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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1 22:59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다병은 공벌레가 되었다.
심리적으로는 완전히 그랬고, 신체적으로는 반쯤 그랬다.
이연화가 기절한 후, 그 체취는 한결 견딜 만한 수준까지 누그러졌다. 아직 열이 있어 보였으나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심각하게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그에 따르듯이 방다병도 서서히 제정신을 찾았는데, 바른 가정에서 바른 교육을 받으며 자란 방 공자는 자신이 저지른 행각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도와준다고 해놓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열심히 부순 끝에 완전히 밑바닥까지 도달해버린 꼴이었다. 하지만 오래 굳어 있을 틈도 없었다. 언제라도 백천원 사람들 혹은 또 다른 적이 등장할 수 있었기에, 방다병은 영혼이 빠진 껍데기처럼 삐걱삐걱 움직여 엉망이 된 현장을 정리하고 옷을 바꾸어 입었다.
석 누님이 알면 날 죽이려고 들 거야. 어머니도 나한테 엄청나게 실망할 텐데. 아니, 뭣보다 이연화가 날 다신 안 보려 들면 어떡하지? 어떤 꿈에서보다 강렬한 첫 경험을 한 양인답지 않게, 방다병은 급속도로 초조해졌다. 그러면서도 그 손은 부지런히 움직여, 적비성과 함께 이연화의 몸을 닦아내고 새 옷을 입혀주었다. 힐끗 돌아본 적비성의 얼굴은 평소와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방다병은 괜히 억울해졌다. 물론 군자의 덕이라고는 모를 저 대마왕은 아무렇지 않겠지! 오히려 속으로 좋아하고 있는 거 아니야? 입을 비죽거리며, 방다병은 이연화를 이불에 둘둘 말아두었다가 백천원 사람들을 맞았다.
"미약의 흔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내력을 끝까지 소진하고 나니, 눌렸던 희락기가 찾아왔던 듯합니다. 지금은 많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백천원 사람들과 함께 도착했던 관하몽이, 인근 객잔에서 이연화를 진맥하며 말했다. 방다병은 그 옆에서 보기 딱할 만큼 움츠러든 채 의원의 말을 들었다. 관하몽의 눈썹이 까딱 움직였다.
"그런데...각인을 한 맥이군요."
방다병이 더욱 쪼그라들었다. 관하몽의 눈썹이 다시 까딱했다.
"두 명하고요...?"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의원의 입으로 듣자 더욱 난감하고도 놀라웠다. 이중 각인은 전례가 없지 않았으나 꽤 드문 현상이었다. 청년은 조금 미칠 듯한 심정으로 양쪽 뺨을 감쌌다. 안 그래도 중대한 사안이, 한 차례 더 꼬여 방다병의 목을 칭칭 감고 있었다. 조용히 묻는 시선에, 방다병은 이 자리에 없는 적비성을 원망하며 새빨개진 얼굴로 당시의 상황을 더듬더듬 설명했다. 놀랍게도, 관하몽은 이성을 잃었던 방다병을 타박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의원은 이연화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면, 조치를 취하는 게 맞았습니다. 다만...이후의 일이 문제로군요."
방다병은 평소의 당당한 태도를 모두 잃어버리고 다시 움츠러들었다. 관하몽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연화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는 물었다.
"아무래도, 방 공자는 각인을 끊길 원하시겠지요?"
"제가요?"
방다병이 동그래진 눈으로 되물었다. 관하몽이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까?"
"아니...그게! 저, 저보다는 이연화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전, 저는 이연화의 건강이 중요하니까 그랬던 건데...이연화한테는 선택권이 없었잖아요. 도와주려고 그런 거지만...어쨌든 제가 잘못한 일이고. 제가 너무 원망스러우면,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던 방다병이 푹 가라앉았다. 관하몽은 양쪽 눈썹을 슬쩍 올리고는 방다병의 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차분히 건넸다.
