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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7 23:16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5부 10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아무래도 수상하지 않아?"
방다병이 심각한 얼굴로 건넨 말에, 적비성은 눈썹을 꿈틀했으나 별달리 반박하지는 않았다.
취화탕 일이 해결된 이후 며칠 동안, 이연화는 아침 일찍 어딘가로 사라져 늦은 시간에나 돌아왔다. 방다병이 그 주변을 뱅뱅 맴돌면서 답을 캐내려 했으나, 이연화는 왜 그렇게 각인 상대를 못 믿느냐며 오히려 방다병을 질책했다. 과거의 이런저런 예를 들어 너를 어떻게 전적으로 신뢰하느냐고 몰아세울 수도 있었지만, 방다병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나마 입을 꾹 다물었다. 이연화의 분위기가 워낙 강경해 보인 탓도 있었고, 밤마다 꼬박꼬박 귀환하는 몸에 여태껏 별다른 부상이 보이지 않은 탓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멀쩡했는데, 어제는 손에 데인 상처가 있더라니까."
방다병이 한껏 낮춘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자신의 손을 가리켰다. 혼례를 치를 공간을 아홉 번째로 점검하고 돌아왔을 때, 방다병은 먼저 누워 자고 있던 이연화를 발견했다. 그 모습을 응시하다, 청년은 이연화의 손가락에 감긴 천을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게 뭐야? 손을 잡아 천을 살살 들춰보니, 그 아래에는 분명 화상으로 보이는 자국이 작게 남아 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그 상처에 대해 묻는 방다병에게, 이연화는 졸린 눈으로 차를 마시며 무심히 대꾸했다.
"아. 시장에서 만두를 먹다 데었어."
"만두...이연화, 거짓말도 좀 성의 있게 해. 무슨 만두가 그런 화상을 남겨?"
"정말이야, 너 만두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막 쪄진 만두를 젓가락으로 찌르다가 육즙이 튀었지 뭐야."
이연화가 손을 흔들며 능청스럽게 읊었다. 아무래도 사실대로 이야기할 것 같지 않아, 방다병은 눈썹을 이상한 모양으로 찌푸리고는 뚱하게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작은 한숨을 쉰 이연화가 방다병을 달래듯이 건넸다.
"방소보. 위험한 일이 아니고, 혼례 준비의 일환이라고 했잖아. 어차피 때가 되면 알게 될 텐데 뭘 그렇게 안달해."
"위험한 일이 아니고, 혼례 준비의 일환인데 왜 비밀로 해야 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굳이 말하자면...음, 그래. 다 익히지 못한 초식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시연하려면 무안하잖아."
이연화는 퍽 좋은 설명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방다병의 표정은 더욱 괴상해졌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 속내가 그대로 드러났는지, 이연화가 에이 소리를 내며 한 손을 내저었다. "그냥, 사실대로 알려주기엔 내가 좀 머쓱하다는 뜻이야. 네 스승의 존엄을 조금쯤은 지켜주지 않겠어?" 대체 이 비밀이 이연화의 존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나, 눈가를 슬쩍 만지는 모양새가 정말 난처해 보였으므로 방다병은 결국 말을 아꼈다. 그렇다 해도 치미는 궁금증까지 없애버리긴 어려워, 청년은 이 문제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붙들고 하소연하게 되었다.
"너는 정말 아는 게 없어? 뒤를 밟아 봤다거나."
"무안에게 시켜본 적은 있지만, 중간에 놓쳤다더군."
적비성이 대수롭잖게 말하며 찻잔을 채웠다. 그 앞에는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종류의 음식들이 여러 접시에 올라 있었다. 이른 시간부터 한 자리에 모여, 두 남자는 혼례 당일에 참석할 사람들을 위한 음식을 최종적으로 선별한 참이었다.
사실 두 명이 자리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결정한 사람은 방다병이었다. 적비성은 물론 맛있는 음식을 좋아했으나 입맛이 까다롭지는 않았다. 워낙 배를 굶주리며 산 기간이 길어서인지, 금원맹주는 이연화의 실패작 수준이 아닌 이상 웬만한 음식을 불평 없이 잘 먹었다. 또한 그의 관심사는 이연화와 맺어진다는 사실 자체였지 혼례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적비성은 모두 괜찮으니 적당히 골라 먹이자는 의견을 별다른 악의도 없이 내놓았다. 불꽃을 토할 기세로-"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야?"-음식 하나하나를 깐깐히 따지던 방다병은, 과일의 종류까지 세심히 택하고 나서야 이연화에 대한 화제를 꺼낸 참이었다. 방다병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그 뒤로는 사람을 안 보냈어?"
"무안을 통해서 말을 전했더군. 한 번 더 걸리면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그런 일을 감수할 가치는 없을 듯하니,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디로 도망칠 생각만 아니라면 상관없어."
산뜻하게 말한 적비성이 과일 한 조각을 우물거렸다. 결국 또 끝까지 걱정하는 사람은 나지. 입을 삐죽이는 방다병을 향해, 적비성이 턱짓했다. "이연화가 쓸 관이 망가졌다고 울상이더니, 그건 해결된 거냐?" 방다병이 푹 한숨을 쉬었다. 그 일을 떠올리면 마음 한편이 어두워졌다. 혼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이연화는 신경도 쓰지 않을 관이 뭐 그리 중요하겠느냐 스스로에게 말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축소되다 못해 단출해진 혼례인 만큼, 챙길 수 있는 부분만큼은 완벽히 준비하고 싶었다. 고민하던 방다병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거 말인데...영 방도가 보이지 않아서, 비영에게 말해보려고 해."
"그 여자에게?"
"응. 험한 사건을 막 겪은 사람에게 부탁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지만...전에 비영의 집에 갔을 때, 옆에 작업장이 붙어 있었잖아? 그때 비영의 작업물들을 잠깐 봤는데, 스쳐보긴 했지만 솜씨가 정말 좋더라고. 어머니가 의뢰했던 도안이 있으니, 혹시 날짜에 맞춰 관을 고쳐줄 수 있을지 물어볼까 해."
"괜찮은 생각이군. 우리에게 신세를 진 것도 있으니, 비밀을 지키라 요구하면 순순히 따를 테지."
"꼭 그런 이유에서 비영을 떠올린 건 아니야. 넌 주변 사람들을 너무 수단적으로 볼 때가 있다니까."
타박하듯이 건네며, 방다병도 과일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씹었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너처럼 그럴듯한 명분에 얽매이는 것보단 훨씬 효율적이라고 본다만." "이건 명분이 아니라 도의라고 하는 거야." 턱을 내밀며 흥 소리를 낸 방다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비영에게 다녀올 테니, 너는 그 동안 하객들이 묵을 방을 좀 봐줘. 여기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있으니까 참고하도록 해."
