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중국연예
- 중화연예
https://hygall.com/592631647
view 9848
2024.05.01 23:36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5부 11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헌성으로 출발하기도 전, 이연화는 지나치게 화려한 의복이나 묵직한 장신구들을 무심히 거부했다. "석류 치마를 입었을 때 그렇게 웃어 놓고는, 비슷한 꼴을 다시 보고 싶어?" 건성으로 핀잔을 주는 이연화에게, 방다병은 그럴 줄 알았다며 대체품들을 제시했다. 개중 이연화가 승낙한 것은 신랑의 예복과 별반 다를 것도 없으나 조금 더 길게 만들어진 옷과 혼례용 관, 그리고 머리에 쓰는 붉은 천이 전부였다. 방다병은 열심히 준비한 제안들이 대부분 거절당한 데에 조금 낙담했으나, 어차피 가장 중요한 것은 예식 그 자체였으므로 그 일을 별로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또한 공들여 치장하지 않았다 해도, 청년은 지금 충분히 멍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연화는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내리깔지 않았다. 남자는 단정하고 곧은 자세로 표표히 발을 옮겼다. 그 걸음은 당당하면서도 삼가는 듯했고, 영웅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을 뒤로 한 서생 같았다. 머리에 쓴 붉은 천이 너울거리며 뒤편으로 늘어졌다. 비영이 고쳐준 관은 이연화가 평소 애용하던 비녀와 닮은 모양이었는데, 그 이파리며 꽃송이가 사방으로 풍성하게 뻗쳐 있어 봄에 흐드러진 가지처럼 생생해 보였다. 붉은 혼례복과 머리를 덮은 천에는 단정한 연꽃 문양이 당연한 듯 수놓여 있었다. 귀걸이나 목걸이, 팔찌 따위가 없어 혼례 날의 신부라기엔 비교적 담백한 차림이었으나, 방다병은 입을 살짝 벌린 채 홀린 사람처럼 그 모습을 응시했다. 가슴이 정신없이 두근거렸다. 멋진 옷을 걸친 이연화라면 가끔 보아 왔지만, 오늘처럼 마음이 울렁거린 적은 없었다.
어째서일까? 방다병의 머리가 답을 찾아 질주했다. 단순히 외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대의 분위기가 평소와 사뭇 달랐다. 이연화는 누군가를 능청스럽게 속이려는 참도, 신분을 숨긴 채 사건을 조사하려는 참도 아니었다. 남자는 자신의 본모습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소탈히 드러내며, 그 여생을 짊어진 채 자발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사고문을 세웠던 이상이와, 십여 년 동안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던 이연화가 동시에 다가오는 듯했다. 상대의 존재감이 너무나 새삼스럽고도 거대하여, 방다병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연화가 정말로 이 관계에 삶을 던지려는 참이란 사실을 절감하자, 어쩐지 울컥한 기분이 들어 목구멍이 답답했다.
두 사람의 앞까지 다가온 이연화가 우뚝 멈추었다. 붉은 천 너머로 그 이목구비가 흐릿하게 보였다. 혼례에 쓰이는 붉은 천은 보통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꺼웠으나, 이연화가 누군가의 부축을 받기 싫다 일축한 탓에 그 두께는 퍽 얄팍해졌다. 넌 왜 숨을 안 쉬고 있어? 이연화가 전음을 건넸을 때, 방다병은 처음으로 호흡을 배운 사람처럼 공기를 들이마셨다. 등과 목,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주 홍옥처럼 익었구먼. 이리 보니까 또 한참 어린아이 같기도 한데." 방칙사가 하효혜에게 놀리듯 건넸다. 헛기침을 한 방다병이 이연화의 왼팔을 잡았다. 적비성이 그 오른팔을 잡자, 자연스레 세 사람이 나란히 선 모양새가 되었다.
본래대로라면 길고 복잡한 절차가 이어져야 했으나, 이연화의 차림새만큼이나 간소해진 혼례는 매우 단순하게 진행되었다. 세 사람은 형식을 갖추어 천지에 예를 올리고, 각 집안의 가족들에게도 정중한 인사와 감사를 표했다. 흐뭇한 미소와 함께 예식을 지켜보던 이들이 저마다 좋은 말을 건넸다.
"세 사람 모두 축하해요. 다소 묘하지만 어쨌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였으니, 비록 단출하다 해도 이 혼례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부디 고통은 함께 나누고, 적이 있다면 함께 맞서며, 하루하루를 서로에게 의지하여 즐거이 살아가길 기원해요."
"소보, 반려가 생기면 너도 더 이상 앞뒤 없는 천둥벌거숭이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배우자의 생각을 물어보고 의논한 다음 결정해야 해."
방칙사가 사려 깊게 건넨 말에, 방다병은 잠깐 삐죽였으나-나는 천둥벌거숭이처럼 군 적이 별로 없는데!-곧 맥빠진 미소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 명의 시종을 거느리고 으스대며 이연화를 만난 날이 떠오른 탓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힘주어 대답하는 방다병을 향해, 하효봉이 웃으며 손짓했다. "형부도 참. 소보가 그런 배짱을 어떻게 부려요? 혼인하기 전에도 못 그랬는데. 소보, 잘 살아. 적 맹주가 괴롭히면 꼭 나한테 와서 얘기해." 전운비가 헛기침과 함께 효봉의 손을 잡았다. "세 사람에게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도울 테니, 부디 삼가지 말고 찾아오시오." 방다병이 벙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세 분의 경사를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두 분의 안위 역시 제 목숨을 걸고 챙길 것이니, 부디 백년해로하시길 바랍니다."
무안이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고개를 끄덕하는 적비성의 옆에서,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통상 혼례에 자리한 음인은 입을 열지 않았으나, 이연화는 물론 그런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모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괜찮으니, 자네의 안위부터 잘 챙기게.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사람 하나만으로 어찌 맹을 유지하겠나."
"제, 제 유무가 어찌 맹의 존속에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그렇잖아도 하 당주께서 이미 많은 조언을 주신 터라, 앞으로 맹의 사정도 더욱 나아질 것입니다."
이연화가 적비성을 슬쩍 눈짓하며 건네자, 무안이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가 없다고 맹이 사라지지는 않겠으나, 네 존재가 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연화의 말대로, 네 안위에도 충분히 신경을 쓰도록 해라. 이상한 낌새가 보인다면 명예를 따지지 말고 피신해. 네가 전처럼 각려초에게 붙들리면 일이 훨씬 귀찮아진다." 적비성이 무심한 투로 말했다. 조금 붉어진 낯으로, 무안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탁자에 이마가 닿을 것처럼 몸을 굽혔다.
금파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기다린 끝에, 금파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시선이 이연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녀석. 찾아오는 것도 불쑥, 떠나는 것도 불쑥. 죽는 것도 불쑥이더니, 이젠 혼인도 불쑥이로구나. 네 사부가 살아있었다면, 아마...."
