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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7 00:17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5부 14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눈을 떴을 때, 적비성은 가장 먼저 팔이 허전하다고 생각했다. 잠의 여운이 남은 눈동자를 두어 번 깜박이자, 입을 살짝 벌린 채 천진한 얼굴로 자던 방다병이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고, 적비성은 한 손으로 침상을 짚어 지체 없이 일어났다. 상대와 입술이 닿을 법한 거리에서 깨어난 날이 떠오른 탓이었다. 침구에 아직 온기가 스민 것을 보니, 이연화가 자리를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했다. 당연하게도, 금원맹주는 고개를 돌려 반려를 찾았다. 그러나 방 안에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적비성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이미 몇 번이고 당한 전력 탓인지, 중요한 순간에 상대가 사라지면 아무래도 좋지 못한 가능성을 상상하게 되었다. 단서라곤 없이 증발한 사람을 찾아 천지를 뒤지던 시절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방을 샅샅이 훑은 적비성이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위기감은 그저 과거에서 비롯된 반사적인 반응일 뿐이었다. 방 안에는 아직 이연화의 옷가지며 소지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연화는 어디로 갔을까? 눈을 감은 채 기감을 넓히다가, 적비성은 이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이라, 하늘 한편이 새파란 빛으로 훤히 밝아져 있었다. 신방 밖으로 나오자, 봄비에 젖은 흙과 나무의 냄새가 청량하게 폐를 채웠다. 크게 심호흡한 적비성이 땅을 박찼다. 별다른 소리도 없이 훌쩍 지붕 위로 오르니, 침의 위에 흰 겉옷 하나만 대충 걸친 채 홀로 앉은 이연화가 보였다. 그 손에 어제 건넸던 보검이 들려 있었다. 시퍼런 날을 바라보는 눈이 고요했다. 바로 다가가는 대신, 적비성은 잠시 자리에 서서 그 모습을 응시했다. 저 검을 이연화에게 건네주기 위해 애썼던 나날들이 뇌리를 스쳤다.
"천금이 아니라 만금을 준다 해도, 나는 검을 넘길 마음이 없소. 설령 당신이 천하제일인이거나, 황궁의 높으신 분이라도 마찬가지요. 강자의 손에서 천하의 명검 소리를 듣더라도 그게 무슨 소용이오? 어차피 누군가의 손에서, 그 누군가보다 약한 이를 죽이는 데에 쓰일 텐데."
적비성이 신분을 감추고 찾아가 거액을 제시했을 때, 강치용은 바로 그렇게 대꾸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적비성은 '신병곡에서 이름을 날린 대장장이라는 자가, 검이 살상에 쓰인다는 사실을 이제야 실감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강치용의 심기를 과히 거스르는 일은 자신의 목적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내가 쓸 검이 아니다. 싸울 자리를 찾아다니는 이에게 주려는 것도 아니고."
물론 그렇다 하여 살갑게 아부할 마음 따위는 없었으므로, 적비성은 단순한 사실을 투박하게 건넸다. 강치용이 코웃음을 쳤다. 자식을 잃은 시름으로 여윈 데다 낯빛도 거무죽죽하게 변해 있었으나, 그 강직하고 꿋꿋한 분위기가 죽은 염왕심명을 조금쯤 닮아 있었다. "무의미한 궤변이오. 어차피 무인에게 주려는 작정일 텐데, 이 검에 피가 묻는 일이 없겠소?" 대놓고 냉소하는 남자를 향해, 적비성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럼 명검을 수집하고 쓰지 않을 부호들에게 팔아버리면 될 텐데, 왜 끌어안고 있지?"
"설령 팔 생각이 없다 해도, 검에게는 검의 명이라는 것이 있소. 벽에만 걸어두고 기뻐할 놈에게 보내는 일은 모욕이오."
강치용이 힘주어 말했다. 적비성은 상대를 이해하는 동시에 이해할 수 없어 눈썹을 찡그렸다.
"태어난 검이 그 목적에 맞게 쓰여야 한다는 신념을 따를 수 없다면, 진즉에 부러뜨리거나 바다에 던져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아예 물건 취급하여 팔아치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망가뜨리지도 못한 채 가지고 있군. 왜지?"
강치용의 얼굴이 벌게지다가 이내 창백해졌다. 어쩌면 남자 스스로도 수없이 떠올린 의문인지도 몰랐다. 수치심에 사로잡힌 듯 고개를 숙이고, 강치용은 우물거리듯 말했다. "자식이 흉하다 하여 부모의 손으로 죽여버릴 수는 없지 않소." 적비성이 힐끗 검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쓰는 대도와는 사뭇 다른 형태였으나, 검집만 보더라도 소문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 만했다. 대장장이를 향해, 적비성이 건넸다.
"네 검은 흉하지 않다. 눈먼 살생에 쓰일 일도 없으니, 내게 검을 넘겨라."
"거절하오. 돌아가시오."
짧게 거부한 강치용이 벌떡 일어섰다. 상대를 붙들고 겁박할 수도 있었지만, 적비성은 그저 불만스럽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남을 협박하여 갈취한 물건을 이연화에게 예물이랍시고 건네줄 수는 없었다. 이미 거미줄과 같은 은원에 얽혔던 이에게, 또 하나의 은원을 선사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포기히고 돌아설 성미였다면, 적가보에 매인 꼬마에서 천하제일을 다투는 금원맹주가 되지도 못했을 터였다. 적비성은 직선적이고 명쾌했으나, 한 번 결정한 일에는 매우 끈질기고 집요하며 인내심이 강했다. 이후 며칠 동안, 적비성은 강치용의 거처에 예고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병곡의 외진 곳에서 홀로 살아가던 강치용은 적비성을 발견할 때마다 대경하여 움찔거렸으나, 그런 날이 많아질수록 그저 불편하고도 짜증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적비성은 상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설득하려 들거나, 때로는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물론 침묵한다 하여 금원맹주의 존재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네가 저 검에게 바라는 운명은 뭐냐?"
