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94479667
view 5206
2024.05.19 23:36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5부 완/이번 편은 에필로그 같은 느낌
정말 길었다........ㅋㅋㅋㅋㅠㅠㅠㅠ 진짜 기나긴 글이었는데 끝까지 봐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탁자 앞에서 잠깐 선잠에 들었다가, 이연화는 퍼뜩 눈을 떴다. 귓가로 새 우는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 맑은 탕국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선 이연화가 불 곁으로 다가갔다. 다행스럽게도, 탕은 넘치거나 타지 않은 채 조금 졸아들어 있었다. 탕에 물을 더해 한 차례 휘 저어준 다음, 이연화는 잠시 부엌 밖으로 난 창을 바라보았다. 잠깐 보슬비를 뿌리던 하늘이 어느새 파래져 있었다. 혼인하던 날 같네. 피식 웃으며 생각하고, 이연화는 창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텃밭을 살폈다. 물을 촉촉히 먹은 흙과 작물이 한층 싱싱해 보였다.

방다병이 도련님의 감각을 한껏 발휘했으리라 예상한 것과 달리, 청허산에 지어진 이연화의 사가는 꽤 소박했다. 운은산에 있는 금파의 거처보다도 작았는데, 이연화는 그 사실을 크게 반겼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화려하고 눈에 띄는 집을 바라지 않은 탓이었다. 사용인을 여럿 두고 생활할 마음도 없었는지라, 이연화는 자신이 홀로 청소하며 관리할 수 있을 정도의 사가를 마주하고 반색했다. 오는 여정 내내 집이 너무 궁색해 보이지 않을까 염려하던 방다병은, 이연화의 반응에 매우 안도하며 기뻐했다. 

방다병이 준비한 사가는 연화루가 여러 조각으로 펼쳐진 듯한 구조였는데, 총 네 개의 아담한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작은 사당이었고, 하나는 서재 겸 응접실과 방으로 구성된 본채였으며, 하나는 부엌과 식사할 공간이 함께 있는 별채였다. 마지막 건물에는 빈 마굿간과, 농기구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사가의 한편에는 텃밭이 있어, 이연화가 연화루에서 기르던 작물과 몇 가지의 꽃들이 함께 자리했다. 그 옆에서 수상하게 킁킁거리는 불여우를 발견하고, 이연화가 크게 외쳤다.

"불여우, 안 돼! 심은 지 얼마 안 되는 것도 있으니까 함부로 파지 마!"

불여우의 귀가 쫑긋 섰다. 미련이 남은 얼굴로 작물을 돌아보고, 개는 이연화가 뭔가 먹을 것을 줄지도 모른다 생각했는지 기대에 찬 얼굴로 총총 부엌을 향했다. "뭘 잘했다고 먹으러 오는 거야?" 웃음기 띤 얼굴로 건네면서도, 이연화는 주섬주섬 부엌을 뒤져 육포 조각을 꺼냈다. 헥헥거리는 개의 털이 젖은 모양새를 보니, 또 집 근처의 작은 폭포에 뛰어든 모양이었다. 집의 창과 문을 열어두면 청량한 물소리가 들려왔는데, 조금씩 더워지는 날씨 탓인지 불여우는 이제 하루가 멀다 하고 그 물에 몸을 담갔다가 돌아왔다.

"음, 괜찮은 것 같은데."

국물 맛을 본 이연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육포를 열심히 먹던 개가 고개를 들었다. "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어서 마저 먹어." 피식 웃으며 건넸지만, 불여우는 다시 육포에 머리를 박는 대신 부엌 밖을 바라보았다. 음? 의아하게 그 시선을 따라갔다가, 이연화는 곧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직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풀과 흙이 바삭거리는 박자만으로도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연화, 이연화! 나 왔어!"

