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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8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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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떠올렸던 태자 유이치와의 즐거운 검술 시간이 단 한번으로 그쳤다. 그 사실에 누구보다도 상심한 건 태자가 아닌 황비였다. 외려 의젓한 태자는 황비와 함께라면 산책도 즐겁다고 손을 내저었다.  둘은 연무장 대신 잘 가꾸어진 정원을 거닐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태자가 좋아하는 것, 최근 관심이 생긴 것, 아홉살, 여덟살의 생일날 파티,… 마치다는 10년의 세월을 어떻게든 따라잡고 싶은 것처럼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고, 유이치는 즐거이 답해주었다.

그뿐인가. 사건 이후로 스즈키의 거리감이 달라졌다. 물론 그는 여전히 스즈키보다는 ‘황제’에 더 가까웠으나… 바빠서 식사도 집무실에서 대충 해결한다던 이가 어느 날은 저녁을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먼저 청했다. 황제와는 유이치만큼 대화가 많았던 건 아니지만, 식사는 즐거웠다. 음식은 모두 마치다가 먹어본 적 없는 중앙의 음식이었다. 북부의 척박한 지역에서나, 평민인 노보루의 생활권에서나, 마치다는 미식을 가까이 할 일이 없었다. 덕분에 황궁에서의 식사 시간은 미술품을 즐기는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다. 

"식사는 입에 맞았길 바라."자리에서 일어나는 마치다에게 황제가 말을 건넸다. 마치다는 응하듯 옅게 웃었다. 이것이 황제의 사과 방식이었다.

황제가 마음을 열어주어 기뻤다. 어쩌면 마치다는 이상적인 황제와 황비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스즈키와 마치다 모두,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스즈키는 처음 보는 황비에게 잘 대해주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마치다도 새로운 관계에 임하는 것이다. 과거의 스즈키와의 관계와는 다르겠으나, 새로운 황제와의 관계 또한 괜찮을 수 있으니….


“기운이 없어 보이네요, 황비 전하.”
“네?”


이런. 마치다는 황급히 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나 미야무라의 눈썰미는 피할 수 없었다. 아무렴, 번화가에서 노보루를 찾아낸 장본인이니까 말이다.

업무를 보기 위해 황궁에 온 미야무라는 돌아가기 전, 마치다를 찾아왔다. 황궁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살필 겸, 안부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해가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으나 적당히 기분 좋은 날씨였다. 마치다는 이제는 익숙해진 동궁의 정원에서 그를 맞이하였다. 낯선 곳에 적응하는 능력은 워낙에 발군이었기에, 미야무라는 안심한 듯 찻잔을 들었다.

그러나 마치다가 제 속내를 숨길 수 있는 건 그 잠시 뿐이었다.


“설마요, 제가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걸요. 이렇게 호화로운 궁에서 기운이 없으면 어떡해요.”
“제 앞에서 너무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닌데…”


마치다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황비는 오히려 기뻐야 한다. 유이치도 착하고, 황제도 잘 대해주고. 궁 내의 사용인들도 황비의 통솔을 잘 따라주었다. 기운이 없는 건 황비가 아니라 아직도 과거의 기억을 붙잡고 아쉬워하는 마치다이니, 그 마음을 설명할 길은 없었다.


“… 그냥, 요새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봐요.”
“그렇게 황제 폐하께서 전하를 못살게 구시나요?”
“아,아니요. 그게 아니라. 요새 이상한 꿈을 자주 꿔서요.”
“꿈이요?”


둘러대는 말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원래 자고 일어나면 희미해지는 게 꿈이다. 그런데도 마치다는 그가 반복해서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매번 어두운 숲속을 헤매고 있었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딱 한 줄기 빛을 내는 수정을 마주했다. 그러나 막상 수정 앞에 서서는 막막한 기분만 거세져, 결국 답답하고 숨찬 기운에 잠에서 깨기를 반복했다. 


“처음 보는 곳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목적지에 도달해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해 답답해하기만 하는 꿈입니다. 제 기억엔 전혀 없는 장소여서, 이상하다고만 생각이 들어요.”
“어두운 숲이라… 그러네요. 남부에는 그렇게 울창한 숲이 없으니까요.”
“하늘을 찌를 만큼 나무가 높고, 빽빽한게, 북부 깊은 곳의 숲처럼…”
“북부요?”


