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610163379
view 2561
2024.11.03 01:26
절망하는 거
황제의 목숨을 끊고 자기도 스승따라 죽으려고 했는데 버젓이 스승이 살아있는 바람에 못 죽게 되서....
루스터행맨 루행
ㅣ
"어째서 당신이 여기 계십니까."
황궁에서도 깊숙히 숨겨진 내궁, 루스터는 한 사내의 옷자락을 붙잡고 원망어린 말을 뱉었다.
"어쨰서!! 당신이 여기 있냔 말입니까!!!"
하지만 사내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저는.... 그럼 저는 어찌 해야 합니까.... 당신이 이렇게 살아있으면..."
좌절로 무릎꿇은 루스터는 그도 처음보는 모습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만 죽죽 흘리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했다. 그저 손을 올려 눈가를 닦아줄 뿐이었다.
"못난...스승이어서,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열린 입은 더듬더듬 문장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하는 말이 옳은 문법인지도 헷갈렸다.
"황제가... 되신걸..."
"아니요, 듣지 않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스승님은 어찌 이렇게 끝까지 잔혹하신지요.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저는 이제 황제의 자리도 못 내려놓지 않습니까."
안다, 그래서 한 말이었다. 제 말이라면 껌벅 죽을 자신의 제자였기에, 어렵게 잡은 자리를 내려놓지 말라고 한 말이었다.
맞은 편에서 원망어린 눈을 한 제자도 그 뜻을 알아 분한 눈치였다. 아니, 어쩌면 이 꼴을 하고 있는 나를 비웃고 있을까.
"....제가 왜 황제가 되고 싶었는지 아십니까."
"...."
"단지, 스승님의 복수를 하고 싶어서.... 나한테는 스승님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빼앗아간 황실과 이 나라가 원망스러워서...."
제자의 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어른거렸다. 어렸을 때는 아무리 다쳐도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던 놈이었는데, 다 큰 놈이 웬 어리광인지.
"해서, 이 나라를 망가뜨릴 작정이었습니다. 황실의 모든 이들을 죽이고, 제가 직접 황제가 된 뒤에 이 한 목숨 끊을 작정이었지요."
제자가 조곤조곤 내려놓는 계획은 섬찟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눈이 좀...
"그런데 이렇게 제 앞에 스승님이 계시니, 불초 제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스승님이 좀 알려주시지요, 제가 뭘하면 될지."
번뜩이는 안광이 비춘 건 전등때문이었을까, 사내는. 아니 행맨은 잠깐 고민했다.
ㅣ
행맨이 아이를 제자로 삼은 건 아주 옛날의 일이었다. 대장군이었던 그는 변경지역을 지키다가 황실에 대한 항명으로 멀리 도망쳤었다. 자신이 아무리 황실의 개라고 하더라도, 변경지역의 모든 이들을 몰살하라는 명령을 듣고 도망치지 않을 이가 없었다.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깊은 산길로 도망치다 산골에 닿았고, 화전민 무리를 만나 잠시 신세를 졌다. 그 화전민들의 무리에서 가장 어렸던 아이가 바로 루스터였다. 화전민들은 행맨을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그의 무술실력은 환영했다. 산적과 만나면 제일 선봉에 서는 게 행맨이었기에, 행맨은 화전민 무리에서 내쳐지지 않았지만 늘 무리를 맴돌아야만 했다. 그런 그에게 루스터는 화전민들을 이끄는 대장의 장남이자 유일한 아이였다. 화전민 생활을 하다 하나둘 아이를 잃어버리거나 죽어간 이들은 루스터를 귀하게 여겼고, 그런 루스터가 따르는 행맨을 더이상 무시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저의 스승님이 되어주세요!"
발랄한 아이의 부탁을 어찌 거절할까, 가르침의 대가로 받은 것은 정(情)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러하였다. 배척하던 이들은 슬금슬금 태도를 바꾸었고, 특히 루스터의 아버지가 극진한 대우로 행맨을 모시자 점차 행맨 역시 화전민들의 무리에 섞일 수 있게 되었다.
