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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19:50
마치다는 여우 수인이야
어릴 때 어미를 잃어 수인 보호소에서 자랐지
수인들은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람보다 지능이 조금 모자라단 인식이 있어서 말을 알아듣는 고급 애완동물쯤으로 취급받아왔어
그나마 요즘 들어선 수인과 인간의 파트너 등록이 가능해지는 등 우리와 동등하게 대우해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지
대형 수인들은 주로 보디가드나 상류층의 과시용이었고 소형 수인들은 여러 계층의 애완용으로 입양되어서 아무래도 위협이 되는 대형 수인들보단 소형 수인들이 더 입양률이 높은 편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치다는 입양이 되지 않았어
야생에서 자라다 보호소에 온 것도 아니고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 손을 탔으면서도 마치다는 까다로운 여우 수인이라 몇 년간 돌봐준 수인 사육사마저 수틀리면 물어버리기 일쑤였거든 그렇다 보니 마치다의 귀여운 모습에 홀려 흥미를 가졌던 사람들 역시 사나운 입질에 금방 돌아가 버렸지
보통 10살 전에 입양을 가는 소형 수인들이니까 이제 막 15살이 된 마치다는 소형 수인들 중에서는 제일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어
나이가 차서 입양을 가기 어려운 수인들은 주로 보호소의 일을 돕곤 했는데 그중에서 맹수 수인들은 인간보다 힘이 더 세서 좋은 일꾼이었어 그런데 마치다는 그마저도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 바빴지 입양도 안가 일도 안 해 이 보호소에서 제일 팔자 좋은 이는 마치다 일 거라고 보호소 사람들이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그래도 어릴 때부터 키운 정이 있어서 마치다를 정말 미워할 순 없었어
그렇게 천덕꾸러기 여우는 제 하고픈 대로 보호소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중이었는데 글쎄 보호소에 막대한 후원금을 내주는 스즈키 가의 이사님이 보호소에 방문하신다지 뭐야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보호소 사람들이 아침부터 부산스레 소란을 떠는 바람에 단잠을 방해받은 마치다는 불퉁한 얼굴로 익숙한 사육사곁에 슬쩍 다가갔어 분풀이로 다리를 콱 깨물려고 했는데 마침 잘 만났다는 표정을 지은 사육사가 한발 빨랐지 이 녀석이 또! 입질을 하려던 마치다를 낚아채 번쩍 안아올렸어
“오늘 오후에 엄청 중요하신 분이 오셔. 행여나 눈에 띌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흥, 내가 왜?”
“마치다!”
어릴 때부터 마치다를 돌봐준 사람 중에 한 사람인 그가 이렇게 큰소리를 내는 걸 처음 봐서 화들짝 놀라고 말았어 심통이 난 여우는 사육사의 손을 깨물곤 마치 제가 깨물린 것처럼 깨갱거리더니 은신처로 쏙 들어가 버렸지 하여간 겁쟁이 주제에 성질머리하고는
그래도 마음씨 좋은 사육사는 큰소리에 놀란 마치다가 걱정돼서 닭 다리를 은식처 옆에 놔주자 금세 고기를 물고 다시 은신처에 쏙 들어가 버리지 뭐야
아마 한동안은 저곳에 있을 것 같았어
차라리 계속 은신처에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한 사육사는 서둘러 보호소를 점검하러 발걸음을 돌렸지
스즈키 이사님이 오늘 수인 보호소에 방문한 까닭은 과시용 맹수 수인을 입양하기 위함이었어 아무래도 폐쇄적인 상류층들 사이에선 여전히 수인의 인격 따윈 존중해 주지 않았거든 그저 제 지위에 걸맞은 화려한 악세사리에 불과할 뿐이었지
노부는 그런 속물들이 지긋지긋했지만 저도 어쩔 수 없는 상류층의 사람인지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지
기왕 이렇게 된 거 호랑이 수인을 입양해 볼까 늑대도 나쁘지 않지.. 과하게 친절한 보호소 소장의 안내를 받으며 뒤따르던 그는 건성으로 소형 수인 구역을 바라보다 순간 발걸음이 멈추었어
“이사님 왜 그러십니까?”
“.... 저 아이로 할게요.”
“....?”
노부는 여우를 본 순간 앞서했던 모든 생각들이 증발해 버리고 말았어 제가 지금까지 수인에게 관심이 없었던 건 저 여우를 만나기 위해서였나 봐. 그렇게 스즈키 이사님은 여우 마치다에게 완전히 꽂히고 말았지
2
“이.. 아이로 하신다고요? 아이고 이사님 얘 정말 여우입니다. 아니 여우가 맞긴 한데 그게 아니라. 저 귀여운 얼굴에 홀리시면 안 됩니다. 수틀리면 사육사도 물어버려서 저희 보호소에 안 물린 직원이 없다니까요!”
마치다를 선택한 노부에 난색을 표한 보호소 소장은 서둘러 그를 말리려 하였어 괜히 마치다 때문에 귀한 후원자를 잃게 될 판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소장의 말은 노부의 귀에 닿지 않았지
“이 작은 애가 물어봤자 뭐 얼마나 물겠습니까. 괜찮습니다. ”
이미 마치다에 단단히 빠진 노부는 소장의 경고보다도 저 복슬복슬한 털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지 그래서 저도 모르게 탐스러운 등을 쓸어보았다가 불쑥 내밀어진 손에 깜짝 놀란 마치다에게 콱 손등을 물리고 말았지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마치다 이 녀석!”