밝은 외침이 들려왔다.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이연화가 반갑게 건넸다. "방소보.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네." 가벼운 짐을 멘 방다병이 해해거리고 웃으며 얼른 발을 옮겼다. 쏜살같이 부엌으로 들어와, 청년은 이연화를 꼭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그 몸에서 옅고도 편안한 체취가 풍겼다. 불여우 역시 꼬리를 치며 방다병을 반겼다. "요리하고 있었어?" 개의 머리를 쓰다듬던 방다병이 다소 복잡한 얼굴로 물은 말에, 이연화는 손에 든 국자 손잡이로 그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 녀석. 요새는 전보다 많이 나아졌잖아? 오늘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 가서 짐 내려놓고 와."
"냄새는 괜찮은 것 같은데...."
"냄새는 맛과 직결되어 있으니, 냄새가 괜찮으면 맛도 괜찮겠지. 까탈스러운 도련님 티 내지 말고, 얼른 짐 두고 와. 조금만 더 끓이면 되니까."

킁킁거리는 방다병을 향해, 이연화가 대충 한 손을 내저으며 건넸다. 고개를 끄덕한 방다병이 부리나케 본채 쪽을 향했다. 이 집을 사가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네. 사실 거의 신혼집처럼 쓰이는 중이지 않나? 잠시 생각하다가, 이연화는 어깨를 으쓱하고 탕에 집중했다. 자신에겐 세 사람이 맺은 관계가 중요할 뿐,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살아가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방다병은 곧 간식을 바라던 불여우와 비슷한 표정을 지은 채 다시 나타났다. 그 한 손에 비녀가 들려 있었다. 수 개월 전, 방다병이 청면객잔에서 예물로 건네준 물건이었다.

"머리 해줄까?"

방다병이 반짝이는 눈으로 물은 말에, 이연화는 나 요리하는 중이라고 대꾸하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돌려주었다. 

혼례를 치른 후, 이연화는 가끔씩 방다병이 준 예물을 건네며 머리를 해달라 요구했다. 처음에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청년은, 이연화가 '예물 자체도 좋기는 하다만, 네가 온천에서처럼 머리를 보아주는 일이 더 좋다' 이야기하자 터질 듯이 익은 복숭아처럼 변해 비녀를 받아들었다.

이연화에게 무언가를 해준다는 것 자체가 기뻐서인지, 아니면 손에 감기는 긴 머리칼의 감촉이 달가워서인지, 방다병은 그 후 시시때때로 이연화의 머리를 새로 해주겠다 달려들었다. 먼저 제안했던 이연화가 조금쯤은 만류할까 싶을 정도로 열성적이었으나, 방다병의 웃음을 굳이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때문에 이연화는 예물을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둔 채 수수한 물건을 쓰다가, 방다병이 비녀를 들고 오면 자연스레 머리칼을 맡겼다. 

"가만히 좀 있어, 이연화. 기껏 균형을 잡고 있는데 흐트러지잖아."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타박할 때에는 영 귀찮기도 했다. 이연화가 건성으로 푸념했다.

"방소보, 나는 지금 냄비를 젓고 있다고. 조금씩 움직일 수밖에 없단 말이야. 내가 머리만 동동 떠다니는 귀신도 아닌데, 어떻게 완벽히 멈춰 있어?"
"귀신이라니, 험한 말 쓰지 마."
"단어 하나 갖고 트집 잡기는...."

꿍얼거리면서도, 이연화는 최대한 상체를 건들거리지 않기 위해 힘을 주었다. 자신의 머리를 만져줄 때마다, 방다병이 정말 심혈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머리칼 하나도 허투루 다루지 않으려는 의지가 느껴져, 가끔씩은 등이나 목줄기로 간지러운 감각이 스치기도 했다. 비녀를 꽂기 직전에는 하도 집중한 나머지, 뒷목으로 가볍게 와 닿던 숨결마저 잠시 멈추었다.

"냄새가 괜찮군."
"악!"

