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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7 22:54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부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기관에서 풀려난 방다병이 진정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방다병은 흐트러진 머리를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한 채 쏜살같이 달려와, 이연화를 붙들고 우리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쉴 틈 없이 물어댔다. 그 모양새가 병아리를 잃어버린 어미닭을 똑 닮아 있었다.
정신이 사나워 일단 방다병을 앉혀놓고 차를 마시게 한 다음, 이연화는 적당한 자초지종을 알려주었다. 하효혜가 입막음을 부탁한 부분은 쏙 빠진 내용이었다. 네 이야기가 맞는지 내게 검증하러 오셨으며, 아직 가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으며, 고민이 깊으신 듯 보였으며, 적비성을 따로 만나길 원하신다는 내용 정도였다. 방다병은 하효혜가 화를 내거나 이연화에게 포기해달라 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일차적으로 안도했으나, 금원맹주와의 독대를 청했다는 부분에선 전혀 안도하지 못했다.
"그건 좀...큰일이네."
"그렇지?"
방다병과 이연화가 근심스럽게 수군거리자, 곁에 섰던 적비성이 매우 불쾌하고도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들 그리 호들갑이지? 내가 방다병을 죽이지 않을까 염려한다고 했으니, 죽이지 않을 거라고 말하면 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아...네가 최소한의 도의를 갖춘 사람인지 확인해야겠다던 말은 잊었어?"
이연화가 한쪽 관자놀이를 비스듬히 짚은 채 건넸다. 방다병이 근심 가득한 한숨을 푹 내쉬며 턱을 괴었다. 적비성이 팔짱을 끼었다.
"그런 것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내게 최소한의 도의는 있겠지. 뭐가 걱정이냐."
"어떻게 자신하는데?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이며 돌아다녀 놓고선."
방다병이 뚱하게 돌아보았다. 적비성이 별말을 다 한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불성실하기는 하지만, 이연화는 어쨌든 정파인이다. 내가 상종 못할 사파라고 생각했다면 절대 어울리려 들지 않았겠지. 하 당주도 그렇게 말했잖나." 이연화가 가볍게 눈가를 만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안심할 수도 없었다.
"저기...이봐. 나야 너를 오랫동안 지켜봤으니 그런 판단을 내린 거지. 하지만 하 당주는 다르잖아. 아무리 연륜이 있는 분이라 해도, 짧은 시간 동안 상대를 다 파악하기란 쉽지 않아. 그러니 네 마음에는 안 들겠지만, 최소한 그 순간만큼이라도 네가 아는 정파인처럼 굴어봐. 사람을 대할 때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제발 무례한 소리는 하지 말고, 다짜고짜 하대하지도 말고."
"내가 개인적으로 깊이 아는 정파인은 너뿐인데. 사기꾼처럼 굴어 좋을 것도 없으니, 그냥 평소대로 만날 거다."
"맙소사. 하 당주께 미리 양해를 구해 놓아야겠어. 방소보, 너도 잘 얘기해 놔. 아비는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서, 하 당주가 보기에는 예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비칠 수도 있다고."
적비성이 대놓고 이죽거린 말에, 이연화가 방다병의 팔을 탁탁 치며 건넸다. 자신의 말에 과히 틀린 부분은 없었다. 기초적인 예법을 배워야 할 시기에, 적비성은 적가보에서 가혹하고 비인도적인 훈련을 거쳐 살수로 거듭나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시점부터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쑥불쑥 도전장을 내밀고 다녔으며, 또 어느 시점부터는 존상이란 이름을 단 채 많은 이들 위에 군림했으니 일상적인 예법을 잘 아는 편이 더욱 이상했다.
내심 한숨을 쉬다가, 이연화는 방다병의 상태를 보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바로 대답하는 대신, 방다병은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래, 방소보?" 방다병의 팔을 살짝 흔들자, 청년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 그 귀와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뭐야, 진짜 왜 이러지? 이연화가 함정을 의심하는 사람처럼 방다병을 바라보았다. 목을 가다듬은 방다병이 말했다.
"이연화. 어머니가 덮어놓고 반대하실 작정은 아닌 것 같지 않아?"
"뭐?"
이연화가 일부러 어이없는 소리를 냈다. 탁자를 짚은 방다병이 상체를 쑥 내밀었다. "안 된다고 하실 거면, 굳이 아비를 부를 필요도 없이 반대하셨을 거 아니야. 하지만 아비를 만나겠다고 하셨으니, 어쩌면 이 관계를 진지하게 고려하시는 중인지도 몰라." 동그란 눈동자가 흥분과 기대로 반짝였다. 앗, 이러면 안 되는데. 이연화가 적비성과 잠깐 시선을 교환했다. 그 입에서 곧 능란한 궤변이 술술 흘러나왔다.
"방소보, 진심으로 하는 얘기야? 반대하실 마음이 없었다면, 오늘 화가 나서 널 기관에 가두지 않으셨겠지. 오히려 상대가 적비성인 만큼, 거절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만남을 청하셨을 수도 있어. 금원맹주와 자기 자식을 엮는 일이 달가울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나는 방소보와 엮인 게 아니다, 너와 엮이다 보니 저 녀석도 끼어들게 된 것이지. 말은 똑바로 해."
"기분 나쁜 게 그 부분이야? 너도 참 너다, 적 맹주."
