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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5 09:17
안녕, 사와키타입니다.

여기가 안드로이드 게시판 맞죠? 로봇 이야기만 하는 전용 게시판이 있다니 세상 참 좋아졌다~
음, 별 건 아니고 고민이 있어서요, 조언을 좀 구할 수 있나 해서.
어… 어디서부터 말하지? 일단 제가 안드로이드인 것 같아요. 아니지, 안드로이드가 맞아요.
말이 좀 이상하죠? 그렇지만 나도 최근에 알았는걸. 그걸 어떻게 최근에 알 수 있냐고 되묻지 말고 차분히 들어봐요.

저에게는 1살 위의 연인이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과 입술이 부어서 못생겼고 말수는 적고 무뚝뚝하면서 엉뚱하고 이상한 말투까지 사용하는데요, 가끔 웃어줄 때 아주 예뻐요. 눈이 곡선을 그리고 눈썹이 아래로 내려가서 울상인 것처럼 찡그리면서 웃는데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항상 웃게 해주고 싶어요.

그 사람은 지금 감독을 하고 있는데 한 때 농구선수였어요. 그것도 꽤 유명했데요. 포지션이나 농구 스타일까지 나열할 수 있는데 그건 패스. 누군지 특정되면 안 되니까. 뭐, 로봇들은 알아도 별 상관없나?

아무튼 저에게 연상의 무뚝뚝하고 이상하지만 사실 다정하고 능력 좋은 애인이 있는데, 그 사람은 저를 아주 소중히 대해줘요.

형은 감독일 때문에 바빠서 집안일을 제가 다 책임지는데요, 새벽부터 일어나서 아침밥을 차리고 형이 먹을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요. 형이 일을 마치고 오기 전까지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끝내고 빨래를 널고 저녁을 준비하고. 집에만 있어도 지루할 틈이 없어요. 가끔 화장실 청소나 유리창 청소, 장식장 청소, 이것저것 하다보면 형 올 시간도 까먹고 바쁘게 움직이다가 배달음식 시켜먹기도 한다니까요 참.

…형은 그걸 늘 미안해해요. 언제나 단정하고 똑부러질 것 같은 형을 챙기고, 형이 먹을 음식을 손수 준비하는 건 내 기쁨인데, 늘 신경 쓰이는지 귀중한 주말에 집안일을 도맡으려고 하죠.

제가 연애할 때 좀 귀찮은 타입이거든요. 앵기고 칭얼대고 금방 울어버리고. 사실 저도 고쳐야 한다는 거 알면서도 형이 받아주니까 어쩔 수 없이 또 어리게 굴고 말아요.
나는 그게 형이 나를 너무 사랑해서, 형의 사랑의 방식이 한 수 굽히고 상대를 우선시하는 거여서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그렇잖아요. 벌써 3년이에요. 3년동안 동거하는데 그 무뚝뚝한 사람이 항상 내 기분을 먼저 살피고 퇴근 길에 내가 좋아하는 간식이나 꽃을 사오고 애정표현이 적다고 싸운 뒤로 자기 전에 늘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는 거, 정말 사랑하지 않으면 어렵잖아요.

그런데 말이에요. 일주일 전에 형이 집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그 때 형은 나랑 같이 영화를 보고 있어서 전화를 무시하려고 했거든요. 형은 나와 있는 시간을 아주 소중히 여기니까.

그런데도 전화벨 소리가 멈추질 않아서 내가 먼저 전화 받아보라고 권했어요. 급한 전화면 어떡하냐고.
재밌는 거 알려줄까요? 급한 전화 맞더라고요.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던 애인이 깨어났다는 전화가 급한 일이 아니면 뭐겠어요?

하하 웃기죠? 분명 아까까지 애인 자랑을 실컷 했는데, 그 사람은 다른 애인이 있었다니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죠?
형은 쇼파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목소리가 잠기는지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면서, 정말이냐고 되물었어요. 몸의 잔떨림이 멈추질 않더라고요. 나는 놀라서 형이 혹여나 넘어질까 팔을 붙잡았어요.

형은 그제야 날 돌아보더라고요. 나를 잠시 잊은 사람처럼.

형은 당장 나가봐야 한다고 했어요. 나는 본능적으로 어떤 겁이 나더라고요. 이 사람을 보내면 안 되겠다는 직감. 만약 형을 보내준다면, 형이 영영 내게서 떠나갈 것 같았아요.
나는 왠지 눈물이 나올 거 같아서 애써 웃었어요. 가지 마라고 붙잡았죠. 애교도 부려보면서 시간도 늦었는데 내일 가보면 안 되냐고 설득했어요.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냐고 이유를 넌지시 물으면서.

형은 늘 날 소중히 대하니까… 못이기는 척 어리광을 받아주니까, 이번에도 그래줄 거라고 내심 믿었는지도 몰라요.

형은… 웃지 않았어요.

