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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6 04:14
페인트칠 벗겨진 낡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다가 코피를 쏟았다. 곧장 손으로 코를 막았는데 틈 사이로 벌건 피가 주르륵 새어나왔다. 저마다 놀란 표정으로 눈 동그랗게 뜨고 다가오는 게 부끄러워 손사래를 쳤다. 저는 괜찮아요. 그냥 코피 쏟은 것뿐이에요. 코트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휴지 뭉치를 꺼내 드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놓쳤다. 힘차게 나뒹굴어 금이 간 화면이 밝게 빛났다. 메시지가 두 개 와 있었다.

[저희 회사에 관심을 보여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번 최종 면접 결과, 허니 비 님은 불합격...]

[당신의 휴머노이드 ☆ 당첨을 축하드립니다! 배송 도착일은...]

왜 행운과 불행은 동시에 오는 걸까. 입꼬리가 축 늘어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멀끔하게 다린 흰 셔츠에 핏물이 붉게 물들었다. 오늘은 운수가 더럽게 좋은 날이었다.
 

-
 

사람들은 언제나 애정을 갈망한다. 인간, 동물, 심지어는 사물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주고 받으려 한다. 갈망하는 부분을 메꾸지 못하면 우리는 외로움에 몸서리친다. 편의점이나 동네 마트의 원 플러스 원 떨이 상품처럼 비루한 모습으로 찾아와 서서히 스며들게 만든다. 애정과 외로움. 이게 바로 내가 지금 휴머노이드 설명서를 들고 끙끙대는 이유다. 총 20페이지로 구성된 설명서에는 휴머노이드의 탄생 계기, 주의사항, 사용법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희미해지는 정신줄 억지로 붙잡아 마지막 페이지에 겨우 다다랐을 때 커다랗게 박혀 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휴머노이드를 만나게 된 당신에게 알립니다.
이 휴머노이드 로봇과 사랑하지 마세요.
겉만 당신과 똑같을 뿐 결국엔 로봇입니다.
이 휴머노이드 로봇과 ‘제발’ 사랑하지 마세요.
* 사랑에 빠질 시 강제로 기억을 지울 수 있습니다.
 

멍하니 문구를 곱씹으며 내 앞에 놓여 있는 휴머노이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굳게 감겨 있던 눈이 스스르 떠지고 아름다운 푸른색 눈동자가 막을 올린다. 무거운 침묵 사이로 침 삼키는 소리만 들렸다. 마치 탐색을 하듯 가만히 나를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주인?”

무심하면서도 건방진 말투에 자연스레 미간을 좁혔다. 우리 H 사의 휴머노이드 로봇은 자유롭습니다. 똑같은 기종은 절대 만들지 않습니다. 휴머노이드의 이름, 성격, 말투는 실제 사람처럼 다양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당신만의 휴머노이드 로봇을 만나 보세요. 사이트 대문에 걸려 있던 홍보 문구가 번쩍 스쳐지나갔다. 열이 오른 느낌에 뒷목만 만지작거렸다.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응. 내가 네 주인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천천히 내민 손끝이 떨렸다. 내 얼굴만 쭉 바라보던 시선이 밑으로 내려갔다. 마주잡은 손이 차가웠다.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손을 잡은 게 로봇이 아닌 인간이었다면 분명 따스했을 텐데. 무언가가 턱 막힌 느낌에 급하게 손을 빼내어 뒤로 숨겼다. 휴머노이드는 한참 동안 눈만 꿈뻑거리다 한마디 내뱉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들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주 본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
 

휴머노이드는 외로움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환상이었다. 사랑만 빼고 모든 게 가능했다. 친구, 가족, 심지어는 육체적 관계까지. 환상은 깊이 바라던 무언가가 있어야 존재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주인. 나한테 원하는 게 있어? 무심히 던지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는 잠을 안 잔다며? 나는 아침 잠이 많거든. 꼭 깨워줬으면 좋겠어. 평온했던 얼굴에 서서히 금이 가더니 결국 눈살을 찌푸린다.

“너는 정말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침마다 깨워주는 건 아무나 다 할 수 있어. 내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지.”

나는 주인의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 존재 가치가 사라져. 그 말에 며칠 전 뉴스에서 보았던 두 개의 기사가 생각났다.

[길거리에 버려진 휴머노이드 수십 개, 주인의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것이 그 이유 … 우리 사회는 이대로도 정말 괜찮은가?]

