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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9 22:06
그뿐이었다. 무모한 명령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그걸 감당해야 하는 마이맨들에 대한 미안함 등등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유를 찾을 만한 때에, 거니의 허락을 받고 네이트 픽은 수인화했다. 흐아아 엘티, 한 번 만요. 제발... 앓아눕기 직전인 큐팁과 크리스테슨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쓰다듬을 허락하고, 마침내 백구는 위풍당당한 걸음을 옮겼다. 길 잃으시면 안됩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거니의 말에도 몰래 코웃음을 쳤다. 이래 봬도 나름 개코라고.
".................."
길을 잃었다.
듬성듬성 난 풀냄새도 맡고 동글동글 구슬을 굴리는 쇠똥구리도 보다가, 냅다 달려드는 전갈을 피해 도망쳤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용맹한 백구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는 미 해병 수색대대, 뻐킹 리컨 마린 장교이니까.
'좆됐네...'
진짜 모르겠다. 백구는 멍해지려는 정신줄을 간신히 부여잡고 코를 킁킁댔다. 내 냄새라도 쫓아가다 보면 아는 길이 나오겠지. 그렇다고 이 상황에 인간으로 변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 나는 알몸이라고...
모래바닥에 코를 박고 한참을 걷다 보니, 조금씩 사람 말소리와 발소리가 들린다. 해병대는 아니고 바로 옆의 육군 기지인 것 같았다. 뭐야, 근처에서 길을 잃은 거였어? 한편으로는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며, 앞으로 어디 가서 개코라고 우쭐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나왔건만 힐링은커녕 피로만 더 쌓인 느낌이었다. 차라리 험비 뒤에서 쉬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서 거니에게 돌아가야겠단 생각으로 백구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렸다. 그때였다.
"넌 누구니?"
머리 위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한껏 젖히자 앳된 얼굴의 여자가 백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눈을 접으며 생긋 웃더니, 백구를 훌쩍 들어 올려 눈을 마주쳤다.
"마을에서 온 강아지인가? 너무 귀엽다!"
이름이 뭐야? 여자가 물었다. 미 해병대 소속 제1수색대대 브라보중대 제2소대장 네이트 픽 중위이다. 라고 말하면 알아들을 수는 있나? 아니 애초에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멍멍 밖에 없는 개한테 말을 거는 의미가 없잖아.
백구는 여자의 군복을 살펴봤다. 성은 비, 계급은 중위. 비 중위로군.
비 중위는 백구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너무 작아! 귀여워! 따위의 말을 뱉었다. 앞발을 바동거리며 정중하게 내려달라 요청했으나, 비 중위는 그대로 백구를 안고 신이 난듯 걸어갔다. 그렇게 영문 모른 채로 납치된 곳은 비 중위의 개인 막사였다.
'육군 장교들은 작전 중에도 개인 막사를 쓰나? 팔자 좋군, 그래.'
거지대장이 속으로 부러워하든 말든 비 중위는 간이침대에 털썩 주저앉더니, 가슴팍에 백구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조잘조잘 말을 걸며 머리와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너 몇 살이야? 왜 이렇게 작아?"
'스물다섯.'
"마을에서 온 거야?"
'마린 기지에서 왔다.'
"오늘 나랑 잘래? 여기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해. 내일 날 밝으면 주인 찾아줄게."
비 중위는 백구를 안은 채로 침대에 폴싹 누웠다. 당황한 백구가 끙끙거리며 앞발로 비 중위의 가슴팍을 박박 긁어 보았지만, 비 중위는 마취제라도 맞은 사람처럼 이상하리만큼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얘도 나처럼 수면 부족인가. 겨우겨우 품에서 빠져나온 백구는 서둘러 거니에게 돌아가려 했다.
비 중위가 우는 걸 보기 전까지는.
슬픈 꿈이라도 꾸는 건지, 약하게 흐느끼며 감긴 눈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백구는 잠시 고민하다, 일찍 귀가하는 걸 포기하고 비 중위의 얼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눈물을 핥아줬다. 거니한테 한 소리 듣지, 뭐.
