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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19:32




흐트러진 머리칼은 그가 얼마나 빠르게 달려왔는가를 짐작할 만한 지표가 되었다. 커다란 청포도를 가득 박아둔 눈망울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주변을 살펴댔으나 정작 그가 찾고 있는 건 눈에 보이지 않았는지 그의 슬리퍼는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수 있을 법한 동공, 쉴새없이 떨리고 있는 손, 휘청거리는 다리. 그는 지금 응급실 한 가운데에서 그의 애인을 찾는 중이었다.



아이스맨의 충실한 수하는 매버릭을 질질 끌고 나와 겨우 의자에 앉혔다. 눈물도 흘리지 않는 이 미련한 남자가 어디가 좋은 건지 수하로선 알 수 없었지만, 제 주인은 이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후에 챙겨야할 사람을 본인이 아닌 매버릭으로 지정한 상태였다. 그는 아이스맨에게 아주 충실한 수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제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주인의 명도 굳건히 따라야만 했다. 그는 오돌오돌 떨고 있는 가엾은 매버릭에게 제 외투를 걸치게 하고, 맨발이나 다름없는 상태의 슬리퍼를 바꿔 신어줬으며, 최대한 따뜻한 목소리로—이게 관건이라는 나긋나긋한 제독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그를 위로했다.



"수술이 길어지지 않는 걸로 봐선 의사들이 예상한 정도에서 그친 것 같습니다."
"......"

"이렇게 만든 새끼들을 색출 중이니 관련 사건은 저나 변호사 님께 맡기시면 될 거고요."

"......"

"...제독님이 기다려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럴 때요."

"......"

"일어나실 겁니다."



매버릭은 코 끝이 빨개지도록 울음을 참는 중이었다. 제가 저 수술방에 들어가있는 건 익숙했으나, 아이스가 들어가있는 건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었다. 걘 전투기도 이제 안 타는데. 차라리 전투기라도 타서 이런 거면, 아니, 아니야. 전투기도 태우면 안 되겠어.

빨간 등이 깜빡거리며 벌써 수술이 5시간을 넘겼음을 알렸다. 아이스의 비서는 매버릭에게 들어가서 눈을 붙이라고 권유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과를 듣기 전까진 버티겠다는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매버릭은 시리도록 차가운 복도에서 아이스맨의 수술 시간을 감내했다.


아이스맨이 눕혀진 침대를 간호사들이 병실로 밀고 들어왔다. 하얀 간호사 옷과 하늘색의 수술복, 감색의 환자복이 뒤엉켜 매버릭의 시야를 어지럽게 했다. 의사는 빠르게 들어와 환자의 보호자와 그 보호자의 보호자 앞에서 환자에 대한 간략한 브리핑을 했다. 매버릭의 귀에는 수술이 잘 끝났다는 것 외엔 더 들어오는 게 없었다. 그런 그를 대신하여 비서가 의사와 소통했다.

매버릭의 눈 앞에 누워있는 아이스맨은 과하게 생소했다.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는 없다고 평생을 생각해왔는데, 매버릭은 이제 그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그는 이 자리가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았다. 핏기가 없는 얼굴을 만져보고 싶었으나 차갑게 식어버렸을까봐 손을 뻗어보지도 못했다.

의료진들이 모두 나가고나서야 매버릭은 아이스맨 앞에서 눈물을 터트렸다.
아이스맨 앞에서만 울기로 약속했던 것에 충실히 보답하듯 매버릭은 엉엉 울어재꼈다.



의사가 깨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시간이 훌쩍 넘어갔는데도 아이스맨의 눈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많은 의료진들이 들어와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약물을 주사해봤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매버릭과 비서는 돌아가며 그들에게 항의를 해도 그들 역시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한 상태라 답할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었다. 매버릭은 입술을 바르르 떨며 아이스맨의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



이상하게 네 손이 너무 차가워, 아이스...