금파의 말이 흐려졌다. 잠시 감정이 치밀었는지, 여자는 시선을 슬쩍 틀며 마른침을 삼켰다. "사모님." 이연화가 얼른 그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반지도 팔찌도 없는 손으로, 이연화는 금파의 양손을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차분한 말이 흘러나왔다.
"어릴 적부터 천방지축이라, 사모님과 사부님의 심기를 많이 어지럽혔지요. 십 년 전의 저는 오만하여, 제 곁에 누군가를 나란히 세우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제 힘만으로 모든 역경을 꺾어버릴 수 있다 믿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제자는 괜찮을 테니, 부디 염려하지 마세요."
금파가 긴 한숨을 쉬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래. 내가 속세와 멀리 떨어져 살기는 한다만, 앞으로는 새를 이용해서라도 가끔 소식을 좀 전해라. 네가 음인이 되었다는 얘길 들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혼인한다는 서신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이연화가 머쓱한 미소를 띠었다. 반드시 그러겠다고 약속하며, 남자는 그 뒤로도 한동안 사모를 위로했다.
이후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다병과 적비성은 신부에게 주는 예물을 건넸다. 먼저 나선 방다병이, 어두운 목함에 든 머리장식을 건네주었다. 이연화가 쓴 관과 비슷한 만듦새의 비녀는, 관보다야 비교적 소박했으나 갓 피어난 꽃송이를 가지에 옮겨놓은 것처럼 생생하고 아름다웠다. 꽃술은 물론이고, 이파리와 꽃잎의 엷은 맥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이연화의 입가로 슬몃 미소가 번졌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비녀를 받은 이연화를 바라보며, 방다병이 잠시 헛기침을 했다. 약간 떨리는 손으로, 청년은 품을 뒤져 이연화에게 열쇠 하나를 내밀었다. 이연화가 의아하게 그 열쇠를 바라보았다. 속사정을 아는 하효혜만이 빙그레 미소했다.
"이연화, 이건...아직 다 완성되지는 않았어."
"이게 뭔데?"
열쇠를 받은 이연화가 이리저리 뒤집어보았다. 다시 헛기침을 한 방다병이 대답했다.
"네 예전 신분이 밝혀지면서, 너는 연화루를 잃게 됐잖아. 너무 유명해진 탓에, 그걸 끌고 돌아다니면 쉽게 표적이 될 테니까. 그래서...네가 오래도록 공들여 만든 보금자리를 다시 돌려주고 싶었어."
이연화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방다병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역시 사전에 상의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이미 준비한 일을 되돌릴 수야 없었다. 그 눈을 피하지 않으려 애쓰며, 방다병이 겨우 태연하게 이었다.
"천기산장 근처에 청허산이라는 곳이 있어. 그리 높고 장엄한 산은 아니지만, 풍경이 좋고 폭포가 아름다워. 그곳에 좋은 터를 찾아서, 작은 사가를 하나 지었어. 앞에 텃밭도 있고, 불여우가 살 집도 있지. 내부는 되도록 연화루를 참고해서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아직 확인은 못해 봤어."
이연화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 묵묵한 시선이 다시 열쇠를 향했다. 방다병은 어쩐지 초조해지는 기분에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너무 부담스럽게 만들었나? 완성되기도 전에 너무 성급히 알려준 걸까? 치밀 뻔한 후회를 억누르며, 방다병은 최대한 차분하면서도 성실한 투로 건넸다.
"그러니까, 나는...난 네가 편안히 돌아올 장소를 만들고 싶었어. 전에 했던 말처럼, 넌 앞으로도 여러 가지 사건들에 휘말리게 되겠지. 세상이 널 오해해서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네가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원할 때마다 텃밭을 가꾸고, 햇빛 아래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즐길 수 있다면, 어떤 근심이든 조금은 수그러지지 않겠어?"
이연화는 그 뒤로도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마음에 안 드나? 일단 돌려줘도 된다고 얘기해야 할까? 방다병이 위태롭게 안달하기 시작했을 즈음, 피식 웃은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부드럽고 낮은 나머지 혼잣말처럼 들리는 목소리였으나, 그 어조는 매우 진실했다. "내겐 그 마음이 이미 집이나 마찬가지야, 방소보." 방다병이 눈을 깜박였다. 상대가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이연화는 오른손으로 방다병의 손등을 가볍게 덮고는 이었다.
"세상에 너처럼 내가 평안하길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설령 내가 집 없이 떠돌더라도, 네 진심을 떠올리면 어떤 시름이든 옅어질 거야. 내겐 그 마음이 집과 다름없는데, 몸이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이겠어. 하지만 네 뜻은 잘 알겠어, 고마워."
고개를 끄덕하며 인사하고, 이연화는 그 열쇠를 소중히 품에 넣었다. 청년의 얼굴로 기쁜 함박웃음이 번지면서, 양쪽 뺨이 보기 좋게 상기되었다. 가슴 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꽃망울들이 일제히 터진 듯했다. 상대를 꽉 끌어안고픈 심정을 애써 누르고, 방다병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뒤이어 적비성이 불쑥 내민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이연화가 쓴웃음과 함께 그 칼을 받아들었다. 언뜻 보면 그 담백한 겉모습이 일반적인 검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으나, 칼집의 만듦새와 칼자루의 각인을 알아본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다병이 적비성의 팔을 탁 건드리며 물었다.
"잠깐, 저거 설마 강치용의 작품이야?"
"맞다."
적비성의 대꾸에, 방다병이 놀란 소리를 질렀다. 전운비 역시 커진 눈으로 물었다.
"강치용이라면, 신병곡에서 엄청난 명성을 떨쳤던 대장장이가 아니오? 하나뿐인 자식을 무인에게 잃은 이후로 검을 만들지 않고 더 이상 팔지도 않아, 그의 신병은 더 이상 아무도 얻을 수 없다고 들었는데. 천금을 준대도 되지 않을 일을 어찌 해냈습니까?"
"부탁했소."
적비성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방다병의 낯빛이 순간 파래졌다. 적비성의 '부탁'을 도무지 온건한 방향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고문과 협박 따위를 상상한 방다병이 얼른 수습하기 위해 부모님을 돌아보았을 때, 무안이 헛기침과 함께 끼어들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존상께서 정말 많이...오래 부탁하셨습니다."
"네가? 대체 뭐라고 했길래 강치용이 자기 검을 준 거야? 심지어 저건 강치용이 만든 작품들 중 가장 빼어나서, 몇 년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탐을 낸 보검이야. 정말 겁박한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런 적 없어. 겁박이 통할 자였다면 이미 다른 자에게 검을 넘겼겠지. 내가 쓸 검이 아니라고 했을 뿐이다."