그렇게 말하면서 두루마리를 건네주자, 적비성은 만 개의 쌀알을 하나하나 젓가락으로 옮기라는 지시를 받은 사람처럼 미간을 구긴 채 그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상대가 험한 말을 쏘아붙이기 전에, 방다병은 얄미운 미소를 짓고는 발길을 돌렸다. 물론 적비성에게 맡긴다 한들 결국 자신의 손길이 필요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방다병은 금원맹주가 설령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혼례 준비에 심력을 쏟아붓길 원했다.
비영의 작업장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비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매대에 상품이 진열되어 있어, 가게를 닫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잠시 기웃거리던 방다병이 큰 소리를 냈다. "안에 계십니까? 천기당의 육 공자입니다." 가명으로 사용하던 성씨를 대자, 곧 저편의 문에서 퉁탕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안쪽에 또 다른 작업 공간이 있는 걸까? 그편으로 다가가려 발을 내디뎠을 때, 닫혔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조금 상기된 낯의 비영이 나타났다.
"아, 대협. 죄송합니다. 제가 안에서, 잠깐 뭘 하던 참이라."
비영이 허둥거리며 등 뒤의 문을 닫았다. 방다병이 의아한 눈을 깜박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왜 그리-."
"아아, 아닙니다. 별일은 아닙니다만, 약조한 것이 있어서요. 무슨 일이십니까?"
비영이 고개를 붕붕 가로젓고는 물었다. 잠깐 고개를 갸웃했지만, 방다병은 속사정을 더 캐묻지 않고 자신이 온 용건을 전했다. 망가진 관을 이편으로 가져오는 참인데, 혹시 시일에 맞추어 보수해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비영은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곧 처음 보는 종류의 표정을 짓고는 가만히 도안을 살폈다. 그 눈빛이 마치 칼을 빼기 전의 검객처럼 진지했다. 장고 끝에, 비영이 모호한 미소를 띠고는 방다병을 바라보았다.
"굉장한 물건이로군요. 모양은 단아하나 그 재료와 정성이 실로 놀랍습니다. 헌데...이런 물건을 정말 제게 맡기셔도 되겠습니까? 분명 이름 있는 장인이 만드셨을 터인데, 제 손길이 닿았다는 사실로 그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름 있는 사람이 만들든, 재야의 고수가 만들든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장인이 가진 명성의 높고 낮음은, 그 손끝이 자아낸 물건과 진심에 흠을 내지 못합니다. 못 하신다는 말이 없으니, 가능한가 보군요."
방다병이 활짝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비영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조금 더 분명한 미소를 띠었다. "가능은 합니다. 두어 날을 새긴 해야겠지만, 그 정도야 대협이 해주신 일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지요." 방다병의 눈이 혜성처럼 반짝였다. 하도 기쁜 나머지, 청년은 양손을 몸 앞에서 모으고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를 두고 여러 날을 고민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이러지 마십시오. 해주신 일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귀한 물건을 다룰 수 있게 해주시니 제가 감사할 일이지요."
비영이 얼른 방다병의 팔을 잡아 허리를 펴도록 했다. 살짝 상기된 얼굴로 비영을 바라보며, 방다병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일신상의 사정이 있어, 가능하면 제가 이런 의뢰를 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쳤으면 합니다." 그 말에, 비영의 눈이 둥그레졌다. 무언가를 짐작한 듯, 여자는 문 안을 슬쩍 돌아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그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물건이 도착하는 대로 다시 오겠습니다."
재차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방다병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몸을 돌리다 깜짝 놀라 멈추었다. 한 번 만났다고 그새 마음의 경계를 많이 풀었는지, 아경이 빤한 눈으로 방다병을 올려다보던 참이었다. "아경." 비영이 반갑게 부르자, 아경이 쪼르르 달려갔다. 그 눈길이 조금 전 닫힌 문을 향해 있었다. "들어갈래." 아경의 말에, 비영이 당황한 얼굴로 아이와 방다병을 번갈아 보았다.
"나중에 들어가게 해 줄게. 지금은 안 돼."
"놀고 싶은데...."
아경이 조그맣게 불평했다. 방다병이 웃으며 허리를 숙여 건넸다.
"꼬마야, 저 안에는 위험한 도구도 많아서 네가 막 들어가면 안 돼. 함부로 놀다가는 다칠지도 몰라."
"그렇게 노는 거 아닌데....옛날 얘기 듣고 싶어."
비영의 손을 꼭 잡은 아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이에게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나 봅니다." 방다병이 건넨 말에, 비영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아경이 멀뚱멀뚱한 눈으로 비영과 방다병을 보다 말했다.
"아니야, 옛날 얘기 다른 사람이야."
"오? 달리 놀아주는 사람이 있나 보네. 수아 낭자야?"
"으응, 아니야."
고개를 가로젓는 꼬마의 옆에서, 비영은 어쩐지 쩔쩔매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생겼어." 아경이 자신의 머리와 몸 주변을 수줍게 손짓하며 설명했다. 누군가의 인영을 어설피 그리는 귀여운 모습에, 방다병이 피식 웃었다. 그 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아마 머리칼도 옷도 긴 사람인 모양이었다. 상대가 그저 웃기만 하자 알아듣지 못한다 생각했는지, 아경이 방다병을 손가락질하며 열심히 설명하려 들었다.
"전에 같이-."
"아아, 아경! 나랑 같이 당과 사러 가자."
아이의 말을 끊고, 비영이 휙 아경의 몸을 들어 어깨에 얹어놓았다. 아경이 웃음을 터뜨리며 비영의 머리칼을 잡았다. "그럼, 대협. 나중에 뵙겠습니다!" 급히 말한 비영이 휭하니 자리를 떴다. 방다병은 어리벙벙한 채 그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갸우뚱하며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겉으로는 평화로웠으나, 속으로는 바쁘다 못해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혼례 날이 다가올수록 방다병은 거의 편집증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꼼꼼하고 완벽하게 확인하고자 했으며, 적비성은 그런 방다병과 툭하면 별것 아닌 일로 말싸움을 하거나 합을 주고받았다. 이연화는 여전히 낮에 사라졌다가 밤에 나타났는데, 가끔은 귀가가 늦어져 새벽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 팔을 붙들고 대체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느냐 다그치고 싶었으나, 방다병은 허벅지를 꼬집으며 가까스로 그 마음을 억눌렀다.
