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608704241
view 7836
2024.10.20 00:31
그 남자의 네겹 벗기기
https://hygall.com/608453720
놀즈너붕붕
친구를 집에 초대했다.
여기까지는 특별할 일 없는 문장이다. 원래 친분 있으면 서로 집에 놀러가서 카드 게임 하고 함께 사는 강아지 보여주고 같이 식사하고 와인도 마신다.
그런데 내 집에 초대한 친구가 라이언 레이놀즈라면 말이 좀 달라지지.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저녁이나 할래요?"
이 파격적인 발언은 사흘 전 그의 트레일러 안에서 이루어졌다.
여느 때와 같이 촬영은 진행되었다. 감정이 고조된 순간, 그걸 폭발시키면서 액션까지 하는 터라 고난이도의 씬이었다. 감독과 스탭들은 긴장했고 라이언 레이놀즈는 태평해 보였다. 대본을 몇 번 살피다가 맞추었던 합을 복기하다가. 열심히 하고 있는 듯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그의 연기에 대한 태도를 지적하는 게 아니다. 분명 위험한 씬이 맞으며, 그걸 소화하는 건 자기 자신인데 아무 문제 없을 거니까 엉덩이에 힘 좀 풀라며 농담을 하고 다니는 그 행위가 말이다. 내가 해석한 그는 기질적으로 예민하다. 본인도 알고 있다.
모두가 입을 모아 훌륭한 장면이 탄생했다고 할 때에도 그는 '다시 한 번 할 수 없을까?'라고 물었다. 만족을 모르는 사람처럼.
완벽에 대해 갈증이 난 듯 스스로를 몰아 붙이는 걸 보며 직업적으로는 멋있었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써는 안쓰러웠다. 저렇게 모두 발산시키고 나면 허할 텐데. 당장 손에 쥐여지는 것도 없고. 성취감은 있을 테지만 몸에 피로도는 쌓일 것이다. 그만큼 대단한 커리어를 가진 건 아니지만 예술이라는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는 터라 마음은 대강 가늠할 수 있다.
"컷!"
울려퍼짐과 함께 모두의 입에서 얕은 숨이 튀어나왔다. 모두가 그를 주시하고 집중하고 있었다.
레이놀즈는 잠깐 호흡을 삼키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넘기고 앞을 봤다. 정확히는 어디인지 모르는 너머를 봤다.
"한 번 더 할 수 있을까?"
도달할 수 없는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라이언 레이놀즈가 진지한 낯으로 말했다.
성이 안 차는 모양이었다. 이미 만족감을 채운 감독은 굳이 그럴 이유가 있냐고 했고 라이언 레이놀즈는 고개를 저었다.
"나 더 잘 할 수 있어."
그리고 트레일러에서 본 얼굴은 분장인지 실제인지 모를 피딱지가 범벅된 모습이었다.
그런 얼굴 꼴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는 여느 때처럼 내게 뭘 마실 거냐고 물었고 나는 얼음이 담긴 시원한 물이라고 대답했다. 내온 건 얼음이 담긴 아이스티였고 얼추 비슷하네 싶어 별 말 붙이지 않았다.
뻐근거리는지 어깨를 돌리는 모습을 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그러고 살면 안 피곤해요?"
"나? 왜? 오늘 다크서클이 유난히 도드라져보여? 최대한 예쁘게 분장해 달라고 했는데. 어차피 스크린에 남는 건 내 미모잖아."
그가 킬킬 웃으며 어깨를 만지던 것을 멈추었다. 눈이 가로로 길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불편한 낯으로 그를 훑었다.
혹여 내가 그의 연인이라도 하더라도 그가 하는 노력과 열정을 컨트롤할 권리는 없다. 연기는 그의 영역이지 내 영역이 아니다. 친구라고 해서 그것을 가볍게 폄하할 권리도 없다. 덜떨어진 남자들처럼 요, 브로. 어차피 이래나 저래나 관객은 많이 들어 올 텐데 뭐 그렇게까지 오바하냐? 라고 껄렁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나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말을 하진 않았고 덕분에 공간은 라이언 레이놀즈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는 침묵을 참지 못하는 사람처럼 안 웃긴 농담을 던졌다가 갑자기 제 일상 얘기를 하고 며칠 전에 했던 산책 중 일어난 해프닝을 말하기도 했다.
그 동안 나는 컵에 담긴 아이스티만 꿀꺽꿀꺽 마셨다. 아이스티 타는 솜씨는 나쁘지 않은지 시원하고 달고 맛있었다.
"삼일 뒤에 뭐해요."
"삼일 뒤? 어. 그때 뭐하더라? 그냥 뭐. 하도 얼굴 봐서 지겨운 내 트레이너랑 마주 앉아서 근육을 더 키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려나."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저녁이나 할래요?"