그렇게 물었을 때, 적비성은 다소 신경질이 나 있었다. 혼례일이 조금씩 다가오는 탓이었다. 물론 무안에게 다른 명검들의 소재도 알아보라 지시해 두었으나, 제작자와 검을 접하고 나니 어떻게든 이 물건을 손에 넣어 전해주고픈 마음이 강해졌다. 강치용은 의도적으로 적비성을 무시하며, 집 앞의 밭에 묵묵히 물을 뿌리고 있었다. 적비성이 그 옆모습을 향해 쏘아붙였다.
"저렇게 내버려두면, 방구석에서 먼지에 뒤덮여 있다가 네가 죽은 뒤 어중이떠중이의 손에 들어가겠지. 그게 네가 바라는 검의 명이냐?"
강치용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살짝 솟았다. 남자가 적비성을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오랜만에 들은 목소리였다.
"그럼, 당신이 바라는 검의 명은 뭐요?"
적비성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내가 바라는 검의 명? 잠시 고민하다가, 금원맹주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내가 바라는 검의 명은 없다. 검은 검일 뿐인데, 무슨 명 따위가 있지?" 강치용의 입가로 쓴웃음이 잠깐 스쳤다.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허무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강치용은 다시 작물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그 도구를 부숴버리고 싶다 생각하다가, 적비성은 이내 주먹을 꾹 쥐고는 말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 바위 같은 장인을 흔들기 위해선 꾸밈 없는 진실이 필요했다.
"다만 나는, 그가 덧없이 스러지지 않길 바란다."
강치용의 손이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상대에게서 아무런 답이 없었으나, 적비성은 그 모습을 빤히 보며 이었다.
"차라리 나 같은 성미였다면 덜 염려했을 테지. 거슬리는 놈이 보이는 대로 치워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그 녀석은...."
적비성의 말끝이 살짝 흐려졌다. 이연화는 기본적으로 무자비한 살생을 꺼렸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사파 고수를 대적할 때에야 손에 사정을 두지 못했지만, 웬만한 상황에선 상대를 거꾸러뜨리는 정도로 멈추곤 했다. 그 몸에 새겨진 정파의 가르침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천성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비성의 눈에 그 행태는 꽤 비효율적으로 비쳤다. 배신자라면 힘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처벌해 온 사람의 눈에, 이연화는 지나치게 물러터진 강자였다.
"해하려고 달려드는 놈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는지 나뭇가지 따위나 쓰고 있어. 언젠가는 분명히 한계가 온다."
적비성이 오른손에 힘을 주며 불평하듯 읊조렸다. 그 이야기에 조금 흥미를 느꼈는지, 강치용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나뭇가지로 검객을 상대했다면 보통 고수가 아닐 텐데. 그런 사람이 자기 애검도 없단 말이오?"
"있었지만, 그놈이 스스로 망가뜨렸다. 강호에 미련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겠지."
금원맹주가 대놓고 불쾌한 투로 대꾸했다. 소자금이 자신의 앞에서 멍청히 털어놓았던 이야기를 떠올리면 아직도 울화가 치밀었다. 강치용의 얼굴로 묘하고도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장인은 이 이야기의 내막이 궁금해진 듯했으나, 질문함으로써 어떤 여지가 생기는 일을 경계하는 듯 망설였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는지, 남자는 헛기침을 한 차례 하고는 짐짓 태연히 물었다.
"제자나 혈육에게 주려는 셈이 아니었소? 내 검을 누구에게 주려고 하는 자들은 보통 그 축이던데."
"내 제자나 혈육이었으면 그렇게 멍청한 꼴을 두고 보지도 않았어."
금원맹주가 이죽거렸다. 적비성을 힐끔거리다가, 강치용은 손에 들었던 물건을 던지듯이 내려놓고는 몸을 돌렸다. "얘기나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오? 왜 반드시 내 검을 줘야겠다는 거요?" 따지는 듯한 질문에, 적비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연화와 각인하겠다고 마음먹은 후로, 단어 선택에 신중해지는 상황이 왕왕 생기고 있었다. 이연화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왜 그에게 천하의 명검을 주고자 이리도 애쓰는 참인가? 골똘한 표정을 지은 채, 금원맹주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번 크게 무너졌다가 일어난 사람이다. 죽을 자리로 걸어가는 것을 겨우 돌려놓았지."
느리게 건네자, 강치용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나와 비슷했군." 그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대장장이의 얼굴로 오래된 비탄이 드리웠다. 이연화의 사정을 구구절절히 설명할 마음은 없었기에, 적비성은 말없이 강치용을 바라보다 이었다.
"내 마음에는 정이나 의 따위가 없다. 하지만 그 녀석은 달라. 자신이 죽을 상황에 처하더라도, 무고하거나 약한 자를 함부로 베지 못할 놈이다. 이미 몇 번씩이나 뒤통수를 맞은 주제에, 그런 부분은 영 변하질 않더군."
마지막 말에는 아무래도 불평의 기척이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적비성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부분 때문에 자신이 이연화를 신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연화는 비록 능청스럽고 뻔뻔했으나 타인의 믿음을 악용하지 못했고, 때로 남을 속일지언정 진실로 해하지 못했다. 이연화가 자신처럼 강자존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지금과 같은 관계에 다다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짧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금원맹주는 곧고 굳은 눈으로 강치용을 바라보았다.
"나는 네 사정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네 아들을 알지도 못하고, 아들을 억울하게 잃은 네 심정을 알지도 못하지. 하지만 네가 부당한 살생을 원치 않아 검을 끌어안은 채 사는 거라면, 그의 손에 넘겨주는 편이 가장 낫다. 그것이 검의 명도, 네 바람도 충족시키는 일일 테니까. 그는 강자에게 핍박받는 약자를 도우며 여생을 살아갈 인간이야. 그러니...."
적비성은 잠시 주저했다. 누군가에게 명령 아닌 청을 하거나 예를 표하는 것은, 그에게 어색할 정도로 드문 경우였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수하가 아니었고, 평생 한 번뿐인 예물을 결정하는 일에 중요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다. 적비성이 가슴 앞에서 양손을 포개어 들자, 강치용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적비성은 정중한 투로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 부탁하겠다. 그가 하잘것없는 악의에 휩쓸려 다시 사라지지 않도록, 네 검을 넘겨다오."