"일주일만 미룰까?"
혼례가 치러지기 불과 사흘 전, 방다병은 핏발이 선 눈으로 탁자에 엎어진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일주일 전부터 들었던 적비성이 메마른 코웃음을 쳤다. 방다병이 입술을 내밀고는 뚱하게 그편을 향했다.
"이젠 대꾸하지도 않네."
"네 가족들과 금파가 오늘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데, 뭘 어떻게 미룬단 말이냐. 이미 일정에 맞추어 이곳의 일꾼들도 최소화했다."
적비성이 성의 없이 대꾸했다. 그야 그렇지. 방다병이 소리없는 한숨을 쉬며 탁자에 이마를 쿵 댔다. 이곳에서 천기당 소당주의 혼례를 치른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알릴 수야 없었기에, 하효혜는 당주의 직인을 찍어 객잔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서신을 보냈다. 천기당주와 그 가족들이 곧 이곳에서 단출하면서도 사적인 시간을 보낼 예정이니, 숙수를 비롯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휴가를 떠나라는 내용이었다. 방다병이 양손으로 뺨을 감싼 채 발작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주문했던 식재료들 중에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 그리고 이연화가, 구름의 모양새를 보더니 그날 비가 올 확률이 높다지 뭐야. 비가 오는 날에 혼인하는 것보다는 맑은 날이 낫잖아? 또, 또 실내를 장식하려고 산 등도 마음에 안 들어. 내가 주문한 거랑 윗부분이 조금 다르단 말이야. 동그란 걸 원했는데, 받아보니 살짝 각이 져 있지 않겠어? 손님들에게 주려고 산 술도-."
"시끄럽다. 네 불평을 들어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게 많으면 넌 빠져라. 나만 혼인할 테니."
적비성이 혀를 차며 쏘아붙인 말에, 방다병이 핏발 선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이 혼례에 내가 얼마나 많이 기여했는데."
"그럼 입 다물고, 사흘 뒤에 잠자코 예복이나 입어. 네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매일같이 들었더니, 어젯밤엔 네놈이 꿈에서까지 끝없이 떠들었다. 하도 시끄러워서, 참지 못하고 칼로 베어 죽였지."
"뭐? 엄청 흉한 악몽이잖아!"
"별로 악몽은 아니었다만."
팔짱을 낀 적비성이 이죽거렸다. 방다병이 뭐라 대꾸하기 전에, 방문이 열렸다. 잔뜩 피로한 얼굴의 이연화가 방으로 들어서며 어깨를 두드렸다. 의심스럽게 가늘어진 눈으로 이연화를 바라보면서, 방다병이 댓발쯤 튀어나온 입으로 툭 던졌다.
"사흘 뒤가 혼인인데, 오늘까지 대체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야?"
또 만두를 먹다 데었다는 종류의 헛소리를 돌려주리라 예상한 것과 달리, 이연화는 입맛을 작게 다시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방다병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따르는 낯빛이 묘하게 어두웠다. 퍽 곤란한 일이 생긴 듯한 태도에, 방다병이 흐느적거리던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 표정이 짙은 투정에서 걱정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연화,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무슨 일이라기보단...."
이연화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적비성까지 미간을 좁히고는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기세를 본 이연화가 얼른 한 손을 내저었다. "별일 없어, 별일 아니야. 그냥...." 이연화가 다시 입맛을 다시며 눈가를 만졌다. 두 쌍의 시선이 그 얼굴이 빤히 꽂혔다. 쓴 약을 억지로 입에 담은 듯 꺼림칙한 표정을 지은 채 침묵하다가, 이연화는 곧 깊은 한숨과 함께 툭 말했다.
"나중에 비웃으면 안 돼."
"비웃다니, 뭘?"
"그런 게 있어."
건성으로 대꾸한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다병이 눈을 껌벅였다. 며칠이나 혹사당한 눈동자가 드디어 제 역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면, 이연화의 뺨이 아주 은은하게 붉어져 있었다. "난 이만 자야겠다. 너도 쉬어, 방소보. 자칫하다간 예복을 입기도 전에 기절하겠다." 한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 이연화는 방다병이 더 물을 틈도 없이 침상에 풀썩 누워버렸다. 방다병은 적비성과 의혹에 찬 시선을 교환했으나, 차마 눈을 감은 이연화를 흔들어 그 말뜻을 추궁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사흘 후, 하늘은 흐렸으나 다행히도 장대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잔잔한 보슬비가 오히려 풍경에 운치를 더해주는 듯도 했다.
하효혜가 도착했을 때부터 대폭 안정된 방다병은-하효혜는 끝없이 계속되는 방다병의 불안과 집착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다가, 적비성의 평에 따르면 '미친 짐승을 다루는 백수원 사육사와 같은 솜씨'로 방다병을 진정시켰다-당연하게도 길일 전날부터 잠을 설쳤지만, 피로감을 아득히 뛰어넘는 흥분과 기대감에 휩싸인 채 붉은 예복을 걸쳤다. 머리가 붕 떴고 입안이 말랐으며, 심장이 정신없이 쿵쿵거렸다. 목구멍이 조금 메인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른손으로 가슴을 꾹 누른 채, 방다병이 옆을 돌아보았다.
적비성이 걸친 옷은 자신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똑같이 금실로 치장된 붉은 혼례복이었으나, 그 예복에는 조금 더 둔중한 질감의 천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또한 방다병의 옷에는 동글동글한 구름 문양이 배열되어 활달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을 주었고, 적비성의 옷에는 보다 각지고 고풍스러운 문양이 배치되어 묵직한 느낌을 풍겼다. 적비성의 얼굴은 여느 때와 별다를 것도 없이 무뚝뚝하고 평온했다. 방다병은 상대가 퍽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그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어떻게 이리 멀쩡하지? 방다병이 조금 억울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혼인하기 직전인데, 얼굴만 보면 무슨 식사하러 가는 것 같네."
상대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방다병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자신을 비웃기 위해서라면 코웃음을 치거나 무언가 미운 말을 지껄였을 텐데, 조금 기다려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그 상태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모양새였다. "아비?" 방다병이 그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눈앞에서 손을 흔들자, 움찔한 적비성이 방다병을 돌아보았다.
"뭐냐?"
"내 말 안 들렸어?"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표정을 살피던 방다병이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천하의 금원맹주도 혼인을 앞두고 긴장하긴 하는구나."