아 이제 끝이야
주르륵 피가 맺힌 손등과 인상을 찌푸린 스즈키 이사를 보고 소장은 망연자실했어
이제 이사님이 노발대발 화를 내시고 우리 보호소에 후원을 당장 끊어버리시겠지 여우 수인의 폭력성을 방치했다며 문을 닫으라 협박이라도 하면 어떡하지?
새파랗게 질린 소장이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굳어버리자 노부는 대수롭지 않게 손등을 매만지더니 제가 깨물어놓고 잔뜩 웅크린 마치다를 향해 입을 열었어
“이런, 내가 갑자기 만져서 겁을 먹었구나. 미안해.”
아뇨 마치다는 원래 제가 물어놓고는 되려 아픈 척을 하는 게 특기랍니다.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소장은 입을 꾹 다문 채 눈치를 살필 뿐이었지
“나 왜 여깄어야 하는데?”
여우로 있는 게 더 편한 마치다는 지금 이만저만 짜증이 난 게 아니었어 배고파서 잠깐 은신처를 나왔을 뿐인데 갑자기 낯선 사람이 저를 만지려 하질 않나 또 사람을 물었다고 혼이 날줄 알았더니 그런 건 안중에도 없이 사람들이 애걸복걸하며 인간화시켜 옷을 입히질 않나 평소엔 달라고 난리를 쳐도 한두 개 줄까 말까 인 초콜릿을 (충치 생기면 큰일이니까) 왕창 쥐여주길래 그만 홀랑 넘어가 버렸지만 생각할수록 분한 거 있지
잔뜩 골이나서 머리 위로 솟아오른 귀가 팔랑팔랑 움직이는 게 이대로 뒀다가는 바닥을 뒹굴며 난리 칠 게 뻔해 소장은 얼른 마치다에게 본론을 꺼냈어
“마치다 저분이 너 입양하고 싶으시대. 마치다는 어때?”
뭐? 마치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어 아까 나한테 물린 그 사람 말이야
저 때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아까부터 봉봉 초콜릿의 껍질을 까 제 입에 넣어주길래 나한테 쫄아서 내 부하가 되기로 했구나!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라 나를 입양하고 싶다 나 봐.
그러니까 내 부하가 아니라 주인이 될 생각이라니 마치다는 어이가 없었지 지금까지 본 인간들 중에서 제일 잘생기긴 했지만 음 입은 옷도 뭔가 비싸 보이긴 해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저한테 웃어주는 거 보면 착한 것 같기도 하고 음음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나보고 모르는 사람한테 입양을 가라는 거야?!”
어떡해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배신감에 가득차 수인화도 풀려버린 마치다가 켕켕 짖으며 소장을 바라보자 그는 당황스러워 하며 얼른 마치다의 말에 답해주었어
“마치다. 원래 입양은 처음 만났지만 너를 원하는 사람한테 가는 거야.”
“아니 내가 왜 모르는 사람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입양’이란다 애초에 너는 아는 사람도 없잖아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마치다를 바라보았지만 소장은 차마 그 말을 뱉을 수 없었어 이 바보 여우는 어차피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할게 분명했거든
하지만 이렇게까지 거부할 줄은 몰라서 소장은 당혹스러웠지 미우나 고우나 어릴 때부터 키운 여우이고 따지자면 마치다가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큰 건 저희들 탓 도 있으니까 괜히 이런 애를 입양 보냈다가 마치다는 물론이고 귀중한 후원자 님까지 잃을까 걱정이 돼서 정말 죄송하지만 다른 아이를 입양하시는 건 어떠시냐 운을 떼려 했는데 이번에도 노부가 한발 빨랐지 뭐야
“그럼 아가 아저씨랑 친해지면 아저씨랑 같이 살래?”
“...”
아가라니 누구보고 아기래 이래봐도 소형 수인 대장한테! 인상을 팍 구긴 마치다지만 그래도 다정하게 저를 보고 웃어주는 얼굴이 싫진 않아서 새침하게 팩 고개를 돌리고 말았어
아직 갈 일이 먼 두 사람
+
마치다는 보호소에 있는 사람들은 몽땅 자기 부하라고 생각한다
맹수 수인들한테는 덤비지 않는다
3
“케이 잘 있었어?”
“노부!”
입에 넣었던 닭고기도 뱉어버리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마치다를 보면서 노부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어
처음 만났을 때 저의 손을 물어버린 여우가 맞는 건지 얼른 자신을 쓰다듬으라며 배를 까고 누워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게 영락없는 여우짓 같지 뭐야
새침 떨던 마치다를 이렇게 만들기 까지는 딱 세 달이 걸렸어
그 세 달 동안 노부는 매일같이 마치다를 만나러 왔지
처음엔 왜 왔냐고 틱틱 거리기 바쁘더니 하루가 멀다 하고 웃으며 저를 보러 오는 사람에게 마치다는 점점 마음을 내어주기 시작했어 사실 노부가 가져오는 달달한 간식 덕도 컸지 뒤에서 사육사들이 아이고 저 단 걸 한입에 넣네..라며 탄식하는 걸 흐린 눈으로 바라본 채 마치다의 비위를 맞춰주다 보니 어느새 마치다는 노부를 제 부하에서 친구로 승격시켜 줬지 뭐야
무려 제 이름을 알려주고 노부만 특별히 자신을 ‘케이’라고 칭할 수 있게 해주었어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인데 노부는 다행히도 마치다의 말에 감격해서 어린 여우를 만족시켜 주었지
세상에 저 까탈스러운 여우가 저렇게까지? 하고 놀란 사육사들은 덤이고 말이야
“마치다. 스즈키 이사님이 그렇게 좋아?”