이연화가 혀를 차며 흘겨보았다. 방다병의 얼굴에서 재차 핏기가 빠져나갔다. 이연화의 말이 썩 그럴싸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이 녀석, 한동안 내 말에 잘 안 넘어오더니 이럴 때에는 또 쉽게 흔들리네. 이연화는 내심 어깨를 으쓱하며 양심의 가책을 흘려보냈다. 하 당주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울상을 지은 눈으로 안절부절못하던 방다병은, 이내 벌떡 일어나 적비성의 어깨를 잡았다. 적비성이 괴상한 눈으로 그 손과 방다병을 번갈아 보았다.
"안 되겠어, 내가 도와 예에 대해 가르쳐 줄게."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갑자기 군자는 못 되더라도, 심하게 흠잡힐 구석은 없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다섯 살 짜리도 알 수 있을 만큼 쉽게 가르쳐줄 테니까, 웃어른에 대한 예를 다해서 어머니를 만나야 해. 사소한 데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도, 어머니는 엄청 날카롭고 기억력도 좋단 말이야. 괜히 그 많은 사업들을 굴리면서 아직 실패하신 적이 없겠어? 그러니까, 어머니를 뵙기 전까지...언제 만난다고 했어?"
"글피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말씀드리려 했지."
이연화가 대답했다. 적비성의 어깨를 잡은 손아귀로 힘이 들어갔다. 금원맹주의 눈빛이 흉흉해졌으나, 방다병은 자신의 사정이 너무 급하여 상대의 편의를 보아줄 여력이라곤 조금도 없는 얼굴로 간곡히 외쳤다.
"이틀 동안, 내가 전력을 다해서 가르칠 테니 잘 따라와야 해. 어머니의 의도가 정확히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 때문에 이 각인을 깨려 드시진 않아야 하잖아!"
"이렇게까지 안 해도-."
적비성이 미간을 좁힌 채 투덜거렸다. 너, 비밀 지켜야 해. 이연화가 얼른 전음을 보내 경고했다. 하효혜에게 승낙의 마음이 만만하였다는 사실을 내비쳐서는 안 되었다. 친인들 앞에서 더욱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방다병의 성향으로 미루어보아, 하효혜가 건넨 말들을 알려준다면 바로 해해거리며 풀어진 얼굴로 돌아다닐 것이 뻔했다. 적비성의 낯이 매우 짜증스럽게 우그러졌다. "쓸데없군. 생각 없으니 놔라." 팩 쏘아붙이고, 적비성은 발길을 휙 돌려 방을 나가버렸다. "아비! 너 꼭 다시 와야 해, 알았지!" 방다병이 그 뒷모습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이연화가 얼른 그 팔을 끌어당겼다.
"됐어, 그만하고 너도 얼른 가서 쉬어. 잘 자야 또 다른 대책을 강구할 수 있지 않겠어."
타이르듯 건넨 말에, 방다병은 금방 수긍하는 대신 우물쭈물 이연화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연화가 또 왜 그러느냐는 시선을 보내자, 청년은 이연화의 양손을 꾹 잡고는 물었다.
"이연화, 너 아무래도 안색이 창백해 보여. 정말로 어머니한테 안 좋은 얘기 들은 건 아니지?"
"방소보, 너희 어머니를 그렇게 못 믿어?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도 내게 욕을 하실 분은 아니잖아. 그냥 이래저래 몸이 조금 지쳐서 그런 거니까, 괜히 오해하지 마."
이연화가 일부러 농담처럼 대꾸했으나, 방다병의 표정은 금방 펴지지 않았다. 고개를 슬쩍 숙인 청년이 중얼거렸다.
"어머니를 못 믿는 게 아니야. 다만...."
"다만, 뭐? 그럼 나를 못 믿어?"
짐짓 얼척없는 얼굴로 묻자, 방다병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숨을 쉬었다. 뭐야, 진짜인가? 이연화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살짝 붉어진 채 고민하더니, 방다병은 곧 이연화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맞아." 이연화가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무안하지만 동시에 진실한 얼굴로, 방다병은 맞잡은 손에 얼른 힘을 주었다. 이연화가 기분이 상해 손을 뿌리치고 돌아서지 않을까 염려한 듯한 반응이었다.
"너는-너는 항상 네가 내 앞날의 걸림돌이 될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어머니에게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해도, 네가 어머니의 말에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자칫하면 네가 또...."
"너만 남겨두고 어디로 사라질 것 같았다고?"
별 걱정을 다 한다는 투로 건네니, 방다병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그러나 이연화는 사실 매우 제발이 저린 상태였는데, 하효혜가 만일 대노하여 방다병과 거리를 두라고 요구했다면 두말없이 사라질 생각 또한 품었던 탓이었다. 물론 하 당주가 덮어놓고 성을 낼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으나, 하나뿐인 아들의 일이니 평소와 달리 격하게 반응한다 하여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방다병이 괜히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어린애 같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네가 날 두고 간 게 벌써 몇 번이야."
"그래, 그리고 네게 잡힌 것도 몇 번인지 모르겠다. 방다병, 나를 못 믿겠으면 네 의지를 믿어. 내가 사라지면, 너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또 찾아내지 않겠어? 나는 네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고."
그 어조는 타박이었지만, 그 내용은 재차 건네는 고백에 가까웠다(적어도 이연화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졌다). 말을 맺으며 방다병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자, 방다병은 조금 전보다도 훨씬 더 빨개진 얼굴로 흥 소리를 냈다. 아비조차 알고 있던 사실을 참 빨리도 깨달았다는 말을 웅얼거리다, 청년은 곧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릴 때 봤던 예법서들을 다시 꺼내야겠어. 적비성에게 고차원적인 얘기를 해봤자 먹히지 않을 거야."
