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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5 23:35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똑바로 서기가 어려웠다. 교완만의 독을 치료하고 일어섰을 때와 비슷할 만큼 어지러웠다.
하지만 자리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지금 팔을 붙든 손이 자신을 안아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머릿속이 뿌연 나머지 그 이유를 명료히 알 수는 없었으나, 그런 상황만은 죽어도 피하고 싶었다. 이연화는 정말 길게 느껴지는 길을 지나, 온갖 붉은빛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공간에 들어서며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의 광경도, 요란한 소리들도 어쩐지 한 꺼풀 멀게 느껴졌다. 오감이 자꾸 둔해져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내가 왜 이렇게 됐더라. 이연화는 내리깐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사고의 실마리를 잡았다.
이연화가 혼례복을 순순히 입자, 봉림은 매우 흡족한 눈치였으나 바로 안심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저항해 봤자 사지를 붙들고 억지로 옷을 입힌 다음 약을 더 먹일 것 아니냐. 인간의 마지막 존엄을 좀 지키자는데 그게 그렇게 이상하냐'고 이연화가 투덜거렸으나, 신 만성도의 맹주는 자신이 이연화를 믿든 믿지 않든 필요한 절차라고 이야기하며 술잔을 올렸다. 물론 모양만 멋드러진 술잔일 뿐, 이연화의 눈에는 그저 독사발이었다. 자신의 선택지를 재어보다가, 이연화는 바닥이 똑똑히 보이지 않는 호수에 뛰어드는 기분으로 훌쩍 잔을 비웠다.
망할 자식. 대체 미혼약을 얼마나 탄 거야? 술을 마시자마자, 이연화는 눈앞에 선 남자를 향해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눈을 떴을 때 느꼈던 탈력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술이 식도를 타고 완전히 넘어가기 전인데도 머리에서 힘이 풀렸다. 이연화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찍어눌렀다. 참지 못하고 난리를 피우면, 이런 난감한 꼴까지 감수한 의미가 없었다. 정신이 아득한 구덩이로 떨어지는 것처럼 끝없이 혼미해지다가 결국에는 멍해졌다. 이윽고 이연화가 총기를 잃은 얼굴로 앉아 있자, 봉림은 그 팔을 잡아 일으키고는 퍽 친절한 태도로 인도했다.
그래도 옛날 그 옷보다는 안 무겁네. 이연화가 실없이 생각했다.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혼례복을 입고 찬 물에 빠졌던 기억이 스쳤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였더라. 어디였지? 누구랑 같이 있었는데. 이연화가 기계적으로 발을 옮기며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이연화가 머릿속 물음표 하나를 붙들고 애쓰는 동안,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말소리들이 쏟아졌다.
"이상이."
"정말 이상이다."
"봉 맹주, 경하드립니다."
"계획의 결과가 궁금하여 미리 와 있었습니다만, 식에 참여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남윤의 계보가 이어지겠군요. 훤비와 풍아로의 후손이라니, 흠 잡을 데가 없습니다."
인도하던 손길이 자신을 자리에 앉혔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어, 장내의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였다. 이연화는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이며,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고자 애썼다. 하지만 시야가 너무 심하게 일렁여 그 머릿수조차 똑바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생각,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연화가 멍한 가운데 떠올렸다. 할 수만 있다면 얼음물에라도 뛰어들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을 왜 해야 하더라. 이연화가 다시금 멍하게 떠올렸다. 몸이 너무 무거운데, 잠깐만 누우면 안 되나...눈을 깜박 감았다가, 이연화는 자신을 둘러 안은 손을 보았다. 자신과 나란히 앉았던 누군가가, 기울어지던 몸이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잡아준 모양이었다.
"으음, 방소보. 나 괜찮아."
이연화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자신을 부축할 사람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코 끝으로 희미하게 맡아지는 체취가 낯설었다. 방다병이 아닌가? "아비?" 이연화가 혼몽한 정신으로 다시 불렀다. 하지만 이 냄새는 금원맹주도 아니었다. 그럼 누구지? 이연화가 반사적인 거부감에 등으로 힘을 주었다. 상대의 손을 빌어 겨우 바로 앉자, 하객들 중 누군가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봉 맹주. 약을 얼마나 쓴 겁니까? 식이 끝나기도 전에 기절하시겠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직접 동해대전에 참가하진 않았으나 이상이의 위명은 익히 들었으니까요. 아직 내공이 완벽히 돌아오지 않았다지만, 벽차지독에서도 풀려난 몸이지 않습니까. 사슬에서 풀어주려면 조금도 방심할 수 없지요."
