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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7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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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여섯겹 벗기기

놀즈너붕붕







상대방이 제안이나 대안을 내놓았을 때, 무조건 NO를 외치는 타입은 아니다. 

제안과 대안이 나왔다는 건 그 사람도 생각이라는 걸 했을 테고 결론으로 완성되기까지 고민을 했을 테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그건 아닌 것 같다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그것보단 이건 어때? 라고 제안하는 편이다. 그게 일종의 매너라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지금 난 레이놀즈에게 연달아 NO만 외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나 둘 다 서로의 고집을 굽히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싫다는 건데?"


그가 퍽 지친 얼굴로 핸들 위로 엎어졌고 나 역시 힘이 빠진 채 뒤로 목을 젖혔다.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예상 범위를 벗어나면 잠깐 고장나는 것은 누구나 같다. 
우리의 문제는 이거였다. 레이놀즈는 세상에 알려진 얼굴이고, 프라이빗한 식당이 아니면 이야기가 번져 나갈 것은 뻔했다. 
물론 하루 정도 저녁 먹는다고 파파라치가 들러붙는다던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원래 알고 지내던 스탭이나 지인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가 뭐 대인관계를 모두 끊고 은둔하는 사람도 아니고.

문제는 내가 이 지역에 너무 오래 살았다는 거다. 한 동네에 오래 살면 장점은 많다. 남들이 잘 모르는 로컬 맛집을 알고 있고 어떻게 이동해야 효율적일지 머리에 그리고 있다. 어딜 가도 적당히 안정감을 느끼고 묘한 친밀감이 형성 되어 있다.

아시안은 샤이해. 아시안은 친근하게 대화를 해 주지 않아. 그들이 가둬놓은 틀을 벗어나려 애쓰는 거 자체가 몹시 불공평하지만 그냥 벗어나고 싶었다.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도 미국에서 살아갈 수많은 아시안을 위해.

낯선 사람이랑 무의미한 대화하는 거 질색이지만 일부러 웃고 떠들었다. 이 시끄러운 파티들은 왜 이렇게 자주 하는가 의문이 들지만 사회에 속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로 인해 나는 이 동네에서, 얼추 자리 잡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까 레이놀즈랑 이 동네 어디를 가도 누군가의 눈에 들 수 있다는 거다. 


"아니. 그러니까 그쪽은 관심과 해명에 익숙하겠지만 나 그런 쪽이 취약하다니까?"


그는 전날 밤 과음을 한 나를 배려하여 철저하게 근처 식당만 줄줄이 읊어댔다. 내가 아직 가 보지 않은 곳들도 있지만 거기에서 아는 눈을 만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레이놀즈와 식사하는 게 발각되었다고 소소한 스캔들이 날 거다. 뭐 이런 건 아니다. 그냥 피곤해지는 것이 몹시 싫었다. 그런 쪽으로 결벽이라면 결벽이라 쳐도 좋다. 


"그냥 차 안에서 부리또나 타코 먹자니까요? 내가 괜찮은 푸드트럭 안다고."
"......"


그가 뚱한 얼굴을 한 채 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저쪽 제안을 몇 번 치다 못해 방망이로 날려 보냈으니 그에게도 내 제안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도 모든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반대할 수 있다. 

아는데! 그래도 차에서 지금 몇 분째 이러고 있는 거냐고.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소리 죽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겉옷을 입고 계단을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분명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뭔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신호가 끈임없이 몸을 지배했지만 시간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급격히 가라앉은 옆얼굴을 슬쩍 훔쳐봤다. 딱히 그의 눈치를 본다기보다, 내가 마음을 상하게 했으니 살펴는 봐야 한다는 심경이었다.


"부리또나 타코가 존나 맛있는 음식인 건 알지만."
"알지만?"
"안 내켜."
"차라리 맛 없어서 안 내킨다고 하던가."


나무라는 말투로 흘겨봐도 레이놀즈는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그는 심지어 뭔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고집스러운 입매를 굳히고 있었다. 


