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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20:08
톰 카잔스키는 다치고 병들어 마음의 문을 닫은 패전국의 대령,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를 처음 본 순간 그를 보듬고 사랑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하겠다고 결심했다.
포로의 처지로 칩거 명령을 받은 그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카잔스키는 군 당국을 끊임없이 설득하고 회유했다. 로비도 아끼지 않았다. 대령은 성치 않은 몸으로 혼자 타국에 남겨진 신세이며 그에겐 이념을 함께 할 동료도 가족도 남지 않았다고, 대령이 조국에 위협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단언하는 보고서를 수백 장씩 작성해 상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군 당국은 톰 카잔스키의 계급장이 여러 번 바뀐 후에야 비로소 슈타우펜베르크가 정식 시민이 되는 것을 허가했다. 새로이 만들어진 대령의 신분 증명서를 들고 저택으로 귀가하던 날 톰 카잔스키는 그에게 청혼했다. 오랜 반려와 망설임 끝에, 기나긴 독일 이름의 끝자락에 비로소 러시아식 성이 함께 붙여지던 순간을 카잔스키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기로 했다.
그는 분명 훌륭한 남편이었으나 좋은 아버지는 되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가 낳은 자식이니 아들들을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에게 쏟기에도 부족한 애정을 그들에게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제 아내가 겨우 열어 보인 반틈의 마음이 자식들에게 향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슈타우펜베르크가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그 대상은 오직 자신이어야 했으니. 마땅히 주어야 할 사랑을 주지 않은 대신 카잔스키는 자식들이 성장하는 데 불편함이 없게끔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부족한 부모가 되지 않도록, 엄밀히 말하면 슈타우펜베르크가 스스로를 부족한 부모라고 여겨 자책하고 아들들에게로 애정을 향할 일이 없도록.
그리하여 카잔스키 가의 아들들은 어머니께 걱정을 끼치지 않고, 어떤 애정도 요구하지 않으며, 독립적으로 자라도록 교육받았다. 어머니를 슬프게 하지 마라. 어머니의 관심을 바라지 마라. 그것이 그들이 자식으로서 지켜야 할 유일한 전제조건이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를 갈며 증오하든, 받지 못한 관심에 서운해하든, 혹은 아내 사랑에만 눈이 먼 비정하고 한심한 남자라며 비웃고 우습게 여기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잔스키 가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비웃는 일은 결코 없었다.
톰 카잔스키 주니어는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생들과는 달리 어머니가 저를 '토미'라고 부르며 품에 안아주는 행복을 그나마 몇 번은 경험했으니까. 같은 이름을 공유한 아들이기에 그만큼의 애정이라도 허락해 준 아버지께 감사할 따름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톰은 어머니의 품이 따뜻하지만 무척 연약하다고 생각했다. 모성애처럼 강렬한 감정을 온전히 소화하기 힘들어 보이는 위태롭고 여린 사람. 스스로를 돌보기조차 버거워 보이는 가엾은 분. 저를 안은 손길이 조금씩 떨릴 때마다 톰은 안정과 편안함보다는 불안감과 걱정을 느꼈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이만 아이를 놓아주라'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는 자신의 품으로 이끌었다. 아버지의 가슴에 기대고 나서야 힘겹게 숨을 고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톰은 부모에게 애정 받길 원하는 아이 본연의 기대를 내려놓기로 했다. 그의 부모는 서로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조심스럽고 많은 힘이 드는 까닭에 자식을 아껴줄 여유 같은 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톰이 부모에게서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한 건 아니었다. 톰은 그들을 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를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세상 무엇보다 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모든 감정과 여력을 단 한 사람만을 위해 내어주는 게 사랑이라는 것을 배웠다. 언젠가 제게도 그런 사람이 생긴다면 저들처럼 후회 없이 헌신하고 몰입하리라. 그 어떤 중요한 것들을 전부 외면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직 사랑 앞에서만 나 자신을 고스란히 바치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톰은 성장했다.
몇 년 뒤 그는 탑건에서 세 살 연하의 대위, 콜사인 매버릭을 만난다.