나란히 앉은 남자가 이연화의 한 손을 잡은 채 예의바르게 말했다. 퍽 친밀한 태도였다. 이연화는 그 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좁혔다. 자신을 이런 거리에서 대할 사람은 매우 한정적이었는데, 귀에 들리는 목소리는 그만큼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고수도 방심 한 번에 이 꼴이라니, 강호는 참 무서운 곳이 아닙니까."
낮고 걸걸한 음성이 너스레를 떨듯이 말했다. 몇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봉림이 상대를 가볍게 치하했다.
"비걸, 자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수고해준 덕이지."
"성가와 서가의 그 멍청이들이 자꾸 맹의 결정을 의심하고 걱정하여 일이 수월하진 않았습니다만, 다행히 목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비걸이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 흥을 돋우려는 투로 이었다.
"금원맹주도 소식을 들으면 아주 속이 뒤집힐 겁니다. 이상이 일로 각 방주를 그렇게 괴롭혔는데, 숙적이 이런 상황에 처했을 줄은 모르겠지요."
"어룡우마방의 입장에서는,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원수입니다. 하지만 죽음보다 이런 삶이 더 힘들 테니 묵과하지요."
"그럼요, 그럼요. 천하의 영웅이라고 불렸던 자가 평생 방에 묶여 아이를 생산하게 되었는데,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여길 겁니다."
"설마 자진하려 들지는 않겠지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연화를 잡았던 손아귀로 힘이 들어갔다. 이연화는 그 손길을 뿌리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를 떠올리려 들 때마다 자꾸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봉림이 짐짓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원래 음인은 각인한 양인의 말을 거스르기 어려운 법입니다. 풍아로의 비술로 태를 건강하게 만드는 과정을 거쳐야겠으나, 그 이전에 각인하여 제 말을 잘 듣도록 길들여야지요. 혹시 알겠습니까? 미래에는 마음을 바꿔, 남윤의 재건에 도움을 주게 될지 말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홍복일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항이 심할 테고, 시간이 꽤 걸릴 텐데...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서, 인질을 구해놓는 게 어떻습니까? 그, 이상이의 제자라고 소문 난 공자가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제안했다. 이연화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이상이의 제자.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자니 퍽 낯설었지만, 그 말은 일종의 닻처럼 이연화의 주의를 잡아챘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물론 그런 변화를 알 길 없이, 사람들이 멋대로 떠들었다.
"천기산장의 소장주 말입니까? 그 청년은 이제 만인책에 오를 만한 고수예요, 잡아오려면 이쪽에서도 꽤 출혈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럼, 이상이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사람들이...아니, 그렇다고 백천원주들이나 금원맹주를 데려올 순 없지 않습니까?"
"적비성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어떤 남자가 신음처럼 말했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코웃음이 들렸다.
"우리가 이상이도 잡았는데, 적비성이라고 안 될 게 있습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복수해야 하는 대상인 것을요. 그자도 제 힘만 믿고 자만하다가 각 방주에게 잡혀 혼인당할 뻔한 적이 있잖습니까. 어떤 절세 고수라도 결국은 사람이고, 틈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계략을 잘 꾸민다면 방 공자든 적비성이든, 사고문 사람이든 잡아올 수 있어요."
"그렇다면 좋겠지만, 너무 우리를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황궁과 강호가 또 힘을 합치면 꽤 골치아파질 테니까요."
이연화의 왼편 손가락이 까딱했다. 몸뚱이는 여전히 물 먹은 솜처럼 늘어져 있었으나,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치열하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건 안 돼. 나는 친한 사람이 별로 없단 말이야. 이연화의 일부분이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그렇게 많은 사건을 거치면서도, 날 배신하지 않고 남아준 사람은 정말 별로 없다고. 이미 나 때문에 고통도 많이들 받았는데, 더 이상 힘들게 하면 되겠어. 이연화가 진땀을 흘리며 이성의 끈을 부여잡았다.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눈을 감으며 앞으로 몸을 숙이자, 봉림이 얼른 어깨를 잡아주었다. 볼 안쪽을 세게 깨물고, 이연화는 눈앞의 반상을 짚은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목에서 옥 팔찌가 빛나고 있었다. 올라오는 토기를 참는 척 왼팔로 입을 가리며, 이연화는 그 염주알을 세게 깨물었다. 소매 뒤편의 사정을 모르는 자들이 웃으며 조롱했다.