적비성이 담백하게 말했다. 무안은 무슨 말을 덧붙이고픈 듯 입을 열었지만, 적비성의 시선에 이내 입을 다물었다. 검집을 살피던 이연화가 빠른 속도로 칼을 빼들었다. 곧은 칼날이 등불의 빛을 반사해 차분하게 번득였다. 문경보다는 소사에 가까운 모양새였으나, 그 색이 소사보다 한층 더 파르스름히 시려 보였다. 검날이 희뜩이며 몇 차례 허공을 가르자, 예리한 검풍에 휘말린 면사가 너울거렸다. 방다병이 헤벌린 입으로 검을 바라보았다. 소문처럼, 저것은 당대의 명검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법한 역작이었다. 검끝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이연화는, 이내 칼을 도로 넣고 적비성을 향했다.
"좋은 검이네. 고마워, 아비. 이름을 고민해 봐야겠는데."
"앞으로는 나뭇가지 따위에 의존하지 마라. 그리고 이건...네가 쓰겠다면 쓰고, 아니면 버려도 상관없다."
잠시 망설이다, 적비성은 품에 손을 넣어 작은 책자 하나를 꺼냈다. 이연화가 어리둥절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검푸른 빛깔의 표지에는 '원책'이라는 말만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속이 텅 빈 책을 넘기던 이연화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야?"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미간을 슬쩍 좁히고, 적비성은 마치 불평하는 사람처럼 짧게 내뱉었다.
"나는 방다병처럼 감언이설에 별 요령이 없다."
"내가 무슨 감언이설을 해? 난 그저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말하는 거야!"
방다병이 발끈해 반박했다. 그 말을 깨끗이 무시하고, 적비성은 이연화를 바라보며 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너와 다투거나 대립할 일도 조금 더 많을지 모르지. 만일 대화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네가 내게 정말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여기에 적어서 건네라. 그러면 네가 쓴 내용이 무엇이든, 내가 반드시 들어주겠다."
이연화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빈 책을 바라보았다. 방다병이 놀라 입을 벌렸다. 금원맹주는 함부로 말을 뱉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무엇이든'이란 말의 무게감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이연화가 상대를 놀리듯이 물었다. "대단한 말을 하네, 아비. 네 자존심에 생채기가 나는 일을 적으면 어쩌려고 그래?" 적비성은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금원맹주는 평소처럼 덤덤한 투로 대꾸했다.
"내 자존심은 내게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키운 것이다. 그걸 지키려다 너를 잃는다면 주객전도지."
이연화의 눈동자가 조금 더 커졌다. 빈 책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연화는 곧 낮은 웃음과 함께 적비성을 향했다.
"네가 준 검도 놀라웠지만, 나는 이 책이 더 놀랍네. 고마워, 아비. 남용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알고 있어. 방다병, 이연화의 필체를 흉내내 장난질을 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엄중한 경고에, 방다병이 억울한 얼굴로 빽 외쳤다. 모인 사람들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살짝 붉어진 낯빛을 빠르게 수습하고, 방다병은 큼직한 웃음을 띤 채 양손을 모아 쥐었다. 사전에 계획한 절차의 대부분이 마무리되었으니, 이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였다.
"자, 그럼 이제 모여주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술을 올리도록-."
"아, 잠깐 기다려."
이연화가 오른손을 들었다. 방다병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습관처럼 눈가를 만지려다, 이연화는 붉은 면사의 존재를 깨닫고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그게...나도 줄 게 있어서." 이연화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방다병의 눈동자가 커졌다.
"뭐? 너는 그런 거 준비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시일도 촉박했고, 네가 따로 모아둔 돈이 있던 것도 아닐 텐데."
방다병이 별다른 사심 없이 말했다. 함께 연화루에서 생활한 기간이 꽤 긴 만큼, 방다병은 이연화가 '정말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루하루 밥을 먹을 일도 염려할 만큼 쪼들리는 형편인데, 어떻게 좋은 패물이나 옷 따위를 준비하겠는가? 물론 사고문주의 지위를 휘두르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테지만, 이연화는 절대 사욕을 위해 영패를 내밀 사람이 아니었다. 방다병도 적비성도 이연화의 가난 따위는 안중에 없었으므로, 그들은 이연화에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라 거듭 이야기했다. 각인부터 혼례까지 다소 얼떨결에 이끌려온 사람이니, 도망치지 않고 자리만 지켜주어도 그저 감사할 노릇이었다.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기는 해. 그래서...음. 너희처럼 좋은 걸 준비하진 못했지만."
아무래도 민망한지, 이연화가 살짝 중얼거리듯이 맺었다. 방다병의 머릿속으로 뒤늦은 깨달음이 번졌다. 며칠 동안 아침에 나가 밤에 돌아온 일이, 설마 이 예물과 관련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대체 무슨 예물을 찾아다니느라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단 말인가? 잠시 어리벙벙해진 방다병의 귀로, 하효혜의 자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건의 값어치가 어찌 그 진심을 넘어설 수 있겠어요? 이 자리에 모인 누구도 그런 일로 흠을 잡지 않을 테니, 준비한 게 있다면 신랑들에게 주도록 해요."
하효혜를 잠시 돌아본 이연화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마지못해 발길을 돌려, 실내로 들어오는 문간 앞에서 잠시 허리를 숙였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두 개의 함을 든 이연화가 방다병과 적비성의 앞으로 돌아왔다. 하나는 작았고, 하나는 길쭉했다. 방다병의 가슴이 묘한 기대감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함 두 개를 발치에 내려놓고도 잠시 주저하다가, 이연화는 곧 체념의 한숨을 내쉬곤 개중 작은 것을 손에 들었다. 그 태도에 엷은 긴장이 배어 있었다.
"자, 아비. 이건 네 거야. 네가 준 것보다야 한참...여러모로 작지만."
적비성이 얼떨떨한 얼굴로 함을 받았다. 그 뚜껑이 열렸을 때, 적비성뿐 아니라 방다병도 고개를 빼고 그 안을 보았다. 검은 비단 위에 단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소박하고 단순한 모양새였으나, 칠흑색의 자루와 그에 대비되는 은백색 날이 튼튼하고 미끈하며 강건해 보였다. 헛기침과 함께 팔짱을 낀 채, 이연화가 태연하려 애쓴 투로 건넸다.
"내가 보기에, 아비. 너는 방다병보다 적이 많을 거야. 네 위치도 위치지만, 너는 남의 체면을 살려주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잖아. 정정당당한 의도를 가진 무공 고수든, 음험하고 졸렬한 소인배든, 다양한 자들이 너와 겨루거나 널 해치길 원할 테지."
적비성이 단도를 손에 쥐었다. 칼자루가 꽤 두툼하여, 적비성의 손아귀에 착 감기듯이 들어왔다. 이연화가 유심히 그 모양새를 살폈다. "음, 다행이네. 네 손에는 좀 작지 않을까 싶었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이연화는 뚫어져라 단도를 바라보는 적비성에게 차근차근 건넸다.
