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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2 02:40
여덟겹벗기기 https://hygall.com/609711526
놀즈너붕붕
"그래, 난, 퍼킹 라이언 레이놀즈야."
거울 너머를 바라보며 한 번 중얼거렸다. 거울을 보면서 진짜 너야? 라고 반복해서 물으면 미쳐버린다는 괴담을 아는데, 다행히 나는 그 괴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냥 가끔 또는 자주 나 자신이 누구인지 복기해야했다.
준비 안 된 채 움직이거나 일터에 뛰어 들어서 난장판 만들지 말자. 어지간하면 폐 끼치지 말자.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내 최선을 다 하자. 소리없이 안에서 공명하는 말을 몇 번 반복하선 거울로 두 손을 쭈욱 뻗는다.
"빌어먹을 라이언 레이놀즈라고."
아마 누가 봐도 오해할 상황이다. 자기애에 너무 취하다 못해 미쳐버렸나 봐. 거울 보고 발정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아마 내 이름을 가진 루머 중에 최악일 거다. 자존심 상하고 창피해서 침대 밑에서 자는 걸 택할지도 모른다.
지금 이렇게 중얼거리는 건 내 자신에 대한 위대함을 읉는 게 아니다. 그냥, 내가 헐리우드에 몸 담고 있는 인간이라는 걸 스스로한테 깨우쳐 주는 거다. 자만하지 말라는 대단한 자기 절제나 겸손 따위도 아니다.
일을 하기 위해, 연기를 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거치는 관문 같은 거다.
이 주문같지도 않은 허접한 걸 몇 번 반복하고 나면 문을 열고 나서부터는 제법 수월해진다.
인간 라이언 레이놀즈 대신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로 얼굴을 갈아 치우는 것이.
일하다 보면 스탭 이름 외우는 정도야 뭐.
솔직히 수 백 명의 스탭 이름을 모두 외울 수는 없다. 소문에 따르면 스탭들을 알뜰살뜰 챙기는 한 배우가 스탭 이름 명단을 들고 다니며 부른단다. 제법 낭만적인 다정함이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별로 다정하지 않다.
그렇다고 매정하고 다정하지 못하냐 물으면 그건 아니다. 내 자신을 보호하자는 게 아니라, 인간인지라 나도 다정함이 있다!
그냥 내 다정의 한계치는 그렇게 무한하지 않고 적절한 휴식이나 성공이라는 보상으로 불규칙하게 채워진다. 그래서 나도 그걸 아껴서 써야 할 때 쓸 뿐이다. 다정이 바닥난 사람은 매력따위 없으니까.
눈이 자주 마주치는 거? 클래식이지. 거의 모든 영화에서 사랑에 빠지기 전 시선을 나누는 신을 찍는다.
내게 사심을 담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 역시 많았다. 종종 남자가 있었다는 것 역시 부정하지 않겠다.
나는 불특정 다수의 많은 사람들에게 어쩌다 보니 내 매력을 흩날리고 다니는 놈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엉덩이가 해픈 놈은 아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하는 걸 농담이라 치부하더라.
사실 농담이 아니었던 적도 꽤 있는데, 그걸 정정해봤자 분위기 흐리는 것 밖에 안 되어서 그냥 또 다른 농담으로 넘어간다.
이 곳에서 타인을 대할 때 진실만을 사용할 수는 없거든.
이것 역시 뭐, 믿거나. 말거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모두에게 내 '진짜모습'을 보이는 걸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겼거든.
아무튼 미술팀 허니 비 와는 눈이 자주 마주쳤다. 초반에는 당연히 이름조차 몰랐다.
나는 내 매니저를 붙들고 테이블 위에 놓을 스탠드 조명을 들고 가는 허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여자 보여?"
"여자? 여기 여자 많아. 라이언. 요즘 세상은 평등을 위해 고용의 다양성을..."
"안 믿기겠지만 나 뉴스도 보고 책도 봐.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키는 대충... 내 쇄골쯤 올 것 같고. 아니다. 더 작나? 아무튼. 작은 조명 들고 가는 사람 말이야. 아니, 걸음이 왜 저렇게 빨라?"
투덜거리는 동안 매니저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 허니 비?"
"허니 비?"
"대체로 평판 좋아. 얼핏 보면 조용해 보이는데 막상 대화해 보면 뭔가 시니컬하고 흥미롭대. 누가 그랬는데. 쫀득한 매력이 있다고."
"......"
"왜?"
매니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콜라를 한 모금 주욱 마시는 걸 보며, 나는 느리게 손가락을 뻗었다.
"너 그거."
"?"
"성희롱이야."
"히엑?"
매니저가 말한 쫀득한은 허니 비의 성격에 관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내가 별로 듣기 싫었다.