강치용은 한동안 꺼림칙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씁쓸하게 집을 한 차례 돌아보고, 장인은 이미 죽은 누군가를 떠올리듯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당신의 마음에는 정과 의가 없다더니, 그 사람을 향한 정은 있나 보오. 고작 나 같은 사람에게 부탁씩이나 하다니." 혼잣말처럼 중얼대고, 강치용은 곧 발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음 같아서야 그를 따라가 계속 닦달하고 싶었으나, 적비성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초조한 마음을 다스렸다. 저런 사람을 대상으로 화를 낸들 별다른 효과가 없으리란 사실을 직감한 탓이었다. 무공의 경지와 무관하게, 어떤 이들은 강하게 두들길수록 오히려 단단해지곤 했다.
그로부터 다시 며칠이 지났을 때, 강치용은 마당에서 뒷짐을 진 채 비를 맞던 금원맹주에게 검을 넘겨주었다.
그와 함께, 강치용은 적비성에게 한 마디의 협박 아닌 협박을 건넸다. 만일 이 검을 받은 사람이 잘못된 길을 걷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금원맹주가 자신을 속였노라는 소문을 동네방네 퍼뜨리겠다는 내용이었다. 한쪽 눈썹을 까딱 드는 것만으로 내 정체를 어떻게 알았느냐 묻는 남자에게, 강치용은 코웃음을 치며 당신의 검을 못 알아볼 대장장이가 몇이나 있겠느냐 대꾸했다(그는 이름조차 없다는 대도를 퍽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 강치용의 검은 이연화의 손에 들려 있었다. 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연화가 여상스레 건넸다.
"잘 잤어?"
"언제부터 나와 있었지?"
질문을 질문으로 받으며, 적비성이 그 곁에 다가가 앉았다. "얼마 안 됐어." 이연화가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검을 검집에 단정히 갈무리하고, 이연화는 아무래도 의문스러운 듯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강치용에게 대체 뭐라고 한 거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얼마나 강경한 사람인지는 여러 차례 들었어. 천금을 준다 해도 쉽게 넘겼을 리 없는데."
"이름을 말하진 않았다만, 너에 대해 대충 설명했다. 검을 넘겨도 될 만한 사람이라 여긴 모양이지."
적비성이 무심히 대꾸했다. 그리 설득된 얼굴은 아니었으나, 이연화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강치용이 무슨 전언을 남기지는 않았어? 당부라든가, 경고라든가." 질문한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적비성은 당당하고도 담백하게 대답했다.
"잘 쓰라고 했다."
"그게 뭐야."
이연화가 맥빠진 웃음을 흘렸다. 적비성은 강치용과의 일을 세세히 설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이연화가 사술에 당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를 함부로 베고 돌아다닐 일은 없으니, 강치용의 바람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비성은 검을 지닌 이연화를 묘하게 편안한 기분으로 응시했다. 아무리 조용히 살아가려 노력하더라도, 남자는 결국 어떤 사건이나 분쟁에 휘말리게 될 터였다. 그 손에 변변찮은 나뭇가지가 아닌 명검이 들려 있으리란 사실만으로도, 심중의 염려와 불만이 대폭 흐려지는 듯했다.
"검명은 정했나?"
"음, 생각해 봤는데-."
"아, 왜 너희만 올라와 있어!"
억울한 외침이 빽 울렸다. 적비성이 슬쩍 미간을 좁히고는 고개를 돌렸다. 지붕에 오른 방다병이 이편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오던 참이었다. 청년은 곧 이연화의 옆에 털썩 앉아 꿍얼거리기 시작했다. "왜 첫날밤을 보냈는데, 다음날 빈 침상에서 혼자 눈을 떠야 해? 나가면 나간다고 말이라도 하지, 아무도 없어서 깜짝 놀랐잖아." 홀로 남겨지는 게 싫으면 일찍일찍 눈을 뜰 것이지, 왜 쓸데없이 남의 탓이란 말인가? 적비성이 귀찮은 눈으로 타박하기 전, 이연화가 그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맞대며 달래듯 건넸다.
"나가봐야 객잔 안이지, 널 두고 어딜 그리 멀리 가겠어. 내가 어제 한 약조는 벌써 잊은 거야?"
방다병의 불평이 쑥 들어갔다. 투덜거리던 표정도 단숨에 맑아져, 청년은 입을 다문 채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꿈지럭거렸다. 이연화와 더 가까이 다가붙는 모양새를 코웃음과 함께 지켜보다, 적비성은 빈 품을 습관처럼 뒤졌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높은 곳에 올라 있으니, 문득 좋은 술 한 모금이 떠오른 탓이었다. "이거 찾아? 내가 가져왔어." 적비성을 힐끗 본 방다병이 작은 술병을 꺼내 건네주었다. 적비성은 상대를 향한 짜증이 다소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병을 열었다.
꽤 좋은 순간이었다. 정말 드물게도, 적비성은 몸의 긴장을 완전히 풀어버릴 만큼 편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자신의 생을 걸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깨끗한 하늘 아래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자니, 마음이 차분한 동시에 흡족했다. 죽림과 꽃나무, 호수와 온천이 서늘한 바람에 잔잔히 흔들렸다. 세 사람은 잠시 이 평화로운 때를 즐기며, 같은 술을 조용히 나누어 마셨다. 오래 앉아 있기에는 다소 쌀쌀했지만, 세 사람 중 누구도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상하네."
이연화의 중얼거림에, 두 사람이 그를 돌아보았다. 남자의 시선은 먼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동자가 아련하면서도 또렷했다.
"몸이 안 아파. 심마도...오늘은 잠잠한 것 같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설마, 또 시작하려는 참인가? 적비성이 내심 못마땅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상대의 낌새를 살폈다. 나는 이런 평안을 누릴 자격이 없다며 스스로를 매도할 참이라면, 다시 방으로 들어가 침상에 밀어넣고 쓸데없는 생각이라곤 못하도록 몰아세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얼굴은 자책이나 우울의 빛에 잠식당하지 않았다. 엷은 씁쓸함이 배어 있었으나, 이연화의 입가는 분명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시는 이런 날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별로 슬퍼하지도 않았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이연화가 담담히 이었다. 그 말대로, 그 눈과 목소리에서 비탄의 기색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오히려 속상했는지, 방다병이 이연화의 손을 꾹 잡았다. 퍼뜩 돌아본 이연화가 작게 웃었다. "왜 그렇게 봐, 청승 떠는 거 아니야. 신기하고 고맙다는 뜻이야." 진심으로 건넨 말에도, 방다병의 낯은 금방 펴지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이연화의 손등을 쓸어주는 방다병을 힐끗 보고, 적비성이 썩 뾰족하지 않은 투로 타박하듯 건넸다.
