓸데없는 소릴 더 듣고 있을 이유는 없다. 정대만이 호텔까지 온 건 저 웃기지도 않는 연애 기사를 치워내고 불꽃 남자의 멋진 활약이라던가, 며칠 전 비시즌을 이래저래 보내며 팬 들을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있다는 인터뷰 기사들이 페이지를 장식하길 바랐던 마음이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무뚝뚝하고 멋없는 고백을 들으러 온 게 아니었음 전 연인과의 스캔들은 불쾌하고 불편하고 또 단단하게 먹었던 마음을 요상하게도 헤집었으니까.

 

"그때는 죄송했어요. 제가 너무 어렸어요."
 

잠수이별을 당했어도 없는 가오 더 상할까 굳이 얘기하지 않았던 십여년 전의 이야길 뻔뻔하게도 꺼내 드는 서태웅이었음 어렸으니까 이해해달라고? 안 그래도 심란하던 마음에 울컥 하고 비수처럼 박혀오는 말이었을듯 정대만의 잘 정리된 양 쪽 눈썹이 꿈틀하더니 목울대도 울렁였음
 

분명 스무살의 서태웅은 충분히 어렸음 하지만 저도 마찬가지였음 그땐 스무살이 넘으면 알아서 번듯한 성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었지만...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줄도 모르고.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스물두 살의 정대만도 이제 갓 사회로 던져진 눈도 다 못 뜬 애새끼와 다름이 없었음 그때는 무슨 어른 흉낼 내겠다고 눈물을 꾸역꾸역 삼켜가며 차가운 창고 구석에 숨어있었는지. 그때의 자신도 겨우 스물두 살이었음. 나도 네가 첫사랑이었는데. 그딴 건 사유가 될 수 없어 

 

- 학교 일로 많이 바빴어요. 앞으로도 전화하고 편지 쓰는 일은 힘들 것 같아요. 헤어졌으면 좋겠어요. 
 

"태웅아. 나 농구하느라 바빠서 너랑 어울려 줄 시간 없어. 너 이러면 형 힘들다."
 

그때 서태웅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정대만임 바빴고, 힘들었다고? 그래, 나도 바쁘고 힘들다. 
 

아마 태웅이는 기억도 못하고 있을 어린 시절의 이별 사유...말은 안 했지만 그 별 볼 일 없는 이별 사유가 마음을 얼마나 다치게 했는지, 그때 농구와 열렬히 사랑에 빠진 너는 알기나 했을지. 이 대화를 그만두고 싶은 정대만이었음 가슴에 다시 한번 생채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는데 눈치가 없는 서태웅이 멈추질 않음

 

"해요. 연애."
 

서태웅은 여전히 고집스러웠음 선수라는 직업을 가진 놈들은 대체로 그랬지만 서태웅의 고집을 이겨낼 사람은 몇 되지 않았음 평소엔 순한 양 같은 놈인데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들어주기 전까진 포기를 모름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 거기엔 서태웅도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정대만이었음 이번에도 포기를 모르고 들러붙는 서태웅

 

"꺼져."
 

비록 태웅이가 미국에 있다 한들 매년 모이는 북산고 모임도 그렇고 언젠가 국내로 돌아올 미래도 그렇고. 안 그래도 좁은 농구판 계속 볼 사이라 참았던 말들이 툭 튀어나왔음 제가 내뱉은 말이었지만 정대만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을듯 겨우 꺼져라는 한 마디가 태웅이를 다치게 했을까 노심초사... 그 걱정이 정대만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지금까지 뻔뻔했던 태웅이의 얼굴이 상처 받은 듯 시무룩해졌음
 

차라리 그냥 집으로 돌아갈걸 제 분풀이를 하겠다고 저 어린 애한테 상처나 주고. 방금까지 어리다는 사유는 인정할 수 없다며 이의를 제기하던 정대만이 방금 죽고 말았음 그리고 방금 다시 태어난 정대만 앞 상처 받은 새끼 고양이 얼굴을 한 서태웅이 말함

 

"선배 마음은 알겠어요. 그렇지만...조금만 더 어울려 주시면 안 될까요."

"...야."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만 가짜 애인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서태웅이 시선을 마주쳐 옴 적당히 불쌍한 표정을 하고 항상 일자로 굳게 다물렸던 입꼬리도 축 늘어뜨리고... 저 불쌍하죠? 라고 말하는 듯한 까만 눈동자. 정대만은 단 한 번도 이 까만 눈을 이겨본 적이 없었음 단호하게 '기사 내려, 서태웅.' 하고 멋지게 돌아서려고 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설득을 듣고 있을 줄은...
 

