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97840227
view 3367
2024.06.22 16:16
테드 window <당신 인1생의 이1야기>에서 많이 따왔음 ㅈㅇ






 

어느 날 미래와 현재가 동시에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수행평가로 보르헤스인가 뭔가 하는 작가의 단편소설을 읽고 난 다음 날부터였나 그랬다. 그 단편에는 『세월의 책』이라는 마법의 책이 나오는데, 그 책을 읽는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속속들이 알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만약 당신이라면 이 책을 읽겠는가? 그런 질문이었다. 현실성도 없고 별 재미도 없는 시시한 내용이었다. 독서라고는 농구잡지 읽는 것밖에 모르는 태웅은 당연히 결말까지 읽지도 않고 쿨쿨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자전거를 타고 가려고 하는데 문득 그날의 점심 메뉴와 석식 메뉴가 눈앞에 보였다. 영사기의 필름처럼 지직거리는 영상이 시야 한 가득 펼쳐졌다. 그러더니 곧 사라졌다.


태웅은 눈을 꿈뻑였다.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눈에 보이는 광경이라고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자전거 바퀴뿐이었다. 새콤달콤한 냄새가 향긋하게 피어오르는 버섯탕수라든가 웬일로 고기가 실한 미트볼 스파게티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했다. 도로 한 가운데 갑자기 급식이 나타나는 게 더 이상하다. 태웅은 흘려 넘기고 학교로 향했다.


체육관에 도착하자 강백호가 일찍부터 아침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복귀한 지 얼마 안 됐으면서 참 열심이었다. 태웅은 어쩐지 가슴이 간질거려서 열심히 점프슛을 연습 중인 강백호의 너른 등짝에 농구공을 퍽 던졌다.


“이 성격 더러운 여우 새끼가 또!”


그리고 제게 덤벼드는 강백호를 익숙한 몸짓으로 휙 피하며 말했다.


“오늘 중식 버섯 탕수. 석식은 미트볼 스파게티. 고기 많이 들어간다.”

“아직 급식표 나오지도 않았는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강백호가 의심스레 눈을 치켜떴다. 태웅은 달리 할 말이 없어 짧게 대답했다.


“그냥. 감으로.”

“이상한 자식.”


강백호가 별난 놈 본다는 듯 태웅의 정강이를 퍽 찼다. 태웅은 반격하는 대신, 다시 연습에 매진하느라 붉게 익은 백호의 등을 한참 바라봤다.


그날 중식에는 정말로 버섯탕수가 나왔고 석식에는 정말로 고기가 실한 미트볼 스파게티가 나왔다. 하루에 두 번이나 좋아하는 메뉴를 먹게 된 강백호는 입이 귀에 걸려서 다섯 번이고 여섯 번이고 배식실과 식탁을 오갔다. 길었던 식사가 끝나고, 녀석은 복근으로도 안 가려질 만큼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며 히히 웃었다.


“예언이 진짜 맞았네? 여우도 쓸 데가 있구만!”


바보처럼 웃는 얼굴에 조금 가슴이 뛰어서, 태웅은 식탁 아래 내리고 있던 손을 꼼지락거렸다.

 

 




정말 예언 능력이 생긴 걸까? 이후로도 태웅은 가까운 미래를 보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문득 난데없는 장면이 떠오른다 싶으면 며칠 후에 실제로 이뤄졌다.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내용들이었다. 마주치면 도망가기만 하던 검은 고양이가 닭가슴살 캔에 마음을 열고 다가온다든가, 한나 선배에게 자랑하려고 스쿠터를 타고 온 태섭 주장이 묘기를 선보이다가 실수로 뒤집어질 뻔해서 두드려 맞는다든가. 대만 선배가 양말을 잊어버린다든가, 그 잊어버린 양말이 어느 남성 팬의 사물함에서 발견된다든가. 소소한 장면이 보였고, 어김없이 본 대로 이뤄졌다.


신기하게도 농구 경기에 관해서만큼은 미래가 보이지 않았는데, 별로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태웅에게 농구 경기는 미리 알고 싶은 대상이 아니었다. 결과를 모른 채 직접 뛰어서 얻는 승리야말로 값지기 때문이었다. 다만 어느 날 문득 강백호가 환하게 웃으며 하늘로 주먹을 내지르는 장면이 눈앞에 스쳤는데, 다음 날 예선 경기에서 지역 1위로 전국대회에 진출하면서 실제로 포효하는 녀석의 모습을 본 적은 있었다. 그 사실이 어지간히도 기뻤던지 녀석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팀원들을 돌아가며 한 명씩 끌어안았는데, 그중에는 태웅도 있었다. 마지막 순서로 포옹 당하려는 찰나, 태웅의 눈앞에 문득 또 다른 미래가 보였다. 두 사람은 웬일로 태웅의 침대에 나란히 마주 앉아 있었고, 울면서 입을 맞추고 있었다. 연기처럼 나타난 미래가 연기처럼 사라진 순간, 태웅은 깜짝 놀라서 현실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든 생각은 엉엉 울고 있던 자기 모습이 너무 꼴사납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조금 진정하자 두 번째 생각이 떠올랐다.