"너는 공격하는 방식도 무기도, 모두 크고 시원시원하지. 일격 하나하나가 곧고 맹렬해서, 웬만한 적은 그대로 날려버릴 수 있을 거야. 네가 얼마나 강한지는 내가 가장 잘 알아. 하지만...세상의 모든 공격이, 네가 잘 준비되어 있을 때 날아오진 않아. 네 대도에 비하면 품격이 떨어진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혹시 알아? 이런 소품이 결정적일 때 네 목숨을 구해줄지. 뭐, 적어도 난 그걸 바라면서 만들었어."
이연화가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인 내용을 놓치지 않고, 적비성과 방다병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네가 만들었다고?" 적비성이 놀라 물었다. 이연화는 또 눈가를 긁적이려다 실패하고는,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렇게 잘 만들진 못했을 거야." 두 남자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단도를 바라보았다. 뛰어난 장인의 솜씨라기엔 물론 무리가 있었으나, 그 만듦새에는 별다른 흠이 없었다. 목을 가다듬은 이연화가 말했다.
"난 원래 뭘 만드는 걸 좋아하거든. 그렇게 만든 걸 중요한 이들에게 선물하는 것도 좋아하고. 사고문주일 때에는 너무 바빠서 그럴 틈이 별로 없었어. 누구에게 한창 뭘 만들어준 건 더 어릴 때인데...그땐 별로, 음. 상대가 좋아하지 않았지."
이연화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방다병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선고도의 손에 의해 모조리 망가진 채, 상자 안에 봉인되어 있던 선물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같은 광경을 떠올렸는지, 이연화가 쓴웃음이 묻은 목소리로 농담처럼 건넸다. "원하지 않으면 쓰지 않아도 되니, 망가뜨리거나 버리진 말아줘." 방다병이 절박한 눈으로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니, 제발 잘 대답하라는 열망이 그 눈에서 이글거렸다. 그 시선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적비성은 물끄러미 단도를 바라보다가 그 물건을 품에 깊이 넣었다.
"이름을 지어줘야겠군."
적비성은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무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그토록 애용하던 대도조차 그저 칼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난생 처음 검명을 지어주겠다 말하는 꼴을 본 참이니 놀라울 법도 했다. 적비성의 말에, 잠깐 조용하던 이연화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고마워." 그 목소리는 작았으나, 분명한 안도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던 방다병을 향해, 이연화가 길쭉한 상자를 내밀었다. "자, 방소보." 이연화가 부드럽게 불렀다. 방다병이 얼른 함을 받아 열었다. 그 안에는 악기가 하나 들어 있었다. 옥색 피리였는데, 그 중간에 은으로 된 고리 형태의 세공이 들어가 있었다. 은가락지가 끼워진 듯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니, 연꽃 문양이 섬세한 솜씨로 새겨져 있었다. 피리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방다병의 눈으로 이채가 돌았다.
"이건...."
"네가 내 정체를 알았던 날, 슬퍼하면서 부러뜨렸던 거야."
이연화가 조용히 말했다. 이걸 줄곧 갖고 있었어? 방다병의 등이 확 달아올랐다. 친우를 잃었다는 사실에 좌절하여, 자신을 구하느라 피를 토했다가 깨어난 이연화를 향해 모진 말을 쏘아붙인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나 이연화의 목소리는 여전히 잔잔했다. "너무 크게 망가진 물건이라, 최대한 애써서 보수하고 장식을 만들어 달았지만 전과 똑같은 소리가 날 거라고 보장할 수는 없어. 그래도...가능하면 꼭 이걸 고쳐주고 싶었어." 방다병의 얼굴이 멍해졌다. 붉은 면사 너머로, 이연화가 슬쩍 찌푸린 듯한 미소를 엷게 지었다.
"너와 안 시간 동안, 내가 널 참 많이 속였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해도, 네게 몇 번이나 거짓말을 하고 상처를 줬어. 너는 항상 나를 과분할 만큼 진심으로 대했는데 말이야. 미안해, 방소보."
"이연화, 나한테 사과하지 않아도 돼. 그때 나는 네 사정을 몰라서, 그저 화가 나서 못나게 구느라 이걸 부러뜨린 거야. 그러니-."
"아니야."
얼른 고개를 가로젓는 방다병의 팔을, 이연화가 가볍게 잡았다. 방다병이 퍼뜩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연화가 나직이 말했다.
"이건 사과라기보단, 앞으론 그러지 않겠다는 약조야. 나는 너와 각인했고, 형식이라 해도 혼례로 맺어지는 참이지. 앞으로 사소한 일이라면 몰라도, 중대한 일에서는 너를 속이지 않을게. 다시 너만 남겨두고 떠나는 일은 없을 거야."
그 말투는 담담했으나, 그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입을 살짝 벌린 채 이연화를 바라보다, 방다병은 문득 황급히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갑작스레 목이 답답해지면서 눈가가 뜨거워진 탓이었다. 사람에 지쳐 진심을 좀처럼 내보이지 않고, 곤란해지면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반복하다가 슬쩍 모습을 감추던 사람이, 다소 서툴지언정 자신에게 미래를 약속하고 있었다. 마른침을 겨우 삼키고, 방다병은 살짝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또 나만 두고 가도, 어차피 내가 널 찾아낼 텐데."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많이 슬퍼하지 않겠어. 그럴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다는 뜻이야."
웃음기 묻은 소리로 말하고, 이연화는 고개를 살짝 틀어 적비성을 바라보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이연화는 방다병과 적비성의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슬쩍 덮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아직도...너희가 왜 나와 맺어지길 원하는지는 모르겠어. 나는 부유하지도 않고, 별로 성실하지도 못하고, 이런저런 문제를 잔뜩 끌어들이는 사람인데 말이야. 하지만 이미 너희에겐 내가 중요하고, 내겐 너희가 중요하지. 장차 너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물론 내 일처럼 함께 돌볼 것이고,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터놓고 의논하도록 애써 볼게. 너희 둘이 삶에서 멀어지는 나를 기어코 붙들었으니, 나도 그 정도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어."
