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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0 21:20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태웅은 노란색 지붕의 체육관을 찾았다. 초등부는 간식시간이었는지 삼삼오오 모여 빵과 팩음료를 하나씩 쥐고 있었다.
태웅이 체육관에 들어서자 새된 비명이 울려퍼졌다. 먹던 것도 내팽겨치고 달려오는 아이들에게 무성의한 끄덕임을 보여주는 태웅의 눈은 NBA 코트 위 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사인을 해달라, 슛을 보여 달라, 사진을 찍어 달라, 원온원을 해달라......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종알대는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그래 라고 대꾸하던 태웅의 눈에 난처한 표정의 대만이 보였다. 대만의 옆에는 눈을 휘둥그레 뜬 아까 그 소년이 서 있었다.
태웅은 잔인하게도 긴 다리로 성큼 걸어 아이들을 떼어내고 대만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붉은빛이 선명해졌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언제든 오라고 할 땐 언제고 묘하게 떨떠름한 목소리다. 그러나 태웅에겐 그다지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태웅은 대만에게 대꾸도 않고 옆의 꼬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기묘한 열기가 번들거리던 태웅의 눈은 눈꺼풀이 두 어번 내려오고 완전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꼬마의 정수리가 까맸다. 붉은빛이라 여겼던 머리카락은 염색약에 얼룩져있었다.
태웅의 눈빛에 실망감이 감돌았다. 그 모습을 보던 대만이 혀를 차며 태웅을 쫓으려 했다. 그러나 태웅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던 꼬마가 그보다 조금 빨랐다.
"뭘 봐?"
꼬마치고 상당히 도발적인 물음이다. 태웅은 순간 실망도 잊고 바보처럼 눈을 꿈뻑였다.
태웅이 계속 말을 않자 꼬마의 심기가 불편한지 눈썹과 눈매가 삐죽삐죽 솟구쳤다.
"뭘 보냐니까? 입에 지퍼 달았어?"
그제야 자신의 실례를 깨달은 태웅이 위기를 무마하려 머리를 굴렸다.
"머리가......"
"내 머리? 내 머리가 어때서."
꼬마는 마치 태웅의 다음말을 기다리듯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뾰족한 눈빛과 마주한 태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머리색이 예뻐서."
뚯밖의 말에 날카롭게 빛나던 소년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떨렸다. 태웅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꼬리를 물었다.
"어디서...염색했는지......"
꽤나 당황했는지 야무지게 끼고 있던 팔짱이 스르륵 풀렸다. 소년은 이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는지 잠시 당황해 대만을 올려다보았다. 당돌하게 태웅에게 달려들던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대만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지금 초등부 강당에 와서 할 말이냐? 태웅은 그런 말이 들리는 것 같은 대만의 눈빛을 슬쩍 피했다.
"염색은...집에서......아빠가 해줬는데......"
꼬마가 어물어물 대꾸했다.
태웅은 경청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노려보던 눈빛에 유순함이 감돌자 태웅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태웅은 초등부 소년들에게 함부로 예스를 남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고등부가 있는 강당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한참 넘겨 돌아왔지만 그에게 뭐라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뭘 하고 왔냐는 물음 대신 슛을 보여달라거나 자세 교정에 대한 질문이 날아왔다.
태웅은 약간 혼이 빠진 채 어린 선수들의 질문에 충실히 답을 해주며 캠프 둘째날의 오후 일정을 보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둘째날의 공식 일정이 종료되었다. 빽빽한 일정에 아이들은 지친 티를 내며 뒷정리를 시작했다.
공식 일정이 끝나면 원온원을 해달라던 선수들은 공을 쥐고 태웅을 찾는 대신 조용히 밀대를 집어들었다. 빈말로도 살가운 성격이라고 할 수 없는 태웅은 그런 아이들에게 구태여 말을 붙이지 않고 조용히 강당을 떠났다.
그대로 퇴근을 하려던 태웅을 붙잡은 건 중등부 코치였다. 이틀 연속 술자리는 조금 곤란한데 라고 생각하던 태웅에게 중등부 코치가 무언갈 불쑥 건넸다.
'정대만 감독이랑 아는 사이라며요? 초등부 강당에 이거 두고 가셨던데 부탁드려요.'