나, 멍청이를 좋아하는구나.


어쩌면 제 침대에서 둘이 얼싸안고 울던 장면도 저와 멍청이와 사귀고 있는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영화에나 나올 법한 키스를 하고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연애도 누구를 좋아하기도 처음이었던 소년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처럼 너무나 강렬한 깨달음이었기 때문에 태웅은 부정하는 단계도 거치지 않고 곧장 강백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자기 마음에 솔직한 태웅은 농구에 빠지듯 강백호에게 빠진 것뿐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별다른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 않고 그 사실을 흔쾌히 수용했다.


그 날부터는 하루하루가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다. 태웅은 이것이 마치 ‘미래를 회상’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어느 날부터인가 머릿속에 외계인이 들어와서 미래의 기억을 보여주는데, 하나하나가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내용뿐이었다.


일주일 정도로 제한됐던 미래의 기억은 점차 더 먼 미래의 기억까지 뻗어나갔다. 공항에서 이륙하는 비행기를 배경으로 서로 끌어안고 있는 장면. 낯선 이국땅에서 재회해 몇 시간이고 포옹하고 있는 장면. 영어가 가득한 코트에서 멍청이와 농구를 하고 있는 장면, 함께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있는 장면. 하나 같이 꿈처럼 행복한 미래의 기억들이었다. 태웅은 약간 들뜬 상태로 성급히 결론을 냈다.


그러니까 나와 멍청이는 평생 같이 농구한다는 거로군.


근사한 미래 같았다. 아니, 그보다 행복한 미래는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법에 걸린 듯 드문드문 현재 속에 미래가 겹쳐 보이는 현상. 이 불가사의를 태웅은 모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멍청이와 종생을 함께 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태웅은 왠지 모를 자신감이 붙어서 현재에서도 멍청이와 좀 더 적극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농구공을 던지거나 정강이를 치거나 하는 게 전부였던 애정표현도 좀 더 온화한 방식으로 변했다. 쉬는 시간에 매점의 인파를 뚫고 멍청이가 좋아하는 메론빵을 사다 주거나, 깜빡하고 두고 온 교과서를 대신 빌려주거나, 고된 연습 끝에 잠든 멍청이를 다른 사람들이 깨우지 못하도록 곁에서 지켜보거나.


하루는 둘이 동시에 골대에 매달렸다가 백보드를 부숴버린 죄로 체육관 청소를 도맡는 벌을 받게 됐다. 모처럼 단 둘이 시간을 낼 기회였다. 태웅은 들뜬 마음을 감추고 묵묵히 바닥에 왁스를 칠했다. 멍청이는 그런 그의 깊은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툴툴대며 대걸레를 휘둘렀다. 녀석은 뭉툭한 대걸레 손잡이로 바닥을 퍽 치며 성냈다.


“고릴에 이어서 송꼬추까지! 이 천재를 뭘로 보고 잡일만 시키는 거야?! 사실 이 천재를 농구부에 받은 이유도 합법적으로 청소를 시킬 잡역부가 필요했기 때문이지?! 다 알아!”


그 순간 태웅의 눈앞에 어린 소녀가 나타났다. 멍청이처럼 화사한 빨간 머리에 눈썹이 삐죽삐죽한 아이였다. 심지어 태웅은 그 소녀의 나이도 알고 있었다. 열두 살이었다. 아이는 제 몸만 한 진공청소기에서 둘둘 말린 전선을 풀어내며 잔뜩 성을 냈다.


“아빠가 나를 기르는 이유는 딱 하나야! 합법적으로 부려먹을 가정부가 필요하기 때문이야!”


콘센트에 플러그를 끼우며 뺨을 잔뜩 부풀린 모습이 아주 진지해 보였다. 울상으로 일그러진 얼굴만 보면 계모에게 학대당하는 가엾은 신데렐라가 따로 없었다. 태웅은 그런 아이의 손에 청소기 손잡이를 꼭 쥐어주며 대꾸했다.


“그래, 맞아. 고작 가정부 한 명이 필요해서 네 아빠가 목숨 걸고 널 낳게 내버려뒀지. 그러니까 그만 툴툴대고 네 방부터 청소해.”


아이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청소기를 돌렸다.


“여우? 내 말 들었어?”