"이러다 차에서 날 새겠어요. 비싸고 좋은 차라는 거 아는데 굳이 차에서 캠핑하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요?"
"먹고 싶은 게 부리또랑 타코야?"
"네?"
"그 메뉴면 돼?"


매우 의심을 살만한 발언이었으나 그걸 붙들고 늘어질 수는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내가 이미 수많은 거절을 해 놓은 상태라서. 
식사를 하자고 먼저 제안한 게 내가 아니라면 하찮은 죄책감을 가질 일도 없으련만.
















"짜잔!"
"......"
"라이언 레이놀즈표 타코 앤 부리또!"
"......"


하나도 재미 없어...

둥근 테이블에 앉아 부리또인지 타코인지 아니면 그냥 식재료를 한 데 뭉쳐 놓은 건지 모를 것을 바라보며 나는 침묵했다. 
내가 왜 라이언 레이놀즈의 집에 앉아 그가 만든 형편 없는 요리를 앞에 두고 있을까.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꿈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아주 조금 했는데 현실은 배신하지 않는다. 이럴 때에는 배신 좀 해도 되는데. 


"요리를."
"요리를?"
"되게..."


칭찬, 칭찬을 해! 머리를 굴려! 뇌가 알콜에 굳었니? 나 술 깬 거 아니었어? 



메뉴만 부리또와 타코면 되는 거지? 그럼 우리 집에 가자.
엥?
문제 될 거 없잖아? 완전 프라이빗 하다고. 설마 내가 집에 경호원 23명쯤 거느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럼 됐네. 출발! 허니가 날 초대했었으니까 나도 허니를 내 집에 초대하는 게 공평한 것 같아.



그 억지 가득한 대화를 기점으로 그가 엑셀을 밟았고 차는 뻥 뚫린 길을 시원하게 내달렸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라이언 레이놀즈의 집에 와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현관에 서 있었고 그가 내 겉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오, 나 남의 집에 초대받고 빈손으로 온 거 처음인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가 내 어깨를 잡고 자연스레 이동했다. 

그가 요리를 할 동안 나는 열 번 정도 물은 것 같다. 뭐 도와줘요? 아니!!! 묻자마자 단박에 대답이 돌아와서 입맛만 다셨다. 
내가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는 더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뭔가 들리지 않아야 할 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 같았다. 


아우. 오. 어라? 으음. 


편하게 쉬고 있으라며 난데없이 영화를 틀어 놓고 담요와 음료를 제공한 터라 그의 말대로 누워있으면 됐겠지만 내 귀가 너무 밝았다. 
도대체 뭘 하는 거야? 궁금증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훔쳐 보려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싶어 엉덩이를 억지로 붙이고 있었다.
영화고 나발이고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않았다. 

확신이라곤 단 1그램도 담겨져 있지 않은 의아한 목소리가 나의 불안을 자극시켰다. 

레이놀즈도 나도 자신의 자리에서 나름의 전투를 벌였고 결과가 이거다. 

좀 그럴싸한 말을 하고 싶은데 그가 내놓은 게 참, 사람이 먹어도 된다고 느껴지지가 않아서 입 안의 혀가 빙글빙글 돌았다. 

목이 타서 내어준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곤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입에 넣어. 죽기야 하겠어? 알러지도 정신으로 참아낸다는 한국인답게 그냥 일단 포크를 움직여 입 안에 넣었다.


"......"
"......"


기묘한 침묵이 오가는 와중에 그가 눈썹을 들썩이며 기대에 찬 눈으로 날 바라봤고 나는 창백한 얼굴로 음식을 씹었다.



"굿? 굿?"
"......굿."


