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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7 09:21
도주 중이던 은행강도가 또 다른 수배자를 인질로 잡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관자놀이를 누르는 쇳덩이에서 서늘함을 느끼며 배리 씰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운 좋게 사회봉사를 끝까지 마쳤지만 배리는 가족들 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봉사를 다니는 내내 수상한 차가 쫓아다니곤 했고, 지금 돌아갔다간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배리는 남은 재산을 처분하고 미국 전역을 떠돌아 다녔다. 집요하게 쫓아오는 검은색 차가 카르텔이 보낸 암살자인지 CIA의 끄나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순순히 잡혀줄 생각도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승보단 개똥밭에 구르는 게 나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돈이 말 그대로 넘쳐났던 덕에 아직도 도피 자금은 제법 넉넉했다. 이대로 몇 년만 떠돌아 다니면 된다고, 여행이라고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버티고 있었건만. 카르텔도 CIA도 아닌 은행 강도에게 잡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배리는 두 손을 들어 올리곤 부지런히 주변을 살폈다. 제 목을 압박한 단단한 팔뚝과 관자놀이에 들이대진 총. 앞에는 총을 들고 대치 중인 십여명의 경찰들. 어느 쪽으로 가던 캄캄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 경악 중인 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배리의 뒤를 쫓고 있던 CIA 역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필 잡혀도 은행 강도한테 잡혀!? 말이 통하는 작자라면 정체를 밝히고 협력을 요청하겠으나 상대는 고집 세기로 유명한 빈센트 한나 경위였다. CIA 배지를 보여줘 봤자 내 사냥감에서 손 떼라고 소리나 지르겠지. 그렇다고 배리 씰이 죽어버리게 놔둘 수도 없었다. 아직 남겨둔 은닉 재산이 있다는 걸 확인한 이상 반드시 체포해서 회수해야만 했다. 셰이퍼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LA 경찰을 막아섰다. 예상대로 한나 경위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고 남자는 그 틈에 배리를 끌고 근처에 세워진 차에 올라탔다. 억센 손아귀 힘에 이끌려 가면서 배리는 인생이 참 스펙타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참을 달려 도망친 두 사람은 변두리에 있는 싸구려 모텔에 도착했다. 누가 봐도 수상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주인은 그들을 눈으로 한 번 훑더니 시큰둥하게 열쇠를 건네줬다. 남자는 방 안에 들어갈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배리를 방 안에 밀어 넣고 몇 번이고 잠금장치를 확인하자 그제야 그는 안심한 듯 총을 품 안에 집어 넣었다. 배리는 스프링이 다 꺼진 매트리스 위에 앉아 남자를 관찰했다. 저걸 어떻게 처리하지, 하는 얼굴이군. 무표정을 가장하곤 있지만 심란한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중간에 버리고 갈 생각이었지만 그 형사가 끝까지 총을 내리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탄 거겠지. 범죄에 직접 가담한 적은 없지만 카르텔과 어울리며 보고 들은 것만 한 트럭이었다. 그가 단순한 강도일 뿐이란 걸 확인하니 배리의 마음은 되려 차분해졌다. ....고민 중에 미안한데, 처음부터 날 노리고 잡은 건 아니죠?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남자는 무슨 개소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완전히 긴장이 풀린 배리는 침대 헤드에 편하게 기대 앉았다. 저기, 그쪽도 쓸데없는 살인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입막음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사실 나도 수배 중인 몸이거든.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을 건네자 남자의 얼굴에 황당함이 드러났다. 수배 중이라고? 네가? 범죄랑은 연 없을 것 같은 인간이 무슨 수배자냐고 하고 싶은 거겠지. 배리는 멋쩍게 웃으며 마약 운반이랑 이것저것 해서 CIA에게 찍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당신 때문에 나까지 경찰에 안면이 생겼으니 한동안은 나도 숨어 다녀야 해요. 설마 멋대로 데려와 놓고 알아서 하라고 내치진 않겠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를 올려다보자 남자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다소 무리수란 건 알고 있지만 배리도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너 때문에 텔레비전에 얼굴이 나왔잖아! 암살자들이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데 살아있다고 확인 사살을 한 거나 마찬가지니 혼자 있는 것보단 누구라도 함께 움직이는 게 안전했다. 그게 총을 가진, 싸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더 좋고. 게다가 왠지 이 남자는 배리가 약하게 나오면 나 몰라라 하진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을 끙끙대던 남자는 마음대로 하라며 한숨을 쉬었다. 예상이 적중하자 배리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얽힌 것도 인연인데 이름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전 배리 씰이에요. 살갑게 웃으며 말을 걸었지만 남자는 배리를 무시한 채 화장실로 들어갔다. 같이 지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짤막한 대답이 들려왔다. ...크리스 시헬리스. 이름만 내뱉은 채 용건이 끝났다는 듯 문이 쾅 닫혔다. 배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닫힌 화장실 문을 쳐다봤다. ...생각보다 멋들어진 이름이네. 그것이 이 기묘한 동거의 시작이었다.