강백호가 멍하니 서 있는 태웅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너도 동의하지? 이 천재한테 청소만 시키는 건 인력 낭비지? 아무래도 남은 청소는 여우가 대신 맡는 편이 더 낫겠지?”


그러더니 태웅이 뭐라 반응하기 전에 대걸레를 넘겨주고 튀어버렸다.


홀로 남은 태웅은 눈을 깜박이며 반짝반짝 빛나는 체육관 바닥만 내려다봤다. 그렇게 하면 사라진 빨간 머리 소녀가 다시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소녀 혹은 아이는 불규칙한 간격을 두고 나타났다. 하루 이틀 걸러 나타날 때도 있었고 일주일 만에 나타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대개 일 분 내외만 지속되다 사라졌다. ‘현재에 삽입된 미래’ 같다고 생각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영화 필름 사이에 잘라 붙인 조각처럼 이질적인 장면들. 그나마 멍청이와 함께 있을 때 주로 나타나고, 멍청이가 촉발한 어떤 행동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었다.

가령 멍청이가 부실 비품 창고에 처박혀 있던 깃발을 발견하고 신나서 몸에 두르고 나타났을 때는 아이도 품이 한참 남는 빨간 유니폼을 몸에 두르고 침실에서 굴러 나오며 외쳤다.


“아빠, 이것 봐! 모델 같아!”


멍청이가 이온음료를 마시고 싶은데 탈진해서 팔이 안 올라간다며 태웅을 부려먹으려 했을 때는 아이도 태웅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졸랐다.


“아빠, 아빠! 올려 줘! 물 마실래! 목말라!”


“여기 아빠가 물통에 물 떠놨잖아.”


“싫어! 분수에서 나오는 거 마실 거야!”


그러면서 무릎에나 겨우 닿는 키로 잔뜩 팔을 뻗어 공원 음수대에 원숭이처럼 매달렸다. 나이는 다섯 살 쯤 됐을까.


다음은 열네 살 즈음. 사춘기에 들어섰을 법한 나이. 옷을 사러 쇼핑몰에 간 아이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또래 친구들을 발견하고 태웅더러 저 멀리 뒤에서 따라오라며 채근했다. 부모님과 같이 왔다는 사실을 친구들한테 들키기 싫다는 이유였다.


“알았지? 절대 들키면 안 돼! 내가 알아서 골라 올 테니까 카드만 빌려줘!”


그러면 태웅은 조금 섭섭한 마음에 한숨을 쉬면서도 가만히 블랙카드를 내주었다. 그 날은 농구화 쇼핑이라는 명목으로 멍청이와 비밀 데이트를 나갔다가 다른 부원들과 마주친 날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멍청이에게 옆구리를 얻어맞고 허둥지둥 기둥 뒤에 숨어야 했던 날.


모든 날들이 그런 식이었다. 멍청이가 나이에 안 맞게 구름사다리를 타고 오르며 묘기를 부리던 날에는 아이도 태웅의 다리를 타고 올랐다. 그러면 태웅은 생각하곤 했다. 제 아버지를 닮아 활발한 원숭이 같다고. 그리고 자신을 바라봤다. 종아리에 아이를 매달고도 멀뚱멀뚱한 모습. 가만히 미소 짓는 자신의 모습. 낯설지만 어딘가 행복해 보이는 모습들.


그 즈음 태웅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정체불명의 아이는 언젠가 멍청이와 자신이 탄생시킬 아이라고.





 

 

아이가 마지막으로 나타났을 때는 스물다섯 살일 때였다. 농구보다 암벽 등반에 취미를 붙였던 아이는 대학 졸업 기념으로 애팔래치아로 여행을 떠났다. 직장은 내정돼 있었다. 산호세의 IT 회사였다.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낸 두 아빠들과 달리 아이는 공부에 흥미가 있었고, 적성도 꽤 맞았는지 공대를 졸업하고 곧장 사회생활에 뛰어들기로 했다. 그 선택의 결실을 축하하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그날 애팔래치아 산에는 구름 한 점 드리우지 않고 해가 쨍쨍 내리쬐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햇빛이 너무 강해서 순간적으로 눈을 감아버린 것일까? 여름 내내 달궈진 돌의 온도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바위를 놓치고 만 것일까? 휴가를 맞아 뉴저지의 자택에서 잔디를 깎고 있던 태웅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끊은 태웅은 지체하지 않고 상대방이 불러준 주소로 달려갔다. 차를 모는 내내 손이 떨렸다. 갑자기 날이 흐려지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태웅은 운전대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눈알만 돌려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디야? 나 지금 가고 있어. 60번국도.>


도착이 코앞이었다. 태웅은 답장을 보내는 대신 마른 침을 꾹 삼키고 엑셀을 밟았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안치실은 스물 네 시간 내내 가동하는 냉방장치 때문에 팔뚝에 닭살이 돋도록 서늘했다. 의사가 냉동고에서 철제 침대를 꺼내 흰 천을 내려주었다. 태웅은 마비된 손끝으로 잠든 여자의 뺨을 만지려다 말고 대답했다.


