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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6 00:43

보고싶다 

정대만...농구선수인 동시에 셀럽이나 다름없었을듯 그의 인기에는 외모가 한몫했는데 조막만한 얼굴에 동그랗고 큰 눈 올리브색 눈동자, 오뚝하게 잘 뻗은 콧대 선이 예쁘게 난 입매에 갈색빛이 차분하게 내려앉은 머리색 귀를 덮을만한 기장에 항상 정돈된 깔끔한 헤어스타일 그리고 턱 아래 옅게 난 흉터까지

흉터? 이렇게만 보면 웬 옥의 티인가 싶지만 옅게 남아있는 그것마저도 매력 포인트였음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겠지

 

-그 정도면 완전 땡큐지

-마스크 깔끔하긴 하잖아 군더더기 없이

-서글서글 제법 귀엽긴 하더라

 

흔남 같은 훈남, 우리 엄마 사위, 면접 프리 패스 상... 기타 등등 정대만에게는 주로 연예인들에게나 붙는 호칭들이 더덕더덕 붙었음 특별히 극찬에 가까운 단어들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겠지 사실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어무나 딸려 주변에서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귀하디 귀한 얼굴이라는 걸...ㅋㅋㅋ
 

거기에 적당히 다정했고 적당히 싹싹했고, 또 적당히 깍듯했고 적당히 호탕했으며 적당한 성적 매력까지. 밸런스를 어찌나 잘 맞춰놨는지 도무지 싫어하려야 싫어할 수가 없었음 어떤 곳에 내놓아도 굶어 죽을 일 없는 넉살 좋은 인싸에 실질적 리더 포지션을 점했을듯 

 

"아니던데. 너 걔 좋아하잖아, 정대만. 솔직히 말해봐."

"누가 미쳤다고 정대만을 좋아해? 에이, 그런 거 아니야."

 

안녕하세요 누가 미쳤다고에 누가를 맡고 있습니다. 그게 몇이냐면 다섯, 여섯... 일곱인가 사실은 무리의 절반 이상이 남몰래 짝사랑하는, 이상하게 숨기고 싶은 그런 남자였음 남녀 구분 없이 함께 속옷 고를 수 있는 남자 그러나 속옷 벗기면 더 좋을 것 같은 남자. 이런 수상한 호칭들을 다 꿰어차고도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는게 보통 꼬리 열 네 개 달린 여우가 아님
 

그런 정대만이 품절되면 어떡하냐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올해로 서른 하나의 정대만, 농구선수. 올해로 프로 9년 차에 FA를 거쳐 비싼 금액에 원 소속팀에 잔류하게 된 프랜차이즈 스타, 그리고 팀의 최고 연봉자. 홈 경기장엔 그의 커다란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렸고 포스터와 지류 티켓에도 항상 센터를 차지했고 팬들이 가져오는 플랜카드만 하루에 수십장이 넘었음

팀 내 유니폼 판매 순위는 당연히 1위. 이 기록은 정대만이 데뷔한 이후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그뿐이냐 등 번호만 달랑 찍혀있는 유니폼 모양의 키링이라도 나오면 팬들이 팀 홈페이지를 금세 터뜨려버렸을 정도임 이쯤 되니 팀의 전력을 넘어 팀의 상징적인 선수나 다름없었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나라에서 농구의 인기는 그리 높지 않았음 모아봐야 다른 팬덤에 비하면 한줌단에 경기장을 매진시켜놨다 해도 타 스포츠에 비해 객석 수가 현저히 적으니 그리 임팩트 있는 일이 아니엇음 무엇보다 신체적 제약이 많은 스포츠다 보니 국제 경기에서 이렇다 할 성적이 나지 못해 관심도는 줄어들 수 밖에
 

올스타전 5년 연속 팬 투표 1위를 하는 정대만이라고 해도 스느스 팔로워 수는 9만 명이 채 되질 않았었음 100만이 훌쩍 넘어가는 타 스포츠의 인기 선수들과 비교하면 1/10도 안 되는 숫자... 그런 정대만을 겨우 한 달 만에 200만 팔로워를 가진 초대형 셀럽으로 만든 건 바로 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한 열애설 때문이었겠다

 

[단독] NBA 황태자 서태웅, 국내 프로농구 선수 정대만과의 은밀한 열애

 