"너보단 낫지. 심장 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적비성이 핀잔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미간은 불쾌한 듯 찌푸려져 있었으나, 그 태도에 별다른 독기는 없었다. 피식 웃어버리고, 방다병은 적비성과 함께 아침부터 강박적으로 점검한 장소를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객잔 전체를 붉은 천으로 두르고 아름다운 등을 걸어두고 싶었으나, 되도록 드러나지 않는 소박함을 유지해야 했기에 방다병의 욕심은 작은 구역에 한정되었다. 죽매탕 근처의 숙소에는, 손님들이 고즈넉한 정취를 즐기며 식사하고 차를 나누기에 알맞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양옆의 문을 열어두면 한편으로는 청명한 대나무숲이, 다른 한편으로는 맑은 호수와 그에 비친 밤하늘이 보였다. 달이 뜨지 않아 아쉬웠으나, 가느다란 빗줄기가 대나무와 수면을 만나 부드럽고 편안한 소리를 냈다.
실내에는 이미 정갈한 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귀한 객들을 위해 숙수가 최선을 다해 마련한 음식이었다(그는 자신의 음식이 혼례에 쓰이리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터였다). 방다병이 날카롭고도 강박적인 눈으로 반상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동안, 적비성은 대놓고 눈을 굴리며 한숨을 쉬었다.
"소보, 손님을 맞아야 할 녀석이 어찌 강아지처럼 그러고 있느냐?"
방칙사의 타박 아닌 타박이 들려오자, 방다병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안으로 드는 부모님을 발견한 얼굴이 확 밝아졌다. 방칙사는 조금 마음이 복잡해 보였으나, 그래도 웃는 낯으로 방다병을 훑어보았다. "이 녀석, 영 어설퍼서 시종 없이 예복이나 제대로 갖출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잘 입었구나. 꽤 번듯한걸." 방다병이 해해거리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팔을 끌었다.
"그럼요, 얼마나 고심해서 주문한 옷인데요."
"이제 걱정 좀 그만하고, 오늘은 그저 기뻐하기만 해라. 적 맹주, 축하해요."
하효혜가 웃으며 건넸다. 적비성은 환한 미소 따위를 돌려주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양손을 포개어 꽤 정중하게 인사했다. "고맙소." 그 뻣뻣한 모습을 다소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방칙사의 뒤편에서, 하효봉과 전운비가 환한 얼굴로 나타났다. "소보!" 명랑하게 외친 하효봉이 얼른 달려와 방다병의 팔을 잡았다. 그 얼굴이 천진한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여기 정말 멋지다. 축하해. 이 선생과 혼인이라니, 처음 들었을 때 까무러치는 줄 알았지 뭐야."
"이상이가 정착할 곳을 찾았다니, 실로 좋은 일이지. 두 사람 모두 축하하오."
"그리고 당신은...전에도 말했지만, 이 선생은 물론이고 소보에게도 잘해야 해요. 나한테 한 것처럼 굴었다가는, 내가 남편과 함께 칼을 들고 찾아갈 테니까. 알겠어요?"
하효봉이 짐짓 적비성을 삿대질하며 쏘아붙였다. 하효봉을 인질로 잡은 전적이 있던 터라, 적비성은 미간을 꿈틀했으나 뭐라 대꾸하지는 못했다. 방다병이 얼른 이모의 팔을 잡아 안쪽으로 인도했다. "자, 자. 이모. 얼른 앉아요." 방다병처럼 턱을 내밀며 흥 소리를 내고, 하효봉은 전운비와 함께 자리를 잡았다. 다음으로 등장한 사람을 발견하고, 방다병은 금세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쭈뼛거리는 태도의 남자는, 평소보다 조금 더 밝은 색상의 옷을 단정히 걸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온 무안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이렇게 참석해도 되는 자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이지요. 비록 가족은 아니라 해도, 당신은 아비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지 않습니까?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며 그 곁을 지켰고요. 그 이름이 친우이든 충복이든, 누군가에게 전심을 다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또한 나란히 앉지 않는다 한들 어차피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볼 텐데, 그럴 바에야 함께 좋은 술을 나누고 축하하는 편이 낫지요."
"방다병의 말이 맞다. 앉아라."
적비성이 가볍게 고갯짓했다. 약간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꾸벅한 무안이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에 뒤따르듯, 노년에 접어든 여자의 인영이 나타났다. 발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아, 그 무위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기다란 지팡이를 짚고 꼿꼿이 선 금파가 두 신랑을 향해 설핏 웃었다.
"무작정 상이를 도와달라 쳐들어와 남의 집 문을 두들기던 녀석이, 오늘은 기어이 그 아이와 혼례를 치르는구나. 상이에게 퍽이나 마음을 쓴다 싶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금파가 놀리듯이 덧붙이며 방다병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방다병이 머쓱하게 웃는 사이, 여자는 깊은 눈으로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상이도 참 기이한 삶을 사는 녀석이야. 십 년 전 목숨을 걸고 싸웠던 상대와 이리 되다니. 이 또한 인연일 테지." 낮은 말에, 적비성이 가벼운 묵례로 답했다.
"금파 선배, 혹시 이연화를 보셨어요? 이제 도착해야 하는데, 아직 기척이 없네요."
방다병이 살짝 불안한 얼굴로 묻자, 금파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했다.
"혹시 복식을 제대로 못 갖추고 있을까봐 한 번 들여다보긴 했다. 금방 나온다고 했으니 곧 도착할 거야. 녀석, 내가 도와주겠다 하는데도 어쩜 그렇게 고집이 센지. 하긴, 천하의 고집불통인 내 남편도 그 아이가 큰 다음엔 도무지 이겨먹질 못했더랬지."
"그러고 보면, 이 혼인에는 정말 고집 센 사람들만 모였지 뭡니까. 소보도 적 맹주도, 고집에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텐데요."
하효혜가 붙임성 있게 덧붙이자, 금파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무안의 옆에 앉았다. "당주의 말이 참으로 맞습니다." 무안이 정중한 태도로 금파에게 예를 표했다. 살짝 고개를 숙여 그 인사를 돌려주는 금파를 어쩐지 초현실적인 기분으로 지켜보다가, 방다병은 개 짖는 소리가 짧게 울렸을 때 홱 고개를 돌렸다. 불여우가 누군가를 따라 이곳까지 왔다면, 그 정체를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나직하게 지시하는 목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려왔다.
"너는 여기 있어. 있다 맛있는 걸 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야 해."
불여우가 다시 한 차례 짖었다. "착하다." 웃음기 묻은 음성으로 건네고, 그 사람은 곧 대나무숲 앞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붉게 휘날리는 인영을 발견한 순간, 방다병은 호흡을 멈추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멈추려 멈춘 숨이 아니라, 스스로 멎어버린 숨이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아무래도 수상하지 않아?"
