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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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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다섯겹 벗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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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즈너붕붕









대화는 어떻게든 흘러갔다. 몇 마디를 주고받다 신이 나면 금세 주제를 틀었다.

입맛에 맞는 즐거운 대화 역시 기분에 영향을 끼쳤지만,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아무래도 알콜이라 볼 수 있다. 레이놀즈가 사 온 와인은 적당히 떫고, 씁쓸하고, 달고, 맛있었다.


"이런 거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어떤 거?"
"분명히 하나잖아요. 하나의 음식인데 여러가지 맛이 나는 거. 뭔 마법같이."


와인병을 툭툭 치며 말하자 그가 적당히 동의하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거 되게... 음. 술 처음 마셔 본 사람이 할 법한 대사였어. 아니면 일생 술맛을 모르다가 갑자기 깨우친 사람이라거나."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상황 파악해요? 이 얘기 어디다 써먹지 말아요."
"극본에 쓰지 않는다고 맹세할게. 어디 뭐 사인이라도 해 둘까? 서류 있어?"


서류같은 게 있을리까. 메모를 하고 스케줄을 정리하는 다이어리나 수첩정도는 있다만. 철저한 개인 영역이라 저 사람에게 드러낼 마음은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입술은 자아를 상실했다. 삐죽거렸다가, 상승했다가, 한도 끝도 없이 처졌다가. 내가 이렇게 풍부한 표정을 낼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앞에 거울이 놓은 것도 아닌데 아 나 지금 꼴사납겠다 싶었다. 멈춰야 한다는 걸 아는데 오랜만에 마시는 비싼 와인 맛이 좋았다.


그와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나마 미간을 구겨가며 몸에 힘을 줬지만, 실없는 농담을 할 때에는 푸하하 웃으며 온 몸에 힘을 뺐다. 누군가가 내 몸을 쿡 찌르면 저항없이 의자 밑으로 흘러 내릴 것이다.


사람 앞에 두고 잠드는 추태만은 벌이지 말자. 딱 한 잔씩 더 마시면 끝날 것 같은데. 예전에는 이 정도 마셔도 별 문제 없었던 것 같은데. 뭐든 사람 몸은 쓰지 않으면 닳아버리는구나. 내 알콜 분해 능력이 이렇게 형편 없어질지 누가 알았던가.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를 데려와도 눈싸움에서 이길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난 치사해."
"에?"


나 이 사람 말 무시하고 있었나? 그런 건 아닌데. 최대한 정신 차려서 적당한 대답을 고르고. 입으로 내뱉고... 숨을 내쉴 때마다 호흡에 취기를 내보내려 애를 쓰고.


"난 음험한 마음을 가진 몹쓸새끼야!"


그 말을 끝으로 쾅! 소리가 났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바라보면 그가 이미 이마를 테이블에 갖다 박은 뒤였다.


"미쳤어요? 미친, 미쳤나봐."


벌떡 일어나 어깨를 잡고 허둥지둥 상체를 잡아 당겼다. 소리가 엄청 컸는데. 테이블이 부러졌거나 남자의 머리가 깨졌거나 둘 중 하나는 할 것 같은데. 충격에 술이 좀 깬 기분이었다. 나는 레이놀즈의 두 뺨을 붙잡고 얼굴 여기저기를 살폈다.


"미친... 이 비싼 얼굴에. 이 잘난 얼굴에."
"단위로 측정하다가 잘생겼다고 해 주니까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참 헷갈리네."
"아니 멀쩡한 얼굴을 갑자기 왜 갖다 박냐고!"


내 몸 안에 이렇게 큰 소리가 있었구나. 뭔가가 울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고함이 발사됐다. 그가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 중얼거렸다.


"나 알고 있었어."
"what the..."
"취하고 있는 거 알고 있었다고. 내 빌어먹게 튼튼한 간은 저거 먹고 기별도 안 가지만 허니는 취해가는 거 알고 있었다고."
"근데?"