"적당히 해, 방소보. 예법 같은 것은 속성으로 가르치기가 쉽지 않아. 설령 억지로 외우도록 할 순 있어도, 몸에 배인 습관으로 만들 수는 없어."
"그럼 어떡해? 아비가 아주 바보거나 천하의 악당이 아니란 건 나도 알아. 어머니께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어. 하지만 저딴 말투를 처음 대하면 백번 오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 봐, 이연화. 적비성이 초면의 상대한테 호감을 줄 만한 사람이야? 심병을 줄 만한 사람이지."
방다병이 답답하게 문 밖을 삿대질하며 뱉은 말에, 이연화는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명치 위로 손을 얹었다. "생각이 하나 있긴 한데, 아비가 따라 줄지는 모르겠네." 이연화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시도하기도 전인데 실패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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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장소를 향해 걸어가면서, 적비성은 꽤 복합적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금원맹주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었는데, 여러 감정들 중 가장 강한 것은 아무래도 짜증이었다. 지난 이틀 동안, 방다병은 신경증이 온 환자처럼 굴었고 이연화는 줄곧 근심에 잠겨 있었다. 적비성은 자신을 이연화의 방에서 마주칠 때마다, 득달같이 달려와 미친 사람처럼 예법을 설파하는 방다병의 목을 비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방다병의 행동은, 아내의 연통을 받은 방칙사까지 천기산장에 도착했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금원맹주의 눈에, 이런 것들은 모두 귀찮은 절차에 불과했다. 방다병의 어머니는 적극적으로 그들을 방해할 마음이 없었고, 설령 방해한들 방다병이 이 관계에서 떨어져 나갈 일도 없었다. 때문에 적비성은 과히 긴장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장차 직간접적으로 협력할 대상이 될 수도 있으니, 그편의 요구에 맞추어 한 번 대면하는 일쯤은 필요하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 적비성은 탁자에 차려진 다과와 차를 보고 한쪽 눈썹을 슬쩍 들었다. 금원맹주로서 주로 상대하던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갖고 회동할 때 좀처럼 먹을 것을 준비하지 않았다. 설령 대접할 음식이 차려져 있다 해도, 십중팔구는 독공을 펼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불과했다. 조금 어색한 기분으로, 적비성은 뚜벅뚜벅 걸어 부부의 앞에 섰다. 하효혜가 예의 바른 미소를 엷게 띤 채 말했다.
"갑작스레 청했는데, 빨리 와주어 고마워요. 나는 천기당주 하효혜입니다. 이쪽은 소보의 부친이고요."
"처음 뵙겠소. 호부상서 방칙사라 하오."
방칙사가 짧게 말했다. 그 얼굴은 딱히 일그러져 있지 않았으나, 적비성은 상대가 자신을 매우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험하게 산 시절이 긴 만큼, 금원맹주는 상대의 적의나 거부감에 매우 익숙하면서도 예민했다. 하효혜가 방칙사를 잠깐 돌아보았다.
"원래 독대를 하려 했으나, 사안이 워낙 중한지라 남편이 급히 천기산장에 돌아왔어요. 양해해주면 고맙겠군요."
"상관 없소."
적비성이 짧게 말했다. 그 무뚝뚝한 태도에, 방칙사의 눈썹이 꿈틀했다. 극존대를 좀 쓰라고 얘기했잖아! 방다병의 전음이 시끄럽게 귀를 울렸다. 적비성은 그만 눈앞의 상대를 잊고 잠시 눈을 굴릴 뻔했다. 이런 참견은 필요 없다고 분명히 얘기했건만, 방다병과 이연화의 기척이 지근거리에서 느껴졌다. 적비성이 소위 '예법 수업'을 듣지 않으리란 사실이 확실해지자, 방다병은 '그럼 내가 근처에서 전음으로 적절한 대답을 알려줄 테니, 그대로 따라야 한다. 이연화가 먼저 꺼낸 제안이다!' 하는 요지의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물론 적비성은 한 번도 고개를 끄덕인 적이 없었다.
"일단 앉지요. 오늘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아요."
하효혜가 자리를 권했다. 적비성은 자리에 앉아, 가면을 벗고는 부부를 바라보았다. 설령 꿍꿍이를 품더라도 음흉하지 않으며, 타인에 대한 정과 신의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금원맹주로서는 별로 마주할 일이 없는 유형이기도 했다. 굳은 얼굴로 앉은 남편의 옆에서, 하효혜가 운을 뗐다.
"일단...어떤 상황인지는 소보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맹주와 소보가 이 선생과 이중 각인을 맺게 되었다고요."
"맞소."
"맹주는 우리 소보를 어떤 아이로 보십니까?"
하효혜의 질문에, 방다병이 허둥지둥 말했다. 그냥 거짓말을 해. 무조건 좋게 얘기해야 해! 적비성은 물론 그 말을 새겨듣지 않고,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을 툭 던졌다.
"방다병은 시끄러운 녀석이오."
답을 기다리며 찻잔을 기울이던 방칙사가 격한 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남편의 등을 쓸어주는 하효혜를 보며, 적비성은 퍽 이상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아들인데, 시끄럽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생각 좀 하고 말해! 방다병이 커다랗게 불평했다. 팔짱을 낀 적비성이 담백하게 이었다.
"나이에 비해 소질이 훌륭하니, 앞으로 수 년 더 있으면 절세 고수가 될 거요.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애송이 티도 많이 벗었소."
"꼭 휘하의 수하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구려."