이연화가 난처하면서도 다정한 투로 맺은 말에, 방다병은 참지 못하고 결국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상대가 정말 생으로 돌아왔을 뿐 아니라, 그 생을 자신과 함께 보내리라는 사실이 벅차도록 선명하게 다가왔다. 방다병이 피리 위에 떨어진 물방울을 황급히 닦아내는 동안, 이연화의 손이 그 눈가로 올라와 눈물을 훔쳤다. "이 녀석. 스승이 큰 마음 먹고 얘기하는데 왜 울어." 상대의 손끝에서 엷은 연꽃 냄새가 풍겼다. 방다병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 얼굴을 가린 천을 당장 열어젖힌 다음 입을 맞추고 싶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헌성으로 출발하기도 전, 이연화는 지나치게 화려한 의복이나 묵직한 장신구들을 무심히 거부했다. "석류 치마를 입었을 때 그렇게 웃어 놓고는, 비슷한 꼴을 다시 보고 싶어?" 건성으로 핀잔을 주는 이연화에게, 방다병은 그럴 줄 알았다며 대체품들을 제시했다. 개중 이연화가 승낙한 것은 신랑의 예복과 별반 다를 것도 없으나 조금 더 길게 만들어진 옷과 혼례용 관, 그리고 머리에 쓰는 붉은 천이 전부였다. 방다병은 열심히 준비한 제안들이 대부분 거절당한 데에 조금 낙담했으나, 어차피 가장 중요한 것은 예식 그 자체였으므로 그 일을 별로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또한 공들여 치장하지 않았다 해도, 청년은 지금 충분히 멍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연화는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내리깔지 않았다. 남자는 단정하고 곧은 자세로 표표히 발을 옮겼다. 그 걸음은 당당하면서도 삼가는 듯했고, 영웅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을 뒤로 한 서생 같았다. 머리에 쓴 붉은 천이 너울거리며 뒤편으로 늘어졌다. 비영이 고쳐준 관은 이연화가 평소 애용하던 비녀와 닮은 모양이었는데, 그 이파리며 꽃송이가 사방으로 풍성하게 뻗쳐 있어 봄에 흐드러진 가지처럼 생생해 보였다. 붉은 혼례복과 머리를 덮은 천에는 단정한 연꽃 문양이 당연한 듯 수놓여 있었다. 귀걸이나 목걸이, 팔찌 따위가 없어 혼례 날의 신부라기엔 비교적 담백한 차림이었으나, 방다병은 입을 살짝 벌린 채 홀린 사람처럼 그 모습을 응시했다. 가슴이 정신없이 두근거렸다. 멋진 옷을 걸친 이연화라면 가끔 보아 왔지만, 오늘처럼 마음이 울렁거린 적은 없었다.
어째서일까? 방다병의 머리가 답을 찾아 질주했다. 단순히 외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대의 분위기가 평소와 사뭇 달랐다. 이연화는 누군가를 능청스럽게 속이려는 참도, 신분을 숨긴 채 사건을 조사하려는 참도 아니었다. 남자는 자신의 본모습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소탈히 드러내며, 그 여생을 짊어진 채 자발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사고문을 세웠던 이상이와, 십여 년 동안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던 이연화가 동시에 다가오는 듯했다. 상대의 존재감이 너무나 새삼스럽고도 거대하여, 방다병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연화가 정말로 이 관계에 삶을 던지려는 참이란 사실을 절감하자, 어쩐지 울컥한 기분이 들어 목구멍이 답답했다.
두 사람의 앞까지 다가온 이연화가 우뚝 멈추었다. 붉은 천 너머로 그 이목구비가 흐릿하게 보였다. 혼례에 쓰이는 붉은 천은 보통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꺼웠으나, 이연화가 누군가의 부축을 받기 싫다 일축한 탓에 그 두께는 퍽 얄팍해졌다. 넌 왜 숨을 안 쉬고 있어? 이연화가 전음을 건넸을 때, 방다병은 처음으로 호흡을 배운 사람처럼 공기를 들이마셨다. 등과 목,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주 홍옥처럼 익었구먼. 이리 보니까 또 한참 어린아이 같기도 한데." 방칙사가 하효혜에게 놀리듯 건넸다. 헛기침을 한 방다병이 이연화의 왼팔을 잡았다. 적비성이 그 오른팔을 잡자, 자연스레 세 사람이 나란히 선 모양새가 되었다.
본래대로라면 길고 복잡한 절차가 이어져야 했으나, 이연화의 차림새만큼이나 간소해진 혼례는 매우 단순하게 진행되었다. 세 사람은 형식을 갖추어 천지에 예를 올리고, 각 집안의 가족들에게도 정중한 인사와 감사를 표했다. 흐뭇한 미소와 함께 예식을 지켜보던 이들이 저마다 좋은 말을 건넸다.
"세 사람 모두 축하해요. 다소 묘하지만 어쨌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였으니, 비록 단출하다 해도 이 혼례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부디 고통은 함께 나누고, 적이 있다면 함께 맞서며, 하루하루를 서로에게 의지하여 즐거이 살아가길 기원해요."
"소보, 반려가 생기면 너도 더 이상 앞뒤 없는 천둥벌거숭이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배우자의 생각을 물어보고 의논한 다음 결정해야 해."
방칙사가 사려 깊게 건넨 말에, 방다병은 잠깐 삐죽였으나-나는 천둥벌거숭이처럼 군 적이 별로 없는데!-곧 맥빠진 미소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 명의 시종을 거느리고 으스대며 이연화를 만난 날이 떠오른 탓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힘주어 대답하는 방다병을 향해, 하효봉이 웃으며 손짓했다. "형부도 참. 소보가 그런 배짱을 어떻게 부려요? 혼인하기 전에도 못 그랬는데. 소보, 잘 살아. 적 맹주가 괴롭히면 꼭 나한테 와서 얘기해." 전운비가 헛기침과 함께 효봉의 손을 잡았다. "세 사람에게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도울 테니, 부디 삼가지 말고 찾아오시오." 방다병이 벙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세 분의 경사를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두 분의 안위 역시 제 목숨을 걸고 챙길 것이니, 부디 백년해로하시길 바랍니다."
무안이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고개를 끄덕하는 적비성의 옆에서,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통상 혼례에 자리한 음인은 입을 열지 않았으나, 이연화는 물론 그런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모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괜찮으니, 자네의 안위부터 잘 챙기게.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사람 하나만으로 어찌 맹을 유지하겠나."
"제, 제 유무가 어찌 맹의 존속에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그렇잖아도 하 당주께서 이미 많은 조언을 주신 터라, 앞으로 맹의 사정도 더욱 나아질 것입니다."
이연화가 적비성을 슬쩍 눈짓하며 건네자, 무안이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가 없다고 맹이 사라지지는 않겠으나, 네 존재가 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연화의 말대로, 네 안위에도 충분히 신경을 쓰도록 해라. 이상한 낌새가 보인다면 명예를 따지지 말고 피신해. 네가 전처럼 각려초에게 붙들리면 일이 훨씬 귀찮아진다." 적비성이 무심한 투로 말했다. 조금 붉어진 낯으로, 무안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탁자에 이마가 닿을 것처럼 몸을 굽혔다.
금파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기다린 끝에, 금파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시선이 이연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녀석. 찾아오는 것도 불쑥, 떠나는 것도 불쑥. 죽는 것도 불쑥이더니, 이젠 혼인도 불쑥이로구나. 네 사부가 살아있었다면, 아마...."
