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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7 21:59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5부 2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목끝까지 푹 잠긴 채, 방다병은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금원맹주와 사고문주를 슬쩍 보았다. 적비성은 바닥을 몇 차례 더듬다가 탕의 온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비스듬히 앉은 참이었고, 이연화는 목만 떠다니는 귀신처럼 쭈그려서는 열심히 탕을 조사하던 참이었다. 아니, 너희는 곧 혼인을 앞둔 음인과 양인이잖아. 이렇게 단정치 못한 차림으로 한 탕에 들어오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둘 다 왜 이렇게 덤덤한 거야! 채 내지르지 못한 소리가 입천장을 간질였다.
"방다병, 네 쪽에는 뭐 없어? 도와준다고 들어와 놓고는 왜 가만히 있어."
이연화가 핀잔처럼 건넸다. 금방 억울해진 방다병이 볼멘소리를 냈다.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해? 아비도 그냥 온천이나 즐기고 있잖아."
"넌 즐기는 얼굴도 아니니까 그렇지."
중얼거린 이연화가 탕 바닥에서 무언가를 끌어올렸다. 바람에 부러진 나뭇가지였다. 실망스러운 소리를 낸 이연화가 그 가지를 밖으로 홱 던져놓았다. "손으로만 찾으려니 영 불편하네. 물이 뿌옇긴 한데, 정말 하나도 안 보이려나?"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더니, 이연화는 곧 결심한 듯 온천 안으로 푹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들어간 곳에서부터 일어난 파문이 크고 둥글게 퍼졌다. 그 물결에 밀려나, 작고 가느다란 꽃가지 하나가 방다병의 앞으로 다가왔다.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흰 꽃송이가 아직 형태를 보전하고 있었다.
이연화가 꽂고 다니던 머리장식과 닮았네. 그 가지를 무심코 집은 방다병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갑자기 무언가가 정강이에 살짝 닿았다. 잘못 느꼈나 싶어 움찔하니, 곧이어 누군가의 손이 무릎 근처를 턱 짚었다. "으악!" 방다병이 기겁하며 펄쩍 뛰어올랐다. 크게 첨벙인 물 아래에서, 이연화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긴 머리카락이 흰 얼굴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퍽 음산해 보였다. "뭐야, 방소보였네." 이연화가 투덜거렸다. 방다병이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는 외쳤다.
"무슨 사람이 그렇게 소리도 없이 움직여? 심장이 멈춰 죽을 뻔했잖아!"
"흉한 소리는. 언제는 무인의 몸을 우습게 보지 말라며? 음, 그런데 역시 물 속에서는 잘 안 보이네."
이연화가 뺨을 긁적였다. 방다병은 그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부산스레 떼어 뒤로 넘겨주며 쏘아붙였다. "밖에서 봐도 이렇게 뿌연 물인데, 들어간다고 뭐가 보이겠어? 심지어 뜨거운 물이잖아, 잠수해서 눈 함부로 뜨지 마." 빠른 말을 늘어놓으면서, 방다병은 다소 미덥잖게 풀어헤쳐져 있던 머리카락을 최대한 모아올리고는 한 손에 들었던 꽃가지를 비녀처럼 꽂아주었다. 그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연화는 탕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이 샘솟는 지점에 가까울수록 더 불투명한 듯한데...뭔가 흔적이 남았다고 하면, 아무래도 수원에서 제일 먼 쪽으로 밀려났겠지."
반쯤 앉았던 이연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다병이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조금 전보다 훨씬 좋지 않게도,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는 온통 젖은 침의 아래의 몸이 선명하게 보였다. 온천의 열기 때문에 살짝 달아오른 살갗과, 갑작스레 찬 공기에 노출되면서 단단해진 가슴팍의 돌기와, 품이 넓은 옷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던 매끄러운 근육의 모양새가 한눈에 들어오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돌이켜보니, 그들은 서로 맨정신인 채 서로의 몸을 제대로 보거나 만진 적이 없었다.
만일 혼사가 제대로 치러진다면...방다병은 벼락 같은 깨달음에 입을 벌렸다. 그럼, 그때는 처음으로 희락기나 약의 영향 없이 서로를 만지고 품게 될 터였다. 머리로는 물론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젖은 침의를 입은 이연화를 보고 있자니 그 그림이 머릿속에서 보다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방다병은 나는 군자라 읊는 것도 잠시 잊어버린 채, 물에 풍덩 잠겨서는 눈을 깜박였다. 등과 뒷목으로 열이 올라 뜨끈뜨끈했다. 입과 코가 온천 물에 들어가 마치 눈만 내놓은 게 같은 모습이었으나, 숨을 참는다는 자각조차 별로 없었다. 사실 물 밖에 있었더라도 제대로 호흡하지 못했을 터였다.
"아야."
이상한 소리가 들렸을 때, 방다병은 폭주하던 상념에서 퍼뜩 벗어나 홱 고개를 돌렸다. 하반신으로 모두 몰릴 뻔했던 피가 아슬아슬하게 멈추었다. 저만치 선 이연화가, 오른손을 슬쩍 보더니 성의 없이 흔들어대고 있었다. 방다병이 얼른 첨벙거리며 그편으로 다가갔다. 탕에서 가장 어둑하고 물이 고인 듯 보여,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면 섣불리 걸음하지 않을 법한 지점이었다. "뭐야, 다쳤어? 왜 그래?" 이연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거 아니야, 여기 뭐가 튀어나와 있어서."
"조심해. 여긴 제대로 관리가 안 된다고 아까 그 낭자들이 말했잖아."
입으로 습관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방다병은 이연화의 손가락을 확인했다. 피가 살짝 맺혀 있었지만 심한 상처는 아니었다. 오른손을 방다병에게 맡긴 채, 이연화가 엉거주춤하게 앉아 왼손으로 돌벽과 바닥을 더듬었다. 그 미간이 곧 슬쩍 좁혀졌다.
"여기 뭔가...못의 머리 같은 게 만져져."