정대만 휴대폰에 쌓인 수백개의 문자메시지에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을듯ㅋㅋㅋ 이런 대형 폭탄급 메시지를 받아본 게 처음일 뿐 아니라 내용들이 전부 [어떻게 된거냐] [진짜냐?] 심지어는 [축하한다] 따위의 알 수 없는 내용들이라 꿈을 꾸는 줄만 알았겠지 뺨을 꼬집어 본다는 건 다들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황당한 일을 겪으니 실제로 뺨을 꼬집어가며 꿈이 아닌지 확인하게 됐을듯
 

그러다 드디어 제 눈으로 보게 된 열애설... 인터넷에 접속하기 무섭게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제 이름과 어둡게 찍힌 사진 한 장 말도 안 되는 내용들 아래에 익숙한 스포츠 기자 이름부터 처음 들어보는 연예부 기자 이름까지 이 양반들 소설가 하셔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정대만은 현재 시즌오프 한 달 째. 아직 팀 소집까진 30일 정도의 시간이 남아 침대에서 뒹굴거리기, 밥 먹기, 스킬 트레이닝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중에 말도 안 되는 폭탄급 기사가 터진거임...ㅋㅋ

대체 이 사진은 뭔데? 정대만 두 눈을 의심했지만 사진 속 남자는 분명히 저였음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 이때구나 하고 생각이 났을듯 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었음 바로 서태웅을 포함한 북산고 모임

 

열애설의 또다른 주인공 서태웅...정대만의 입을 빌리자면 얼음공주 같은 얼굴을 해서 하는 짓은 영 허당이 따로 없다는 미남. 그것도 고교 시절부터 팬클럽을 이끌고 다니는 초특급 미남이었음 게다가 농구에 대한 집념도 뛰어나 고교 졸업과 동시에 비행기를 타고 미국 땅으로 날아가더니 NCAA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고 농구 인기가 그리 높지 않은 이 땅에서도 서태웅의 기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와르르 쏟아져 나왔음 그렇게 이를 악물고 농구에만 매진하던 서태웅 드래프트에서도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들었겠지
 

미국으로 유학 가 있는 아들을 120퍼센트 지원해 줄 만큼 괜찮은 집안 배경과 농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구단, 그리고 서태웅 본인의 끈기와 오기 타고난 재능까지 미국 내 유명 프로구단 입단과 동시에 태웅이의 인생은 당연히 탄탄대로였음 현재는 스타팅 라인업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 팀의 주축 멤버로 활약하고 있고
 

배우 뺨치는 화려한 마스크에 터프한 플레이 스타일 빛나는 창창한 미래 몇백 억을 우습게 넘기는 연봉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 영앤리치 톨앤핸썸...서태웅이 신는 신발 마다 품귀 현상 파파라치에 찍힌 그저 그런 티셔츠 마저 유행템으로 만들어버리는 셀러브리티 등등 수식어가 끝도 없을듯 그렇다 보니 국내의 미미한 농구 인기와는 별개로 사람들은 서태웅이라는 브랜드에 열광했음
 

그런 서태웅이 오랜만에 귀국한것임 시즌을 마치고 미국 내 몇몇 인터뷰에만 응한 채 빠르게 돌아온 서태웅은 당연하게도 예능, 시사, 잡지, 광고... 너나 할 것 없이 오만 군데서 초대장이 날아왔지만 전부 거절함 그저 고교 농구부 시절을 함께한 일명 북산고 멤버들과의 만남에만 참석했음 이른 나이에 고향을 떠난 태웅이에겐 몇 남지 않은 지인들이기도 했고 국내 농구 얘기도 잔뜩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엉망진창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한 그 모임을 서태웅은 좋아했음 크게 티는 나지 않았지만


그날도 크게 다른 점은 없었음 아직 시즌을 다 마치지 못한 백호를 제외하고는 하나 둘 씩 약속 장소에 모여들었겠지 도시 외곽에 허름하지도 그렇다고 력셔리하지도 않은 작은 식당의 주방 왼 편으로 딱 하나 있는 안락한 룸에 둘러 앉아 음식을 시켜 먹고 오랜만에 모인 만큼 술잔도 부딪혔음
 

보통 각자의 사정으로 술을 많이 마시진 않았으나 그날은 고삐가 풀려서인지 그냥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일이 이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평소보다 더 많은 술병이 줄을 맞춰 룸으로 들어왔음 평소에 술을 즐기지 않는다 해도 평균 180이 넘는 거구의 남자들의 주량은 당연히 일반인보다 셌겠지 몸이 크면 간도 커다랗다는 건지 각자 서너병은 넘게 해치운 듯했음
 

