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27 완
다 쓰고 보니까 뒤가 더 있어야 할 거 같아서, 2.5나 3으로 이어질 예정임ㅎㅎㅠㅠ 2부도 엄청 길었는데 봐줘서 고마워!!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이렇게 한 달만 더 지내면, 팔자에도 없는 신경쇠약에 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세 사람을 동시에 부르기 두어 시진 전, 방다병은 그런 생각과 함께 끙끙거리고 있었다.

사흘 전 적비성과의 대면 직후, 하효혜는 방칙사와 함께 다소 복잡한 얼굴로 아들을 맞았다. 그 표정을 본 방다병은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어머니의 성정을 잘 아는 탓이었다. 차라리 언성을 높여 잔소리하고, 등과 팔을 때리며 생각 없는 아이라 화를 내는 하효혜는 비교적 편히 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고 걱정하며, 차분한 음색으로 합리적인 이야기를 건네는 하효혜는 정말 어려운 상대였다. 그럴 때의 어머니는 철벽 같은 논리와 함께 온건하지만 단호한 감성을 띠고 있어, 반대하는 목소리를 선뜻 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기에, 방다병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어떠셨어요?"
"흥미로운 사람이더구나. 농으로라도 군자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자부심과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듯해 오히려 인의의 모양새와 통하는 부분이 있어. 마음만 잘 먹는다면, 세상에 좋은 영향을 많이 줄 수도 있겠다."

어머니의 평에, 방다병은 일차적으로 안도했다. 방칙사는 "어찌나 콧대가 높던지, 태도만 두고 보면 어디의 제후라도 되는 것 같더라." 하는 소리를 못마땅하게 중얼거렸으나, 대놓고 반박하며 적비성을 나쁘게 말하지는 않았다. 방다병이 마른침을 삼켰다. 비록 긍정적인 말을 먼저 꺼내 놓았지만, 하효혜의 얼굴에는 엷은 근심이 깔려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천기당주가 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듯하면서도 거대한 야심이 있어, 늘 분쟁의 중심에 설 것 같은 인상도 있었지. 그런 사람은 원치 않더라도 남들의 주의를 끌기 마련이야. 이 선생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적 맹주 역시 조용한 삶을 살아갈 사람은 아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조용히 사는 적비성이라니, 상상도 안 되네요."

방다병이 쓴 미소를 띤 채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하효혜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 눈동자에서 분명한 염려가 일렁였다.

"소보. 네가 그 동안 노력하여 뛰어난 무공을 지닌 신진 고수가 되었다 하나, 이 선생과 적 맹주는 이미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큰 명성을 쌓은 사람들이다. 그들과 더욱 깊은 관계로 엮이게 되면, 그 명성의 여파를 보다 크게 받을 수밖에 없어. 앞으로 일어날 소란들에 네가 자칫 잘못 휘말리지 않을까 불안하기도 하구나. 강호에는 늘 갈등과 분란이 넘쳐나니 말이다."

어머니가 건넨 솔직한 말에, 방다병을 입을 꾹 다물고는 잠시 자신의 허벅지를 바라보았다. 그 두 사람에 비해, 자신이 아직 미숙한 청년이란 사실쯤은 싫을 만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호오에 따라 변하지 않았고, 방다병의 마음 또한 흔들리지 않았다. 억울함이나 분함 따위는 그저 부차적인 감정일 뿐이었다. 잠시 침묵하다가, 방다병은 옷자락을 휙 걷고는 부모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효혜가 혀를 차며 얼른 방다병의 팔을 잡았다.

"이 녀석, 자꾸 무릎이나 꿇어대고. 그런다고 내가 봐줄 줄 알아?"

하효혜가 짐짓 야단치듯 말했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서는 대신, 방다병은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건넸다. 

"걱정하게 해서 죄송해요, 어머니. 하지만...처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각인하지 않더라도 이연화와 늘 함께 있을 거예요." 