“노부? 노부 좋아. 잘생겼잖아.”
사실 마치다가 노부를 좋아하는 건 매일 같이 저를 보러 오는 성실함도 아니고 맛있는 간식 때문도 아니었어 오직 얼굴이지 저 잘난 얼굴. 이래 봬도 여우는 얼빠였거든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못되게 굴고 입질을 했던 것도 따지자면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아서 였지
아 사육사들은 순전히 기분에 따른 거라 예외야
아무튼 귀엽다며 다가오는 인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치다는 부러 사납게 굴었어
그런데 자신이 좋다며 다가온 노부는 달랐지
모르긴 해도 소장이 쩔쩔 매는 걸 보면 대단한 사람 같은데 그런 이가 제 앞에선 헤실헤실 웃어주니까 퍽 마치다의 마음에 들어차지 뭐야 가끔 바보 같을 정도로 웃는 게 흠이지만 뭐 어때 이 몸이 좋다잖아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여우는 그렇게 특별히 자신의 이름을 하사하듯 노부에게 알려주었고 친구가 되어주기로 한 거야
이러니 슬슬 케이의 입양을 다시 꺼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보호소 사람들의 생각과 노부의 마음이 같았던 건지 그는 슬쩍 마치다에게 운을 뗐어
“케이 아직도 나한테 입양 오는 게 싫어?”
“... 노부는 좋아 그렇지만.."
“왜 뭔가 걸리는 게 있어?”
그래 나와 친해졌다 하더라도 고작 세 달 만난 저보단 십여 년을 보낸 곳에 더 애착이 깊겠지 하루아침에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슬프겠어? 오늘 마치다가 제 뜻을 거절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노부는 재촉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어
하지만 여우는 그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지
“아니이... 노부는 내 친구인데 내가 너한테 입양 가면 노부가 내 주인님이 되는 거잖아? 그건 싫어.”
여우가 이렇게나 서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물이었던가
자신이 소형 동물들의 대장이라며 자랑스레 말해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마치다는 이곳을 떠나기 싫은 게 아니라 노부를 주인으로 받아들이는게 싫대
정말이지.. 이상하고 귀여운 여우라니까
노부는 결국 마치다의 대답에 하하 웃어버리고 말았지
그럼 마치다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노부의 얄미운 손을 콱 물어버렸어 가볍게 문거라 피가 나진 않았지만 꽤나 아플 텐데도 노부는 되려 여우를 달래면서 입을 열었어
“미안. 케이 너를 비웃은 게 아니야. 아야. 미안하대도.”
“그럼 왜 웃어!”
“네가 귀여워서 그랬어.”
귀엽기는! 열다섯이나 된 여우에겐 귀엽다기보다 용맹하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걸 노부는 알지 못하나 봐
뽀로통 하게 노려보자 입에 넣어주는 과일 젤리가 맛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연신 저에게 미안하다 하는 노부가 조금 안쓰러워서 그를 용서해 주기로 했지 나는 정말 마음이 넓다니까!
얌전해진 마치다를 무릎 위에 앉힌 노부는 결 좋은 등을 쓰다듬으면서 조곤조곤 여우를 타일렀어
“케이 너를 입양한다고 해도 내가 너의 주인이 되진 않을 거야 우린 지금처럼 계속 친구로 지낼 거니까 대신 내가 너의 보호자가 되어줄게.”
보호자=주인이라는 걸 알지 못한 망충 여우는 그 말이 썩 듣기 좋아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케케 웃음을 지어 보였어
이게 거의 다 넘어왔다!
남들이 보는 마치다
노부가 보는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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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치다의 입양일이 다가오자 보호소 사람들은
시원섭섭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어
아이고 얘가 드디어 입양을 가네
아니 근데 가서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양가감정이 밀려왔지 사실 마치다가 입양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숱한 수인들을 입양 보낸 경험이 무색하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막막했던 그들은 마지막 날 밤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마치다를 붙잡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줄 수 있었어
“알겠지? 화가 나더라도 3번은 참아야 해. 마치다도 이제 열다섯이고 소형 동물 대장이잖아. 대장은 모름지기 너그러워야 하니까 스즈키 이사님이 서운하게 해도 조금만 봐줘.”
“응 나는 대장이니까. 그럴 수 있어.”
간절한 마음이 여우에겐 미처 닿지 않는 건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마치다를 보고 보호소 사람들은 더욱 안달이 났어 그렇잖아 당장 내일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숨겨놓은 간식들만 가방에 가득 넣는 여우를 보고 어떻게 안심을 할 수 있겠어? 결국 한숨과 함께 마치다의 짐을 다시 싸주어야 했지 정말 괜찮을까?
“안녕 잘 있어! 놀러 올게!”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노부의 손을 잡고 해맑게 웃는 마치다에 보호소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어
방금 전까지 노부의 손을 붙잡고 제발 우리 여우 잘 부탁한다며 신신 당부를 한건 비밀로 붙여두고 말이야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마치다가 아무 탈 없이 잘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마는 현실은 녹녹치 않았어
“케이 나왔어.”
“.....”