처음 몇 주간은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됐다.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며 주변과 뉴스를 체크하고, 식사는 늘 식어 빠진 배달 음식에 외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돈을 아낀다 해도 경비는 점점 바닥을 드러내 갔고 배리의 인내심 또한 이제 한계였다. 배리는 크리스를 붙잡고 시골로 가자고 설득했다. 아예 도시와 동떨어진 깡시골로 들어가서 신분을 위장한 채 상황을 살피자는 계획이었다. 크리스는 탐탁지 않아 했으나 처음으로 보는 배리의 진지한 얼굴에 설득되어 결국 그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차로 6시간을 달려 도착한 새로운 은신처는 농장과 옥수수밭밖에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시내에도 편의점 하나 없는 곳이었지만 배리는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다는 점에 감사했다. 하지만 배리의 자유는 오래 가지 않았다. 크리스는 배리가 시내로 나갈 때마다 꼭 따라나섰고, 의처증 걸린 남편처럼 아예 손목을 붙잡고 다녔다. 배리가 불편한 티를 내며 떨어지라고 속삭였지만 크리스는 요지부동이었다. 혼자 다니다 잡히기라도 하면 어쩔래? 네가 잡힌 후에 감형을 위해 내 위치를 불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마음 같아선 수갑을 채우고 싶다는 말에 배리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작은 마을에 새로 온 이웃은 그 존재만으로도 이야깃거리였다. 그런 두 사람이 어딜가나 항상 손을 잡고 다닌다면 당연히 여러 가지 소문이 돌 수 밖에 없었다. 두 분은 부부신가? 식료품점의 노파가 싱글거리며 묻는 말에 크리스의 손이 멈췄다. 당황한 크리스는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말하려 했으나 배리의 행동이 더 빨랐다. 크리스의 팔짱을 끼고 끌어당긴 배리는 생긋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결혼한 지 5년 째라며 넉살을 떠는 배리를 보자 크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배리를 흘끗거렸다. 팔꿈치에 가슴이 눌리는 것도 아는지 모르는지, 배리는 크리스에게 찰싹 달라붙어 살가운 아내처럼 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은 유달리 삭막했다. 얼마나 봤다고 부부야, 부부는... 크리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자 배리도 기분이 상했는지 이래야 의심을 안 받을 것 아니냐며 받아쳤다. 나도 당신이 취향 아니니까 참으라고 쏘아붙이는 배리의 말에 크리스는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처음엔 분명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얌전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편해진 모양인지 배리는 언젠가부터 말도 놓고 조금씩 성질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나한테 잡혀서 벌벌 떨던 건 기억 안 나나 보지? 크리스의 이죽거림에도 배리는 기가 죽지 않았다. 그땐 총을 들이대니까 그렇지. 납치범이 이렇게 유치한 남자일 줄 누가 알았나. 한 마디를 안 지는군. 이쯤 되니 분노보단 황당함이 앞섰다. 이 대화 자체가 부부싸움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랬다. 결국 크리스는 입을 다무는 걸 택했고, 그렇게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둘은 부부 행세를 하게 되었다. 집에선 찬바람이 불어도 배리는 사람들 앞에서 살가운 배우자인 척 연기했다. 남편이 무뚝뚝하단 말에도 익숙하다는 듯 웃어 넘기는 여유까지 보였다. 크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경외심까지 느껴졌다. 하는 것만 보면 마약 운반이 아니라 접대 업을 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길래 범죄랑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작고 동글동글한 남자가 수배자가 되어 자신과 함께 도주 생활을 하게 된 건지. 크리스는 배리 씰이란 인간에게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침대에 앉아 지도를 보고 있던 배리에게 다가간 크리스는 배리의 옆에 드러누웠다. 배리는 황당하단 얼굴로 당신 방으로 가라고 했으나 크리스는 아예 눈을 감고 잘 준비를 했다. 그럼 내가 나간다고 몸을 일으키는 배리의 손목을 붙잡은 크리스는 그대로 배리를 끌어 당겼다. 부부라며, 밖에선 그렇게 사이 좋은 척 하더니 각방 쓰게? 배리는 이 인간이 왜 이러나 싶은 얼굴로 크리스를 바라봤다. 