예상대로 거니는 한참이나 늦게 돌아온 소대장을 보자 걱정이 담긴 잔소리를 했다. 그러나 네이트의 눈 앞엔 비 중위의 우는 얼굴만 잔상처럼 남아 떠다닐 뿐이었다.
"제 말 듣고 계십니까?"
"응. 그래서, 별일 없었지?"
"예. 슈워체 대위가 한 번 호출했는데, 자리에 안 계시다 하니까 알겠다고 하고 말았습니다. 아마 또 별거 아니었겠죠."
"알았어. 고마워, 마이크. 고생했어."
"제가 뭘요. 쬐끄만한 강아지 걱정하는 게 더 큰일이었습니다."
"미안하다니까. 오랜만에 나간 거라 신났나 봐."
그러나 거니의 당부가 무색하게, 네이트는 다음 날도 아기 백구로 변해 비 중위의 막사를 찾아갔다.
"혼자 여기까지 온 거야? 날 만나려고?"
'자네 괜찮나? 어제 울었잖아.'
"...워웅?"
비 중위는 꺄아아— 지금 내 말에 대답한 거야?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다행히 걱정할 정도로 우울해 보이지는 않아 안심이 되었다. 아무래도 같은 중위에 비슷한 처지니까, 그래서 신경이 쓰인 것뿐이라 생각했다.
'괜찮은지 보러 온 거니까 나는 가 보겠네.'
그러나 뒤를 돌기도 전 백구는 또다시 궁댕이가 홀랑 들려버렸다. 예상치 못한 추행(?)에 버둥거리다 이번엔 조금 더 빨리 체념했다. 괜찮아. 토닥이는 손길이 부드럽고 조심스러웠기에.
비 중위는 어제처럼 백구를 막사로 데려가 또 한참이나 조잘거렸다. 어제는 왜 말도 없이 갔냐는 둥, 집이 어디냐는 둥, 주인은 있냐는 둥. 네이트는 비 중위가 레이만큼이나 떠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그 목소리가 썩 듣기 싫지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듣기 좋았다.
그날 이후 네이트 픽은 시간이 날 때마다 비 중위를 찾아갔다. 가끔 비 중위가 자리를 비운 때에는 침대 옆에서 기다리다 시간이 되면 돌아가곤 했다. 비 중위의 막사는 황량할 정도로 짐이 없었다. 그 풍경이 언젠가 자면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랑 겹쳐 보였다. 쓸쓸해 보여.
네이트는 비 중위에 대해 이것저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첫 번째는 비 중위가 센티넬이라는 것이었다. 그날도 일주일 동안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날이라 기절하듯 잠들었다고. 매칭 가이드가 있지만 다른 부대 소속이고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아마 어린 나이에 중위를 단것도 센티넬이라는 가산점이 붙어서 그런 것일 테지.
"그런데 너는 왜 크질 않아? 계속 똑같은 거 같아."
'25년 동안 이 크기였어.'
"아, 나는 스물여섯 살이야."
'............!!'
백구는 사과의 의미로 정중하게 비 중위의 코를 할짝였다. 외모만 보고 풋내 나는 어린애라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비 중위는 감격한 얼굴로 꺄아아아— 하며 털로 덮힌 몸 여기저기에 뽀뽀를 했다. 맨둥한 뱃살에도 쪽쪽대려는 걸 앞발로 겨우 막았다.
"그거 알아? 너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무슨 종일까?"
'종은 무슨... 그냥 똥개지.'
"내 유일한 기쁨이야."
그 말엔 살짝 얼굴이 빨개진 백구였다. 물론 털에 가려 안 보였겠지만.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건 누구라도 좋아할 일이니까. 그렇게만 여기기로 했다.