사과도 결심도 티 없는 진심이라, 방다병의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 말하던 하효혜처럼 차분했다. 하효혜의 얼굴로 쓴웃음이 빙긋이 떠올랐다. "그거야 예전부터 알고 있긴 했지." 나직이 읊조리는 아내의 옆에서, 방칙사가 낮은 한숨을 뱉으며 뒷목을 주물렀다. 감은 눈이 퍽 피로해 보였다. 무릎을 꿇은 채, 방다병은 오른손으로 하효혜의 팔을 잡았다. 맑은 눈동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눈에 담았다. 

"강호의 소란에 힘없이 휘둘리지 않도록, 홍수에도 떠내려가지 않는 나무처럼 단단해져야죠. 셋 중에서 가장 쉽게 겨눌 만한 약점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당장은 어렵겠지만, 저는 언젠가 반드시 그 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람이 될 거예요. 든든한 뒷배를 가진 세 사람이 서로를 살펴주면, 감히 천하에 대적하지 못할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언젠가 적비성과 지붕 위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덧붙여 건네자, 하효혜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 이마로는 여전히 수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으나, 방다병은 만류의 말이 바로 튀어나오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가만히 부모님을 지켜보았다.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던 천기당주가, 짐짓 괘씸한 눈으로 아들을 흘겨보았다.

"너 말이야, 내게 허락을 구할 생각이나 제대로 있었던 거냐? 허락이 아니라 아주 통보를 하러 온 행태구나."
"그럴 리가요! 당연히 어머니 허락을 구하러 온 거죠. 전 그냥, 제 마음과 생각을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뿐이에요."

방다병이 얼른 손을 내저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옆에 앉았던 방칙사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팩 돌렸다. 팔짱을 낀 모양새가 섭섭해 보였다. "네 어머니 허락만 중요하고, 네 아비 생각은 아무래도 좋았느냐?" "에이, 아버지. 아니란 거 아시잖아요. 제게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두 중요해요." 얼른 넉살 좋게 이야기하자, 방칙사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집어치우라는 듯이 손가락질을 하며 혀를 찼다. 일부러 해해거리던 방다병의 앞에서, 호부상서는 곧 자세를 바로 하고 한결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소보. 나 역시 이 문주가 당대의 영웅이란 사실을 안다. 그 사실을 대희국의 누가 모르겠느냐. 적비성 또한, 과히 오만한 구석이 있으나 악인으로 칭할 자는 아니야.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 문주와 금원맹주의 여건이 그리 단순하지가 않아. 이런 형태의 이중 각인이라면 강호와 황가의 시선을 모두 의식할 수밖에 없으니, 공공연히 혼인하거나 후사를 보는 일이 쉽지 않을 게다. 그런 불완전한 각인으로도, 너는 정말 괜찮단 말이냐?"

방칙사의 염려스러운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하효혜였다. 피식 웃은 천기당주가 남편의 팔을 툭 건드렸다. "나는 이미 다 들은 이야기지만, 당신은 또 들어야겠네요." 방다병이 조금 무안한 미소를 띠었다. 무릎을 꿇은 채 아버지를 향하고, 청년은 며칠 전 어머니에게 건넸던 말을 읊었다.

"제겐 각인 자체로 이미 완전해요, 아버지. 다른 일은 그저 형식일 뿐이니,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방칙사가 길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떨떠름하게 침체된 표정을 향해, 방다병이 힘주어 이었다.

"저도 알아요. 제 마음과 별개로, 이연화가 아버지의 눈에 완벽한 상대로 비치진 않겠죠. 이연화도 그 때문에 제게 오래도록 선을 그었으니까요. 하지만 부모님이 제게 바라던 삶은, 그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좋아 보이려고 애쓰는 삶이 아니었잖아요. 두 분은 늘 제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셨죠. 이연화가 저와의 각인을 이어갈 의향이 있다고 했을 때...세상이 온전해진 것처럼 행복했어요."

주먹을 꾹 쥔 방다병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맺었다. 긴장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강렬하고 아름다운 환희가 차오르는 탓이었다. 함부로 말을 얹지 못한 채, 방칙사는 착잡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방다병의 음성이 낮아졌다. 