금파의 말이 흐려졌다. 잠시 감정이 치밀었는지, 여자는 시선을 슬쩍 틀며 마른침을 삼켰다. "사모님." 이연화가 얼른 그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반지도 팔찌도 없는 손으로, 이연화는 금파의 양손을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차분한 말이 흘러나왔다.
"어릴 적부터 천방지축이라, 사모님과 사부님의 심기를 많이 어지럽혔지요. 십 년 전의 저는 오만하여, 제 곁에 누군가를 나란히 세우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제 힘만으로 모든 역경을 꺾어버릴 수 있다 믿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제자는 괜찮을 테니, 부디 염려하지 마세요."
금파가 긴 한숨을 쉬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래. 내가 속세와 멀리 떨어져 살기는 한다만, 앞으로는 새를 이용해서라도 가끔 소식을 좀 전해라. 네가 음인이 되었다는 얘길 들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혼인한다는 서신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이연화가 머쓱한 미소를 띠었다. 반드시 그러겠다고 약속하며, 남자는 그 뒤로도 한동안 사모를 위로했다.
이후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다병과 적비성은 신부에게 주는 예물을 건넸다. 먼저 나선 방다병이, 어두운 목함에 든 머리장식을 건네주었다. 이연화가 쓴 관과 비슷한 만듦새의 비녀는, 관보다야 비교적 소박했으나 갓 피어난 꽃송이를 가지에 옮겨놓은 것처럼 생생하고 아름다웠다. 꽃술은 물론이고, 이파리와 꽃잎의 엷은 맥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이연화의 입가로 슬몃 미소가 번졌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비녀를 받은 이연화를 바라보며, 방다병이 잠시 헛기침을 했다. 약간 떨리는 손으로, 청년은 품을 뒤져 이연화에게 열쇠 하나를 내밀었다. 이연화가 의아하게 그 열쇠를 바라보았다. 속사정을 아는 하효혜만이 빙그레 미소했다.
"이연화, 이건...아직 다 완성되지는 않았어."
"이게 뭔데?"
열쇠를 받은 이연화가 이리저리 뒤집어보았다. 다시 헛기침을 한 방다병이 대답했다.
"네 예전 신분이 밝혀지면서, 너는 연화루를 잃게 됐잖아. 너무 유명해진 탓에, 그걸 끌고 돌아다니면 쉽게 표적이 될 테니까. 그래서...네가 오래도록 공들여 만든 보금자리를 다시 돌려주고 싶었어."
이연화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방다병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역시 사전에 상의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이미 준비한 일을 되돌릴 수야 없었다. 그 눈을 피하지 않으려 애쓰며, 방다병이 겨우 태연하게 이었다.
"천기산장 근처에 청허산이라는 곳이 있어. 그리 높고 장엄한 산은 아니지만, 풍경이 좋고 폭포가 아름다워. 그곳에 좋은 터를 찾아서, 작은 사가를 하나 지었어. 앞에 텃밭도 있고, 불여우가 살 집도 있지. 내부는 되도록 연화루를 참고해서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아직 확인은 못해 봤어."
이연화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 묵묵한 시선이 다시 열쇠를 향했다. 방다병은 어쩐지 초조해지는 기분에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너무 부담스럽게 만들었나? 완성되기도 전에 너무 성급히 알려준 걸까? 치밀 뻔한 후회를 억누르며, 방다병은 최대한 차분하면서도 성실한 투로 건넸다.
"그러니까, 나는...난 네가 편안히 돌아올 장소를 만들고 싶었어. 전에 했던 말처럼, 넌 앞으로도 여러 가지 사건들에 휘말리게 되겠지. 세상이 널 오해해서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네가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원할 때마다 텃밭을 가꾸고, 햇빛 아래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즐길 수 있다면, 어떤 근심이든 조금은 수그러지지 않겠어?"
이연화는 그 뒤로도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마음에 안 드나? 일단 돌려줘도 된다고 얘기해야 할까? 방다병이 위태롭게 안달하기 시작했을 즈음, 피식 웃은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부드럽고 낮은 나머지 혼잣말처럼 들리는 목소리였으나, 그 어조는 매우 진실했다. "내겐 그 마음이 이미 집이나 마찬가지야, 방소보." 방다병이 눈을 깜박였다. 상대가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이연화는 오른손으로 방다병의 손등을 가볍게 덮고는 이었다.
"세상에 너처럼 내가 평안하길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설령 내가 집 없이 떠돌더라도, 네 진심을 떠올리면 어떤 시름이든 옅어질 거야. 내겐 그 마음이 집과 다름없는데, 몸이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이겠어. 하지만 네 뜻은 잘 알겠어, 고마워."
고개를 끄덕하며 인사하고, 이연화는 그 열쇠를 소중히 품에 넣었다. 청년의 얼굴로 기쁜 함박웃음이 번지면서, 양쪽 뺨이 보기 좋게 상기되었다. 가슴 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꽃망울들이 일제히 터진 듯했다. 상대를 꽉 끌어안고픈 심정을 애써 누르고, 방다병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뒤이어 적비성이 불쑥 내민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이연화가 쓴웃음과 함께 그 칼을 받아들었다. 언뜻 보면 그 담백한 겉모습이 일반적인 검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으나, 칼집의 만듦새와 칼자루의 각인을 알아본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다병이 적비성의 팔을 탁 건드리며 물었다.
"잠깐, 저거 설마 강치용의 작품이야?"
"맞다."
적비성의 대꾸에, 방다병이 놀란 소리를 질렀다. 전운비 역시 커진 눈으로 물었다.
"강치용이라면, 신병곡에서 엄청난 명성을 떨쳤던 대장장이가 아니오? 하나뿐인 자식을 무인에게 잃은 이후로 검을 만들지 않고 더 이상 팔지도 않아, 그의 신병은 더 이상 아무도 얻을 수 없다고 들었는데. 천금을 준대도 되지 않을 일을 어찌 해냈습니까?"
"부탁했소."
적비성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방다병의 낯빛이 순간 파래졌다. 적비성의 '부탁'을 도무지 온건한 방향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고문과 협박 따위를 상상한 방다병이 얼른 수습하기 위해 부모님을 돌아보았을 때, 무안이 헛기침과 함께 끼어들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존상께서 정말 많이...오래 부탁하셨습니다."
"네가? 대체 뭐라고 했길래 강치용이 자기 검을 준 거야? 심지어 저건 강치용이 만든 작품들 중 가장 빼어나서, 몇 년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탐을 낸 보검이야. 정말 겁박한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런 적 없어. 겁박이 통할 자였다면 이미 다른 자에게 검을 넘겼겠지. 내가 쓸 검이 아니라고 했을 뿐이다."