백구는 비 중위가 업무를 볼 때면 좁다란 막사 안을 돌아다녔다. 사실 별 볼 일은 없고, 옅게 베어있는 비 중위의 냄새를 좇는 게 다였다. 예의상 침대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여러 사람의 피 냄새가 맡아질 때면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비 중위에게 돌아갔다. 발치에 앉아 끙끙거리거나 혹 집중한 비 중위가 듣지 못할 때면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면 비 중위는 백구를 들어 올려 무릎 혹은 책상에 올려 놓았다. 그렇게 따끈한 무릎 위에서 깜빡 졸기도 하고, 비 중위의 손 가까이에 쭈그리고 앉아 같이 보고서를 들여다 보기도 했다.
'여기 틀렸다.'
"왜? 배고파? 물 줄까?"
'아니, 여기 틀렸다구.'
"응? 어, 잘못 썼네."
어떻게 알았어? 천재 아니야? 기특하다는 듯 뽀뽀를 해주면 백구는 민망함에 귀만 탈탈 긁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 내일부터 작전에 나가야 해. 놀러 오는 건 상관없지만 내가 오지 않아도 놀라지 마."
네이트는 오지 않는다는 한마디를 꽤 여러 번 곱씹었다. 그래, 여기는 전쟁터고 누구든 언제든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지. 그런데 왜 마음이 이렇게 따가운 걸까. 비 중위도 오늘만큼은 평소처럼 웃지 못하는 듯했다.
"사람들은 센티넬이라고 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슈퍼히어로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나는 무서워. 죽는 것도 무섭고, 죽이는 것도 무서워."
"그래도, 내가 먼저 나서야 내 밑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피를 덜 묻힐 수 있으니까. 죄도 한 사람이 몰아서 짓는 게 낫겠지?"
비 중위는 백구의 자그마한 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해 줘. 나도, 다른 사람들도."
까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우는 건가 싶어서 얼굴을 보려 했지만 잠깐만, 조금만... 미안해. 중얼거리는 젖은 목소리에 백구는 가만히 비 중위의 볼을 핥아주었다.
"혹시 너 먹을 거 있으면 내가 가져올게!"
'......도둑질은 안 돼.'
그날 밤 비 중위는 울지 않았지만, 백구는 비 중위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었다. 비 중위가 지키고 싶은 이들과 함께 꼭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하면서.
백구는 비 중위가 떠난 이후 매일매일 막사로 갔다. 어떤 때는 이른 아침이었고, 어떤 때는 늦은 밤이었다. 그래도 하루 한 번씩은 고집스럽도록 출근도장을 찍었다. 한 일주일 정도 지났을 즈음엔 정말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닌지 조바심이 났다.
"오늘도 못 만나셨나요?"
"응... 두 번 다시 못 보는 건 아니겠지?"
"일반인도 아니고 센티넬이니,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그 후로도 백구는 텅 빈 막사로 가 비 중위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사흘이 더 지난 날이었다.
"............!!!!!!"
침대 위에 앉아있던 백구는 발소리가 들리자 호다닥 뛰어내려갔지만, 낯선 목소리를 듣고 책상 아래로 몸을 숨겼다.
비 중위가 돌아왔다. 의식이 없는 채로, 피 냄새를 잔뜩 묻힌 채. 너덜너덜한 군복 아래로 보이는 몸은 상처투성이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심지어 상반신의 반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일반인이었으면 바로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숨은 쉬고 있는 걸까? 얼른 나가서 말라붙은 핏자국을 핥아주고 싶었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은 자리를 비킬 생각을 않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왔나."
"예. 많이 안 좋습니까?"
"보다시피."
또 다른 남성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가쁜 목소리였다. 낯익은 목소리와 냄새에 백구의 귀가 쫑긋거렸다. 아마 저 남자가 비 중위의 매칭 가이드일 테지. 네이트는 한편으로 안심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남자는 비 중위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백구는 깜짝 놀라 눈을 감았다. 온몸을 뒤덮은 상처를 확인한 남자가 작게 혀를 찼다. 개새끼들. 남자가 욕을 뱉었다. 그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떴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 다행히 비 중위는 그에게 가려져 있었다. 커다란 덩치가 눈에 익었다.