"저는 이 문주가 아닌지라 그분의 반응을 완벽히 예상할 수는 없습니다만, 아마 이 문주는 방 공자를 크게 원망하거나 화를 내시지는 않을 겁니다. 난처해하거나 무안해할 수는 있어도요. 그리고 각인은 양측이 관련된 일입니다, 물론 방 공자의 생각도 중요하지요. 다른 한 분은 어디 계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만."
관하몽이 희미하게 질책하는 투로 맺었다. 적비성은 백천원 사람들과 함께 그곳을 나왔으나, 이연화의 상태가 위험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어디론가 휭 없어져 버렸다. 박살나버린 '신 만성도'와 관련된 맹 내의 일을 처리하러 간 것인지도 몰랐다. 방다병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자기랑 각인했을지도 모를 음인을 두고 사라질 수가 있어? 아니, 상황을 고려하면 오히려 옆에 붙어 있는 편이 더 안 좋은 건가? 방다병이 길을 잃은 기분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으...."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 방다병과 관하몽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이연화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작게 뒤척였다. 곧 그 눈꺼풀이 올라가더니, 약간 멍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방다병이 펄쩍 뛰듯이 그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연화, 이연화. 정신이 들어? 좀 어때?"
"방소보...? 여긴 어디야."
"객잔이야. 백천원 사람들이 도착해서 본부를 정리했어."
방다병의 부축을 받아,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미간으로 얕은 골이 생겼다. 고개를 한 번 가로저은 이연화가 피로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내가 너하고 아비랑...." 이연화의 말이 흐려졌다. 그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방다병을 향했다. 방다병은 불에 달군 철판에 억지로 세워진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주보니 오해할 수도 없었다. 각인한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 경험하는, 명쾌히 설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연대감이 느껴졌다. 이연화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너...."
"미, 미안해! 그때 네가 너무...너무 아파 보여서."
방다병이 큰 소리로 말하며 후다닥 멀어졌다. 온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이런 말을 변명이라고 내뱉는 스스로가 참 저급하게 느껴졌다. 이연화와 달리, 자신은 그 시작과 끝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격정에 휩쓸렸다 하여 기억까지 사라지진 않은 탓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동의 없이 상대를 만지며 입 맞추고, 적비성과 함께 그 목덜미를 물어버리고, 나중에는 좋을 대로 삽입해서 토정하고, 마지막엔 이연화가 기다리라고 하는데도 무시하고, 또...머리를 푹 숙인 방다병이 울상을 지었다. 하나하나 되짚어 생각할수록, 조그맣게 변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드물게도, 이연화는 바로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남자는 말문이 막힌 듯 방다병과 허공을 번갈아 보며 눈을 깜박이다가, 뺨이며 귀를 일순 벌겋게 붉힌 채 헛숨을 내뱉다가, 이윽고 창백해진 낯으로 미간을 찌푸리면서 뒷목을 짚었다. "아이고, 머리야...." 지그시 눈을 감은 이연화가 신음처럼 읊조렸다. 관하몽이 그 어깨를 살짝 밀었다.
"누워 계세요. 더 쉬셔야 합니다. 방 공자,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지요."