방다병이 심각한 얼굴로 건넨 말에, 적비성은 눈썹을 꿈틀했으나 별달리 반박하지는 않았다.
취화탕 일이 해결된 이후 며칠 동안, 이연화는 아침 일찍 어딘가로 사라져 늦은 시간에나 돌아왔다. 방다병이 그 주변을 뱅뱅 맴돌면서 답을 캐내려 했으나, 이연화는 왜 그렇게 각인 상대를 못 믿느냐며 오히려 방다병을 질책했다. 과거의 이런저런 예를 들어 너를 어떻게 전적으로 신뢰하느냐고 몰아세울 수도 있었지만, 방다병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나마 입을 꾹 다물었다. 이연화의 분위기가 워낙 강경해 보인 탓도 있었고, 밤마다 꼬박꼬박 귀환하는 몸에 여태껏 별다른 부상이 보이지 않은 탓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멀쩡했는데, 어제는 손에 데인 상처가 있더라니까."
방다병이 한껏 낮춘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자신의 손을 가리켰다. 혼례를 치를 공간을 아홉 번째로 점검하고 돌아왔을 때, 방다병은 먼저 누워 자고 있던 이연화를 발견했다. 그 모습을 응시하다, 청년은 이연화의 손가락에 감긴 천을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게 뭐야? 손을 잡아 천을 살살 들춰보니, 그 아래에는 분명 화상으로 보이는 자국이 작게 남아 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그 상처에 대해 묻는 방다병에게, 이연화는 졸린 눈으로 차를 마시며 무심히 대꾸했다.
"아. 시장에서 만두를 먹다 데었어."
"만두...이연화, 거짓말도 좀 성의 있게 해. 무슨 만두가 그런 화상을 남겨?"
"정말이야, 너 만두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막 쪄진 만두를 젓가락으로 찌르다가 육즙이 튀었지 뭐야."
이연화가 손을 흔들며 능청스럽게 읊었다. 아무래도 사실대로 이야기할 것 같지 않아, 방다병은 눈썹을 이상한 모양으로 찌푸리고는 뚱하게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작은 한숨을 쉰 이연화가 방다병을 달래듯이 건넸다.
"방소보. 위험한 일이 아니고, 혼례 준비의 일환이라고 했잖아. 어차피 때가 되면 알게 될 텐데 뭘 그렇게 안달해."
"위험한 일이 아니고, 혼례 준비의 일환인데 왜 비밀로 해야 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굳이 말하자면...음, 그래. 다 익히지 못한 초식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시연하려면 무안하잖아."
이연화는 퍽 좋은 설명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방다병의 표정은 더욱 괴상해졌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 속내가 그대로 드러났는지, 이연화가 에이 소리를 내며 한 손을 내저었다. "그냥, 사실대로 알려주기엔 내가 좀 머쓱하다는 뜻이야. 네 스승의 존엄을 조금쯤은 지켜주지 않겠어?" 대체 이 비밀이 이연화의 존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나, 눈가를 슬쩍 만지는 모양새가 정말 난처해 보였으므로 방다병은 결국 말을 아꼈다. 그렇다 해도 치미는 궁금증까지 없애버리긴 어려워, 청년은 이 문제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붙들고 하소연하게 되었다.
"너는 정말 아는 게 없어? 뒤를 밟아 봤다거나."
"무안에게 시켜본 적은 있지만, 중간에 놓쳤다더군."
적비성이 대수롭잖게 말하며 찻잔을 채웠다. 그 앞에는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종류의 음식들이 여러 접시에 올라 있었다. 이른 시간부터 한 자리에 모여, 두 남자는 혼례 당일에 참석할 사람들을 위한 음식을 최종적으로 선별한 참이었다.
사실 두 명이 자리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결정한 사람은 방다병이었다. 적비성은 물론 맛있는 음식을 좋아했으나 입맛이 까다롭지는 않았다. 워낙 배를 굶주리며 산 기간이 길어서인지, 금원맹주는 이연화의 실패작 수준이 아닌 이상 웬만한 음식을 불평 없이 잘 먹었다. 또한 그의 관심사는 이연화와 맺어진다는 사실 자체였지 혼례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적비성은 모두 괜찮으니 적당히 골라 먹이자는 의견을 별다른 악의도 없이 내놓았다. 불꽃을 토할 기세로-"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야?"-음식 하나하나를 깐깐히 따지던 방다병은, 과일의 종류까지 세심히 택하고 나서야 이연화에 대한 화제를 꺼낸 참이었다. 방다병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그 뒤로는 사람을 안 보냈어?"
"무안을 통해서 말을 전했더군. 한 번 더 걸리면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그런 일을 감수할 가치는 없을 듯하니,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디로 도망칠 생각만 아니라면 상관없어."
산뜻하게 말한 적비성이 과일 한 조각을 우물거렸다. 결국 또 끝까지 걱정하는 사람은 나지. 입을 삐죽이는 방다병을 향해, 적비성이 턱짓했다. "이연화가 쓸 관이 망가졌다고 울상이더니, 그건 해결된 거냐?" 방다병이 푹 한숨을 쉬었다. 그 일을 떠올리면 마음 한편이 어두워졌다. 혼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이연화는 신경도 쓰지 않을 관이 뭐 그리 중요하겠느냐 스스로에게 말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축소되다 못해 단출해진 혼례인 만큼, 챙길 수 있는 부분만큼은 완벽히 준비하고 싶었다. 고민하던 방다병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거 말인데...영 방도가 보이지 않아서, 비영에게 말해보려고 해."
"그 여자에게?"
"응. 험한 사건을 막 겪은 사람에게 부탁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지만...전에 비영의 집에 갔을 때, 옆에 작업장이 붙어 있었잖아? 그때 비영의 작업물들을 잠깐 봤는데, 스쳐보긴 했지만 솜씨가 정말 좋더라고. 어머니가 의뢰했던 도안이 있으니, 혹시 날짜에 맞춰 관을 고쳐줄 수 있을지 물어볼까 해."
"괜찮은 생각이군. 우리에게 신세를 진 것도 있으니, 비밀을 지키라 요구하면 순순히 따를 테지."
"꼭 그런 이유에서 비영을 떠올린 건 아니야. 넌 주변 사람들을 너무 수단적으로 볼 때가 있다니까."
타박하듯이 건네며, 방다병도 과일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씹었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너처럼 그럴듯한 명분에 얽매이는 것보단 훨씬 효율적이라고 본다만." "이건 명분이 아니라 도의라고 하는 거야." 턱을 내밀며 흥 소리를 낸 방다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비영에게 다녀올 테니, 너는 그 동안 하객들이 묵을 방을 좀 봐줘. 여기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있으니까 참고하도록 해."