"저는 이상이를 동경했고, 이연화를 애중했죠. 지금은 두 사람이 하나란 걸 알게 됐고요. 그만큼 많은 의미를 가진 사람을 또 만나지는 못할 거예요. 저는 이연화가 완벽한 사람이라서 각인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세상에 그런 사람은 있지도 않고요. 저는 그냥...다른 이를 생각할 수가 없어요." 

방다병이 확신에 찬 나머지 오히려 담담하게까지 들리는 투로 말했다. 물론 이연화와 지내던 모든 날들이 그저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 방다병의 마음에 깊숙이 자리한 만큼, 이연화는 때때로 생경할 만큼 강렬한 분노와 슬픔, 안타까움과 불안을 선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통을 이유로 이 관계에서 도망칠 마음 따위는 없었다. 가끔 불편하게 조여든다 하여 심장을 뽑아버릴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네가 아직 어려서 그리 말하는 것일 수도 있어. 더 많은 사람들을 겪다 보면, 설령 이 문주가 아니더라도 끌리는 상대를 만날지 모르는 일 아니냐."

방칙사가 힘없는 푸념처럼 말했다. 방다병이 아버지를 향해 차분히 물었다. "아버지도 어머니와 혼인하실 때, 주변 어른들이 반대하셨죠. 그때 비슷한 말씀을 들으셨을 텐데, 어떻게 하셨어요?" 방칙사의 입이 딱 다물렸다. 호부상서는 비열한 반칙을 마주한 사람처럼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방다병이 방칙사와 하효혜를 번갈아보며 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는 친자가 없었지요. 그 일로 서로와 각인하신 걸 후회하셨나요?"
"이 녀석,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우리와 너는 경우가 다르지. 네 어머니의 상황이 이 문주와 같더냐?"

방칙사가 짐짓 따지듯이 물었다. 방다병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이연화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란 음인이었기를 바라세요? 아니면, 그 핏줄과 어린 시절이 덜 기구했기를 원하세요? 이연화는 뛰어난 능력과 귀한 피를 타고났지만, 부당하게 거리로 내몰려 어렵게 성장했어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선고도처럼 비뚤어지지 않고, 그 능력을 길러 세상을 위하고자 했지요. 잘 갖추어진 환경에서 바르게 성장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더 힘들고 빛나는 일이잖아요. 그 노력이 많은 경계와 은원을 불러들였다 해서, 그 사람에게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돼요."

방다병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방칙사는 아들의 말투에 조금 심기가 상한 듯했지만, 그 내용에는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재차 한숨을 쉬었다. 방다병은 합당한 반항심이 일렁이는 눈으로 방칙사를 바라보았다.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정말로 이연화를 거부하려 든다면, 지금껏 아버지가 가르쳤던 군자의 덕들이 빛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방다병이 왼손으로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미간을 꾹꾹 누르던 방칙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비록 과거의 굴레에서 모두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연화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설령 입으로는 다른 말을 한들, 늘 정과 의를 행하려 하겠죠. 그 명성에 흠을 내고자 달려드는 이가 있다면 저도 용납하지 못할 사람일 거예요. 아버지, 이연화와 함께하면 제 안의 무엇도 거스르며 살아갈 필요가 없어요. 저는 그 사람이 제게 내려진 천명이라고 생각해요."
"천명은 무슨 천명이냐, 네가 화봉초를 가져와 먹이지만 않았다면 문주가 음인이 될 일도 없었을 텐데...."

아들의 간곡한 말에, 방칙사가 탄식하듯 이야기하며 얼굴을 쓸었다. 방다병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따지고 들면, 이연화에게 건강히 살아달라 떼를 쓴 것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었다. 이연화가 음인이 된 이후 벌어진 일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들의 관계는 여전히 투닥거리는 친우에 머물렀을지도 몰랐다. "몸이 바뀌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리 되었으니, 정말 천명이었을지도 모르죠." 하효혜가 짓궂은 미소와 함께 건넸다. 방칙사는 전혀 웃지 못한 채, 방다병을 향해 떠보듯이 물었다.

"네게 집안의 대를 이을 의무가 있다고 하면 어쩌겠느냐? 너는 우리 집의 독자인데."