방다병이 고개를 들었다. 이연화는 의원의 손길에 다시 순순히 누워서는 이불을 덮고 있었다. 결국 방다병은 우물쭈물하다가 이연화가 누운 방을 나섰다. 자신이 곁에 있어도 이연화의 회복에 악영향을 끼쳤으면 끼쳤지, 별다른 도움이 될 듯하지는 않았다. 어쩐지 한없이 우울해지는 생각에, 방다병은 발로 바닥을 몇 차례 툭툭 치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후로, 방다병은 며칠 동안 이연화를 보지 못했다.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로, 방다병은 바빴다. 어쨌든 형탐의 패를 가진 사람으로써, 백천원이 '신 만성도'를 처리하는 과정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방다병은 백천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탈주를 시도한 죄인을 몇 명 붙들어 오기도 했고, 본부에서 찾은 대량의 장부와 명부 등을 확인하여 '신 만성도'의 남은 세력을 파악하기도 했다. 방다병은 객잔의 탁자 앞에서 꾸벅거리다 잠들거나, 지붕 위에서 꾸벅거리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둘째로, 도무지 이연화를 볼 낯이 없었다. 아무리 머릿속에서 당시의 상황을 복기해 보아도, 스스로 내릴 만한 결론은 똑같았다. 방다병, 너는 짐승 새끼다! 적비성이 이연화의 목덜미를 물려고 들었을 때, 아주 실낱 같다고는 해도 일말의 이성이 남아 있었잖아! 그럼 바로 그 대마왕한테 장을 날렸어야지, 왜 똑같은 짓을 해버린 거야? 방다병은 자신을 어느 때보다도 혹독하게 두들겨패며 끙끙거렸다. 어찌나 그 정도가 심했던지, 선잠에 들었을 때 자신의 모습을 한 귀신에게 두들겨맞는 꿈을 꾸었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방다병은 이연화에게 건넬 말을 정하지 못했다. 진심 어린 사과야 몇백 몇천 번이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각인을 끊기 위해 노력하자고 해야 하나?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이연화가 그걸 요구하지 않을까? 그럼 난 뭐라고 해야 하지? 사실 이연화가 그렇게 묻는다면, 방다병의 입장에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가장 합리적이고도 이성적인 흐름이었다. 본인의 동의 없이 맺어진 각인이었으니, 되도록 초반에 끊어버리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하지만...방다병은 그 생각에 다다를 때마다 어김없이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방다병은 각인을 끊고 싶지 않았다.
각인을 끊는 과정에서 겪을 고통 따위가 염려되는 것은 아니었다. 괴로움이라면 참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시간이 생길 때마다 거듭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누구나 납득할 합리적인 이유랄 것이 없었다. 그냥 내가 원할 뿐이잖아. 이전에도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형질이 바뀐 후 몸을 섞고 나니까 반려로까지 삼고 싶다 생각하는 거잖아. 아름답고 강하지만 동시에 불안하면서 미덥잖은 구석도 많은 사람이니, 나와 각인으로 묶어버리고 싶다고. 그럼 이연화를 더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아니, 아니야. 방다병은 고개를 저으며 잔뜩 풀이 죽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이고 욕심일 뿐이었다.
"문주께서 형질을 조절할 수 있게 되셨습니다."
이런저런 고민에 빠진 채 백천원에 당도한 날, 관하몽은 방다병을 먼저 찾아와 그렇게 전해주었다. 방다병의 눈이 의아해졌다.
"네, 원래도 내력으로-."
"더 이상 내력을 쓰지 않고 조절할 수 있게 되셨다는 말입니다. 내력을 쓰셔도 더 이상 냄새가 새지 않더군요."
"네? 그 사이에 내력을 쓸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설마, 적이 아직 이연화를 노리고-."
방다병이 반쯤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관하몽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금원맹주와 이야기하다가 잠깐 감정이 격해지신 모양입니다."
"금원맹주라고요? 적비성이 언제 왔어요?"
"제가 알기론 어제 저녁입니다만, 어쨌든 오자마자 문주를 찾더군요. 두 분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다투는 과정에서 잠깐 합이 오고갔던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어요. 희락기를 강하게 겪은 데다 각인까지 하고 나니, 몸이 바뀐 형질에 적응한 모양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방다병이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다행스러운 소식이었으나, 적비성이 찾아와 무슨 말을 했을지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방다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관하몽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건넸다.
"방 소협. 언젠가는 각인에 대해서 문주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계속 피한다고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방다병이 움찔했다. 기력이 쭉 빠지는 동시에, 얼굴로 불이 붙을 것 같았다. 여기서까지 둘러댈 만큼 뻔뻔하지는 않았기에, 방다병은 한숨을 쉬고는 웅얼거리듯 말했다.
"티가 많이 났나 봅니다."
