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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0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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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것도 모름 ㅈㅇ
사실 H국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음. 서로 땅덩어리가 크니 쉬이 넘볼수 없었기에 경계를 하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왔지. 하지만 그건 선대 왕들 때의 이야기이고, 황권이 교체되고 나서부터 둘의 관계는 점점 밑바닥을 치겠지. 일단 로마황제가 땅따먹기를 시작하며 제국을 확장해가니 H국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음.
그들도 영토를 확장해갔지만 끝내 로마에게 집어 삼켜졌음. 두 국가의 모두 황제가 미쳤다는 것이지만 로마에겐 아카시우스라는 능력이 출중한 장군이 있었고 H국에는 그보다 나은 장군의 부재가 패망의 원인이었음.
“자네가 H국에 로마의 깃발을 세워 올리면… 자네에게 결혼을 허가 하도록하지.”
장군은 남들이 결혼을 서너번을 할 동안 단 한번도 하지 않았음. 물론,약혼자가 몇몇 있었지만 전부 무산됐지.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거든. 그리고 아카시우스는 그 이유를 알았음. 아카시우스의 가문은 명망있는 가문이었고 그의 악혼자들은 하나같이 난다긴다 하는 고위 귀족층이었으니깐. 황제는 제 입지가 위태로워질까봐 훼방을 둔 거지.
근데 갑자기 결혼이라니. 무슨 바람이 든 걸까.
“H국의 공주를 자네 아내로 맞이하는게 좋겠군.”
원로회가 술렁거렸음. 아카시우스에게 모욕적인 처사라며 이의를 제기하는 자도 있었지만 황제는 포도주를 머금으며 실실 웃을 뿐이었음.
“황제의 핏줄이라고, 마르쿠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결혼인가! 귀족보다 중요한게 황실의 핏줄이고 그 핏줄은 신의 사랑을 뜻하지!”
황제가 조소하듯 중얼거렸음. 아, 사랑이 아니겠는데? 멸한 핏줄이니 신에게 버림받은 거겠군. 하며 혼자 키득거리며 웃자 원로들은 아카시우스의 표정을 살폈음. 그는 황제의 제안을 수락했음. 원로들은 조용히 경악했고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 그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지.
H제국을 멸하면 문제가 클 거임. 로마가 감당할 수 있는 지배 범위를 넘어선 규모이고 로마에서 지내고 있는 H국 이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름. 하지만 황제는 공주에게 아카시우스의 부인 자리를 줌으로써 H국의 시민들을 보듬는거지.
아카시우스는 로마에서 지내는 모든 이들의 애정을 받고있는 명예로운 자니까. H국 황실의 마지막 핏줄을 살리고 장군의 아내로 삼는다. 자비로우면서도 체면도 살려주는 처사이지. H국 공주에게는. 아카시우스는 전혀 아니지만.
아카시우스는 황제가 오랜만에 머리를 썼다고 생각했음. 이게 썼다고 말 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하지만 공주와의 결혼을 아카시우스는 반란의 초석으로 삼았음.
이 결혼은 H국의 상처를 잠시나마 덮을수는 있지만 가릴 수는 없음. 문제가 터지는건 시간 문제였음. 아카시우스가 공주와의 결혼을 받아들인건 그가 벌일 반란의 첫 동맹을 맺은거라고 여겼음. 안타깝게도 방식은 일방적이지만.
H국을 향해 수도없는 날이 흘러갔고 아카시우스는 전쟁에 점차 지쳐갔음. 정확히는 그의 어린 병사들의 죽음이 지긋지긋 해졌지. 그들을 사지로 내모는 자신을 향한 혐오감이 가득 차오를 때도 있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칼을 휘둘고 전진하는 걸 멈추지 않았음. 자신의 방식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지않으면 모든것들이 빠르게 무너져 내릴게 뻔했으니깐.
피가 나이고 내가 피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을 때 아카시우스는 자신의 손으로 파멸의 길을 걷게한 제국의 공주를 마주했음. 그는 탄식을 내뱉었지. 생각보다 너무 어렸거든. 가냘펐지만 거침없이 칼날을 제 목에 갖다대는 무모한 행동에 다소 놀라기도 했다가 배짱에 흥미를 느끼기도 했겠다. 저 정도 배짱이면 제 계획 속에서 죽지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겠지.
이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기혐오를 느꼈겠지. 저 어리고 작은 여자애를 제 고국의 자유를 위해 사용되는 도구처럼 여기고 있으니깐. 본인은 이 여자아이의 나라와 국민들을 다 도살해버렸는데. 그래서 아카시우스는 공주의 부탁을 들어준거지. 제 미래 동맹이 되고 장차 H국을 이끌어갈 여인의 부탁인데 들어주는게 뭐 어렵겠음.
전장에서 돌아오는 병사들을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아카시우스는 예상했듯 그전과는 로마의 분위기가 달라진게 느껴졌음. 누군가가 병사들을 향해 "살인자들!" 이라고 외친 탓에 크고작은 소란이 벌어졌음. 하지만 그것도 그날 오후 아카시우스 장군과 H국 공주와의 혼인이 이뤄진다는 소식에 잠잠해지겠지만.
"또다시 지옥에서 돌아오셨군, 아카시우스 장군."
황제는 이제 로마를 이길 제국은 없다며 그의 앞에서 두 손을 들어올려 로마의 영광을 표하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나름 뿌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카시우스는 아니었음. 이 영광은 찰나인걸 알지. 황제는 황석에 앉아 아카시우스에게 물었음.
"H 황제가 꽁꽁 숨겨논 그 아이의 모습은 어떻던가?"
"그 아이는,"
"추녀는 아니었으면 좋겠네."
"...이제 갓 여인이 된 모습이었습니다."
"마음에 드나?"
황제는 아카시우스의 말을 듣고 낄낄 웃었음. 이 얼마나 우스운 관계냐면서. 자신의 모든걸 파괴한 사내를 사랑해야 될 여인이라니. 그 아이는 조국을 멸한 자에게 팔려갔으니 필히 죽은 제 부모도 외면할거라면서. 그러면서 그에게 몸조심 하라는 말도 하겠지.