"고마우면, 앞으로 청승은 좀 덜 떨도록 해라."
"음, 노력해 볼게. 그래도 가끔씩 안 좋은 날이 있기는 할 거야."
눈가를 긁적인 이연화가 머쓱한 미소와 함께 받았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긴 데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기란 요원했으니,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이연화는 또 배신당하고 아파하거나 자책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지도 몰랐다. 상상만으로도 답답한 일이었지만, 그 또한 이연화라는 사람의 일부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방다병이 이연화에게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하며 낮게 건넸다.
"이연화. 그런 일이 생기면 나한테 숨기지 마. 단숨에 해결해줄 수는 없겠지만...적어도 네 곁을 지킬 수는 있으니까."
이연화의 얼굴로 엷은 웃음이 번졌다. 방다병의 등을 토닥이듯 쓸다가, 이연화는 곧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아비. 너는 왜 아무 말이 없어? 너는 내 곁을 안 지켜줄 셈이야?" 농담처럼 날아온 말에, 적비성이 내심 눈을 굴렸다. 다정한 말이나 위로 따위는 적비성에게 아직 불편한 옷과 같았으나, 그렇다고 고통에 빠진 이연화를 홀로 내버려둔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하효혜의 질문을 듣고 그런 상황을 이미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그런 일이라면 예물을 쓸 필요도 없으니, 그냥 내게 말해라."
이연화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피식 웃더니, 이연화는 곧 예물로 받은 검을 쓰다듬으며 읊조렸다.
"검 이름은 수연(守緣)으로 지어야겠어."
적비성이 퍼뜩 돌아보았다. 담백한 어조였으나, 그 내용에는 꽤 무게감이 있었다. 어쩌면 듣는 사람이 제멋대로 부여한 무게인지도 몰랐다. 한때는 세상에 미련이 없노라 강변하기 위해 검을 부수었던 남자가, 이제는 새로운 검을 든 채 그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상대가 인세의 틈바구니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적비성은 한쪽 입매를 비뚜름하게 끌어올렸다. "수연검?" 방다병이 동그래진 눈으로 그 이름을 발음하자,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하고는 이었다.
"내가 의와 협을 행한다고 철석같이 믿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물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걷겠지만, 그 길이 정말로 옳을지는 모를 일이지. 어떤 일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 결과를 알게 되기도 하니까. 그러니 거창한 뜻을 갖기보다는, 일단 내게 주어진 인연들을 잘 지키고 싶어. 살면서 마주치는 다른 사람들도 겸사겸사 도와주고 말이야. 그런 시간이 쌓이다 보면, 돌아봤을 때 자연스레 의로운 삶이 되지 않겠어?"
이연화는 다소 장난스럽게 들릴 만큼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했지만, 방다병은 순간 울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응. 분명히 그럴 거야." 겨우 그렇게만 말하고, 청년은 한 차례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이연화의 손을 꾹 쥐었다. 팔짱을 낀 적비성이 퍽 무심한 투로 대꾸했다.
"난 네가 의로운 삶을 지향하지 않아도 별로 상관은 없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살고 싶다면야."
"으. 천하에 분위기를 망치는 무공이 있다면, 네가 가장 절정 고수일 거야."
코를 슥 훔친 방다병이 적비성을 째려보며 툴툴거렸다. 여느 때처럼 꿈쩍도 않는 금원맹주를 향해 흥 소리를 내고, 방다병은 밝게 빛나는 눈으로 이연화를 향했다.
"여길 떠나면, 이연화. 새로 지은 집에 함께 가자. 네 집이니까, 직접 보고 원하는 대로 꾸며야 하지 않겠어."
"연화루와 비슷하다면 내가 더 바랄 건 없을 텐데. 하지만 좋아, 내 집이라면 한 번은 가봐야지."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하며 승낙하자, 방다병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적비성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내가 쓸 물건들은 무안을 시켜 옮겨놓도록 하지." 방다병의 표정이 대번에 이상해졌다. 눈썹을 이상한 모양으로 찌푸리고, 청년은 불길한 낌새를 감지한 동물처럼 적비성을 바라보았다.
"거긴 이연화의 사가인데, 왜 네가 쓸 물건들을 갖다 놔?"
"이연화의 사가라면 자주 들를 게 아니냐. 희락기가 왔을 때 이용하기도 편할 테고. 세 사람이 천기산장이나 금원맹을 들락거리기는 아무래도 불편하지 않나? 사람들에게 너무 알려진 곳보단, 산중에 외떨어진 사가가 낫지."
적비성이 그리 당연한 것을 왜 질문씩이나 하느냐는 얼굴로 대답하자, 방다병은 금방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럼...그럼 내 물건도 갖다놓을 거야." 이연화의 소매를 꽉 부여잡은 채, 방다병이 소외당할 일을 경계하는 아이마냥 꿍얼거렸다. 적비성은 비웃고 싶지도 않은 심정이 되어-내가 정말 저런 꼬마와 함께 혼례를 올렸단 말인가?-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발끈한 방다병이 뭐라 외치기 전, 이연화가 두 신랑의 양손을 잡아 토닥였다.
"그래, 그래. 너희 좋을 대로 해. 같이 있을 장소가 늘어나면 좋지, 뭘."