그리고 하필이면 송태섭의 '쫄?' 한 마디에 반응한 정대만은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더니 아예 정신을 잃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채였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겠지 23시가 넘으니 가게 주인이 머쓱히 마감 시간을 알렸고 북산고 모임도 슬슬 자리를 정리하던 참이었음. 다들 자리를 이미 뜨거나 일어서고 남아있는 건 서태웅과 권준호. 준호는 안 그래도 심란한 얼굴을 하고 있는 태웅이의 얼굴에 대고 눈도 깜짝 안 한 채 '그럼 대만이를 잘 부탁해.' 하며 무거워 보이는 서류 가방을 들고 사라졌음
 

결국 마지막 남은 사람은 진상 짓을 하다 말고 코를 박고 잠든 정대만과 눈치 게임에 실패한 두 살 어린 후배인 서태웅. 가게 주인이 테이블을 행주로 닦으러 왔을 즈음 한숨과 함께 일어섰겠다 아니 정확히는 서태웅에 의해 정대만이 일으켜졌음
 

아무리 운동선수라 한들 자신과 거의 대등해 보이는 선배를 끌고 나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겠지 심지어 술에 취해 축축 늘어지기까지하니 힘은 두 배로 들고... 서태웅 간신히 선배를 가게에서 끌고 나왔지만 차마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줄 용기도 집 주소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도 없었음

 

태웅이 24시간 편의점 앞 플라스틱으로 된 빨간 의자에 선배 앉혀두고 생수 하나를 사 왔음 친근한 빨간 의자 맞은 편에 앉아 목을 축이며 선배가 술이 깨기를 기다렸지만 술이 깨긴 개뿔ㅋㅋ 제집인 줄 아는지 흠냐흠냐... 입 맛까지 다시며 달콤한 잠에 빠진 정대만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음

 

"선배, 정신 좀 차려봐요. 주소라도 알려 주시던가요."

"으으응..."

 

전혀 일어날 기색이 없는 꼴에 태웅이가 하아... 하고 짧은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음 간신히 앉혀둔 정대만의 몸이 기우뚱 하고 기울었겠지 저대로 두면 엎어질 것 같아 먹던 생수를 내려놓고 기우는 선배를 붙잡아 다시 빨간 의자에 앉혀두는 서태웅 슬슬 지치기 시작함ㅋㅋㅋ 안 그래도 서먹한 사이인 정대만을 커버치고 있는 것도 시차 적응이 아직이라 잠을 일곱 시간 밖에 못 잤다는 것도 사유에 포함됐음. 누군가가 선배를 챙겨야 한다면 차라리 제가 하는 쪽이 낫다곤 생각했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겠지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했음 호텔에 던지든, 숙소로 데려가든, 아니면 이대로 길바닥에 두고 가든. 그게 뭐가 됐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려야 하니 여적 자고 있는 선배를 흔들어 깨워봤는데 반응이 없음ㅋㅋ 이번엔 작은 얼굴을 양손에 쥐고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툭툭 쳐봄. '하지마아..' 라는 말이 술에 꼬부라졌는지 발음이 샜음 뭐라는지 잘 들리지 않자 '선배, 뭐라고요?' 하며 고개를 가깝게 붙였을 뿐인데

바로 그 장면이 기자라고 쓰고 파파라치라 읽는 사람에게 그대로 찰칵
 

그 사진이 이틀 후 [단독] NBA 황태자 서태웅, 국내 프로농구 선수 정대만과의 은밀한 열애 라는 얼토당토않은 제목과 함께 증거 사진으로 실리게 됐던것임


쏟아지는 건 문자나 메신저 뿐만이 아니었음 그냥 팀원들과 시시껄렁한 사진을 추억 삼아 올려두는 곳이자 작게나마 팬들이랑 소통하는 창구로 만들어진 정대만의 SNS의 알람 팝업도 몇 백개가 쌓였음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러가며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들어간 인별그램은 아주 난리가 났음ㅋㅋㅋ 둘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고 갑자기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도 있었고 더럽다는 등의 악플도 형 나한테도 한번만 대줘 같은 댓글까지...

