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일본연예
- 일본연예
스즈키 대공령이 위치한 북부는 중앙으로부터 길게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험준하고 눈이 녹지 않는 숲이 끝없이 이어진 북부. 자원이 풍부한 곳은 아니었고 주민들도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나름의 삶을 꾸려가며 소소한 생활을 이어갔다. 추운 눈을 피해 벽난로에 모인 이들 사이에서는 수없이 많은 신화와 요정들의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저 깊은 숲, 순록이 빽빽한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눈에 발자국을 남기는 발자취를 북부의 사람들은 마법같은 이야기로 채워넣었다.
그러나 여태 정쟁에서 크게 눈에 띄지 않았던 탓이었을까. 최북단에서 황제의 기사단 역할을 하였던 스즈키 대공령은 어느 샌가 황가에 불만을 품은 귀족 연합의 타겟이 되었다. 귀족들은 반란의 깃발을 꽂기 위해 연합하여, 스즈키 대공령을 덮쳤다.
빽빽하던 숲이 불탔다. 도망가던 주민들이 다쳤다. 전쟁은 그들이 가꾸었던 삶을 거칠게 할퀴었다. 스즈키 가와 기사단은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피했어야 했던 전쟁.
마치다가 끝을 보지 못한 전쟁이었다.
*
황제의 이번 여름 휴가를 북부에서 보내기로 하였다는 말에 많은 이들이 놀랐다. 누군가는 황제의 고향이니만큼 조용한 휴가를 보내고자 함이라고 생각했고, 누군가는 척박해진 북부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움직임이라고 의견을 보탰다. 어느 쪽이든 반대하는 의견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그 행차가 황비인 마치다의 말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도 없었다.
대공령이라고는 하나 황궁에 비하면 소박한 크기라, 동행하는 사용인도 최소한으로 꾸려졌다. 알게 모르게 황궁 생활을 불편해했던 마치다에게는 오히려 좋은 소식이었다. 스즈키와 유이치, 자신까지 셋이서 한 마차를 타고 이동하니 황가의 행렬보다는 가족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유이치는 창밖을 보며 잔뜩 신이 나 있었다. 늘 의젓한 모습이었지만 이럴 때면 영락없는 어린 아이였다. 바쁘게 깜빡이는 눈에 마치다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유이치는 북부에 가본 적이 있니?”
유이치가 고개를 돌려 마치다를 바라보았다. 뭔가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의아한 얼굴의 마치다가 되묻기도 전에 스즈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태자는 가본 적이 없다.”
“네? 하지만 폐하의 고향인데도..”
스즈키는 흘금 시선을 돌려 마치다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아무 것도 없으니까.”
마치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스즈키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이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의 눈에서는 일말의 관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말마따라, 그곳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그러고보니 북부로 떠난다 할때에 고토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곳에는 유명한 건 하나도 없고 순 숲과 눈밖에 없지 않느냐고. 유명한 식재료랄 것도 없으니 살이 쪽 빠져서 오시겠다며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꼭 고토 뿐은 아니었다. 황제의 피서지가 의외였던 이유 중 하나는 정말로, 북부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전쟁 후로 버려지다시피 한 지역이었기에, 스즈키 가의 사용인들에 의해 관리된 대공성을 빼고는 사람 지낼만한 곳도 몇 없다고 들었다.
“저, 이렇게 궁을 멀리 떠나는 것도 처음입니다.”
태자가 황제의 눈치를 보다가 덧붙였다. 그러고보니 피서지가 정해진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였지. 인생의 첫 모험이 얼마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지는 마치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역시 북부로 가길 잘했어요.”
“비 전하께서는 왜 북부에 가고 싶으셨어요?”
마치다는 여전히 밖을 바라보고 있는 스즈키의 옆선을 잠시 바라보았다. 매끄러운 눈꼬리도 이순간만큼은 즐거워보이지 않았다.
“…폐하의 추억이 있을테니까요.”
“추억이요?”
“네. 추억. 어릴 적에 지내셨던 방이나, 말을 타고 돌아다녔을 숲, 호수 … 그런 추억들이요.”
매섭게 추운 북부도 여름만큼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람들은 겨우내 그리워했던 햇살을 만끽했고, 숲은 작게나마 생명을 터뜨렸다. 성의 뒤편 숲을 조금만 걸어가면 나타나는 얼음이 녹은 호수는 햇살에 반짝이며 추위가 떠나갔음을 알렸다.
“그대가 그걸 어찌 아는가.”
스즈키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뒤따랐다. 마치다는 아무렇지 않게 스즈키와 눈을 마주했다.
10년의 세월이 북부를 어떻게 할퀴고 지나갔을지, 마치다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10년 전, 그리고 그보다 더 어렸을 무렵의 기억들은 여전히 생생했다. 자신이,스즈키가 살았던 고향이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고요한 북부에서 함께한 나날들을.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다고 하지 말아줘, 마치다는 하고픈 말을 숨긴 채 미소를 기웠다.
“… 상상이에요.”
스즈키는 아무 말이 없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유이치는 손을 꾸물거리다가 이윽고 반대편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색해진 마차 속 공기에 마치다는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단란한 가족 여행은 욕심이었을까.