태웅은 제 손에 덜렁 남겨진 갈색 가죽 지갑을 보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몇 번의 연결음 끝에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시끄러운 잡음과 함께 태웅의 귀를 파고들었다.
"선배, 지갑 놓고가셨는데요."
"뭐? 그럴리가... 어? 어라? 어어?"
당황한 기색이 잔뜩 풍기는 목소리 옆으로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초등부라면 진작 공식 일정이 끝났겠건만 아직도 아이들을 봐주는 모양이다.
"어어..이거 어쩌냐. 얘들아 잠깐만-"
대만이 난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웅아, 너 여기 좀 와줄 수 있겠냐? 여기 사거리에 있는 마트인데......"
내일 만나면 드릴게요 라고 말하려던 태웅은 한숨과 함께 말을 삼켰다.

아니나 다를까 마트에 갔더니 아이들이 우글우글 하다. 과자가 잔뜩 담긴 바구니가 하나, 둘, 셋...... 지갑을 안 가져왔으면 꼼짝없이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했을 양이 상당했다. 물론 아이들의 원망어린 목소리는 덤으로 말이다.
과자 바구니를 발견한 죄로, 태웅은 지갑 배달에서 그치지 않고 과자를 상자에 담아 싣고 초등부 숙소에 도착했다.
대만과 태웅이 도착하자 초등부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우루루 쏟아져나와 두 사람에게 매달렸다.
"과자!"
"감독님! 제꺼도 사왔죠?"
"서태웅 선수다!"
"서태웅 선수! 나 아까 받은 사인 잃어버렸어요. 하나만 더 주세요."
태웅은 반쯤 남아있던 영혼마저 다 털리는 기분이 들었다. 대만은 아직도 기운이 팔팔한 지 아이들과 어울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태웅은 멍하니 과자를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기계적으로 사인을 했다. 고등부 아이들은 다 죽어가는데 초등부 아이들은 아직 쌩쌩했다.
"이녀석들아, 저녁 먹고 먹어야 한다니까?"
때이른 과자파티에 정대만이 쩔쩔 맸지만 이미 곳곳에서 고소하고 짭짤하며 달콤한 냄새가 났다.
정신없이 과자를 나눠주고 뜯어주고 닦아주길 몇 번 반복하자 차라리 풀코트 출전을 세 번 연속 하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음 주말에 원온원 일정 반드시 받아내야지 라고 생각하며 태웅은 소년들에게 둘러싸여있는 정대만을 노려보았다. 이번 일은 원온원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아이들과 놀아주던 대만은 때아닌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금세 아이들에게 정신을 뺏겨 곧 다가올 지옥의 원온원 기색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의 손에는 과자며 음료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모자라지않게 산 것인지 상자 안에는 아직 과자가 몇 개 남아 있었다. 상자를 한 쪽으로 치우려던 태웅은 갑자기 제 바지를 잡아당기는 감각에 놀라 고개를 내렸다.
입가에 초콜릿을 묻힌 소년이 태웅의 바지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혹시 과자를 받지 못했나? 싶었지만 소년의 손에는 먹다 만 과자가 들려 있었다. 과자는 하나씩 이라고 했는데..... 슬쩍 대만의 눈치를 살피던 태웅에게 소년이 말했다.
"호야도 줘야해요."
"호야?"
못 받은 친구가 있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태웅의 눈에는 빈 손인 아이들이 없었다.
"호야 아직 코트에 있어요."
소년이 과자를 우물거리며 바깥을 가리켰다.



소년의 말을 따라 밖으로 나가보니 어디선가 공을 튀기는 소리가 났다.
통- 통- 통-
고등부 소년들에 비하면 턱없이 귀여운 소리였으나 꽤나 옹골찼다.
소리를 따라 가니 두 개도 아니고 골대를 하나 세워둔 작은 코트가 나타났다. 변변찮은 조명도 없는데다 숙소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근처 도로의 가로등 불빛이 코트를 비추는 빛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 희미한 빛에 의지해 골을 향해 뛰어오르는 소년이 있었다.
어스름한 코트가 무서울 법도 한 데 소년은 용감하게 몇 번이고 골을 향해 달리고 뛰고 공을 던졌다.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모습이다.
물끄러미 소년을 보던 태웅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 겁쟁이보다 저 꼬마가 더 훌륭해. 태웅은 상자를 내려놓고 천천히 소년에게 다가갔다.

