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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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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는 유순한 표정으로 노부의 얼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케이를 내려다보다 케이의 위로 푹 쓰러졌다. 영감에 대한 분노로 속이 드글드글 끓는데 동시에 이 사람이 그 망할 인간한테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도 몰랐다는 걸 생각하니 드글드글 끓던 속이 새까맣게 타 버린 것 같아서 온몸에 힘이 빠졌다. 노부는 노부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는 케이를 한참 끌어안고 있다가 물었다. 

"언제 만났어요?"
"한 1년쯤 전이었나."
"케이..."

벌써 1년 전에 만났는데 그동안 노부에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던 게 서운하기도 하고, 벌써 케이에게 손을 뻗쳤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던 영감이 가증스럽기도 했다. 게다가 케이가 영감에게 대체 무슨 말을 듣고 무슨 취급을 당했을지 짐작도 안 돼서 속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케이는 몸이 찌뜩찌뜩해져서 불쾌하고 허리도 아프니까 일단 목욕을 하고 싶다고 했다. 케이는 건강하고 튼튼하지만 땀을 흘린 후에 계속 젖은 채 있으면 확실히 감기에 걸리기 쉽긴 할 테니 노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욕실로 가 물을 받았다. 케이가 다시 말을 시작한 건 둘이 함께 뜨거운 물을 채운 욕조에 앉았을 때였다. 

"처음엔 무슨 일인지 전혀 짐작도 못했는데 내가 다니는 회사의 CEO가 날 보겠다고 하니까 놀라서 일단 갔지. 그때까지만 해도 네 아버지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진짜."
"뭐, 드라마처럼 갑자기 까만 차가 눈 앞에 나타나 멈추더니 타라고 하기라도 했어요?"
"어, 생각보다 드라마가 고증을 잘 하나 봐. 너무 드라마 같아서 식상하더라."
"..."
"그래서 네가 알고보니 스즈키 가의 막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제 돈봉투를 주거나 얼굴에 물을 끼얹으려나 생각했는데 그러진 않더라구. 그건 또 드라마랑 다르던데."

불안한 이쪽 마음은 모르고 재잘재잘하는 케이가 귀여우면서도 야속해서 물 위로 드러난 케이의 어깨 위로 뜨거운 물을 부어주는 손길이 거칠어지자 케이가 키득키득 웃고는 노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나한테 너랑 헤어지라고 하더라고. 돈봉투도 안 주고."

돈봉투를 못 받은 게 그리 서러울 리는 없었다. 케이는 무척 유능한 사람이고 승진도 아주 빨랐다. 낭비하지 않고 돈을 차곡차곡 잘 모으는 알뜰한 성격이지만 돈에 집착하는 성격도 아니고. 하지만 돈봉투 돈봉투하는 게 재미있는지 케이는 계속 돈봉투 이야기를 하며 투덜거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와중에도 그게 귀여워서 입을 맞춰주자 케이는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헤어지라고 하길래 안 사귄다고 했더니 아예 딱 잘라서 거절하라는 거야. 그래서 진짜로 딱 잘라서, 여러 번 거절했다고 하니까 화를 내더라고. 거짓말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

케이는 정말로 딱 잘라서 여러 번 거절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딱 잘라서 거절해 놓고도 매몰차게 관계를 끊지는 않았지만. 영감도 그걸 알아서 분통을 터뜨린 거겠지만 케이가 만약 그때 영감 말에 넘어가서 매몰차게 노부와의 관계를 끊어냈으면 그때 영감의 목숨줄도 잘렸을 테니까 고마워 하라고, 빌어먹을 영감.

"나한테 내 가족이 있는 미국 지사장으로 보내 줄 테니까 너랑 만나지 말라고 하더라."
"... 거절했어요?"
"거절했지. 아, 그러고보니까 돈봉투는 주지 않았지만 돈봉투랑 비슷한가? 지사장으로 가면 월급도 올라가고?"
"케이!"