남자는 비 중위의 손끝에 살짝 입을 맞추고, 그 손에 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비 중위의 뒷목을 당겨 입술을 깊이 머금었다. 얕은 상처들이 서서히 아물어가는 걸 보지 못했다면 그저 두 연인의 애정행각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키스를 이어가다 비 중위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정신이 드십니까."
"브랫?"
"네, 접니다. 중위님."
중위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아무리 모른 척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는 이의 것이라서. 브랫의 이름을 들은 순간, 아니, 사실은 그가 막사로 들어올 때부터 백구는 알았다. 비 중위의 매칭 가이드가 누구였는지.
그러나 혹시라도,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그와 같은 이름을 하고 그와 닮은 목소리를 가진 다른 누군가가 아닐까. 작은 백구의 작디 작은 소망은 남자의 등에 있는 문신을 본 순간 잘게 조각나버렸다.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와 가쁜 숨소리, 간간히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를 들으며 백구는 그저 눈을 꼭 감고 울지 않으려 애썼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백구도, 네이트 픽도.
브랫은 가이드다. 브랫은 비 중위의 매칭 가이드다. 브랫은 비 중위의 숨을 트이게 하고 상처를 치유한다. 유능하고, 똑똑하고, 사려 깊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개새끼로 변하는 게 다인 어느 괴물이랑은 다르게.
"갈 거야?"
"네. 상처는 다 나으셨잖습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
"죄송합니다."
가이딩이 끝나고, 옷을 모두 챙겨 입은 브랫이 무표정한 얼굴로 비 중위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까만 눈동자 아래에 한참을 고여있다 결국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몸 좀 사려가면서 하십시오."
"바쁜데 시간 뺏어서 미안해."
"......걱정하는 겁니다."
브랫이 막사를 나가자 비 중위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상처 하나를 끌어안은 채. 백구는 비 중위의 눈물을 핥아줄 수도, 비 중위를 위로해 줄 수도 없었다. 백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네이트 픽은 비 중위를 안아줄 수 없다. 제 부하를 꾸짖을 수도, 그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갈 수도 없다. 백구는 들었으니까. 브랫이 입 맞추기 전, 애틋하게 속삭이던 말을.
언제쯤...
언제쯤 당신에게 제대로 입맞출 수 있을까.
젠킬 브랫너붕붕네잇 네잇너붕붕브랫 중위님너붕붕브랫 백구너붕붕
".................."
길을 잃었다.
듬성듬성 난 풀냄새도 맡고 동글동글 구슬을 굴리는 쇠똥구리도 보다가, 냅다 달려드는 전갈을 피해 도망쳤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용맹한 백구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는 미 해병 수색대대, 뻐킹 리컨 마린 장교이니까.
'좆됐네...'
진짜 모르겠다. 백구는 멍해지려는 정신줄을 간신히 부여잡고 코를 킁킁댔다. 내 냄새라도 쫓아가다 보면 아는 길이 나오겠지. 그렇다고 이 상황에 인간으로 변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 나는 알몸이라고...
모래바닥에 코를 박고 한참을 걷다 보니, 조금씩 사람 말소리와 발소리가 들린다. 해병대는 아니고 바로 옆의 육군 기지인 것 같았다. 뭐야, 근처에서 길을 잃은 거였어? 한편으로는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며, 앞으로 어디 가서 개코라고 우쭐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나왔건만 힐링은커녕 피로만 더 쌓인 느낌이었다. 차라리 험비 뒤에서 쉬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서 거니에게 돌아가야겠단 생각으로 백구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렸다. 그때였다.
"넌 누구니?"
머리 위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한껏 젖히자 앳된 얼굴의 여자가 백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눈을 접으며 생긋 웃더니, 백구를 훌쩍 들어 올려 눈을 마주쳤다.
"마을에서 온 강아지인가? 너무 귀엽다!"
이름이 뭐야? 여자가 물었다. 미 해병대 소속 제1수색대대 브라보중대 제2소대장 네이트 픽 중위이다. 라고 말하면 알아들을 수는 있나? 아니 애초에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멍멍 밖에 없는 개한테 말을 거는 의미가 없잖아.