“……네, 맞아요. 제 딸이 맞습니다.”


어떻게 그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장면은 잘라낸 영화 필름처럼 중간을 건너뛰고 비순차적으로 전환된다. 안치실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발소리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온다. 곁을 스쳐 지나가는 빨간 머리. 멍하니 철제침대를 내려다보는 너.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는 너. 목이 틀어 막힌 것처럼 제대로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고 총에 맞은 짐승처럼 끅끅대는 너. 나의 멍청이.


의사가 같은 질문을 멍청이에게도 묻는다. 우느라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서 태웅이 다시 한 번 대답한다. 네, 맞습니다. 우리 딸이 맞아요.

왜 아이는 암벽 등반을 좋아했을까? 질문을 떠올린 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답이 떠올랐다. 그야 아빠들을 닮았으니까. 자신과 멍청이가 하늘 높이 점프하는 것을 사랑하듯, 아이도 하늘 높이 기어오르는 것을 좋아했을 테니까.


장면이 끝났을 때는 인터하이 결승 경기에서 패하고 합숙소로 돌아가던 때였다. 대차한 버스로 걸어가다 말고 갑자기 주룩 눈물을 흘리자, 앞서 걷던 멍청이가 놀라서 돌아봤다.


“야, 왜 그래? 너 울 줄도 아냐? 고작 우승 좀 못했다고 우는 거냐? 엉?!”


말투는 사납지만 매서운 눈에 어린 걱정이 따뜻했다. 아무 대답도 못한 채 멍청이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는 자신을 두고 멍청이가 부러 힘차게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자식, 우승 못 했다고 기가 팍 죽었구만! 보기보다 감상적이라니까! 야, 걱정 마. 돌아오는 겨울에는 천재님이 이끄는 북산이 여름 몫까지 갑절로 멋지게 우승해 줄 테니까!”


그리고 쉽게 고개를 들지 못하는 태웅의 턱을 잡아 끌며 시선을 맞췄다.


“여우. 나 못 믿냐?”


금방이라도 승리를 향해 튀어나갈 듯한 사내가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흰 천 앞에서 힘없이 주저앉았던 일은 언제냐는 듯이.


태웅은 주술에 이끌리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믿어.”


그제야 녀석이 환히 웃었다. 그 미소를 보며 태웅은 되뇌었다.


괜찮아. 언젠가 우리에게 불행이 찾아오더라도 괜찮아. 불행이 찾아오면 그때는 내가 너를 지탱할 테니까. 지금 네가 나를 지탱하듯이. 그때는 내가 더 강해져서 너를 지키겠다고.

 





 

 

 

날이 지날수록, 행운인 줄 알았던 마법 능력이 사실은 저주임이 확실해졌다. 머릿속에 들어앉은 외계인은 처음에 보여주었던 달콤한 미래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어느 순간부터 잿빛 미래만 비추기 시작했다. 대부분 어딘가 쓸쓸하고 고독한 장면들이었다. 정확히는, 고독해 하는 멍청이의 모습들. 차라리 자신이 괴로워하는 모습이라면 나았을 텐데. 스스로 감정이 둔한 편이라고 믿는 태웅은 그러면 음울한 환영을 보는 일도 조금은 덜 슬펐을 거라고 생각했다.


길을 걷을 때, 자전거 안장에 올라탈 때, 물을 마실 때, 씻고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일상을 살 때마다 넋 나간 채 앉아있는 멍청이가 보였다. 조금 나이 들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입술을 깨물고 있는 멍청이가. 무언가 참듯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멍청이의 모습이 농구할 때를 제외하고 수시로 떠오르는데, 그럴 때마다 가슴이 뛰고 숨쉬기 답답해졌다. 금방이라도 멍청이가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쓸쓸한 모습이나마 언뜻 언뜻 비춰주던 멍청이가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그리고 그런 미래의 멍청이를 따라서 현재의 멍청이도 어느 날 홀연 듯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힐수록 태웅은 더 농구에 매달렸다(유일하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 때는 농구를 할 때뿐이었다). 잠시라도 손에서 공을 놓으면 미래의 기억이 재발할 것 같아서 뛰고 또 뛰었다. 몸이 지쳐 더 뛸 수 없을 때는 눈으로 멍청이의 흔적을, 아직 이 세계에 남아있는 멍청이의 흔적을 좇았다. 그 그림자를 확인할 때마다 ‘아직 잃지 않았다’고 안도한 뒤, 잠시 후에는 다시 미래가 보여주는 불안으로 빠져들면서.