그게 머리랑 테이블이랑 강력한 세기로 만날 이유가 돼?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말리려고 했거든? 아니 근데, 우리 얘기 정말 즐거웠잖아. 의견이 서로 다르면 그 지점까지 흥미로웠어. 그러니까 이게 멈출 수가 없는 거야. 머리로는 말려, 말려, 말려. 라이언!! 하고 양심이 한 번씩 내지르는데 입은 블라 블라 멈추질 않는 거야."
"......"


억눌렸던 무언가를 터뜨리듯 레이놀즈의 입이 쉴새없이 움직였다.


"내가 술 마시고 뭐 헛소리라도 했나? 알콜 알러지가 있다고 했다던가?"
"전혀. 거기 앉아서 한결같이 날 웃겨줬어. 존나 완벽했지."
"나 취하지 않게 말려달라고 한 기억도 전혀 없는데."
"나도 그건 듣지 못했어."
"그럼 도대체?"


네 놈은 뭐가 문제길래?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레이놀즈를 내려다 봤다. 그는 키가 매우 큰 편이기 때문에 이런 각도는 참으로 희귀한 것이다. 기가 막힌데 취기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라 명확하게 따질 수가 없다.


"작정한 것 같잖아."
"뭘요?"
"꼬시려고 작정한 놈 같잖아. 나 그렇게 엉덩이 가벼운 놈 아니야. 아마도. 아니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정도까지는 절대 아니라고."
"그게 뭔 상관인데요?"
"어?"
"사람들이 그쪽을 어떻게 말하건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보는 것 뿐인데."


레이놀즈는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 난처하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도드라지는 전완근이나 핏줄, 손목 위에 걸쳐있는 시계 따위에 눈길이 갔다.


"아니...... 내가 말했잖아. 허니."
"......"
"룰은 지켜야 하는데. 친구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친구 사이에 꼬신다 라는 표현은 가능하고?"
"그것도 룰을 어긴 거지."


엄숙한 얼굴로 그가 턱 부근을 매만졌다. 바보들의 행진. 멍청이들의 대화. 천장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숨을 뱉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미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내쫓을까. 내가 초대하긴 했다만 시간도 늦었고. 영영 여기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허니."


그가 비스듬히 몸을 숙인 채로 이름을 불렀다. 내 배에 그의 머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를 남겨둔채 잔뜩 잠긴 목소리로. 느릿하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조심스럽게, 생명력이 약한 화분을 다루듯이.

열린 창 너머에는 물감을 뒤엎은 듯한 주황색 노을이 졌고 분위기용으로 틀어 놓은 음악은 대화가 끊기자 기다렸다는 듯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거리를 유지하는 게 룰이겠지?"
"거 규칙 되게 좋아하네..."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부드럽고 결이 좋았다. 다시 치고 올라 온 취기는 정수리부터 시작하여 나를 장악했다. 시야가 흐릿했다가 지나치게 또렷하기도 하고.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기도 했다.


"친구가 좋다고 했잖아?"


대답을 요구하는 말에도 나는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친구고 나발이고... 다 모르겠고.

그냥 무지 졸리다. 수마가 승리했다. 눈이 감겼다. 그 과정에서 그와 내가 닿았는지는 모르겠다.















번뜩 눈을 뜨고 이불을 들쳐본다. 하체가 뻐근거리거나 불편하지 않다. 전날에 입었던 옷과 같다. 벗겨져 있는 건 양말 뿐이다. 그마저도 가지런히 일렬로 모아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져 있다.

누가 내 머리로 북치기라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띵하게 울렸다가 잔잔하게 지끈거리다 난리가 났다. 이런 상황에 다다르면 언제나 지난 과거의 나를 책망하게 된다. 왜 그랬어. 너 왜 그랬냐고. 작작 마시면 될 것을. 왜 미래, 그러니까 현재의 나에게 이런 형벌을 주는 거야. 즐긴 건 과거의 너잖아.


비틀거리며 일어나 냉장고로 향한다. 물이 나를 살려줄지니. 지금 믿어야 하는 건 신이 아니라 시원한 물이다. 식도를 타고 흘러 들어가는 무해한 액체에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이미 확인하긴 했지만 혹시나 싶어 탁상 달력에 쓰인 글자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가며 인식했다.