"분노에 미친자는 목표가 명확해지지. 자다가 목에 칼이라도 들어오지 않게 투구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
"시도때도 없이 자네를 죽일 생각만 할 걸 그 여인은? 암살을 시도 할지도 몰라, 마르쿠스."
황제는 로마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지금을 더 흥미롭고 즐겁게 생각하는 것 같았음. 지옥을 준 남편과 지옥을 줄 아내라니. 이 얼마나 흥미로운 관계인가! 황제는 어여쁜 공주는 지금 만신창이일테니 상태가 호전되면 식을 올리자는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음.
칼 끝을 거침없이 제 목으로 휘둘렀던 행동을 보면 암살시도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카시우스는 일어나지 않을 일 따위에 걱정하지 않았음. 그는 저택으로 돌아갔고 지하실로 곧장 향했음. 그리고 그녀의 목숨값으로 데려온 시종을 쇠창살 뒤에 서서 바라보겠지. 두 손과 발이 사슬에 묶여있는 그가 어둠 속에서 말했음.
"...공주님 상태는 어떠십니까."
"자네보단 좋지."
남자는 침묵했음. 아카시우스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 했고 그가 한 행동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처사임. 아카시우스는 벽에 기댄 채 말했음. 그리 걱정이 된다면 공주의 상처가 다 아문 뒤 보여주겠다고. 그러자 사슬이 꿈틀거리며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들리겠다.
"아마도 그날은 공주와 나의 혼인식이 되겠군."
남자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왔음. 간신히 억누르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흘러나오고 있었겠다. 그는 창살을 붙잡으며 말했음. 내게 원하는게 무엇이냐고. 그 말을 들은 아카시우스는 공주가 울부짖으며 외쳤던 말을 떠올렸음. 이 아이가 죽으면 나도 죽겠다. 이 말이 조금은 헷갈리겠다. 연인을 위해 내뱉은 말인지 아니면 자신의 국민을 살리기 위해 내뱉은 말인지.
하지만 아카시우스는 그 둘이 연인관계여도 상관없다 생각했음. 무슨 관계였든간에 떨어뜨려 놓을 생각이니깐. 그래도 공주와의 약속은 지켜야했지.
"자네...싸울 줄은 아나?"
"이 창살만 없었다면 장군은 죽었을 것입니다."
아카시우스가 크게 웃자 지하실이 쩌렁쩌렁 울리겠지. 공주와 오랫동안 함께 붙어있었던 아이라는 걸 방금 내뱉은 말로 확인하게 됐겠지. 이 아이의 배짱을 그녀가 닮게 된 건지, 그녀의 배짱을 그가 배우게 된 건지. 그는 창살 앞으로 걸어가 말했음.
"난 자네 공주와 거래를 했네. 그리고 방금 자네의 거취를 정했지."
"........."
"멀리서라도 공주를 지켜보고 싶다면, 로마의 기사가 되게."
그가 억누른 분노를 표출하며 반발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는지 결국 수긍하고야 말겠지. 그도 아는 거임. 아카시우스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자 선의였다는 걸.
/
사실 아카시우스는 혼인식을 올리고 그렇게 곧장 허니 곁을 떠날 생각은 없었음.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었지. 그래도 그는 허니가 잘 버틸거라 생각했고 그렇게 해주길 바랐지. 그리고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허니를 마주했을 때 조금 놀랐겠다. 1년 새에 허니는 많이 성숙해졌고 심약해져 있었음. 보기좋게 그을려있던 피부는 창백했고 키는 좀 더 큰 듯 했지만 큰 만큼 체구는 더 작아진 듯 했음.
아,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단 약하군. 이라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자신을 향해 표독스럽게 웃으며 로마를 욕보이는 말을 크게 외치는 그녀의 태도에 금세 생각이 접히겠지. 시종이 떠나자 그는 대략 그녀가 자신이 없는 이곳에서 어떤식으로 생활했는지 눈치챌 수 있었음.
그녀가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면 반가워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제 시종의 근황을 묻고싶어 안절부절 할 줄은 생각 못했겠지. 아카시우스는 바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를 애태우고 싶다는 몹쓸 마음이 들었음.
"당신이 아끼는 그 아이 얘기는 식사 후에 해드겠습니다."
허니는 제 손길을 힘들어했음. 싫어도 어쩔 수 없었음. 제 탓에 이 저택에서의 허니 입지는 1년 정도 뒤로 밀려졌으니깐. 지체된 만큼 시종들의 신임을 얻어야 아카시우스가 그나마 마음 편히 움직일 수 있었기에 일부러 더 노골적인 스킨십을 해댔지. 그리고 아카시우스도 제 아내를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긴 했음. 그래서 허니의 손을 붙잡았을 때 꽤 놀랐지.
자신이 어루만졌던 여인들 손 중에서 가장 거칠었으니깐. 흉터도 있었고.
"...내 나라는 여자도 검술을 배웁니다."
이 말을 하면서 귀를 붉히는 허니의 태도에 아카시우스는 조용히 미소를 삼켰음. 자신은 대단하다 생각했는데 그녀는 제 손이 창피하다고 느낀 것에 미소가 지어진거겠지. 허니는 시종일관 티모시의 근황을 알고싶어했음. 하지만 아카시우스는 그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지. 자신이 로마의 파멸을 원하다는 것을. 자신의 대략적인 계획을 듣고 나서 허니는 놀란 기색을 숨길 수가 없어 저 멀리 떨어진 시종의 눈치까지 살폈지.
어리숙해. 뭐...이 나이라면 그럴만하지만.
본래 폭탄이 맨 처음 터질 때의 소음에 놀랄 뿐 그 뒤에 이어지는 소리에 점차 적응하고 무뎌지기 마련임. 그래서 그는 허니가 그녀의 시종 얘기를 들어도 자신이 처음했던 말에 비하면 반응이 적을 줄 알았지만 아니었어. 오히려 반응이 더 컸고 그게 아카시우스의 심기를 건드렸지.
안정을 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소식을 묻고 알려주자 애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 모습이 거슬렸음.