“요새 이상하다, 여우.”


어느 날 멍청이가 말을 꺼냈다. 올 것이 왔다. 태웅은 매고 있던 가방끈을 꼭 쥐었다.


멍청이를 따라 멍청이의 집으로 귀가하다시피 지낸지 일주일째였다. 스토커냐고 짜증내면서 어떻게든 떨어트리려고 애를 쓰던 멍청이는, 닷새 무렵부터 태웅을 떼어놓기를 포기했다. 대신 수상해 하는 눈빛으로 태웅을 쳐다보며 물었다. 대체 왜 그러냐고. 태웅은 못 알아들은 척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뭐가.”

“모른 척 하지 마라. 얼마 전부터 내 뒤만 졸졸 좇아다니잖아. 너 나 귀찮아하는 거 아니었냐?”

“귀찮아 한 적 없어.”


태웅은 단호한 태도로 단칼에 부정했다. 그러자 멍청이가 조금 멋쩍은 기색으로 목기침을 큼큼대며 덧붙였다.


“아니, 그래도. 우리 사이가 요새 좀, 크흠, 친해지기는, 큼, 했다만…… 기본적으로 넌 동료든 친구든 남이라면 쌀쌀맞고 무관심한 타입이잖냐.”


쌀쌀맞지도 않고 무관심하지도 않아. 적어도 멍청이한테는. 태웅은 불쑥 튀어 나오려는 혼잣말을 억눌렀다. 대신 입을 꾹 다물고 제 뒤에서 한 발짝 뒤처져서 따라오던 멍청이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요새는 멍청이와 한 걸음이라도 멀어지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불안이 솟았다.


모퉁이를 도느라 멍청이를 잠깐 도로 쪽으로 끌고 갈 때였다. 갑작스런 클락션 소리가 귀를 찢었다. 급정거 하느라 아스팔트 도로에 고무 타이어가 긁히는 소리도. 커다란 손이 옆으로 몸을 밀쳤고,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차라리 영화나 드라마처럼 회상 장면이 시작되면 세계가 회색으로 변하기라도 하면 덜 생생할 텐데. 안타깝게도 태웅이 보는 미래의 장면들은 모두 선명한 총천연색 화면이었다. 그런데 그 다채로운 색상의 세계가 웬일로 흑과 백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태웅은 감았던 눈을 깜빡였다. 몸에 걸친 옷이 어쩐지 교복보다 답답하고 불편했다. 다시 보니 교복이 아니라 정장이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새까만 정장. 별로 패션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통 검은색으로 옷장을 채울 만큼 센스가 없지도 않다. 제 손으로 골랐을 리 없는 착장에 어딘가 어색해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마찬가지로 검은 정장을 차려 입은 여자가 다가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태웅아!”


급히 달려온 듯한 여자는 금방이라도 정신이 나갈 것처럼 펑펑 눈물을 쏟아내며 태웅의 품으로 쓰러졌다. 크고 검은 두 눈이 영정 사진을 보더니 무너졌다.


“어떡해…… 어떡해, 태웅아……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그리고 숨죽여 흐느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태웅의 두 팔이 저절로 움직여 여자를 받쳐 들었다. 그는 상주였다. 조문 온 사람이 울다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책임지고 보호하는 것도 그의 책임이었다. 그대로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여자는 기어이 정신을 다잡더니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마지막으로 인사하게 해줘.”


두 사람이 다시 눈을 마주친 것은 헌화와 분향이 끝나고 나서였다. 조문실 밖으로 여자를 데리고 나온 태웅은 차분한 태도로 여자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침묵을 지키는 얼굴은 평소처럼 희고 창백했다. 그것이 못내 걱정스러웠는지, 여자가 조심스레 태웅의 뺨을 쓸어내렸다.


“……괜찮냐고 묻지는 않을게. 그래도 너무 힘들면, 못 견디겠으면 꼭 말해줘야 해. 절대 너까지——”

“매니저.”


태웅이 말을 끊었다. 오랜 호칭에 그녀가 젖은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작게 웃었다.


“그만 편하게 부르라니까. 우리 졸업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매니저야?”


그러다 제가 뱉은 ‘졸업’이라는 단어에 어떤 기억이 건드려졌는지 다시금 참았던 눈물을 주룩 쏟아냈다.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흘러내리는 단발머리를 연신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솔직하게 눈물을 내보이는 그녀를 보고 태웅은 생각했다.


모르겠어. 나한테 너는 항상 매니저였어. 늘 한 발짝 뒤에서 나와 그 녀석을 응원해 준. 내 시간은 그 녀석과 너를 만났던 여름에 영원히 멈춰있는 것 같아. 그 시간에 박제된 것처럼.