갑작스러운 말소리가 들렸을 때, 이연화의 머리에 꽂히려던 비녀가 휘청했다. 억울함을 인간으로 빚어놓은 듯한 모양새가 되어, 방다병은 비녀를 단검처럼 든 채 상대를 삿대질했다.

"너 말이야, 다닐 때 인기척 좀 내! 왜 여기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길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움직이는 거야? 그리고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뻔히 알면서,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목소리를 내야 해? 일부러 그러는 거지!"
"방소보, 진정해. 아무리 아비라도 설마 그렇게까지-."
"당연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알아차리는 게 늦군."

적비성이 한쪽 입매를 올리며 비웃었다. 별다른 독기는 없었으나 방다병을 건드리기엔 충분했으므로, 방다병은 약이 올라 금방이라도 비녀를 던질 것처럼 파들거렸다. "애 좀 그만 놀려. 자꾸 그러면 원첩에다 적는다." 이연화가 혀를 차며 손가락질하자, 이번에는 금원맹주의 낯이 어둑해졌다. "그런 하찮은 일에 남용하라고 준 게 아니다." "이게 왜 하찮은 일이야!" 큰 소리로 반박하면서도, 방다병은 다시 비녀를 든 채 이연화의 머리를 재빨리 쓸어모았다.

그들이 복닥거리는 일을 멈추고 식탁에 둘러앉기까지는 그로부터 반 시진 정도가 더 걸렸다. 연화루에처럼 함께 식사하면서, 이연화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진심으로 즐겼다. 독에서 해방된 이후부터는 오감도 한층 더 생생하고 또렷해져, 십 년 동안 대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방다병과 적비성도 별다른 불평 없이 그릇을 비웠다. 두 사람이 오는 시기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적어도 며칠에 한 번씩 모여 차나 식사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종종 함께 외유를 나갈 때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통상 이연화를 끌어들이려 노력하는 쪽은 방다병이었다.

"아, 이연화. 전에 아소촌이라는 마을에 함께 갔었잖아."

아무래도 오늘 역시 그런 노력의 일환이 될 모양이었다. 상대의 속내가 반쯤 투명하게 보이는 듯해, 이연화는 내심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방다병이 기이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어딘가에 함께 가자 제안하면, 이연화는 대충 듣다가 개중 절반 정도에 응해 주었다. 딱히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은 아니었다. 비록 그런 마음이 조금쯤 있다 해도, 이연화의 동기는 '이 평화로운 사가에서 무해한 소일에 집중하며 한적하게 지내고 싶다'에 더 가까웠다. 분쟁과 갈등이라면 지겨울 만큼 겪은 탓에, 향후 수 년 정도는 이곳에서 게으른 동물처럼 늘어져 있고 싶었다. 

"아소촌? 생선 요리가 맛있던 곳이었나...?"

일부러 기억하지 못하는 척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방다병이 답답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새신부가 자꾸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졌던 아소촌 말이야. 너랑 내가 함께 해결했는데, 그걸 벌써 잊었어?"
"아아, 그 아소촌. 너랑 내가 간 곳이 한두 군데여야지. 거기가 왜?"
"사건을 해결하고 오는 길목이라 잠깐 들러봤거든. 그런데 촌장이 이상한 얘기를 해주더라고. 아소촌에는 별일이 없었는데,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산중에 백수촌이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대. 그런데 보름 전에 웬 뱀 신령이라 자처하는 존재가 백수촌 촌장의 집에 나타나서는, 인신공양을 하지 않으면 마을에 재앙을 내리겠다 협박했다는 거야. 헛것을 봤나 싶어 무시했더니, 그때부터 산짐승이 사람을 찢어놓고 도망치거나 우물이 썩는 등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지 뭐야.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사람을 바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신령이 말한 장소에 누군가를 데려가 봤대."

이연화가 한쪽 눈썹을 가만히 찌푸렸다. 물론 방다병이 물어오는 사건은 대부분 기이하거나 잔혹했지만, 인신공양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방다병의 이야기를 듣던 적비성이 냉랭한 코웃음을 쳤다.