드물게 당황한 배리의 얼굴을 보니 유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뭐야, 진짜... 배리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크리스는 자는 척을 하며 버텼다. 배리는 결국 포기하고 하던 일을 마저 하기로 했다. 배리가 남은 돈이나 도주 경로를 확인하는 동안 크리스는 눈을 감고 배리의 기척에 집중했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작은 부스럭거림이나 침대의 진동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느낄 수 있는, 나쁘지 않은 부산스러움이었다. 이런 기분을 느낀 게 얼마 만이지. 그동안은 혼자 도망쳐 다니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스스로가 살아있다는 것 조차 잊고 살았던 것 같았다. 조직이 와해되기 전까지 크리스는 한 번도 오롯이 혼자인 적 없었다. 일을 할 때엔 믿음직한 동료들과 함께였고 집에선 아내와 아이가 있었다. 혼자 있는 걸 즐기는 듯하지만 크리스는 이런 작은 부산스러움과 인간적인 기척을 사랑했다. 답지 않게 감상에 젖은 크리스는 슬쩍 눈을 떠 배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와 통통한 뒷모습을 천천히 눈으로 덧그리던 크리스는 문득 배리와 함께 지내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시작된 악연이지만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날에 느낀 배리의 온기와 움직임은 크리스의 마음 안에 작은 일렁임을 만들어냈다.
그 다음 날부터 크리스는 매일 배리의 침실로 쳐들어왔다. 온 힘을 다 해 밀어내도 꿈쩍도 안 하자 배리는 결국 시근덕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하지만 소파에 웅크려 자는 날이 이어지자 배리의 마음속에 억울함이 치솟았다. 이 집도 내 돈으로 샀고 저 침대는 내 건데 왜 내가 나가서 자야 해? 배리가 침대에서 나가지 않고 버티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동침하게 되었다. 잠결에 품 안으로 파고든 크리스가 배리의 몸을 더듬어대서 쫓아내는 헤프닝도 있었지만 이제는 두 사람 모두 함께 잠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지기 마련이었다. 일상을 공유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저녁을 어떻게 할 지에 대해 크리스와 이야기를 나누던 배리는 문득 집 안에서도 정말 부부처럼 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크리스가 잠결에 몸을 붙여와도 전처럼 경악스럽지도 않았다. 이렇게 지내도 괜찮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크리스가 부르는 소리에 의문은 금세 사라졌다.
평온하기만 할 것 같았던 일상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깨졌다. 한적한 시골 마을엔 CIA며 마약 단속국 등 온갖 조직이 쳐들어와 도로가 차로 막힐 지경이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늘 짐을 싸두고 있던 터라 잡히지 않고 잽싸게 도망갈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이 지내던 집은 순식간에 포위됐다. 언덕 위에서 집 앞을 빼곡하게 둘러싼 요원들을 보며 크리스는 혀를 내둘렀다. 너 도대체 뭘 하던 인간이야? 항상 서글서글하게 굴어서 잊고 지냈지만 생각해보면 배리 씰은 첫 만남부터 크리스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크리스의 눈빛에 멋쩍어진 배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날 쫓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 않았냐며 변명했다. 어쨌거나 거처를 들켰으니 이제는 여기서 떠나야만 했다. 크리스를 쫓는 무리와 배리를 쫓는 무리는 체급부터가 달랐다. 배리랑 함께 다니는 게 더 부담스러울 텐데도 크리스는 자연스럽게 배리에게 지도에서 봐놨던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배리가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지만 크리스는 이미 제 계획에 배리를 끼워 넣은 후였다. 아니, 배리가 제 생각보다 거물이라는 생각이 들자 크리스는 배리 씰이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만드는 인간에게 끌렸으니까. 