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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1 20:13
얘네 어지간하면 안 엇갈릴 것 같은데 만약 엇갈린다면 둘이 사귀지 않은 상태에서 백호한테 애인이 생기는 게 유일할 것 같음

그래서 둘이 사귀지도 않으면서 기류만 타고 어정쩡하게 시간 보내다가 태웅이 먼저 미국 가고 나면 태웅이가 먼저 자기 마음 깨달을 것 같음.
처음엔 단순히 난 자리가 크게 와닿을 뿐이라고 생각했을거임. 옆에 착 달라붙어서 어그로 끌어대고 맹렬하게 쫓아오는 녀석이 사라졌으니 허전하다 느낄 법도 하지...라고 생각했지만 먼 타지 생활 도중 천하의 서태웅도 외로움을 느꼈던 어느날 밤, 가족도 아니고 같이 전국에 갔던 팀원들도 아닌 강백호가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자기 마음의 정체를 알아챘을듯.

강백호와 함께 하며 어떤 감정이 느껴진다는 건 알았음. 하지만 낯선 감정을 깊게 파고드는 건 두려운 일이었고 그보단 당장 백호와 함께 농구하며 즐거움을 느끼는게 더 좋았음.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진 못했지만 파고드는 순간 강백호와의 즐거움이 깨져버릴 거라는 건 확실하게 느껴졌거든. 그렇게 애써 묻어뒀던 감정이 외로움을 만나며 터진 것이었음.

그 때 그 알 수 없던 감정들이 다 사랑이었다니. 어이없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조금 원망스럽기도 하겠지.
그래도 강백호가 쫓아온다고 했으니까 이 헤어짐은 잠깐일 뿐이지. 확정난 건 없었으나 강백호는 반드시 미국에 올거라는 예감이 들었음. 어쩌면 강백호 본인보다 서태웅이 더 그 사실을 믿는 것 같았음.
미국에 오면 바로 내 마음을 보여줘야 하나? 그 녀석 남자도 오케이던가. 싫어하면 어떡하지? 누나 잡지 좀 볼 걸 그랬나... 그래도 나 없이 네가 재밌게 농구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이런 생각을 하며 백호가 없는 밤을 지새운 태웅이는 백호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음.


딱 1년이 지나 백호는 정말 미국땅을 밟아 태웅이를 만나러 왔음. 1학년 인터하이, 산왕과 맞붙었을 때 강백호가 마지막 골을 넣던 순간보다 더 심장이 뛰었음. 태웅인 짐짓 아닌 체 했지만 언제나 창백하던 볼에 홍조가 어리고 괜히 몸짓이 부산스러워져 딱 봐도 마음 있는 누군가를 기다리는구나 싶었음.
멀리서 빨간 머리카락이 보이자 심장의 박동 소리가 귓가에 들릴만큼 커졌음. 제가 곁에 없어도 열심히 쫓아왔는지 여전히 자신보다 조금(아주 조금) 더 큰 키로 태웅을 발견한 백호가 손을 번쩍 들어올렸음. 반짝이는 눈으로 백호의 몸짓 하나하나를 좇던 태웅의 눈동자에 점점 당혹이 번졌음. 번쩍 치켜든 백호의 왼쪽 손, 그 약지에는 빛나는 무언가가 걸려있었으니까.


동갑내기 매니저는 아니라고 했음. 그 사실이 태웅을 더욱 공포와 혼란에 빠트렸지만 백호는 눈치채지 못하고 떠들어댔음.
첫만남부터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까지, 백호는 상세히, 아주 상세히 말해주었고 그 바람에 태웅의 눈앞에 그 간의 러브스토리가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졌음.
밤늦게 남아 연습하던 농구부 남학생과 마찬가지로 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하던 취주악부 여학생의 첫 만남, 농구부의 사기 진작을 위해 취주악부가 시합 응원에 참가하게 되고 소녀는 림을 향해 뛰는 소년을, 소년은 트럼펫을 힘차게 부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고...... 누나가 보던 흔한 로맨스 영화 같은 이야기였음. 그리고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강백호였음. 남자주인공이 사랑하는 건 태평양 너머에서 농구를 하는 시커멓고 덩치 큰 남자가 아닌 그의 곁에서 음악으로 응원해준 당차고 조그만 소녀, 여자 주인공이었음.


멍한 태웅을 보며 백호가 혀를 쯧 찼음. 하여튼 허우대만 좋지 어디다 넋을 빼고 다니는 녀석이라니까.
너 임마 내가 먼저 연애해서 배아픈거냐? 그런거지?
자신의 약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태웅을 보며 백호가 낄낄 웃었음.


태웅인 고국과 미국을 가로막은 태평양에 약간의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음. 강백호가 없는 날들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건 태웅이었으니까. 그 여자애도 강백호의 빈자리를 외로워하고 슬퍼하겠지. 그리고 그녀 스스로처럼 누군가 그 틈을 파고 들어서... 아니, 그저 외로워하기만 해도 좋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유학이니 끝없는 날들에 외로워하다 제 풀에 지쳐주길, 더이상 견디지 못하여 주길 태웅이는 바라고 또 바랬음.
하지만 강백호가 사랑하는 그 여자는 외로움을 씹어 삼키기라도 했는지 백호의 손가락에서 반지가 사라지질 않았음.

붉은 머리가 거리낄 게 되지않는 미국 땅에서 백호는 저만의 매력을 고국에서보다 훨씬 더 빛냈음. 그런 백호에게 달라붙는 자들이 점점 늘자 태웅인 질투에 휩싸이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빠졌음. 저 녀석이 바다 건너 그 여자에게서 한 눈을 판다면, 만약 그래준다면 나에게도 기회가 주어지는게 아닌가.
태웅인 증명이 필요했음. 이 관계를 깨고 새 관계로 정립해도 좋다는 증명, 그러나 스스로는 겁이 나 누군가 시도해 성공해주길 바라는 증명이었음.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느바 리그에 뛰고 있는데도 반지는 빛이 조금 탁해졌을 뿐, 여전히 백호의 왼손 약지를 차지하고 있었음.
종종 스포츠 뉴스는 순애보라는 별명을 강백호에게 붙였고 백호는 그럴 때면 수줍어하다 텔레비전 너머 그녀에게 영상 편지를 보냈음. 그 모습을 보면서 태웅은 속이 바짝 타들어가다 못해 비틀리는 기분이었음.


왜 나는 안되는데. 똑같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처지에 왜 내 사랑은 기다려주질 않고 저 여자의 사랑은 기다려주는건데. 억울함과 원망이 불쑥불쑥 태웅의 마음을 두드렸음.
그 1년이 뭐라고, 그 1년이 아니었다면 우리 사이는 조금 달라질 수 있었을까.
만약 내가 바보같이 내 감정을 모른 체 하지 않았더라면, 너와 함께 하는 미래를 좀 더 깊게 생각해보았더라면,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 한 마디를 못해서 엇갈려버린 이 관계가 바뀔 수 있었을까.



태웅이 보고 있는 브라운관 속에선 빛바랜 반지 위에 다이아가 반짝이는 반지 하나를 더 낀 강백호가 환히 웃고 있었음.





태웅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