형은 봐주지도 져주지도 않았어요.

그 사람은 겉옷을 챙겼어요, 말을 들어줄 시간조차 없다는 듯이. 신발을 구겨 신었죠, 붙잡는 손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울음을 터뜨렸는데 매정하게 손을 떼어냈어요. 그런데도 아주 모질지는 못해서 조심스러운 손길로.

형이 그렇게 가고 미치는 줄 알았어요. 너무 무서워서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문득, ‘정우성’. 전화에서 얼핏 들은 그 세 글자가 떠올랐어요.
나는 급하게 인터넷에 그 이름을 쳐봤어요. 아주 많은 정보가 나오더라고요. 그 사람은 NBA의 선수였고 비인기 종목이었던 한국의 농구를 전성기로 이끈 스타선수더라고요. 5년 전에 팀의 우승을 이끌어낸 MVP였는데, 그 탓에 원한을 가진 상대팀의 극성팬에게 교통사고를 당한 후 의식불명. 드라마 같은 이야기였어요. 만약, 형이 받은 전화대로 깨어난 게 맞다면 더욱더.

그리고 나랑 아주 닮아있었어요. 아니, 정확히는 내가 그 사람과 똑같이 생겼죠.

정우성 선수가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내가 어릴 적 부모를 잃어버렸다거나 세간에 숨겨져서 자랐을 가능성은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나는 감정에 솔직할 뿐이지, 생각이 어린 게 아니니까. 그런 허무맹랑한 추측으로 넘어가기엔 모든 상황이 너무 이상했어요.

나는 뭐라도 나올까 싶어서 형의 방을 뒤졌어요. 그리고 장롱 구석에 형이 쓴 일기를 발견했어요.
나는 죄책감도 모르고 일기장을 열고 글을 읽어내려갔어요. 믿기지 않아서 읽고 다시 또 읽고. 형의 반듯한 필체를 눈감고도 그려낼 수 있을만큼 계속해서 내용을 이해하려고 읽었어요.

나는,


……


네, 그렇게 된 이야기랍니다.

이제는 놓아주라고 말하는 주변인들을 만류에도 오랜 애인을 떠나보낼 수 없어서, 그 사람의 DNA로 불법 안드로이드를 제작한 사랑 이야기. 꽤 로맨틱하나요?

다정한 제 애인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 모양이에요. 일기장을 읽는 내내 형의 후회와 미련이 내게도 느껴져서 가슴이 아릿할 정도였다니까요. 그래도 사랑하는 애인이 눈을 떴으니까 해피엔딩 아니겠어요?


근데요,


그러면 나는요?


안드로이드는 아무리 사람과 유사해도 자신이 로봇인 걸 인지하게 되어있다고 들었어요. 그야 자신이 진짜 인간이라고 착각하면 안 되니까. 또 인간행세를 하며 다른 인간을 속여서도 안 되니까.
그런데 나는 그것조차 몰랐어요. 당신은 나에게 애인의 영혼을 불어놓은 것마냥 정말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만들었어요. 형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 대하듯 하니까 나는 내가 사람이 아닐 거라 의심조차 못했어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해요?

너무 오랫동안 인간흉내를 내다보니 제가 진짜 인간이라 생각하나 봐요.

그 사람을 사랑해요.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내가 느끼는 감정이 거짓일 수 있나요?

형은 그 사람의 옆에서 몇 년간 움직이지 않아 근육이 빠지고 굳어있을 다리를 무사히 재활하도록 돕겠죠.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한 시도 떠나지 않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살피겠죠.
형은 다정하니까 한 때 제게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을 안심시키려 웃으며 달래줄 거예요.

하지만 지난 3년동안 당신 곁에 있던 건 나잖아. 당신을 웃기려고 노력한 것도 당신과 함께 시간을 나눈 것도 나잖아요. 그 사람과 내가 다른 건 고작 농구를 했다는 거 차이인데. 고작 그거 뿐인데.

나는 그 사람의 DNA를 받아서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게 아니에요. 당신이 기뻐하길 바라며 음식을 연구했던 것도 그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저는 아무말도 못 했어요.

당신에겐 2번째 기회가 주어졌는데 나에게는 아무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어.

형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형은 받지 않았어요.

다시 걸었어요.

형은, 받지 않았어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형이 무슨 말을 꺼낼지 감도 안 잡히니까. 그래서 나도 다시 걸지 않았어요.

이걸 보는 사람이 있다면 알려줘요. 당신이 로봇이든 사람이든 상관없어요.

형이 내게 돌아올까요?

형이 절 속인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아무렇지 않게 돌아온다면, 형이 좋아하던 것들을 한 데 모아 저녁을 차리고 평소처럼 웃어보일 테니까. 나한테 기회를 줘요.
3년이면 전애인 정도는 이미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잖아.
부탁이에요. 도와주세요, 제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군가 저한테 알려줘요.




형, 보고있어요?




우성명헌  사와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