제가 애정결핍을 겪게 된 건 유년 시절 내리사랑의 부재 때문이었어요. 닉 리버스는 마이크를 쥔 채 슬픔에 젖은 눈으로 말했다. 아우우, 관객석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매번 크리스마스마다 제가 빌었던 소원은 '어머니의 다정한 손길을 받아보는 것'이었지만, 그 소원이 이루어진 일은 한 번도 없었답니다. 부모님은 저를 사랑할 만큼의 여유가 없는 분들이었거든요. 어린 저는 성탄절 아침이 되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트리 밑에 앉아 애꿎은 선물 상자만 뜯어댔죠. 제겐 아무 의미 없는 슬픈 플라스틱 선물들 말예요. 관객들의 비통함은 더욱 깊어졌다. (누군가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우리는 닉을 사랑해!" 라고 외치다가 제재받았다)
그런 저를 위로해 준 건 음악이었어요. 환상 같은 선율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들. 내가 모르고 살던 총천연색 감정들을 알려준 고마운 노래들. 고독한 삶의 유일한 구원 같았달까요. 음악은 곧 저의 모든 것이 되었죠, 여러분들이 아시듯이. 제가 겪었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었기에 저는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오늘 밤 여러분들도 저로 인해 그동안 몰랐던 기쁨과 즐거움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넘치는 사랑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닉 리버스가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고, 곧 다음 곡인 Spend this night with me의 달콤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VIP석에 앉아 공연을 보던 톰 카잔스키 주니어는 코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누가 들으면 네가 정말 들풀처럼 외롭게만 살아온 줄 알겠다 닉 카잔스키. 이때껏 널 애지중지 업어키운 나는 뭐가 되냐. 아버지가 사다 주신 선물 상자가 80개도 넘어서 지칠 때까지 나랑 선물 개봉식을 하고 놀았다는 건 왜 말 안 해. 아버지 카드로 네 방에 화려한 LP 컬렉션을 차려놓을 수 있었단 얘기는 왜 빼고. 그러다가 LP샵 아르바이트생이던 조르제비치 군과 눈이 맞은 덕에 지금도 불타는 연애 중인 거 아니었냐고. 톰 카잔스키 주니어가 동생의 쇼 비즈니스식 거짓말에 어이없는 실소를 짓거나 말거나, 오늘 밤 관객들은 닉 리버스가 선사하는 매혹적인 낭만에 잔뜩 빠져들 예정이었다.
담담하게 인내하기로 한 맏형,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는 우회로를 택한 둘째 형과 달리 크리스 나이트 카잔스키는 사랑 그 자체를 부정하는 쪽을 택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건 신의 축복이나 은총에서 비롯된 숭고한 감정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유전자를 안전히 보호하기 위해 뇌에서 분비한 호르몬의 작용이다. 자신의 부모는 단지 그런 쪽의 본능이 덜 발현된 개체들이었을 뿐이다. 자신과 형제들에게 무언가 흠이 있어 부모가 사랑해 주지 않은 게 아니라. 놀라웠다. 자신이 겪은 상실과 외로움은 알고 보니 전부 이성적으로 설명 가능한 일이었다. 과학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과학은 어린 크리스가 감정적 공허를 느끼는 대신 이성적인 납득과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그가 이 매력적인 학문에 깊이 몰두하게 된 건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과학에 대한 열정과 특유의 영특함 덕분에 크리스는 놀랄 만큼 이른 나이에 유수의 공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학문적 성취와는 별개로, 그는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거나 소중히 여겨지고 싶은 감정을 완전히 잊은 채로 자랐다. 훤칠하고 잘생긴 첫인상, 그리고 엉뚱한 농담들 덕에 크리스에게 호기심을 갖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묘하게 느껴지는 서늘한 거리감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치며 돌아서기 일쑤였다. 그들은 크리스가 공부만 좀 잘하지 자기 중심적이고 제멋대로인 이상한 녀석이라며 수군대곤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니 굳이 변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다. 태도를 바꾸고 싶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의 곁에 남아있는 친구들이라곤 비슷한 성향을 가진 몇몇 괴짜들이 전부였다. 연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매력적으로 굴며 접근하는 사람들과 밤을 같이 한 적은 있지만 한번도 지속적인 관계로 이어진 경우는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상호 합의 하에 생물학적 욕구를 해결한 것뿐이고 그 이상의 접촉이나 교제는 필요치 않다는 판단이었다. 크리스는 논문 연구에 매진하기에도 아까운 시간을, 고작 누군가를 설레게 만들거나 안심시켜 주겠다는 이유로 손을 잡고 캠퍼스를 산책하는 일에 허비할 생각 따위는 꿈에도 없었다.
어느 날 양자물리학 수업을 듣던 중, 발긋한 뺨을 가진 육사생도가 강의실로 쳐들어와 제 멱살을 잡아 끌더니 "이 개자식아, 네놈을 찾느라고 이 개같은 대학을 전부 싸돌아다녀야 했어! 내... 내 처음을 그렇게 가져가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혼자만 속편하게 가버리면 어떡하라는 거야! 책임져, 당장 내게 고백하고 날 애인으로 삼지 않으면 이마에 총구멍을 내버릴 테다!!"라고 외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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