"제가 아는 방 소협이라면 여기까지 오는 길에 이 문주의 옆에서 떨어져 있을 리가 없는데, 간병은 고사하고 얼굴도 제대로 내비치지 않으니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지요. 문주가 비밀을 지켜달라 하셔서 다른 분들은 이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시니, 곧 가서 대화해 보십시오. 의원으로서는 형질이 처음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바로 각인을 끊길 권장하진 않겠으나, 상황이 아무래도 특수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소협이 하도 나타나지 않으니 문주가 오해하시는 부분도 있는 듯합니다."
잔뜩 쭈그러져 있던 방다병은, 관하몽이 덧붙인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해요?" 관하몽이 고개를 끄덕했다.
"방 소협이 찾아오지 않는 이유를 두고, 원망스러워 그런 거라 생각하시는 것 같더군요."
"예? 제가 뭘 원망해요...설마 이연화를 말입니까?"
방다병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의원은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고는, 희미한 짜증이 묻은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저는 의원이지, 사람들 사이의 얼키고설킨 일까지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다 드렸으니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그렇게만 건네고, 관하몽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인사를 남긴 다음 휭하니 사라졌다. 방에는 놀라고 당황한 방다병만이 얼빠진 얼굴로 남아 있었다.
결국 그날 밤, 방다병은 제자리 맴을 이백 번쯤 돌다가 방을 떠나 이연화를 만나러 걸음했다. 멀리서 보니, 이연화의 처소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그 근처로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다가가다, 방다병은 잠시 발을 멈추었다. 안에서 대화의 기척이 두런두런 느껴진 탓이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방다병이 조심조심 다가가 문간에 귀를 대었다. 과거보다 무공의 수준이 오른 덕인지, 이제는 감각이 예민해져 방 안의 대화를 엿듣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방다병은 안 돼."
그 말이 들리자마자, 방다병은 우뚝 멈추어 섰다. 분명 이연화의 목소리였다. 잠시 후, 적비성의 음성이 이어졌다.
"진심이냐?"
"당연하지. 차라리 너라면 모를까, 방다병하고는 절대 안 돼."
이연화가 단호하게 잘랐다.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리가 방금 들은 말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 적비성이 와 있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그것도 이상했다. 왜 이 시간에 이연화의 처소에 단둘이 있단 말인가? 아니, 그리고 그보다! 적비성이라면 모를까, 자신과는 안 된다고? 대체 뭐가? 설마, 설마 적비성하고는 각인을 유지할 여지가 있지만 나하고는 절대 안 된다고? 방다병의 입이 멍하게 벌어졌다. 절벽 앞에 선 듯이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안에서 작은 코웃음이 들려왔다.
"네가 그럴 수 있다면야."
"무슨 헛소리야? 전처럼 신경 긁을 거면 나가, 적 맹주. 당연히 그럴 수 있고 그래야만 하지."
이연화가 대놓고 신경질을 내며 타박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방다병은 문을 확 열어젖혔다. 두 남자의 시선이 쏠렸다. 이연화는 백의를 걸친 채 침상에 앉아 있었고, 적비성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연화는 일순 확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낯빛을 가다듬고는 능청스럽게 건넸다.
"이야, 방소보. 경지가 오르긴 했네. 들키지 않고 사람 말을 엿들을 줄도 알게 됐어."
"나하고는 뭐가 안 돼?"
방다병이 바로 물었다. 적비성은 순간 비웃음을 띤 채 이연화를 돌아보았고, 이연화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뒷목을 어루만졌다. 적비성이 턱짓하며 툭 건넸다.
"이놈은 네가 알아서 해, 이연화. 어쨌든 내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생각해 봐라."
뭘 생각해 봐? 무슨 제안이라도 한 거야? 방다병이 동그래진 눈으로 이연화와 적비성을 번갈아 보았다. 물론 적비성에게서 친절한 설명 따위가 나오지는 않았다. 금원맹주는 방다병을 곁눈으로 보며 한 차례 더 이죽거리고는, 저벅저벅 걸어 청년을 지나쳤다. 문이 닫히자마자, 방다병은 자신이 갇힌 기분과 상대를 가둔 기분을 동시에 느끼며 이연화를 돌아보았다. 공교롭게도, 이연화 역시 비슷한 분위기를 두른 채 눈가를 살짝 만지고 있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방다병은 공벌레가 되었다.