방다병의 입이 살짝 벌어졌으나, 그 안에서는 금방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솔직하게 뱉기가 꺼려진 탓이었다. 사실 대를 이을 작정이라 하여 반드시 친자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방가의 방계에는 이미 후손들이 차고 넘쳐, 양자로 고려할 만한 아이들도 많았다. 어차피 핏줄을 보수적으로 따질 작정이라면, 방다병 또한 이 집안의 적자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진정으로 부모라 여기는 사람들에게 대뜸 그런 말을 건네고 싶지 않아, 청년은 잠시 고민하다 미덥잖게 꿍얼거렸다.

"그럼...그럼 슬퍼하겠죠."
"이 녀석, 그게 끝이야? 뭐 반성하고 다르게 해보겠다든가 하는 마음은 전혀 없는 것이냐?"

방칙사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외치며 손가락질했다. 방다병이 뚱하게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럼 아버지는 정말로 제가 부모님을 위해 제 삶을 포기하길 바라세요? 그렇지도 않으시면서. 다 알거든요." 볼멘소리로 이야기하자, 방칙사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호부상서는 세상에 이리 무례한 경우는 처음 보았다는 듯이 뒷목을 잡으며 하효혜를 돌아보았다.

"저, 저 녀석! 부인, 저 녀석 하는 꼴을 좀 봐요. 아주 부모님을 제 아래로 여기는 게 아니면 감히 저러겠소?"
"아래로 여기다뇨, 저 지금 무릎 꿇고 있잖아요. 이게 어딜 봐서 아래로 여기는 거예요?"
"이놈이 계속 말대꾸는. 어머니의 기관에 갇혀서 며칠을 쫄딱 굶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어머니의 기관에는 이미 갇혀 봤거든요!"
"자, 자. 그만들 해요."

하효혜가 두 남자를 슥 떠밀며 말렸다. 방다병은 입을 삐죽 내민 채 고개를 돌렸고, 방칙사도 흥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하효혜가 방다병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소보, 네 생각과 마음은 잘 알겠다. 하지만 이는 분명 중대사이니, 네 아버지와 조금 더 논의할 시간이 필요해. 그건 너라도 이해하겠지?" 한숨을 내쉰 방다병이 고개를 끄덕했다. 그 시선이 한풀 누그러졌다. 아무리 자신이 보기에 옳은 길이라 해도, 부모님에게 상당한 심적 과제를 던져주었다는 사실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물론이죠.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서 죄송해요. 부모님이 괴로워하시길 바라지는 않았어요."
"그건 알지만, 이 얘기는 더 일찍 꺼내야 했어. 처음 들었을 땐 정말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효혜가 방다병의 어깨를 찰싹 치며 타박했다. 방다병이 민망한 미소와 함께 어깨를 문질렀다. 

그날 부모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오면서, 방다병은 첫날보다는 상황이 진전되었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하효혜는 경악과 불신, 분노를 동시에 내비쳤다("뭐라고? 대체 언제 처음...아니, 이미 한참 전이잖아! 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내게 알리지를 않고? 심지어 네가 먼저 달려들어? 이 녀석, 내가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 몸가짐을 삼가지는 못할망정! 최근에는 왜 또? 널 살리려다가? 맙소사, 그런데 이 선생이 각인을 유지하는 일에 동의했다고? 혹시 네가 뭔가 착각한 건 아니냐?"). 오늘의 하효혜는 방다병과 이연화, 적비성의 상황을 보다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허락하실지는 모르는 일이잖아? 며칠 동안, 방다병은 잠자리에 쉽게 들지 못하고 뒤척이며 갈등했다. 물론 방다병은 부모님을 신뢰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효혜와 방칙사는 방다병의 의지를 정말로 꺾어버리고 폭력적인 언동을 보일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부마 자리를 고사하고 강호에 나가 살겠노라는 결정도 끝까지 막고자 애썼을 터였다. 하지만 적비성이 지적했던 대로, 부모님에게 어느 정도 인정받기까지는 꽤 긴 세월이 걸렸다. 이 사실을 들은 지 고작 며칠 만에, 부부가 정말로 아들의 결정을 지지해 줄까? 마냥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익숙한 천기산장이, 오늘은 유난히 크고 엄숙하게 느껴졌다. 방다병은 잔뜩 긴장한 채 응접실을 향했다. 세 사람의 앞에서 문이 열렸을 때, 그 너머에는 하효혜와 방칙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하효혜는 예의 바른 미소와 함께 인사했고, 방칙사는 심각하지만 역시 공손한 태도로 예를 표했다. 부모님의 속내를 읽으려 노력하며, 방다병은 어머니의 손짓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하효혜가 말문을 열었다.