인정한다. 다분히 충동적 발언이었다. 흙더미를 뒤집어 쓰고 피딱지를 붙이고 있는 눈 앞의 인간이 몹시 안쓰러워보여, 밥이나 한 끼 먹이고 싶은 한국인의 마음이었다.
"오- 그거 좋,"
별 일 아니라는 듯 헤실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일순간 웃음을 멈추었다. 스릴러 영화에 나오는 싸이코패스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편차 높은 표정 변화였다.
"나?"
손가락이 자기 가슴을 향한다.
"허니?"
손가락이 나를 향한다.
"집?"
손가락이 세모가 되지는... 않았다. 좀 귀찮아진 터라 난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혹시 내가 뱉은 단어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었나?"
"어! 크리스, 나야. 삼일 뒤에 우리 같이 운동하기로 한 거 말이야. 그래. 늘 하는 그 거지같은 행위. 그거 그 날 하루는 좀 뺐으면 해. 내가 방금 아주 중요한 일이 생겨버렸지 뭐야?"
라이언 레이놀즈는 내게 대답하는 대신 핸드폰을 꺼내 들고 트레이너로 추정되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큰소리로 웃었다.
나는 빈컵을 두고 트레일러를 떠났다.
초인종이 울리는 걸 보고 현관문을 노려봤다.
내가 놓친 사실이 있다. 내가 요리에 그다지 소질이 없다는 점이다. 내가 해 먹는 요리는 대게 생존을 위한 것이어서 매우 간단한 것들이었다. 치즈와 양상추와 토마토와 슬라이스 햄을 올린 샌드위치나, 파스타 면을 익혀 시중에 판매하는 소스를 넣는 것. 아무튼 요리라기보다 조리에 가까운 것들.
사람 초대해 놓고 그런 걸 먹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 초대의 이유는 저 강박적인 남자의 몸에 뭐라도 기력을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먹는 음식으로.
요리에는 자신 없지만 데코에는 자신 있다. 평생을 미감에 미쳐 살았던 인간이라 그런지 유튜브 보고 맛있는 요리는 못 해내도 데코만은 기가 막히게 따라했다.
보기에는 그럴싸한 스테이크와 샐러드 파운드 케이크와 카나페. 메뉴가 왜 이렇게 뒤죽박죽이냐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유튜브 보면서 가장 예쁘게 보이는 요리들을 한 것 뿐이다.
난 뭐하는 인간일까. 자괴감이 짙어지기 전에 문을 열었다.
"써프라이즈-!"
집주인에게 초대 받고 온 남자가 써프라이즈를 외친다.
한심하단 눈으로 훑어보다 그의 손목을 잡아 안으로 당겼다.
"뭐예요?"
"이건 꽃다발. 이건 책. 이건 와인. 이건 향수. 이건 유명한 미술작품 엽서들. 원화는 구해지 못했어. 돈으로도 삼일 만에 유명 원화를 구하진 못하더라. 아직 자본주의가 세상을 장악한 건 아닌가 봐!"
"아니... 뭐가 이렇게 많냐고요."
꽃다발은 또 왜 이렇게 크고? 거의 내 상체만하지 않은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 뭐 그런 건가?
"일단 고마워요."
"일단은 빼주면 안 될까?"
"아니, 진심으로 고마운데 꽃다발이 너무 커요."
"오."
그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런 그를 세워두고 집 안에 있는 화병 두 개를 가져와 보여줬다.
"보여요?"
"나 아직 눈이 멀진 않았어. 노화 방지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거든."
"화병이 작죠?"
"응."
"당신이 가져온 꽃다발 존나 크죠? 꽃이 많죠? 여기 나누어서 예쁘게 꽃꽂이 해야겠죠?"
"......왜 나에게 그런 테러블한 일을 시키는 거야. 제발. 내가 자신있는 걸 시켜줘! 차라리 말도 안 되는 요리 재료 구해오기 이런 걸 해주면 안 될까?"
"안 돼요. 해요."
단호하게 말을 쳐내고 테이블에 앉힌 다음 꽃다발과 화병 두개를 앞에 놔줬다. 그는 정말로 참담한 얼굴로 그것들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이런 말 뭐한데, 내가 싫으면 직접 말해줄래? 아니. 말하지 마. 나 나름 상처 잘 받는 인간이야."
"나름이 아니라 잘 받는 거 알고 있으니까 그만하고 얼른 해요. 예쁘게 해주는 거 바라지도 않으니까."
"기대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말은 쓸쓸하구나..."
그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꽃을 화병에 옮기기 시작했다. 좀 너무했나 싶다가도 이 정도 괴롭힘은 나쁜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울퉁불퉁하네."
"화병 보지 마. 나 봐. 잘생긴 내 얼굴을 봐."
자기가 꾸민 화병이 아주 창피했는지 그는 평소 하지 않는 말까지 했다. 물론 겉모습이 근사하기야 하지만.
"스스로 잘난 거 아는 남자 재수없다."