"나한테 약속했잖아요...약속 했잖아...같이 돌아오겠다고..."
제 위치와 신분을 망각하고 투정을 부리며 우는 그 모습에 아카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아픈 사람을 다그치기도 했지. 곧장 방에서 나와 후회하긴 했지만. 아카시우스는 허니의 눈물이 신경 쓰였음. 그리고 시종과의 관계도 의심이 됐지. 연인, 혹은 짝사랑?
"장군, 듣고 있소?"
"아, 죄송합니다. 회담 장소가 생각보다 고요하군요."
"피가 들끓는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이런 고요함이 어색할만도 하지. 이해한다네."
회담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지만 아카시우스는 묘하게 집중이 안 됐음. 그 원인을 특정할 수 없는게 답답했지. 뚜렷한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 한 채 회담은 흐지부지 끝났고 밖을 내다보니 어느덧 해는 저물고 별자리가 어두운 하늘 위로 수를 놓고 있었겠지.
"술 한 잔 하고 가겠는가?"
이 회담을 만든 의장에 친숙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아카시우스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음.
"아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침대에 반쯤 누운 채로 제 팔을 붙잡으며 눈물을 흘렸던 나의 어린 아내. 길게 늘어뜨린 채 땋여진 머리카락과 새하얀 드레스 위 어깨위에 꽃장식이 되어있는 숄을 걸치고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있을, 황제가 강제로 엮어준 나의 공주. 그냥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제 머릿속에 허니의 얼굴이 그려지는 순간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한 아카시우스는 정말로 빠르게 말에 올라타 저택으로 향했음.
시종들이 기쁜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아카시우스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에게 물었지.
"아내의 상태는 어떤가. 식사는 하였고?"
시종들은 살짝 놀란 눈치를 보였지만 빠르고 정확하게 허니의 상태를 그에게 설명해주었지. 아카시우스는 이제 허니는 자신이 보살피겠다는 말을 끝으로 계단을 타고 침실로 향했음.
/
침실로 향하니 시종 하나가 주전자와 찻잔이 담긴 트레이을 들고 나오고 있었음. 뭐냐고 묻자 의원이 처방한 약재를 우린 차라고 말하겠지. 차가 조금 식어 데워야 될 것 같아 덧붙여 설명하기도 하겠다. 아카시우스는 정말로 아프긴 한가보구나 생각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자 허니가 놀랐는지 대뜸 누구냐며 소리치겠지.
아카시우스가 모습을 보이자 그녀는 좀 당황했는지 금방 시선을 피했음. 눈은 여전히 부어있었겠다. 아마 자신이 떠나고 나서도 한참은 더 울었던 모양임. 그녀를 지나쳐 옷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자 밖에서 허니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리겠지. 왜 이 시간에 멋대로 찾아오냐, 여긴 내 방이다 본인 방으로 돌아가라. 대꾸를 안 해주니 결국 옷방으로 걸어들어오겠지.
"내 말은 전혀 듣고있지 않,"
"때마침 잘 됐군요. 등 아래 단추가 말썽입니다. 좀 도와주시겠어요?"
"시종을 부르겠습니다."
"그들도 휴식 시간이 필요할텐데요."
그녀는 결국 작은 숨을 내뱉으며 아카시우스 등 뒤로 섰음. 얇은 천 뒤로 단추를 만지며 꼬물거리는 손길이 느껴졌지. 그게 간지럽기도 하고 신경쓰여서 잘 안되냐고 묻자 그녀는 아무말이 없었음. 그래서 뒤를 살짝 돌아보자 단추가 실타래에 단단히 엉켜있는지 그걸 풀기 위해 잔뜩 집중한 표정으로 끙끙거리고 있는 모습에 아카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겠지.
"엉킨게 풀기 어렵다면 그냥 끊어버리셔도 됩니다."
이 말을 하기가 무섭게 허니의 손에서 우득, 소리가 들렸고 그의 어깨에 간신히 매달려있던 옷은 허니의 손 위로 툭 떨어지겠지. 손에 들린 옷감을 받기 위해 몸을 돌리자 허니는 흠칫 놀란 것도 모자라 손에 들려있던 옷을 품에 끌어안으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음. 그것도 얼굴이 잔뜩 빨개진 채로 말이야. 그녀는 대체 눈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겠는지 검은 눈동자는 정차없이 흔들리기만 했음.
아카시우스가 손을 뻗자 그녀는 어쩌자는 식의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간신히 올려다봤음.
"옷을 주셔야지요."
"아...!"
허니는 그의 품에 옷을 안겨주다시피 건네고는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음. 아카시우스가 옷을 편히 갈아입고 침실로 나오자 그녀는 방 한가운데에 불편한 표정으로 덩그러니 서 있었지. 그리고 때마침 시종이 다시 데운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음. 시종은 서로를 대치하듯 서 있는 허니와 아카시우스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살펴보다 아카시우스가 나가보라는 손짓을 보이자 조용히 트레이를 협탁 위에 두고 금방 사라지겠지.
"잠들기 전 차를 마시는게 좋겠군요."
"...전 괜찮습니다."
이 말을 하는데도 목소리 끝이 갈라져서 허니는 무안한 듯 길게 내려땋은 제 머리끝을 마지작거렸음. 그리고 소파에 앉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차를 따라 마시겠다. 뜨거운 김을 호호 불며 마시는 허니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카시우스가 물었음.
"많이 우셨나 봅니다. 눈밑이 여전히 붉은걸 보니."
허니는 대꾸하지 않았음. 하지만 분명히 그녀의 시종을 떠올리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지. 아카시우스는 미간을 좁혔음. 사실 그는 티모시를 데리고 오려고 했었음. 허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지만 남부의 반란이 꽤나 커서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그 자리를 지킬만한 믿음직스러운 기사가 있어야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사에 적합한 인물은 티모시였지.
"그 아이가 단순 시종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검술 실력이 탁월하더군요."