*
북부에 도착하기 전 마차는 초입에 위치한 여관에서 잠시 멈추었다. 밤이 깊어지고 있어 하룻밤을 쉬어가기 위함이었다. 아직 북부에 다다르지 않았음에도, 시원할 만큼 상쾌한 공기와 어두울 만치 빽빽한 숲이 중앙으로부터 멀리 떠나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내내 들떠있던 마치다였건만, 도달할 무렵부터 마치다는 몸이 좋지 않았다. 마음같아서는 조금이라도 더 이동을 재촉하고 싶었지만, 노보루의 몸은 오랜 마차 탑승에 지친 몸이었다. 마차에서 내려오던 마치다는 갑작스레 현기증이 나 휘청였다.
마치다의 팔을 누군가 단단히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마치다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을 지도 모른다.
“몸이 좋지 않으면 말을 했어야지.”
스즈키였다. 마치다는 일순 가까워진 거리감에 몸이 긴장되었다.
실은 그뿐이 아니었다. 스즈키의 가까이 기대자 왜인지 속이 메슥거리기까지 했다. 순전 멀미라도 하는 기분에 마치다는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죄송합니다. 잠시 밖에서 바람을 좀 쐬고 들어가겠습니다.”
스즈키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팔을 놓아주었다.
“숲 속은 어두워 위험하니, 이 근방에만 있어.”
마치다는 얼른 몸을 숙이고는 자리를 피했다.
스즈키에게서 멀어지자 몸은 훨씬 편해졌다. 마차 멀미가 아니라 스즈키 멀미였단 말인가. 마치다는 아무도 몰래 입을 삐쭉였다. 설마 내가 그러려고. 오랜만에 탄 마차가 불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노보루의 몸은 확실히 이런 장거리의 여행에 익숙치 않았으므로.
바람이 나무들을 파헤치며 시원하게 솨아아 소리를 내었다. 멍하니 흰 나무들 위로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곁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태자였다.
“유이치, 추운데 왜 나와있어. 들어가서 쉬지 않고.”
“아니에요. 비 전하와 같이 있고 싶어서요.”
유이치는 천천히 그의 옆에 다가와 그처럼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마치다의 허리쯤에나 오는 키였다. 그럼에도 어른스레 자신을 달래는 모습이 황제보다 나았다. 마치다는 웃으며 그의 작은 손을 잡았다.
“유이치, 마차에서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었니?”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여서, 유이치는 화들짝 놀라 마치다를 바라보았다.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투명한 눈이 어릴 적 스즈키랑 똑같았다. 스즈키는 거짓말을 할 때면 꼭 마치다에게 들키고는 했다. 유이치는 안절부절 못하며 마치다를 바라보다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북부에 와본 적 있어요.”
“정말?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아버지… 폐하 몰래 왔던 거라서요.”
유이치가 스즈키 몰래 다녀왔다니. 그런 배짱이 있는 아이였나? 마치다는 상체를 숙여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유이치가 왜 그랬을까?”
유이치는 그런 마치다를 쳐다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조그만 입술이 열렸다.
“이번 생일 축하 연회를 하기 전에… 어머니의 그림을 보고 싶었어요.”
“… …”
“대공가에는 아직 그림이 남아있다고 들었거든요. ”
… … 폐하께는 비밀이에요. 유이치는 작게 중얼거렸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를 그리워했을 뿐인데, 아이는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소근거렸다.
아이는 자신보다 몇 배로 슬퍼할 아버지를 생각해 배려했을 것이다. 기억을 열어보는 것조차 힘들어 어머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그러나 그의 그림만은 깊숙히 남겨둔 그의 아버지를 위해서. 그 사실이 마치다는 심장이 아플 정도로 슬펐다.
어떻게 해야 다시 곁에 있을 수 있는 걸까. 나는 나이지만, 또한 내가 아닌데. 지나버린 10년의 그리움과 슬픔을 어떻게 채워줄 수 있는 걸까. 마치다는 유이치를 꼭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작은 손이 마치다를 마주 껴안았다.
둘의 머리를 몇 차례 바람이 쓰다듬어주었다.
“이만 들어갈까.”
“네. 얼른 들어가요. 북부의 숲은 무서워요.”
“어머, 왜 그렇게 생각해?”
“길을 금방 잃어버리니까요.”
마치다는 몸을 일으켰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잃어버린 적이 있어?”
“… …”
“이것도 비밀?”
“비밀.”
유이치가 베시시 웃었다. 아이의 웃는 얼굴에 마치다도 금세 웃게 되었다. 방금 전까지 아이의 슬픔에 미안해하고 있었으면서, 아이에게는 받기만 했다.
마치다는 아이의 손등을 살살 쓸어주었다.
“대공령에 도착하면, 길을 잘 찾는 법을 알려줄게. 북부의 숲에 대해.”
여태 가르쳐주지 못한 것들을 모두 알려줘야지. 마치다는 빙긋 웃었다.