"쭈글쭈글한 모양새로 죽었거나, 누군가에게 찢어발겨져 내장이 적출당했겠군."
"어? 맞아, 쭈글쭈글하게 말라붙어 있었다더라. 어떻게 알았어?"
"모르긴 몰라도, 아마 범인은 무공 수련에 산 사람을 필요로 하는 사파 강호인일 거다. 큰 도시에서 흉한 일을 벌이면 금세 꼬리가 잡히니, 그런 놈들은 가끔 외부와 왕래가 없는 곳을 찾아 피해자를 물색하지."

적비성이 여상스레 말했다. 이연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 안의 채소를 씹었다. 힘을 찾아 사람의 도리를 넘어가는 이들은 늘 지치지도 않고 나타났다. 방다병이 고개를 끄덕했다.

"나도 듣자마자 그걸 의심했어. 그런데 얘기를 들을수록 아무래도 좀 이상한 거야. 실제로 산짐승을 목격한 사람도 있고-."
"잠깐, 정말로 짐승이 들어와서 사람을 찢어놨다고? 그걸 본 사람이 있어?"

이연화가 기묘한 표정을 짓고 묻자,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멀쩡하던 우물이 하루아침에 푹 썩어버린 것도 이상하다는 거야. 대체 무슨 독을 쓴 건지, 정말로 오랜 시간이 지나 썩은 것처럼 변해 있었대." 흠. 이연화가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상대의 흔들림이 눈에 들어왔는지, 방다병이 한층 열띤 목소리로 이었다.

"그리고, 동굴에 사람을 데려다 놓아둔 후도 이상해. 촌장이 다른 청년들과 함께 밤을 새면서 동굴 근처에 숨어 있었다고 했거든. 혹시 사람이 신령 행세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그런데 밤새 아무도 동굴에 들고 나질 않았다는 거야. 그러다 아침이 되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멀쩡했던 사람이 어느샌가 말라붙어 죽어 있었대. 비명도 못 지르고, 어디서 들어왔는지도 모를 존재에게 죽은 거지."

방다병이 맺은 말에, 이연화는 어쩐지 말려드는 기분에 사로잡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방다병의 이야기는 최근 들었던 사건들 중 가장 괴상했다. 이런 끔찍한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두자니 영 신경에 거슬릴 듯도 했고, 무엇보다 범인의 윤곽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방다병을 홀로 보내는 일이 아무래도 저어되었기에, 이연화는 이윽고 고개를 까딱했다. 방다병이 기대에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같이 가자."
"좋아! 백천원에 사건 조사를 허가해달라는 서신도 보냈으니, 바로 출발하면 돼."

방다병이 주먹을 불끈 쥐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야기를 듣던 적비성이 말했다. "나도 동행하지. 생기를 빨아들이는 무공에 기이한 독술을 쓴다니, 잡아서 약마에게 던져주면 되겠어." 대수롭잖게 덧붙여진 말에, 이연화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었다. 악인의 말로에 걸맞은 일이기는 했으나, 선뜻 찬동하기엔 다소 떨떠름한 방식이었다. 방다병이 눈에 힘을 주고는 금원맹주를 쏘아보았다. "안 돼. 형탐 앞에서 무슨 소리야? 재판을 거쳐 188 감옥에 넣어야지." 적비성이 피식 웃으며 차를 마셨다. 무시하는 태도에 발끈해 일어서려는 방다병을 능숙하게 잡아당겨 앉히고, 이연화가 미간을 슬쩍 좁힌 채 건넸다. 

"갈 만한 일이니 함께 가겠는데 말이야, 방소보. 이러다 백천원보다 네 명성이 더 높아지겠어. 이상하고 무서운 사건들을 네가 하도 많이 해결하니까, 이제는 백천원이나 사고문보다 방 형탐의 이름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많잖아. 돌아다닐 때 각별히 조심해야 해. 보복도 걱정이지만, 유명한 인사를 해코지해서 제 명성을 높이려는 놈들도 많으니 말이야."