검술실력을 제외하고도 리더십이 좋았고 청중들을 이끄는 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었음. 그래서 아카시우스는 그가 단순 시종이었다기 보다 허니의 안위를 책임지는 호위기사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겠지. 허니는 아카시우스를 힐끗 쳐다보다 여전히 침묵을 유지했음. 허니가 차를 다시 따르기 위해 주전자에 손을 뻗자 그가 먼저 잡고 허니의 찻잔에 주정자 주둥이를 기울었음.
자신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차를 식히려는걸 까먹은 허니는 그만 입술을 데고 말았음. 아, 하며 작은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고 아카시우스가 그녀의 찻잔을 붙잡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겠지. 데인 부분이 아픈지 손을 갖다대는 허니였음.
아카시우스는 허니 옆으로 가 앉아 허니의 손을 붙잡았음. 그녀가 움찔거렸지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허니의 턱을 살짝 붙잡고 부어오른 입술 부근을 엄지 손가락으로 지긋이 누르며 살폈지.
"칠칠 맞으십니다."
"......."
"시종에게 약을 가져오라 할까요."
"...왜 약속을 어기셨죠?"
허니가 아카시우스의 손목을 붙잡았음. 제가 장군이 돌아오기만을 얼마나 기대했는지...아셨을텐데요. 허니의 낮은 목소리에 그는 천천히 허니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음.
"내가 아니라 그 아이를 기다린거겠지."
"........"
"자꾸 그 아이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니 부인에게 미안했던 마음이 점차 사라지는군요."
"제게 미안한 마음이 있긴 하십니까? 장군이 제게 사과조차 하지 않아 전혀 몰랐는데요."
"지아비를 두고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는 부인은 제게 미안한 마음이 드시긴 합니까?"
"...그게 지금 할 말이라고..."
"언제나 그대가 바라는대로 상황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탓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능력이 출중한 그 아이여야 하고."
"하지만,"
"만약 내가 그대와 했던 거래를 제대로 이행했다면 그 결과가 궁금합니다. 그 애를 당신 앞으로 데려왔으면 무엇을 하려고 했습니까?"
아카시우스는 오전에 그녀를 다그쳤던 것 처럼 압박하기 시작했음. 그 아이와 도망치려고 했습니까? 아니면 로마국에 있는 H국 이주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습니까? 당신은 그 나라의 공주이니 그대가 명령한다면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죠. 나의 아내가 되어 반역을 도모하고 내 명예를 실추하려 했습니까? 어느순간부터 허니는 자신이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게 아닌 그에게 자신의 손목이 꽉 붙잡힌 상태가 되었겠지.
점차 창백해지는 허니의 안색에 아카시우스는 아차, 싶었음. 자신이 너무 몰아세웠다고 생각해 손에 힘을 풀려고 했지만 허니가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뚝뚝 흘리겠지. 그리고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음.
"이 나라는...하나밖에 남지 않은 친우를 그리워하는 것도 죄입니까?"
허니는 붉어진 눈동자를 치켜뜨고 장군을 노려봤음.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그리고 그 표정은 금세 또 일그러지겠지. 옷자락을 꽉 쥐고있던 허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카시우스를 향해 언성을 조금 더 높이며 말했음. 그녀의 목소리가 거칠어 질수록 아카시우스는 조바심이 나겠지.
"그림자처럼 인격이 짓밟혀지며 사는 삶 따윈 그대는 전혀 모르겠지. 당신은 위대한 나라의 위대한 장군이니깐!"
허니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지만 허니가 그의 손을 거칠게 쳐냈음.
"그 애를 만나면 뭘 할지 궁금하다 하셨죠? 내가 원했던 건...."
허니가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고 몸이 휘청거리자 아카시우스는 재빨리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주었음. 카펫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그녀의 눈물길에 아카시우스는 측은지심이 들겠다.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조심스레 침대로 데려가 앉힌 뒤 목이 아픈 그녀를 위해 차를 가져다 주려고 했지만 허니가 그의 옷깃을 붙잡았음.
"난 티모시를 통해 내 존재 가치를 확인받고 싶었어요."
목의 통증이 고통스러운지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허니는 그를 놓아줄 생각은 없어보였음.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붙잡고 있는 이 아이가 안타까운 나머지 아카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겠지. 이번에도 저를 뿌리칠 줄 알았지만 허니는 의외로 가만히 안겨있었음. 그는 그녀의 등을 달래듯 쓰담아주며 아카시우스가 말했음.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그리고 사과도 하겠지.
"미안해요."
제 허리를 끌어안는 허니의 손길에 아카시우스는 뒤늦게 깨닫고 말겠다. 허니는 잘 지내고 있었던게 아니었고 고독함에 허덕이고 있었다는 걸. 허니를 이렇게 만든 것이 본인이라는 사실도.
/
아카시우스는 사실 사흘정도 머물고 떠날 예정이었음. 하지만 어제 제 품에 안겨 엉엉 울던 허니의 모습을 봐버린 이상 그녀를 두고 떠나기가 쉽지않은거지.
"왜 그리...빤히 보십니까."
함께 아침식사를 하는 와중에 허니가 물었고 아카시우스는 대꾸 없이 미소만 지었음. 허니는 슬쩍 제 눈가를 더듬거리며 매만지겠지. 퉁퉁 불어서 그런가? 하며 혼자 생각하다가 아카시우스가 식사를 다 끝맺고 식기를 내려놓으며 허니를 불렀겠지. 허니는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리고는 그를 쳐다봤음.
"저와 같이 남부 해안도시로 가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당분간 따뜻한 도시에서 머무는게 부인의 건강을 위해 좋을 것 같군요."
건강은 사실 핑계였고 주눅들어보이는 허니를 기운 차리게 도와주고싶어서 이런 말을 내뱉는 거겠지. 허니는 당연히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숙였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가 조심스레 웃고있다는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 저렇게도 좋을까.
"내일 출발하도록 하죠."
허니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음. 허니는 짐을 싸야겠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음. 그녀의 접시 위로는 음식이 가득했지. 아카시우스는 허니가 남긴 음식들을 쳐다보다 문득 자신이 내린 결정이 옳은 결정인지 생각하게 되겠지. 그래도 한 번쯤은 그녀에게 기쁨을 줘도 되지 않을까하며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겠지.