엄지를 치켜 세우면서 억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렇게 행복하지 않은 식사를 끝냈고 난 마비된 듯한 혀를 애도하며 그의 화장실에서 열심히 가글을 했다. 
내가 엄지를 세우자 자신감이 붙은 레이놀즈가 신이 나서 자기가 만든 음식을 먹었고, 낯빛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황급히 일어난 그가 자기가 며칠 전에 끝내주는 나쵸를 구했다며 이것저것 먹을 것을 가져오는 동안 나는 내 접시에 있는 것 만큼은 다 먹었다.

그리하여 그는 퍽 감동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티가 나게 순해진 눈매에 헛웃음을 치던 난 별 말 없이 엄지를 한 번 더 올려줬을 뿐이다.


"남의 집에 초대받았는데 빈 손으로 온 거 처음이에요."


후식으로 내어준 과일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아직 여운에 젖은 듯 유순한 얼굴을 하던 그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정식 초대 아니야."
"음?"
"아, 내 말은. 정식 초대는 나중에 제대로 할 거라는 말이었어. 그러니까 그런 거 전혀 개의치 마. 그리고 나는 집에 온다고 막 뭐 들고 오는 거 엄청 부담스러워. 뇌물은 주고 받지 않는 게 좋으니까. 알지?"
"보통 그런 건 뇌물이 아니라 선물인데... 아니면 어제 우리 집에 가져온 게 뇌물이었나?"
"그건 다분히 순수한 호의와 우정으로 다져진 선물이지."


어쩜 저렇게 적재적소로 말을 받아칠까.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인지라 나는 흥미로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나, 이참에 요리 좀 배울까?"


슬쩍 옆으로 붙어 묻는 말이 그거라 좀 웃겼다. 


"아서라. 배운다고 다 잘하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하버드 갔게요? 자기 능력 밖 일을 막 하려고 들면 병나요."
"그 말 백퍼센트 동의하는데 납득했다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네."
"왜. 상처 받았어요?"


그가 제 가슴께를 만지며 투덜거리기에 적당히 대응해줬다. 


"그래도. 둘 중 한 명은 요리를 잘 하는 게 어쨌든 좋으니까."
"왜요?"
"생존적인 면에서?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로망이 여자들한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안 되는 일에 괜히 힘 빼는 건 별로인데. 사먹거나. 훌륭한 요리실력을 가진 사람을 고용하거나. 그게 더 효율적이지 않아요?"
"음. 내가 요리를 배울까라고 물어본 건, 우리 둘이 식사할 일이 앞으로도 있을 거라는 걸 염두에 두고 한 말이거든."



그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가구와 인테리어 소품을 봤다. 그 사이에 그는 아예 내 옆으로 가까이 붙어 앉았다.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으로 신경이 좀 둔해진 참이었다. 눈치 좋은 그는 그걸 알고 공격을 퍼부었다.



"근데 거기에 그런 대답을 내놓는다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거네?"
"원래 친구끼리 식사 많이 해요."
"그 단어가 더 이상 나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 알고 있지?"
"......"
"매우 중요하면서 동시에 중요하지 않은 단어야. 허니. 예민하잖아. 나보다 더 눈썰미 좋고 눈치도 빠르고."
"사람 초대해놓고 불편하게 하기 있어요?"


인상을 찡그리며 되묻자, 그가 실실 웃으며 내 어깨 위로 턱을 올렸다.


"왜 요즘은 그거 안 해줘?"
"뭘요."
"나 훑어보는 거. 관찰하는 거."
"관찰한 거 아니라니까..."
"나 눈으로 발가벗겨 먹는 거."
"허어..."
"있잖아. 그때가 그리우면서도 이렇게 네가 내 앞에 있다는 거에 되게 만족한다? 이거 모순이지?"
"......"
"응? 허니. 대답해 줘."


대답을 칭얼거리는 것처럼 그가 밀착한 몸을 한 번 더 내쪽으로 기울었다. 어깨 위의 무게가 부담스러우면서도 나쁘지 않았으니 나 역시 모순이다. 


"맞아요. 맞아."
"그렇지? 세상은 원래 모순 덩어리니까."


그는 만족한 듯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조금 더 깊이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