방다병의 얼굴에서 분이 싹 빠져나갔다. 이연화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방다병은 얼룩덜룩한 목덜미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푹 머리를 기댔다. 그 얼굴이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 녀석, 아무리 이른 시간이라도 바깥인데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연화가 혀를 차며 질책했으나, 그 목소리는 그리 진지하지 않았다. 피식 웃은 적비성이 흰 손을 꽉 맞잡았다. 자신과 비슷한 힘으로 쥐어 오는 손아귀가 달갑다 못해 환희로웠다. 어찌 보면 가장 일상적인 아침이었으나, 동시에 가장 특별한 아침이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눈을 떴을 때, 적비성은 가장 먼저 팔이 허전하다고 생각했다. 잠의 여운이 남은 눈동자를 두어 번 깜박이자, 입을 살짝 벌린 채 천진한 얼굴로 자던 방다병이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고, 적비성은 한 손으로 침상을 짚어 지체 없이 일어났다. 상대와 입술이 닿을 법한 거리에서 깨어난 날이 떠오른 탓이었다. 침구에 아직 온기가 스민 것을 보니, 이연화가 자리를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했다. 당연하게도, 금원맹주는 고개를 돌려 반려를 찾았다. 그러나 방 안에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적비성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이미 몇 번이고 당한 전력 탓인지, 중요한 순간에 상대가 사라지면 아무래도 좋지 못한 가능성을 상상하게 되었다. 단서라곤 없이 증발한 사람을 찾아 천지를 뒤지던 시절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방을 샅샅이 훑은 적비성이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위기감은 그저 과거에서 비롯된 반사적인 반응일 뿐이었다. 방 안에는 아직 이연화의 옷가지며 소지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연화는 어디로 갔을까? 눈을 감은 채 기감을 넓히다가, 적비성은 이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이라, 하늘 한편이 새파란 빛으로 훤히 밝아져 있었다. 신방 밖으로 나오자, 봄비에 젖은 흙과 나무의 냄새가 청량하게 폐를 채웠다. 크게 심호흡한 적비성이 땅을 박찼다. 별다른 소리도 없이 훌쩍 지붕 위로 오르니, 침의 위에 흰 겉옷 하나만 대충 걸친 채 홀로 앉은 이연화가 보였다. 그 손에 어제 건넸던 보검이 들려 있었다. 시퍼런 날을 바라보는 눈이 고요했다. 바로 다가가는 대신, 적비성은 잠시 자리에 서서 그 모습을 응시했다. 저 검을 이연화에게 건네주기 위해 애썼던 나날들이 뇌리를 스쳤다.
"천금이 아니라 만금을 준다 해도, 나는 검을 넘길 마음이 없소. 설령 당신이 천하제일인이거나, 황궁의 높으신 분이라도 마찬가지요. 강자의 손에서 천하의 명검 소리를 듣더라도 그게 무슨 소용이오? 어차피 누군가의 손에서, 그 누군가보다 약한 이를 죽이는 데에 쓰일 텐데."
적비성이 신분을 감추고 찾아가 거액을 제시했을 때, 강치용은 바로 그렇게 대꾸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적비성은 '신병곡에서 이름을 날린 대장장이라는 자가, 검이 살상에 쓰인다는 사실을 이제야 실감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강치용의 심기를 과히 거스르는 일은 자신의 목적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내가 쓸 검이 아니다. 싸울 자리를 찾아다니는 이에게 주려는 것도 아니고."
물론 그렇다 하여 살갑게 아부할 마음 따위는 없었으므로, 적비성은 단순한 사실을 투박하게 건넸다. 강치용이 코웃음을 쳤다. 자식을 잃은 시름으로 여윈 데다 낯빛도 거무죽죽하게 변해 있었으나, 그 강직하고 꿋꿋한 분위기가 죽은 염왕심명을 조금쯤 닮아 있었다. "무의미한 궤변이오. 어차피 무인에게 주려는 작정일 텐데, 이 검에 피가 묻는 일이 없겠소?" 대놓고 냉소하는 남자를 향해, 적비성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럼 명검을 수집하고 쓰지 않을 부호들에게 팔아버리면 될 텐데, 왜 끌어안고 있지?"
"설령 팔 생각이 없다 해도, 검에게는 검의 명이라는 것이 있소. 벽에만 걸어두고 기뻐할 놈에게 보내는 일은 모욕이오."
강치용이 힘주어 말했다. 적비성은 상대를 이해하는 동시에 이해할 수 없어 눈썹을 찡그렸다.
"태어난 검이 그 목적에 맞게 쓰여야 한다는 신념을 따를 수 없다면, 진즉에 부러뜨리거나 바다에 던져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아예 물건 취급하여 팔아치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망가뜨리지도 못한 채 가지고 있군. 왜지?"
강치용의 얼굴이 벌게지다가 이내 창백해졌다. 어쩌면 남자 스스로도 수없이 떠올린 의문인지도 몰랐다. 수치심에 사로잡힌 듯 고개를 숙이고, 강치용은 우물거리듯 말했다. "자식이 흉하다 하여 부모의 손으로 죽여버릴 수는 없지 않소." 적비성이 힐끗 검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쓰는 대도와는 사뭇 다른 형태였으나, 검집만 보더라도 소문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 만했다. 대장장이를 향해, 적비성이 건넸다.
"네 검은 흉하지 않다. 눈먼 살생에 쓰일 일도 없으니, 내게 검을 넘겨라."
"거절하오. 돌아가시오."
짧게 거부한 강치용이 벌떡 일어섰다. 상대를 붙들고 겁박할 수도 있었지만, 적비성은 그저 불만스럽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남을 협박하여 갈취한 물건을 이연화에게 예물이랍시고 건네줄 수는 없었다. 이미 거미줄과 같은 은원에 얽혔던 이에게, 또 하나의 은원을 선사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포기히고 돌아설 성미였다면, 적가보에 매인 꼬마에서 천하제일을 다투는 금원맹주가 되지도 못했을 터였다. 적비성은 직선적이고 명쾌했으나, 한 번 결정한 일에는 매우 끈질기고 집요하며 인내심이 강했다. 이후 며칠 동안, 적비성은 강치용의 거처에 예고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병곡의 외진 곳에서 홀로 살아가던 강치용은 적비성을 발견할 때마다 대경하여 움찔거렸으나, 그런 날이 많아질수록 그저 불편하고도 짜증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적비성은 상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설득하려 들거나, 때로는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물론 침묵한다 하여 금원맹주의 존재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네가 저 검에게 바라는 운명은 뭐냐?"