그러자 케이는 또 피식 웃더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랬더니 사람을 하나 찾아준다고 했어."
"사람?? 어떤 사람이요?"
"날 납치했던 사람."
"... 네?"

그리고 케이는 노부가 평생 잊지 못할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마치다는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하교하던 길에 놀이터에 들러서 놀고 있다가 납치를 당했었다. 정확하게는 놀이터에서 친구와 함께 놀고 각자 집으로 가기 위해 헤어져서 혼자 걷고 있을 때 자동차 한 대가 멈춰서더니 운전자가 그랬었다. 

"너 아까 놀이터에서 얘랑 놀고 있지 않았어? 얘가 아저씨 차에 부딪쳐서 병원에 데려가는 길인데 얘 집이 어딘지 알아?"

차 안에는 정말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친구가 있었다. 놀란 마치다는 얼른 차 안에 올라타서 친구를 살피려고 했다. 그러나 마치다가 차에 오르자마자 누군가 마치다의 얼굴에 하얀 천을 가져다대더니 의식이 사라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둘이 납치된 건 아직 어렸던 마치다가 밖에서는 고양이로 변하면 안 된다는 부모님의 엄포를 또 홀랑 까먹고 놀이터에서 친구와 함께 수인형으로 변해서 놀았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여우였고 마치다는 고양이였는데 둘 다 너무 어려서 수인형도 어렸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보기에는 새끼고양이와 강아지가 같이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거라 단순하게 생각했다. 둘이 변하기 전부터 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들은 수인 불법거래 조직이었고 반인반수 상태일 때 성적으로 가장 끌리는 수인들을 골랐기 때문에 주로 꼬리와 긴 귀가 있는 수인들을 선호했다. 그런 놈들의 눈에 아기고양이와 아기여우 형태로 놀고 있는 어린 수인들이 보인 것이다. 그렇지만 둘 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당장 팔려가지는 않았다. 반항하지 못하게 하고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많이 때리기는 했지만. 놈들은 마치다와 친구에게, 다른 모든 납치 피해자들에게 한 경고를 했다. 너희가 어디에 살고 있고 이름이 뭔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부모의 이름이 뭔지도 전부 알고 있으니까 도망갈 생각 따윈 하지 말라고. 너희가 도망가면 너와 너희 가족을 모두 죽일 거라고. 어린 마치다에겐 무서울 수밖에 없는 협박이었다. 몇날며칠 정신없이 얻어맞고 쫄쫄 굶으며 간간이 소금간만 한 주먹밥이나 마른 식빵 따위를 얻어먹은 지 며칠이 지난 지도 알 수 없었다. 처음엔 집에 보내달라고 빌고 울기도 했지만 너무 많이 얻어맞고 나니까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곳에서는 가끔 어느 정도 큰 청소년기의 납치피해자들은 옷을 입은 건지 만 건지 모를 정도로 조그만 천조각만 걸친 채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기도 했었다. 올라갔다가 안 돌아오기도 했고. 그때 마치다와 함께 잡힌 친구는 마치다보다 조금 컸다. 그래봤자 어린애였는데 어느 날 그 친구도 팬티 같은 작은 천조각 하나만 걸치고 다른 형, 누나들과 함께 끌려갔다 돌아왔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돌아온 친구는 그날부터 납치된 피해자들이 갇혀 있는 철창 속에 있을 때도 마치다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겁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나쁜 놈들이 주고받는 대화에 이상할 정도로 집중하며 몰래몰래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친구는 어느 날 마치다에게 속삭였다. 

"3일 후에 사냥을 나간대. 그때 도망가자."
"...사냥? 무슨 사냥?"
"우리 잡아온 것처럼 또 누구 잡아오려는 거야. 그걸 사냥이라고 하나 봐."
"도망가면 죽인다고 했잖아."
"도망 안 가면 끔찍한 일을 당할 거야."