타박 아닌 타박과 함께, 이연화는 방다병의 접시에 고기 한 점을 덜어주었다. 자연스럽게 고기 두 점을 집어 이연화의 접시에 얹어놓으며, 방다병이 입을 삐죽거렸다.

"난 그냥 내 일을 할 뿐이야, 원주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어려우니까. 그리고, 사실 절반 이상은 늘 네가 개입했잖아. 사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네가 태평천하를 위해 나름대로 애쓴다는 걸 알아. 아소촌 촌장님도 네 안부부터 물어보셨다고."
"안 되겠네, 이번에는 가면을 쓰고 네 몸종처럼 행동해야겠어."

이연화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더 이상 대희국에 이연화라는 이름을 뿌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위기감을 공유하는 대신, 방다병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천진하게까지 들리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연화, 이러다 보면 나중에는 우리가 따로 형당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지 않아?"
"그게 무슨 무서운 소리야. 강호의 형당은 백천원이잖아."

이연화가 실제로 진저리를 치며 대꾸했다. 십여 년 전의 자신이야 야심과 이상이 컸던 데다 기운이 넘쳤으니 사고문 같은 조직을 만들었지만, 지금의 자신에게 새로이 거대한 조직을 창설해 운영하라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달아날 터였다. 사고문을 책임졌던 짧은 시간 동안, 제대로 밤잠을 자며 지낸 날이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골똘히 생각하던 방다병이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음, 형당이란 말은 좀 거창할지도 모르겠네. 백천원처럼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비슷한 뜻을 가진 인재 몇이 함께 모여 일하면 어떨까 싶었어. 백천원과는 별개로, 우리가 직접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건을 찾거나 조사하는 거지. 해괴한 사건에 대한 탄원이 들어오면 접수를 받기도 하고."
"속 편한 소리 한다, 방소보. 그 다음엔 뭘 어쩌게, 우리한텐 감옥도 판관도 없는걸."
"뭐 어때, 진실이 밝혀진 다음엔 절차에 맞게 관이나 백천원에 인계하면 되지.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있잖아. 형탐의 신분도 나쁘진 않지만, 어쨌든 백천원까지 소식이 닿아야 사건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구석진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하나뿐인 강호 형당에 사건이 몰리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이야 비일비재하고. 만일 독자적으로 활동한다면...아마 형탐보다는 그저 탐에 가까워질지 모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몰라."  

방다병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진 것을 보고, 이연화는 다시 진저리를 치며 팔을 쓸었다. 비록 열일곱의 자신보다 진중하고 성실해 보였지만, 방다병의 얼굴에는 어쩐지 십여 년 전의 이상이와 퍽 닮은 구석이 있었다. 뜻하는 바가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돕길 원하고, 세상에 고난보다 희망이 더 많으리라 믿는 청년. 어쩐지 심란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응시하다, 이연화는 곧 나쁜 생각을 털어버리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다병은 자신이 아니었고, 자신 역시 십여 년 전의 청년이 아니었다. 

"됐어, 됐어. 일단 그 백수촌인지 하는 곳에 다녀오자고. 열흘 안으로는 마무리하는 편이 좋겠네."
"열흘 안으로? 왜?"