"못? 탕에 못 같은 게 왜 있겠어?"
의아하게 물으며, 방다병이 물 속으로 손을 담갔다. "조금 더 아래쪽이야." 이연화가 낮게 말하며 고갯짓했다. 그 목소리와 숨결이 가까워, 방다병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가까이 붙어 있어서인지, 덥고 맑은 수증기에 희미하게 섞인 연꽃 냄새가 느껴졌다. 각인한 상대의 체취가 코를 건드리자, 반사적으로 아랫배가 살짝 조여들면서 가슴이 뛰었다. 방다병은 목을 가다듬으며 일부러 손끝의 감각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또한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는데, 같은 물건을 만지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이 얽힌 탓이었다. 마지막으로 그 손을 겹쳐 잡았던 날, 그들은 어두운 동굴에서-방다병이 눈을 질끈 감았다.
바른 청년이 재차 곤경에 빠지기 전, 갑자기 커다란 손바닥이 확 누르듯 덮쳐 왔다. 방다병이 와악 소리를 내며 돌아보았다. 단단한 무언가를 아무렇지 않게 만지작거리던 적비성이 말했다.
"오래되어 녹이 슨 듯한데. 정확히 뭔지 모르겠군."
"잠깐, 잠깐만. 아래쪽에 뭐가 걸려 있어. 아주 작은 것이...아."
미간을 좁힌 채 탕을 더듬던 이연화가, 곧 작고 흐물거리는 조각을 꺼냈다. 그 손끝에 손톱 크기의 작은 물체가 잡혀 있었다. 두 쌍의 시선이 한 점으로 쏠렸다. 적비성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이건...물에 녹은 종이 같은데."
작고 불그스름한 조각을 유심히 보던 방다병이 말하자, 이연화의 얼굴로 빙긋이 미소가 떠올랐다. "똑똑하네, 방 공자." 칭찬하듯 이야기한 이연화가, 다시 몸을 숙여 수수께끼의 물체가 박힌 곳을 더듬었다. "음, 이걸 빼고 싶은데." 그 중얼거림에, 금원맹주가 다짜고짜 오른손을 펴 들었다.
"바위를 부수고 빼내면 될 일 아니냐? 비켜라."
"그게 무슨 짓이야? 남의 사업장을 함부로 부수지 마! 기다려 봐, 내가 빼볼 테니까."
방다병이 호기롭게 손을 넣었다. 그러나 돌출된 부분이 워낙 작고 뾰족한 탓에, 좀처럼 제대로 잡거나 힘을 집중시키기가 어려웠다. 단정한 손톱 끝이 조금 벗겨지도록 애써도 잘 되지 않자, 지켜보던 이연화가 방다병의 어깨를 톡톡 쳤다.
"됐어, 내가 해볼게. 내력을 잘 운용하면 될지도 몰라."
"워낙 오래된 물건이라, 섣불리 내력을 불어넣었다간 부서질 수도 있어. 잠깐만, 될 것도 같은데-."
"답답하군. 그냥 부수는 게 빠르다니까."
세 고수가 탕 바닥에 꽂힌 작은 물건을 빼내기 위해 티격태격하며 끙끙거리는 사이, 누군가의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잔뜩 죽이려 애쓴 발소리였다. 상대는 탕 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근처에 멈춘 채 잠시 서성거렸다. 재빠르게 시선을 교환한 세 사람이 급히 앉은 자세로 돌아갔다. "거기...거기 누가 계십니까?" 꽃나무 너머에서, 잔뜩 겁에 질린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을 가다듬은 방다병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우리는 천기당에서 온 사람들이오. 여독을 풀기 위해 탕을 찾다가, 이곳의 정경이 아름다워 잠시 발을 멈추었소. 목욕을 즐기는 중이니, 괘념치 마시오."
"아...대협들이셨군요. 소인은 호명입니다."
한결 안도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들을 숙소까지 안내했던 남자였다. 그는 금방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잠시 쩔쩔매다가 조심스레 건넸다.
"저, 대협들. 청면객잔에는 이곳 말고도 좋은 탕들이 많습니다. 이곳은 아직 정비가 다 끝나지 않아, 까딱하면 깨진 돌 따위에 다치실 수도 있어요. 소인이 다른 곳으로 안내해드리면 어떻습니까? 대나무숲 옆에 자리한 죽매탕도 아주 좋습니다."
방다병이 이연화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호명은, 중요한 손님들이 자칫 변을 당해 천기당주의 귀에 좋지 못한 소식이 들어가지 않을까 염려하는 듯했다. 고개를 까딱한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부탁하지요." 대수롭잖게 말한 이연화가 탕을 나와 몇 발짝 걸어갔다. 젖은 몸에서 온천 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 꼴에 경악한 방다병이 후다닥 뛰쳐나와 화살 같은 속도로 수건을 집었다. 아이를 급히 씻기는 부모처럼 그 몸을 휘감아 탈탈 털자, 이연화가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느냐 묻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방다병이 벌게진 얼굴로 타박했다.
"제정신이야? 아무리 우리밖에 없는 온천이라 해도, 젖은 침의만 걸치고 다니려고?"
"내가 언제 침의만 입고 돌아다닌다고 했어? 겉옷 하나쯤은 걸치려고 했는데, 네가 나보다 빨리 움직여서 유난을 떠니까-어붑, 방소보!"
그 입이 얄미워 수건으로 덮어 꽉꽉 누르자, 이연화가 짐짓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방다병의 손을 찰싹 때렸다. 방다병은 수건 너머를 마음껏 노려보며 이연화의 머리를 닦아냈다. 이연화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꾹 닫고 있었지만, 방다병을 밀어내거나 때리지는 않았다. 흰 얼굴이 탕의 열기로 달아올라 은은한 복숭아 빛을 띠고 있었다. 백의 대협처럼 면사라도 씌우고 싶다 생각하다가, 방다병은 자신이 미숙하고 질투 넘치는 양인처럼 구는 참이란 사실을 깨닫고 푸르르 고개를 털었다.