마치다는 잔뜩 겁먹은 친구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그때 위에 올라가서 뭘 본 거야?"
"학교 강당 같은 그런 데가 있는데. 무대에만 불을 켜놓고 우리를 무대에 세워서 경매를 했어."
"경매가 뭐야?"
"찜하는 그런 거? 선택하는 거? 그런 건가 봐. 우리가 올라가고 놈들이 100만부터 '경매'를 시작한다고 했는데 무대 아래쪽에 앞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갑자기 빨간 색으로 13번하는 숫자가 켜졌어. 무대만 환하고 무대 아래는 불이 없어서 누군지는 보이지 않았어. 그때부터 계속 그런 식으로 숫자를 올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빨간 불이 계속 켜졌어. 나랑 같이 나간 형 중에 마사카 형 있잖아. 그 형이 그때 3500만에 '낙찰'됐다고 하고 끌려갔어. 다시 안 돌아왔잖아."
"... 어떻게 됐는데?"
"팔린 거야."
"팔...팔았다고? 사람인데?"
"그래. 그날 안 돌아온 누나랑 형들은 다 팔렸어. 나는 어려서 그냥 이런 어린애들도 있다고 구경만 시키는 거라고 '경매'는 안 하고."

마치다가 침을 꿀꺽 삼키자 친구는 더 어두워진 얼굴로 속삭였다. 

"며칠 전에 온 형 있었잖아. 말도 안 하고 계속 울기만 하던 형."
"어."
"무대 아래서 몇 명을 '경매'할 때처럼 빨간 숫자 켜서 뽑았거든. 경매할 때는 한 사람만 뽑았는데 그때는 여러 명을 뽑았어."
"어."

무서운 이야기가 기다릴 것 같은 기분에 다시 침을 꿀꺽 삼키자 친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속삭였다. 

"그 사람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서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그 형한테 달려들어서 막..."
"... 때렸어?"
"아니. 형 몸을 막 만지고 억지로 자기 ... 그거 빨게 하고 막 다리 벌려서 억지로 그거 집어넣고."

그게 뭔지는 알았다. 어린이들을 노리는 나쁜 사람들도 있다면서 선생님들이 이것저것 교육을 해 줬었다. 그때 배운 것들 중에는 모르는 어른이 말 걸면 주변에 도움을 구하기 등등 외에도 누군가 몸을 만지거나 입을 맞추려고 하면 소리를 지르던가 주변에 도움을 구하거나 도망가라거나 하는 것도 있었다. 부모님도 남이 함부로 몸을 만지게 하면 안 된다고 했고.

그런데 몸에 막 뭘 넣는다니? 억지로 빨게 한다니? 친구는 그 형이 말을 안 듣고 막 고개를 돌리고 도망치려고 하니까 때렸다고도 했다. 친구는 그걸 봐서 무서웠겠지만 마치다는 오히려 못 봐서 더 무서웠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모르니까 머릿속에서 더 끔찍하게 상상이 돼서. 그래서 마치다는 친구와 함께 나쁜 놈들이 '사냥'을 위해 대거 그 집을 비우는 날을 노려서 도망가기로 했다. 그리고 마치다가 친구와 함께 그날 소수의 감시자만 남겨놓고 모두 '사냥'을 나간 날 며칠 전 경매로 다 팔려서 또 얼마 남지 않은 수인들을 지키고 있는 놈의 주의를 돌릴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마치다가 친구와 납치돼 온 이후 두 꼬마를 잘 챙겨줬던 형이 다가왔다. 

"아무 말 하지 말고 조용히 해. 형만 따라와. 절대로 소리를 내거나 형을 놓치면 안 돼."

마치다와 친구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형을 보자, 형이 '여기서 같이 나가자'라고 속삭였다. 