정신없이 농구에 빠져있던 소년은 낯선 사람의 발소리도 눈치 채지 못하고 다시 그물을 향해 슛을 쏘았다.
괜찮은 궤적을 그리는 모양새에 소년의 입가에 비슷한 호선이 그려졌다. 그러나 공은 그물을 스치는 소리를 내지 못했고 소년의 호선도 중간에 뚝 멈추고 말았다.
텅-
커다란 손이 쳐낸 공이 코트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갑작스런 난입에 당황하던 소년이 금세 버릇없는 태도로 물었다.
"뭐야?"
태웅은 소년의 키에 맞게 무릎을 굽히며 눈을 마주했다. 붉은색이 얼룩덜룩한 머리카락이 어둠에 가려져 까맣게 보였다.
"원온원."
소년의 눈이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태웅은 허리를 조금 더 숙여주며 속삭였다.
"쏴봐."
태웅의 말이 심기를 건드렸는지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년은 거리를 두고 틈을 노렸다. 아까와 같은 슛은 태웅의 신장에 가로막힐 게 뻔하다 생각한 소년은 태웅을 돌파할 구석을 찾아댔다.
또래에 비해 유려한 드리블 소리를 배경으로 쉴새없이 움직이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아이들이게 치여 탁빛이던 태웅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시계의 바늘이 한 바퀴를 다 돌기 전, 소년이 태웅의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태웅은 긴 팔을 뻗어 소년의 진입을 막았다. 소년이 칫 소리를 내며 몸을 물렸으나 태웅의 손이 더 빨랐다.
텅 소리를 내며 공이 소년의 손을 빠져나갔다. 앗 소리를 내기도 전에 공은 코트 구석으로 데구르르 굴러 떨어졌다.
소년이 구르는 공을 보고만 있자 태웅은 꼬마를 상대로 너무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같으면 꼬마고 뭐고 봐주지 않았겠지만 서른줄에 든 이후로는 자신도 체면이라는 걸 차릴 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꼬마가 울면 골치였다.
태웅이 조금 머쓱하게 소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망연자실했을거라 여긴 소년은 금세 공을 쫓아 쥐고 태웅의 앞으로 돌아왔다.
"다시해."
심술궃던 소년의 눈이 호승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소년이 땀범벅이 되어 코트에 드러눕자 태웅은 그제야 자신이 조금 과했다는 걸 알아챘다.
적당한 때에 끊었어야 했는데. 태웅이 민망한 기색으로 소년에게 다가왔다. 소년은 땀을 비오듯 흘리며 코트에 엎어져 있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뛰었으나 소년은 한 번도 골을 득점하지 못했다.
코트에 널부러져 있던 소년의 등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한 번쯤은 봐줬어야 했나. 꼬마가 울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인 태웅은 잔뜩 긴장한 채 곧 터질 폭탄을 기다렸다.
"으아아!!"
소년이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태웅은 움찔 놀라긴 했으나 울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안도를 느꼈다.
소년이 주먹을 불끈 쥐고 태웅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때리기라도 할 기세에 태웅이 슬쩍 몸을 뒤로 뺐다.
"내일 또 해."
소년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내뱉은 말에 태웅의 동공이 커졌다.
"내일은 반드시 골을 넣을거야. 반드시!"
호기로운 도전장이라기 보다 원수에게 하는 선전포고에 가까운 어투다. 소년은 태웅에게서 약속을 받아내야겠는지 새카만 눈으로 태웅을 노려보았다.
"......그래."
태웅이 긍정의 답을 내놓자 소년은 잠시 놀랐다가 조금 기쁜 기색을 띄었다가 다시 들끓는 눈이 되었다.
"꼭이야. 내일 저녁에 여기에서 만나."
소년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태웅이 바보처럼 그 손가락을 보고만 있자 답답해진 소년이 직접 태웅의 손을 끌어왔다. 조막만한 손이 불길처럼 뜨겁다.
태웅이 쓰는 볼펜보다 작은 새끼 손가락이 그의 새끼 손가락을 휘감았다. 약속의 모양새라기 보다 나무를 타고 오르는 덩굴 줄기의 모양새다.
"새끼 손가락 걸었으니까 잊으면 안돼. 약속을 깨면 새끼 손가락이 잘릴거야."