[욕구를 너무 채워줘도 문제? 휴머노이드를 폐기하는 이유 2위, “원하던 것 다 이루어져… 이제 필요없다”]


환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에게 인간은 변덕스럽고 매몰찼다.

“난 일상도 특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아침마다 날 깨워줘. 너는 내 외로움만 채워주면 돼.”

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싫지 않았다. 까치발 들어 동그란 머리를 마음껏 헤집었다. 주인이란 인식은 있는지 미간 좁히면서 거부는 하지 않는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 전원 버튼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 버튼을 죽어도 누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나는 평생 외로울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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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가 지나 잠을 깨우는 손짓에 점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토스트를 한입 무는데 앞에서 독서를 하고 있던 그 애가 한마디 툭 던졌다.

“주인. 나 기타 사 줘.”

기타? 갑자기 웬 기타? 눈을 꿈뻑거리며 묻자 여전히 책에 시선 고정한 채로 대답한다. 새벽에 TV 보다가 우연히 봤는데 좋아 보여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는데 취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도 되잖아.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하나 사 줄게. 그 말에 묘하게 기뻐 보이는 얼굴 보며 웃다가 우연히 책 표지 하단에 있는 ‘노엘’을 발견했다. 노엘? 그러고 보니 지금껏 휴머노이드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H 사의 휴머노이드는 모두 이름을 가진 채 탄생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느릿느릿 물었다.

“혹시... 이름이 노엘이야?”

여태 보고 있던 책을 조심스레 내려 놓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괜히 눈을 아래로 깔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걸 이제 알았어? 언제까지 안 물어보고 버티나 궁금했는데.”

성탄절에 나를 만들기 시작해서 이름을 노엘로 지었대. 참 기막힌 작명법이지. 그래서 난 성탄절이 싫어. 더럽게 좆같은 회사. 아무 말 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내가 욕을 가르쳤던가? 아무리 되돌려 보아도 그런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개성’을 중시하는 H 사의 휴머노이드는 성격과 말투까지 마치 살아 있는 인간처럼 생생하고 제멋대로였다.
 

-
 

평화로운 금요일 오후. 냉장고로 향했던 노엘이 식탁 위에 폴라로이드 한 장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여기 네 옆에 있는 남자 누구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 따라가던 나는 기겁했다. 노엘이 가져온 건 몇 개월 전 헤어진 남자친구와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얼른 뒤로 숨기자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이건 어디서 발견한 거야?”
“냉장고 옆면에 계속 붙어 있었어.”

그렇구나. 손에 쥐고 있던 사진을 망설임 없이 구겼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무심하게 남자친구야? 묻길래 이미 헤어진 사이라고 못 박아 주었다. 빤히 응시하는 푸른색 눈동자를 괜히 마주하기 힘들어 시선을 피했다. 가끔 누가 주인이고 누가 휴머노이드인지 헷갈릴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전 남자친구와 찍은 사진 하나 들켰다고 큰 죄를 지은 것마냥 움찔거리는 것도 참 이상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나만 바라보던 노엘이 대뜸 바다를 좋아하느냐 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해. 바다 예쁘잖아. 조용히 생각에 잠기고 싶은 날이 있으면 꼭 바다에 갔어. 요즘엔 못 갔지만.

그날 이후로 노엘은 TV에서 바다가 나올 때마다 멍한 얼굴로 화면을 응시하곤 했다. 파아란 바다 저 끝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 비현실스러웠다. 그때마다 또다시 마음에 새겼다. 너는 휴머노이드가 맞구나. 인간이 아니구나. 사무치는 외로움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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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맑았던 하늘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고 흐릿했다.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제멋대로인 일기예보를 원망하며 노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엘? 나야. 우산을 안 들고 나왔는데 비가 오네. 마중 좀 나와 줘. 알겠다는 짧은 대답과 함께 연결이 툭 끊겼다. 집에 휴머노이드 하나 들였다고 팍팍했던 삶이 조금은 편해졌다.

어? 허니 비. 그렇게 시간이 꽤 흐르고 고개 푹 숙여 눈 감을 때 누군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자 거기에는 몇 개월 전 헤어진 전 남자친구가 서 있었다. 어떤 여자애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로. 아무 말 없이 빤히 응시하기만 하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다.

“넌 변한 게 없구나. 잘 지냈어?”
“응.”
“영화 보러 온 거야?”