페드로너붕붕
약티모시너붕붕
암것도 모름 ㅈㅇ
사실 H국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음. 서로 땅덩어리가 크니 쉬이 넘볼수 없었기에 경계를 하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왔지. 하지만 그건 선대 왕들 때의 이야기이고, 황권이 교체되고 나서부터 둘의 관계는 점점 밑바닥을 치겠지. 일단 로마황제가 땅따먹기를 시작하며 제국을 확장해가니 H국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음.
그들도 영토를 확장해갔지만 끝내 로마에게 집어 삼켜졌음. 두 국가의 모두 황제가 미쳤다는 것이지만 로마에겐 아카시우스라는 능력이 출중한 장군이 있었고 H국에는 그보다 나은 장군의 부재가 패망의 원인이었음.
“자네가 H국에 로마의 깃발을 세워 올리면… 자네에게 결혼을 허가 하도록하지.”
장군은 남들이 결혼을 서너번을 할 동안 단 한번도 하지 않았음. 물론,약혼자가 몇몇 있었지만 전부 무산됐지.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거든. 그리고 아카시우스는 그 이유를 알았음. 아카시우스의 가문은 명망있는 가문이었고 그의 악혼자들은 하나같이 난다긴다 하는 고위 귀족층이었으니깐. 황제는 제 입지가 위태로워질까봐 훼방을 둔 거지.
근데 갑자기 결혼이라니. 무슨 바람이 든 걸까.
“H국의 공주를 자네 아내로 맞이하는게 좋겠군.”
원로회가 술렁거렸음. 아카시우스에게 모욕적인 처사라며 이의를 제기하는 자도 있었지만 황제는 포도주를 머금으며 실실 웃을 뿐이었음.
“황제의 핏줄이라고, 마르쿠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결혼인가! 귀족보다 중요한게 황실의 핏줄이고 그 핏줄은 신의 사랑을 뜻하지!”
황제가 조소하듯 중얼거렸음. 아, 사랑이 아니겠는데? 멸한 핏줄이니 신에게 버림받은 거겠군. 하며 혼자 키득거리며 웃자 원로들은 아카시우스의 표정을 살폈음. 그는 황제의 제안을 수락했음. 원로들은 조용히 경악했고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 그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지.
H제국을 멸하면 문제가 클 거임. 로마가 감당할 수 있는 지배 범위를 넘어선 규모이고 로마에서 지내고 있는 H국 이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름. 하지만 황제는 공주에게 아카시우스의 부인 자리를 줌으로써 H국의 시민들을 보듬는거지.
아카시우스는 로마에서 지내는 모든 이들의 애정을 받고있는 명예로운 자니까. H국 황실의 마지막 핏줄을 살리고 장군의 아내로 삼는다. 자비로우면서도 체면도 살려주는 처사이지. H국 공주에게는. 아카시우스는 전혀 아니지만.
아카시우스는 황제가 오랜만에 머리를 썼다고 생각했음. 이게 썼다고 말 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하지만 공주와의 결혼을 아카시우스는 반란의 초석으로 삼았음.
이 결혼은 H국의 상처를 잠시나마 덮을수는 있지만 가릴 수는 없음. 문제가 터지는건 시간 문제였음. 아카시우스가 공주와의 결혼을 받아들인건 그가 벌일 반란의 첫 동맹을 맺은거라고 여겼음. 안타깝게도 방식은 일방적이지만.
H국을 향해 수도없는 날이 흘러갔고 아카시우스는 전쟁에 점차 지쳐갔음. 정확히는 그의 어린 병사들의 죽음이 지긋지긋 해졌지. 그들을 사지로 내모는 자신을 향한 혐오감이 가득 차오를 때도 있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칼을 휘둘고 전진하는 걸 멈추지 않았음. 자신의 방식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지않으면 모든것들이 빠르게 무너져 내릴게 뻔했으니깐.
피가 나이고 내가 피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을 때 아카시우스는 자신의 손으로 파멸의 길을 걷게한 제국의 공주를 마주했음. 그는 탄식을 내뱉었지. 생각보다 너무 어렸거든. 가냘펐지만 거침없이 칼날을 제 목에 갖다대는 무모한 행동에 다소 놀라기도 했다가 배짱에 흥미를 느끼기도 했겠다. 저 정도 배짱이면 제 계획 속에서 죽지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겠지.
이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기혐오를 느꼈겠지. 저 어리고 작은 여자애를 제 고국의 자유를 위해 사용되는 도구처럼 여기고 있으니깐. 본인은 이 여자아이의 나라와 국민들을 다 도살해버렸는데. 그래서 아카시우스는 공주의 부탁을 들어준거지. 제 미래 동맹이 되고 장차 H국을 이끌어갈 여인의 부탁인데 들어주는게 뭐 어렵겠음.
전장에서 돌아오는 병사들을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아카시우스는 예상했듯 그전과는 로마의 분위기가 달라진게 느껴졌음. 누군가가 병사들을 향해 "살인자들!" 이라고 외친 탓에 크고작은 소란이 벌어졌음. 하지만 그것도 그날 오후 아카시우스 장군과 H국 공주와의 혼인이 이뤄진다는 소식에 잠잠해지겠지만.
"또다시 지옥에서 돌아오셨군, 아카시우스 장군."
황제는 이제 로마를 이길 제국은 없다며 그의 앞에서 두 손을 들어올려 로마의 영광을 표하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나름 뿌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카시우스는 아니었음. 이 영광은 찰나인걸 알지. 황제는 황석에 앉아 아카시우스에게 물었음.
"H 황제가 꽁꽁 숨겨논 그 아이의 모습은 어떻던가?"
"그 아이는,"
"추녀는 아니었으면 좋겠네."
"...이제 갓 여인이 된 모습이었습니다."
"마음에 드나?"
황제는 아카시우스의 말을 듣고 낄낄 웃었음. 이 얼마나 우스운 관계냐면서. 자신의 모든걸 파괴한 사내를 사랑해야 될 여인이라니. 그 아이는 조국을 멸한 자에게 팔려갔으니 필히 죽은 제 부모도 외면할거라면서. 그러면서 그에게 몸조심 하라는 말도 하겠지.