연적일 수도 있었을 그 녀석을, 너는 어떻게 이토록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어쩌면 네가 한 사랑이야말로 진짜 사랑이 아니었을까? 지난 이십 년 동안 내가 한 어설픈 소꿉놀이가 아니라. 쉽게 종생이라고 떠벌리던, 자만에 찬 나의 허풍이 아니라.

 


허풍이 아니라.


허풍이 아니


라.

 

라.

 




 

태웅은 막힌 숨을 들이키며 깨어났다. 축축하게 젖은 옷이 몸에 기분 나쁘게 들러붙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미친 듯이 옆자리를 더듬는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눈 감기 전까지만 해도 손에 잡히던 크고 따뜻한 온기가 사라져 있었다. 멍청이가 없었다. 그는 간이침대에서 허겁지겁 내려오느라 구르듯이 떨어졌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빨간 머리를 찾기 시작했다.


“강백호! 강백호, 어디 있어!!”


“학생, 처치가 필요하면 벨을 눌러요! 응급실에서 소란피우지 말고!”


놀란 간호사와 경비가 달려와서 태웅을 붙들었다. 난동을 부리던 태웅은 응급실이란 소리에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하얀 건물 안에 득시글대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바쁘게 움직이는 의료진들, 어디선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신음소리…… 병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피가 빠져 나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작 차에 치인 몸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멀쩡한데, 정신이 대신 피 흘리고 있었다. 놓쳐버린 붉은 머리를 찾아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안 돼……”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함을 유지하던 단정한 표정이 무너지듯 일그러질 때였다. 걸걸한 목소리가 문을 쾅 열어젖히듯 병실을 울렸다.


“엉? 뭔 일 났어요? 간호사 누나에 경비 아저씨까지? 여우 넌 또 왜 제압당한 범죄자 꼴이냐?”


멍청이였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올려다보는 자신을 녀석은 도리어 멀뚱멀뚱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다 ‘아차!’ 하는 혼잣말을 내지르더니 손바닥으로 등을 퍽퍽 내려쳤다.


“근데 머리는 괜찮은 거냐, 여우?! 너답지 않게 이게 무슨 난동이야? 간호사 누나, 역시 뇌 검사를 한 번 더 해야겠어요!”


그러면서 태웅을 일으켜 강제로 검사기기 앞에 앉히려고 했다. 태웅은 그 손길을 뿌리치고는, 반대로 멍청이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들어 앉혔다. 제 시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 자리에 앉혔다. 붙잡힌 멍청이는 사나운 눈매를 다소 멍청하게 깜빡였다. 급속도로 어색해진 분위기에 옆에 있던 간호사와 경비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태웅은 긴장으로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떼어냈다.


“……살아있어……?”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르겠는 한 마디에 멍청이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당연히 살아있지! 새끼손가락 삐어서 잠깐 반깁스만 하고 온 거야.”


멍청이가 깁스를 둘러맨 손가락과 손바닥을 붕붕 휘둘러 보이며 말했다. 반대쪽 손날로 깁스를 두드리는 장난이나 치고 있는 모습이 건강하다 못해 에너지가 펄펄 남아 보였다.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냐? 삼십 분이나 기절해 있었어. 뼈, 근육, 장기 전부 다 멀쩡하다는데도 일어나질 않아서 응급 구조대원이랑 의사 선생님이 얼마나 놀랐다고. 이럴 때까지 멋대로 잠들기냐?”


그리고 어쩌다 병원에 실려 왔는지 설명이 이어졌다. 차가 급정거를 걸던 순간에 멍청이가 저를 밀쳤고, 저는 반사적으로 그런 멍청이의 허리를 껴안으며 같이 쓰러진 모양이었다. 덕분에 둘 다 큰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남은 것이 손가락 반깁스와 잠시간의 기절뿐이니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당분간 농구 연습은 어렵게 되었지만. 포워드가 두 명이나 빠지는 탓에 송 주장과 부원들이 골을 앓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무사했다. 멍청이도 저도 모두.


강백호는 눈앞에 살아있고, 여기 이곳은 현재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무의식적으로 눈물이 타고 흘렀다. 미래에서는 상주여서 꺼내놓을 수 없었던 눈물이 비로소 눈꺼풀을 비집고 나왔다. 태웅은 달아오른 눈매를 손등으로 덮어 가렸다. 피부에 닿는 온기가 아프도록 뜨거웠다. 전신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 하던 방금 전이 머나먼 과거의 일 같았다.