북부의 성이 가까워지자 마치다는 마차 대신 말을 타고 싶다고 청했다. 당연히 사용인들은 말 한 번 타본 일이 없는 영애를 무척이나 걱정하여 반대했다. 다만 황제만은 예외였다.
“말을 타본 적 있나?”
스즈키의 물음에 마치다는 웃음을 삼켰다. 그야 여기서부터 마치다는 눈을 감고도 말을 몰 수 있는 곳이었다. 주된 생계 수단이 사냥인 북부에서는 어릴 때부터 말을 가르쳤다. 아이들은 처음 말을 받는 날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였다. 더군다나 마치다는 그 대공령의 기사단장이었다.
“어릴 적에 마을에서 말을 탔었습니다.”
스즈키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물론 노보루는 아니지만. 마치다는 애써 침착하게 웃어보였다. 과연 몇 차례의 병약한 모습을 보였던 마치다를 그가 믿어줄지…
다행히도, 황제가 사용인 몇에게 명해, 그들이 두 마리의 말을 끌고 왔다. 아무래도 혼자 타고 가도록 하기엔 못미더운 모양이었다.
자신을 보조할 이이니 아몬이나, 다른 기사가 타려나. 익숙하게 말 안장 위로 올라타 앉아 말의 갈기를 쓰다듬고 있는데, 다른 말 한 마리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 위에는 스즈키가 있었다.
“스, 폐하, 어찌…”
“신경 쓰지 말게. 나도 마차보다 말이 편하거든.”
물론 스즈키는 정말로 말이 더 편할 터이다. 스즈키만큼 날쌔게 말을 모는 이는 북부에서 마치다 외엔 손을 꼽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이 높이에서 스즈키를 마지막으로 본 건…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던 마치다가 말끄럼히 바라보고만 있자, 스즈키는 괜히 고삐를 틀어 말의 방향을 바꿨다.
“황비는.”
“네?”
“혼자서도 잘 타는군.”
그야 기사였으니까… 마치다는 먼저 출발한 스즈키의 뒷통수를 바라보다 얼른 뒤쫓았다. 혹시, 평민인 노보루가 말을 익숙하게 모는 건 이상한 건가? 그러고보니 남부의 아이들은 어릴 때 말을 안 탈지도 모른다. 마치다는 괜히 찔려서 덧붙였다.
“말을 타고 다니는 기사들을 동경했거든요.”
“기사들을?”
“말 위에서 어쩜 그렇게 날쌔게 움직이던지… 말을 타면서 활을 쏘는 이들도 있지 않나요?”
“… …”
“… 이상한가요?”
“그보다는… 의외로군. 말을 타기엔 발목이 불편했을텐데.”
“아, 음…”
아차, 그랬지. 마치다는 노보루의 발목을 자꾸 잊고는 했다. 뭐, 노보루가 왜 다쳤는지 아는 사람은 저 멀리에 있으니, 마치다는 적당히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어릴 땐 괜찮았습니다. 발목은 최근에 다쳤어요.”
“그래도 무리하지 마라. 내 말보다 빠르게 가지 마.”
스즈키의 말이 마치다의 옆에 따라붙었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이제 겨우 경보하는 정도의 속도였다. 북부의 시원한 공기가 마치다의 뺨을 간질였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기분 좋은 추위였다. 마치다는 저도 모르게 조금 웃어버렸다.
“그러면 조금만 더 빨리 가주시면 안될까요? 폐하의 말이 더 뛰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스즈키가 여전히 놀란 눈으로 마치다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더 속도를 높이면 말이 놀라.”
“하지만 폐하께서는 충분히 달리실 수 있잖아요.”
스즈키는 완고했다. 마치다는 조금 더 속도를 내고 싶었다. 언제 또 이 길을 말을 타고 달려볼 수 있을지 몰랐다. 두 번 다시 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의 고향, 북부의 시원한 숲길을.
마치다는 실수인 척 말의 옆구리를 찼다. 말이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다는 당황한 척 스즈키를 돌아보았다.
“어어, 폐하-.”
“황비!”
스즈키가 놀라 마치다를 뒤쫓았다. 그러면 마치다는 조금 더 속도를 냈다. 폐하, 폐하, 하고 실컷 부르면서 마치다는 숲 속을 내리 뛰어 올라갔다. 말은 주인의 당황한 목소리보다 단단히 쥔 목줄을 신뢰했는지 빠르게도 뛰어갔다. 스즈키는 마치다를 가까이서 뒤쫓았다. 말을 세워, 스즈키의 말에도 마치다는 모른 채 말을 재촉할 뿐이었다.
‘성이 보일 때까지 경주하자!’
어릴 적의 기억이 마치다를 또 같이 간지럽혔다. 스즈키와 경쟁하듯 오르막길 사이로 말을 재촉하다보면, 빽빽한 나무들이 조금씩 간격을 두고, 그 사이로 높은 돌벽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운 순간이었다.
이제 정말로 스즈키가 자신을 낚아채기 전에 말을 세워야겠다 싶어,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기껏 단장했던 황비의 머리가 바람에 흩날려 엉망이 되었다.
그리고 스즈키는 그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찢을듯 가득 채우는 동안에도,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