그렇게 말하면서 두루마리를 건네주자, 적비성은 만 개의 쌀알을 하나하나 젓가락으로 옮기라는 지시를 받은 사람처럼 미간을 구긴 채 그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상대가 험한 말을 쏘아붙이기 전에, 방다병은 얄미운 미소를 짓고는 발길을 돌렸다. 물론 적비성에게 맡긴다 한들 결국 자신의 손길이 필요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방다병은 금원맹주가 설령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혼례 준비에 심력을 쏟아붓길 원했다.
비영의 작업장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비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매대에 상품이 진열되어 있어, 가게를 닫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잠시 기웃거리던 방다병이 큰 소리를 냈다. "안에 계십니까? 천기당의 육 공자입니다." 가명으로 사용하던 성씨를 대자, 곧 저편의 문에서 퉁탕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안쪽에 또 다른 작업 공간이 있는 걸까? 그편으로 다가가려 발을 내디뎠을 때, 닫혔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조금 상기된 낯의 비영이 나타났다.
"아, 대협. 죄송합니다. 제가 안에서, 잠깐 뭘 하던 참이라."
비영이 허둥거리며 등 뒤의 문을 닫았다. 방다병이 의아한 눈을 깜박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왜 그리-."
"아아, 아닙니다. 별일은 아닙니다만, 약조한 것이 있어서요. 무슨 일이십니까?"
비영이 고개를 붕붕 가로젓고는 물었다. 잠깐 고개를 갸웃했지만, 방다병은 속사정을 더 캐묻지 않고 자신이 온 용건을 전했다. 망가진 관을 이편으로 가져오는 참인데, 혹시 시일에 맞추어 보수해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비영은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곧 처음 보는 종류의 표정을 짓고는 가만히 도안을 살폈다. 그 눈빛이 마치 칼을 빼기 전의 검객처럼 진지했다. 장고 끝에, 비영이 모호한 미소를 띠고는 방다병을 바라보았다.
"굉장한 물건이로군요. 모양은 단아하나 그 재료와 정성이 실로 놀랍습니다. 헌데...이런 물건을 정말 제게 맡기셔도 되겠습니까? 분명 이름 있는 장인이 만드셨을 터인데, 제 손길이 닿았다는 사실로 그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름 있는 사람이 만들든, 재야의 고수가 만들든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장인이 가진 명성의 높고 낮음은, 그 손끝이 자아낸 물건과 진심에 흠을 내지 못합니다. 못 하신다는 말이 없으니, 가능한가 보군요."
방다병이 활짝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비영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조금 더 분명한 미소를 띠었다. "가능은 합니다. 두어 날을 새긴 해야겠지만, 그 정도야 대협이 해주신 일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지요." 방다병의 눈이 혜성처럼 반짝였다. 하도 기쁜 나머지, 청년은 양손을 몸 앞에서 모으고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를 두고 여러 날을 고민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이러지 마십시오. 해주신 일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귀한 물건을 다룰 수 있게 해주시니 제가 감사할 일이지요."
비영이 얼른 방다병의 팔을 잡아 허리를 펴도록 했다. 살짝 상기된 얼굴로 비영을 바라보며, 방다병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일신상의 사정이 있어, 가능하면 제가 이런 의뢰를 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쳤으면 합니다." 그 말에, 비영의 눈이 둥그레졌다. 무언가를 짐작한 듯, 여자는 문 안을 슬쩍 돌아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그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물건이 도착하는 대로 다시 오겠습니다."
재차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방다병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몸을 돌리다 깜짝 놀라 멈추었다. 한 번 만났다고 그새 마음의 경계를 많이 풀었는지, 아경이 빤한 눈으로 방다병을 올려다보던 참이었다. "아경." 비영이 반갑게 부르자, 아경이 쪼르르 달려갔다. 그 눈길이 조금 전 닫힌 문을 향해 있었다. "들어갈래." 아경의 말에, 비영이 당황한 얼굴로 아이와 방다병을 번갈아 보았다.
"나중에 들어가게 해 줄게. 지금은 안 돼."
"놀고 싶은데...."
아경이 조그맣게 불평했다. 방다병이 웃으며 허리를 숙여 건넸다.
"꼬마야, 저 안에는 위험한 도구도 많아서 네가 막 들어가면 안 돼. 함부로 놀다가는 다칠지도 몰라."
"그렇게 노는 거 아닌데....옛날 얘기 듣고 싶어."
비영의 손을 꼭 잡은 아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이에게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나 봅니다." 방다병이 건넨 말에, 비영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아경이 멀뚱멀뚱한 눈으로 비영과 방다병을 보다 말했다.
"아니야, 옛날 얘기 다른 사람이야."
"오? 달리 놀아주는 사람이 있나 보네. 수아 낭자야?"
"으응, 아니야."
고개를 가로젓는 꼬마의 옆에서, 비영은 어쩐지 쩔쩔매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생겼어." 아경이 자신의 머리와 몸 주변을 수줍게 손짓하며 설명했다. 누군가의 인영을 어설피 그리는 귀여운 모습에, 방다병이 피식 웃었다. 그 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아마 머리칼도 옷도 긴 사람인 모양이었다. 상대가 그저 웃기만 하자 알아듣지 못한다 생각했는지, 아경이 방다병을 손가락질하며 열심히 설명하려 들었다.
"전에 같이-."
"아아, 아경! 나랑 같이 당과 사러 가자."
아이의 말을 끊고, 비영이 휙 아경의 몸을 들어 어깨에 얹어놓았다. 아경이 웃음을 터뜨리며 비영의 머리칼을 잡았다. "그럼, 대협. 나중에 뵙겠습니다!" 급히 말한 비영이 휭하니 자리를 떴다. 방다병은 어리벙벙한 채 그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갸우뚱하며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겉으로는 평화로웠으나, 속으로는 바쁘다 못해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혼례 날이 다가올수록 방다병은 거의 편집증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꼼꼼하고 완벽하게 확인하고자 했으며, 적비성은 그런 방다병과 툭하면 별것 아닌 일로 말싸움을 하거나 합을 주고받았다. 이연화는 여전히 낮에 사라졌다가 밤에 나타났는데, 가끔은 귀가가 늦어져 새벽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 팔을 붙들고 대체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느냐 다그치고 싶었으나, 방다병은 허벅지를 꼬집으며 가까스로 그 마음을 억눌렀다.