알고 보니 형과 다른 수인들도 그날 탈출하려고 작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다와 친구는 형, 누나들과 함께 도망쳤다. 다른 우리에 있는 형 한 명이 소란을 피워서 간수의 시선을 끌었을 때 뱀 수인 누나가 - 뱀인 줄 모르고 착각해서 잡아왔다고 했다. 뱀이라서 경매에서 팔리진 않았지만 너무너무 예뻐서 조직에서도 풀어주지 않았다고. - 창살 사이로 몰래 빠져나가서 혼자 피해자들을 감시하고 있던 감시자의 발목을 꽉 물었다. 뱀 누나는 그 사람이 죽었을 거라고 했다. 자기 독은 정말 강하다고. 그 누나가 감시자에게서 열쇠를 뺏아서 우리를 다 열었다. 감옥은 지하실에 있었는데 위층으로 올라온 형과 누나들이 1층에 있던 다른 놈들도 공격해서 다 기절시키고 원래 피해자들이 차고 있던 수갑과 족쇄로 전부 묶어놓은 다음 정신없이 밖으로 내달렸다. 어린 마치다와 친구는 발걸음이 느렸지만 형들이 손을 꼭 잡고 달리다가 마치다나 친구가 뒤처지면 업거나 안고 달려줬다. 다행히 그 건물 주위에 있던 숲을 조금 벗어나자 큰길이 나와서 형과 누나들이 손을 흔들어 차를 세웠고 탈출한 일행은 전부 경찰서로 갔다. 그때 전부 옷차림도 넝마였고 여기저기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구해준 마음씨 좋은 운전자들도 납치당했다 탈출했다는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들이 신고를 받고 갔을 때는 이미 그들이 갇혀 있던 곳은 거대한 화마에 휩싸여 있었고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집의 소유주는 옛날에 조부가 창고로 쓰던 것을 물려받았는데 팔리지도 않고 쓸 일도 없어서 계속 방치하고 있었다고, 범죄조직에 이용되고 있는 것도 몰랐다고 했다. 경찰은 이 사람의 말을 의심했지만 창고 소유주는 외국에 있었고 가족들이 전부 몇 년 동안 귀국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마치다는 그를 납치했었던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다. 

누군지도 몰랐는데... 


*****


"네 아버지가 날 납치한 사람이 누군지도 알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안다고 하더라. 나도 몰랐고 경찰들도 몰랐는데. 대기업 정보력이 경찰 수사력보다 좋나 봐."

노부는 케이가 납치당한 적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밤마다 자다 깨서 집 안을 한 번 둘러보고 나야 다시 잠드는 걸 보면 분명히 과거에 트라우마를 강하게 얻은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게 이렇게 심각한 범죄와 관련돼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영감은 그걸 알아놓고도 케이를 보호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걸 자기 뜻에 맞게 이용하려고 했단 말이야? 이 쓰레기가! 

"... 그래서 찾았어요?"

자신의 목소리인데도 자기 목소리 같지가 않았다. 욕실이라 목소리가 울려서가 아니었다. 목소리가 너무 거칠어지고 낮아져서 자기 목소리 같지 않았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히 다행이었다. 그러자 케이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네 앞에서 사라져주면 그 남자를 찾아준다고 해서 싫다고 했어."
"... 케이."
"너무 손해보는 장사잖아. 난 합기도와 복싱을 배웠고, 이제 휴대전화도 있어. 내 휴대전화에는 SOS를 누르면 바로 경찰과 아몬상에게 연락이 가는 앱도 깔려 있어. 다시 그런 놈한테 잡혀가지 않을 거고, 잡혀간다고 해도 무력하게 있지도 않을 거야. 그런데 그깟 놈 때문에 내 인생이 또 좌우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이제 나한테 위협도 안 되는 그런 놈 하나 잡자고 너랑 연 끊고 사는 건 너무 내가 손해야."
"... 자다 깨서 돌아다니는 것도 그래서예요?"