방칙사가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내 휘하에 있었으면 더 여러 번 맞았을 텐데. 적비성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전음으로 들려오는 방다병의 비명을 흘려내느라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방소보를 그렇게 보지는 않소." 금원맹주는 그렇게만 대꾸하고 빈 잔에 차를 따랐다. 하효혜가 엷은 근심이 드리워진 얼굴로 말했다.
"적 맹주, 직설적으로 말하지요. 이렇게 묻는 것은, 이중 각인이란 관계가 특수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한 사람과 각인한 두 사람 사이에서 여러 갈등과 분쟁이 벌어지기도 하지요. 때로는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해 끔찍한 참극이 발생하기도 하고요. 적 맹주가 비록 인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여기지는 않으나, 이 관계가 혹시 소보에게 해를 주진 않을지 저어됩니다."
"내가 방소보를 죽일까 염려하는 거라면, 그럴 일은 없소."
적비성이 딱 잘랐다. 투박하다 못해 무례하게 들릴 법한 말이었지만, 금원맹주의 입장에서는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런 만큼 오히려 이런저런 설명을 갖다 붙이지 않았으나, 상대는 물론 적비성을 잘 알지 못했기에 희미한 의혹과 불신을 내비쳤다. 방칙사가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입을 열었다. 그 말투는 딱히 날카롭지 않고 단정했으나, 그 내용은 꽤 공격적이었다.
"어떻게 장담할 수 있소? 적 맹주의 행적을 보면, 자신의 심기를 거스른 자들을 냉혹하게 죽인 적이 많더이다. 소보는 적 맹주가 죽이지 않는다는 여자나 아이도 아니고, 상대의 눈치를 보아가며 할 말을 못 하는 아이도 아니오. 단지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그리 말하는 거라면-."
"여보, 진정해요. 내가 청해서 온 천기산장의 손님입니다."
하효혜가 그 팔을 잡으며 낮게 차분하게 건네자, 방칙사는 일단 입을 다물었으나 여전히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적비성이 한쪽 입매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방다병은 내 심기를 자주 거스르는 녀석이오. 그건 확실하지." 아무렇지 않게 건네자, 방칙사가 눈을 부릅떴다. 조금 전까지 지키던 평정을 대폭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너 자꾸 뭐하는 거야! 방다병과 이연화의 전음이 동시에 들려왔다. 이제는 둘이 함께 난리군. 적비성은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부부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듯한 기세의 방칙사를 향해, 금원맹주가 덤덤히 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죽이지 않았고, 앞으로도 죽일 마음은 없소. 그 녀석은 이연화에게 매우 중요하니, 내가 방소보를 해친다면 이연화는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나와 연을 끊어버릴 테지. 나는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소. 또한 지금의 내게 살심을 일으킬 만한 행동이라면, 이연화를 해치거나 내 뒤통수를 치는 짓일 텐데. 당신들이 아는 방소보가 그럴 사람이오?"
상대를 똑바로 보며 묻자, 방칙사는 금방 답하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 말하면 제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었고, 아니라 말하면 적비성의 이야기에 동조하는 셈이었다. 결국 호부상서는 매우 떨떠름한 투로 읊조렸다.
"기분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줄 알았더니, 논리에 따라 말하기도 하는구려."
"기분에 따라서만 행동하면 오래 살아남을 수 없소. 내가 적가보에서 고통과 함께 배운 것이지."
툭 대꾸한 적비성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 불편하고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비...분위기가 이게 뭐야. 네게 친절한 태도를 바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잠정적 동맹 상대를 대할 때의 예절은 갖춰야지. 이연화가 피로한 소리를 보냈다. 적비성은 방다병이 홀로 떠들 때보다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으나,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지금 굉장히 정중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대놓고 상대를 비웃지도 않았고, 위협하지도 않았으며, 허울 좋은 말로 둘러대지도 않았다. 적비성을 줄곧 유심히 살피던 하효혜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적 맹주가 허투루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도 알겠고요. 하지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맹주가 이끄는 금원맹은, 비록 극악무도한 범죄로 연명하지 않는다 하나 딱히 정도에 구애받지도 않는 조직이지요. 장차 어떤 분란과 풍파에 휘말렸을 때, 소보나 이 선생이 그로 인해 화를 입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만일, 금원맹을 해체하는 조건으로 이중 각인을 용인하겠다면 어쩔 거요?"
방칙사가 대뜸 물었다. 어, 일단 어떤 점을 걱정하시는지 잘 알겠다고 해. 그런 다음 정파의 명성에 누를 끼치거나 누군가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만일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말씀하신 방안도 심각하게 고려해 보겠다고 해. 실제로 당장 해체하라고 강요하시는 말씀이 아니니까 제발 그렇게 대답해! 방다병이 다급히 줄줄 늘어놓았다. 이 녀석은 전음으로도 정말 말이 많군. 이연화가 괜히 가르쳐 줬어. 적비성이 내심 신경질적으로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각인에 있어 당신들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소."
적비성이 미간을 슬쩍 좁힌 채 쏘아붙이자, 방다병이 다시 전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너 제정신이야? 내 말을 하나도 안 들을 거면, 최소한 성질 좀 누르면서 얘기해! 무례한 투로 말하지 좀 말고! 문간을 향해 정신 사나우니 저리 꺼지라 외치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하다, 적비성은 결국 차와 함께 그 욕구를 삼켜버리고 건넸다.
"하지만 각인에는 그 집안 사람들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설명을 원한다면 주도록 하겠소."