아이는 느리지만 착실히 커져갔다. 어딜 가든 행맨의 옆에 붙어 졸졸 따라다니는 통에 루스터를 찾으려면 행맨부터 찾으라는 농담이 있었을 정도였다. 어느덧 시간이 흘렀고, 화전민들은 뭉쳐졌다 흩어지길 반복하며 이리저리 산을 옮겨다녔다. 그즈음, 루스터에게 등을 맡길 수 있게 된 행맨은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풀어놓았다.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자신에게 온 마음을 다해 부닥쳐오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비천한 계급이었고, 아버지는 위세 높은 양반가였단다. 어쩌면 뻔한 이야기지, 안 그래? 세상이 나에게 냉대만 남겨주는 그 기분이란, 결국 가문을 나와 황실의 군대로 들어갔고 운이 좋게 대장군까지 승진했단다. 그런데 황실에서 국경 지역의 모든 주민을 말살하라는 명이 떨어진 거야. 차마 사람의 인격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지. 그래서 도망쳤어, 최대한 멀리. 그러다 너를 만나게 된거지."
행맨은 몰랐지만, 루스터는 그 마지막이 꼭 자신에게 향해있는 말 같다고 생각했다.
아, 그러니까 스승님과 나는 운명이구나. 우리가 만나게 된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고.
입을 헤 벌린 소년은 스승님 모르게, 아니 사실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 사람을 지키겠다고. 그 마음이 사무치는 사랑의 마음이란 걸 진작에 알았다면 이리 멀리멀리 돌아올 일도 없을텐데.
ㅣ
루스터는 까무룩 기절하듯 잠든 행맨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역시 이 황실의 종자들은 죄다 죽여야한다고. 말하기도 벅차 보이던 스승님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절해버렸다. 서둘러 그를 내궁에서 빼낸 루스터는 그를 데리고 침실로 향했다. 목욕을 시키자는 생각에 손수 옷을 벗겼더니 보이는 건 온통 입에 담지도 못할 상처뿐이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구고, 다시 말려 침대에 눕히던 순간까지도 스승님은 깨어나지 못하였다.
"역시... 다 죽여버려야 돼."
황실이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루스터는 이를 까득 깨물며 생각했다. 이 순간까지 달려오며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잔인하게 화전민을 도륙하는 황군과 그를 막아서는 스승님, 기절한 스승님을 개처럼 끌고가는 황군과 시체더미에서 더듬더듬 일어나는 자신을. 마을은 온통 불바다였고, 성한 시체는 한 구도 없었다. 그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채 밤새 시체를 옮기고 땅을 팠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이 복수를 하기로, 그리고 복수가 끝나는 대로 스승님을 찾기로.
그 목표가 변경된 건 수도로 거주지를 옮기고 한창 작전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스승님의 소식을 알아보라고 궁에 보낸 세작은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와 아무래도 그가 죽은 것 같다고 전했다. 아, 그때의 절망이란. 하지만 루스터는 주저앉을 시간조차 없었다. 한 톨의 감정마저 쏟아부어야만 했다. 그는 이전의 목표를 조금 수정했다. 황실을 모조리 죽이고 스승님을 따라가겠노라고. 지옥이라도 기꺼이 따라가겠노라고.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의 품안에 있었다.
ㅣ
날이 밝자, 황실에서 있었던 모든 비보는 도성 밖으로 퍼져나갔다. 황제가 바뀌었고, 황실의 성씨가 바뀌었으며, 황후 역시 바뀌었다.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던 행맨은 다행히 즉위식 직전에 깨어났지만, 그게 본인에게도 다행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행맨은 겨우 뜬 눈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궁녀들의 움직임을 좇았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오?"
"....황제페하의 즉위식과 황후마마의 책봉식이 열리는 날이옵니다."
"아,.. 헌데 이 옷은 무엇이오?"
".....죽...죽여주십옵소서! 마마께서 오래도록 깨어나지 않아 궁녀들끼리 치수를 재어 만든 옷입니다! 혹여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라도 있으신지..."
"....마마?"
"예?"
"내가 왜 마마더냐?"
"그야 스승님이 저의 황후가 되어주셔야 하니까요."
예고없이 열린 문에서 루스터는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이 황실에 마땅한 인재가 없어 부탁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기, 난 남자인데..."
"상관없습니다, 저는 이 황실에 미련이 없으니 양자를 들여도 됩니다. 물론,"
행맨에게 바짝 다가간 루스터가 속삭였다. 직접 낳아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만....
농염하게 허리를 매만지는 루스터를 보며 행맨은 등허리가 쭈뼛서는 기분이었다. 알았구나.