방다병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연화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곧 희락기가 올 것 같아서. 뭐 객잔 같은 곳에서 보내도 상관은 없지만, 아무래도 집이 더 편하니까." 방다병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적비성이 의외롭게 물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전보다 조금 이른 듯한데."
"희락기가 무슨 뜨고 지는 해도 아니고, 가끔씩 빨라지거나 느려질 때도 있는 거지. 상태를 보니, 딱 열흘쯤 후면 시작할 것 같아."
"아, 그...괜찮겠어? 희락기가 오기 전엔 원래 좀, 몸이 처지잖아. 꼭 같이 안 가도 돼, 이연화. 아비랑 나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방다병이 허둥지둥 말했다. 조금 전까지 이야기하던 미래의 청사진 따위는 싹 잊어버린 듯한 태도였다. 사건 해결에 나를 끌어들이려 그렇게 애를 써 놓고는. 이연화가 내심 어이없게 웃으며 방다병을 흘겨보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 혼자 집에 남았다가, 만에 하나라도 너희가 제 시간에 못 돌아오면? 물론 약이 있기는 하지만, 희락기는 각인한 상대와 보내야 가장 깔끔하고 빠르게 끝난단 말이야. 내가 짝이 없는 사람도 아닌데 혼자 베개나 물어뜯으며 참아야겠어?"
"아, 알았어. 알았어. 그럼, 그...최대한 빨리 끝내고 오자!"

퍽 결연하게 외치며, 방다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빈 그릇들을 얼른 들어 척척 나르는 모양새가, 설거지를 얼른 마치고 최대한 빨리 떠나려는 듯했다. 얼떨떨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연화가 눈가를 긁적였다.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는데."
"제놈이 일하겠다는데, 내버려 둬."

적비성이 편하게 되었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방다병은 여느 때처럼 적비성에게 자신을 도우라 타박하는 말도 없이, 수북히 쌓인 그릇을 솜씨 좋게 나르며 주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쓴웃음과 함께 지켜보는 이연화를 향해, 적비성이 나직한 코웃음을 치며 던졌다.

"방다병이 귀찮은 일을 벌일 게 신경 쓰이나 보지."
"뭐, 방소보는 방소보다운 삶을 살게 되겠지. 그 와중에 너무 상처 받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십여 년 전의 너보다는 인복이 있으니, 무슨 일을 벌인들 너처럼 고난을 겪지는 않을 거다."

적비성이 무심히 건넨 말을 어렵잖게 받아들이며, 이연화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적비성의 말대로, 방다병의 여건은 십여 년 전의 자신보다 아득히 나았다. 그에게는 무공 실력뿐 아니라, 든든한 부모님과 넘치는 재력이라는 뒷배가 있었다. 전 사고문주와 현 금원맹주를 긍정적인 인맥에 넣어도 되겠지? 살짝 회의적으로 생각하며 팔짱을 끼는 이연화를 향해, 적비성이 농담처럼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저 녀석의 관심사는 대의가 아니라, 네 희락기야. 설령 귀찮은 일을 벌인들, 꽤 먼 미래가 될 테지."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그 말에 대꾸하듯, 방다병이 무공 초식에 가까운 속도로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저렇게까지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연화는 청년을 굳이 말리지 않고 찻잔을 기울였다. 

그로부터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이연화는 간단한 여장을 챙겨 길을 나서게 되었다. 그나마 보슬비가 내려 텃밭이 완전히 젖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불여우, 작물 파내지 말고 착하게 기다려야 해. 산을 돌아다녀도 좋지만, 멧돼지나 맹수가 있는 곳에는 절대 들어가지 마." 개를 향해 단단히 이르고, 이연화는 사가를 한 차례 둘러본 다음 천천히 대문을 나섰다. 안달하는 소년처럼 이연화를 기다리다가, 방다병은 문이 잠기기 무섭게 이연화의 팔을 잡아끌었다. "뭐가 이렇게 성화야." 투덜거리면서도, 이연화는 그 손에 순순히 끌려 발을 옮겼다. 적비성은 그리 애쓰는 기색도 없이 그들의 속도를 따라잡았다.

함께 공식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많이 보여 좋을 일이 없건만, 이연화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편안해졌다. 세 사람이 함께 있는데, 설령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들 어떠랴.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을 테고, 찾지 못한다면 힘으로 두들겨서라도 돌파구를 만들 텐데. 오만함보다는 느긋함이 더 짙게 배인 생각을 떠올리며, 이연화는 두 남자의 사이에서 발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