"둘 다 자주 뵙기 어려운 분들인데, 이렇게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여주어서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두 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이연화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적비성은 물론 전혀 송구하지 않은 얼굴로 하효혜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방다병은 온통 흥건해진 손바닥을 자기도 모르게 허벅지에 꽉 눌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하효혜가 긴 숨을 내쉬며 방칙사를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남편과 이런저런 대화를 참 많이 나누었습니다. 염려되는 바가 조금도 없지는 않으나, 이토록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진 것 또한 하늘의 뜻이겠지요. 이미 생긴 인연을 끊는 일이 얼마나 비인도적이고 폭력적인 짓인지 잘 압니다. 그런 일을 아들에게 강요할 수 있었다면, 한사코 강호로 나가겠다던 아이를 결국 놓아주지도 못했겠지요."

방다병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심장박동이 너무 시끄럽고 빠른 나머지, 가슴뿐 아니라 온몸이 그 박자를 따라 쿵쿵 울렸다. 하효혜가 엷게 웃었다.

"저희 부부는 소보의 각인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세 사람의 마음이 모두 굳고 진지한데, 어찌 다른 이가 함부로 말을 얹겠습니까?"

방다병과 이연화가 잠시 숨을 삼켰다. 적비성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이 귀찮은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에서인지 미미하게 달가운 빛을 띠었다. 방다병은 금방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오른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잔뜩 차가워졌던 손발로 뜨거운 피가 쭉 돌았다. "어머니." 방다병이 겨우 하효혜를 불렀을 때, 이연화가 가슴 앞에서 손을 모으고는 상체를 깊이 숙였다. 진중하다 못해 결연한 말이 흘러나왔다.

"하 당주,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방 공자에게 부당한 화가 미치지 않도록 전심을 다할 것입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꼭 그리하겠습니다."
"이 선생. 선생은 마음의 두려움을 조금 내려놓으셔도 괜찮습니다. 때로는 그런 두려움이 오히려 불필요한 위험을 만들기도 하니까요. 선생의 됨됨이는 나와 남편이 충분히 알고 있어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부디 이 일로 등을 굽히지 마세요. 뭣보다 선생이 목숨을 바친다면 소보가 남은 생을 고통 속에 살 테니, 소보를 위해선 부디 다치거나 죽을 생각일랑 마시고 오래도록 건강히 살아야 합니다."

이연화의 오른편 손목을 잡은 채, 하효혜가 온건하면서도 단호한 투로 건넸다. 이연화가 찌푸린 듯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 양쪽 뺨과 귀가 슬쩍 붉어져 있었다. 하효혜가 낮게 웃었다.

"소보의 마음을 꺾지 않을 것이라 미리 말씀드렸는데, 그리도 걱정하셨습니까?"
"뭐라고요? 이연화, 너 이미 알고 있었어?"

방다병이 빽 소리를 내며 돌아보자, 이연화가 입맛을 다시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됐다, 선생한테 그러지 마라. 내가 비밀을 지켜달라 부탁한 거니까." 하효혜가 방다병의 손등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그 얼굴이 이내 진지해졌다.

"소보. 네가 곧고 바른 아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급하지는 말아야 해. 두 사람의 무위와 명성이 너보다 높으니, 너 역시 노력하여 얼른 경지를 올리고 싶겠지.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게다. 어린 시절,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할 때부터 의지 하나로 검을 들지 않았더냐? 하지만 서두르다 보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 그저 항상 정진하며 성실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어머니. 명심하겠습니다."