그런 방다병을 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연화는, 대충 마른 몸에 긴 겉옷을 걸치더니 홱 발길을 돌렸다. 무심히 몸을 닦은 적비성이, 역시 무심한 태도로 방다병을 지나치며 건넸다. 그 시선이 방다병의 하반신을 힐끗 스쳤다.
"너야말로 빨리 옷이나 걸쳐라. 선 게 다 보이니까."
응? 방다병의 눈이 커졌다. 등골로 불길하고도 오싹한 감각이 달렸다. 외면할 수 없는 재앙을 확인하듯 자신의 다리 사이를 일별했다가, 방다병은 곧 비명을 삼키며 제대로 닦지도 않은 몸에 마른 옷을 부리나케 둘렀다. 세 번째 손님의 등장에 놀란 남자를 향해, 이연화는 이 친구가 굼뜬 탓으로 이제야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건넸다. 호명은 혹시라도 천기당의 귀인들이 다친다면 당주를 볼 면목이 없어지니, 제발 취화탕엔 걸음하지 말아달라 재차 이야기하면서 세 사람을 인도했다.
호명이 안내해준 죽매탕은 취화탕과 사뭇 다른 정취를 지닌 곳이었다. 시원하고 깨끗한 냄새를 풍기는 대나무숲이 지척이었는데, 그 줄기와 잎이 이따금 부는 바람에 흔들려 청량한 소리를 냈다. 탕의 크기도 한결 넓어, 방다병은 물에 몸을 담근 채 이래저래 쿵덕거리는 심신을 안정시켰다. 이곳에서는 이연화도 여기저기 들쑤시지 않고, 그저 얌전히 앉아 따뜻한 탕을 즐기고 있었다. 고요히 눈을 감은 모양새가 만족한 여우 같기도 했고, 생각에 빠진 서생 같기도 했다. 적비성은 수련에 열중하는 무인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가끔씩 얼굴을 닦으며 죽림을 감상했다.
"하 당주의 수완은 정말 대단하네. 이렇게 잘 조성된 객잔이라면, 아무리 시골이라도 곧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질 거야. 기관 발명에 그리 재능이 있는데, 사업을 보는 안목도 높다니. 너희 어머니라면 천하도 능히 운영하시겠어."
눈을 뜬 이연화가 짐짓 너스레를 떨며 건넨 말에, 방다병은 피식 웃었다. 이곳이 번화가였다면야 기겁하며 그런 소리 말라 했겠지만, 그 내용만 두고 보면 딱히 이상하지도 않았다. 이연화가 팔짱을 끼고는 이었다. "그러니, 그 명성과 혜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이 사건을 하루빨리 해결해야겠지." 방다병의 입꼬리가 쭉 내려갔다. 흥 소리를 낸 청년이 대꾸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조사는 계속할 거야. 귀신이라니 이상하잖아."
"좋은 태도네, 방 형탐. 물이 붉어지거나, 나무에 흰 옷이 걸리는 현상은 모두 사람이 의지를 갖고 행할 수 있는 일이야. 문제는 누가, 어째서 그런 방식으로 소동을 일으켜야 했느냐지."
"그리고 왜 하필 취화탕인 거지? 이곳엔 탕이 많은데, 범인은 취화탕을 콕 집어 소문이 나도록 만들었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마굿간에서 들린다는 울음소리도 취화탕과 연관된 건가?"
"뭐, 단번에 모든 걸 알아내긴 쉽지 않겠지. 오늘은 일단 좀 쉬고, 내일 날이 밝으면 마굿간에 가 보자. 마지막으로 울음소리가 들린 게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낭자들이 말했던 흔적이 남았을 수도 있지 않겠어?"
이연화가 가볍게 하품을 하며 맺었다. 눈을 느리게 깜박이는 모양새가 조금 피곤해 보였다. 벽차지독에서 해방된 후로도, 이연화는 방다병보다 졸리다는 소리를 자주 하곤 했다(물론 곤란한 상황을 피하려는 시도일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연화는 방다병에 비해 많이 자는 편이었다). 이연화에게 미리 챙겨온 안신향을 줘야겠다고 생각하다, 방다병은 이연화에 이끌리듯 크게 하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잠이 부족한 것으로 따지자면 자신의 사정이 훨씬 더했는지라, 그 사실을 상기하자마자 누적된 피로가 밀려왔다.
처소로 돌아오면서, 방다병은 도끼눈을 번쩍이며 적비성을 쫓아낼 말들을 준비했다. 천기산장을 벗어났으니, 금원맹주는 분명 이연화와 함께 밤을 보내겠다며 고집을 부릴 터였다. 그러나 방다병의 내적 준비가 무색하게도, 적비성은 이연화를 따라가는 대신 특유의 당당하면서도 뻔뻔한 태도로 방다병의 방에 비집고 들어왔다. 이연화조차 의외라는 눈으로 적비성을 힐끗 보았으니, 방다병의 표정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좀처럼 의혹 가득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적비성이 귀찮은 투로 물었다.
"뭐냐?"
"웬일로 이연화를 안 따라가?"
"오늘은 그냥 못 잘 것 같아서 여기로 왔을 뿐이야."
적비성이 미간을 펴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 말뜻을 금방 이해하지 못한 방다병이 눈을 깜박깜박했다. 그 꼴을 퍽 한심스럽게 보다가, 적비성은 무안한 기색도 없이 덧붙였다.
"온천에서 아랫도리로 피가 몰린 게 너 하나는 아니었단 뜻이다."
헙! 방다병이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온몸의 피부가 확 달아올랐다. 어떻게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거지? 방다병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적비성을 본 지가 이제 하루이틀이 아니었으나, 그 거침없는 언행에는 아직도 왕왕 놀라움이 치밀었다. 적비성이 못마땅한 코웃음을 쳤다.