"일주일만 미룰까?"
혼례가 치러지기 불과 사흘 전, 방다병은 핏발이 선 눈으로 탁자에 엎어진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일주일 전부터 들었던 적비성이 메마른 코웃음을 쳤다. 방다병이 입술을 내밀고는 뚱하게 그편을 향했다.
"이젠 대꾸하지도 않네."
"네 가족들과 금파가 오늘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데, 뭘 어떻게 미룬단 말이냐. 이미 일정에 맞추어 이곳의 일꾼들도 최소화했다."
적비성이 성의 없이 대꾸했다. 그야 그렇지. 방다병이 소리없는 한숨을 쉬며 탁자에 이마를 쿵 댔다. 이곳에서 천기당 소당주의 혼례를 치른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알릴 수야 없었기에, 하효혜는 당주의 직인을 찍어 객잔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서신을 보냈다. 천기당주와 그 가족들이 곧 이곳에서 단출하면서도 사적인 시간을 보낼 예정이니, 숙수를 비롯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휴가를 떠나라는 내용이었다. 방다병이 양손으로 뺨을 감싼 채 발작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주문했던 식재료들 중에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 그리고 이연화가, 구름의 모양새를 보더니 그날 비가 올 확률이 높다지 뭐야. 비가 오는 날에 혼인하는 것보다는 맑은 날이 낫잖아? 또, 또 실내를 장식하려고 산 등도 마음에 안 들어. 내가 주문한 거랑 윗부분이 조금 다르단 말이야. 동그란 걸 원했는데, 받아보니 살짝 각이 져 있지 않겠어? 손님들에게 주려고 산 술도-."
"시끄럽다. 네 불평을 들어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게 많으면 넌 빠져라. 나만 혼인할 테니."
적비성이 혀를 차며 쏘아붙인 말에, 방다병이 핏발 선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이 혼례에 내가 얼마나 많이 기여했는데."
"그럼 입 다물고, 사흘 뒤에 잠자코 예복이나 입어. 네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매일같이 들었더니, 어젯밤엔 네놈이 꿈에서까지 끝없이 떠들었다. 하도 시끄러워서, 참지 못하고 칼로 베어 죽였지."
"뭐? 엄청 흉한 악몽이잖아!"
"별로 악몽은 아니었다만."
팔짱을 낀 적비성이 이죽거렸다. 방다병이 뭐라 대꾸하기 전에, 방문이 열렸다. 잔뜩 피로한 얼굴의 이연화가 방으로 들어서며 어깨를 두드렸다. 의심스럽게 가늘어진 눈으로 이연화를 바라보면서, 방다병이 댓발쯤 튀어나온 입으로 툭 던졌다.
"사흘 뒤가 혼인인데, 오늘까지 대체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야?"
또 만두를 먹다 데었다는 종류의 헛소리를 돌려주리라 예상한 것과 달리, 이연화는 입맛을 작게 다시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방다병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따르는 낯빛이 묘하게 어두웠다. 퍽 곤란한 일이 생긴 듯한 태도에, 방다병이 흐느적거리던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 표정이 짙은 투정에서 걱정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연화,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무슨 일이라기보단...."
이연화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적비성까지 미간을 좁히고는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기세를 본 이연화가 얼른 한 손을 내저었다. "별일 없어, 별일 아니야. 그냥...." 이연화가 다시 입맛을 다시며 눈가를 만졌다. 두 쌍의 시선이 그 얼굴이 빤히 꽂혔다. 쓴 약을 억지로 입에 담은 듯 꺼림칙한 표정을 지은 채 침묵하다가, 이연화는 곧 깊은 한숨과 함께 툭 말했다.
"나중에 비웃으면 안 돼."
"비웃다니, 뭘?"
"그런 게 있어."
건성으로 대꾸한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다병이 눈을 껌벅였다. 며칠이나 혹사당한 눈동자가 드디어 제 역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면, 이연화의 뺨이 아주 은은하게 붉어져 있었다. "난 이만 자야겠다. 너도 쉬어, 방소보. 자칫하다간 예복을 입기도 전에 기절하겠다." 한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 이연화는 방다병이 더 물을 틈도 없이 침상에 풀썩 누워버렸다. 방다병은 적비성과 의혹에 찬 시선을 교환했으나, 차마 눈을 감은 이연화를 흔들어 그 말뜻을 추궁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사흘 후, 하늘은 흐렸으나 다행히도 장대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잔잔한 보슬비가 오히려 풍경에 운치를 더해주는 듯도 했다.
하효혜가 도착했을 때부터 대폭 안정된 방다병은-하효혜는 끝없이 계속되는 방다병의 불안과 집착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다가, 적비성의 평에 따르면 '미친 짐승을 다루는 백수원 사육사와 같은 솜씨'로 방다병을 진정시켰다-당연하게도 길일 전날부터 잠을 설쳤지만, 피로감을 아득히 뛰어넘는 흥분과 기대감에 휩싸인 채 붉은 예복을 걸쳤다. 머리가 붕 떴고 입안이 말랐으며, 심장이 정신없이 쿵쿵거렸다. 목구멍이 조금 메인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른손으로 가슴을 꾹 누른 채, 방다병이 옆을 돌아보았다.
적비성이 걸친 옷은 자신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똑같이 금실로 치장된 붉은 혼례복이었으나, 그 예복에는 조금 더 둔중한 질감의 천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또한 방다병의 옷에는 동글동글한 구름 문양이 배열되어 활달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을 주었고, 적비성의 옷에는 보다 각지고 고풍스러운 문양이 배치되어 묵직한 느낌을 풍겼다. 적비성의 얼굴은 여느 때와 별다를 것도 없이 무뚝뚝하고 평온했다. 방다병은 상대가 퍽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그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어떻게 이리 멀쩡하지? 방다병이 조금 억울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혼인하기 직전인데, 얼굴만 보면 무슨 식사하러 가는 것 같네."
상대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방다병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자신을 비웃기 위해서라면 코웃음을 치거나 무언가 미운 말을 지껄였을 텐데, 조금 기다려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그 상태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모양새였다. "아비?" 방다병이 그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눈앞에서 손을 흔들자, 움찔한 적비성이 방다병을 돌아보았다.
"뭐냐?"
"내 말 안 들렸어?"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표정을 살피던 방다병이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천하의 금원맹주도 혼인을 앞두고 긴장하긴 하는구나."