이제 더 이상 부부 노릇을 할 필요가 없음에도 크리스는 배리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배리 또한 크리스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정들었던 집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고, 그들을 쫓는 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나아가니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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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도 한 위험함 하는 범죄자지만 배리가 저지른 일의 스케일이 너무 커서 배리랑 붙으면 당돌하지만 밉지 않군<이 짤 같이 되는 게 좋음ㅋㅋㅋㅋㅋ 그리고 고분고분한 사람보다 사고 치는 사람을 좋아하는 크리스 취향엔 스릴을 즐기는 배리 씰이 딱이기도 하고. 배리도 말만 아니라 했지 금발에 잘생겨서 크리스가 취향이었을 듯. 이미 침대 공유도 성공했으니 계속 위장 부부 생활을 하면 마음도 맞고 몸도 맞게 되겠지 중간에 미국 시골마을에서 남자 둘이 부부 노릇을 하는데 편견이 없을 수 있나? 싶긴 했는데 대충 오메가버스처럼 동성 부부가 일상인 세계관이라 칩시다~
아이스매브
한참을 달려 도망친 두 사람은 변두리에 있는 싸구려 모텔에 도착했다. 누가 봐도 수상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주인은 그들을 눈으로 한 번 훑더니 시큰둥하게 열쇠를 건네줬다. 남자는 방 안에 들어갈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배리를 방 안에 밀어 넣고 몇 번이고 잠금장치를 확인하자 그제야 그는 안심한 듯 총을 품 안에 집어 넣었다. 배리는 스프링이 다 꺼진 매트리스 위에 앉아 남자를 관찰했다. 저걸 어떻게 처리하지, 하는 얼굴이군. 무표정을 가장하곤 있지만 심란한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중간에 버리고 갈 생각이었지만 그 형사가 끝까지 총을 내리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탄 거겠지. 범죄에 직접 가담한 적은 없지만 카르텔과 어울리며 보고 들은 것만 한 트럭이었다. 그가 단순한 강도일 뿐이란 걸 확인하니 배리의 마음은 되려 차분해졌다. ....고민 중에 미안한데, 처음부터 날 노리고 잡은 건 아니죠?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남자는 무슨 개소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완전히 긴장이 풀린 배리는 침대 헤드에 편하게 기대 앉았다. 저기, 그쪽도 쓸데없는 살인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입막음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사실 나도 수배 중인 몸이거든.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을 건네자 남자의 얼굴에 황당함이 드러났다. 수배 중이라고? 네가? 범죄랑은 연 없을 것 같은 인간이 무슨 수배자냐고 하고 싶은 거겠지. 배리는 멋쩍게 웃으며 마약 운반이랑 이것저것 해서 CIA에게 찍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당신 때문에 나까지 경찰에 안면이 생겼으니 한동안은 나도 숨어 다녀야 해요. 설마 멋대로 데려와 놓고 알아서 하라고 내치진 않겠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를 올려다보자 남자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다소 무리수란 건 알고 있지만 배리도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너 때문에 텔레비전에 얼굴이 나왔잖아! 암살자들이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데 살아있다고 확인 사살을 한 거나 마찬가지니 혼자 있는 것보단 누구라도 함께 움직이는 게 안전했다. 그게 총을 가진, 싸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더 좋고. 게다가 왠지 이 남자는 배리가 약하게 나오면 나 몰라라 하진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을 끙끙대던 남자는 마음대로 하라며 한숨을 쉬었다. 예상이 적중하자 배리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얽힌 것도 인연인데 이름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전 배리 씰이에요. 살갑게 웃으며 말을 걸었지만 남자는 배리를 무시한 채 화장실로 들어갔다. 같이 지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짤막한 대답이 들려왔다. ...크리스 시헬리스. 이름만 내뱉은 채 용건이 끝났다는 듯 문이 쾅 닫혔다. 배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닫힌 화장실 문을 쳐다봤다. ...생각보다 멋들어진 이름이네. 그것이 이 기묘한 동거의 시작이었다.