심리적으로는 완전히 그랬고, 신체적으로는 반쯤 그랬다.
이연화가 기절한 후, 그 체취는 한결 견딜 만한 수준까지 누그러졌다. 아직 열이 있어 보였으나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심각하게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그에 따르듯이 방다병도 서서히 제정신을 찾았는데, 바른 가정에서 바른 교육을 받으며 자란 방 공자는 자신이 저지른 행각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도와준다고 해놓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열심히 부순 끝에 완전히 밑바닥까지 도달해버린 꼴이었다. 하지만 오래 굳어 있을 틈도 없었다. 언제라도 백천원 사람들 혹은 또 다른 적이 등장할 수 있었기에, 방다병은 영혼이 빠진 껍데기처럼 삐걱삐걱 움직여 엉망이 된 현장을 정리하고 옷을 바꾸어 입었다.
석 누님이 알면 날 죽이려고 들 거야. 어머니도 나한테 엄청나게 실망할 텐데. 아니, 뭣보다 이연화가 날 다신 안 보려 들면 어떡하지? 어떤 꿈에서보다 강렬한 첫 경험을 한 양인답지 않게, 방다병은 급속도로 초조해졌다. 그러면서도 그 손은 부지런히 움직여, 적비성과 함께 이연화의 몸을 닦아내고 새 옷을 입혀주었다. 힐끗 돌아본 적비성의 얼굴은 평소와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방다병은 괜히 억울해졌다. 물론 군자의 덕이라고는 모를 저 대마왕은 아무렇지 않겠지! 오히려 속으로 좋아하고 있는 거 아니야? 입을 비죽거리며, 방다병은 이연화를 이불에 둘둘 말아두었다가 백천원 사람들을 맞았다.
"미약의 흔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내력을 끝까지 소진하고 나니, 눌렸던 희락기가 찾아왔던 듯합니다. 지금은 많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백천원 사람들과 함께 도착했던 관하몽이, 인근 객잔에서 이연화를 진맥하며 말했다. 방다병은 그 옆에서 보기 딱할 만큼 움츠러든 채 의원의 말을 들었다. 관하몽의 눈썹이 까딱 움직였다.
"그런데...각인을 한 맥이군요."
방다병이 더욱 쪼그라들었다. 관하몽의 눈썹이 다시 까딱했다.
"두 명하고요...?"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의원의 입으로 듣자 더욱 난감하고도 놀라웠다. 이중 각인은 전례가 없지 않았으나 꽤 드문 현상이었다. 청년은 조금 미칠 듯한 심정으로 양쪽 뺨을 감쌌다. 안 그래도 중대한 사안이, 한 차례 더 꼬여 방다병의 목을 칭칭 감고 있었다. 조용히 묻는 시선에, 방다병은 이 자리에 없는 적비성을 원망하며 새빨개진 얼굴로 당시의 상황을 더듬더듬 설명했다. 놀랍게도, 관하몽은 이성을 잃었던 방다병을 타박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의원은 이연화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면, 조치를 취하는 게 맞았습니다. 다만...이후의 일이 문제로군요."
방다병은 평소의 당당한 태도를 모두 잃어버리고 다시 움츠러들었다. 관하몽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연화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는 물었다.
"아무래도, 방 공자는 각인을 끊길 원하시겠지요?"
"제가요?"
방다병이 동그래진 눈으로 되물었다. 관하몽이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까?"
"아니...그게! 저, 저보다는 이연화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전, 저는 이연화의 건강이 중요하니까 그랬던 건데...이연화한테는 선택권이 없었잖아요. 도와주려고 그런 거지만...어쨌든 제가 잘못한 일이고. 제가 너무 원망스러우면,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던 방다병이 푹 가라앉았다. 관하몽은 양쪽 눈썹을 슬쩍 올리고는 방다병의 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차분히 건넸다.