그렇게 물었을 때, 적비성은 다소 신경질이 나 있었다. 혼례일이 조금씩 다가오는 탓이었다. 물론 무안에게 다른 명검들의 소재도 알아보라 지시해 두었으나, 제작자와 검을 접하고 나니 어떻게든 이 물건을 손에 넣어 전해주고픈 마음이 강해졌다. 강치용은 의도적으로 적비성을 무시하며, 집 앞의 밭에 묵묵히 물을 뿌리고 있었다. 적비성이 그 옆모습을 향해 쏘아붙였다.
"저렇게 내버려두면, 방구석에서 먼지에 뒤덮여 있다가 네가 죽은 뒤 어중이떠중이의 손에 들어가겠지. 그게 네가 바라는 검의 명이냐?"
강치용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살짝 솟았다. 남자가 적비성을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오랜만에 들은 목소리였다.
"그럼, 당신이 바라는 검의 명은 뭐요?"
적비성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내가 바라는 검의 명? 잠시 고민하다가, 금원맹주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내가 바라는 검의 명은 없다. 검은 검일 뿐인데, 무슨 명 따위가 있지?" 강치용의 입가로 쓴웃음이 잠깐 스쳤다.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허무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강치용은 다시 작물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그 도구를 부숴버리고 싶다 생각하다가, 적비성은 이내 주먹을 꾹 쥐고는 말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 바위 같은 장인을 흔들기 위해선 꾸밈 없는 진실이 필요했다.
"다만 나는, 그가 덧없이 스러지지 않길 바란다."
강치용의 손이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상대에게서 아무런 답이 없었으나, 적비성은 그 모습을 빤히 보며 이었다.
"차라리 나 같은 성미였다면 덜 염려했을 테지. 거슬리는 놈이 보이는 대로 치워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그 녀석은...."
적비성의 말끝이 살짝 흐려졌다. 이연화는 기본적으로 무자비한 살생을 꺼렸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사파 고수를 대적할 때에야 손에 사정을 두지 못했지만, 웬만한 상황에선 상대를 거꾸러뜨리는 정도로 멈추곤 했다. 그 몸에 새겨진 정파의 가르침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천성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비성의 눈에 그 행태는 꽤 비효율적으로 비쳤다. 배신자라면 힘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처벌해 온 사람의 눈에, 이연화는 지나치게 물러터진 강자였다.
"해하려고 달려드는 놈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는지 나뭇가지 따위나 쓰고 있어. 언젠가는 분명히 한계가 온다."
적비성이 오른손에 힘을 주며 불평하듯 읊조렸다. 그 이야기에 조금 흥미를 느꼈는지, 강치용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나뭇가지로 검객을 상대했다면 보통 고수가 아닐 텐데. 그런 사람이 자기 애검도 없단 말이오?"
"있었지만, 그놈이 스스로 망가뜨렸다. 강호에 미련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겠지."
금원맹주가 대놓고 불쾌한 투로 대꾸했다. 소자금이 자신의 앞에서 멍청히 털어놓았던 이야기를 떠올리면 아직도 울화가 치밀었다. 강치용의 얼굴로 묘하고도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장인은 이 이야기의 내막이 궁금해진 듯했으나, 질문함으로써 어떤 여지가 생기는 일을 경계하는 듯 망설였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는지, 남자는 헛기침을 한 차례 하고는 짐짓 태연히 물었다.
"제자나 혈육에게 주려는 셈이 아니었소? 내 검을 누구에게 주려고 하는 자들은 보통 그 축이던데."
"내 제자나 혈육이었으면 그렇게 멍청한 꼴을 두고 보지도 않았어."
금원맹주가 이죽거렸다. 적비성을 힐끔거리다가, 강치용은 손에 들었던 물건을 던지듯이 내려놓고는 몸을 돌렸다. "얘기나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오? 왜 반드시 내 검을 줘야겠다는 거요?" 따지는 듯한 질문에, 적비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연화와 각인하겠다고 마음먹은 후로, 단어 선택에 신중해지는 상황이 왕왕 생기고 있었다. 이연화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왜 그에게 천하의 명검을 주고자 이리도 애쓰는 참인가? 골똘한 표정을 지은 채, 금원맹주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번 크게 무너졌다가 일어난 사람이다. 죽을 자리로 걸어가는 것을 겨우 돌려놓았지."
느리게 건네자, 강치용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나와 비슷했군." 그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대장장이의 얼굴로 오래된 비탄이 드리웠다. 이연화의 사정을 구구절절히 설명할 마음은 없었기에, 적비성은 말없이 강치용을 바라보다 이었다.
"내 마음에는 정이나 의 따위가 없다. 하지만 그 녀석은 달라. 자신이 죽을 상황에 처하더라도, 무고하거나 약한 자를 함부로 베지 못할 놈이다. 이미 몇 번씩이나 뒤통수를 맞은 주제에, 그런 부분은 영 변하질 않더군."
마지막 말에는 아무래도 불평의 기척이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적비성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부분 때문에 자신이 이연화를 신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연화는 비록 능청스럽고 뻔뻔했으나 타인의 믿음을 악용하지 못했고, 때로 남을 속일지언정 진실로 해하지 못했다. 이연화가 자신처럼 강자존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지금과 같은 관계에 다다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짧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금원맹주는 곧고 굳은 눈으로 강치용을 바라보았다.
"나는 네 사정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네 아들을 알지도 못하고, 아들을 억울하게 잃은 네 심정을 알지도 못하지. 하지만 네가 부당한 살생을 원치 않아 검을 끌어안은 채 사는 거라면, 그의 손에 넘겨주는 편이 가장 낫다. 그것이 검의 명도, 네 바람도 충족시키는 일일 테니까. 그는 강자에게 핍박받는 약자를 도우며 여생을 살아갈 인간이야. 그러니...."
적비성은 잠시 주저했다. 누군가에게 명령 아닌 청을 하거나 예를 표하는 것은, 그에게 어색할 정도로 드문 경우였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수하가 아니었고, 평생 한 번뿐인 예물을 결정하는 일에 중요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다. 적비성이 가슴 앞에서 양손을 포개어 들자, 강치용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적비성은 정중한 투로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 부탁하겠다. 그가 하잘것없는 악의에 휩쓸려 다시 사라지지 않도록, 네 검을 넘겨다오."
