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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6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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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마친 후 커피를 끓여서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한밤중에 마시는 커피는 독약이지만 어차피 이야기할 것들이 많았다. 스즈키는 갑작스럽게 마치다의, 아니 헬폭스의 작전에 지령요원이 투입돼야 할 때 1순위로 들어가기 위해서 거의 항상 대기하고 있긴 했지만 원래라면 맡은 작전이 없을 때는 출근하지 않아도 됐고, 마치다 역시 작전이 들어오지 않으면 출퇴근은 자유라 두 사람 다 당장 내일 출근할 일이 없기도 했으니. 

"프랑스인이라는 건 사실이에요?"
"응."
"일본에서 태어난 건 맞죠?"
"응."
"그런데 어쩌다가 프랑스인이 된 거예요?"
"외인부대 들어갔어."
"프랑스 외인부대요?"
"응."
"언제? 왜요?"

외인부대라고 하면 군대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낭만적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군대는 군대다. 게다가 전투력이 뛰어난 부대는 그만큼 군기도 셀 텐데. 실제로 프랑스 외인부대는 군기가 강하기로 유명하고 부대 내 가혹행위도 심해서 여러 차례 문제가 됐다고 들었다. 프랑스 외인부대의 가혹행위에 관련한 다큐도 있을 정도라고. 그런데 그런 곳을 갔다고?

"18살 때."

마치다는 입을 다물고 커피를 마셨지만 말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말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아서 스즈키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마치다의 손을 살짝 쥐었다. 고생을 많이 한 삶을 증명하듯 군데군데 못이 박힌 단단하고 따뜻한 손이 살짝 긴장했다가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팀장님이 네가 있던 보육원 후원해 줬다고 했잖아. 많이 도와주셨다고."
"네."
"내가 어릴 때 있던 보육원도 도와주셨거든."
"진짜요?"
"응. 그런데 보육원이 폐쇄됐어.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생각하면 무슨 비리가 있었던 것 같긴 해. 관련 행정기관들이나 후원자들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그냥 야반도주해 버린 것 같더라고. 우리는 급하게 다른 보육원들로 분산수용됐는데 보육원을 운영하던 놈들이 우리 서류도 다 가지고 튀어서 서류가 분실되기도 하고 그랬어. 그때 팀장님이랑 연락이 끊겼고. 운이 나빠서 새로 옮겨간 곳은 시설도 관리도 엉망이었어. 팀장님 같은 좋은 후원자가 와서 돌봐주는 일도 없었고."
"..."
"그래서 못 버티고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보육원을 나와서 몰래 숙식제공 공장에 취업했는데."
"네."
"공장은 개판이고 공장장은 개자식이었거든. 맞기 싫어서 보육원에서 도망나왔는데 공장에서도 맞았고 숙식비를 뺀다면서 돈은 조금밖에 안 줬고. 물량을 무리하게 받아서 몇 달씩 밤샘작업하고 그럴 때도 많았는데 또 한동안 물량을 맞추느라고 한 달 동안 다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일했던 적이 있었어. 겨우 물량을 맞췄는데 공장장도 양심이란 게 있었는지 회식을 시켜줬거든. 뭐 허름한 싸구려 밥집이었는데. 그날 식당 TV에서 사막 어디서 작전을 수행하는 프랑스 외인부대가 나오는 영화를 해 주고 있더라고."
"네."
"원래 군대 같은 데 관심도 없었지만 사실 뭐 군대라고 그렇게 좋겠어? 군기라는 말이 괜히 있겠냐고. 외인부대에도 낭만 같은 게 없을 거라는 건 알았어. 하지만 그렇다고 당시 내 상황에 낭만이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었거든. 희망도 없었는데 낭만은 무슨. 어디를 가더라도 미래도 없는 여기보다는 낫겠다 싶었지. 그래서 쥐꼬리만한 월급이라도 한 푼도 안 쓰고 공장 형들이나 아저씨들 버리려는 옷 주워입고 버리려는 신발 주워 신으면서 모은 돈을 조금 헐어서 중고로 프랑스어 교재를 샀어. 기숙사 방장한테 맞아가면서 라디오에서 프랑스어 강의해 주는 시간에는 라디오 차지하고 앉아서 귀도 열었고."
"외인부대는 프랑스어 못해도 들어갈 수 있다고 들었었는데. 아니었나 봐요?"
"맞아. 프랑스어 못해도 돼. 그런데 프랑스어를 못하거나 체력이 안 되면 고생만 하고 성과는 쌓기 힘든 부대로 간다고 하더라고. 좀 알아보니까. 내 체급을 조금이라도 올려서 가야 모험을 하는 보람이 있지."
"그래서 18살 되자마자 프랑스로 넘어간 거예요?"
"응. 출국하려면 신원을 회복해야 하니까 행정기관에 갔더니 5년 전에 실종된 애가 돌아와서 그 사람들도 난리더라고. 내가 미성년자인 걸 알고도 고용한 게 걸려서 공장장은 벌금을 냈다고 하던데. 나는 그 공장장이 보복하러 오기 전에 프랑스로 튀었지."
"몇 년 있었어요, 거기서?"
"프랑스에 있었던 건 9년. 외인부대에 있었던 건 7년."
"7년이나 있었어요?"
"중사는 달고 나오고 싶어서."

