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4227
2025.06.15 05:54



bgsd  어나더  3나더  4나더  5나더  6나더  7나더   8나더   9나더   10나더  11나더  12나더     




케이는 한참 가만히 안겨있다가 머쓱해졌는지 스즈키를 심술궂게 밀어냈다. 세수를 하고 올 셈인지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가는 케이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놀다가 벽에 머리를 박고는 집사에게 성질을 부리는 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던 스즈키는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퍼석해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저씨와 팀원들의 죽음이 참혹했을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곳에 함께 갔다가 혼자 돌아온 케이가 얼마나 끔찍하고 괴로운 마음으로 살아왔을지도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케이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는 스즈키가 짐작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정도였다. 죽어가는 그 와중에도 케이에게 스즈키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던 아저씨를 떠올리며 스즈키는 뜨거워지는 눈가를 눌렀다. 다시는 보지 못할 그 사람이 스즈키의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스즈키를 아끼고 걱정했는지 다시 깨닫자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동시에 또 무너져 내렸다. 케이가 다시 나오는 소리를 듣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자, 케이가 물기로 촉촉해졌지만 여전히 눈두덩과 코가 빨간 얼굴로 돌아와서 스즈키를 흘긋 바라봤다. 

"일단 잠깐 잘까?"

스즈키는 아직도 마음이 진탕이어서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케이의 마음이 더 허물어졌을 테니 정신차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일어서자 케이는 먼저 2층으로 향했다. 이 집은 처음 들어갔던 2층 집과 비슷한 구조여서 1층에는 거실과 부엌, 욕실과 화장실 그리고 방 1개가 있었고 2층에는 욕실과 화장실, 방 3개가 있었다. 첫 번째 집에서 케이가 불을 켜고 다닐 때 뒤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서재처럼 꾸며진 방 하나 외에는 모두 침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케이는 혼자 살고 사교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타입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침실이 많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케이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서 스즈키에게 빈 침실 하나를 내어주려나 했지만. 

케이는 킹 사이즈로 보이는 넓은 침대가 있는 침실로 들어가면서 침실에 붙어 있는 작은 화장실을 가리켰다. 

"선반에 새 칫솔 있어."

스즈키는 원래 향이 강한 치약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화장실에 있는 치약을 보자 왜 세수를 하고 온 케이에게서 레몬향이 났는지 알 수 있었다. 케이와 스즈키는 호텔의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왔기 때문에 이미 둘이 같은 향을 풍기고 있었고, 케이가 매번 볼일만 보고 나면 스즈키를 버리고 쌩하게 가 버릴 때도 스즈키와 같은 향을 풍기는 게 기뻤었는데. 케이의 집에서 케이와 같은 치약을 쓰고 있으니 진탕이 됐던 마음이 어느새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나 너무 단순한 거 아닌가. 

잠시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 밀려왔지만, 케이에게서 은은하게 흘러나온던 레몬향이 퍼지는 만큼 기분이 상큼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성인 두 명이 뒹굴어도 될 만큼 넓은 침대라 각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면 편히 잘 수 있는 침대라는 게 뻔히 보이는데. 베개 두 개를 붙여놓고 침대 가운데에 가까운 곳에 누워서 새침하게 눈을 감고 자는 척하고 있는 케이를 보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스즈키가 모르는 척 옆으로 가서 케이 옆에 딱 붙어 누운 다음 팔을 뻗자 케이는 여전히 '자는 척'을 유지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스즈키의 팔 위로 머리를 옮겼다. 