강치용은 한동안 꺼림칙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씁쓸하게 집을 한 차례 돌아보고, 장인은 이미 죽은 누군가를 떠올리듯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당신의 마음에는 정과 의가 없다더니, 그 사람을 향한 정은 있나 보오. 고작 나 같은 사람에게 부탁씩이나 하다니." 혼잣말처럼 중얼대고, 강치용은 곧 발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음 같아서야 그를 따라가 계속 닦달하고 싶었으나, 적비성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초조한 마음을 다스렸다. 저런 사람을 대상으로 화를 낸들 별다른 효과가 없으리란 사실을 직감한 탓이었다. 무공의 경지와 무관하게, 어떤 이들은 강하게 두들길수록 오히려 단단해지곤 했다.
그로부터 다시 며칠이 지났을 때, 강치용은 마당에서 뒷짐을 진 채 비를 맞던 금원맹주에게 검을 넘겨주었다.
그와 함께, 강치용은 적비성에게 한 마디의 협박 아닌 협박을 건넸다. 만일 이 검을 받은 사람이 잘못된 길을 걷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금원맹주가 자신을 속였노라는 소문을 동네방네 퍼뜨리겠다는 내용이었다. 한쪽 눈썹을 까딱 드는 것만으로 내 정체를 어떻게 알았느냐 묻는 남자에게, 강치용은 코웃음을 치며 당신의 검을 못 알아볼 대장장이가 몇이나 있겠느냐 대꾸했다(그는 이름조차 없다는 대도를 퍽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 강치용의 검은 이연화의 손에 들려 있었다. 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연화가 여상스레 건넸다.
"잘 잤어?"
"언제부터 나와 있었지?"
질문을 질문으로 받으며, 적비성이 그 곁에 다가가 앉았다. "얼마 안 됐어." 이연화가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검을 검집에 단정히 갈무리하고, 이연화는 아무래도 의문스러운 듯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강치용에게 대체 뭐라고 한 거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얼마나 강경한 사람인지는 여러 차례 들었어. 천금을 준다 해도 쉽게 넘겼을 리 없는데."
"이름을 말하진 않았다만, 너에 대해 대충 설명했다. 검을 넘겨도 될 만한 사람이라 여긴 모양이지."
적비성이 무심히 대꾸했다. 그리 설득된 얼굴은 아니었으나, 이연화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강치용이 무슨 전언을 남기지는 않았어? 당부라든가, 경고라든가." 질문한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적비성은 당당하고도 담백하게 대답했다.
"잘 쓰라고 했다."
"그게 뭐야."
이연화가 맥빠진 웃음을 흘렸다. 적비성은 강치용과의 일을 세세히 설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이연화가 사술에 당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를 함부로 베고 돌아다닐 일은 없으니, 강치용의 바람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비성은 검을 지닌 이연화를 묘하게 편안한 기분으로 응시했다. 아무리 조용히 살아가려 노력하더라도, 남자는 결국 어떤 사건이나 분쟁에 휘말리게 될 터였다. 그 손에 변변찮은 나뭇가지가 아닌 명검이 들려 있으리란 사실만으로도, 심중의 염려와 불만이 대폭 흐려지는 듯했다.
"검명은 정했나?"
"음, 생각해 봤는데-."
"아, 왜 너희만 올라와 있어!"
억울한 외침이 빽 울렸다. 적비성이 슬쩍 미간을 좁히고는 고개를 돌렸다. 지붕에 오른 방다병이 이편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오던 참이었다. 청년은 곧 이연화의 옆에 털썩 앉아 꿍얼거리기 시작했다. "왜 첫날밤을 보냈는데, 다음날 빈 침상에서 혼자 눈을 떠야 해? 나가면 나간다고 말이라도 하지, 아무도 없어서 깜짝 놀랐잖아." 홀로 남겨지는 게 싫으면 일찍일찍 눈을 뜰 것이지, 왜 쓸데없이 남의 탓이란 말인가? 적비성이 귀찮은 눈으로 타박하기 전, 이연화가 그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맞대며 달래듯 건넸다.
"나가봐야 객잔 안이지, 널 두고 어딜 그리 멀리 가겠어. 내가 어제 한 약조는 벌써 잊은 거야?"
방다병의 불평이 쑥 들어갔다. 투덜거리던 표정도 단숨에 맑아져, 청년은 입을 다문 채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꿈지럭거렸다. 이연화와 더 가까이 다가붙는 모양새를 코웃음과 함께 지켜보다, 적비성은 빈 품을 습관처럼 뒤졌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높은 곳에 올라 있으니, 문득 좋은 술 한 모금이 떠오른 탓이었다. "이거 찾아? 내가 가져왔어." 적비성을 힐끗 본 방다병이 작은 술병을 꺼내 건네주었다. 적비성은 상대를 향한 짜증이 다소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병을 열었다.
꽤 좋은 순간이었다. 정말 드물게도, 적비성은 몸의 긴장을 완전히 풀어버릴 만큼 편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자신의 생을 걸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깨끗한 하늘 아래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자니, 마음이 차분한 동시에 흡족했다. 죽림과 꽃나무, 호수와 온천이 서늘한 바람에 잔잔히 흔들렸다. 세 사람은 잠시 이 평화로운 때를 즐기며, 같은 술을 조용히 나누어 마셨다. 오래 앉아 있기에는 다소 쌀쌀했지만, 세 사람 중 누구도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상하네."
이연화의 중얼거림에, 두 사람이 그를 돌아보았다. 남자의 시선은 먼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동자가 아련하면서도 또렷했다.
"몸이 안 아파. 심마도...오늘은 잠잠한 것 같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설마, 또 시작하려는 참인가? 적비성이 내심 못마땅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상대의 낌새를 살폈다. 나는 이런 평안을 누릴 자격이 없다며 스스로를 매도할 참이라면, 다시 방으로 들어가 침상에 밀어넣고 쓸데없는 생각이라곤 못하도록 몰아세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얼굴은 자책이나 우울의 빛에 잠식당하지 않았다. 엷은 씁쓸함이 배어 있었으나, 이연화의 입가는 분명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시는 이런 날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별로 슬퍼하지도 않았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이연화가 담담히 이었다. 그 말대로, 그 눈과 목소리에서 비탄의 기색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오히려 속상했는지, 방다병이 이연화의 손을 꾹 잡았다. 퍼뜩 돌아본 이연화가 작게 웃었다. "왜 그렇게 봐, 청승 떠는 거 아니야. 신기하고 고맙다는 뜻이야." 진심으로 건넨 말에도, 방다병의 낯은 금방 펴지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이연화의 손등을 쓸어주는 방다병을 힐끗 보고, 적비성이 썩 뾰족하지 않은 투로 타박하듯 건넸다.