"언제 돌아가는데...?"
 

정대만은 그날을 후회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하게 됨


 

[공식] 정대만 측, 서태웅과의 열애 인정... 초대박 농구 커플 탄생. "예쁘게 만남을 이어가는 중"

 

 

"죄송합니다, 네 정말 죄송해요. 그게... 아무튼, 맞아요."

 

정대만은 프런트에 전화해 사과하고 또 사과했음 이런 개망신이 다 있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뭘 하나 이미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걸... 강백호의 여우 발언은 미래를 예지한 것이었을까. 꼬리가 열 한 개 달린 백여우에 홀랑 잡아먹힌 듯 설득당한 정대만은 호텔을 나서자마자 퍼뜩 정신을 차렸음 아, 이게 아닌데...
 

프런트도 황당했을듯 불과 몇 시간 전엔 절대 아니라고 잡아떼더니 이젠 열애를 인정하는 기사를 다 내달라고 하니까. 앞으로의 입장 수익은 어쩌나 유니폼 안 팔리면 어쩌나 구단에 딱 하나 있는 인기 스타 정대만을 이대로 떠나보내도 되나 등등 여러 걱정이 앞섰지만 본인이 그렇다는 걸 말릴 수도 없었음 결국 더는 말을 얹지 않고 그의 뜻대로 해주는 프런트였을듯
 

하지만 프런트의 생각은 틀렸음 기사가 터짐과 동시에 기존에 있던 농구 팬들은 물론 머글마저 '정대만'이라는 남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음 서태웅의 연인으로 시작했지만 잘생긴 그의 외모 뜨거운 플레이 스타일 서글서글 하면서도 깔끔한 인상 센스 있는 인터뷰 스킬까지....오히려 서태웅과의 열애설이 터진걸 아쉬워할 정도였음
 

[서태웅 이 좋은걸 지만 봤단 말임?] 같은 댓글을 남기면서까지. 유니폼 판매량은 갑자기 두 배, ...아니 열 배를 넘어 지난 시즌 재고 품절. 아직 시작도 안 한 다음 시즌의 유니폼을 내놓으라며 댓글 창은 난리가 났음 서태웅은 제가 속한 리그 뿐 아니라 국내의 자그마한 수준의 리그도 들끓게 한다며 구단은 혀를 내둘렀음


정대만의 모든 점이 달라졌음 광고요? 예능 프로그램이요? 잡지 인터뷰요? 지금까진 스포츠 뉴스 인터뷰나 농구 잡지 촬영 등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젠 의류, 식품, 전자기기 광고 요청에 요즘 핫한 예능 프로와 유명 유튜브 채널에서도 러브 콜을 날렸으며 여성 잡지, 남성 잡지, 패션 잡지 등등... 이쪽도 경쟁하듯 인터뷰 요청을 해댔음 물론 절반 이상이 서태웅의 이야기였으나 나머지 절반은 정대만의 농구 이야기를 했음 정대만은 그것으로도 크게 만족했음
 

조금이나마 농구라는 종목을 사람들이 알아준다면. 제가 오랫동안 사랑했던 농구를 사람들도 함께 사랑해준다면. 저로 인해 제 동료들에게도 관심이 돌아온다면. 어느 종목과 같이 이 곳도 치열한 전쟁과 같다는 걸 알아준다면. 그리고 그게 얼마나 멋진 승부인지 모두가 알아주었으면.  
 

정대만은 바보였지만 서태웅이 생각하는 만큼의 바보는 아니었음 주는 게 있다면 돌아오는 것도 있어야지. 정대만이 이 우스운 역할 놀이에 뛰어든 건 서태웅의 체면도 체면이지만 제가 원했던 게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음 그리고 그 일은 제법 성공적이기까지 했음 

 

열애설이 터지고 거의 한 달이 지났을 즈음 정대만은 이미 시즌 준비가 시작됐을듯 연습구장에 모여 슬슬 체력 보강 훈련과 슛 감을 끌어올리는 등 가장 기초적이지만 중요한 시기였음 서태웅은 아직 휴가가 남았다며 돌아가지 않고 국내에서 버팅겼음 당연히 태웅이가 돌아가지 않았으므로 행사나 연애 놀음에 어울려 주는 건 정대만의 몫이었음 휴일이나 훈련 전후로 그가 원하는 대로 어울려 줬으니까
 