스즈키는 그동안 케이와 호텔을 드나든 밤이 많고도 많았지만 케이는 늘 볼일만 보면 바로 가 버렸기 때문에 둘이 한 침대에서 잠든 적은 없었다. 늘 쌩하게 가 버리기 바쁘던 사람을 품에 안고 잠을 청하고 있으니 절로 잠이 솔솔 올 법도 하건만. 스즈키가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예쁜 사람을 품에 안고도 잠들지 못한 건 스즈키의 품에서 눈을 감고 있는 예쁘고 아까운 사람이 잠에 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PTSD를 앓는 사람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건 흔한 일이다. 그의 아저씨가 어떻게 눈을 감았는지 몰랐던 스즈키도 아저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곤 했으니, 그 지옥에서 살아온 케이는 어련했을까. 그러나 케이와 같은 욕실에서 씻고 나와서 같은 샴푸향과 바디워시향을 풍기고, 케이가 빨아놓아서 케이의 잠옷과 같은 섬유유연제 향을 풍기는 잠옷을 입고, 케이와 같은 치약향을 풍기는 스즈키와 같은 침대에 누워 있어서 불면의 밤이 그리 괴롭지는 않은지 색색 내쉬는 케이의 숨소리는 안정적이었다. 

불면의 밤이 너무 익숙해져서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맞이하는 데 너무 담담해진 게 아닐까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해파리 먹을 수 있어요?"

혹시 조금이라도 졸리다면 잠을 깨울 생각은 없었으므로 작게 묻자, 역시 잠들지 못하고 있었는지 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내일 같이 장 보러 갈래요?"
"음..."
"이 근처에 마트 있어요?"
"있어."
"가 본 적 있어요?"
"..."

역시. 당연히 주변 환경은 꼼꼼히 확인했겠지만 장 보러는 안 다닐 줄 알았다. 펜트리에 쌓여 있는 즉석식품은 전부 온라인 주문인가. 

"나 카레도 잘 만들어요."
"...응."
"쫄깃하게 버섯이랑 고기 넣어줄게요."
"...그래."
"해파리냉채도 잘해요. 코가 찡해질 정도로 겨자 많이 넣어줄게요. 새콤하고 쫄깃하게."
"... 응."

그렇게 스즈키 비장의 요리를 몇 가지나 자랑하는 동안 어깨에 닿는 케이의 호흡이 뜨거워졌다. 쫄깃쫄깃하고 아삭아삭한 식감, 강한 향, 맵고 신 맛, 차갑거나 뜨거운 온도... 헬폭스를 없애버리고 싶어하는 개자식들이 몇 번이나 위험한 함정에 빠뜨려도 무사히 빠져나온 사람답게 영리한 케이는 스즈키가 미각을 잃은 케이를 위해서 뭘 해 주고 싶어하는지 깨달아 버려서, 한동안 뜨거운 숨을 내쉬었지만 곧 심통맞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떠들고 잠이나 자."

그 목소리가 조금 젖어 있는 건 모르는 척했다. 





집에 들어왔을 때처럼 두근두근하며 보안이 철저한 지하 통로를 통과해서 첫 번째 집으로 갔다가 나왔을 때 집 앞은 비어 있었고 마트까지 가는 길에도 따라붙는 꼬리는 없었다.

스즈키가 해파리를 비롯한 각종 해산물과 겨자, 고추기름, 매운맛이 나는 각종 외국소스와 고기, 버섯 같은 것들을 쓸어담는 동안 케이는 내내 조용히 따라다니기만 했다. 그러나 스즈키가 지난밤 말했던 카레와 해파리냉채, 매콤한 해산물볶음 등의 요리 재료를 다 산 걸 보고는 계산대로 향하는 스즈키를 붙잡았다.

"너 먹고 싶은 요리 재료나 사. 원래-"

'어차피 맛도 못 느끼니까' 라는 말 같은 거나 할 것 같아서 냅다 입을 맞췄더니 눈이 똥그래졌다. 그리고 예상했던 앞발, 아니 주먹이 날아왔다. 

"미쳤어?"

하지만 스즈키도 사고를 치기 전에 주변을 확인했다. 평일 낮이라 이용객이 적어서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대형마트인 만큼 CCTV야 있겠지만 무슨 사고나 사건이 생기지 않는 이상 이 큰 마트에서 수시로 CCTV를 확인해 볼 것도 아니고. 