지켜보던 멍청이가 놀라서 허둥지둥하더니,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손은 어깨를 두드리려다 말고 위로 올라갔다. 커다랗고 마디진 손이 태웅의 더펄머리를 어색하게 쓸다가, 두드리다가, 다시 쓸기를 반복했다. 달래는 건지 위로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손길이었다. 웬일로 그 어설픈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에게 멍청이가 농치듯 탄식했다.


“아씨~ 진짜 뇌 검사 한 번 더 해봐야 될 것 같은데. 안 그러고서야 우리 여우가 이렇게 얌전한 게 말이 되나?”


멋쩍은 위로에 고였던 눈물이 기어이 떨어졌다.

 

 






 

태웅은 필사적으로 멍청이를 피해 다녔다. 당연한 행동이었다. 멍청이와 사귀게 되면 멍청이가 낳아준 아이를 잃고, 종국에는 멍청이조차 잃고 긴 세월을 홀로 남게 되리라는 걸 알게 됐는데 달리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강심장인 소년에게도 그건 너무 괴로운 일이었다. 차라리 사랑을 접는 편이 나았다. 그도 사람이었고 사람이기에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태웅은 자신의 행동을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이라고 되새기며 죽을힘을 다 해 멍청이의 반경에서 멀리 멀리 떨어지기로 했다.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단계를 거쳐 순차적으로 멀어져야 한다는 계획 따위는 짤 틈도 없었다. 손끝 하나 스치는 순간 결심은 무너지고, 결말을 알면서도 불행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될 게 분명했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의 유혹은 그만큼 강했다. 영영 상실할 것인가, 살아남아 멀리서라도 지켜볼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처음에는 멍청이의 반에 찾아가지 않는 수준이었던 이별 절차가 빠르게 속도를 붙여 같이 등교하지 않는 것, 일부러 길을 엇갈리는 것, 점심시간에 옥상에 올라가지 않는 것까지 번졌다. 딱 하나, 절대 피할 수 없는 순간이 하나 있다면 부활동 시간이었다. 같은 농구부원인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멍청이에 이어서 농구마저 잃으면 그땐 정말 무너질 게 분명했다. 멍청이를 피해 다니는 만큼 더 집착적으로 농구에 매달리기로 했는데, 사실 그 판단 자체가 모순이었다. 포워드 파트너이자 이학년 콤비로 묶여버린 두 사람의 손발이 엇나가는 걸 농구부원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기 때문이다.


멍청이에게 패스해야 할 때, 자리싸움을 하느라 등과 가슴이 부대낄 때, 리바운드 하려다가 손끝이 스칠 때마다 몸이 반사적으로 주춤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깨달은 건데, 패스라는 건 생각보다 내밀한 행위였다. 패스를 하려면 눈을 마주치거나, 마주치지 않는다면 그만큼 더 강한 신뢰로 상대를 의식해야 한다. 끊임없이 서로를, 서로의 움직임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가능한 게 패스였다. 지금까지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그런 교류의 순간들을 계속 이어 갈 수 있을까? 이 관계의 결말을 샅샅이 알게 된 후에도? 할 수 있을 리 없다. 태웅은 경기에서 졌을 때조차 느끼지 못했던 패배감을 생애 처음으로 느꼈다.


패스가 자꾸 엇나가고 머뭇거리는 일이 반복되자 처음에는 송 주장과 한나 선배가 한소리씩 던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지나서는 일학년 후배들조차 걱정스레 힐끔거렸다. 북산의 에이스, 팀을 두 번이나 전국대회로 이끈 왕자. 그런 별명을 망토처럼 두르고 다니던 선배가 자꾸 저지르는 실수는 허점 투성이여서, 오히려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낯설었다. 모두 태웅을 걱정하고 의심하고 나무라고, 더 나아가 그에게 실망하는 빛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오직 멍청이만 조용했다. 평소 같으면 제일 먼저 나서서 왜 나한테 패스를 안 하는 거냐고 왁왁거려야 하는 녀석이 멀찍이서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태웅은 자꾸만 엇나가는 실수나 다른 부원들의 의심스러워하는 눈빛보다도 멍청이의 그 침묵에 더 숨이 막혔다.


결국 세 시간 연습 내내 단 한 번도 멍청이와 공을 교환하지도 않고 시선을 주고받지도 않는 날이 왔다. 태웅은 추궁을 피하려 일찌감치 라커룸을 나와 자전거 자물쇠를 풀었다. 피로에 절은 몸을 이끌고 안장에 올라타려 할 때였다. 억센 힘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강백호였다. 녀석은 흉흉한 눈매를 매섭게 치켜뜨며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기 좀 하지.”

“……싫어.”