"문주께서 빨리 눕고 싶으신가 봅니다."
"맹주, 빨리 혼방에 드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이빨 아래로 피 맛이 배었다. 염주알과 함께 손목의 피부를 물어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 작은 상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연화는 목을 넘어간 쓴맛에 매달리며 두어 차례 기침을 뱉었다. 곧 시원한 불이 체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괴이한 느낌이었으나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연화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온몸을 짙게 채웠던 텁텁함이, 마치 장대비 아래의 모닥불처럼 덧없이 사라졌다.
"문주, 괜찮으십니까?"
봉림이 퍽 모순적이게도 염려스러운 투로 물었다. 하지만 이연화는 금방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뜬 채, 이연화는 소매 아래편에서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바라보던 봉림이 의아하게 귀를 가까이했다. "문주?" 남자가 불렀다. 하지만 이연화는 그 목소리 대신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흔, 마흔하나. 모인 자들을 훑어보며 숫자를 세던 이연화가 천천히 등을 폈다. 바르다 못해 꼿꼿한 자세였다. 봉림의 눈이 커졌다. 소매를 내리고, 이연화는 문에서 가장 가까이 앉았던 사람을 가리키며 맺었다.
"마흔둘."
장내가 일순 고요해졌다. 조금 전까지 떠들어대던 것이 거짓말처럼, 모인 이들은 말을 잃어버리고 아연해졌다. 불신과 경악의 시선이 한 점으로 모였다. 자리에 똑바로 앉은 남자는, 약에 취해 비틀거리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날선 눈을 하고 있었다.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옥처럼 보였던 염주알들이 군데군데 뭉그러지고 끊어져 있었다. 즐겁게 들릴 만큼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연신침의 선물이 참으로 신묘합니다. 감쪽같지요? 이 염주알들은 정교하게 위장된 해독제들입니다. 몇 가지 응급상황에 대비한 약함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뭐 댁들이 내게 쓸 약이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위험을 감수할 순 없을 테니 결국은 산공독이나 미혼약, 아니면 희락기를 앞당기는 약을 쓰겠지. 적 맹주처럼 경맥을 끊어두면 어쩌나 걱정하긴 했는데, 다행히 팔다리만 묶어 두셨더군요. 운이 좋았지요."
이연화가 싱긋 웃었다. 물론 그 웃음을 웃음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연화가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서자, 하객들 중 몇이 앉은자리에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몸을 물렸다. 벌떡 일어선 봉림이 더듬거렸다. 그 얼굴이 당혹으로 희게 질려 있었다.
"왜, 왜 더 일찍 도망갈 수도 있었는데-."
"그러게요. 왜일까요?"
이연화가 놀리듯 되물었다. 그 시선이 장내에 모인 사람들을 훑었다. 까만 수정구슬처럼 보이는 눈이었다. 누군가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검을 잡았고, 누군가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연화가 엷고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눈까지는 닿지 않는 웃음이었다.
"중요하신 분들이 마흔둘씩이나, 이리 제발로 모여주실 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 사람들을 불러! 거기 문간에 너, 당장 나가서-."
발작적인 지시는 끝나지 못했다. 이연화의 손에서 출발한 잔이 화살처럼 그 머리를 때린 탓이었다. 두개골을 박살낼 작정은 아니었기에, 남자는 쓰러져 경련할 뿐 사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놀란 소리를 지르며 물러났다. 이연화는 뒷짐을 진 채 자리에서 훌쩍 뛰어올라, 문간에서 벌벌 떨던 꼬마의 앞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붉은 혼례복이 펄럭였다. 조금 전까지와 딴판으로, 이연화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허리를 약간 굽히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얘야, 아까 나랑 약속했었지. 가져왔니?"
얼빠진 얼굴로 이연화를 바라보던 아이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곧게 뻗은 나뭇가지 하나를 건넸다. 이연화는 나뭇가지를 받아 휘둘러보고 싱긋 웃었다.
"그래, 튼튼해 보이는 걸로 잘 골랐네."
"이, 이것도요."