잔뜩 벅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부인, 저 녀석은 지금 우리가 돌을 씹어먹으라 해도 그리할 거요." 방칙사가 못마땅하게 놀리듯이 말했다. 그 말이 과히 틀리지 않았기에, 방다병은 머리를 들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지금 밖으로 나가 펄쩍 뛰어오르면 중천의 명월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결 여유를 되찾은 방다병이 적비성을 돌아보며 농담처럼 물었다.

"아비한테는 따로 하실 말씀 없으세요?"
"적 맹주에게는...."

하효혜가 잠시 주저하는 빛을 띠었다. 하고 싶은 말을 뱉어도 될지 고민하는 듯한 태도에, 적비성이 눈썹을 살짝 들고는 건넸다.

"품은 말이 있다면 하시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언 같은 말을 건네기가 조심스럽군요. 하지만, 적 맹주를 만나고 느낀 바는...."

잠시 고민하다가, 하효혜는 품에서 작은 책자를 꺼냈다. 표지를 보니, 적비성이 건네주었다던 금원맹의 자료인 듯했다. 천기당주의 눈빛이 방금 전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진지한 빛을 발했다.

"내게 준 자료를 면밀히 훑어보았는데, 금원맹에는 더 체계적인 규율과 수입원이 필요해요. 천기당의 자료를 만들어줄 테니, 이 자료를 만든 사람에게 주고 참고하도록 하면 도움이 될 거예요. 세운 사람의 뜻이 아무리 좋더라도, 큰 조직은 그 뜻만으로 굴러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맹주가 세심히 신경을 쓰지 않으면, 자연히 각려초 같은 이들이 또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하효혜가 술술 늘어놓은 말에, 적비성이 눈을 깜박였다. 갑작스러운 평가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방다병은 그만 입을 막으며 웃음을 참았다. 비록 적비성의 머리가 나쁘지 않은 편이기는 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사업가와 경영자로서 교육받은 하효혜의 눈에는 아무래도 미숙한 수준으로 비칠 터였다. 하효혜가 오른손의 검지를 펴 들고는 이었다.

"또한 너무 솔직하게 굴어서도 안 됩니다. 맹주의 직선적인 화법과 성품이 누군가에게는 믿음직해 보이겠으나, 누군가에게는 과히 투명하게 보일 수도 있어요. 물론 적 맹주를 잘못 대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알 테니 함부로 속이려는 이가 많지는 않겠으나, 자칫하다가는 사업상의 자잘한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손해가 모이다 보면 꽤 몸집이 커지지요."

방다병은 치미는 웃음을 참으며 적비성을 힐끗 보았다. 강직한 얼굴이 복잡한 빛을 띤 채 일그러져 있었다. 금원맹에서는 감히 누구도 금원맹주의 행동을 지적하지 못했을 터였다. 하효혜가 짐짓 어깨를 으쓱하며 지나가는 말처럼 건넸다. "실무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면, 다른 사람에게 맹주 자리를 넘기는 것도 방법이지요. 거기까진 내가 말할 영역이 아닙니다만." 적비성의 눈썹이 팔자 모양으로 찌푸려졌을 때, 방다병은 결국 참지 못하고 풉 소리를 뱉었다. 험한 눈길이 즉시 날아와 꽂혔다. 짐짓 이연화의 옆으로 숨는 방다병을 한심스레 보던 방칙사가, 곧 짧은 헛기침으로 주의를 끌었다.

"이 일에 어깃장을 놓을 마음은 없으나, 다만 문주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습니다. 부디 황가에 책잡힐 일은 만들지 말아주시오. 비록 강호가 비교적 자유로운 터라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문주는 원한다 하여 황가와 영영 연을 끊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 말입니다. 무언가 좋지 못한 낌새를 감지한다면, 폐하께서 언제 무슨 명을 내릴지 모르는 일이에요."
"명심하겠습니다."