"고마우면, 앞으로 청승은 좀 덜 떨도록 해라."
"음, 노력해 볼게. 그래도 가끔씩 안 좋은 날이 있기는 할 거야."
눈가를 긁적인 이연화가 머쓱한 미소와 함께 받았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긴 데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기란 요원했으니,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이연화는 또 배신당하고 아파하거나 자책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지도 몰랐다. 상상만으로도 답답한 일이었지만, 그 또한 이연화라는 사람의 일부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방다병이 이연화에게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하며 낮게 건넸다.
"이연화. 그런 일이 생기면 나한테 숨기지 마. 단숨에 해결해줄 수는 없겠지만...적어도 네 곁을 지킬 수는 있으니까."
이연화의 얼굴로 엷은 웃음이 번졌다. 방다병의 등을 토닥이듯 쓸다가, 이연화는 곧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아비. 너는 왜 아무 말이 없어? 너는 내 곁을 안 지켜줄 셈이야?" 농담처럼 날아온 말에, 적비성이 내심 눈을 굴렸다. 다정한 말이나 위로 따위는 적비성에게 아직 불편한 옷과 같았으나, 그렇다고 고통에 빠진 이연화를 홀로 내버려둔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하효혜의 질문을 듣고 그런 상황을 이미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그런 일이라면 예물을 쓸 필요도 없으니, 그냥 내게 말해라."
이연화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피식 웃더니, 이연화는 곧 예물로 받은 검을 쓰다듬으며 읊조렸다.
"검 이름은 수연(守緣)으로 지어야겠어."
적비성이 퍼뜩 돌아보았다. 담백한 어조였으나, 그 내용에는 꽤 무게감이 있었다. 어쩌면 듣는 사람이 제멋대로 부여한 무게인지도 몰랐다. 한때는 세상에 미련이 없노라 강변하기 위해 검을 부수었던 남자가, 이제는 새로운 검을 든 채 그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상대가 인세의 틈바구니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적비성은 한쪽 입매를 비뚜름하게 끌어올렸다. "수연검?" 방다병이 동그래진 눈으로 그 이름을 발음하자,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하고는 이었다.
"내가 의와 협을 행한다고 철석같이 믿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물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걷겠지만, 그 길이 정말로 옳을지는 모를 일이지. 어떤 일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 결과를 알게 되기도 하니까. 그러니 거창한 뜻을 갖기보다는, 일단 내게 주어진 인연들을 잘 지키고 싶어. 살면서 마주치는 다른 사람들도 겸사겸사 도와주고 말이야. 그런 시간이 쌓이다 보면, 돌아봤을 때 자연스레 의로운 삶이 되지 않겠어?"
이연화는 다소 장난스럽게 들릴 만큼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했지만, 방다병은 순간 울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응. 분명히 그럴 거야." 겨우 그렇게만 말하고, 청년은 한 차례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이연화의 손을 꾹 쥐었다. 팔짱을 낀 적비성이 퍽 무심한 투로 대꾸했다.
"난 네가 의로운 삶을 지향하지 않아도 별로 상관은 없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살고 싶다면야."
"으. 천하에 분위기를 망치는 무공이 있다면, 네가 가장 절정 고수일 거야."
코를 슥 훔친 방다병이 적비성을 째려보며 툴툴거렸다. 여느 때처럼 꿈쩍도 않는 금원맹주를 향해 흥 소리를 내고, 방다병은 밝게 빛나는 눈으로 이연화를 향했다.
"여길 떠나면, 이연화. 새로 지은 집에 함께 가자. 네 집이니까, 직접 보고 원하는 대로 꾸며야 하지 않겠어."
"연화루와 비슷하다면 내가 더 바랄 건 없을 텐데. 하지만 좋아, 내 집이라면 한 번은 가봐야지."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하며 승낙하자, 방다병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적비성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내가 쓸 물건들은 무안을 시켜 옮겨놓도록 하지." 방다병의 표정이 대번에 이상해졌다. 눈썹을 이상한 모양으로 찌푸리고, 청년은 불길한 낌새를 감지한 동물처럼 적비성을 바라보았다.
"거긴 이연화의 사가인데, 왜 네가 쓸 물건들을 갖다 놔?"
"이연화의 사가라면 자주 들를 게 아니냐. 희락기가 왔을 때 이용하기도 편할 테고. 세 사람이 천기산장이나 금원맹을 들락거리기는 아무래도 불편하지 않나? 사람들에게 너무 알려진 곳보단, 산중에 외떨어진 사가가 낫지."
적비성이 그리 당연한 것을 왜 질문씩이나 하느냐는 얼굴로 대답하자, 방다병은 금방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럼...그럼 내 물건도 갖다놓을 거야." 이연화의 소매를 꽉 부여잡은 채, 방다병이 소외당할 일을 경계하는 아이마냥 꿍얼거렸다. 적비성은 비웃고 싶지도 않은 심정이 되어-내가 정말 저런 꼬마와 함께 혼례를 올렸단 말인가?-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발끈한 방다병이 뭐라 외치기 전, 이연화가 두 신랑의 양손을 잡아 토닥였다.
"그래, 그래. 너희 좋을 대로 해. 같이 있을 장소가 늘어나면 좋지, 뭘."
방다병의 얼굴에서 분이 싹 빠져나갔다. 이연화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방다병은 얼룩덜룩한 목덜미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푹 머리를 기댔다. 그 얼굴이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 녀석, 아무리 이른 시간이라도 바깥인데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연화가 혀를 차며 질책했으나, 그 목소리는 그리 진지하지 않았다. 피식 웃은 적비성이 흰 손을 꽉 맞잡았다. 자신과 비슷한 힘으로 쥐어 오는 손아귀가 달갑다 못해 환희로웠다. 어찌 보면 가장 일상적인 아침이었으나, 동시에 가장 특별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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