"황후께서 아플 때 제가 손수 몸을 닦고 물수건을 올렸지요."
행맨은 그저 다시 쓰러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ㅣ
'가문의 수치! 어찌 사내아이가 그런 것을 달고...!'
'에그, 해괴망측하여라!! 저걸 사내라 봐야하는지, 여인이라 봐야하는지 모르겠구나!!!'
'썩 꺼지거라! 너는 이제부터 세러신 가문이 아니다!'
남자가 귀했던 세러신 가문에서 유일하게 쫓겨난 사내, 행맨에게는 가문 사람들에게만 암암리에 난 비밀이 하나 있었다. 사내의 몸으로 여인의 성기를 달고 태어났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모두가 손가락질 하기에 꽁꽁 숨겼다. 황군이 되어서는 제일 마지막에 빨리 씻었고, 어느정도 지위에 오른 이후에는 홀로 목욕을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앞에 붙은 사내의 성기가 큰 편이라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잘 모른다는 것이다.
"황후, 제게 와주어 감사합니다."
"흐으읏, 아안... 안돼, 시러어어.... 흐으으윽, 윽... 그만, 그만....!"
성기는 매우 예민하였고, 종래에는 황제의 목을 끌어안고 채신머리없이 독촉이나 해대었다. 다음날 아침이 밝고서야 행맨은 잔뜩 부끄러움을 느낀 채 눈을 뜨지 못했다. 이대로 머리를 콕 박고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분명 책봉식을 할 때만 하더라도, 평생의 비밀이 들켰다는 생각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신방이 열리고 돌변한 황제의 애무에 그만...
"기침하셨습니까?"
".....예에.."
"아기씨가 예쁘게 잘 태어나면 좋을련만, 저는 스승님 닮은 잘생기고 총명한 사내면 좋겠습니다."
".....예?"
"이런, 제가 또 설레발을 쳤군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표정은 무언가 안도한 듯 싶었다. 루스터는 행맨을 품에 꼭 끌어안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황제새끼는 너무 괘씸하지만 그래도 살려둔만큼 참형으로 끝내야겠다고. 행맨의 악몽을 옆에서 듣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ㅣ
행맨이 땀에 잔뜩 절은 채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살려달라는 둥, 잘못했다는 둥,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그가 어쩐지 허리짓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 예상치못했던 바는 아니었다. 스승님을 살려둔 이유가 있었군, 루스터는 행맨을 천천히 흔들어깨웠다. 잠에서 깨어난 행맨은 눈앞을 가득채운 루스터에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처럼 엉엉 운 행맨은 루스터의 품에서 끊임없는 눈물을 흘렸다. 루스터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행맨을 등을 쓰다듬으며 끊임없는 그를 달랬다. 눈물과 땀으로 흠뻑 젖은 행맨은 말할 것도 없이 흥분되었지만, 루스터는 오늘만큼은 참기로 했다. 따뜻하게 데운 목욕물에 그를 안은 채 들어갔다. 이제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뺨이 발그레해진 행맨에게 루스터는 말없이 입술을 내렸다.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와 콧잔등, 그리고 숭배해 마지않는 입술까지. 행맨은 그 입술 아래 눈을 감았다.
루스터는 이런 아이였지, 그가 황후 책봉식에 당황스럽기 했어도 도망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다정한 루스터가 자신을 보듬어 줄거라는 얄팍한 생각. 더러워진 자신을 루스터가 혐오한다고 해도 할말은 없었다. 다만 지금 이렇게 위로받는 시간이 너무나 따뜻해서 행맨은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양심을 밀어놓았다.
ㅣ
행맨이 루스터애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느낀 건 첫 아이를 낳은 이후였다. 루스터는 아이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행맨의 몸상태를 챙겼다. 힘이 다 빠지고 땀에 젖어 형편없는 몰골일텐데도 루스터는 행맨에게 예쁘다며 입술을 내렸다. 행맨은 이제 루스터의 냉대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루스터에게 외면받고 냉대받는다면 제일 먼저 무너질 것만 같았다.
"신첩을 버리지 마세요, 폐하..."