정대만 다급하게 댓글 기능부터 막았겠지 아니, 서태웅이랑 연애설 난 것도 황당한데 뭐가 어쩌고 저째? 씨발 씨발 욕을 내뱉으며 설정을 바꾸고 프로필 화면으로 나오니 어? 고작 9만명이었던 팔로워가 짧은 사이 20만? 제 눈을 의심한 정대만이었을듯


황당함보다 앞선 것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그냥 우스갯소리로 넘어갈 일이 아니었음 서태웅의 영향력은 정대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했음 겨우 몇 분 만에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정대만 얼굴 새하얗게 질렸겠지 
 

몇 백명의 관중 앞에서 매일매일을 긴장된 순간으로 사는 운동선수 정대만일지라도 농구를 빼면 평범한 일반인일 뿐이었음 그러니 농구와는 전혀 관련 없는 관심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건 매우 큰 두려움과 부담을 줬겠다 제 손놀림 하나 말 한마디가 몇만 명, 아니 몇십만명에게 영향력을 끼친다니.

정대만의 구단 역시 난리가 났음 국내 농구판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가 악질 까판 기사도 아니고, 여자와의 스캔들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게이 스캔들이라니. 한 번도 이런 문제로 속을 썩인 적이 없던 정대만이라 기사 내용이 황당하기만 했음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는데 게이 스캔들? 그것도 이름만 들으면 다 안다는 NBA 리거 서태웅이랑? 이걸 믿어 말아 하고 골머리를 썩고 있던 구단에 먼저 전화를 걸어온 건 정대만이었음

 

-저 아니에요.

"그래, 아니겠지. 오보라는 거지?"

-완전요.

 

방금까지의 약간의 의심이 미안할 만큼 완강한 부정이었음 오른손으로 마우스 휠을 내리다 말고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안심한 구단 매니저가 이젠 마우스에서 손을 뗐음 어쩌다 이런 기사가 터졌는진 모르겠지만 요상한 각도에서 찍힌 사진 한 장으로 이런 엄청난 소설을 만들어 내다니. 이 모든 일이 서태웅의 잘남과 서태웅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만든 억측이겠지. 구단은 오히려 정대만을 위로하며 넘어갔음 

그러나 그런 호의는 구단 소속 선수이자 구단 내 최고의 실력과 인기를 누리는 정대만에게만 유효했겠다...정대만의 구단은 이런 쓸데없는 소설을 쓴 베스트셀러와 말을 옮기며 루머를 생산하는 몇몇 인간들에게 고소라도 먹여줄 생각으로 반박 기사를 내줬음

 

서태웅-정대만 열애? 허위 사실, 정대만 "그저 좋은 선후배 관계."


대중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원래 같은 고등학교 출신으로 자주 만나던 사이에 무슨 연애설이냐며 새로운 여론을 형성했음 처음부터 두 사람의 연애설을 부정하던 무리는 제가 무슨 게임에서 이긴 마냥 기세등등한 댓글들을 쏟아냈겠지 정대만 역시 이 얼토당토않은 날벼락이 잠잠해지길 바라며 놀란 마음을 잠재웠음
 

하지만 정말 문제는 따로 있었음..ㅋㅋㅋㅋㅋ 연애설 기사가 터진 지 8시간, 반박 기사가 터진 지 3시간 만에 새롭게 올라온 속보

 

[서태웅-정대만] 정대만과의 열애 인정한 NBA 리거, "서로 알아가는 단계..."

 

씨발, 씨발 서태웅! 
 

어느 정도 수습이 됐다는 구단의 소식을 들으며 냉장고에서 참외 하나를 꺼내들어 열심히 칼질을 하고 있던 정대만... 끈적한 제 손을 대신하여 걸려 온 전화를 스피커 폰으로 받는데. 후배 놈 하나가 깔깔 거리며 웃는 목소리에 "야. 나도 엄청 황당해. 너 그만 좀 쪼개라니까." 하고 무안을 주니 상대방이 잠시 말이 없다 서운하다는 투로 투덜거림
 

-뭐야 정대만. 태웅이가 이미 연애 인정하고 기사까지 낸 마당에 끝까지 모르는 척은
 

아작 하고 냉장고에서 잘 숙성된 차가운 참외를 한 입 시원하게 깨물어 먹던 정대만 그대로 내뱉을 뻔한 걸 간신히 집어삼켰겠지ㅋㅋㅋ  뭐? 벌떡 일어나 되물었음 누가 얼음 가득한 냉수를 머리에 쏟아부은 느낌이었음 머리가 쭈뼛 하고 일어서고 순간적으로 어버버 말이 다 꼬여서 나옴 

"무, 무슨 개소리야?" 하니 투덜거리던 후배가 "엥?" 하고 멍청한 소리를 냄 이게 무슨 바보들의 대화인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무슨 헛소린가 알아보기 위해 "야, 일단 끊어봐." 하고 후배의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은 정대만이 다급하게 인터넷에 접속했음 후배 말이 부디 거짓말이었길 빌었는데...