안 할 거야. 너랑 말 섞지 않을 거야. 한 마디라도 내뱉는 순간, 결심 따위는 잊어버리고 네게 달려들고 말 테니까. 그런 실수는 절대 하지 않아. 태웅은 속으로 되뇌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멍청이가 사냥감을 좇는 호랑이 같은 기세로 달려드는 바람에 손목을 붙잡혔다.


“얘기 좀 하자고.”


억누른 목소리가 거칠게 긁히고, 번뜩이는 눈빛 뒤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보였다. 체격이 엇비슷하니 떼어내려면 얼마든지 떼어낼 수 있을 텐데도 태웅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다른 부원들이 봤다면 까무러칠 만큼 순종적이고 무력한 태도로 멍청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멍청이의 집이었다. 혼자 사는 녀석은 제 몸집만한 자신을 짐짝 옮기듯이 거칠게 잡아 끌어 침대에 던지다시피 앉혔다. 그리고 얌전히 폭력을 받아내고만 있는 제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싫어졌냐?”

“……”

“이제 나랑 농구하기 싫어졌냐고.”


성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중적인 표정. 자신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멍청이다운 표정.


태웅은 손에 닿는 시트를 움켜쥐었다. 머릿속은 음울한 예감으로 점철됐고, 심장은 불길하게 쿵쿵 뛰었다. 게다가 이렇게 가까이서 멍청이와 마주본 적은 처음이었다. 앞으로 이 얼굴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에 기분 나쁜 열까지 올라서 시야가 어지러웠다. 세상이 빙빙 도는 와중에도 멍청이는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픈 표정이었다. 저 얼굴에서 당장 그 표정을 걷어내고 싶은데,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태웅은 애써 머리를 굴렸다.


“……학년이 바뀌면 미국으로 갈 계획이야.”

“…….”


형형한 눈매가 어디 계속 말해보란 듯 번뜩였다. 태웅은 마른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네가 날 따라오면 좋겠지만,”

“…….”

“억지로 데려갈 수는 없잖아. 어차피 같은 팀으로 남을 거라는 보장도 없어. 대학리그, 유학, 프로입단…… 졸업하고 나면 각자 제 갈 길 갈 거고.”


어설픈 변명이란 건 알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우리가 계속 같이 있으면 네가 죽게 된다고 당사자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리 둔감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정말로 시야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멍청이의 꿰뚫을 듯한 시선을 견뎌내기도 어려웠다. 마지못해 시선을 피하려는 순간, 커다란 두 손이 태웅의 두 팔을 덥썩 붙들었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흔들기 시작했다. 어찌나 힘이 억센지 지진 난 것처럼 시야가 흔들렸다. 화를 내고 있었다. 멍청이가 정신 차리라는 듯 저를 마구잡이로 흔들어대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게 지금이냐?”


날카로운 비난이 귀를 찢었다. 태웅은 견딜 수 없어 눈을 감았다. 멍청이는 아랑곳하지않고 혼까지 털어버릴 기세로 몸을 탈탈 흔들며 추궁했다.


“유학 가는 게 지금이냐고! 우리가…… 우리가, 지금 당장 헤어지는 거냐? 응?”


아니라고, 떠나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네 옆에 질리도록 달라붙어있고 싶다고 속으로만 대답할 때였다. 몇 주 만에 아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네댓 살 되어 보이는 아이는 한 손에 이야기책을 들고 태웅을 향해 구르듯 달려왔다. 태웅은 아이가 내민 책의 표지를 알아보고 말했다.


“벌써 몇 번이나 읽어준 책이잖아. 이미 아는 내용인데 왜 계속 읽어달라고 하는 거야? 끝을 아는데.”


아이는 까르륵 웃었다.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앳된 목소리가 개구지게 소리쳤다.


“왜냐하면, 읽고 싶으니까!”


머리가 울렸다.


읽고 싶으니까.


좋아하니까. 소중하니까.


그 모든 결말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으니까.


머리를 채우던 환영이 가라앉았을 때는 멍청이의 멱살을 잡아 끌어 입 맞추고 있었다. 갑작스런 접촉에 놀란 멍청이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려 했으나, 태웅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코끝에 감도는 멍청이의 체향과 뺨에 닿는 달뜬 목덜미의 감촉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온기를 있는 힘껏 들이 마시며 대답했다.


좋아하니까, 읽고 싶다. 좋아하니까, 알고 싶다.


너무 좋아해서, 이야기의 결말을 알더라도 다시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고, 경험하고, 온몸으로 겪어내고 싶다.

이유를 묻는다면 오직 그뿐.

 


 

눈앞에는 『세월의 책』이 놓여 있다. 앞으로 당신 삶에서 벌어질 일이 모두 기록된 책이다. 그 책을 읽을 것인가? 비극으로 치닫을 결말을 알더라도?

 

 

태웅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책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