행맨에게 기쁜 날 소원을 말해보라는 루스터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였다. 파르르 떨며 눈을 내리깐 행맨에게서 믿기지 못할 말이 흘러나오자 루스터는 그야말로 혼란에 빠졌다. 이때까지 내가 애정을 베푼줄 알았던 것인가, 루스터는 행맨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얘기했다.
"스승님이야말로 절 두번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스승님이 죽더라도 지옥끝까지 따라갈테니까요."
그 말이 왜 이렇게 든든하고 안심이 되는지, 행맨은 살짝 웃으며 눈을 감았다. 잠이 쏟아져내렸다.
ㅣ
행맨과 루스터의 첫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루스터는 행맨이 너무 고생해서 아이를 그만 낳았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행맨은 아니었다. 첫째가 너무 행맨을 닮아 자신의 어린 시절과 똑닮았던 터였다. 다행히 성기는 남성의 것 하나였지만, 행맨은 루스터를 닮은 아이 딱 한 명만 더 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물론 루스터에게 다 들리도록.
"황후, 다 들립니다."
"일부러 그러는 겁니다."
".....황후 몸이 상할까 걱정됩니다."
듣는 귀가 는 탓에 둘은 이제 서로의 호칭을 조금 수정하였다. 소소한 나날들이 반복되었다.
루스터는 여전히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스승님이 납치되던 그런 장면들이 아니라, 스승님에게 처음으로 고백을 듣던 날의 기억이다. 봄바람이 살랑 불어오던 어느 저녁, 흩날리는 벚꽃 아래 서있던 스승님은 이제 자신을 황후로 불러달라고 고백했다. 은애한다고 속삭이던 그 나무 아래의 기억은 루스터가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행맨에게서 잊지 못할 소리가 있었다. 딱 하나였다. 내궁의 문을 열고 걸어들어온 루스터가 아이처럼 엉엉 울다가, 까무룩 정신을 잃은 자신을 향해 사랑한다던 소리.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루스터의 목소리만은 오래오래 가슴에 남았다. 당신을 사랑해 여기까지 왔다고, 진작 말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그런데 버릇없는 제자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 목소리만은 죽어서도 잊지못할 터였다.
ㅣ
상상할때만 해도 피폐감금광공물이었는데 왜째서 해피엔딩이 되었지? 암튼 둘은 영사해.
황제의 목숨을 끊고 자기도 스승따라 죽으려고 했는데 버젓이 스승이 살아있는 바람에 못 죽게 되서....
루스터행맨 루행
ㅣ
"어째서 당신이 여기 계십니까."
황궁에서도 깊숙히 숨겨진 내궁, 루스터는 한 사내의 옷자락을 붙잡고 원망어린 말을 뱉었다.
"어쨰서!! 당신이 여기 있냔 말입니까!!!"
하지만 사내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저는.... 그럼 저는 어찌 해야 합니까.... 당신이 이렇게 살아있으면..."
좌절로 무릎꿇은 루스터는 그도 처음보는 모습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만 죽죽 흘리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했다. 그저 손을 올려 눈가를 닦아줄 뿐이었다.
"못난...스승이어서,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열린 입은 더듬더듬 문장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하는 말이 옳은 문법인지도 헷갈렸다.
"황제가... 되신걸..."
"아니요, 듣지 않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스승님은 어찌 이렇게 끝까지 잔혹하신지요.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저는 이제 황제의 자리도 못 내려놓지 않습니까."
안다, 그래서 한 말이었다. 제 말이라면 껌벅 죽을 자신의 제자였기에, 어렵게 잡은 자리를 내려놓지 말라고 한 말이었다.
맞은 편에서 원망어린 눈을 한 제자도 그 뜻을 알아 분한 눈치였다. 아니, 어쩌면 이 꼴을 하고 있는 나를 비웃고 있을까.
"....제가 왜 황제가 되고 싶었는지 아십니까."
"...."
"단지, 스승님의 복수를 하고 싶어서.... 나한테는 스승님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빼앗아간 황실과 이 나라가 원망스러워서...."
제자의 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어른거렸다. 어렸을 때는 아무리 다쳐도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던 놈이었는데, 다 큰 놈이 웬 어리광인지.
"해서, 이 나라를 망가뜨릴 작정이었습니다. 황실의 모든 이들을 죽이고, 제가 직접 황제가 된 뒤에 이 한 목숨 끊을 작정이었지요."
제자가 조곤조곤 내려놓는 계획은 섬찟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눈이 좀...