아차. 노보루는 물론, 미야무라도 북부에 가본 적이 없을 터였다. 마치다는 대충 둘러대었다.


“책에서… 보니까 그렇다고 하던데요. 남부의 나무와 달리 북부에는 희고 창백한 자작나무 숲이 있다고…”
“책에서…”


나중에 살펴봐야겠네요. 미야무라가 덧붙이며 찻잔 사이로 입을 숨겼다. 마치다도 찻잔을 들며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별로 좋지 않으신 듯 한데 이런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미야무라가 잔을 내려놓고는 잠시 망설였다. 그래봐야 잠을 조금 설친 정도였기에 노보루의 몸이라 해도 큰 무리는 없었다. 마치다는 괜찮다는 듯 미야무라를 바라보았다. 미야무라는 잠시 입가를 문지르다가 품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이건…”
“야마토 군이 찾아왔었어요.”
“아…!”


마치다가 놀란 얼굴로 봉투를 바라보았다.


“원칙대로라면 황궁을 통해 전달받으셔야겠지만… 아무래도 평민이다보니, 황비에게까지 안부를 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요.”


미야무라가 덧붙였다. 

염치도 없지. 어떻게 야마토에 대해서 잊고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마치다는 옅은 그리움과 짙은 죄책감을 담아 편지 봉투를 열었다. 

편지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자신은 잘 지내고 있으며, 그 당시 받았던 돈은 은행에 넣어두었다는 간략한 이야기였다. 편지의 말미에는, 자신은 여전히 같은 곳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노보루,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


그의 마지막 말에 마치다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러나 마치다의 말은 거짓일 수 밖에 없었다.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노보루가 아니었고, 편지 역시 노보루에게 도착하지 못했다. 이미 이만큼 큰 잘못을 저질렀으면서, 어떻게 노보루의 몸으로 황제와의 새로운 관계를 이어갈 생각을 했던 걸까. 마치다는 자신의 이기적임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역시나 한층 더 표정이 어두워진 황비를 보며 미야무라는 적잖은 걱정을 하였다. 아무리 황궁에 적응하였다 하여도, 야마토라는 알파와 노보루는 확연히 각별한 사이로 보였다. 그럼에도 한번쯤 남부에 가보라는 말을 전할 수 없는 것이 미야무라의 처지였다. 적어도 아직은, 아니었다.

어두운 정적이 드리운 찰나, 정원 뒷편의 사용인들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마치다와 미야무라 모두 고개를 들었다. 뜻밖의 인물이 정원을 찾은 까닭이었다.


“미야무라, 그대가 와 있었나.”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미야무라와 마치다 모두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미야무라를 언급하고서도, 황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황비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는 기색이었다. 이를 눈치챈 미야무라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마치다를 황비의 자리에 올린 이는 미야무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정작 이 셋이서 만난 적은 처음이었다. 미야무라를 밀치며 화를 내었으나, 결국 마치다를 황비로 맞은 황제. 마치다와 닮았다는 이유로 황제가 과거를 잊을 수 있도록 해달라 부탁을 받은 황비. 상대의 앞에서 약간의 불편함을 가진 채, 그러나 물러날 구실은 만들지 못하고, 셋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대는.”


황제가 마치다를 보며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은가. 요사이 안색이 좋지 않아보인다 하던데.”


좀이 쑤셔서 방에서 한숨 좀 쉬었기로서니 그 소문이 벌써 어디까지 퍼진 걸까. 마치다는 속으로 치밀어오르는 부끄러움을 꾹 눌러내렸다. 한때 기사단장이었던 시절의 체력이 이때만큼은 그립고도 억울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저는 괜찮습니다. 보세요.”


마치다는 부러 밝은 목소리로 제 얼굴을 가리켜보였다. 보라고는 했지만, 황제는 정말 찬찬히 얼굴을 살폈다. 이러다간 피곤해서가 아니라 어색해서 안색이 안 좋아질 것 같았다.


“흠… 확실히 피곤해보이는군."
“전혀, 아닙니다. 그저 제가 이상한 꿈을 요즘 꾸어서…”
“꿈?”
“폐하.”


내내 조용히 있던 미야무라가 신경이 거슬리지 않을 정도만큼의 단호함으로 황제를 불렀다.