"나야 혼인 전에 다시 일을 치르든 말든 상관 없어. 하지만 네놈이 바로 옆에 있으니, 기척을 느끼면 분명 또 도중에 뛰어들어 혼인 전의 도리 어쩌고 하며 귀찮게 굴겠지. 그런 상황이 싫어 여기로 온 것인데, 네가 잠자코 있겠다면야 저기로 가겠다."
"아아, 아니야!"
방다병이 얼른 적비성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물론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성가신 일이 싫어서였겠으나, 어쨌든 자신을 고려한 결정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적비성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탁자 앞에 앉아, 미리 준비된 술을 따랐다.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여느 때처럼 무뚝뚝하고 투박했다. 방다병은 서늘한 물을 마시면서 그 얼굴을 힐끔 보았다. 이연화도 아비의 딱 절반...아니, 삼분의 일 정도만 솔직했으면 좋겠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방다병은 한풀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비. 넌 신경 쓰이지 않아?"
"뭐가 말이냐."
"너도 알겠지만, 이연화는 혼인을 바라지 않잖아."
"그래서?"
적비성이 별 새삼스러운 소리를 다 한다는 얼굴로 방다병을 보았다. 잠깐 말문이 막혀 뻐끔거리다, 방다병은 물 한 모금을 더 마시고서야 침울하게 이었다.
"그래서라니, 혼인은 원래 당사자들의 합의 하에 진행되는 경사인데...이연화는 별로 기뻐 보이지도 않고."
"조용하잖나. 반대하지 않으면 그걸로 됐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 적비성이 술잔을 기울였다. 방다병은 어쩐지 가치관의 혼란에 휩쓸린 기분으로 반듯한 눈썹을 찌푸렸다. 그걸로 된 건가? 정말로? 그 머릿속의 물음표를 들은 사람처럼, 적비성이 비뚜름한 웃음을 피식 뱉었다.
"처음 각인이 시작되었을 때도 비슷했어. 바라지 않다 못해 싫어했지."
"그야 그랬지만...."
"이연화는 쓸데없이 생각이 많으니, 그 걱정에 하나하나 맞추다 보면 속만 터지지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아. 적당히 궁지에 몰아붙인 다음, 일단 저질러놓고 적응하도록 만드는 게 더 낫다. 다행히 천기당주가 그런 일에 조예가 있으니, 이제 함부로 달아날 마음은 못 품겠지."
말을 마친 적비성이, 오랜만에 상당히 마두스러운 미소를 띠었다(한편으로는 천진할 만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거 너무 불한당 같은 소리 아니야?" 회의적으로 푸념하면서도, 방다병은 그 말에 조금은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장 빛나던 시기에 너무 많은 고난을 겪은 만큼, 이연화는 비극이 되풀이되는 일을 강박적으로 피하고자 들었다. 만일 그들 사이에 벌어졌던 몇 가지의 사고가 아니었다면, 세 사람의 각인은 지금쯤 갑갑한 답보 상태에 머무르거나 아예 끊겨 버렸을지도 몰랐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바른 청년은 곧 진저리를 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적비성이 그렇게 여긴다고 나까지 바로 동조해서는 안 돼. 적어도 나는 줄곧 제정신을 차리고, 이연화를 궁지에 몰아세우는 일이 자칫 과해지지 않도록 막아야만 해! 양손으로 뺨을 찹찹 때리는 방다병의 옆에서, 적비성이 덤덤히 팔짱을 끼었다.
"도망칠 거였다면 이미 도망쳤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네 어머니까지 제 손으로 끌어들인 마당에, 제멋대로 변덕을 부리긴 어렵겠지. 그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논의했으면 좋겠군."
"실용적인 부분?"
"각인에 관련된 사람이 셋이니, 최소한의 규칙은 있어야겠지. 일단, 희락기를 어떻게 보낼지 정해야 해."
적비성의 말에, 방다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현에서 처음 나오기는 했지만, 하 당주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여태 흐지부지 미뤄진 사안이었다. "이연화가 희락기에 들면, 우리 중에 가능한 사람이 상대하면 되지. 둘 다 들어가도 상관 없고. 문제는 우리 둘 중 하나만 희락기에 들었을 때인데...그땐 셋이 있는 게 더 위험할 수도 있어." 방다병이 근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세 사람이 함께하려 들다간, 희락기에 든 쪽이 그렇지 않은 쪽의 형질을 약하게 보아 공격할 수도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적비성이 읊조렸다.
"그럼, 그땐 둘만 보내는 편이 낫겠군. 빈도가 심하게 다르지 않은 이상, 따로 잠자리를 갖더라도 이중 각인이 사라지는 일은 좀처럼 없다고 들었다."
방다병이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중 각인을 수용했을 때, 침대에서 이연화를 독점하는 날이 금방 오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제안을 세 사람이 모두 받아들일 경우, 어쩌면 수 개월 내로 이연화와 단둘이 마주앉게 될지도 몰랐다. 그 상상만으로도 묘한 기대감과 전율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방다병이 애써 태연하게 건넸다.
"의외네, 너라면 희락기가 온 사람의 팔을 묶어놓고서라도 셋이 함께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어설픈 놈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날이 생긴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적비성이 이죽거린 말에, 방다병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누가 어설프다는 거야? 나도 이제 처음 아니야, 충분히, 그...잘할 수 있다고."
"덜떨어지게 굴다 각인에서 떨려나지 않도록 조심해라. 뭐, 그렇게 된다면 나야 반가운 일이다만."