처음 몇 주간은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됐다.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며 주변과 뉴스를 체크하고, 식사는 늘 식어 빠진 배달 음식에 외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돈을 아낀다 해도 경비는 점점 바닥을 드러내 갔고 배리의 인내심 또한 이제 한계였다. 배리는 크리스를 붙잡고 시골로 가자고 설득했다. 아예 도시와 동떨어진 깡시골로 들어가서 신분을 위장한 채 상황을 살피자는 계획이었다. 크리스는 탐탁지 않아 했으나 처음으로 보는 배리의 진지한 얼굴에 설득되어 결국 그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차로 6시간을 달려 도착한 새로운 은신처는 농장과 옥수수밭밖에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시내에도 편의점 하나 없는 곳이었지만 배리는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다는 점에 감사했다. 하지만 배리의 자유는 오래 가지 않았다. 크리스는 배리가 시내로 나갈 때마다 꼭 따라나섰고, 의처증 걸린 남편처럼 아예 손목을 붙잡고 다녔다. 배리가 불편한 티를 내며 떨어지라고 속삭였지만 크리스는 요지부동이었다. 혼자 다니다 잡히기라도 하면 어쩔래? 네가 잡힌 후에 감형을 위해 내 위치를 불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마음 같아선 수갑을 채우고 싶다는 말에 배리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작은 마을에 새로 온 이웃은 그 존재만으로도 이야깃거리였다. 그런 두 사람이 어딜가나 항상 손을 잡고 다닌다면 당연히 여러 가지 소문이 돌 수 밖에 없었다. 두 분은 부부신가? 식료품점의 노파가 싱글거리며 묻는 말에 크리스의 손이 멈췄다. 당황한 크리스는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말하려 했으나 배리의 행동이 더 빨랐다. 크리스의 팔짱을 끼고 끌어당긴 배리는 생긋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결혼한 지 5년 째라며 넉살을 떠는 배리를 보자 크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배리를 흘끗거렸다. 팔꿈치에 가슴이 눌리는 것도 아는지 모르는지, 배리는 크리스에게 찰싹 달라붙어 살가운 아내처럼 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은 유달리 삭막했다. 얼마나 봤다고 부부야, 부부는... 크리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자 배리도 기분이 상했는지 이래야 의심을 안 받을 것 아니냐며 받아쳤다. 나도 당신이 취향 아니니까 참으라고 쏘아붙이는 배리의 말에 크리스는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처음엔 분명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얌전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편해진 모양인지 배리는 언젠가부터 말도 놓고 조금씩 성질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나한테 잡혀서 벌벌 떨던 건 기억 안 나나 보지? 크리스의 이죽거림에도 배리는 기가 죽지 않았다. 그땐 총을 들이대니까 그렇지. 납치범이 이렇게 유치한 남자일 줄 누가 알았나. 한 마디를 안 지는군. 이쯤 되니 분노보단 황당함이 앞섰다. 이 대화 자체가 부부싸움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랬다. 결국 크리스는 입을 다무는 걸 택했고, 그렇게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둘은 부부 행세를 하게 되었다. 집에선 찬바람이 불어도 배리는 사람들 앞에서 살가운 배우자인 척 연기했다. 남편이 무뚝뚝하단 말에도 익숙하다는 듯 웃어 넘기는 여유까지 보였다. 크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경외심까지 느껴졌다. 하는 것만 보면 마약 운반이 아니라 접대 업을 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길래 범죄랑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작고 동글동글한 남자가 수배자가 되어 자신과 함께 도주 생활을 하게 된 건지. 크리스는 배리 씰이란 인간에게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침대에 앉아 지도를 보고 있던 배리에게 다가간 크리스는 배리의 옆에 드러누웠다. 배리는 황당하단 얼굴로 당신 방으로 가라고 했으나 크리스는 아예 눈을 감고 잘 준비를 했다. 그럼 내가 나간다고 몸을 일으키는 배리의 손목을 붙잡은 크리스는 그대로 배리를 끌어 당겼다. 부부라며, 밖에선 그렇게 사이 좋은 척 하더니 각방 쓰게? 배리는 이 인간이 왜 이러나 싶은 얼굴로 크리스를 바라봤다. 드물게 당황한 배리의 얼굴을 보니 유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뭐야, 진짜... 배리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크리스는 자는 척을 하며 버텼다. 배리는 결국 포기하고 하던 일을 마저 하기로 했다. 배리가 남은 돈이나 도주 경로를 확인하는 동안 크리스는 눈을 감고 배리의 기척에 집중했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작은 부스럭거림이나 침대의 진동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느낄 수 있는, 나쁘지 않은 부산스러움이었다. 이런 기분을 느낀 게 얼마 만이지. 그동안은 혼자 도망쳐 다니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스스로가 살아있다는 것 조차 잊고 살았던 것 같았다. 조직이 와해되기 전까지 크리스는 한 번도 오롯이 혼자인 적 없었다. 일을 할 때엔 믿음직한 동료들과 함께였고 집에선 아내와 아이가 있었다. 혼자 있는 걸 즐기는 듯하지만 크리스는 이런 작은 부산스러움과 인간적인 기척을 사랑했다. 답지 않게 감상에 젖은 크리스는 슬쩍 눈을 떠 배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와 통통한 뒷모습을 천천히 눈으로 덧그리던 크리스는 문득 배리와 함께 지내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시작된 악연이지만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날에 느낀 배리의 온기와 움직임은 크리스의 마음 안에 작은 일렁임을 만들어냈다.