"분노에 미친자는 목표가 명확해지지. 자다가 목에 칼이라도 들어오지 않게 투구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
"시도때도 없이 자네를 죽일 생각만 할 걸 그 여인은? 암살을 시도 할지도 몰라, 마르쿠스."
황제는 로마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지금을 더 흥미롭고 즐겁게 생각하는 것 같았음. 지옥을 준 남편과 지옥을 줄 아내라니. 이 얼마나 흥미로운 관계인가! 황제는 어여쁜 공주는 지금 만신창이일테니 상태가 호전되면 식을 올리자는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음.
칼 끝을 거침없이 제 목으로 휘둘렀던 행동을 보면 암살시도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카시우스는 일어나지 않을 일 따위에 걱정하지 않았음. 그는 저택으로 돌아갔고 지하실로 곧장 향했음. 그리고 그녀의 목숨값으로 데려온 시종을 쇠창살 뒤에 서서 바라보겠지. 두 손과 발이 사슬에 묶여있는 그가 어둠 속에서 말했음.
"...공주님 상태는 어떠십니까."
"자네보단 좋지."
남자는 침묵했음. 아카시우스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 했고 그가 한 행동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처사임. 아카시우스는 벽에 기댄 채 말했음. 그리 걱정이 된다면 공주의 상처가 다 아문 뒤 보여주겠다고. 그러자 사슬이 꿈틀거리며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들리겠다.
"아마도 그날은 공주와 나의 혼인식이 되겠군."
남자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왔음. 간신히 억누르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흘러나오고 있었겠다. 그는 창살을 붙잡으며 말했음. 내게 원하는게 무엇이냐고. 그 말을 들은 아카시우스는 공주가 울부짖으며 외쳤던 말을 떠올렸음. 이 아이가 죽으면 나도 죽겠다. 이 말이 조금은 헷갈리겠다. 연인을 위해 내뱉은 말인지 아니면 자신의 국민을 살리기 위해 내뱉은 말인지.
하지만 아카시우스는 그 둘이 연인관계여도 상관없다 생각했음. 무슨 관계였든간에 떨어뜨려 놓을 생각이니깐. 그래도 공주와의 약속은 지켜야했지.
"자네...싸울 줄은 아나?"
"이 창살만 없었다면 장군은 죽었을 것입니다."
아카시우스가 크게 웃자 지하실이 쩌렁쩌렁 울리겠지. 공주와 오랫동안 함께 붙어있었던 아이라는 걸 방금 내뱉은 말로 확인하게 됐겠지. 이 아이의 배짱을 그녀가 닮게 된 건지, 그녀의 배짱을 그가 배우게 된 건지. 그는 창살 앞으로 걸어가 말했음.
"난 자네 공주와 거래를 했네. 그리고 방금 자네의 거취를 정했지."
"........."
"멀리서라도 공주를 지켜보고 싶다면, 로마의 기사가 되게."
그가 억누른 분노를 표출하며 반발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는지 결국 수긍하고야 말겠지. 그도 아는 거임. 아카시우스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자 선의였다는 걸.
/
사실 아카시우스는 혼인식을 올리고 그렇게 곧장 허니 곁을 떠날 생각은 없었음.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었지. 그래도 그는 허니가 잘 버틸거라 생각했고 그렇게 해주길 바랐지. 그리고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허니를 마주했을 때 조금 놀랐겠다. 1년 새에 허니는 많이 성숙해졌고 심약해져 있었음. 보기좋게 그을려있던 피부는 창백했고 키는 좀 더 큰 듯 했지만 큰 만큼 체구는 더 작아진 듯 했음.
아,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단 약하군. 이라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자신을 향해 표독스럽게 웃으며 로마를 욕보이는 말을 크게 외치는 그녀의 태도에 금세 생각이 접히겠지. 시종이 떠나자 그는 대략 그녀가 자신이 없는 이곳에서 어떤식으로 생활했는지 눈치챌 수 있었음.
그녀가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면 반가워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제 시종의 근황을 묻고싶어 안절부절 할 줄은 생각 못했겠지. 아카시우스는 바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를 애태우고 싶다는 몹쓸 마음이 들었음.
"당신이 아끼는 그 아이 얘기는 식사 후에 해드겠습니다."
허니는 제 손길을 힘들어했음. 싫어도 어쩔 수 없었음. 제 탓에 이 저택에서의 허니 입지는 1년 정도 뒤로 밀려졌으니깐. 지체된 만큼 시종들의 신임을 얻어야 아카시우스가 그나마 마음 편히 움직일 수 있었기에 일부러 더 노골적인 스킨십을 해댔지. 그리고 아카시우스도 제 아내를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긴 했음. 그래서 허니의 손을 붙잡았을 때 꽤 놀랐지.
자신이 어루만졌던 여인들 손 중에서 가장 거칠었으니깐. 흉터도 있었고.
"...내 나라는 여자도 검술을 배웁니다."
이 말을 하면서 귀를 붉히는 허니의 태도에 아카시우스는 조용히 미소를 삼켰음. 자신은 대단하다 생각했는데 그녀는 제 손이 창피하다고 느낀 것에 미소가 지어진거겠지. 허니는 시종일관 티모시의 근황을 알고싶어했음. 하지만 아카시우스는 그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지. 자신이 로마의 파멸을 원하다는 것을. 자신의 대략적인 계획을 듣고 나서 허니는 놀란 기색을 숨길 수가 없어 저 멀리 떨어진 시종의 눈치까지 살폈지.
어리숙해. 뭐...이 나이라면 그럴만하지만.
본래 폭탄이 맨 처음 터질 때의 소음에 놀랄 뿐 그 뒤에 이어지는 소리에 점차 적응하고 무뎌지기 마련임. 그래서 그는 허니가 그녀의 시종 얘기를 들어도 자신이 처음했던 말에 비하면 반응이 적을 줄 알았지만 아니었어. 오히려 반응이 더 컸고 그게 아카시우스의 심기를 건드렸지.
안정을 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소식을 묻고 알려주자 애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 모습이 거슬렸음.