"그런데 이렇게 제 앞에 스승님이 계시니, 불초 제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스승님이 좀 알려주시지요, 제가 뭘하면 될지."
번뜩이는 안광이 비춘 건 전등때문이었을까, 사내는. 아니 행맨은 잠깐 고민했다.
ㅣ
행맨이 아이를 제자로 삼은 건 아주 옛날의 일이었다. 대장군이었던 그는 변경지역을 지키다가 황실에 대한 항명으로 멀리 도망쳤었다. 자신이 아무리 황실의 개라고 하더라도, 변경지역의 모든 이들을 몰살하라는 명령을 듣고 도망치지 않을 이가 없었다.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깊은 산길로 도망치다 산골에 닿았고, 화전민 무리를 만나 잠시 신세를 졌다. 그 화전민들의 무리에서 가장 어렸던 아이가 바로 루스터였다. 화전민들은 행맨을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그의 무술실력은 환영했다. 산적과 만나면 제일 선봉에 서는 게 행맨이었기에, 행맨은 화전민 무리에서 내쳐지지 않았지만 늘 무리를 맴돌아야만 했다. 그런 그에게 루스터는 화전민들을 이끄는 대장의 장남이자 유일한 아이였다. 화전민 생활을 하다 하나둘 아이를 잃어버리거나 죽어간 이들은 루스터를 귀하게 여겼고, 그런 루스터가 따르는 행맨을 더이상 무시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저의 스승님이 되어주세요!"
발랄한 아이의 부탁을 어찌 거절할까, 가르침의 대가로 받은 것은 정(情)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러하였다. 배척하던 이들은 슬금슬금 태도를 바꾸었고, 특히 루스터의 아버지가 극진한 대우로 행맨을 모시자 점차 행맨 역시 화전민들의 무리에 섞일 수 있게 되었다.
아이는 느리지만 착실히 커져갔다. 어딜 가든 행맨의 옆에 붙어 졸졸 따라다니는 통에 루스터를 찾으려면 행맨부터 찾으라는 농담이 있었을 정도였다. 어느덧 시간이 흘렀고, 화전민들은 뭉쳐졌다 흩어지길 반복하며 이리저리 산을 옮겨다녔다. 그즈음, 루스터에게 등을 맡길 수 있게 된 행맨은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풀어놓았다.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자신에게 온 마음을 다해 부닥쳐오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비천한 계급이었고, 아버지는 위세 높은 양반가였단다. 어쩌면 뻔한 이야기지, 안 그래? 세상이 나에게 냉대만 남겨주는 그 기분이란, 결국 가문을 나와 황실의 군대로 들어갔고 운이 좋게 대장군까지 승진했단다. 그런데 황실에서 국경 지역의 모든 주민을 말살하라는 명이 떨어진 거야. 차마 사람의 인격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지. 그래서 도망쳤어, 최대한 멀리. 그러다 너를 만나게 된거지."
행맨은 몰랐지만, 루스터는 그 마지막이 꼭 자신에게 향해있는 말 같다고 생각했다.
아, 그러니까 스승님과 나는 운명이구나. 우리가 만나게 된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고.
입을 헤 벌린 소년은 스승님 모르게, 아니 사실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 사람을 지키겠다고. 그 마음이 사무치는 사랑의 마음이란 걸 진작에 알았다면 이리 멀리멀리 돌아올 일도 없을텐데.
ㅣ
루스터는 까무룩 기절하듯 잠든 행맨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역시 이 황실의 종자들은 죄다 죽여야한다고. 말하기도 벅차 보이던 스승님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절해버렸다. 서둘러 그를 내궁에서 빼낸 루스터는 그를 데리고 침실로 향했다. 목욕을 시키자는 생각에 손수 옷을 벗겼더니 보이는 건 온통 입에 담지도 못할 상처뿐이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구고, 다시 말려 침대에 눕히던 순간까지도 스승님은 깨어나지 못하였다.
"역시... 다 죽여버려야 돼."
황실이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루스터는 이를 까득 깨물며 생각했다. 이 순간까지 달려오며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잔인하게 화전민을 도륙하는 황군과 그를 막아서는 스승님, 기절한 스승님을 개처럼 끌고가는 황군과 시체더미에서 더듬더듬 일어나는 자신을. 마을은 온통 불바다였고, 성한 시체는 한 구도 없었다. 그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채 밤새 시체를 옮기고 땅을 팠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이 복수를 하기로, 그리고 복수가 끝나는 대로 스승님을 찾기로.