"나 잘난 거 하나 없어. 아주 없어. 별 볼일 없어. 가장 섹시한 남자 1위라니. 다들 속았지. 직업을 사기꾼으로 바꾸어도 성공할 거야."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어갔나. 아님 열어둔 창문 사이로 내 정신머리를 흐리게 하는 무언가가 흘러 들어 오나.
오늘따라 그가 하는 말이 다 우스워 작게 킬킬댔다. 라이언 레이놀즈는 테이블 매너를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는 사람처럼 깔끔하게 음식들을 먹었다. 손가락을 움직이고, 입 안에 있는 것을 음미하며 씹고, 대화할 때는 나와 눈을 맞추었다.
"부상은 없었어요?"
"아, 별로? 뭐 어디 하나가 부러진 거 아닌 이상 우리 업계에서는 부상으로 봐주지 않거든.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 올렸다. 이해가 안 가는 말은 아닌데 묘하게 거슬려서 대답 대신 와인잔을 빙글 돌렸다.
"핸드폰에 내 사진 지웠어요?"
"나? 나 핸드폰 없어."
"지우라니까."
"나 요즘 자연을 사랑하게 되어서 그렇게 문명에 가까운 전자 기기들 다 내다 버렸어."
뻔뻔하기 그지 없지. 눈썹을 올린 채 그를 바라보다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 지울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건 그의 시선에서 바라 본 나였으니 어찌 보면 그에게 더 지분이 큰 사진이다.
"음-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그가 포크를 쥔 채 우물거렸다.
"나 뭔가 사과해야 하나?"
"에?"
"기분이 별로인 이유가 나야? 아니면 다른 거야? 다른 거면 기꺼이 내 한 몸 불살라서 그걸 제거해 줄 거고. 이유가 나라면..."
"본인이라면? 뭐 어쩔 건데요."
의자에 한쪽 팔을 걸친 채 그에게 물었다. 입 안에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킨 그가 고뇌하는 눈을 했다.
사람 초대해 놓고 틱틱거리는 내게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화살을 돌린다.
"나라면..."
"......"
"으. 어쩌지. 완전 버러지 멍청이가 된 것 같아. 그럴싸한 말을 하고 싶은데 하나도 안 떠올라. 허니 비의 기분을 나쁘게 한 사람이 나라는 걸 가정하는 순간 백지가 됐어. 최악이네."
그가 인상을 마구 구기며 두 손에서 식기를 놓았다. 정말로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마냥 몸서리치며 어쩔 줄을 몰라하는데 내가 그 만큼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나 궁금해질 정도였다.
나는 거짓말을 제법 잘한다. 이런 걸로 거들먹거려도 되나 싶지만 마음 먹고 거짓말을 하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니까, 심각한 영역의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선의를 가진 거짓말만 하는 게 내 거짓말의 성공 요인이다.
"그쪽 초대하고 나서 깨달아 버렸어요."
"깨달아? 어떤 걸?"
긴장한 얼굴을 한 레이놀즈가 앞으로 몸을 숙였다.
"내가 형편없는 요리사라는 걸. 성에 안 차요. 지금 여기 있는 요리들 싹 다. 최선을 다 하긴 했는데 나 더 잘 할 수 있는데! 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 그래요."
"뭐? 형편없는이란 표현이 이런 데서 감히 튀어나올 수 있는 거였어? 말도 안 돼. 그 어떤 미슐랭 레스토랑에 가도 이런 맛은 느껴본 적 없어. 완전 신선하잖아. 고든 램지도 이 요리를 먹으면 방긋 웃으며 접시를 핥을 걸?"
"그게 대충 내 기분이에요."
"어?"
사실 요리에 대해 그렇게까지 몰두하진 않았다. 애초에 내 영역 밖의 것이라 생각해서 최선을 따질 것 까진 아니라는 거다.
그는 멍청한 얼굴로 침묵하다 조금 뒤 맥없이 몸에 힘을 풀었다.
"나 다친 데 없다니까. 부상이랄 것도 없어. 얼굴 쓸린 거. 팔꿈치에 상처난 거. 다리 긁힌 거 밖에 없어."
"예예."
"걱정을 이렇게 해주네. 감동받긴 했는데 이상하게 뒷통수가 막 얼얼해."
소름끼치다는 듯 팔을 벅벅 문지르는 그를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레이놀즈는 하던 것을 멈추고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매우 난처하다는 듯 이마를 짚고 중얼거렸다.
"이건 곤란해."
"뭐가요 또."
"내가 말했잖아."
"......"
"네가 그렇게 나를 꿰뚫어 볼 때마다 빌어먹게 좋다고. 그래서 온 몸에 전율이 온다고. 그 시선 속에 잠겨 죽어버리라고 하면 까짓 거 달콤하네 하면서 그냥 뛰어들 것 같단 말이지."
https://hygall.com/608704241
[Code: aeb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