마치다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커피잔을 내려놓은 후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스즈키를 바라봤다. 

"제대하고 프랑스 PMC에 들어갔는데 일본지사 발령받아서 들어오고 다시 팀장님을 만난 거야."

스즈키도 커피잔을 내려놓고 마치다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흘러내린 마치다의 머리를 넘겨주자, 마치다는 간지러운지 미간을 조금 찡그렸으나 스즈키의 손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이 사람이 스즈키가 누군지도 모르던 시절에, 한사코 자기 이름 한 자도 알려주지 않으려 하던 시절에 숱하게 밤을 보냈는데도 이제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 서로가 만나기를 고대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몸이나 섞자고 만나던 모텔 방이 아니라 헬폭스가, 케이가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꽁꽁 감추고 있던 자기의 공간에 스즈키를 넣어줬기 때문인지. 가슴이 너무 말랑말랑해서 이제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없는데도 괜히 얼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전에는 침대에서 실컷 뒹굴고 난 뒤라도 조금이라도 말랑하게 굴면 질색을 하면서 밀어내던 사람인가 싶게 스즈키한테 기댄 채로 얌전히 스즈키의 손길을 허락하는 게 너무 벅차서. 제대로 먹지 않고 다니기 때문인지 까칠한 얼굴이 안쓰러운데도 닿는 체온은 달콤하기만 해서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겨우 입을 뗐다. 

"길에서 아저씨를 마주친 거예요?"

케이는 여전히 스즈키의 손을 밀어내지 않고 스즈키의 어깨에 기댄 채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지사장은 우리보다 먼저 일본에 귀국해서 프런트회사 차리고 지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외인부대 출신은 아니고 프랑스 유학생 출신이어서 국적은 프랑스인이었거든 나처럼."
"네."
"그 사람이랑 팀장님이 약혼한 상태더라고."
"네???"

스즈키가 깜짝 놀라자 케이는 재미있었는지 피식 웃었으나 곧 미소가 사라졌다. 

"팀장님 결혼하셨어.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결혼식을 한 건 아니고 그냥 팀원들 모아서 같이 밥먹고 혼인신고만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몇 년을 알았는데 결혼했다는 말이나 해 주지 싶어서 서운했던 것도 잠깐이었다. 

"당시 지사장님 뱃속에 있던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못 보고 돌아가셨지만."

아저씨가 남기고 간 가족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마도 케이가 있었다는 보육원이 갑작스럽게 폐쇄된 후 새로 찾은 보육원에서 스즈키와 다른 아이들을 새롭게 돕기 시작했었을 아저씨는 그 후 항상 스즈키의 삶을 돌봐줬다. 스즈키가 처음 아저씨를 만났을 때 스즈키는 10살도 안 됐었는데 아저씨는 이미 20대 중반이상은 돼 보였었으니까 나이차를 생각하면 결혼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직업 때문에 다른 사람을 자신의 삶에 끌어들이는 것을 극히 경계했었다. 위험하게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래서 결혼을 했을 거라고는...

"위험한 일이라고 처음에는 나도 하지 못하게 했었어서... 결혼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래... 팀장님과 지사장님은 어릴 때부터 사귀었었는데 팀장님이 이 일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헤어지자고 했었나 봐. 위험하다고. 우리 지사장님 성질이 무시무시하신 분이라 그 일로 크게 화가 나서 프랑스로 유학을 가 버린 거고. 그 뒤로 10년 넘게 안 돌아왔다고 하더라고. 그러다 겨우 다시 만났으니... 이제 놓치면 영영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나 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이 두려워서 자신의 삶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내밀고 겨우 손을 잡았는데, 아이를 밴 배우자를 남겨놓고 무너지는 폐광 아래에서 마지막 숨을 뱉을 때 아저씨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케이도 분위기가 가라앉은 걸 느꼈는지 잠시 아무런 말이 없다가 여전히 케이의 손을 쥐고 있는 스즈키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다. 