이연화가 미간을 좁히고는 약속했다. "혈통이란 것이 무엇인지, 참 여러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군요." 하효혜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방다병은 그 말이 참 맞다고 생각하며 이연화의 오른손을 슬쩍 잡았다. 그 손바닥도 조금 축축해져 있어, 방다병은 자기도 모르게 벙긋 웃었다. 상대가 힘든 것이 좋지는 않았으나, 이연화 역시 이 일이 잘 성사되기를 바라며 마음을 썼다는 점이 고마웠다. 하효혜가 빙긋 웃으며 양손을 마주잡았다. 

"자, 그러면 중요히 논의할 일이 딱 하나 남았네요."
"무엇입니까?"

이연화가 의아하게 물었다. 하효혜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야, 혼인을 어떻게 치를지에 대한 것이지요."
"예?"
"네?"

이연화와 방다병이 거의 동시에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적비성이 한쪽 눈썹을 슬쩍 올렸다. 가장 먼저 당혹을 수습한 이연화가 말했다.

"저, 하 당주. 무슨 말씀이신지...조금 전 방 어르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제 각인은 공공연히 드러내 좋을 일이 없습니다."
"언제 공공연히 드러내자고 했나요? 다만 세 사람이 함께하고자 마음먹었으니, 예법에 따라 적절한 절차는 치러야지요. 꼭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더라도, 형식을 갖출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이는 진심과 도의의 문제이니, 그저 허례라고 일축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그것이...."

이연화가 말문이 막혀 더듬거렸다. 방다병은 기뻐해야 할지 난처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심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사실 크게 반대하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혼인을 바라는 마음이 전무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형식을 갖추는 일 정도로 어머니가 이 관계를 허락한다면야 두 번이든 세 번이든 할 수 있었다. 하효혜가 적비성을 향해 물었다.

"적 맹주는 어떤가요? 맹주는 혹시 혼인을 치르는 일이 불필요한 허례라고 봅니까?"
"난 아무래도 상관 없소."

적비성이 팔짱을 낀 채 대꾸했다. 그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오른 것을 보니, 하효혜의 제안에 퍽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러나 전혀 흥미로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이연화가 그 팔을 잡아당겼다. 생각 좀 하고 대답하라는 절박한 시선에도, 적비성은 당당히 어깨를 으쓱했다.

"사적인 맹약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 그 정도도 꺼려질 만큼 진지하지 못한 거냐?"
"그런 뜻이 아니잖아. 만에 하나 정말 그걸 한다고 해도, 모든 부분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하는데-."
"내가 적당한 장소를 몇 군데 생각해두긴 했어요. 천기산장은 아무래도 드나드는 이들이 많아, 어떤 식으로든 이목이 쏠릴 테니 말이지요. 천기당의 사업장들 중에 아직 개점하지 않은 곳들이 있는데, 그런 장소를 이용하면 어떨까 싶어요. 내가 나름대로 장단점을 정리해 뒀으니, 곧 한 자리에 모여 골라보면 좋을 것 같네요. 아, 일단은 길일부터 골라야겠지요?"

하효혜가 쭉쭉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이연화의 낯빛이 잠깐 창백해졌다. 어떻게든 말리고 싶으나 딱히 말릴 말이 없어 궁지에 몰린 얼굴로, 불세출의 영웅이라 불렸던 사람은 즐겁게 말하는 하효혜를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보았다("내가 잘 아는 사람이 있으니, 지인의 일이라 하고 길일을 물어볼게요. 혼인에 필요한 물건들은 전부 은밀히 준비할 테니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 하지만 무엇이 좋을지는 함께 정해야겠지요. 바쁘겠지만, 적 맹주도 당분간 일정을 확보하도록 하세요."). 

여러 가지 이유로 상기된 채 싱글거리며, 방다병은 이미 맞잡았던 손으로 더 꽉 힘을 주었다. 이 폭주를 좀 말려보라는 듯이 방다병을 돌아보았다가, 이연화는 그 표정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왼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그 손조차 곧 적비성이 잡아내려 쥔 탓에, 이연화는 그저 망연자실한 얼굴로 하효혜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방다병은 기쁜 심정을 숨길 노력이라곤 전혀 하지 않은 채, 한껏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연화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떤 이유로든 상대를 놓아버릴 생각 따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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