노부의 집에 오고 정확히 일주일 만에 마치다는 우울해졌거든
처음엔 예쁜 집과 넓은 자신의 방이 좋았어
맛있는 식사가 매 끼니마다 나와서 먹보 여우는 신이 났었지 거품을 잔뜩 띄운 욕조에서 목욕을 했을 땐 어린애처럼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 매일 밤 자기 전 노부가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책도 읽어줘서 저도 모르게 잠에 빠지는 것 역시 마음에 들었는데 그랬는데
노부는 하루 종일 제 옆에 있어주지 않았어
자신의 보호자이기 때문에 마치다에게 좋은 것만 해주려면 일을 해야 한대 나는 그런 것보다 노부랑 있는 게 더 좋다고 했는데도 제 말은 들어주지 않은 거 있지?
그렇다고 노부가 마치다를 혼자 둔 건 아니야 베이비시터를 붙여주었거든 그렇지만 그 베이비시터는 노부가 아니잖아
게다가 자신의 소형 수인들 부하처럼 귀엽지도 않았어
“마치다 같이 책 읽을까?”
“... 저리 가 못생긴 게.”
물론 넓은 집엔 베이비시터 말고도 다른 고용인들이 많이 있었지만 우리의 까탈스러운 여우는 낯을 가렸어 그러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시터와 저에게 친절한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으려니 마치다는 점점 기분이 안 좋아지지 뭐야
“케이 아가 나 좀 봐줘. 왜 그래? 낮에 무슨 일 있었어?”
“... 나 다시 보호소 갈래. 여기 재미없어.”
“... 미안하지만 그건 안돼.”
제가 조금이라도 싫은 티를 내면 어쩔 줄 몰라 했으면서 오늘은 왜 그런 무서운 표정을 짓는 거야? 처음 보는 단호한 얼굴에 당황한 마치다가 서러움과 당혹감을 이기지 못해 엉엉 울어버리자 그런 여우를 안쓰러운 눈으로 달래준 노부였지만 마치다를 다시 보호소에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어떻게 데려온 너인데 절대 안 될 말이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외로워하는 여우를 계속 혼자 둘 순 없었어 (베이비시터:네? 저는요?)
결국 노부는 심사숙고 한끝에 수인 학교를 택했지
마치다처럼 주인이 일을 가 있는 동안 집에 혼자 있는 수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야
그곳에선 단순히 케어 목적이 아니라 수인들의 재능을 적극 지원해 주는 곳이기도 했어 물론 노부가 보기에 마치다는 먹고 노는 게 특기 같아 보이긴 했지만.. 혹시 알아 그곳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재능을 발견할지?
또 자길 낯선 곳에 보내는 거냐고 가기 싫다 징징대는 마치다를 겨우 달래 수인 학교에 보냈던 첫날
노부는 옷이 죄다 늘어난 보람도 없이 바로 마치다를 데리러 가야 했어
“네.. 마치다 보호자님 되시죠? 다름이 아니라 마치다가 친구를 물어서요. 네..”
또 제 성질을 못 참고 호기심에 다가온 강아지 친구를 왕 물어버렸다지 뭐야 노부는 연신 사과를 했지만 결국 그 수인 학교는 더 이상 다닐 수 없었지
집에 돌아오는 동안 뭘 잘했다고 절 데리러 온 노부 손마저 물어대서 피가 났지만 그럼에도 그는 차마 마치다를 혼낼 수 없었어 제 욕심에 수인 학교를 보낸 거니까 말이야 다시 보호소에 돌려보내달라 우는 것보단 저에게 화를 내는 게 훨씬 보기 좋았지
어차피 이곳이 안된다면 다른 수인 학교에 보내면 되었어
그렇게 4번째 새로운 수인 학교를 보낸 날
그날은 어쩐지 첫날부터 전화가 오지 않는 거야
게다가 마치다를 데리러 갔을 때 처음으로 마치다가 웃으며 저를 반겨주지 뭐야
노부는 순간 제가 꿈을 꾸는 줄 알았어
“노부 나 형아 생겼어!”
“... 형아? 우리 케이. 자세히 말해줘.”
알고 보니 마치다와 같은 여우 수인이 이곳에 있다 나 봐
저보다 나이가 두 살 많은 여우를 처음 본 마치다는 곧바로 그 여우에게 폭 빠져버리고 말았대 하루 종일 여우 형아 뒤만 졸졸 따라다녔단 선생님의 말을 듣자 노부는 처음으로 수인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에 기쁘다기 보다 연신 새로 사귄 여우 수인 얘기를 하는 마치다에 질투가 났어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지
자신의 이런 옹졸한 마음은 하나도 알지 못한 채 샤워 후 젖은 머리를 맡긴 마치다는 쭉 신이 난 상태였어
“노부 나 학교 가는 거 좋아 이제 노부 올 때까지 잘 기다릴 수 있어.”
“정말? 케이 대단하다. 멋진 여우네.”