적비성이 명백한 비웃음을 띤 채 뱉은 말에, 방다병이 더욱 발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라 반박할 심산이었으나, 그 시선은 적비성에게서 문 쪽으로 이동했다. 이상한 기척을 감지한 탓이었다.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냐?" 대답 대신 문간으로 다가가, 청년은 문틈에 얼굴 바짝 댄 채 귀를 기울였다. 아주 희미하고도 묘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눈꺼풀을 닫고 감각을 한껏 예리하게 곤두세우니, 이내 그 정체가 한결 분명해졌다. 눈을 뜬 방다병이 놀라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울음 소리가 들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목끝까지 푹 잠긴 채, 방다병은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금원맹주와 사고문주를 슬쩍 보았다. 적비성은 바닥을 몇 차례 더듬다가 탕의 온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비스듬히 앉은 참이었고, 이연화는 목만 떠다니는 귀신처럼 쭈그려서는 열심히 탕을 조사하던 참이었다. 아니, 너희는 곧 혼인을 앞둔 음인과 양인이잖아. 이렇게 단정치 못한 차림으로 한 탕에 들어오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둘 다 왜 이렇게 덤덤한 거야! 채 내지르지 못한 소리가 입천장을 간질였다.
"방다병, 네 쪽에는 뭐 없어? 도와준다고 들어와 놓고는 왜 가만히 있어."
이연화가 핀잔처럼 건넸다. 금방 억울해진 방다병이 볼멘소리를 냈다.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해? 아비도 그냥 온천이나 즐기고 있잖아."
"넌 즐기는 얼굴도 아니니까 그렇지."
중얼거린 이연화가 탕 바닥에서 무언가를 끌어올렸다. 바람에 부러진 나뭇가지였다. 실망스러운 소리를 낸 이연화가 그 가지를 밖으로 홱 던져놓았다. "손으로만 찾으려니 영 불편하네. 물이 뿌옇긴 한데, 정말 하나도 안 보이려나?"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더니, 이연화는 곧 결심한 듯 온천 안으로 푹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들어간 곳에서부터 일어난 파문이 크고 둥글게 퍼졌다. 그 물결에 밀려나, 작고 가느다란 꽃가지 하나가 방다병의 앞으로 다가왔다.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흰 꽃송이가 아직 형태를 보전하고 있었다.
이연화가 꽂고 다니던 머리장식과 닮았네. 그 가지를 무심코 집은 방다병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갑자기 무언가가 정강이에 살짝 닿았다. 잘못 느꼈나 싶어 움찔하니, 곧이어 누군가의 손이 무릎 근처를 턱 짚었다. "으악!" 방다병이 기겁하며 펄쩍 뛰어올랐다. 크게 첨벙인 물 아래에서, 이연화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긴 머리카락이 흰 얼굴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퍽 음산해 보였다. "뭐야, 방소보였네." 이연화가 투덜거렸다. 방다병이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는 외쳤다.
"무슨 사람이 그렇게 소리도 없이 움직여? 심장이 멈춰 죽을 뻔했잖아!"
"흉한 소리는. 언제는 무인의 몸을 우습게 보지 말라며? 음, 그런데 역시 물 속에서는 잘 안 보이네."
이연화가 뺨을 긁적였다. 방다병은 그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부산스레 떼어 뒤로 넘겨주며 쏘아붙였다. "밖에서 봐도 이렇게 뿌연 물인데, 들어간다고 뭐가 보이겠어? 심지어 뜨거운 물이잖아, 잠수해서 눈 함부로 뜨지 마." 빠른 말을 늘어놓으면서, 방다병은 다소 미덥잖게 풀어헤쳐져 있던 머리카락을 최대한 모아올리고는 한 손에 들었던 꽃가지를 비녀처럼 꽂아주었다. 그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연화는 탕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이 샘솟는 지점에 가까울수록 더 불투명한 듯한데...뭔가 흔적이 남았다고 하면, 아무래도 수원에서 제일 먼 쪽으로 밀려났겠지."
반쯤 앉았던 이연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다병이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조금 전보다 훨씬 좋지 않게도,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는 온통 젖은 침의 아래의 몸이 선명하게 보였다. 온천의 열기 때문에 살짝 달아오른 살갗과, 갑작스레 찬 공기에 노출되면서 단단해진 가슴팍의 돌기와, 품이 넓은 옷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던 매끄러운 근육의 모양새가 한눈에 들어오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돌이켜보니, 그들은 서로 맨정신인 채 서로의 몸을 제대로 보거나 만진 적이 없었다.
만일 혼사가 제대로 치러진다면...방다병은 벼락 같은 깨달음에 입을 벌렸다. 그럼, 그때는 처음으로 희락기나 약의 영향 없이 서로를 만지고 품게 될 터였다. 머리로는 물론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젖은 침의를 입은 이연화를 보고 있자니 그 그림이 머릿속에서 보다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방다병은 나는 군자라 읊는 것도 잠시 잊어버린 채, 물에 풍덩 잠겨서는 눈을 깜박였다. 등과 뒷목으로 열이 올라 뜨끈뜨끈했다. 입과 코가 온천 물에 들어가 마치 눈만 내놓은 게 같은 모습이었으나, 숨을 참는다는 자각조차 별로 없었다. 사실 물 밖에 있었더라도 제대로 호흡하지 못했을 터였다.
"아야."
이상한 소리가 들렸을 때, 방다병은 폭주하던 상념에서 퍼뜩 벗어나 홱 고개를 돌렸다. 하반신으로 모두 몰릴 뻔했던 피가 아슬아슬하게 멈추었다. 저만치 선 이연화가, 오른손을 슬쩍 보더니 성의 없이 흔들어대고 있었다. 방다병이 얼른 첨벙거리며 그편으로 다가갔다. 탕에서 가장 어둑하고 물이 고인 듯 보여,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면 섣불리 걸음하지 않을 법한 지점이었다. "뭐야, 다쳤어? 왜 그래?" 이연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거 아니야, 여기 뭐가 튀어나와 있어서."
"조심해. 여긴 제대로 관리가 안 된다고 아까 그 낭자들이 말했잖아."
입으로 습관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방다병은 이연화의 손가락을 확인했다. 피가 살짝 맺혀 있었지만 심한 상처는 아니었다. 오른손을 방다병에게 맡긴 채, 이연화가 엉거주춤하게 앉아 왼손으로 돌벽과 바닥을 더듬었다. 그 미간이 곧 슬쩍 좁혀졌다.
"여기 뭔가...못의 머리 같은 게 만져져."