"볼크."
"... 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콜사인에 놀라서 퍼뜩 고개를 들자, 케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스즈키를 바라봤다. 

"지령팀 직원 파일을 턴 적이 있거든."
"네?"

우리 조직 보안 수준이 이 정도로 엉망이었나?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지만 개인정보 관리는 철저히 한다. 가끔 어느 통신사, 어느 백화점, 어느 웹사이트에서 회원정보나 고객 정보가 해킹당하면 사회적으로 난리가 나지 않는가. 당연히 보안이 생명인 민간군사조직에서는 더더욱 요원들의 개인정보를 철저하게 관리한다. 심지어 같은 요원들조차 다른 요원들의 정보를 보지 못하는데?

"제가 스즈키 노부유키라는 거 몰랐다면서요."
"개인정보 파일을 턴 게 아니라 요원 평가서를 턴 거라. 본명이나 신상은 없었어."
"... 그것도 털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볼크만은 못해도 내가 아는 녀석도 실력이 그리 나쁘지 않거든."
"외부에서 우리 회사 시스템 해킹 시도가 있었다면서 갑자기 보안이 강화된 적이 있었는데 해킹 시도만 한 게 아니라 성공한 거였군요."

케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즈키의 손을 꾹꾹 눌렀다. 

"너도 우리 조직 해킹할 수 있잖아."

스즈키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케이가 붙잡고 있던 스즈키의 손등을 또 쿡쿡 찔렀다. 

"해킹해 봤지?"

스즈키는 결국 입을 열어서 사실을 털어놨다.

"보안 서류를 다 뚫지는 못했어요."
"우리도 다 못 뚤었어. 요원들 신상도 못 털었고, 작전 관련 서류도 하나도 못 봤어. 턴 건 요원들 평가자료뿐이야. 너는?"
"옛날 작전 몇 가지는 봤는데, 그때 그 작전 관련 자료들은 보안이 더 빡빡해서 못 뚫었어요."
"역시 네가 류세이보다 더 실력이 괜찮네."
"류세이요?"
"내가 아는 해커."
"전 동료라는 사람이요?"
"지하에 보안설비 설치한 거나 먼저 갔던 집에 도청장치 설치한 녀석은 다른 녀석인데, 뭐 아무튼 류세이도 전 동료인 건 맞아."
"다 프랑스 PMC 시절 동료들이에요?"
"어. 류세이는 외인부대에도 같이 있었고. 아무튼, 평가서 보니까 네 실력이 S+급으로 돼 있던데."
"그래요?"
"어, 평가항목은 전부 최우수 성적을 받았고, 성과 평가도 좋았는데, 네 직속상사가 안 좋은 평을 해 놨던데. 항목평가는 그 인간이 손댈 수 없는 부분인지 다 좋은데 그 자식이 주관적 평가만 안 좋게 해놨더라고. 비협조적이고 팀워크 정신이 없다고. 그 자식이 지령팀장이지?"
"네."

케이가 잠을 못 잘까 걱정이 됐지만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이야기가 케이의 마음을 시리게 만들 이야기일 게 뻔해서 스즈키는 잠깐 일어나서 물을 끓이고 홍차티백을 넣은 다음 우유를 붓고 끓였다. 홍차티백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게 무색하게 설탕은 없어서 당황했지만 케이가 미각을 상실한 게 벌써 몇 년일 거라는 점을 생각하면 의외로운 일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스즈키는 설탕을 못 넣은 따뜻한 밀크티를 머그에 담아서 케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어차피 따뜻하게 들고 있으면서 몸도 녹이고 속도 따뜻하게 마시라고 만든 거니까 맛이야 뭐. 케이는 느끼지도 못할 테고...

케이와 함께 작전에 나갔던 팀원들이 모두 사망한 5년 전, 아니 이제 6년 전 생일에 대해서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몰라서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있자,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신 케이가 망설이는 스즈키의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입을 열었다. 

"6년 전, 우리 작전의 목표는 폐광에 숨겨져 있는 우리 장비를 회수하고, 폐광을 비밀리에 점유하고 우리 장비에 손을 댄 자들을 확인하고 제거하는 거였어."

그렇게 6년 전, 케이가 팀원들을 모두 잃었던 날의 참혹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요원놉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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