"저는 이 문주가 아닌지라 그분의 반응을 완벽히 예상할 수는 없습니다만, 아마 이 문주는 방 공자를 크게 원망하거나 화를 내시지는 않을 겁니다. 난처해하거나 무안해할 수는 있어도요. 그리고 각인은 양측이 관련된 일입니다, 물론 방 공자의 생각도 중요하지요. 다른 한 분은 어디 계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만."
관하몽이 희미하게 질책하는 투로 맺었다. 적비성은 백천원 사람들과 함께 그곳을 나왔으나, 이연화의 상태가 위험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어디론가 휭 없어져 버렸다. 박살나버린 '신 만성도'와 관련된 맹 내의 일을 처리하러 간 것인지도 몰랐다. 방다병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자기랑 각인했을지도 모를 음인을 두고 사라질 수가 있어? 아니, 상황을 고려하면 오히려 옆에 붙어 있는 편이 더 안 좋은 건가? 방다병이 길을 잃은 기분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으...."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 방다병과 관하몽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이연화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작게 뒤척였다. 곧 그 눈꺼풀이 올라가더니, 약간 멍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방다병이 펄쩍 뛰듯이 그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연화, 이연화. 정신이 들어? 좀 어때?"
"방소보...? 여긴 어디야."
"객잔이야. 백천원 사람들이 도착해서 본부를 정리했어."
방다병의 부축을 받아,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미간으로 얕은 골이 생겼다. 고개를 한 번 가로저은 이연화가 피로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내가 너하고 아비랑...." 이연화의 말이 흐려졌다. 그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방다병을 향했다. 방다병은 불에 달군 철판에 억지로 세워진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주보니 오해할 수도 없었다. 각인한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 경험하는, 명쾌히 설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연대감이 느껴졌다. 이연화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너...."
"미, 미안해! 그때 네가 너무...너무 아파 보여서."
방다병이 큰 소리로 말하며 후다닥 멀어졌다. 온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이런 말을 변명이라고 내뱉는 스스로가 참 저급하게 느껴졌다. 이연화와 달리, 자신은 그 시작과 끝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격정에 휩쓸렸다 하여 기억까지 사라지진 않은 탓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동의 없이 상대를 만지며 입 맞추고, 적비성과 함께 그 목덜미를 물어버리고, 나중에는 좋을 대로 삽입해서 토정하고, 마지막엔 이연화가 기다리라고 하는데도 무시하고, 또...머리를 푹 숙인 방다병이 울상을 지었다. 하나하나 되짚어 생각할수록, 조그맣게 변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드물게도, 이연화는 바로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남자는 말문이 막힌 듯 방다병과 허공을 번갈아 보며 눈을 깜박이다가, 뺨이며 귀를 일순 벌겋게 붉힌 채 헛숨을 내뱉다가, 이윽고 창백해진 낯으로 미간을 찌푸리면서 뒷목을 짚었다. "아이고, 머리야...." 지그시 눈을 감은 이연화가 신음처럼 읊조렸다. 관하몽이 그 어깨를 살짝 밀었다.
"누워 계세요. 더 쉬셔야 합니다. 방 공자,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지요."