백구는 여자의 군복을 살펴봤다. 성은 비, 계급은 중위. 비 중위로군.
비 중위는 백구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너무 작아! 귀여워! 따위의 말을 뱉었다. 앞발을 바동거리며 정중하게 내려달라 요청했으나, 비 중위는 그대로 백구를 안고 신이 난듯 걸어갔다. 그렇게 영문 모른 채로 납치된 곳은 비 중위의 개인 막사였다.
'육군 장교들은 작전 중에도 개인 막사를 쓰나? 팔자 좋군, 그래.'
거지대장이 속으로 부러워하든 말든 비 중위는 간이침대에 털썩 주저앉더니, 가슴팍에 백구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조잘조잘 말을 걸며 머리와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너 몇 살이야? 왜 이렇게 작아?"
'스물다섯.'
"마을에서 온 거야?"
'마린 기지에서 왔다.'
"오늘 나랑 잘래? 여기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해. 내일 날 밝으면 주인 찾아줄게."
비 중위는 백구를 안은 채로 침대에 폴싹 누웠다. 당황한 백구가 끙끙거리며 앞발로 비 중위의 가슴팍을 박박 긁어 보았지만, 비 중위는 마취제라도 맞은 사람처럼 이상하리만큼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얘도 나처럼 수면 부족인가. 겨우겨우 품에서 빠져나온 백구는 서둘러 거니에게 돌아가려 했다.
비 중위가 우는 걸 보기 전까지는.
슬픈 꿈이라도 꾸는 건지, 약하게 흐느끼며 감긴 눈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백구는 잠시 고민하다, 일찍 귀가하는 걸 포기하고 비 중위의 얼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눈물을 핥아줬다. 거니한테 한 소리 듣지, 뭐.
예상대로 거니는 한참이나 늦게 돌아온 소대장을 보자 걱정이 담긴 잔소리를 했다. 그러나 네이트의 눈 앞엔 비 중위의 우는 얼굴만 잔상처럼 남아 떠다닐 뿐이었다.
"제 말 듣고 계십니까?"
"응. 그래서, 별일 없었지?"
"예. 슈워체 대위가 한 번 호출했는데, 자리에 안 계시다 하니까 알겠다고 하고 말았습니다. 아마 또 별거 아니었겠죠."
"알았어. 고마워, 마이크. 고생했어."
"제가 뭘요. 쬐끄만한 강아지 걱정하는 게 더 큰일이었습니다."
"미안하다니까. 오랜만에 나간 거라 신났나 봐."
그러나 거니의 당부가 무색하게, 네이트는 다음 날도 아기 백구로 변해 비 중위의 막사를 찾아갔다.
"혼자 여기까지 온 거야? 날 만나려고?"
'자네 괜찮나? 어제 울었잖아.'
"...워웅?"
비 중위는 꺄아아— 지금 내 말에 대답한 거야?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다행히 걱정할 정도로 우울해 보이지는 않아 안심이 되었다. 아무래도 같은 중위에 비슷한 처지니까, 그래서 신경이 쓰인 것뿐이라 생각했다.
'괜찮은지 보러 온 거니까 나는 가 보겠네.'
그러나 뒤를 돌기도 전 백구는 또다시 궁댕이가 홀랑 들려버렸다. 예상치 못한 추행(?)에 버둥거리다 이번엔 조금 더 빨리 체념했다. 괜찮아. 토닥이는 손길이 부드럽고 조심스러웠기에.
비 중위는 어제처럼 백구를 막사로 데려가 또 한참이나 조잘거렸다. 어제는 왜 말도 없이 갔냐는 둥, 집이 어디냐는 둥, 주인은 있냐는 둥. 네이트는 비 중위가 레이만큼이나 떠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그 목소리가 썩 듣기 싫지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듣기 좋았다.
그날 이후 네이트 픽은 시간이 날 때마다 비 중위를 찾아갔다. 가끔 비 중위가 자리를 비운 때에는 침대 옆에서 기다리다 시간이 되면 돌아가곤 했다. 비 중위의 막사는 황량할 정도로 짐이 없었다. 그 풍경이 언젠가 자면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랑 겹쳐 보였다. 쓸쓸해 보여.