"너보단 낫지. 심장 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적비성이 핀잔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미간은 불쾌한 듯 찌푸려져 있었으나, 그 태도에 별다른 독기는 없었다. 피식 웃어버리고, 방다병은 적비성과 함께 아침부터 강박적으로 점검한 장소를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객잔 전체를 붉은 천으로 두르고 아름다운 등을 걸어두고 싶었으나, 되도록 드러나지 않는 소박함을 유지해야 했기에 방다병의 욕심은 작은 구역에 한정되었다. 죽매탕 근처의 숙소에는, 손님들이 고즈넉한 정취를 즐기며 식사하고 차를 나누기에 알맞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양옆의 문을 열어두면 한편으로는 청명한 대나무숲이, 다른 한편으로는 맑은 호수와 그에 비친 밤하늘이 보였다. 달이 뜨지 않아 아쉬웠으나, 가느다란 빗줄기가 대나무와 수면을 만나 부드럽고 편안한 소리를 냈다.
실내에는 이미 정갈한 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귀한 객들을 위해 숙수가 최선을 다해 마련한 음식이었다(그는 자신의 음식이 혼례에 쓰이리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터였다). 방다병이 날카롭고도 강박적인 눈으로 반상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동안, 적비성은 대놓고 눈을 굴리며 한숨을 쉬었다.
"소보, 손님을 맞아야 할 녀석이 어찌 강아지처럼 그러고 있느냐?"
방칙사의 타박 아닌 타박이 들려오자, 방다병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안으로 드는 부모님을 발견한 얼굴이 확 밝아졌다. 방칙사는 조금 마음이 복잡해 보였으나, 그래도 웃는 낯으로 방다병을 훑어보았다. "이 녀석, 영 어설퍼서 시종 없이 예복이나 제대로 갖출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잘 입었구나. 꽤 번듯한걸." 방다병이 해해거리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팔을 끌었다.
"그럼요, 얼마나 고심해서 주문한 옷인데요."
"이제 걱정 좀 그만하고, 오늘은 그저 기뻐하기만 해라. 적 맹주, 축하해요."
하효혜가 웃으며 건넸다. 적비성은 환한 미소 따위를 돌려주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양손을 포개어 꽤 정중하게 인사했다. "고맙소." 그 뻣뻣한 모습을 다소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방칙사의 뒤편에서, 하효봉과 전운비가 환한 얼굴로 나타났다. "소보!" 명랑하게 외친 하효봉이 얼른 달려와 방다병의 팔을 잡았다. 그 얼굴이 천진한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여기 정말 멋지다. 축하해. 이 선생과 혼인이라니, 처음 들었을 때 까무러치는 줄 알았지 뭐야."
"이상이가 정착할 곳을 찾았다니, 실로 좋은 일이지. 두 사람 모두 축하하오."
"그리고 당신은...전에도 말했지만, 이 선생은 물론이고 소보에게도 잘해야 해요. 나한테 한 것처럼 굴었다가는, 내가 남편과 함께 칼을 들고 찾아갈 테니까. 알겠어요?"
하효봉이 짐짓 적비성을 삿대질하며 쏘아붙였다. 하효봉을 인질로 잡은 전적이 있던 터라, 적비성은 미간을 꿈틀했으나 뭐라 대꾸하지는 못했다. 방다병이 얼른 이모의 팔을 잡아 안쪽으로 인도했다. "자, 자. 이모. 얼른 앉아요." 방다병처럼 턱을 내밀며 흥 소리를 내고, 하효봉은 전운비와 함께 자리를 잡았다. 다음으로 등장한 사람을 발견하고, 방다병은 금세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쭈뼛거리는 태도의 남자는, 평소보다 조금 더 밝은 색상의 옷을 단정히 걸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온 무안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이렇게 참석해도 되는 자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이지요. 비록 가족은 아니라 해도, 당신은 아비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지 않습니까?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며 그 곁을 지켰고요. 그 이름이 친우이든 충복이든, 누군가에게 전심을 다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또한 나란히 앉지 않는다 한들 어차피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볼 텐데, 그럴 바에야 함께 좋은 술을 나누고 축하하는 편이 낫지요."
"방다병의 말이 맞다. 앉아라."
적비성이 가볍게 고갯짓했다. 약간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꾸벅한 무안이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에 뒤따르듯, 노년에 접어든 여자의 인영이 나타났다. 발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아, 그 무위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기다란 지팡이를 짚고 꼿꼿이 선 금파가 두 신랑을 향해 설핏 웃었다.
"무작정 상이를 도와달라 쳐들어와 남의 집 문을 두들기던 녀석이, 오늘은 기어이 그 아이와 혼례를 치르는구나. 상이에게 퍽이나 마음을 쓴다 싶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금파가 놀리듯이 덧붙이며 방다병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방다병이 머쓱하게 웃는 사이, 여자는 깊은 눈으로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상이도 참 기이한 삶을 사는 녀석이야. 십 년 전 목숨을 걸고 싸웠던 상대와 이리 되다니. 이 또한 인연일 테지." 낮은 말에, 적비성이 가벼운 묵례로 답했다.
"금파 선배, 혹시 이연화를 보셨어요? 이제 도착해야 하는데, 아직 기척이 없네요."
방다병이 살짝 불안한 얼굴로 묻자, 금파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했다.
"혹시 복식을 제대로 못 갖추고 있을까봐 한 번 들여다보긴 했다. 금방 나온다고 했으니 곧 도착할 거야. 녀석, 내가 도와주겠다 하는데도 어쩜 그렇게 고집이 센지. 하긴, 천하의 고집불통인 내 남편도 그 아이가 큰 다음엔 도무지 이겨먹질 못했더랬지."
"그러고 보면, 이 혼인에는 정말 고집 센 사람들만 모였지 뭡니까. 소보도 적 맹주도, 고집에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텐데요."
하효혜가 붙임성 있게 덧붙이자, 금파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무안의 옆에 앉았다. "당주의 말이 참으로 맞습니다." 무안이 정중한 태도로 금파에게 예를 표했다. 살짝 고개를 숙여 그 인사를 돌려주는 금파를 어쩐지 초현실적인 기분으로 지켜보다가, 방다병은 개 짖는 소리가 짧게 울렸을 때 홱 고개를 돌렸다. 불여우가 누군가를 따라 이곳까지 왔다면, 그 정체를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나직하게 지시하는 목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려왔다.
"너는 여기 있어. 있다 맛있는 걸 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야 해."
불여우가 다시 한 차례 짖었다. "착하다." 웃음기 묻은 음성으로 건네고, 그 사람은 곧 대나무숲 앞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붉게 휘날리는 인영을 발견한 순간, 방다병은 호흡을 멈추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멈추려 멈춘 숨이 아니라, 스스로 멎어버린 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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