대답도 않고 대충 고개만 주억거렸다. 영화 이미 다 봤다는 이야기 굳이 뱉을 필요 없었다. 맑게 웃는 얼굴 보고 있으면 몇 날 며칠을 울던 모습이 떠올라 속이 울렁거렸다. 혼자서 왔냐는 물음에 짧게 숨을 내쉬며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영화관 앞에 다다른 노엘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내 옆에 나란히 섰다. 투명 우산 위로 빗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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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나랑 영화 보러 왔는데. 혼자 아니야.”

노엘의 차가운 손이 내 볼을 콕 찌른다. 호선을 그리던 입꼬리가 떨리더니 서서히 굳는다. 남자친구냐는 질문에 고개를 돌려 노엘을 바라보았다.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조용히 응시한다. 정적이 흘렀다. 부정하려고 입을 떼려는 찰나에 노엘이 내 볼을 힘주어 꼬집었다. 아. 인상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남자친구 맞아요. 그쪽도 영화 보러 온 것 같은데 갈 길 가세요. 시간 얼마 없을 텐데. 냉담한 목소리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짧게 인사만 남기고 여자애와 함께 안으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뒷모습 멍하니 바라보다 얼얼해진 볼을 만지작거렸다.

“네 전 남자친구 옆에 있던 여자애 휴머노이드야.”
“그럴 것 같았어.”
“휴머노이드랑 사랑하는 건 불법이야. 잠깐 재미 즐기는 거라면 몰라도.”
“알아.”

한숨을 내쉬며 노엘이 들고 있던 우산을 빼앗아 들었다. 순식간에 젖어 드는 시린 비에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작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왜 한 개만 들고 나왔어? 묻자 두 개 따로 쓰고 가는 건 정없다며. 내 손에 있던 우산 다시 가져가며 대답한다. 다음부터는 우산 마음대로 가져가지 마. 물이나 비에 젖는 건 로봇한테 최악이야. 스스로 로봇이라 칭하는 것이 묘하게 불편했다. 알겠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에 젖는 건 최악이라고 했으면서 나 있는 곳으로 우산 다 기울인다. 소리 없는 다정함에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 문득 든 생각에 멈춰 섰다. 노엘의 옷을 잡아당기자 물음표 담긴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노엘. 아까 그 휴머노이드랑 전 남자친구... 둘이 사귀는 사이인 건 어떻게 알았어?”
“똑같아서.”
“응?”
“냉장고에 붙어 있던 사진. 거기에 있는 네 눈빛이랑 그 여자애 눈빛이 똑같아서.”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눈이었어. 곧 있으면 회사에서 걔 기억 지우러 찾아올걸. 갑작스럽게 뒤통수를 얻어 맞은 느낌이 들었다. 또다시 걸음을 멈추자 의아한 얼굴로 나를 뒤돌아본다. 차가운 빗물이 조금씩 스며든다. 젖은 운동화 끝이 축축했다. 자연스럽게 우산 기울이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헛웃음을 쳤다.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나를 찔렀다.

내가 ‘걔’랑 어쩌다 헤어졌더라?

그리고

내가 ‘쟤’를 평소에 어떤 눈빛으로 바라봤더라?
 

-
 

노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재활용 쓰레기통에 기대어 앉아 있는 휴머노이드를 보았다. 미형인 얼굴 아래로 군데군데 벗겨지고 긁힌 흔적이 눈에 띄었다. 길거리를 걷다 보면 주인에게 버려진 휴머노이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는데 딱 그 꼴이었다. 비를 오랫동안 맞았는지 부식이 진행되고 있는 곳도 보였다. 안쓰럽지만 내 휴머노이드가 아니었다. 애써 모르는 척 지나가려는데 휴머노이드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담배를 주워 입에 물었다. 주머니에서 어디서 났는지 모를 라이터까지 꺼내길래 기겁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들고 있던 라이터를 확 빼앗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휴머노이드가 담배 피우면 안 돼. 그러다 망가져.”

내 말에 눈을 날카롭게 뜨며 짜증스런 표정을 짓는다. 라이터를 도로 가져가며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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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라고. 이미 주인한테 버려진 몸인데 뭐 어때? 난 망가지는 게 좋아. 참견하지 말고 좀 꺼져.”