그렇게 말하고, 적비성이 품으로 손을 넣었다. 부부의 의아한 시선이 그 동작을 따라갔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기관에서 풀려난 방다병이 진정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방다병은 흐트러진 머리를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한 채 쏜살같이 달려와, 이연화를 붙들고 우리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쉴 틈 없이 물어댔다. 그 모양새가 병아리를 잃어버린 어미닭을 똑 닮아 있었다.
정신이 사나워 일단 방다병을 앉혀놓고 차를 마시게 한 다음, 이연화는 적당한 자초지종을 알려주었다. 하효혜가 입막음을 부탁한 부분은 쏙 빠진 내용이었다. 네 이야기가 맞는지 내게 검증하러 오셨으며, 아직 가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으며, 고민이 깊으신 듯 보였으며, 적비성을 따로 만나길 원하신다는 내용 정도였다. 방다병은 하효혜가 화를 내거나 이연화에게 포기해달라 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일차적으로 안도했으나, 금원맹주와의 독대를 청했다는 부분에선 전혀 안도하지 못했다.
"그건 좀...큰일이네."
"그렇지?"
방다병과 이연화가 근심스럽게 수군거리자, 곁에 섰던 적비성이 매우 불쾌하고도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들 그리 호들갑이지? 내가 방다병을 죽이지 않을까 염려한다고 했으니, 죽이지 않을 거라고 말하면 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아...네가 최소한의 도의를 갖춘 사람인지 확인해야겠다던 말은 잊었어?"
이연화가 한쪽 관자놀이를 비스듬히 짚은 채 건넸다. 방다병이 근심 가득한 한숨을 푹 내쉬며 턱을 괴었다. 적비성이 팔짱을 끼었다.
"그런 것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내게 최소한의 도의는 있겠지. 뭐가 걱정이냐."
"어떻게 자신하는데?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이며 돌아다녀 놓고선."
방다병이 뚱하게 돌아보았다. 적비성이 별말을 다 한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불성실하기는 하지만, 이연화는 어쨌든 정파인이다. 내가 상종 못할 사파라고 생각했다면 절대 어울리려 들지 않았겠지. 하 당주도 그렇게 말했잖나." 이연화가 가볍게 눈가를 만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안심할 수도 없었다.
"저기...이봐. 나야 너를 오랫동안 지켜봤으니 그런 판단을 내린 거지. 하지만 하 당주는 다르잖아. 아무리 연륜이 있는 분이라 해도, 짧은 시간 동안 상대를 다 파악하기란 쉽지 않아. 그러니 네 마음에는 안 들겠지만, 최소한 그 순간만큼이라도 네가 아는 정파인처럼 굴어봐. 사람을 대할 때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제발 무례한 소리는 하지 말고, 다짜고짜 하대하지도 말고."
"내가 개인적으로 깊이 아는 정파인은 너뿐인데. 사기꾼처럼 굴어 좋을 것도 없으니, 그냥 평소대로 만날 거다."
"맙소사. 하 당주께 미리 양해를 구해 놓아야겠어. 방소보, 너도 잘 얘기해 놔. 아비는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서, 하 당주가 보기에는 예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비칠 수도 있다고."
적비성이 대놓고 이죽거린 말에, 이연화가 방다병의 팔을 탁탁 치며 건넸다. 자신의 말에 과히 틀린 부분은 없었다. 기초적인 예법을 배워야 할 시기에, 적비성은 적가보에서 가혹하고 비인도적인 훈련을 거쳐 살수로 거듭나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시점부터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쑥불쑥 도전장을 내밀고 다녔으며, 또 어느 시점부터는 존상이란 이름을 단 채 많은 이들 위에 군림했으니 일상적인 예법을 잘 아는 편이 더욱 이상했다.
내심 한숨을 쉬다가, 이연화는 방다병의 상태를 보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바로 대답하는 대신, 방다병은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래, 방소보?" 방다병의 팔을 살짝 흔들자, 청년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 그 귀와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뭐야, 진짜 왜 이러지? 이연화가 함정을 의심하는 사람처럼 방다병을 바라보았다. 목을 가다듬은 방다병이 말했다.
"이연화. 어머니가 덮어놓고 반대하실 작정은 아닌 것 같지 않아?"
"뭐?"
이연화가 일부러 어이없는 소리를 냈다. 탁자를 짚은 방다병이 상체를 쑥 내밀었다. "안 된다고 하실 거면, 굳이 아비를 부를 필요도 없이 반대하셨을 거 아니야. 하지만 아비를 만나겠다고 하셨으니, 어쩌면 이 관계를 진지하게 고려하시는 중인지도 몰라." 동그란 눈동자가 흥분과 기대로 반짝였다. 앗, 이러면 안 되는데. 이연화가 적비성과 잠깐 시선을 교환했다. 그 입에서 곧 능란한 궤변이 술술 흘러나왔다.
"방소보, 진심으로 하는 얘기야? 반대하실 마음이 없었다면, 오늘 화가 나서 널 기관에 가두지 않으셨겠지. 오히려 상대가 적비성인 만큼, 거절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만남을 청하셨을 수도 있어. 금원맹주와 자기 자식을 엮는 일이 달가울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나는 방소보와 엮인 게 아니다, 너와 엮이다 보니 저 녀석도 끼어들게 된 것이지. 말은 똑바로 해."
"기분 나쁜 게 그 부분이야? 너도 참 너다, 적 맹주."