적비성이 담백하게 말했다. 무안은 무슨 말을 덧붙이고픈 듯 입을 열었지만, 적비성의 시선에 이내 입을 다물었다. 검집을 살피던 이연화가 빠른 속도로 칼을 빼들었다. 곧은 칼날이 등불의 빛을 반사해 차분하게 번득였다. 문경보다는 소사에 가까운 모양새였으나, 그 색이 소사보다 한층 더 파르스름히 시려 보였다. 검날이 희뜩이며 몇 차례 허공을 가르자, 예리한 검풍에 휘말린 면사가 너울거렸다. 방다병이 헤벌린 입으로 검을 바라보았다. 소문처럼, 저것은 당대의 명검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법한 역작이었다. 검끝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이연화는, 이내 칼을 도로 넣고 적비성을 향했다.
"좋은 검이네. 고마워, 아비. 이름을 고민해 봐야겠는데."
"앞으로는 나뭇가지 따위에 의존하지 마라. 그리고 이건...네가 쓰겠다면 쓰고, 아니면 버려도 상관없다."
잠시 망설이다, 적비성은 품에 손을 넣어 작은 책자 하나를 꺼냈다. 이연화가 어리둥절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검푸른 빛깔의 표지에는 '원책'이라는 말만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속이 텅 빈 책을 넘기던 이연화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야?"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미간을 슬쩍 좁히고, 적비성은 마치 불평하는 사람처럼 짧게 내뱉었다.
"나는 방다병처럼 감언이설에 별 요령이 없다."
"내가 무슨 감언이설을 해? 난 그저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말하는 거야!"
방다병이 발끈해 반박했다. 그 말을 깨끗이 무시하고, 적비성은 이연화를 바라보며 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너와 다투거나 대립할 일도 조금 더 많을지 모르지. 만일 대화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네가 내게 정말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여기에 적어서 건네라. 그러면 네가 쓴 내용이 무엇이든, 내가 반드시 들어주겠다."
이연화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빈 책을 바라보았다. 방다병이 놀라 입을 벌렸다. 금원맹주는 함부로 말을 뱉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무엇이든'이란 말의 무게감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이연화가 상대를 놀리듯이 물었다. "대단한 말을 하네, 아비. 네 자존심에 생채기가 나는 일을 적으면 어쩌려고 그래?" 적비성은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금원맹주는 평소처럼 덤덤한 투로 대꾸했다.
"내 자존심은 내게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키운 것이다. 그걸 지키려다 너를 잃는다면 주객전도지."
이연화의 눈동자가 조금 더 커졌다. 빈 책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연화는 곧 낮은 웃음과 함께 적비성을 향했다.
"네가 준 검도 놀라웠지만, 나는 이 책이 더 놀랍네. 고마워, 아비. 남용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알고 있어. 방다병, 이연화의 필체를 흉내내 장난질을 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엄중한 경고에, 방다병이 억울한 얼굴로 빽 외쳤다. 모인 사람들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살짝 붉어진 낯빛을 빠르게 수습하고, 방다병은 큼직한 웃음을 띤 채 양손을 모아 쥐었다. 사전에 계획한 절차의 대부분이 마무리되었으니, 이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였다.
"자, 그럼 이제 모여주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술을 올리도록-."
"아, 잠깐 기다려."
이연화가 오른손을 들었다. 방다병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습관처럼 눈가를 만지려다, 이연화는 붉은 면사의 존재를 깨닫고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그게...나도 줄 게 있어서." 이연화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방다병의 눈동자가 커졌다.
"뭐? 너는 그런 거 준비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시일도 촉박했고, 네가 따로 모아둔 돈이 있던 것도 아닐 텐데."
방다병이 별다른 사심 없이 말했다. 함께 연화루에서 생활한 기간이 꽤 긴 만큼, 방다병은 이연화가 '정말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루하루 밥을 먹을 일도 염려할 만큼 쪼들리는 형편인데, 어떻게 좋은 패물이나 옷 따위를 준비하겠는가? 물론 사고문주의 지위를 휘두르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테지만, 이연화는 절대 사욕을 위해 영패를 내밀 사람이 아니었다. 방다병도 적비성도 이연화의 가난 따위는 안중에 없었으므로, 그들은 이연화에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라 거듭 이야기했다. 각인부터 혼례까지 다소 얼떨결에 이끌려온 사람이니, 도망치지 않고 자리만 지켜주어도 그저 감사할 노릇이었다.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기는 해. 그래서...음. 너희처럼 좋은 걸 준비하진 못했지만."
아무래도 민망한지, 이연화가 살짝 중얼거리듯이 맺었다. 방다병의 머릿속으로 뒤늦은 깨달음이 번졌다. 며칠 동안 아침에 나가 밤에 돌아온 일이, 설마 이 예물과 관련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대체 무슨 예물을 찾아다니느라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단 말인가? 잠시 어리벙벙해진 방다병의 귀로, 하효혜의 자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건의 값어치가 어찌 그 진심을 넘어설 수 있겠어요? 이 자리에 모인 누구도 그런 일로 흠을 잡지 않을 테니, 준비한 게 있다면 신랑들에게 주도록 해요."
하효혜를 잠시 돌아본 이연화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마지못해 발길을 돌려, 실내로 들어오는 문간 앞에서 잠시 허리를 숙였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두 개의 함을 든 이연화가 방다병과 적비성의 앞으로 돌아왔다. 하나는 작았고, 하나는 길쭉했다. 방다병의 가슴이 묘한 기대감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함 두 개를 발치에 내려놓고도 잠시 주저하다가, 이연화는 곧 체념의 한숨을 내쉬곤 개중 작은 것을 손에 들었다. 그 태도에 엷은 긴장이 배어 있었다.
"자, 아비. 이건 네 거야. 네가 준 것보다야 한참...여러모로 작지만."
적비성이 얼떨떨한 얼굴로 함을 받았다. 그 뚜껑이 열렸을 때, 적비성뿐 아니라 방다병도 고개를 빼고 그 안을 보았다. 검은 비단 위에 단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소박하고 단순한 모양새였으나, 칠흑색의 자루와 그에 대비되는 은백색 날이 튼튼하고 미끈하며 강건해 보였다. 헛기침과 함께 팔짱을 낀 채, 이연화가 태연하려 애쓴 투로 건넸다.
"내가 보기에, 아비. 너는 방다병보다 적이 많을 거야. 네 위치도 위치지만, 너는 남의 체면을 살려주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잖아. 정정당당한 의도를 가진 무공 고수든, 음험하고 졸렬한 소인배든, 다양한 자들이 너와 겨루거나 널 해치길 원할 테지."
적비성이 단도를 손에 쥐었다. 칼자루가 꽤 두툼하여, 적비성의 손아귀에 착 감기듯이 들어왔다. 이연화가 유심히 그 모양새를 살폈다. "음, 다행이네. 네 손에는 좀 작지 않을까 싶었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이연화는 뚫어져라 단도를 바라보는 적비성에게 차근차근 건넸다.