..멍청한 스즈키 노부유키
케이가 학교에 가는 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함이었잖아 보호소에 돌려보내달라 하는 걸 겨우 달래 학교에 보낸 것도 자신이면서 고작 친구를 사귄 걸 질투하고 있다니 제 여우보다 한참 나이도 많은 주제에 나잇값도 못하고 잠깐이지만 부끄러운 생각을 하고 말았지
그렇게 마치다 몰래 마음을 추스른 노부는 자신의 여우가 조잘조잘 떠드는 학교에서의 일을 경청해 주었어
소라 형아 좋아
마치다가 친해진 여우 수인은 소라래
노부마치
어릴 때 어미를 잃어 수인 보호소에서 자랐지
수인들은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람보다 지능이 조금 모자라단 인식이 있어서 말을 알아듣는 고급 애완동물쯤으로 취급받아왔어
그나마 요즘 들어선 수인과 인간의 파트너 등록이 가능해지는 등 우리와 동등하게 대우해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지
대형 수인들은 주로 보디가드나 상류층의 과시용이었고 소형 수인들은 여러 계층의 애완용으로 입양되어서 아무래도 위협이 되는 대형 수인들보단 소형 수인들이 더 입양률이 높은 편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치다는 입양이 되지 않았어
야생에서 자라다 보호소에 온 것도 아니고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 손을 탔으면서도 마치다는 까다로운 여우 수인이라 몇 년간 돌봐준 수인 사육사마저 수틀리면 물어버리기 일쑤였거든 그렇다 보니 마치다의 귀여운 모습에 홀려 흥미를 가졌던 사람들 역시 사나운 입질에 금방 돌아가 버렸지
보통 10살 전에 입양을 가는 소형 수인들이니까 이제 막 15살이 된 마치다는 소형 수인들 중에서는 제일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어
나이가 차서 입양을 가기 어려운 수인들은 주로 보호소의 일을 돕곤 했는데 그중에서 맹수 수인들은 인간보다 힘이 더 세서 좋은 일꾼이었어 그런데 마치다는 그마저도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 바빴지 입양도 안가 일도 안 해 이 보호소에서 제일 팔자 좋은 이는 마치다 일 거라고 보호소 사람들이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그래도 어릴 때부터 키운 정이 있어서 마치다를 정말 미워할 순 없었어
그렇게 천덕꾸러기 여우는 제 하고픈 대로 보호소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중이었는데 글쎄 보호소에 막대한 후원금을 내주는 스즈키 가의 이사님이 보호소에 방문하신다지 뭐야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보호소 사람들이 아침부터 부산스레 소란을 떠는 바람에 단잠을 방해받은 마치다는 불퉁한 얼굴로 익숙한 사육사곁에 슬쩍 다가갔어 분풀이로 다리를 콱 깨물려고 했는데 마침 잘 만났다는 표정을 지은 사육사가 한발 빨랐지 이 녀석이 또! 입질을 하려던 마치다를 낚아채 번쩍 안아올렸어
“오늘 오후에 엄청 중요하신 분이 오셔. 행여나 눈에 띌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흥, 내가 왜?”
“마치다!”
어릴 때부터 마치다를 돌봐준 사람 중에 한 사람인 그가 이렇게 큰소리를 내는 걸 처음 봐서 화들짝 놀라고 말았어 심통이 난 여우는 사육사의 손을 깨물곤 마치 제가 깨물린 것처럼 깨갱거리더니 은신처로 쏙 들어가 버렸지 하여간 겁쟁이 주제에 성질머리하고는
그래도 마음씨 좋은 사육사는 큰소리에 놀란 마치다가 걱정돼서 닭 다리를 은식처 옆에 놔주자 금세 고기를 물고 다시 은신처에 쏙 들어가 버리지 뭐야
아마 한동안은 저곳에 있을 것 같았어
차라리 계속 은신처에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한 사육사는 서둘러 보호소를 점검하러 발걸음을 돌렸지
스즈키 이사님이 오늘 수인 보호소에 방문한 까닭은 과시용 맹수 수인을 입양하기 위함이었어 아무래도 폐쇄적인 상류층들 사이에선 여전히 수인의 인격 따윈 존중해 주지 않았거든 그저 제 지위에 걸맞은 화려한 악세사리에 불과할 뿐이었지
노부는 그런 속물들이 지긋지긋했지만 저도 어쩔 수 없는 상류층의 사람인지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지
기왕 이렇게 된 거 호랑이 수인을 입양해 볼까 늑대도 나쁘지 않지.. 과하게 친절한 보호소 소장의 안내를 받으며 뒤따르던 그는 건성으로 소형 수인 구역을 바라보다 순간 발걸음이 멈추었어
“이사님 왜 그러십니까?”
“.... 저 아이로 할게요.”
“....?”
노부는 여우를 본 순간 앞서했던 모든 생각들이 증발해 버리고 말았어 제가 지금까지 수인에게 관심이 없었던 건 저 여우를 만나기 위해서였나 봐. 그렇게 스즈키 이사님은 여우 마치다에게 완전히 꽂히고 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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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로 하신다고요? 아이고 이사님 얘 정말 여우입니다. 아니 여우가 맞긴 한데 그게 아니라. 저 귀여운 얼굴에 홀리시면 안 됩니다. 수틀리면 사육사도 물어버려서 저희 보호소에 안 물린 직원이 없다니까요!”
마치다를 선택한 노부에 난색을 표한 보호소 소장은 서둘러 그를 말리려 하였어 괜히 마치다 때문에 귀한 후원자를 잃게 될 판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소장의 말은 노부의 귀에 닿지 않았지
“이 작은 애가 물어봤자 뭐 얼마나 물겠습니까. 괜찮습니다. ”
이미 마치다에 단단히 빠진 노부는 소장의 경고보다도 저 복슬복슬한 털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지 그래서 저도 모르게 탐스러운 등을 쓸어보았다가 불쑥 내밀어진 손에 깜짝 놀란 마치다에게 콱 손등을 물리고 말았지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마치다 이 녀석!”