방다병이 고개를 들었다. 이연화는 의원의 손길에 다시 순순히 누워서는 이불을 덮고 있었다. 결국 방다병은 우물쭈물하다가 이연화가 누운 방을 나섰다. 자신이 곁에 있어도 이연화의 회복에 악영향을 끼쳤으면 끼쳤지, 별다른 도움이 될 듯하지는 않았다. 어쩐지 한없이 우울해지는 생각에, 방다병은 발로 바닥을 몇 차례 툭툭 치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후로, 방다병은 며칠 동안 이연화를 보지 못했다.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로, 방다병은 바빴다. 어쨌든 형탐의 패를 가진 사람으로써, 백천원이 '신 만성도'를 처리하는 과정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방다병은 백천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탈주를 시도한 죄인을 몇 명 붙들어 오기도 했고, 본부에서 찾은 대량의 장부와 명부 등을 확인하여 '신 만성도'의 남은 세력을 파악하기도 했다. 방다병은 객잔의 탁자 앞에서 꾸벅거리다 잠들거나, 지붕 위에서 꾸벅거리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둘째로, 도무지 이연화를 볼 낯이 없었다. 아무리 머릿속에서 당시의 상황을 복기해 보아도, 스스로 내릴 만한 결론은 똑같았다. 방다병, 너는 짐승 새끼다! 적비성이 이연화의 목덜미를 물려고 들었을 때, 아주 실낱 같다고는 해도 일말의 이성이 남아 있었잖아! 그럼 바로 그 대마왕한테 장을 날렸어야지, 왜 똑같은 짓을 해버린 거야? 방다병은 자신을 어느 때보다도 혹독하게 두들겨패며 끙끙거렸다. 어찌나 그 정도가 심했던지, 선잠에 들었을 때 자신의 모습을 한 귀신에게 두들겨맞는 꿈을 꾸었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방다병은 이연화에게 건넬 말을 정하지 못했다. 진심 어린 사과야 몇백 몇천 번이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각인을 끊기 위해 노력하자고 해야 하나?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이연화가 그걸 요구하지 않을까? 그럼 난 뭐라고 해야 하지? 사실 이연화가 그렇게 묻는다면, 방다병의 입장에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가장 합리적이고도 이성적인 흐름이었다. 본인의 동의 없이 맺어진 각인이었으니, 되도록 초반에 끊어버리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하지만...방다병은 그 생각에 다다를 때마다 어김없이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방다병은 각인을 끊고 싶지 않았다.
각인을 끊는 과정에서 겪을 고통 따위가 염려되는 것은 아니었다. 괴로움이라면 참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시간이 생길 때마다 거듭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누구나 납득할 합리적인 이유랄 것이 없었다. 그냥 내가 원할 뿐이잖아. 이전에도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형질이 바뀐 후 몸을 섞고 나니까 반려로까지 삼고 싶다 생각하는 거잖아. 아름답고 강하지만 동시에 불안하면서 미덥잖은 구석도 많은 사람이니, 나와 각인으로 묶어버리고 싶다고. 그럼 이연화를 더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아니, 아니야. 방다병은 고개를 저으며 잔뜩 풀이 죽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이고 욕심일 뿐이었다.
"문주께서 형질을 조절할 수 있게 되셨습니다."
이런저런 고민에 빠진 채 백천원에 당도한 날, 관하몽은 방다병을 먼저 찾아와 그렇게 전해주었다. 방다병의 눈이 의아해졌다.
"네, 원래도 내력으로-."
"더 이상 내력을 쓰지 않고 조절할 수 있게 되셨다는 말입니다. 내력을 쓰셔도 더 이상 냄새가 새지 않더군요."
"네? 그 사이에 내력을 쓸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설마, 적이 아직 이연화를 노리고-."
방다병이 반쯤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관하몽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금원맹주와 이야기하다가 잠깐 감정이 격해지신 모양입니다."
"금원맹주라고요? 적비성이 언제 왔어요?"
"제가 알기론 어제 저녁입니다만, 어쨌든 오자마자 문주를 찾더군요. 두 분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다투는 과정에서 잠깐 합이 오고갔던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어요. 희락기를 강하게 겪은 데다 각인까지 하고 나니, 몸이 바뀐 형질에 적응한 모양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방다병이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다행스러운 소식이었으나, 적비성이 찾아와 무슨 말을 했을지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방다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관하몽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건넸다.
"방 소협. 언젠가는 각인에 대해서 문주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계속 피한다고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방다병이 움찔했다. 기력이 쭉 빠지는 동시에, 얼굴로 불이 붙을 것 같았다. 여기서까지 둘러댈 만큼 뻔뻔하지는 않았기에, 방다병은 한숨을 쉬고는 웅얼거리듯 말했다.
"티가 많이 났나 봅니다."
"제가 아는 방 소협이라면 여기까지 오는 길에 이 문주의 옆에서 떨어져 있을 리가 없는데, 간병은 고사하고 얼굴도 제대로 내비치지 않으니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지요. 문주가 비밀을 지켜달라 하셔서 다른 분들은 이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시니, 곧 가서 대화해 보십시오. 의원으로서는 형질이 처음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바로 각인을 끊길 권장하진 않겠으나, 상황이 아무래도 특수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소협이 하도 나타나지 않으니 문주가 오해하시는 부분도 있는 듯합니다."