네이트는 비 중위에 대해 이것저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첫 번째는 비 중위가 센티넬이라는 것이었다. 그날도 일주일 동안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날이라 기절하듯 잠들었다고. 매칭 가이드가 있지만 다른 부대 소속이고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아마 어린 나이에 중위를 단것도 센티넬이라는 가산점이 붙어서 그런 것일 테지.
"그런데 너는 왜 크질 않아? 계속 똑같은 거 같아."
'25년 동안 이 크기였어.'
"아, 나는 스물여섯 살이야."
'............!!'
백구는 사과의 의미로 정중하게 비 중위의 코를 할짝였다. 외모만 보고 풋내 나는 어린애라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비 중위는 감격한 얼굴로 꺄아아아— 하며 털로 덮힌 몸 여기저기에 뽀뽀를 했다. 맨둥한 뱃살에도 쪽쪽대려는 걸 앞발로 겨우 막았다.
"그거 알아? 너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무슨 종일까?"
'종은 무슨... 그냥 똥개지.'
"내 유일한 기쁨이야."
그 말엔 살짝 얼굴이 빨개진 백구였다. 물론 털에 가려 안 보였겠지만.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건 누구라도 좋아할 일이니까. 그렇게만 여기기로 했다.
백구는 비 중위가 업무를 볼 때면 좁다란 막사 안을 돌아다녔다. 사실 별 볼 일은 없고, 옅게 베어있는 비 중위의 냄새를 좇는 게 다였다. 예의상 침대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여러 사람의 피 냄새가 맡아질 때면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비 중위에게 돌아갔다. 발치에 앉아 끙끙거리거나 혹 집중한 비 중위가 듣지 못할 때면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면 비 중위는 백구를 들어 올려 무릎 혹은 책상에 올려 놓았다. 그렇게 따끈한 무릎 위에서 깜빡 졸기도 하고, 비 중위의 손 가까이에 쭈그리고 앉아 같이 보고서를 들여다 보기도 했다.
'여기 틀렸다.'
"왜? 배고파? 물 줄까?"
'아니, 여기 틀렸다구.'
"응? 어, 잘못 썼네."
어떻게 알았어? 천재 아니야? 기특하다는 듯 뽀뽀를 해주면 백구는 민망함에 귀만 탈탈 긁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 내일부터 작전에 나가야 해. 놀러 오는 건 상관없지만 내가 오지 않아도 놀라지 마."
네이트는 오지 않는다는 한마디를 꽤 여러 번 곱씹었다. 그래, 여기는 전쟁터고 누구든 언제든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지. 그런데 왜 마음이 이렇게 따가운 걸까. 비 중위도 오늘만큼은 평소처럼 웃지 못하는 듯했다.
"사람들은 센티넬이라고 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슈퍼히어로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나는 무서워. 죽는 것도 무섭고, 죽이는 것도 무서워."
"그래도, 내가 먼저 나서야 내 밑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피를 덜 묻힐 수 있으니까. 죄도 한 사람이 몰아서 짓는 게 낫겠지?"
비 중위는 백구의 자그마한 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해 줘. 나도, 다른 사람들도."
까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우는 건가 싶어서 얼굴을 보려 했지만 잠깐만, 조금만... 미안해. 중얼거리는 젖은 목소리에 백구는 가만히 비 중위의 볼을 핥아주었다.
"혹시 너 먹을 거 있으면 내가 가져올게!"
'......도둑질은 안 돼.'
그날 밤 비 중위는 울지 않았지만, 백구는 비 중위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었다. 비 중위가 지키고 싶은 이들과 함께 꼭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하면서.
백구는 비 중위가 떠난 이후 매일매일 막사로 갔다. 어떤 때는 이른 아침이었고, 어떤 때는 늦은 밤이었다. 그래도 하루 한 번씩은 고집스럽도록 출근도장을 찍었다. 한 일주일 정도 지났을 즈음엔 정말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닌지 조바심이 났다.