그러면서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하길래 나도 모르게 휴머노이드의 손을 내리쳤다. 바닥에 담배와 라이터가 나뒹굴었다. 씨발. 진짜 좆같아. 성난 얼굴로 씩씩거리며 몸을 벌떡 일으킨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뒷걸음질을 쳤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노엘이 자신보다 큰 휴머노이드에게 다가가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그 잘난 담배 계속 피우고 싶으면 좀 닥쳐. 망가지는 게 좋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전 주인이 어떻게 다뤘을지 빤히 보여.”

정적이 흘렀다. 너, 갈 곳 없지? 매섭게 노엘을 노려보던 눈빛이 서서히 잠잠해졌다. 대답해. 뒤에 있던 나를 한참 응시하더니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노엘은 아무 말 없이 그 휴머노이드의 등을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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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집으로 데리고 온 휴머노이드의 이름은 리암이었다. 노엘보다 늦게 출시된 신형 모델로 감정 표현이 더욱 풍부하고 육체적 관계에 중점을 두고 만들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가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리암의 전 주인은 아름다운 것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며 틈만 나면 제 휴머노이드를 괴롭혔다. 듣는 내내 구역질이 올라와 미치는 줄 알았다. 리암의 회상이 끝나고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노엘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사랑을 할 수 없으니까 쾌락이라도 즐겨 보겠다는 속셈이었겠지. 세상엔 변태 같은 새끼들이 많아.”

인간의 욕심과 환상의 깊이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걸까? 처참해진 기분에 숨이 턱 막혔다. 피로해진 눈을 비비며 앞에 있는 리암을 바라보았다. 벗겨지고 긁히고 부식된 흔적들. 나도 모르게 그 부분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잠시 움찔거리더니 눈을 감는다. 찰나에 마주한 눈동자가 슬퍼 보여서 마음이 저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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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신형 휴머노이드는 내 예상보다 빠르게 우리 삶에 스며들었다. 첫날 절대 주인이라 부르지 않겠다던 다짐은 어느새 저 멀리로 사라졌는지 주인, 어디 가? 주인, 뭐 해? 하며 따라다니는 모습이 산만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로봇이라기보단 강아지에 가까웠다. 첫 만남에 이 드러내던 것은 일종의 방어 기제였던 모양이다.

노엘에게 다가갈 때마다 어울리지 않게 쭈뼛거리던 것도 시간이 지나자 대담하게 변질했다. 가볍게 까부는 것부터 시작해서 결국 노엘을 화나게 만드는 것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틈이 생길 때마다 난 신형이고 넌 구형이야. 그러니까 씨발 내가 더 멋진 휴머노이드지! 라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그때마다 노엘은 무심한 얼굴로 손가락 두 개만 올렸다. 친형제처럼 굵은 눈썹 달고 싸우는 게 유치하고 웃겨서 웃음만 줄줄 새어나왔다.

리암은 육체적 접촉에 거리낌이 없었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내가 눈에 보이기라도 하면 한걸음에 달려와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애교 부리는 것도 처음에만 당황스러웠을 뿐 시간이 흐르자 일상이 되었다. 나는 이 모든 게 리암만의 개성적인 성격과 전 주인의 산물이 결합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릴 때마다 움찔거리며 몸에 힘을 주었다. 세뇌라도 하듯 주인, 좋아해. 말썽 안 부릴 테니까 나 버리지 마. 중얼거렸다. 안 버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 수십 번 이야기해 주어도 제자리였다. 제발, 제발 나 버리지 마.

사랑을 할 수 없으니까 쾌락이라도 즐겨 보겠다는 속셈이었겠지.

노엘의 말이 떠올랐다.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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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 12월 초가 되었다. 요즘 들어 말이 없어진 노엘은 방에 틀어박혀 소중한 기타만 하루 종일 만지작거렸다. 기타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끈질기게 물어보아도 힌트 하나 주지 않았다. 너는 몰라도 된다며 매정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방에서 흘러나오는 기타의 선율을 자장가 삼아 낮잠을 잘 수 있게 되었을 때쯤, 외출을 하고 돌아온 리암이 한껏 들뜬 걸음으로 달려와 내 볼에 입을 맞추고 으하하 웃었다. 갑자기 뭐야? 눈 동그랗게 뜨며 물으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한다.