잔뜩 쭈그러져 있던 방다병은, 관하몽이 덧붙인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해요?" 관하몽이 고개를 끄덕했다.
"방 소협이 찾아오지 않는 이유를 두고, 원망스러워 그런 거라 생각하시는 것 같더군요."
"예? 제가 뭘 원망해요...설마 이연화를 말입니까?"
방다병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의원은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고는, 희미한 짜증이 묻은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저는 의원이지, 사람들 사이의 얼키고설킨 일까지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다 드렸으니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그렇게만 건네고, 관하몽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인사를 남긴 다음 휭하니 사라졌다. 방에는 놀라고 당황한 방다병만이 얼빠진 얼굴로 남아 있었다.
결국 그날 밤, 방다병은 제자리 맴을 이백 번쯤 돌다가 방을 떠나 이연화를 만나러 걸음했다. 멀리서 보니, 이연화의 처소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그 근처로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다가가다, 방다병은 잠시 발을 멈추었다. 안에서 대화의 기척이 두런두런 느껴진 탓이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방다병이 조심조심 다가가 문간에 귀를 대었다. 과거보다 무공의 수준이 오른 덕인지, 이제는 감각이 예민해져 방 안의 대화를 엿듣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방다병은 안 돼."
그 말이 들리자마자, 방다병은 우뚝 멈추어 섰다. 분명 이연화의 목소리였다. 잠시 후, 적비성의 음성이 이어졌다.
"진심이냐?"
"당연하지. 차라리 너라면 모를까, 방다병하고는 절대 안 돼."
이연화가 단호하게 잘랐다. 방다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리가 방금 들은 말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 적비성이 와 있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그것도 이상했다. 왜 이 시간에 이연화의 처소에 단둘이 있단 말인가? 아니, 그리고 그보다! 적비성이라면 모를까, 자신과는 안 된다고? 대체 뭐가? 설마, 설마 적비성하고는 각인을 유지할 여지가 있지만 나하고는 절대 안 된다고? 방다병의 입이 멍하게 벌어졌다. 절벽 앞에 선 듯이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안에서 작은 코웃음이 들려왔다.
"네가 그럴 수 있다면야."
"무슨 헛소리야? 전처럼 신경 긁을 거면 나가, 적 맹주. 당연히 그럴 수 있고 그래야만 하지."
이연화가 대놓고 신경질을 내며 타박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방다병은 문을 확 열어젖혔다. 두 남자의 시선이 쏠렸다. 이연화는 백의를 걸친 채 침상에 앉아 있었고, 적비성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연화는 일순 확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낯빛을 가다듬고는 능청스럽게 건넸다.
"이야, 방소보. 경지가 오르긴 했네. 들키지 않고 사람 말을 엿들을 줄도 알게 됐어."
"나하고는 뭐가 안 돼?"
방다병이 바로 물었다. 적비성은 순간 비웃음을 띤 채 이연화를 돌아보았고, 이연화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뒷목을 어루만졌다. 적비성이 턱짓하며 툭 건넸다.
"이놈은 네가 알아서 해, 이연화. 어쨌든 내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생각해 봐라."
뭘 생각해 봐? 무슨 제안이라도 한 거야? 방다병이 동그래진 눈으로 이연화와 적비성을 번갈아 보았다. 물론 적비성에게서 친절한 설명 따위가 나오지는 않았다. 금원맹주는 방다병을 곁눈으로 보며 한 차례 더 이죽거리고는, 저벅저벅 걸어 청년을 지나쳤다. 문이 닫히자마자, 방다병은 자신이 갇힌 기분과 상대를 가둔 기분을 동시에 느끼며 이연화를 돌아보았다. 공교롭게도, 이연화 역시 비슷한 분위기를 두른 채 눈가를 살짝 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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