오늘은 쉬는 날. 호출 올 일 없고. 특별한 다른 약속 없고.

그래, 그래. 머리에 미약한 지진이 남아있다 할 지언정 다른 것은 평화롭구나.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부엌을 쳐다 본다. 남이 해 준 청소에 대해 점수를 매기고 싶진 않다. 나는 그저 이 부엌에서 낯선 것들을 응시하며 먹은 것들을 치워 나갔을 레이놀즈를 상상했다. 감상했으면 좋았으려나. 뇌리에 짙게 남았을까.


입맛을 다시다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자고로 휴일은 그간 소홀하게 대했던 침대와 다시 유대감을 쌓는 날이다. 익숙한 이불 위에 누워 온 몸에 힘을 빼다 양말 옆 핸드폰을 발견한다.

별 일이야 있겠어 싶지만 혹시나 싶어 액정을 확인한 난 당황하여 버벅거렸다.


"부, 부재중. 32통...?"


설마 스케줄을 착각하고 있었나? 온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뒷목에서부터 식은땀이 흐른다. 내가 설마 그런 걸 착각할 리가 있나. 하지만 기계도 고장이 나는데 한낱 인간인 내가 그럴 리 없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손 끝이 너무 떨려서 터치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겨우 부재중 목록을 확인하고 나서는 참았던 것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하, 씨! 진짜..."


다시 핸드폰을 쥐고 털썩 뒤로 누워버린다. 하나는 친구에게, 나머지 31통은 모두 라이언 레이놀즈다. 이니셜 R과 불타는 하트로 내 전화목록이 도배되었다. 타이밍 좋게 또 다시 전화가 울렸고 난 성의없이 그걸 받았다.


"여보세요."
[살아있지? 아무 문제 없지? 괜찮은 거지? 죽을 것 같은 숙취에 시달린다던가? 아니면 혹시 어디가 아프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실수로 넘어졌다던가?]
"물음표가 몇 개야... 이상한 가정 좀 그만해요."
[하지만.]


환기를 위해 창을 열어 머리를 기대면 건너편에 익숙한 차 한 대가 보인다. 새카만 썬팅에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하지만 걱정되잖아.]
"......난 누구처럼 어디 숨어서 혼자 울거나 그러지 않는데."
[갑자기 공격을 해 버리네. 칼 맞은 기분인데 괜찮아. 참아볼게. 나 건강한 편이니까.]
"왜 스토커처럼 거기서 그러고 있어요?"
[wow. 2연타를 맞으니까 천하의 나도 좀 어질어질하다. 잠깐만. 어떻게 말해야 스토커같지 않을지 심도있게 고민 좀 해볼게.]


휴일인데. 나만의 시간인데. 고대하고 기다려왔던!

밀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레트로트 음식을 먹고 여차하면 야식을 배달 시키고. 내가 그렸던 모습은 분명 그거란 말이지.

근데 자꾸만, 필름 끊긴 나를 안아다 조심히 침대에 눕히고 제 나름대로 어지럽혀진 모든 것들을 치웠을 모습이 떠올라서... 조금 더 단정히 꽂혀있는 화병의 꽃이 눈에 거슬려서.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긁었다. 뜻대로 되는 게 없네.


"시간 괜찮은 거면."
[없어도 만들까? 그런 거 잘해.]
"같이 저녁이나 먹던가...요. 우리 집 말고."
[근처 맛집 a부터 z까지 리스트를 뽑아서,]
"아우 정말. 일단 좀 씻을 테니까 리스트를 정리하건 집으로 도망가버리건 마음대로 해요."


내 할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약을 올리려던 심보는 아니었다.

그냥 좀 창피해서. 이마를 긁적이고 있으니 메세지 한 통이 온다.



[여기서 도망가는 사람은 완전 최저. 인간 이하가 되는 거야.]



뭐가 이렇게 비장하단 말인가. 차라리 그냥 도망가지 말라고 직구로 말해 버리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