“동네에 있는 휴머노이드 놈들이랑 축구했는데 골 넣었어.”
“그래? 잘했네.”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자 경쾌하게 웃으며 다시 내 볼을 잡고 뽀뽀를 마구 퍼풋는다. 견디지 못하고 잠깐만, 외치는 찰나에 노엘이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그대로 멈추고 눈만 깜빡거렸다. 마치 화를 꾹꾹 눌러담은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기타 줄 끊어졌어. 좆같네.”

침묵이 흘렀다. 짧게 한숨을 내쉬는 노엘의 모습 뒤로 줄이 끊긴 기타와 빼곡하게 무언가가 적힌 흰 종이들이 잔뜩 널부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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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몰라도 노엘이 머리를 바짝 짧게 깎았다. 까칠까칠한 느낌이 마음에 들어 몇 분 쓰다듬었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내 손을 잡아 끌어내린다.

“머리카락도 다시 안 자라면서 왜 이렇게 짧게 깎았어?”
“그냥.”
“잘 어울리네.”

나도 자를까? 물으니 내 머리카락 끝을 살며시 쥐었다가 놓는다.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한다. 아니. 그 상태 그대로 놔둬. 내 기억 속 주인은 항상 그 머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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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왜 너만 멋있는 거 하냐며 난리를 치던 리암도 결국엔 까까머리를 하고 왔다. 짧게 깎은 머리가 어색한지 계속 매만지길래 잘 어울린다는 한마디 던져 주었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해맑게 웃는다. 집에 조금 사나운 밤톨이 둘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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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3일,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노엘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크리스마스에 바닷가 가자.

싫어하는 날 굳이 콕 찝어 가려는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리암과 나를 바라보는 노엘의 얼굴이 소중한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바다에 직접 가 보는 건 처음이라며 기대감에 부푼 리암의 얼굴과 대조적이었다.

“어느 바다로 갈 건데?”

괜히 불안한 마음에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물었다.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주인이 전에 갔던 곳.”

정말 사랑했지만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바다와 재회했다. 맑은 하늘에 빛을 머금은 푸른색 바다는 다시 보아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리암은 물 만난 고기처럼 차의 시동이 꺼지자마자 안전벨트를 풀고 바닷가로 달려나갔다. 운전하는 내내 아무런 말이 없던 노엘은 먼저 가 있으라는 한마디 툭 던지고 사라졌다. 졸지에 차 안에 혼자 남은 나만 물음표 채우며 꿈뻑거렸다.

리암은 바닷물에 발 한 번 담구지 못하고 파도가 치는 곳 앞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어깨를 확 잡자 괴성을 지르며 몸을 휘청거렸다. 그대로 배를 붙잡으며 웃고 있으니 씩씩거리며 항의를 한다. 깜짝 놀랐잖아! 바다에 잠겼으면 난 죽었어. 그 말에 찔끔 나온 눈물을 닦으며 표정을 굳혔다. 잠시 잊고 있었다. 리암은 휴머노이드라 물에 젖으면 고장이 난다는 걸. 나는 가끔 노엘과 리암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침울해진 표정으로 사과를 하자 괜찮다며 손만 젓는다. 그때 귓가에 파도 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시린 겨울 바다의 파도는 맑고 너그러웠다.

결국 물에 뛰어드는 것은 포기하고 리암과 둘이서 나란히 앉아 바다 구경을 하고 있으니 노엘이 핫초코 한 잔을 사 들고 돌아왔다. 한 걸음, 두 걸음 발 내딛으며 다가올 때마다 모래가 서걱서걱 소리를 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겨울 바람 춥다며. 마셔. 건네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핫초코 위에서 모락모락 하얀 김이 올라왔다.

겨울 바다는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오랫동안 파도가 춤추는 것을 관망하다 피어오르는 추억에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흐릿해져도 괜찮을 기억이었다. 그 순간에 무관심한 얼굴로 파도를 바라보던 노엘이 물었다.

“너는 바다가 왜 좋아?”
“전에도 말해 주지 않았어? 예뻐서 좋아.”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
“응. 좋아하는데 꼭 거창한 이유가 필요해?”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조용히 수긍한다. 그렇게 해가 바다에 잠길 때까지 앉아 있다가 겨우 발걸음을 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적했다. 창 너머 보이는 컴컴한 하늘에 별이 밝게 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 크리스마스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불안했다. 피로가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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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부터 불안한 예감은 빗겨가지 않고 나를 괴롭게 만들곤 했다. 눈을 떴는데 문득 허전해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기가 넘쳐야 할 집이 조용했다. 이불을 걷어내고 방문을 열자 아무도 없는 거실이 보였다. 평소처럼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어야 할 노엘도, 소파에 기대어 드라마를 보고 있어야 할 리암도. 아무것도 그 자리에 없었다.