어느새 정대만의 SNS 팔로워는 180만 명...예전에는 동료와 다녀온 캠핑이라거나 셀카라거나 또는 당일 팬들에게 받은 잘 나온 사진을 박제하는 용도로 사용했었지만 요즘 정대만이 올리는 게시글은 거의 90퍼센트 이상 서태웅의 이야기였음

 

[오늘 본 영화 재밌으니까 추천할게] 

[ㅁㅁㅁ길 파스타 운 좋게 웨이팅 없이 들어감] 
 

하고 주어가 빠진 이야길 적어도 누가 봐도 서태웅과의 데이트임을 짐작하게 하는 사진으로 골라 올렸음. 온통 가짜뿐이네. 피드를 올려보고 내려보고 이리보고 저리 봐도 서태웅의 가짜 애인 페이지가 따로 없었음 괜히 뾰로통 하고 정대만의 입술이 삐죽여짐

 

"...음식이 별로예요?"
 

턱을 괴고 SNS 게시글을 올리던 정대만이 핸드폰을 던지듯이 테이블에 떨궈놓으니 맞은 편에서 파스타를 먹던 태웅이가 고개를 들고 바라봤음 놓여있던 자몽에이드를 쭉 들이켜던 정대만이 '아니이...' 하자 서태웅이 말해보라는 듯 눈짓함

 

"그냥 좀. 예전만큼 재미있진 않네."

"그럼 하지 마요."

"어떻게 그러냐. 사람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게 온통 너인데."

 

태웅이의 심플한 답에 너는 세상을 아직도 모른다는 등 이래서 서태웅은 안 된다는 등 불만이 쌓이는 정대만이었음 정말로 서태웅은 세상을 모른다. 모두가 원하는 일임에도 본인이 귀찮은 일은 하지 않는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태웅이의 SNS는 계정만 있지 게시글은 0개, 팔로잉은 1명. 그마저도 정대만이었음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서태웅의 연인인 정대만의 SNS에 열광했겠지 서태웅을 훔쳐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니 그럴 만도 했음
 

서태웅은 뾰족하게 입술이 나와있는 선배를 제 휴대폰에 담았음. 찰칵 소리가 나니까 그제야 '뭐야!' 하고 성질을 내지만 태웅이는 사진이 잘 나왔다며 그대로 제 휴대폰에 정대만의 사진을 저장함 더 먹고 싶은 건 없냐며 제 앞에 있던 피자 조각도 선배의 접시에 덜어 놓아줌. 좀만 더 하면 입에라도 넣어줄 것 같아 시큰둥한 표정을 한 정대만이 손을 내저었음


태웅이는 가짜 연인 놀음이 꽤 즐거운 듯했음. 이래야 속일 수 있다면서 행사며 파티에 여기저기 끌고 다니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평범한 연인처럼 영화를 보러 가자 했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 했음 정대만이 고분고분 기분이 좋아 보이면 제가 묵고 있는 호텔서 와인을 하자며 부르기까지 했음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하고 묻는 선배에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진짜처럼 행동해달라 부탁하니 마음 약한 정대만은 따를 수 밖에....

오늘도 ㅁㅁㅁ길에 유명 레스토랑이 있다며 훈련이 끝나면 같이 가자 부탁했더니 정대만은 흔쾌히 승낙했음 예약도 안 되는 유명 레스토랑에 태웅이가 쉐프에게 따로 부탁한 것도 모르고 정대만은 운 좋게 웨이팅이 없다며 신나했음. 바보. 태웅이가 입 모양으로만 뻥긋거림
 

귀찮은 일이 꽤 많이 늘었지만 정대만도 태웅이와 어울리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음 어린 시절 그와 맘껏 즐기지 못했던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기도 했고 예쁜 얼굴로 종알종알 말을 붙이는 모습도 좋았고. 태웅이만큼 잘 빠진 회색 스포츠카를 끌고 집 앞에 데려다주는 일도 내심 뿌듯했음 내리기 전에 태웅이는 꼭 "선배, 잘 자요." 하고 굿나잇 인사까지 전하니 가슴이 꽤 간지럽기까지 했음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되는데. 마치 10년 전 쯤으로 돌아간 듯한 설렘을 애써 모른 척 하고 그저 서태웅을 돕는 거라며 자기 위로 했지만 사실 정대만은 꽤 즐거웠음

 

하지만 일어나야 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법임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간에

 


태웅대만

[Code: a92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