제 반박 기사는 어디 가고...뭐?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가? 이런 씨발. 씨발, 씨발 서태웅! 정대만이 씩씩거리는 동안 남의 연애 참 좋아하는 대중들은 또다시 난리가 났음ㅋㅋㅋ
 

서태웅만 불쌍하네, 아직 말을 안 맞춘 듯, 일단 사귀긴 한다는 거잖아. 정대만이 읽던 글 아래엔 댓글이 만선이었음. 이제 제 이름을 치면 불꽃 슈터 정대만 등의 농구 관련 기사는 2페이지로 꺼진지 오래고 그저 서태웅과의 기삿거리만 줄줄이 엮여 나왔음 오늘 하루 이 나라에선 저와 서태웅 얘기가 저녁 반찬과 술안주로 나올 것이 분명했음 아주 재미들 나셨다. 정대만 그대로 스캔들의 또다른 주인공을 만나러 집을 나섰음


쾅쾅쾅! 벨도 아니고 문을 요란하게 두들기는 소리에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서태웅이 깜짝 놀라 문 앞에 섰겠지 여길 찾아올 사람은 당연히... 

"서태웅 문 열어!"

정대만 밖에 없었음. 국내에 있는 동안 장기 투숙할 호텔을 알고 있는 건 가족, 에이전트, 그리고 정대만 뿐이었으니까. 그것도 알려준 건 아니고 술 처먹고 하룻밤 보낸 후 직접 걸어 나갔으니 모를 리 없었을 뿐

"어서 오세요."
 

서태웅이 문을 열자 예상처럼 정대만이 씩씩거리며 서 있었음 팀 로고가 박힌 하얀 티셔츠와 평범한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 집에 있다 막 튀어나왔는지 평범한 복장이었음 비교적 별거 없는 차림처럼 보여도 깔끔하게 세탁되어 있는 흰 티셔츠는 얼룩 하나 없고 세탁 세제의 잔향과 잘 마른 햇빛 냄새도 났겠지 이 무더위에 집을 굴러다니면서도 깔끔함을 유지하는 남자는 흔해 보여도 사실 그렇게 찾기 쉽지 않았음 

남자들 무리에서 오랫동안 생활해온 서태웅도 그런건 진작 알고 있었음 눈앞에 서 있는 2살 연상의 정대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서태웅 잠시 옛날의 감상에 빠졌다가 입을 뗐을듯

"좀 늦었네요."
 

열애설이 터지면 부리나케 쫓아올 줄 알았는데 침착하게 집구석에 앉아 정정 보도도 내고. 서태웅은 정대만의 의외의 모습에 조금 놀란 눈치였음 예전이랑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앞에 있는 선배가 어른이 되기는 했나봄

"너 어쩌자고 그런 기사를 내?"
 

들어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태웅이 어깨를 밀치며 안으로 밀고 들어온 정대만... 화가 난 듯 했음 평소처럼 장난을 치지도 않고, 웃지도 않고, 태웅아 하고 다정하게 부르지도 않고. 제법 싸늘하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물어왔음 서태웅이 입을 열기도 전에

"됐으니까 정정기사 내."
 

하며 한 마디를 더 거들겠지 이번엔 타이밍을 놓칠 새라 말이 끝나게 무섭게 서태웅이 고개를 저었음
 

싫어요. 

뭐? 

싫다고요. 
 

단호한 말투에 정대만의 입이 벌어짐 얘가, 얘가 지금 뭐래냐? 황당한 대답이었음 연애는 커녕 2년 만에, 그것도 고교 모임에서 잠깐 본 사이면서 대문짝만하게 연애설을 내놓고 제가 더 당당한 얼굴을 한다는게...그마저도 정정기사 내랬더니 싫단다. 황당함도 잠시 정대만 단번에 미간 사이를 좁히고 날카롭게 한쪽 눈을 치켜들고 묻겠지


"뭐 하자는 거야 서태웅."