그 다음 날부터 크리스는 매일 배리의 침실로 쳐들어왔다. 온 힘을 다 해 밀어내도 꿈쩍도 안 하자 배리는 결국 시근덕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하지만 소파에 웅크려 자는 날이 이어지자 배리의 마음속에 억울함이 치솟았다. 이 집도 내 돈으로 샀고 저 침대는 내 건데 왜 내가 나가서 자야 해? 배리가 침대에서 나가지 않고 버티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동침하게 되었다. 잠결에 품 안으로 파고든 크리스가 배리의 몸을 더듬어대서 쫓아내는 헤프닝도 있었지만 이제는 두 사람 모두 함께 잠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지기 마련이었다. 일상을 공유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저녁을 어떻게 할 지에 대해 크리스와 이야기를 나누던 배리는 문득 집 안에서도 정말 부부처럼 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크리스가 잠결에 몸을 붙여와도 전처럼 경악스럽지도 않았다. 이렇게 지내도 괜찮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크리스가 부르는 소리에 의문은 금세 사라졌다.
평온하기만 할 것 같았던 일상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깨졌다. 한적한 시골 마을엔 CIA며 마약 단속국 등 온갖 조직이 쳐들어와 도로가 차로 막힐 지경이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늘 짐을 싸두고 있던 터라 잡히지 않고 잽싸게 도망갈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이 지내던 집은 순식간에 포위됐다. 언덕 위에서 집 앞을 빼곡하게 둘러싼 요원들을 보며 크리스는 혀를 내둘렀다. 너 도대체 뭘 하던 인간이야? 항상 서글서글하게 굴어서 잊고 지냈지만 생각해보면 배리 씰은 첫 만남부터 크리스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크리스의 눈빛에 멋쩍어진 배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날 쫓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 않았냐며 변명했다. 어쨌거나 거처를 들켰으니 이제는 여기서 떠나야만 했다. 크리스를 쫓는 무리와 배리를 쫓는 무리는 체급부터가 달랐다. 배리랑 함께 다니는 게 더 부담스러울 텐데도 크리스는 자연스럽게 배리에게 지도에서 봐놨던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배리가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지만 크리스는 이미 제 계획에 배리를 끼워 넣은 후였다. 아니, 배리가 제 생각보다 거물이라는 생각이 들자 크리스는 배리 씰이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만드는 인간에게 끌렸으니까. 이제 더 이상 부부 노릇을 할 필요가 없음에도 크리스는 배리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배리 또한 크리스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정들었던 집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고, 그들을 쫓는 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나아가니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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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도 한 위험함 하는 범죄자지만 배리가 저지른 일의 스케일이 너무 커서 배리랑 붙으면 당돌하지만 밉지 않군<이 짤 같이 되는 게 좋음ㅋㅋㅋㅋㅋ 그리고 고분고분한 사람보다 사고 치는 사람을 좋아하는 크리스 취향엔 스릴을 즐기는 배리 씰이 딱이기도 하고. 배리도 말만 아니라 했지 금발에 잘생겨서 크리스가 취향이었을 듯. 이미 침대 공유도 성공했으니 계속 위장 부부 생활을 하면 마음도 맞고 몸도 맞게 되겠지 중간에 미국 시골마을에서 남자 둘이 부부 노릇을 하는데 편견이 없을 수 있나? 싶긴 했는데 대충 오메가버스처럼 동성 부부가 일상인 세계관이라 칩시다~
아이스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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