"못? 탕에 못 같은 게 왜 있겠어?"
의아하게 물으며, 방다병이 물 속으로 손을 담갔다. "조금 더 아래쪽이야." 이연화가 낮게 말하며 고갯짓했다. 그 목소리와 숨결이 가까워, 방다병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가까이 붙어 있어서인지, 덥고 맑은 수증기에 희미하게 섞인 연꽃 냄새가 느껴졌다. 각인한 상대의 체취가 코를 건드리자, 반사적으로 아랫배가 살짝 조여들면서 가슴이 뛰었다. 방다병은 목을 가다듬으며 일부러 손끝의 감각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또한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는데, 같은 물건을 만지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이 얽힌 탓이었다. 마지막으로 그 손을 겹쳐 잡았던 날, 그들은 어두운 동굴에서-방다병이 눈을 질끈 감았다.
바른 청년이 재차 곤경에 빠지기 전, 갑자기 커다란 손바닥이 확 누르듯 덮쳐 왔다. 방다병이 와악 소리를 내며 돌아보았다. 단단한 무언가를 아무렇지 않게 만지작거리던 적비성이 말했다.
"오래되어 녹이 슨 듯한데. 정확히 뭔지 모르겠군."
"잠깐, 잠깐만. 아래쪽에 뭐가 걸려 있어. 아주 작은 것이...아."
미간을 좁힌 채 탕을 더듬던 이연화가, 곧 작고 흐물거리는 조각을 꺼냈다. 그 손끝에 손톱 크기의 작은 물체가 잡혀 있었다. 두 쌍의 시선이 한 점으로 쏠렸다. 적비성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이건...물에 녹은 종이 같은데."
작고 불그스름한 조각을 유심히 보던 방다병이 말하자, 이연화의 얼굴로 빙긋이 미소가 떠올랐다. "똑똑하네, 방 공자." 칭찬하듯 이야기한 이연화가, 다시 몸을 숙여 수수께끼의 물체가 박힌 곳을 더듬었다. "음, 이걸 빼고 싶은데." 그 중얼거림에, 금원맹주가 다짜고짜 오른손을 펴 들었다.
"바위를 부수고 빼내면 될 일 아니냐? 비켜라."
"그게 무슨 짓이야? 남의 사업장을 함부로 부수지 마! 기다려 봐, 내가 빼볼 테니까."
방다병이 호기롭게 손을 넣었다. 그러나 돌출된 부분이 워낙 작고 뾰족한 탓에, 좀처럼 제대로 잡거나 힘을 집중시키기가 어려웠다. 단정한 손톱 끝이 조금 벗겨지도록 애써도 잘 되지 않자, 지켜보던 이연화가 방다병의 어깨를 톡톡 쳤다.
"됐어, 내가 해볼게. 내력을 잘 운용하면 될지도 몰라."
"워낙 오래된 물건이라, 섣불리 내력을 불어넣었다간 부서질 수도 있어. 잠깐만, 될 것도 같은데-."
"답답하군. 그냥 부수는 게 빠르다니까."
세 고수가 탕 바닥에 꽂힌 작은 물건을 빼내기 위해 티격태격하며 끙끙거리는 사이, 누군가의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잔뜩 죽이려 애쓴 발소리였다. 상대는 탕 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근처에 멈춘 채 잠시 서성거렸다. 재빠르게 시선을 교환한 세 사람이 급히 앉은 자세로 돌아갔다. "거기...거기 누가 계십니까?" 꽃나무 너머에서, 잔뜩 겁에 질린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을 가다듬은 방다병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우리는 천기당에서 온 사람들이오. 여독을 풀기 위해 탕을 찾다가, 이곳의 정경이 아름다워 잠시 발을 멈추었소. 목욕을 즐기는 중이니, 괘념치 마시오."
"아...대협들이셨군요. 소인은 호명입니다."
한결 안도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들을 숙소까지 안내했던 남자였다. 그는 금방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잠시 쩔쩔매다가 조심스레 건넸다.
"저, 대협들. 청면객잔에는 이곳 말고도 좋은 탕들이 많습니다. 이곳은 아직 정비가 다 끝나지 않아, 까딱하면 깨진 돌 따위에 다치실 수도 있어요. 소인이 다른 곳으로 안내해드리면 어떻습니까? 대나무숲 옆에 자리한 죽매탕도 아주 좋습니다."
방다병이 이연화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호명은, 중요한 손님들이 자칫 변을 당해 천기당주의 귀에 좋지 못한 소식이 들어가지 않을까 염려하는 듯했다. 고개를 까딱한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부탁하지요." 대수롭잖게 말한 이연화가 탕을 나와 몇 발짝 걸어갔다. 젖은 몸에서 온천 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 꼴에 경악한 방다병이 후다닥 뛰쳐나와 화살 같은 속도로 수건을 집었다. 아이를 급히 씻기는 부모처럼 그 몸을 휘감아 탈탈 털자, 이연화가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느냐 묻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방다병이 벌게진 얼굴로 타박했다.
"제정신이야? 아무리 우리밖에 없는 온천이라 해도, 젖은 침의만 걸치고 다니려고?"
"내가 언제 침의만 입고 돌아다닌다고 했어? 겉옷 하나쯤은 걸치려고 했는데, 네가 나보다 빨리 움직여서 유난을 떠니까-어붑, 방소보!"
그 입이 얄미워 수건으로 덮어 꽉꽉 누르자, 이연화가 짐짓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방다병의 손을 찰싹 때렸다. 방다병은 수건 너머를 마음껏 노려보며 이연화의 머리를 닦아냈다. 이연화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꾹 닫고 있었지만, 방다병을 밀어내거나 때리지는 않았다. 흰 얼굴이 탕의 열기로 달아올라 은은한 복숭아 빛을 띠고 있었다. 백의 대협처럼 면사라도 씌우고 싶다 생각하다가, 방다병은 자신이 미숙하고 질투 넘치는 양인처럼 구는 참이란 사실을 깨닫고 푸르르 고개를 털었다.