제 온기를 나누어주려는 듯 매버릭은 자꾸 아이스맨의 손에 집착했다. 간호사들이 그의 팔에 새로운 링거를 꽂아넣을 때마저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검사를 해야해서 검사실로 아이스맨의 침대가 나갔을 때를 제외하곤 매버릭은 아이스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해군도 비상이었다. 가장 유능한 제독과 가장 빠른 파일럿이 군을 비운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빠진다고 휘청거릴 조직은 아니었으나 해군에서도 감수해야할 위험이 생긴 거나 다름이 없었다. 입원한 지 사흘이 지났을 때, 매버릭의 복귀를 원한다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매버릭은 완강히 거절했다. 제가 쓰지 않은 수많은 연차들을 들이밀면서. 그리고 그는 만약 아이스맨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제출할 전역 관련 서류도 가슴에 품은 상태였다.


그가 수술받은 지 나흘이 되었을 때 병실 내부엔 비서가 매일 사다 바꿔두는 꽃병과 매버릭이 은은히 틀어둔 클래식, 그리고 매버릭만이 채워져있었다. 매버릭은 아이스맨의 간병일 모든 것에 손을 뻗어 해냈다. 그의 얼굴을 닦아내고, 링거와 약을 위해 간호사를 부르고, 그가 들을 수 있게 책을 소리내어 읽었다. 그를 기다리기 위하여 간간히 입에 무언가를 넣기도 했지만 비서가 사온 대다수의 음식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편이었다.



"...And thou away, the very birds are mute; Or if they sing, 'tis with so dull a cheer That leaves look pale, dreading the winter's near."



소네트를 읽어내는 소리 사이마다 흐느낌이 섞였으나 그걸 들을 사람은 앞에 누워있는 아이스맨뿐이었다. 매버릭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쏟아냈다. 그가 고개를 떨구자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바지에 얼룩이 생겨났다. 잠에 들지 못해서 눈이 새빨개져 있어도 눈물은 쉽게 흘러내렸다. 한참을 킹킹, 소리내던 매버릭은 제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매버릭에겐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제 애인이 절실했다.



"...맵."
"아이스?"




고개를 든 매버릭이 아이스맨의 가늘게 뜬 눈과 마주했다. 그는 메마른 입술로 매버릭을 부르며 겨우 손을 움직였다. 매버릭은 이제 쏟을 수 있는 눈물이 없다고 생각했음에도 자꾸 흐르는 눈물에 자꾸 눈 쪽을 훔치느라 아이스맨의 얼굴을 흐릿하게 봐야만 했다.



"...매...브...미안해."

"흐윽, 그래. 넌 좀, 킁, 미안해 해야 돼."

"...나, 괜...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미친놈아 너 4일만에 눈 떴거든?? 나 과부 만들려고 했지 나쁜 새끼야."

"...남편이 살...아있는데...과부는...무슨."




아이스맨은 팔을 조심히 들어 젖은 연인의 얼굴을 살살 쓸어냈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매버릭은 한 번 더 팡 터진 감정을 끅끅 내뱉어냈다.



"무서웠어?"

"4일이나 누워있는데 그럼 안 무서워? 너 진짜 조금만 더 늦었어봐."

"미안해. 늦을 줄 몰랐어."

"진짜... 너..."




매버릭은 이제 아이스맨의 품에 안겨있었다. 링겔바늘이 당겨서 힘들었지만 제 앞에 앉아있는 연인의 투정을 받아내는 게 우선이었으므로. 아이스맨은 기꺼이 제 연인을 품에 안아 달랬다.


 

"너... 나보다 빨리 죽으면 안돼. 약속해."

"내가 3살이나 많은데도 그런거야?"




장난스레 넘기려고 하는 애인이 괘씸해 가슴팍을 톡, 쳤다. 아프면 안되니까, 톡.



"킁, 안 돼. 그니까 나 죽는 거 보고 죽어."

"쉽지 않네... 알겠어. 오늘부터 유산소 1시간 더 늘려야겠다."

"약속해."

"그래. 약속."




매버릭의 불안을 모르지 않는 아이스맨은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 그게 제 연인을 안정시켜준다면야.

아이스맨은 못할 것도 없었다. 있는 힘껏 매버릭보다 하루 더 오래 사리라. 그렇게 아이스맨의 토닥거림은 의사가 병실을 방문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아이스매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