"나한테 약속했잖아요...약속 했잖아...같이 돌아오겠다고..."
제 위치와 신분을 망각하고 투정을 부리며 우는 그 모습에 아카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아픈 사람을 다그치기도 했지. 곧장 방에서 나와 후회하긴 했지만. 아카시우스는 허니의 눈물이 신경 쓰였음. 그리고 시종과의 관계도 의심이 됐지. 연인, 혹은 짝사랑?
"장군, 듣고 있소?"
"아, 죄송합니다. 회담 장소가 생각보다 고요하군요."
"피가 들끓는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이런 고요함이 어색할만도 하지. 이해한다네."
회담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지만 아카시우스는 묘하게 집중이 안 됐음. 그 원인을 특정할 수 없는게 답답했지. 뚜렷한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 한 채 회담은 흐지부지 끝났고 밖을 내다보니 어느덧 해는 저물고 별자리가 어두운 하늘 위로 수를 놓고 있었겠지.
"술 한 잔 하고 가겠는가?"
이 회담을 만든 의장에 친숙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아카시우스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음.
"아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침대에 반쯤 누운 채로 제 팔을 붙잡으며 눈물을 흘렸던 나의 어린 아내. 길게 늘어뜨린 채 땋여진 머리카락과 새하얀 드레스 위 어깨위에 꽃장식이 되어있는 숄을 걸치고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있을, 황제가 강제로 엮어준 나의 공주. 그냥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제 머릿속에 허니의 얼굴이 그려지는 순간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한 아카시우스는 정말로 빠르게 말에 올라타 저택으로 향했음.
시종들이 기쁜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아카시우스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에게 물었지.
"아내의 상태는 어떤가. 식사는 하였고?"
시종들은 살짝 놀란 눈치를 보였지만 빠르고 정확하게 허니의 상태를 그에게 설명해주었지. 아카시우스는 이제 허니는 자신이 보살피겠다는 말을 끝으로 계단을 타고 침실로 향했음.
/
침실로 향하니 시종 하나가 주전자와 찻잔이 담긴 트레이을 들고 나오고 있었음. 뭐냐고 묻자 의원이 처방한 약재를 우린 차라고 말하겠지. 차가 조금 식어 데워야 될 것 같아 덧붙여 설명하기도 하겠다. 아카시우스는 정말로 아프긴 한가보구나 생각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자 허니가 놀랐는지 대뜸 누구냐며 소리치겠지.
아카시우스가 모습을 보이자 그녀는 좀 당황했는지 금방 시선을 피했음. 눈은 여전히 부어있었겠다. 아마 자신이 떠나고 나서도 한참은 더 울었던 모양임. 그녀를 지나쳐 옷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자 밖에서 허니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리겠지. 왜 이 시간에 멋대로 찾아오냐, 여긴 내 방이다 본인 방으로 돌아가라. 대꾸를 안 해주니 결국 옷방으로 걸어들어오겠지.
"내 말은 전혀 듣고있지 않,"
"때마침 잘 됐군요. 등 아래 단추가 말썽입니다. 좀 도와주시겠어요?"
"시종을 부르겠습니다."
"그들도 휴식 시간이 필요할텐데요."
그녀는 결국 작은 숨을 내뱉으며 아카시우스 등 뒤로 섰음. 얇은 천 뒤로 단추를 만지며 꼬물거리는 손길이 느껴졌지. 그게 간지럽기도 하고 신경쓰여서 잘 안되냐고 묻자 그녀는 아무말이 없었음. 그래서 뒤를 살짝 돌아보자 단추가 실타래에 단단히 엉켜있는지 그걸 풀기 위해 잔뜩 집중한 표정으로 끙끙거리고 있는 모습에 아카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겠지.
"엉킨게 풀기 어렵다면 그냥 끊어버리셔도 됩니다."
이 말을 하기가 무섭게 허니의 손에서 우득, 소리가 들렸고 그의 어깨에 간신히 매달려있던 옷은 허니의 손 위로 툭 떨어지겠지. 손에 들린 옷감을 받기 위해 몸을 돌리자 허니는 흠칫 놀란 것도 모자라 손에 들려있던 옷을 품에 끌어안으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음. 그것도 얼굴이 잔뜩 빨개진 채로 말이야. 그녀는 대체 눈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겠는지 검은 눈동자는 정차없이 흔들리기만 했음.
아카시우스가 손을 뻗자 그녀는 어쩌자는 식의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간신히 올려다봤음.
"옷을 주셔야지요."
"아...!"
허니는 그의 품에 옷을 안겨주다시피 건네고는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음. 아카시우스가 옷을 편히 갈아입고 침실로 나오자 그녀는 방 한가운데에 불편한 표정으로 덩그러니 서 있었지. 그리고 때마침 시종이 다시 데운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음. 시종은 서로를 대치하듯 서 있는 허니와 아카시우스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살펴보다 아카시우스가 나가보라는 손짓을 보이자 조용히 트레이를 협탁 위에 두고 금방 사라지겠지.
"잠들기 전 차를 마시는게 좋겠군요."
"...전 괜찮습니다."
이 말을 하는데도 목소리 끝이 갈라져서 허니는 무안한 듯 길게 내려땋은 제 머리끝을 마지작거렸음. 그리고 소파에 앉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차를 따라 마시겠다. 뜨거운 김을 호호 불며 마시는 허니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카시우스가 물었음.
"많이 우셨나 봅니다. 눈밑이 여전히 붉은걸 보니."
허니는 대꾸하지 않았음. 하지만 분명히 그녀의 시종을 떠올리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지. 아카시우스는 미간을 좁혔음. 사실 그는 티모시를 데리고 오려고 했었음. 허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지만 남부의 반란이 꽤나 커서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그 자리를 지킬만한 믿음직스러운 기사가 있어야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사에 적합한 인물은 티모시였지.
"그 아이가 단순 시종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검술 실력이 탁월하더군요."