이연화가 혀를 차며 흘겨보았다. 방다병의 얼굴에서 재차 핏기가 빠져나갔다. 이연화의 말이 썩 그럴싸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이 녀석, 한동안 내 말에 잘 안 넘어오더니 이럴 때에는 또 쉽게 흔들리네. 이연화는 내심 어깨를 으쓱하며 양심의 가책을 흘려보냈다. 하 당주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울상을 지은 눈으로 안절부절못하던 방다병은, 이내 벌떡 일어나 적비성의 어깨를 잡았다. 적비성이 괴상한 눈으로 그 손과 방다병을 번갈아 보았다.
"안 되겠어, 내가 도와 예에 대해 가르쳐 줄게."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갑자기 군자는 못 되더라도, 심하게 흠잡힐 구석은 없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다섯 살 짜리도 알 수 있을 만큼 쉽게 가르쳐줄 테니까, 웃어른에 대한 예를 다해서 어머니를 만나야 해. 사소한 데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도, 어머니는 엄청 날카롭고 기억력도 좋단 말이야. 괜히 그 많은 사업들을 굴리면서 아직 실패하신 적이 없겠어? 그러니까, 어머니를 뵙기 전까지...언제 만난다고 했어?"
"글피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말씀드리려 했지."
이연화가 대답했다. 적비성의 어깨를 잡은 손아귀로 힘이 들어갔다. 금원맹주의 눈빛이 흉흉해졌으나, 방다병은 자신의 사정이 너무 급하여 상대의 편의를 보아줄 여력이라곤 조금도 없는 얼굴로 간곡히 외쳤다.
"이틀 동안, 내가 전력을 다해서 가르칠 테니 잘 따라와야 해. 어머니의 의도가 정확히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 때문에 이 각인을 깨려 드시진 않아야 하잖아!"
"이렇게까지 안 해도-."
적비성이 미간을 좁힌 채 투덜거렸다. 너, 비밀 지켜야 해. 이연화가 얼른 전음을 보내 경고했다. 하효혜에게 승낙의 마음이 만만하였다는 사실을 내비쳐서는 안 되었다. 친인들 앞에서 더욱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방다병의 성향으로 미루어보아, 하효혜가 건넨 말들을 알려준다면 바로 해해거리며 풀어진 얼굴로 돌아다닐 것이 뻔했다. 적비성의 낯이 매우 짜증스럽게 우그러졌다. "쓸데없군. 생각 없으니 놔라." 팩 쏘아붙이고, 적비성은 발길을 휙 돌려 방을 나가버렸다. "아비! 너 꼭 다시 와야 해, 알았지!" 방다병이 그 뒷모습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이연화가 얼른 그 팔을 끌어당겼다.
"됐어, 그만하고 너도 얼른 가서 쉬어. 잘 자야 또 다른 대책을 강구할 수 있지 않겠어."
타이르듯 건넨 말에, 방다병은 금방 수긍하는 대신 우물쭈물 이연화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연화가 또 왜 그러느냐는 시선을 보내자, 청년은 이연화의 양손을 꾹 잡고는 물었다.
"이연화, 너 아무래도 안색이 창백해 보여. 정말로 어머니한테 안 좋은 얘기 들은 건 아니지?"
"방소보, 너희 어머니를 그렇게 못 믿어?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도 내게 욕을 하실 분은 아니잖아. 그냥 이래저래 몸이 조금 지쳐서 그런 거니까, 괜히 오해하지 마."
이연화가 일부러 농담처럼 대꾸했으나, 방다병의 표정은 금방 펴지지 않았다. 고개를 슬쩍 숙인 청년이 중얼거렸다.
"어머니를 못 믿는 게 아니야. 다만...."
"다만, 뭐? 그럼 나를 못 믿어?"
짐짓 얼척없는 얼굴로 묻자, 방다병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숨을 쉬었다. 뭐야, 진짜인가? 이연화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살짝 붉어진 채 고민하더니, 방다병은 곧 이연화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맞아." 이연화가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무안하지만 동시에 진실한 얼굴로, 방다병은 맞잡은 손에 얼른 힘을 주었다. 이연화가 기분이 상해 손을 뿌리치고 돌아서지 않을까 염려한 듯한 반응이었다.
"너는-너는 항상 네가 내 앞날의 걸림돌이 될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어머니에게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해도, 네가 어머니의 말에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자칫하면 네가 또...."
"너만 남겨두고 어디로 사라질 것 같았다고?"
별 걱정을 다 한다는 투로 건네니, 방다병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그러나 이연화는 사실 매우 제발이 저린 상태였는데, 하효혜가 만일 대노하여 방다병과 거리를 두라고 요구했다면 두말없이 사라질 생각 또한 품었던 탓이었다. 물론 하 당주가 덮어놓고 성을 낼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으나, 하나뿐인 아들의 일이니 평소와 달리 격하게 반응한다 하여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방다병이 괜히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어린애 같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네가 날 두고 간 게 벌써 몇 번이야."
"그래, 그리고 네게 잡힌 것도 몇 번인지 모르겠다. 방다병, 나를 못 믿겠으면 네 의지를 믿어. 내가 사라지면, 너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또 찾아내지 않겠어? 나는 네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고."
그 어조는 타박이었지만, 그 내용은 재차 건네는 고백에 가까웠다(적어도 이연화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졌다). 말을 맺으며 방다병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자, 방다병은 조금 전보다도 훨씬 더 빨개진 얼굴로 흥 소리를 냈다. 아비조차 알고 있던 사실을 참 빨리도 깨달았다는 말을 웅얼거리다, 청년은 곧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릴 때 봤던 예법서들을 다시 꺼내야겠어. 적비성에게 고차원적인 얘기를 해봤자 먹히지 않을 거야."