“저 역시 황비 전하의 건강이 걱정됩니다. 이전부터 몸이 약하신 분이셨기에 더더욱, 신경을 쓰셔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가.”


어떻게든 건강 얘기를 좀 벗어나려나 싶었는데 미야무라의 발언에 대화는 다시금 연약한 마치다의 몸으로 돌아왔다. 아닌데, 그냥 정말 잠이 좀 부족하고, 태자와 검술 수업을 못해서 속상한 것 뿐인데… 하지만 노보루의 몸은 둘에 비해 마른 체구였고, 종종 발목이 아픈 모습도 보였기에, 그의 건강함은 설득력을 잃었다.


“남부 태생이면 더위에 강한 이들이 많다 하였는데, 황비 전하께서는 오히려 더위에 약하셔서 여름마다 더 체력이 저하되셨다지요.”
“그러고보니 곧 여름인가. 이제 정원에 나오는 건 자제하도록 하게.”


노보루의 몸으로 여름을 나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그건 미야무라도 모르는 사실일 게 뻔하다. 그럼에도 미야무라의 뻔뻔한 얼굴에 마치다는 할 말을 잃었다. 더군다나 황제의 시선은 점점 더 안쓰러워져서, 이제는 병약한 황비로 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마음을 쓸거면 검술 시간을 갖게 해주던지…


“두분의 염려에 감사하지만 저는 정말로…”
“아, 그러고보니 피서지는 정해지셨습니까?”


미야무라가 황제에게 물었다. 황제는 물어볼 것을 물어야 한다는 표정으로 미야무라를 대했다. 황제가 10년 간 중앙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측근인 미야무라가 모를리가 없었다. 그러나 미야무라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설마 황비 전하를 맞이하셨는데도 계획에 없다 하시지는 않겠지요. 이 기회에 태자 전하와 함께 잠시 시원한 곳으로 다녀오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준비된 별장도 없는데 어딜 간다는 말인가.”
“그야, 북부에 있지 않습니까.”
“북부…!”


황제의 눈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미야무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북부라 하면, 스즈키가 대공 시절에 사용했던 성을 의미했다. 황궁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여전히 스즈키 가의 사용인들이 관리하는 바, 인원을 적게 꾸려 떠난다면 여름 황궁으로 사용하기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북부, 그것도 스즈키의 대공 시절 사용했던 성은 마치다 기사단장과 함께 금기시되는 말이었다. 황위에 오른 후로 황제가 단 한 번도 북부에 다녀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미야무라는 감히 청한 것이다. 북부에, 황비와 함께, 다녀올 것을.

황제는 단번에 거절할 생각이었다. 뿐만 아니라, 감히 주제넘은 발언을 올린 미야무라를 크게 혼내며 쫓아낼 것이었다. 바로 옆에서, 북부라는 단어에 바로 눈을 반짝이는 황비만 아니었다면.


“… …”


차라리 가고 싶다고 말이나 하지. 그럼 거절할 텐데. 그러나 황비는 말이 없었다. 북부라는 말에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도 혹여나 황제가 알아볼까 싶어 애써 고개를 숙여 표정을 숨겼다. 필시 거절할까 염려하는 것이다. 역시 그 사건 때문인가. 연무장에서의 소동 이후로 황제는 여러 방면에서 나름의 애를 썼건만, 황비는 여전히 먼저 요구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선을 안다는 듯이, 묵묵했다.

케이라면, … 아니, 케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스즈키에게라면 모를까, 스즈키 대공에게는 늘 예의를 지켰으니까. 이것마저 둘은 닮은 건가. 스즈키는 일순간 저도 모르게 또 그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 … 생각해보지.”


미야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정말로 단번에 받아들여질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 얄미웠다. 황비를 맞이한 순간도 그렇고, 그의 계획에 놀아나고 있다는 기분이 께름칙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얼굴이 환해진 황비가 더 눈에 띄었다. 마치다는 애써 씰룩대는 입가를 손끝으로 가리고 “감사합니다, 폐하.” 하고 인사를 올렸다. 고작 생각해본다는 말만으로 황비는 기뻐했다. 황제는 여전히 자신의 선택이 맞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 발언은 하나 하나가 큰 무게와 책임이 따르는 바, 얼마지 않아 황가의 여름 피서지로 북부의 성이 되었다는 소식이 황궁 전체에 퍼졌다.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