어린아이치고 잔혹한 으름장에 태웅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아이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엄지손가락을 꾹 맞대고 손바닥까지 비볐다.
약속을 '복사'해 나눠 갖고나서야 아이는 안심한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어른들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니까... 당신도 믿을 수 없지만 말야."
"난 거짓말 안 해."
"내일 두고보면 알겠지."
소년이 입을 삐죽이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태웅이 비져나오는 헛웃음을 참으며 다시 한 번 약속을 거듭하려던 때, 우렁찬 노성이 코트를 뒤흔들었다.
"호야! 서태웅!"
목소리의 주인은 정대만이었다. 아차 싶어진 태웅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정대만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가 니들 얼마나 찾았는 줄 아냐? 말도 없이 이탈하면 어떡해!"
태웅은 변명 대신 얌전히 뒷짐을 졌다. 살짝 고개를 숙이자 자신과 똑같은 자세로 풀죽은 채 고개를 숙인 아이가 보였다.
"호야 너, 지난 캠프에서도 마음대로 이탈해서 난리 난 거 기억 안 나?"
상습범이었나보군. 옛날이었다면 소년의 마음에 조금 더 공감했겠지만 같은 교육자 이름표를 달고 있는 지금은 차마 소년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
"너 자꾸 이러면 아빠한테 연락할거야!"
"아, 안돼요...!"
소년이 잔뜩 당황해 울먹거렸다. 제게 보인 당돌함이며 짓궃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아요, 삼촌!"
대만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기세에 태웅은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자신의 다리로 아이의 몸을 가렸다.
"제가 먼저 원온원 하자고 했어요."
온전히 아이 혼자 혼날 일이 아니었다. 태웅은 아이가 놀란 눈이 되어 자신을 보는 것도 모르고 대만에게 사과했다.
"과자 먹으라고 부르려다... 죄송합니다."
허리를 숙이는 태웅의 모습에 아이가 놀라 얼어붙었다. 허리를 숙여 사과하는 후배와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를 번갈아 보던 대만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래서야 화도 못 내겠다.
"하아...... 너희들 진짜......"
대만은 말을 고르는 것처럼 입을 우물거리다 목을 꺾고 한숨을 뿜었다. 한숨이라기엔 꼭 고함 같았다.
"...됐다. 호야 너는 들어가서 손 씻고 식당 가. 어딘지 알지?"
"네......"
"다들 저녁 먹으러 갔으니까 늦기 전에 빨리 가."
소년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고 숙소 쪽으로 달려갔다.
토도독 하는 발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미간을 꾹꾹 누르던 대만은 소년이 사라진 쪽을 눈으로 좇고 있는 태웅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
시선 섞인 침묵을 눈치 챈 태웅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대만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애 데리고 연습할거면 말하고 해라."
다시 그러지 말라는 소리가 들릴 줄 알았는데 뜻밖의 허락이 떨어졌다. 태웅이 조금 얼떨떨한 눈으로 대만을 보자 대만이 시선을 피하며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초등부에서 가장 뛰어난 애야. 열정은 캠프에서 제일이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달라붙던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등부 애들은 호야 따라가기 벅차하는데 그렇다고 중등부 애들을 붙이겠냐 고등부 애들을 붙이겠냐? 고작 8살 난 애한테......"
대만이 마른 세수를 하며 입술을 푸르르 떨었다.
"네가 좀 봐주면 쟤도 만족하겠지."
그래도 말은 하고 하라며 대만이 태웅에게 잔소리를 쏟아냈다.
"미국에서 살더니 만 나이처럼 살면 어떡하냐?"
"만 나이도 서른은 넘었는데요."
"자랑이다, 임마."
이런저런 실없는 소리 끝에 대만은 가보라며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코트를 벗어나려던 태웅이 아 소리를 내며 발걸음을 멈췄다.
"삼촌이라고 부르던데... 조카인가요?"
대만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지만 다행히 시간이 태웅의 눈을 어둡게 했다.
"아니. 지인 아들이라."
"그렇군요."
태웅은 궁금증이 해결됐는지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뒤도는 법 없이 코트를 떠났다. 태웅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대만은 앓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못해먹겠네, 진짜......"
대만이 쭈그려 앉은 채 머리를 벅벅 긁었다.





태웅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