그 목표가 변경된 건 수도로 거주지를 옮기고 한창 작전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스승님의 소식을 알아보라고 궁에 보낸 세작은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와 아무래도 그가 죽은 것 같다고 전했다. 아, 그때의 절망이란. 하지만 루스터는 주저앉을 시간조차 없었다. 한 톨의 감정마저 쏟아부어야만 했다. 그는 이전의 목표를 조금 수정했다. 황실을 모조리 죽이고 스승님을 따라가겠노라고. 지옥이라도 기꺼이 따라가겠노라고.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의 품안에 있었다.
ㅣ
날이 밝자, 황실에서 있었던 모든 비보는 도성 밖으로 퍼져나갔다. 황제가 바뀌었고, 황실의 성씨가 바뀌었으며, 황후 역시 바뀌었다.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던 행맨은 다행히 즉위식 직전에 깨어났지만, 그게 본인에게도 다행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행맨은 겨우 뜬 눈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궁녀들의 움직임을 좇았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오?"
"....황제페하의 즉위식과 황후마마의 책봉식이 열리는 날이옵니다."
"아,.. 헌데 이 옷은 무엇이오?"
".....죽...죽여주십옵소서! 마마께서 오래도록 깨어나지 않아 궁녀들끼리 치수를 재어 만든 옷입니다! 혹여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라도 있으신지..."
"....마마?"
"예?"
"내가 왜 마마더냐?"
"그야 스승님이 저의 황후가 되어주셔야 하니까요."
예고없이 열린 문에서 루스터는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이 황실에 마땅한 인재가 없어 부탁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기, 난 남자인데..."
"상관없습니다, 저는 이 황실에 미련이 없으니 양자를 들여도 됩니다. 물론,"
행맨에게 바짝 다가간 루스터가 속삭였다. 직접 낳아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만....
농염하게 허리를 매만지는 루스터를 보며 행맨은 등허리가 쭈뼛서는 기분이었다. 알았구나.
"황후께서 아플 때 제가 손수 몸을 닦고 물수건을 올렸지요."
행맨은 그저 다시 쓰러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ㅣ
'가문의 수치! 어찌 사내아이가 그런 것을 달고...!'
'에그, 해괴망측하여라!! 저걸 사내라 봐야하는지, 여인이라 봐야하는지 모르겠구나!!!'
'썩 꺼지거라! 너는 이제부터 세러신 가문이 아니다!'
남자가 귀했던 세러신 가문에서 유일하게 쫓겨난 사내, 행맨에게는 가문 사람들에게만 암암리에 난 비밀이 하나 있었다. 사내의 몸으로 여인의 성기를 달고 태어났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모두가 손가락질 하기에 꽁꽁 숨겼다. 황군이 되어서는 제일 마지막에 빨리 씻었고, 어느정도 지위에 오른 이후에는 홀로 목욕을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앞에 붙은 사내의 성기가 큰 편이라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잘 모른다는 것이다.
"황후, 제게 와주어 감사합니다."
"흐으읏, 아안... 안돼, 시러어어.... 흐으으윽, 윽... 그만, 그만....!"
성기는 매우 예민하였고, 종래에는 황제의 목을 끌어안고 채신머리없이 독촉이나 해대었다. 다음날 아침이 밝고서야 행맨은 잔뜩 부끄러움을 느낀 채 눈을 뜨지 못했다. 이대로 머리를 콕 박고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분명 책봉식을 할 때만 하더라도, 평생의 비밀이 들켰다는 생각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신방이 열리고 돌변한 황제의 애무에 그만...
"기침하셨습니까?"
".....예에.."
"아기씨가 예쁘게 잘 태어나면 좋을련만, 저는 스승님 닮은 잘생기고 총명한 사내면 좋겠습니다."
".....예?"