그런 방다병을 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연화는, 대충 마른 몸에 긴 겉옷을 걸치더니 홱 발길을 돌렸다. 무심히 몸을 닦은 적비성이, 역시 무심한 태도로 방다병을 지나치며 건넸다. 그 시선이 방다병의 하반신을 힐끗 스쳤다.
"너야말로 빨리 옷이나 걸쳐라. 선 게 다 보이니까."
응? 방다병의 눈이 커졌다. 등골로 불길하고도 오싹한 감각이 달렸다. 외면할 수 없는 재앙을 확인하듯 자신의 다리 사이를 일별했다가, 방다병은 곧 비명을 삼키며 제대로 닦지도 않은 몸에 마른 옷을 부리나케 둘렀다. 세 번째 손님의 등장에 놀란 남자를 향해, 이연화는 이 친구가 굼뜬 탓으로 이제야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건넸다. 호명은 혹시라도 천기당의 귀인들이 다친다면 당주를 볼 면목이 없어지니, 제발 취화탕엔 걸음하지 말아달라 재차 이야기하면서 세 사람을 인도했다.
호명이 안내해준 죽매탕은 취화탕과 사뭇 다른 정취를 지닌 곳이었다. 시원하고 깨끗한 냄새를 풍기는 대나무숲이 지척이었는데, 그 줄기와 잎이 이따금 부는 바람에 흔들려 청량한 소리를 냈다. 탕의 크기도 한결 넓어, 방다병은 물에 몸을 담근 채 이래저래 쿵덕거리는 심신을 안정시켰다. 이곳에서는 이연화도 여기저기 들쑤시지 않고, 그저 얌전히 앉아 따뜻한 탕을 즐기고 있었다. 고요히 눈을 감은 모양새가 만족한 여우 같기도 했고, 생각에 빠진 서생 같기도 했다. 적비성은 수련에 열중하는 무인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가끔씩 얼굴을 닦으며 죽림을 감상했다.
"하 당주의 수완은 정말 대단하네. 이렇게 잘 조성된 객잔이라면, 아무리 시골이라도 곧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질 거야. 기관 발명에 그리 재능이 있는데, 사업을 보는 안목도 높다니. 너희 어머니라면 천하도 능히 운영하시겠어."
눈을 뜬 이연화가 짐짓 너스레를 떨며 건넨 말에, 방다병은 피식 웃었다. 이곳이 번화가였다면야 기겁하며 그런 소리 말라 했겠지만, 그 내용만 두고 보면 딱히 이상하지도 않았다. 이연화가 팔짱을 끼고는 이었다. "그러니, 그 명성과 혜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이 사건을 하루빨리 해결해야겠지." 방다병의 입꼬리가 쭉 내려갔다. 흥 소리를 낸 청년이 대꾸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조사는 계속할 거야. 귀신이라니 이상하잖아."
"좋은 태도네, 방 형탐. 물이 붉어지거나, 나무에 흰 옷이 걸리는 현상은 모두 사람이 의지를 갖고 행할 수 있는 일이야. 문제는 누가, 어째서 그런 방식으로 소동을 일으켜야 했느냐지."
"그리고 왜 하필 취화탕인 거지? 이곳엔 탕이 많은데, 범인은 취화탕을 콕 집어 소문이 나도록 만들었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마굿간에서 들린다는 울음소리도 취화탕과 연관된 건가?"
"뭐, 단번에 모든 걸 알아내긴 쉽지 않겠지. 오늘은 일단 좀 쉬고, 내일 날이 밝으면 마굿간에 가 보자. 마지막으로 울음소리가 들린 게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낭자들이 말했던 흔적이 남았을 수도 있지 않겠어?"
이연화가 가볍게 하품을 하며 맺었다. 눈을 느리게 깜박이는 모양새가 조금 피곤해 보였다. 벽차지독에서 해방된 후로도, 이연화는 방다병보다 졸리다는 소리를 자주 하곤 했다(물론 곤란한 상황을 피하려는 시도일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연화는 방다병에 비해 많이 자는 편이었다). 이연화에게 미리 챙겨온 안신향을 줘야겠다고 생각하다, 방다병은 이연화에 이끌리듯 크게 하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잠이 부족한 것으로 따지자면 자신의 사정이 훨씬 더했는지라, 그 사실을 상기하자마자 누적된 피로가 밀려왔다.
처소로 돌아오면서, 방다병은 도끼눈을 번쩍이며 적비성을 쫓아낼 말들을 준비했다. 천기산장을 벗어났으니, 금원맹주는 분명 이연화와 함께 밤을 보내겠다며 고집을 부릴 터였다. 그러나 방다병의 내적 준비가 무색하게도, 적비성은 이연화를 따라가는 대신 특유의 당당하면서도 뻔뻔한 태도로 방다병의 방에 비집고 들어왔다. 이연화조차 의외라는 눈으로 적비성을 힐끗 보았으니, 방다병의 표정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좀처럼 의혹 가득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적비성이 귀찮은 투로 물었다.
"뭐냐?"
"웬일로 이연화를 안 따라가?"
"오늘은 그냥 못 잘 것 같아서 여기로 왔을 뿐이야."
적비성이 미간을 펴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 말뜻을 금방 이해하지 못한 방다병이 눈을 깜박깜박했다. 그 꼴을 퍽 한심스럽게 보다가, 적비성은 무안한 기색도 없이 덧붙였다.
"온천에서 아랫도리로 피가 몰린 게 너 하나는 아니었단 뜻이다."
헙! 방다병이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온몸의 피부가 확 달아올랐다. 어떻게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거지? 방다병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적비성을 본 지가 이제 하루이틀이 아니었으나, 그 거침없는 언행에는 아직도 왕왕 놀라움이 치밀었다. 적비성이 못마땅한 코웃음을 쳤다.