"적당히 해, 방소보. 예법 같은 것은 속성으로 가르치기가 쉽지 않아. 설령 억지로 외우도록 할 순 있어도, 몸에 배인 습관으로 만들 수는 없어."
"그럼 어떡해? 아비가 아주 바보거나 천하의 악당이 아니란 건 나도 알아. 어머니께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어. 하지만 저딴 말투를 처음 대하면 백번 오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 봐, 이연화. 적비성이 초면의 상대한테 호감을 줄 만한 사람이야? 심병을 줄 만한 사람이지."
방다병이 답답하게 문 밖을 삿대질하며 뱉은 말에, 이연화는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명치 위로 손을 얹었다. "생각이 하나 있긴 한데, 아비가 따라 줄지는 모르겠네." 이연화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시도하기도 전인데 실패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약속 장소를 향해 걸어가면서, 적비성은 꽤 복합적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금원맹주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었는데, 여러 감정들 중 가장 강한 것은 아무래도 짜증이었다. 지난 이틀 동안, 방다병은 신경증이 온 환자처럼 굴었고 이연화는 줄곧 근심에 잠겨 있었다. 적비성은 자신을 이연화의 방에서 마주칠 때마다, 득달같이 달려와 미친 사람처럼 예법을 설파하는 방다병의 목을 비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방다병의 행동은, 아내의 연통을 받은 방칙사까지 천기산장에 도착했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금원맹주의 눈에, 이런 것들은 모두 귀찮은 절차에 불과했다. 방다병의 어머니는 적극적으로 그들을 방해할 마음이 없었고, 설령 방해한들 방다병이 이 관계에서 떨어져 나갈 일도 없었다. 때문에 적비성은 과히 긴장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장차 직간접적으로 협력할 대상이 될 수도 있으니, 그편의 요구에 맞추어 한 번 대면하는 일쯤은 필요하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 적비성은 탁자에 차려진 다과와 차를 보고 한쪽 눈썹을 슬쩍 들었다. 금원맹주로서 주로 상대하던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갖고 회동할 때 좀처럼 먹을 것을 준비하지 않았다. 설령 대접할 음식이 차려져 있다 해도, 십중팔구는 독공을 펼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불과했다. 조금 어색한 기분으로, 적비성은 뚜벅뚜벅 걸어 부부의 앞에 섰다. 하효혜가 예의 바른 미소를 엷게 띤 채 말했다.
"갑작스레 청했는데, 빨리 와주어 고마워요. 나는 천기당주 하효혜입니다. 이쪽은 소보의 부친이고요."
"처음 뵙겠소. 호부상서 방칙사라 하오."
방칙사가 짧게 말했다. 그 얼굴은 딱히 일그러져 있지 않았으나, 적비성은 상대가 자신을 매우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험하게 산 시절이 긴 만큼, 금원맹주는 상대의 적의나 거부감에 매우 익숙하면서도 예민했다. 하효혜가 방칙사를 잠깐 돌아보았다.
"원래 독대를 하려 했으나, 사안이 워낙 중한지라 남편이 급히 천기산장에 돌아왔어요. 양해해주면 고맙겠군요."
"상관 없소."
적비성이 짧게 말했다. 그 무뚝뚝한 태도에, 방칙사의 눈썹이 꿈틀했다. 극존대를 좀 쓰라고 얘기했잖아! 방다병의 전음이 시끄럽게 귀를 울렸다. 적비성은 그만 눈앞의 상대를 잊고 잠시 눈을 굴릴 뻔했다. 이런 참견은 필요 없다고 분명히 얘기했건만, 방다병과 이연화의 기척이 지근거리에서 느껴졌다. 적비성이 소위 '예법 수업'을 듣지 않으리란 사실이 확실해지자, 방다병은 '그럼 내가 근처에서 전음으로 적절한 대답을 알려줄 테니, 그대로 따라야 한다. 이연화가 먼저 꺼낸 제안이다!' 하는 요지의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물론 적비성은 한 번도 고개를 끄덕인 적이 없었다.
"일단 앉지요. 오늘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아요."
하효혜가 자리를 권했다. 적비성은 자리에 앉아, 가면을 벗고는 부부를 바라보았다. 설령 꿍꿍이를 품더라도 음흉하지 않으며, 타인에 대한 정과 신의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금원맹주로서는 별로 마주할 일이 없는 유형이기도 했다. 굳은 얼굴로 앉은 남편의 옆에서, 하효혜가 운을 뗐다.
"일단...어떤 상황인지는 소보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맹주와 소보가 이 선생과 이중 각인을 맺게 되었다고요."
"맞소."
"맹주는 우리 소보를 어떤 아이로 보십니까?"
하효혜의 질문에, 방다병이 허둥지둥 말했다. 그냥 거짓말을 해. 무조건 좋게 얘기해야 해! 적비성은 물론 그 말을 새겨듣지 않고,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을 툭 던졌다.
"방다병은 시끄러운 녀석이오."
답을 기다리며 찻잔을 기울이던 방칙사가 격한 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남편의 등을 쓸어주는 하효혜를 보며, 적비성은 퍽 이상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아들인데, 시끄럽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생각 좀 하고 말해! 방다병이 커다랗게 불평했다. 팔짱을 낀 적비성이 담백하게 이었다.
"나이에 비해 소질이 훌륭하니, 앞으로 수 년 더 있으면 절세 고수가 될 거요.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애송이 티도 많이 벗었소."
"꼭 휘하의 수하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구려."