당사자도 아니고 딱히 이렇다 할 관계도 아닌 사람이 나대는 것 같지만 두고 볼 수는 없지. 내 말에 매니저는 통통한 볼을 우물거리며 자신의 표현이 잘못됐던 것 같다고, 그러지 않겠다고 사과했다.
허니 비.
허니 비.
허니 비.
뭔가를 결심할 때처럼 이름을 속 안에서 몇 번 굴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잘 굴러가네. 데굴데굴 여기저기를 치고 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키고 있어.
나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단하네. 허니 비?"
감정에 매몰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확신하다.
당시 나는 몰아치는 것들에 대해 제대로 방어할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여서 심적으로 몹시 피로한 상태였다.
누군가는 찌질하고 남자답지 못한 선택이라 하겠지만 당장 해소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사람 없는 곳에 가서 울었다. 눈물로 감정을 털어내려는 나만의 방식인 거다.
거기서 발칙한 허니 비를 마주칠 줄이야.
안 그래도 둘이 있을 틈이 한 번쯤은 생기지 않을까 했는데. 마치 신이 내게 내려주신 운명 같았다. 내 너를 괴롭게 했으니 곧 즐거움도 주리라. 에이맨. 직접적으로 화답하진 않았지만 내 나름대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런 식으로 엮이고, 친구라는 영역에 단단히 묶어두고, 거리를 좁히고.
직접 사냥을 해 본 건 아니지만 얼추 비슷한 마음이었다. 먹잇감을 하나 정해 두고 점점 범위를 좁혀 나가는 거다. 물론 나는 아마존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맹수가 아니니 허니를 뜯어 먹진 않겠지만.
어차피 계획대로 될 거였고 장기전이 되어도 상관 없었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지난 노력의 결과는 성공으로 진화하는 거니까.
상대가 꺼려할 만한 요소는 이미 뒤에서 모두 작업해 둔 뒤 앞에서는 고해하듯 말하며 농담을 섞는다.
농담이야 내 주무기니까. 그럼 앙큼한 허니 비는 내 검은 속내를 다 안다는 눈을 하면서도 매섭게 캐묻지는 않았다.
만약 나를 내몬 채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추궁이라도 했다면? 내 정신적 오르가즘이 한층 더 강해졌을지도 모른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허니 비를 보면 늘 정신적으로 발정한 상태니까.
그냥 보고 있으면 무언가가 충족된다. 다른 어떤 것보다 흥미롭다. 툭 던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가볍게 던져버리고야 마는 그 집념과 까칠한 다정함이 마음에 든다. 내 뇌를 천박하게 만드는데 그래서 좋다.
그러니 허니가 파티에 간다는 이야기는 내게 몹시 거슬릴 수밖에.
허니의 모든 친구관게에 참견을 하려는 건 아니다. 아직 그 만큼 나락으로 가진 않았다.
호기심의 빛을 눈가에 가득 안고 허니에게 말을 거는 남자는 정말이지 별로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내게 있어서는 최악이다.
매너고 나발이고 그런 거 재고 따지는 동안 밀림에서는 다른 맹수가 나타나 먹잇감을 채간다.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고 있다며 넘겨주는 허니의 손길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 받고 있지 않은가.
그냥 대충 개소리 지껄이며 사이를 파고 들어가 앉는다. 여긴 쇼파가 빌어먹게 좁네. 그렇다고 내가 다시 튕겨 나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허니는 내 등장에 아직 제대로 적응을 못한 모양이었고, 조금 옆으로 밀려난 남자가 헤실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와. 라이언씨? 나 진짜 팬이에요. 저 아세요?"
"알지. 저번에 나 죽이게 찍어줬잖아. 근데 피사체가 근사한 덕도 꽤 있지?"
"피사체와 제 실력이 딱 맞아 떨어졌을 때가 가장 아름답죠."
이거 봐라. 저 무해한 웃음으로, 눈 한 번 돌리는 법 없이 정체 모를 술을 홀짝홀짝 마시며 낀 채로 앉아있다.
"......아 좀!"
저를 두고 두 사내가 눈으로 쌈박질을 하건 말건 허니는 개의치 않았다.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허니가 표효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우리 둘의 시선을 한 데 모았다.
"좁아 터져 죽어버리겠네! 내가 꺼지긴 싫으니까 키 큰 두 사람이 꺼져!!!!!"
나름 맹수의 기싸움을 하던 남자와 나는 허니의 맹렬한 기세에 주춤한다.
아무래도 내 먹잇감이 가장 몸집이 크다는 아프리칸 코끼리인듯 하다. 그 큰 발로 나를 짓밟아 제압하는 느낌이었다.
당연히도 그게 매우 섹시했다.
약티모시너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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