아 이제 끝이야
주르륵 피가 맺힌 손등과 인상을 찌푸린 스즈키 이사를 보고 소장은 망연자실했어
이제 이사님이 노발대발 화를 내시고 우리 보호소에 후원을 당장 끊어버리시겠지 여우 수인의 폭력성을 방치했다며 문을 닫으라 협박이라도 하면 어떡하지?
새파랗게 질린 소장이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굳어버리자 노부는 대수롭지 않게 손등을 매만지더니 제가 깨물어놓고 잔뜩 웅크린 마치다를 향해 입을 열었어
“이런, 내가 갑자기 만져서 겁을 먹었구나. 미안해.”
아뇨 마치다는 원래 제가 물어놓고는 되려 아픈 척을 하는 게 특기랍니다.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소장은 입을 꾹 다문 채 눈치를 살필 뿐이었지
“나 왜 여깄어야 하는데?”
여우로 있는 게 더 편한 마치다는 지금 이만저만 짜증이 난 게 아니었어 배고파서 잠깐 은신처를 나왔을 뿐인데 갑자기 낯선 사람이 저를 만지려 하질 않나 또 사람을 물었다고 혼이 날줄 알았더니 그런 건 안중에도 없이 사람들이 애걸복걸하며 인간화시켜 옷을 입히질 않나 평소엔 달라고 난리를 쳐도 한두 개 줄까 말까 인 초콜릿을 (충치 생기면 큰일이니까) 왕창 쥐여주길래 그만 홀랑 넘어가 버렸지만 생각할수록 분한 거 있지
잔뜩 골이나서 머리 위로 솟아오른 귀가 팔랑팔랑 움직이는 게 이대로 뒀다가는 바닥을 뒹굴며 난리 칠 게 뻔해 소장은 얼른 마치다에게 본론을 꺼냈어
“마치다 저분이 너 입양하고 싶으시대. 마치다는 어때?”
뭐? 마치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어 아까 나한테 물린 그 사람 말이야
저 때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아까부터 봉봉 초콜릿의 껍질을 까 제 입에 넣어주길래 나한테 쫄아서 내 부하가 되기로 했구나!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라 나를 입양하고 싶다 나 봐.
그러니까 내 부하가 아니라 주인이 될 생각이라니 마치다는 어이가 없었지 지금까지 본 인간들 중에서 제일 잘생기긴 했지만 음 입은 옷도 뭔가 비싸 보이긴 해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저한테 웃어주는 거 보면 착한 것 같기도 하고 음음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나보고 모르는 사람한테 입양을 가라는 거야?!”
어떡해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배신감에 가득차 수인화도 풀려버린 마치다가 켕켕 짖으며 소장을 바라보자 그는 당황스러워 하며 얼른 마치다의 말에 답해주었어
“마치다. 원래 입양은 처음 만났지만 너를 원하는 사람한테 가는 거야.”
“아니 내가 왜 모르는 사람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입양’이란다 애초에 너는 아는 사람도 없잖아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마치다를 바라보았지만 소장은 차마 그 말을 뱉을 수 없었어 이 바보 여우는 어차피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할게 분명했거든
하지만 이렇게까지 거부할 줄은 몰라서 소장은 당혹스러웠지 미우나 고우나 어릴 때부터 키운 여우이고 따지자면 마치다가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큰 건 저희들 탓 도 있으니까 괜히 이런 애를 입양 보냈다가 마치다는 물론이고 귀중한 후원자 님까지 잃을까 걱정이 돼서 정말 죄송하지만 다른 아이를 입양하시는 건 어떠시냐 운을 떼려 했는데 이번에도 노부가 한발 빨랐지 뭐야
“그럼 아가 아저씨랑 친해지면 아저씨랑 같이 살래?”
“...”
아가라니 누구보고 아기래 이래봐도 소형 수인 대장한테! 인상을 팍 구긴 마치다지만 그래도 다정하게 저를 보고 웃어주는 얼굴이 싫진 않아서 새침하게 팩 고개를 돌리고 말았어
아직 갈 일이 먼 두 사람
+
마치다는 보호소에 있는 사람들은 몽땅 자기 부하라고 생각한다
맹수 수인들한테는 덤비지 않는다
3
“케이 잘 있었어?”
“노부!”
입에 넣었던 닭고기도 뱉어버리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마치다를 보면서 노부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어
처음 만났을 때 저의 손을 물어버린 여우가 맞는 건지 얼른 자신을 쓰다듬으라며 배를 까고 누워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게 영락없는 여우짓 같지 뭐야
새침 떨던 마치다를 이렇게 만들기 까지는 딱 세 달이 걸렸어
그 세 달 동안 노부는 매일같이 마치다를 만나러 왔지
처음엔 왜 왔냐고 틱틱 거리기 바쁘더니 하루가 멀다 하고 웃으며 저를 보러 오는 사람에게 마치다는 점점 마음을 내어주기 시작했어 사실 노부가 가져오는 달달한 간식 덕도 컸지 뒤에서 사육사들이 아이고 저 단 걸 한입에 넣네..라며 탄식하는 걸 흐린 눈으로 바라본 채 마치다의 비위를 맞춰주다 보니 어느새 마치다는 노부를 제 부하에서 친구로 승격시켜 줬지 뭐야
무려 제 이름을 알려주고 노부만 특별히 자신을 ‘케이’라고 칭할 수 있게 해주었어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인데 노부는 다행히도 마치다의 말에 감격해서 어린 여우를 만족시켜 주었지
세상에 저 까탈스러운 여우가 저렇게까지? 하고 놀란 사육사들은 덤이고 말이야
“마치다. 스즈키 이사님이 그렇게 좋아?”