검술실력을 제외하고도 리더십이 좋았고 청중들을 이끄는 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었음. 그래서 아카시우스는 그가 단순 시종이었다기 보다 허니의 안위를 책임지는 호위기사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겠지. 허니는 아카시우스를 힐끗 쳐다보다 여전히 침묵을 유지했음. 허니가 차를 다시 따르기 위해 주전자에 손을 뻗자 그가 먼저 잡고 허니의 찻잔에 주정자 주둥이를 기울었음.
자신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차를 식히려는걸 까먹은 허니는 그만 입술을 데고 말았음. 아, 하며 작은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고 아카시우스가 그녀의 찻잔을 붙잡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겠지. 데인 부분이 아픈지 손을 갖다대는 허니였음.
아카시우스는 허니 옆으로 가 앉아 허니의 손을 붙잡았음. 그녀가 움찔거렸지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허니의 턱을 살짝 붙잡고 부어오른 입술 부근을 엄지 손가락으로 지긋이 누르며 살폈지.
"칠칠 맞으십니다."
"......."
"시종에게 약을 가져오라 할까요."
"...왜 약속을 어기셨죠?"
허니가 아카시우스의 손목을 붙잡았음. 제가 장군이 돌아오기만을 얼마나 기대했는지...아셨을텐데요. 허니의 낮은 목소리에 그는 천천히 허니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음.
"내가 아니라 그 아이를 기다린거겠지."
"........"
"자꾸 그 아이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니 부인에게 미안했던 마음이 점차 사라지는군요."
"제게 미안한 마음이 있긴 하십니까? 장군이 제게 사과조차 하지 않아 전혀 몰랐는데요."
"지아비를 두고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는 부인은 제게 미안한 마음이 드시긴 합니까?"
"...그게 지금 할 말이라고..."
"언제나 그대가 바라는대로 상황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탓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능력이 출중한 그 아이여야 하고."
"하지만,"
"만약 내가 그대와 했던 거래를 제대로 이행했다면 그 결과가 궁금합니다. 그 애를 당신 앞으로 데려왔으면 무엇을 하려고 했습니까?"
아카시우스는 오전에 그녀를 다그쳤던 것 처럼 압박하기 시작했음. 그 아이와 도망치려고 했습니까? 아니면 로마국에 있는 H국 이주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습니까? 당신은 그 나라의 공주이니 그대가 명령한다면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죠. 나의 아내가 되어 반역을 도모하고 내 명예를 실추하려 했습니까? 어느순간부터 허니는 자신이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게 아닌 그에게 자신의 손목이 꽉 붙잡힌 상태가 되었겠지.
점차 창백해지는 허니의 안색에 아카시우스는 아차, 싶었음. 자신이 너무 몰아세웠다고 생각해 손에 힘을 풀려고 했지만 허니가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뚝뚝 흘리겠지. 그리고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음.
"이 나라는...하나밖에 남지 않은 친우를 그리워하는 것도 죄입니까?"
허니는 붉어진 눈동자를 치켜뜨고 장군을 노려봤음.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그리고 그 표정은 금세 또 일그러지겠지. 옷자락을 꽉 쥐고있던 허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카시우스를 향해 언성을 조금 더 높이며 말했음. 그녀의 목소리가 거칠어 질수록 아카시우스는 조바심이 나겠지.
"그림자처럼 인격이 짓밟혀지며 사는 삶 따윈 그대는 전혀 모르겠지. 당신은 위대한 나라의 위대한 장군이니깐!"
허니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지만 허니가 그의 손을 거칠게 쳐냈음.
"그 애를 만나면 뭘 할지 궁금하다 하셨죠? 내가 원했던 건...."
허니가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고 몸이 휘청거리자 아카시우스는 재빨리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주었음. 카펫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그녀의 눈물길에 아카시우스는 측은지심이 들겠다.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조심스레 침대로 데려가 앉힌 뒤 목이 아픈 그녀를 위해 차를 가져다 주려고 했지만 허니가 그의 옷깃을 붙잡았음.
"난 티모시를 통해 내 존재 가치를 확인받고 싶었어요."
목의 통증이 고통스러운지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허니는 그를 놓아줄 생각은 없어보였음.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붙잡고 있는 이 아이가 안타까운 나머지 아카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겠지. 이번에도 저를 뿌리칠 줄 알았지만 허니는 의외로 가만히 안겨있었음. 그는 그녀의 등을 달래듯 쓰담아주며 아카시우스가 말했음.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그리고 사과도 하겠지.
"미안해요."
제 허리를 끌어안는 허니의 손길에 아카시우스는 뒤늦게 깨닫고 말겠다. 허니는 잘 지내고 있었던게 아니었고 고독함에 허덕이고 있었다는 걸. 허니를 이렇게 만든 것이 본인이라는 사실도.
/
아카시우스는 사실 사흘정도 머물고 떠날 예정이었음. 하지만 어제 제 품에 안겨 엉엉 울던 허니의 모습을 봐버린 이상 그녀를 두고 떠나기가 쉽지않은거지.
"왜 그리...빤히 보십니까."
함께 아침식사를 하는 와중에 허니가 물었고 아카시우스는 대꾸 없이 미소만 지었음. 허니는 슬쩍 제 눈가를 더듬거리며 매만지겠지. 퉁퉁 불어서 그런가? 하며 혼자 생각하다가 아카시우스가 식사를 다 끝맺고 식기를 내려놓으며 허니를 불렀겠지. 허니는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리고는 그를 쳐다봤음.
"저와 같이 남부 해안도시로 가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당분간 따뜻한 도시에서 머무는게 부인의 건강을 위해 좋을 것 같군요."
건강은 사실 핑계였고 주눅들어보이는 허니를 기운 차리게 도와주고싶어서 이런 말을 내뱉는 거겠지. 허니는 당연히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숙였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가 조심스레 웃고있다는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 저렇게도 좋을까.
"내일 출발하도록 하죠."
허니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음. 허니는 짐을 싸야겠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음. 그녀의 접시 위로는 음식이 가득했지. 아카시우스는 허니가 남긴 음식들을 쳐다보다 문득 자신이 내린 결정이 옳은 결정인지 생각하게 되겠지. 그래도 한 번쯤은 그녀에게 기쁨을 줘도 되지 않을까하며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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