방칙사가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내 휘하에 있었으면 더 여러 번 맞았을 텐데. 적비성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전음으로 들려오는 방다병의 비명을 흘려내느라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방소보를 그렇게 보지는 않소." 금원맹주는 그렇게만 대꾸하고 빈 잔에 차를 따랐다. 하효혜가 엷은 근심이 드리워진 얼굴로 말했다.
"적 맹주, 직설적으로 말하지요. 이렇게 묻는 것은, 이중 각인이란 관계가 특수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한 사람과 각인한 두 사람 사이에서 여러 갈등과 분쟁이 벌어지기도 하지요. 때로는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해 끔찍한 참극이 발생하기도 하고요. 적 맹주가 비록 인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여기지는 않으나, 이 관계가 혹시 소보에게 해를 주진 않을지 저어됩니다."
"내가 방소보를 죽일까 염려하는 거라면, 그럴 일은 없소."
적비성이 딱 잘랐다. 투박하다 못해 무례하게 들릴 법한 말이었지만, 금원맹주의 입장에서는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런 만큼 오히려 이런저런 설명을 갖다 붙이지 않았으나, 상대는 물론 적비성을 잘 알지 못했기에 희미한 의혹과 불신을 내비쳤다. 방칙사가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입을 열었다. 그 말투는 딱히 날카롭지 않고 단정했으나, 그 내용은 꽤 공격적이었다.
"어떻게 장담할 수 있소? 적 맹주의 행적을 보면, 자신의 심기를 거스른 자들을 냉혹하게 죽인 적이 많더이다. 소보는 적 맹주가 죽이지 않는다는 여자나 아이도 아니고, 상대의 눈치를 보아가며 할 말을 못 하는 아이도 아니오. 단지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그리 말하는 거라면-."
"여보, 진정해요. 내가 청해서 온 천기산장의 손님입니다."
하효혜가 그 팔을 잡으며 낮게 차분하게 건네자, 방칙사는 일단 입을 다물었으나 여전히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적비성이 한쪽 입매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방다병은 내 심기를 자주 거스르는 녀석이오. 그건 확실하지." 아무렇지 않게 건네자, 방칙사가 눈을 부릅떴다. 조금 전까지 지키던 평정을 대폭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너 자꾸 뭐하는 거야! 방다병과 이연화의 전음이 동시에 들려왔다. 이제는 둘이 함께 난리군. 적비성은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부부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듯한 기세의 방칙사를 향해, 금원맹주가 덤덤히 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죽이지 않았고, 앞으로도 죽일 마음은 없소. 그 녀석은 이연화에게 매우 중요하니, 내가 방소보를 해친다면 이연화는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나와 연을 끊어버릴 테지. 나는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소. 또한 지금의 내게 살심을 일으킬 만한 행동이라면, 이연화를 해치거나 내 뒤통수를 치는 짓일 텐데. 당신들이 아는 방소보가 그럴 사람이오?"
상대를 똑바로 보며 묻자, 방칙사는 금방 답하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 말하면 제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었고, 아니라 말하면 적비성의 이야기에 동조하는 셈이었다. 결국 호부상서는 매우 떨떠름한 투로 읊조렸다.
"기분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줄 알았더니, 논리에 따라 말하기도 하는구려."
"기분에 따라서만 행동하면 오래 살아남을 수 없소. 내가 적가보에서 고통과 함께 배운 것이지."
툭 대꾸한 적비성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 불편하고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비...분위기가 이게 뭐야. 네게 친절한 태도를 바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잠정적 동맹 상대를 대할 때의 예절은 갖춰야지. 이연화가 피로한 소리를 보냈다. 적비성은 방다병이 홀로 떠들 때보다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으나,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지금 굉장히 정중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대놓고 상대를 비웃지도 않았고, 위협하지도 않았으며, 허울 좋은 말로 둘러대지도 않았다. 적비성을 줄곧 유심히 살피던 하효혜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적 맹주가 허투루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도 알겠고요. 하지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맹주가 이끄는 금원맹은, 비록 극악무도한 범죄로 연명하지 않는다 하나 딱히 정도에 구애받지도 않는 조직이지요. 장차 어떤 분란과 풍파에 휘말렸을 때, 소보나 이 선생이 그로 인해 화를 입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만일, 금원맹을 해체하는 조건으로 이중 각인을 용인하겠다면 어쩔 거요?"
방칙사가 대뜸 물었다. 어, 일단 어떤 점을 걱정하시는지 잘 알겠다고 해. 그런 다음 정파의 명성에 누를 끼치거나 누군가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만일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말씀하신 방안도 심각하게 고려해 보겠다고 해. 실제로 당장 해체하라고 강요하시는 말씀이 아니니까 제발 그렇게 대답해! 방다병이 다급히 줄줄 늘어놓았다. 이 녀석은 전음으로도 정말 말이 많군. 이연화가 괜히 가르쳐 줬어. 적비성이 내심 신경질적으로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각인에 있어 당신들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소."
적비성이 미간을 슬쩍 좁힌 채 쏘아붙이자, 방다병이 다시 전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너 제정신이야? 내 말을 하나도 안 들을 거면, 최소한 성질 좀 누르면서 얘기해! 무례한 투로 말하지 좀 말고! 문간을 향해 정신 사나우니 저리 꺼지라 외치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하다, 적비성은 결국 차와 함께 그 욕구를 삼켜버리고 건넸다.
"하지만 각인에는 그 집안 사람들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설명을 원한다면 주도록 하겠소."
그렇게 말하고, 적비성이 품으로 손을 넣었다. 부부의 의아한 시선이 그 동작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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