“노부? 노부 좋아. 잘생겼잖아.”
사실 마치다가 노부를 좋아하는 건 매일 같이 저를 보러 오는 성실함도 아니고 맛있는 간식 때문도 아니었어 오직 얼굴이지 저 잘난 얼굴. 이래 봬도 여우는 얼빠였거든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못되게 굴고 입질을 했던 것도 따지자면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아서 였지
아 사육사들은 순전히 기분에 따른 거라 예외야
아무튼 귀엽다며 다가오는 인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치다는 부러 사납게 굴었어
그런데 자신이 좋다며 다가온 노부는 달랐지
모르긴 해도 소장이 쩔쩔 매는 걸 보면 대단한 사람 같은데 그런 이가 제 앞에선 헤실헤실 웃어주니까 퍽 마치다의 마음에 들어차지 뭐야 가끔 바보 같을 정도로 웃는 게 흠이지만 뭐 어때 이 몸이 좋다잖아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여우는 그렇게 특별히 자신의 이름을 하사하듯 노부에게 알려주었고 친구가 되어주기로 한 거야
이러니 슬슬 케이의 입양을 다시 꺼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보호소 사람들의 생각과 노부의 마음이 같았던 건지 그는 슬쩍 마치다에게 운을 뗐어
“케이 아직도 나한테 입양 오는 게 싫어?”
“... 노부는 좋아 그렇지만.."
“왜 뭔가 걸리는 게 있어?”
그래 나와 친해졌다 하더라도 고작 세 달 만난 저보단 십여 년을 보낸 곳에 더 애착이 깊겠지 하루아침에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슬프겠어? 오늘 마치다가 제 뜻을 거절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노부는 재촉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어
하지만 여우는 그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지
“아니이... 노부는 내 친구인데 내가 너한테 입양 가면 노부가 내 주인님이 되는 거잖아? 그건 싫어.”
여우가 이렇게나 서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물이었던가
자신이 소형 동물들의 대장이라며 자랑스레 말해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마치다는 이곳을 떠나기 싫은 게 아니라 노부를 주인으로 받아들이는게 싫대
정말이지.. 이상하고 귀여운 여우라니까
노부는 결국 마치다의 대답에 하하 웃어버리고 말았지
그럼 마치다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노부의 얄미운 손을 콱 물어버렸어 가볍게 문거라 피가 나진 않았지만 꽤나 아플 텐데도 노부는 되려 여우를 달래면서 입을 열었어
“미안. 케이 너를 비웃은 게 아니야. 아야. 미안하대도.”
“그럼 왜 웃어!”
“네가 귀여워서 그랬어.”
귀엽기는! 열다섯이나 된 여우에겐 귀엽다기보다 용맹하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걸 노부는 알지 못하나 봐
뽀로통 하게 노려보자 입에 넣어주는 과일 젤리가 맛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연신 저에게 미안하다 하는 노부가 조금 안쓰러워서 그를 용서해 주기로 했지 나는 정말 마음이 넓다니까!
얌전해진 마치다를 무릎 위에 앉힌 노부는 결 좋은 등을 쓰다듬으면서 조곤조곤 여우를 타일렀어
“케이 너를 입양한다고 해도 내가 너의 주인이 되진 않을 거야 우린 지금처럼 계속 친구로 지낼 거니까 대신 내가 너의 보호자가 되어줄게.”
보호자=주인이라는 걸 알지 못한 망충 여우는 그 말이 썩 듣기 좋아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케케 웃음을 지어 보였어
이게 거의 다 넘어왔다!
남들이 보는 마치다
노부가 보는 마치다
4
드디어 마치다의 입양일이 다가오자 보호소 사람들은
시원섭섭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어
아이고 얘가 드디어 입양을 가네
아니 근데 가서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양가감정이 밀려왔지 사실 마치다가 입양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숱한 수인들을 입양 보낸 경험이 무색하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막막했던 그들은 마지막 날 밤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마치다를 붙잡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줄 수 있었어
“알겠지? 화가 나더라도 3번은 참아야 해. 마치다도 이제 열다섯이고 소형 동물 대장이잖아. 대장은 모름지기 너그러워야 하니까 스즈키 이사님이 서운하게 해도 조금만 봐줘.”
“응 나는 대장이니까. 그럴 수 있어.”
간절한 마음이 여우에겐 미처 닿지 않는 건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마치다를 보고 보호소 사람들은 더욱 안달이 났어 그렇잖아 당장 내일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숨겨놓은 간식들만 가방에 가득 넣는 여우를 보고 어떻게 안심을 할 수 있겠어? 결국 한숨과 함께 마치다의 짐을 다시 싸주어야 했지 정말 괜찮을까?
“안녕 잘 있어! 놀러 올게!”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노부의 손을 잡고 해맑게 웃는 마치다에 보호소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어
방금 전까지 노부의 손을 붙잡고 제발 우리 여우 잘 부탁한다며 신신 당부를 한건 비밀로 붙여두고 말이야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마치다가 아무 탈 없이 잘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마는 현실은 녹녹치 않았어
“케이 나왔어.”
“.....”