"저희 사귄 거 맞잖아요."

"무슨..."

"저희 사귀었잖아요. 선배랑 저랑, 2년이나."

 

너는 무슨, 너는... 10년을 꽉 채운 옛날 얘길 여기서 하냐. 
 

가물가물 띄엄띄엄 생각나는 기억의 조각을 추억 속으로 방치 시켜둔 지가 언젠데...이제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만날만한 사이가 됐는데. 마주쳐도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안녕, 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할 수 있는 사이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헤어짐과 동시에 애틋함도, 추억도 곱씹지 말라는 듯 냉랭하게 굴더니 이제 와서 전남친 노릇을 하려고 드는 두 살 후배 놈한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정대만은 말 문이 턱 막힘 

 

"태웅아, 우리 헤어진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릴 하는거야?"

"네. 그러니까 이제 다시 만나요. 서로 알아가는 단계."

 

속보로 올라왔던 기사 제목을 읊는 목소리와 동시에 뻔뻔한 시선이 다가옴. 그랬구나, 중의적인 표현이었구나. 그래 네 큰 뜻을 이 선배가 이제야 알았다. 서태웅이 이렇게 막무가내인 놈이었나?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아 정대만은 더 말을 얹지 않았음

 

보통의 연인이 그렇듯 성격 차이나 사소한 싸움 등의 문제로 헤어진 게 아니었음 그랬으면 오히려 속이라도 시원했겠지. 서태웅의 보통의 사람이 아니듯 그는 보통의 이별을 택하지 않았음 서태웅 열 아홉 번째 생일을 보내기 무섭게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냈었지 태웅이 생일이 1월 1일이니 새해를 맞이하고 처음 듣는 소식이 연인의 유학인 셈이었음 뭐 여기까진 정대만도 미리 알고 있었던 내용이라 눈물을 머금고 잘 다녀오라 마중까지 해주었음

그렇게 서태웅...미국으로 슝 떠나버리더니 그대로 한 달을 잠수. 그게 잠수 이별이라는 것도 몰랐던 순진해 빠진 정대만은 태웅이가 걱정돼서 제대로 된 일상생활도 누리지 못했음 정대만 태웅이네 부모님으로부터 받아든 연락처로 몇 번이고 전화를 넣고 심지어 태웅이가 입학한 미국 학교에까지 전화를 걸었음 안되는 영어로 떠듬떠듬. 그게 얼마나 미련하고 구질구질한 짓이었는지 자신의 수많은 흑역사 중 아직도 top 3로 꼽히는 일화로 기억하고 있던 정대만이었을듯
 

-서태웅, 그 학교에서 농구를 하는 학생인데 그에게 전해주세요. 연락해 달라고. 내 이름은 대만 정 입니다.
 

그제야 걸려 온 전화 한 통. 학교 일이 바쁘니 헤어지자는 담백한 목소리. 자존심 강한 정대만이었지만 비싼 자존심은 잠시 내려두고 왜 그러냐며 이유도 물었음 서태웅은 심플하게 답했음 바쁘고 힘들다. 그래서 붙잡아도 보았음 반대쪽 수화기에서 죄송해요 선배. 하는 태웅이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오고...아, 끝났구나. 정대만 단념하고 전화를 끊었었겟지 슬펐지만 원래 연애라는 건 한 쪽에서 끈이 툭 떨어지면 더 이어지기 힘든 법이었음 그래서 고등학교 때 시작했던 첫사랑은 깔끔하게 지우고 살고 있었는데


그래서 다시 지금, 호텔. 다시 만나자고 뻔뻔하게 떠들고 있는 후배 놈한테 옛날이야기는 자존심 상 구태여 보태지 않았음
 

아마 이것도 비슷하게 10년이 훌쩍 넘은 기억일 것임 제 친구였던, 그리고 지금도 친구인 권준호가 싸늘한 얼굴을 하고 말한 적이 있었음 '철 좀 들어라. 정대만.' 그땐 그게 죽도록 싫었음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권준호의 말이 백번 이해가 되었겠지 얼마나 한심했으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지금 그 말을 저 놈한테 돌려주려 해. 표정까지 똑같이 해서.
 

"철 좀 들어라. 서태웅."
 

무표정하던 서태웅의 표정이 드디어 일그러짐


선배 그게 아니에요 


태웅대만

[Code: c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