"이런, 제가 또 설레발을 쳤군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표정은 무언가 안도한 듯 싶었다. 루스터는 행맨을 품에 꼭 끌어안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황제새끼는 너무 괘씸하지만 그래도 살려둔만큼 참형으로 끝내야겠다고. 행맨의 악몽을 옆에서 듣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ㅣ
행맨이 땀에 잔뜩 절은 채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살려달라는 둥, 잘못했다는 둥,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그가 어쩐지 허리짓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 예상치못했던 바는 아니었다. 스승님을 살려둔 이유가 있었군, 루스터는 행맨을 천천히 흔들어깨웠다. 잠에서 깨어난 행맨은 눈앞을 가득채운 루스터에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처럼 엉엉 운 행맨은 루스터의 품에서 끊임없는 눈물을 흘렸다. 루스터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행맨을 등을 쓰다듬으며 끊임없는 그를 달랬다. 눈물과 땀으로 흠뻑 젖은 행맨은 말할 것도 없이 흥분되었지만, 루스터는 오늘만큼은 참기로 했다. 따뜻하게 데운 목욕물에 그를 안은 채 들어갔다. 이제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뺨이 발그레해진 행맨에게 루스터는 말없이 입술을 내렸다.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와 콧잔등, 그리고 숭배해 마지않는 입술까지. 행맨은 그 입술 아래 눈을 감았다.
루스터는 이런 아이였지, 그가 황후 책봉식에 당황스럽기 했어도 도망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다정한 루스터가 자신을 보듬어 줄거라는 얄팍한 생각. 더러워진 자신을 루스터가 혐오한다고 해도 할말은 없었다. 다만 지금 이렇게 위로받는 시간이 너무나 따뜻해서 행맨은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양심을 밀어놓았다.
ㅣ
행맨이 루스터애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느낀 건 첫 아이를 낳은 이후였다. 루스터는 아이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행맨의 몸상태를 챙겼다. 힘이 다 빠지고 땀에 젖어 형편없는 몰골일텐데도 루스터는 행맨에게 예쁘다며 입술을 내렸다. 행맨은 이제 루스터의 냉대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루스터에게 외면받고 냉대받는다면 제일 먼저 무너질 것만 같았다.
"신첩을 버리지 마세요, 폐하..."
행맨에게 기쁜 날 소원을 말해보라는 루스터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였다. 파르르 떨며 눈을 내리깐 행맨에게서 믿기지 못할 말이 흘러나오자 루스터는 그야말로 혼란에 빠졌다. 이때까지 내가 애정을 베푼줄 알았던 것인가, 루스터는 행맨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얘기했다.
"스승님이야말로 절 두번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스승님이 죽더라도 지옥끝까지 따라갈테니까요."
그 말이 왜 이렇게 든든하고 안심이 되는지, 행맨은 살짝 웃으며 눈을 감았다. 잠이 쏟아져내렸다.
ㅣ
행맨과 루스터의 첫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루스터는 행맨이 너무 고생해서 아이를 그만 낳았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행맨은 아니었다. 첫째가 너무 행맨을 닮아 자신의 어린 시절과 똑닮았던 터였다. 다행히 성기는 남성의 것 하나였지만, 행맨은 루스터를 닮은 아이 딱 한 명만 더 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물론 루스터에게 다 들리도록.
"황후, 다 들립니다."
"일부러 그러는 겁니다."
".....황후 몸이 상할까 걱정됩니다."
듣는 귀가 는 탓에 둘은 이제 서로의 호칭을 조금 수정하였다. 소소한 나날들이 반복되었다.
루스터는 여전히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스승님이 납치되던 그런 장면들이 아니라, 스승님에게 처음으로 고백을 듣던 날의 기억이다. 봄바람이 살랑 불어오던 어느 저녁, 흩날리는 벚꽃 아래 서있던 스승님은 이제 자신을 황후로 불러달라고 고백했다. 은애한다고 속삭이던 그 나무 아래의 기억은 루스터가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행맨에게서 잊지 못할 소리가 있었다. 딱 하나였다. 내궁의 문을 열고 걸어들어온 루스터가 아이처럼 엉엉 울다가, 까무룩 정신을 잃은 자신을 향해 사랑한다던 소리.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루스터의 목소리만은 오래오래 가슴에 남았다. 당신을 사랑해 여기까지 왔다고, 진작 말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그런데 버릇없는 제자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 목소리만은 죽어서도 잊지못할 터였다.
ㅣ
상상할때만 해도 피폐감금광공물이었는데 왜째서 해피엔딩이 되었지? 암튼 둘은 영사해.
https://hygall.com/610163379
[Code: c22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