노부의 집에 오고 정확히 일주일 만에 마치다는 우울해졌거든
처음엔 예쁜 집과 넓은 자신의 방이 좋았어
맛있는 식사가 매 끼니마다 나와서 먹보 여우는 신이 났었지 거품을 잔뜩 띄운 욕조에서 목욕을 했을 땐 어린애처럼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 매일 밤 자기 전 노부가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책도 읽어줘서 저도 모르게 잠에 빠지는 것 역시 마음에 들었는데 그랬는데
노부는 하루 종일 제 옆에 있어주지 않았어
자신의 보호자이기 때문에 마치다에게 좋은 것만 해주려면 일을 해야 한대 나는 그런 것보다 노부랑 있는 게 더 좋다고 했는데도 제 말은 들어주지 않은 거 있지?
그렇다고 노부가 마치다를 혼자 둔 건 아니야 베이비시터를 붙여주었거든 그렇지만 그 베이비시터는 노부가 아니잖아
게다가 자신의 소형 수인들 부하처럼 귀엽지도 않았어
“마치다 같이 책 읽을까?”
“... 저리 가 못생긴 게.”
물론 넓은 집엔 베이비시터 말고도 다른 고용인들이 많이 있었지만 우리의 까탈스러운 여우는 낯을 가렸어 그러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시터와 저에게 친절한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으려니 마치다는 점점 기분이 안 좋아지지 뭐야
“케이 아가 나 좀 봐줘. 왜 그래? 낮에 무슨 일 있었어?”
“... 나 다시 보호소 갈래. 여기 재미없어.”
“... 미안하지만 그건 안돼.”
제가 조금이라도 싫은 티를 내면 어쩔 줄 몰라 했으면서 오늘은 왜 그런 무서운 표정을 짓는 거야? 처음 보는 단호한 얼굴에 당황한 마치다가 서러움과 당혹감을 이기지 못해 엉엉 울어버리자 그런 여우를 안쓰러운 눈으로 달래준 노부였지만 마치다를 다시 보호소에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어떻게 데려온 너인데 절대 안 될 말이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외로워하는 여우를 계속 혼자 둘 순 없었어 (베이비시터:네? 저는요?)
결국 노부는 심사숙고 한끝에 수인 학교를 택했지
마치다처럼 주인이 일을 가 있는 동안 집에 혼자 있는 수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야
그곳에선 단순히 케어 목적이 아니라 수인들의 재능을 적극 지원해 주는 곳이기도 했어 물론 노부가 보기에 마치다는 먹고 노는 게 특기 같아 보이긴 했지만.. 혹시 알아 그곳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재능을 발견할지?
또 자길 낯선 곳에 보내는 거냐고 가기 싫다 징징대는 마치다를 겨우 달래 수인 학교에 보냈던 첫날
노부는 옷이 죄다 늘어난 보람도 없이 바로 마치다를 데리러 가야 했어
“네.. 마치다 보호자님 되시죠? 다름이 아니라 마치다가 친구를 물어서요. 네..”
또 제 성질을 못 참고 호기심에 다가온 강아지 친구를 왕 물어버렸다지 뭐야 노부는 연신 사과를 했지만 결국 그 수인 학교는 더 이상 다닐 수 없었지
집에 돌아오는 동안 뭘 잘했다고 절 데리러 온 노부 손마저 물어대서 피가 났지만 그럼에도 그는 차마 마치다를 혼낼 수 없었어 제 욕심에 수인 학교를 보낸 거니까 말이야 다시 보호소에 돌려보내달라 우는 것보단 저에게 화를 내는 게 훨씬 보기 좋았지
어차피 이곳이 안된다면 다른 수인 학교에 보내면 되었어
그렇게 4번째 새로운 수인 학교를 보낸 날
그날은 어쩐지 첫날부터 전화가 오지 않는 거야
게다가 마치다를 데리러 갔을 때 처음으로 마치다가 웃으며 저를 반겨주지 뭐야
노부는 순간 제가 꿈을 꾸는 줄 알았어
“노부 나 형아 생겼어!”
“... 형아? 우리 케이. 자세히 말해줘.”
알고 보니 마치다와 같은 여우 수인이 이곳에 있다 나 봐
저보다 나이가 두 살 많은 여우를 처음 본 마치다는 곧바로 그 여우에게 폭 빠져버리고 말았대 하루 종일 여우 형아 뒤만 졸졸 따라다녔단 선생님의 말을 듣자 노부는 처음으로 수인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에 기쁘다기 보다 연신 새로 사귄 여우 수인 얘기를 하는 마치다에 질투가 났어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지
자신의 이런 옹졸한 마음은 하나도 알지 못한 채 샤워 후 젖은 머리를 맡긴 마치다는 쭉 신이 난 상태였어
“노부 나 학교 가는 거 좋아 이제 노부 올 때까지 잘 기다릴 수 있어.”
“정말? 케이 대단하다. 멋진 여우네.”
..멍청한 스즈키 노부유키
케이가 학교에 가는 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함이었잖아 보호소에 돌려보내달라 하는 걸 겨우 달래 학교에 보낸 것도 자신이면서 고작 친구를 사귄 걸 질투하고 있다니 제 여우보다 한참 나이도 많은 주제에 나잇값도 못하고 잠깐이지만 부끄러운 생각을 하고 말았지
그렇게 마치다 몰래 마음을 추스른 노부는 자신의 여우가 조잘조잘 떠드는 학교에서의 일을 경청해 주었어
소라 형아 좋아
마치다가 친해진 여우 수인은 소라래
노부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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