"나야 혼인 전에 다시 일을 치르든 말든 상관 없어. 하지만 네놈이 바로 옆에 있으니, 기척을 느끼면 분명 또 도중에 뛰어들어 혼인 전의 도리 어쩌고 하며 귀찮게 굴겠지. 그런 상황이 싫어 여기로 온 것인데, 네가 잠자코 있겠다면야 저기로 가겠다."
"아아, 아니야!"
방다병이 얼른 적비성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물론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성가신 일이 싫어서였겠으나, 어쨌든 자신을 고려한 결정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적비성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탁자 앞에 앉아, 미리 준비된 술을 따랐다.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여느 때처럼 무뚝뚝하고 투박했다. 방다병은 서늘한 물을 마시면서 그 얼굴을 힐끔 보았다. 이연화도 아비의 딱 절반...아니, 삼분의 일 정도만 솔직했으면 좋겠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방다병은 한풀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비. 넌 신경 쓰이지 않아?"
"뭐가 말이냐."
"너도 알겠지만, 이연화는 혼인을 바라지 않잖아."
"그래서?"
적비성이 별 새삼스러운 소리를 다 한다는 얼굴로 방다병을 보았다. 잠깐 말문이 막혀 뻐끔거리다, 방다병은 물 한 모금을 더 마시고서야 침울하게 이었다.
"그래서라니, 혼인은 원래 당사자들의 합의 하에 진행되는 경사인데...이연화는 별로 기뻐 보이지도 않고."
"조용하잖나. 반대하지 않으면 그걸로 됐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 적비성이 술잔을 기울였다. 방다병은 어쩐지 가치관의 혼란에 휩쓸린 기분으로 반듯한 눈썹을 찌푸렸다. 그걸로 된 건가? 정말로? 그 머릿속의 물음표를 들은 사람처럼, 적비성이 비뚜름한 웃음을 피식 뱉었다.
"처음 각인이 시작되었을 때도 비슷했어. 바라지 않다 못해 싫어했지."
"그야 그랬지만...."
"이연화는 쓸데없이 생각이 많으니, 그 걱정에 하나하나 맞추다 보면 속만 터지지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아. 적당히 궁지에 몰아붙인 다음, 일단 저질러놓고 적응하도록 만드는 게 더 낫다. 다행히 천기당주가 그런 일에 조예가 있으니, 이제 함부로 달아날 마음은 못 품겠지."
말을 마친 적비성이, 오랜만에 상당히 마두스러운 미소를 띠었다(한편으로는 천진할 만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거 너무 불한당 같은 소리 아니야?" 회의적으로 푸념하면서도, 방다병은 그 말에 조금은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장 빛나던 시기에 너무 많은 고난을 겪은 만큼, 이연화는 비극이 되풀이되는 일을 강박적으로 피하고자 들었다. 만일 그들 사이에 벌어졌던 몇 가지의 사고가 아니었다면, 세 사람의 각인은 지금쯤 갑갑한 답보 상태에 머무르거나 아예 끊겨 버렸을지도 몰랐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바른 청년은 곧 진저리를 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적비성이 그렇게 여긴다고 나까지 바로 동조해서는 안 돼. 적어도 나는 줄곧 제정신을 차리고, 이연화를 궁지에 몰아세우는 일이 자칫 과해지지 않도록 막아야만 해! 양손으로 뺨을 찹찹 때리는 방다병의 옆에서, 적비성이 덤덤히 팔짱을 끼었다.
"도망칠 거였다면 이미 도망쳤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네 어머니까지 제 손으로 끌어들인 마당에, 제멋대로 변덕을 부리긴 어렵겠지. 그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논의했으면 좋겠군."
"실용적인 부분?"
"각인에 관련된 사람이 셋이니, 최소한의 규칙은 있어야겠지. 일단, 희락기를 어떻게 보낼지 정해야 해."
적비성의 말에, 방다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현에서 처음 나오기는 했지만, 하 당주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여태 흐지부지 미뤄진 사안이었다. "이연화가 희락기에 들면, 우리 중에 가능한 사람이 상대하면 되지. 둘 다 들어가도 상관 없고. 문제는 우리 둘 중 하나만 희락기에 들었을 때인데...그땐 셋이 있는 게 더 위험할 수도 있어." 방다병이 근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세 사람이 함께하려 들다간, 희락기에 든 쪽이 그렇지 않은 쪽의 형질을 약하게 보아 공격할 수도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적비성이 읊조렸다.
"그럼, 그땐 둘만 보내는 편이 낫겠군. 빈도가 심하게 다르지 않은 이상, 따로 잠자리를 갖더라도 이중 각인이 사라지는 일은 좀처럼 없다고 들었다."
방다병이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중 각인을 수용했을 때, 침대에서 이연화를 독점하는 날이 금방 오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제안을 세 사람이 모두 받아들일 경우, 어쩌면 수 개월 내로 이연화와 단둘이 마주앉게 될지도 몰랐다. 그 상상만으로도 묘한 기대감과 전율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방다병이 애써 태연하게 건넸다.
"의외네, 너라면 희락기가 온 사람의 팔을 묶어놓고서라도 셋이 함께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어설픈 놈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날이 생긴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적비성이 이죽거린 말에, 방다병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누가 어설프다는 거야? 나도 이제 처음 아니야, 충분히, 그...잘할 수 있다고."
"덜떨어지게 굴다 각인에서 떨려나지 않도록 조심해라. 뭐, 그렇게 된다면 나야 반가운 일이다만."
적비성이 명백한 비웃음을 띤 채 뱉은 말에, 방다병이 더욱 발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라 반박할 심산이었으나, 그 시선은 적비성에게서 문 쪽으로 이동했다. 이상한 기척을 감지한 탓이었다.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냐?" 대답 대신 문간으로 다가가, 청년은 문틈에 얼굴 바짝 댄 채 귀를 기울였다. 아주 희미하고도 묘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눈꺼풀을 닫고 감각을 한껏 예리하게 곤두세우니, 이내 그 정체가 한결 분명해졌다. 눈을 뜬 방다병이 놀라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울음 소리가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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