케이는 노부를 계속 거절하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공간에 들어오는 걸 견딜 수 없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잘 수도 없다고 했다. 그 이유가 이런 거였어? 과거에 납치된 적이 있고, 그 납치범들이 언젠가 네 집에 찾아가서 죽일 거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쪽에서 내 이름과 부모님 이름, 내가 사는 곳도 안다고 했잖아. 그게 블러핑인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부모님한테 그렇게 말하자 부모님은 당장 이사했고 아버지도 직장을 옮겼어. 온 가족이 다 함께 개명했고. 처음엔 모두 불안해했지만 몇 년간은 다 같이 서로를 격려하며 잘 극복하는 것 같았어. 그런데, 나랑 나이차가 많이 나는 동생이 있는데 동생도 수인이야. 그 애까지 납치당할 뻔한 일이 있었던 데다가 그 얼마 후에 집에 도둑이 들었거든. 도둑은 잡았는데 그냥 도둑이었어. 주거침입 강도 전과가 많은 그냥 강도. 그런데도 부모님은 내가 납치당한 일과 동생이 납치당할 뻔했던 일과 그 도둑 사건이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셨지. 그래서 가족들은 다 같이 이민을 갔어. 나는 남았고. 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나도 괜찮지는 않았는지 밤에 자다 깨게 되고 잠에서 깨면 집 안을 한 번 확인해 봐야 안심하게 되더라고."
"... 계속 그랬어요? 가족들 이민 가고 난 다음에 계속?"
"매일은 아니고... 그냥..."

케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덧붙였다. 

"최근 들어서 조금 심한 편이긴 해. 원래는 매일 밤 깨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변태 새끼 이후로 심해진 거죠?"

케이는 그냥 낮게 웃고 말았다. 역시 그 새끼 때문이었지. 케이는 그때 지하에 갇혀 있어서 그 경매라는 것에서 일어난 성폭행도 말로만 듣고 보지는 못했던 것 같지만 계속 상상하게 되니까 더 충격으로 남았을 텐데. 영감은 그 사건과 조직을 조사했을 테니 케이가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안고 있을지 알면서도 그런 변태를 보냈다 이거지. 케이의 트라우마를 자극해서 그때의 범인을 잡아달라고 애원하며 노부와 헤어지겠다고 빌게 하려 한 건가? 기가 막히고 열받아서 말도 안 나올 정도였다. 평생 노부한테 관심도 없었으면서 왜 갑자기 남의 인생에 간섭하고 난리야? 처돌았어? 정말 죽고 싶은 거야? 명이 너무 긴 것 같아서 그래?

노부가 화를 가라앉히려고 심호흡을 하자 케이가 다시 노부의 입술에 입을 촉 맞췄다. 물이 식어서 케이를 물에서 꺼낸 후 둘 다 포근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케이의 집에 노부의 잠옷은 없어서 전에 케이가 노부 집에서 입고 왔던 노부의 셔츠와 반바지를 입었지만. 케이 집에도 잠옷을 사다놔야겠어. 커플 잠옷으로 사야지. 

두 사람이 다시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노부는 케이의 뺨을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가족들이 이민 가신 건 언제예요?"
"4년 전."
"미국으로?"
"응. 원래 동생이 미국으로 대학을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저런 일 때문에 아예 고등학교부터 거기서 다니게 하려고 데리고 다 같이 갔어. 동생이 공부를 잘해."
"... 케이는 왜 안 갔어요?"

케이는 픽 웃더니 케이의 뺨을 콕콕 찌르고 있는 노부의 손가락을 꼭 깨물었다. 

"미국엔 네가 없잖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말발만은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데 오늘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머리가 멍했다. 게다가 심장도 난리가 났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멍해졌던 노부는 노부의 손가락을 깨무느라고 잡고 있는 케이의 손가락을 같이 꽉 깨물었다. 안 사귀어주면서 사람 마음 흔드는 말은 잘만 하지. 이 여우. 아니 이 고양이. 

"그러면 아몬 상 말고 나로 바꿔줘요. SOS."

무정한 못된 고양이는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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