"오늘도 못 만나셨나요?"
"응... 두 번 다시 못 보는 건 아니겠지?"
"일반인도 아니고 센티넬이니,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그 후로도 백구는 텅 빈 막사로 가 비 중위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사흘이 더 지난 날이었다.
"............!!!!!!"
침대 위에 앉아있던 백구는 발소리가 들리자 호다닥 뛰어내려갔지만, 낯선 목소리를 듣고 책상 아래로 몸을 숨겼다.
비 중위가 돌아왔다. 의식이 없는 채로, 피 냄새를 잔뜩 묻힌 채. 너덜너덜한 군복 아래로 보이는 몸은 상처투성이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심지어 상반신의 반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일반인이었으면 바로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숨은 쉬고 있는 걸까? 얼른 나가서 말라붙은 핏자국을 핥아주고 싶었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은 자리를 비킬 생각을 않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왔나."
"예. 많이 안 좋습니까?"
"보다시피."
또 다른 남성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가쁜 목소리였다. 낯익은 목소리와 냄새에 백구의 귀가 쫑긋거렸다. 아마 저 남자가 비 중위의 매칭 가이드일 테지. 네이트는 한편으로 안심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남자는 비 중위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백구는 깜짝 놀라 눈을 감았다. 온몸을 뒤덮은 상처를 확인한 남자가 작게 혀를 찼다. 개새끼들. 남자가 욕을 뱉었다. 그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떴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 다행히 비 중위는 그에게 가려져 있었다. 커다란 덩치가 눈에 익었다.
남자는 비 중위의 손끝에 살짝 입을 맞추고, 그 손에 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비 중위의 뒷목을 당겨 입술을 깊이 머금었다. 얕은 상처들이 서서히 아물어가는 걸 보지 못했다면 그저 두 연인의 애정행각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키스를 이어가다 비 중위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정신이 드십니까."
"브랫?"
"네, 접니다. 중위님."
중위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아무리 모른 척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는 이의 것이라서. 브랫의 이름을 들은 순간, 아니, 사실은 그가 막사로 들어올 때부터 백구는 알았다. 비 중위의 매칭 가이드가 누구였는지.
그러나 혹시라도,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그와 같은 이름을 하고 그와 닮은 목소리를 가진 다른 누군가가 아닐까. 작은 백구의 작디 작은 소망은 남자의 등에 있는 문신을 본 순간 잘게 조각나버렸다.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와 가쁜 숨소리, 간간히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를 들으며 백구는 그저 눈을 꼭 감고 울지 않으려 애썼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백구도, 네이트 픽도.
브랫은 가이드다. 브랫은 비 중위의 매칭 가이드다. 브랫은 비 중위의 숨을 트이게 하고 상처를 치유한다. 유능하고, 똑똑하고, 사려 깊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개새끼로 변하는 게 다인 어느 괴물이랑은 다르게.
"갈 거야?"
"네. 상처는 다 나으셨잖습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
"죄송합니다."
가이딩이 끝나고, 옷을 모두 챙겨 입은 브랫이 무표정한 얼굴로 비 중위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까만 눈동자 아래에 한참을 고여있다 결국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몸 좀 사려가면서 하십시오."
"바쁜데 시간 뺏어서 미안해."
"......걱정하는 겁니다."
브랫이 막사를 나가자 비 중위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상처 하나를 끌어안은 채. 백구는 비 중위의 눈물을 핥아줄 수도, 비 중위를 위로해 줄 수도 없었다. 백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네이트 픽은 비 중위를 안아줄 수 없다. 제 부하를 꾸짖을 수도, 그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갈 수도 없다. 백구는 들었으니까. 브랫이 입 맞추기 전, 애틋하게 속삭이던 말을.
언제쯤...
언제쯤 당신에게 제대로 입맞출 수 있을까.
젠킬 브랫너붕붕네잇 네잇너붕붕브랫 중위님너붕붕브랫 백구너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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