"아무도 못 봤어요."

케이는 어쩌면 복수를 마치고 모든 걸 끝내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6년 전 케이의 생일에 있었던 그 끔찍한 이야기를 들어서가 아니었다. 예전부터 케이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살아남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케이를 사랑하고 케이가 사랑했던 이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만 알아내면 자기 삶도 끝맺으려 하는 게 아닐까 싶었던 날들이. 그리고 케이에게서 그들을 앗아간 이들의 복수를 마치고 나면 모든 걸 놓아버리는 게 아닐까 싶었던 밤들이 많고도 많았으니. 

그런 케이에게, 잠을 잃고 미각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많고 많은 것들을 잃었어도 다시 먹는 즐거움을,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려는 스즈키의 시도가 불편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스즈키는 결코 케이가 모든 걸 밝히고 모든 걸 마무리한 뒤에 마음편하게 훌훌 떠나게 할 수 없으니 어쩔 것인가.

내가 당신을 쉽게 보내줄 줄 알고?

그때였다. 

"너 먹고 싶은 것도 하라고."
"나는-"
"원래 한쪽으로만 치우친 관계는 오래 못 간대... 모르냐?"

더 잘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날의 기억을 안고서는 도저히 잘 살아갈 수가 없어서, 같이 잘 살아보려고 하는 스즈키의 노력과 마음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러는 건 줄 알았는데. 한쪽이 더 정성을 쏟아서 기울어진 관계는 오래 못 간다는 말을 들어서 걱정했던 건가. 

우리 관계가 오래 가지 못하고 쉽게 끊어질까 봐 두려웠던 건가.

그런 것도 모르냐고 새침하게 쏘아붙이고는 귀가 빨개져서 괜히 진열대의 조미료를 들었다놨다 하는 케이가 너무 예쁜 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근심과 후회, 절망, 슬픔 같은 것들로 마음이 꽉 차 있는데도 우리가 오래 가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는 사람이 예쁘지 않으면 누가 예쁠까. 

그러니까. 

"괜찮아요. 케이 맛있는 거 먹이고, 난 케이 먹을 거니까."

비록 귓가에 아주 작게 속삭이긴 했지만 공공장소에서 하기에 부적절한 말을 해 버린 건 케이 탓... 아닐까?





저녁에 스즈키가 만든 회심의 해파리냉채와 쫄깃한 돼지고기를 곁들인 요리는 다행히 케이의 마음에 든 듯했다.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는 않았겠지만 케이는 쫄깃한 해파리와 돼지고기를 꼭꼭 씹어먹었고 겨자의 톡 쏘는 느낌이 올 때마다 코를 찡긋하는 모습도 귀여웠다. 

그리고 차를 마시면서 당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어제 지령실에서 너랑 싸웠던 사람."
"네."
"이글 목소리와 똑같았어."
"이글이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날 우리가 폐광에 들어갔을 때 지령실에 있던 요원의 콜싸인이 이글이었어."
"... 목소리가 똑같았다고요? 그날 작전 중에 목소리 변조가 풀렸었어요?"

케이는 스즈키가 장을 보면서 사 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저었다. 

"몰랐어? 그늘 우리 작전 전까지는 지령요원이 목소리 변조를 안 했어."
"안 했다고요?"
"그때 그 사건으로 우리 팀이 전멸했기 때문에 책임 소재로 조직이 한 번 뒤집힌 다음에 지령요원들의 목소리를 변조하기로 한 거야. 지령실의 수작이었어. 또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를 바란 거겠지."
"... 그 사람이 그날 지령을 내린 사람이라고요?"
"맞아. 그 목소리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으니까. 드디어 찾았네. 그 자식. 그놈 누구야?"

지령팀장이 그날 지령실에 있던 놈이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요원놉맟
[Code: ca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