"너는 공격하는 방식도 무기도, 모두 크고 시원시원하지. 일격 하나하나가 곧고 맹렬해서, 웬만한 적은 그대로 날려버릴 수 있을 거야. 네가 얼마나 강한지는 내가 가장 잘 알아. 하지만...세상의 모든 공격이, 네가 잘 준비되어 있을 때 날아오진 않아. 네 대도에 비하면 품격이 떨어진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혹시 알아? 이런 소품이 결정적일 때 네 목숨을 구해줄지. 뭐, 적어도 난 그걸 바라면서 만들었어."
이연화가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인 내용을 놓치지 않고, 적비성과 방다병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네가 만들었다고?" 적비성이 놀라 물었다. 이연화는 또 눈가를 긁적이려다 실패하고는,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렇게 잘 만들진 못했을 거야." 두 남자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단도를 바라보았다. 뛰어난 장인의 솜씨라기엔 물론 무리가 있었으나, 그 만듦새에는 별다른 흠이 없었다. 목을 가다듬은 이연화가 말했다.
"난 원래 뭘 만드는 걸 좋아하거든. 그렇게 만든 걸 중요한 이들에게 선물하는 것도 좋아하고. 사고문주일 때에는 너무 바빠서 그럴 틈이 별로 없었어. 누구에게 한창 뭘 만들어준 건 더 어릴 때인데...그땐 별로, 음. 상대가 좋아하지 않았지."
이연화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방다병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선고도의 손에 의해 모조리 망가진 채, 상자 안에 봉인되어 있던 선물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같은 광경을 떠올렸는지, 이연화가 쓴웃음이 묻은 목소리로 농담처럼 건넸다. "원하지 않으면 쓰지 않아도 되니, 망가뜨리거나 버리진 말아줘." 방다병이 절박한 눈으로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니, 제발 잘 대답하라는 열망이 그 눈에서 이글거렸다. 그 시선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적비성은 물끄러미 단도를 바라보다가 그 물건을 품에 깊이 넣었다.
"이름을 지어줘야겠군."
적비성은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무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그토록 애용하던 대도조차 그저 칼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난생 처음 검명을 지어주겠다 말하는 꼴을 본 참이니 놀라울 법도 했다. 적비성의 말에, 잠깐 조용하던 이연화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고마워." 그 목소리는 작았으나, 분명한 안도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던 방다병을 향해, 이연화가 길쭉한 상자를 내밀었다. "자, 방소보." 이연화가 부드럽게 불렀다. 방다병이 얼른 함을 받아 열었다. 그 안에는 악기가 하나 들어 있었다. 옥색 피리였는데, 그 중간에 은으로 된 고리 형태의 세공이 들어가 있었다. 은가락지가 끼워진 듯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니, 연꽃 문양이 섬세한 솜씨로 새겨져 있었다. 피리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방다병의 눈으로 이채가 돌았다.
"이건...."
"네가 내 정체를 알았던 날, 슬퍼하면서 부러뜨렸던 거야."
이연화가 조용히 말했다. 이걸 줄곧 갖고 있었어? 방다병의 등이 확 달아올랐다. 친우를 잃었다는 사실에 좌절하여, 자신을 구하느라 피를 토했다가 깨어난 이연화를 향해 모진 말을 쏘아붙인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나 이연화의 목소리는 여전히 잔잔했다. "너무 크게 망가진 물건이라, 최대한 애써서 보수하고 장식을 만들어 달았지만 전과 똑같은 소리가 날 거라고 보장할 수는 없어. 그래도...가능하면 꼭 이걸 고쳐주고 싶었어." 방다병의 얼굴이 멍해졌다. 붉은 면사 너머로, 이연화가 슬쩍 찌푸린 듯한 미소를 엷게 지었다.
"너와 안 시간 동안, 내가 널 참 많이 속였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해도, 네게 몇 번이나 거짓말을 하고 상처를 줬어. 너는 항상 나를 과분할 만큼 진심으로 대했는데 말이야. 미안해, 방소보."
"이연화, 나한테 사과하지 않아도 돼. 그때 나는 네 사정을 몰라서, 그저 화가 나서 못나게 구느라 이걸 부러뜨린 거야. 그러니-."
"아니야."
얼른 고개를 가로젓는 방다병의 팔을, 이연화가 가볍게 잡았다. 방다병이 퍼뜩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연화가 나직이 말했다.
"이건 사과라기보단, 앞으론 그러지 않겠다는 약조야. 나는 너와 각인했고, 형식이라 해도 혼례로 맺어지는 참이지. 앞으로 사소한 일이라면 몰라도, 중대한 일에서는 너를 속이지 않을게. 다시 너만 남겨두고 떠나는 일은 없을 거야."
그 말투는 담담했으나, 그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입을 살짝 벌린 채 이연화를 바라보다, 방다병은 문득 황급히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갑작스레 목이 답답해지면서 눈가가 뜨거워진 탓이었다. 사람에 지쳐 진심을 좀처럼 내보이지 않고, 곤란해지면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반복하다가 슬쩍 모습을 감추던 사람이, 다소 서툴지언정 자신에게 미래를 약속하고 있었다. 마른침을 겨우 삼키고, 방다병은 살짝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또 나만 두고 가도, 어차피 내가 널 찾아낼 텐데."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많이 슬퍼하지 않겠어. 그럴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다는 뜻이야."
웃음기 묻은 소리로 말하고, 이연화는 고개를 살짝 틀어 적비성을 바라보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이연화는 방다병과 적비성의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슬쩍 덮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아직도...너희가 왜 나와 맺어지길 원하는지는 모르겠어. 나는 부유하지도 않고, 별로 성실하지도 못하고, 이런저런 문제를 잔뜩 끌어들이는 사람인데 말이야. 하지만 이미 너희에겐 내가 중요하고, 내겐 너희가 중요하지. 장차 너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물론 내 일처럼 함께 돌볼 것이고,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터놓고 의논하도록 애써 볼게. 너희 둘이 삶에서 멀어지는 나를 기어코 붙들었으니, 나도 그 정도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어."
이연화가 난처하면서도 다정한 투로 맺은 말에, 방다병은 참지 못하고 결국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상대가 정말 생으로 돌아왔을 뿐 아니라, 그 생을 자신과 함께 보내리라는 사실이 벅차도록 선명하게 다가왔다. 방다병이 피리 위에 떨어진 물방울을 황급히 닦아내는 동안, 이연화의 손이 그 눈가로 올라와 눈물을 훔쳤다. "이 녀석. 스승이 큰 마음 먹고 얘기하는데 왜 울어." 상대의 손끝에서 엷은 연꽃 냄새가 풍겼다. 방다병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 얼굴을 가린 천을 당장 열어젖힌 다음 입을 맞추고 싶었다.
https://hygall.com/592631647
[Code: f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