노엘?
리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불안한 걸음을 떼자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노란색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투박하게 묶인 리본을 조심스레 풀고 상자를 열자 ‘우리의 주인, 허니에게’라는 글씨가 적힌 편지지가 보였다. 숨이 턱 막혔다. 떨리는 손끝을 겨우 진정시키며 편지지를 쥐어 들었다. 그 밑으로 작은 녹음기 한 개와 어제 바다에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 고이 담겨 있었다.

편지지를 쭉 펼쳐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차근차근 마음에 담았다.

안녕, 허니 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분명 좋진 않을 거야. 왜 우리가 사라졌는지 궁금하겠지... 간단해. 인간은 같은 인간을 품어도 되지만 휴머노이드가 인간을 품는 건 불법이야. 한 달 전에 회사에서 통지서가 날아왔었어. 우리 기억을 지우러 오겠다고 말이야. 몰랐다고? 그래... 당연하겠지. 보자마자 쓰레기통에 처박아 뒀거든. 아무튼 그날 결심했어.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바다에 가 보겠다고. 많고 많은 날 중 하필 좆같은 크리스마스를 고른 건, 아무리 좆같아도 하루 정도는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어.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가?
 


 

가끔 생각하곤 해. 멍청한 인간들은 기어코 우리를 만들어 놓고 뭐가 두려워서 사랑을 금지시킨 걸까. 결국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애정과 사랑에 있는데.
 


 

너도 우리를 사랑하잖아? 네 앞에서 기억 잃긴 싫었어. 네 표정이 다 보일 테니까. 그럼 못 견딜 테니까.
 


 

전에 기타로 뭐 하냐고 물어봤었지. 곡 하나 썼어. 노래는 리암, 그 녀석이 불렀고. 마음에 들진 모르겠어.
 


 

사랑해, 허니 비. 다시는 우리 찾지 마.

떨리는 손으로 녹음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들리는 기타 소리에 입술을 꾹 물었다. 셋이서 환하게 웃고 있는 폴라로이드 밑에는 휘갈긴 글씨로 이렇게 써져 있었다.

네 덕분에 좆같은 크리스마스를 조금이나마 사랑할 수 있게 됐어. 고마워, 주인.
 

-
 

어느 날, 우주와 관련된 다큐를 보다가 물었다.

“왜 너희가 가까이 있을 때마다 더 외로운 느낌이 들까?”

그 말에 턱 괴고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노엘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었다.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던 리암이 느리게 눈을 떴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대략 147,500,000km에서 152,500,000km이며 …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우리를 사랑하니까...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

리암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잠에 취해 있는 것처럼 웅얼거렸다.

“응?”
“아닌가? 아니면... 아니면 우리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노엘이 리암의 얼굴 위로 쿠션을 던졌다. 아, 뭐야. 존나 아프잖아! 잔뜩 짜증을 내며 노려보는 시선에 어깨만 으쓱거린다. 노엘이 다시 별무리가 가득 차 있는 화면으로 고개 돌리며 입을 뗐다.

“사람들은 매일 해와 달을 보면서 살아가. 당장 제 눈에 보이니 가깝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존나 멀지. 아무리 애를 써도 닿질 않아. 그거랑 비슷한 거야. 가까이 있지만 멀어. 주인, 넌 인간이지만 우리는 로봇이지. 끝까지 채워도 텅텅 빈 것처럼 허전한 게 있을 수밖에 없다고. 태생적인 거야. 너의 외로움처럼.”

그리고 우리의 사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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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529 시스템 상 오류 발견. 기억 지워지지 않음.]
[NO.912 시스템 작동 완료. 기억 지워짐.]




[시스템 오류 발생. 오류 발생.]



[NO.529 기억 지워지지 않음.]
[NO.912 기억 복구됨. 기억 지워지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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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금지된 것일수록 인간은 더 강렬히 쟁취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휴머노이드 로봇도 마찬가지다.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애정과 사랑에 있다. 인간과 휴머노이드가 사랑을 하는 사회현상은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예정된 비극이었다.

- H 사,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팀 회고록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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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싯 노엘너붕붕 리암너붕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