아이가 얼른 이연화의 머리장식을 내밀었다. 혼례에 쓰이는 화려한 것이 아닌, 이연화가 잡혀왔을 때 하고 있었던 물건이었다. 이연화는 아무렇지 않게 머리장식을 바꾸고, 백의 위에 걸쳤던 붉은 혼례복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검처럼 휘둘러 들자, 혼례를 치르는 사람이 아닌 방랑 검객과 같은 풍모가 느껴졌다. 이연화가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이제 너는 나가렴. 네 방으로 돌아가서, 나나 백천원 사람들이 올 때까지 나오지 말고 숨어 있어." 아이가 푸르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를 내보내고, 이연화는 문을 등지며 홱 돌아섰다. 얼어붙은 이들을 향해, 이연화가 빙그레 웃었다. 그림 같은 미소였다. 그는 찾아온 환자들을 정리하는 의원처럼 자신의 앞을 가리키며 공손히 말했다.
"자, 일렬로 서서 얌전히 혈도를 짚혀 주시면, 죽이지 않고 백천원에 인계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그 말대로 금방 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연화가 한쪽 입매를 살짝 올렸다. 완벽히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하나, 여전히 심후한 내력이 전신을 휘감았다. 긴 머리칼이 슬쩍 떠올랐다가 내려왔다. 그 표정이 싸늘해지면서, 줄곧 느긋하던 분위기가 일변했다. 십 년 전의 동해대전에 참전할 때와 비슷한 얼굴로, 이연화는 다양한 표정을 지은 면면들을 향해 쏘아붙였다.
"하지만 이 문을 나가 달아나려 든다면, 그 명은 오늘까지다."
냉랭한 선언과 함께 줄기줄기 피어오르는 살기에, 모인 자들의 얼굴로 귀신을 마주한 듯한 두려움이 스쳤다. 봉림이 내력을 섞어 고함을 쳤다.
"다들 뭐 하고 있소! 어떻게든 제압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해!"
주춤거리던 이들 중, 반절 정도가 각자의 무기를 쳐들고 달려들었다. 나머지 절반은 무림인이 아닌 듯, 얼른 뒤편으로 빠져 덜덜 떨기 바빴다. 뒷문이 없느냐고 허둥대던 꼴을 보다가, 이연화는 한쪽 다리를 뒤로 빼며 숨을 멈추었다. "안 돼, 피해!" 누군가가 외쳤지만, 그 외침에 모든 사람이 반응하지는 못했다. 백천원 앞마당에 쳐들어온 자들을 일거에 정리했던 검격이, 장내의 공기를 무정히 갈랐다.
개중 고수들은 몸을 피하거나 무기로 어찌어찌 막아냈으나, 그러지 못한 자들은 가슴팍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열다섯이 남았군. 이연화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뛰어오르며 생각했다. 나부낀 머리카락 끝이 천장에 가볍게 닿았다. 열다섯이면, 최악은 아니네. 이연화가 힐끗 밖을 보았다. 어쨌든 이곳에는 눈앞에 모인 사람들 말고도 무장 병력이 있었으니, 그들이 소란을 알아채고 집결하기 전 상황을 정리하는 편이 나았다. 또한 지금의 자신은 내력을 편안하게 펑펑 써가며 싸우기 곤란한 처지였다. 속전속결. 이연화는 결심하듯 생각하며 나뭇가지를 들었다.
그 나뭇가지에서 조금 전과 같은 검격이 두 번, 세 번째로 터져 나오자 또 다섯이 줄었다. 폭음 같은 소리가 거푸 이어지며, 연회장의 집기들이 무참히 갈라지고 부서졌다. 비명과 신음이 난무했고, 새로운 혈흔이 바닥에 뿌려질 때마다 뒤로 도망친 자들이 볼품없는 소리를 질러댔다. 이연화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남은 열 중 셋은 부상을 입었고, 셋은 비틀거렸으며 넷은 멀쩡했다. 앞으로 열을 상대하자면, 이제는 조금 신중해져야 했다. 큰 공격을 거푸 퍼부은 탓으로 내력이 많이 소모되어 있었다. 형질이 바뀐 이후로 정말 조금의 내력도 남지 않을 때까지 심신을 소모해본 적은 없었지만, 마지막 기억을 돌이켜볼 때 아주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나랑 억지로 결혼하겠다는 놈 앞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그게 정말 최악이지. 이연화가 내심 코웃음을 치듯 생각하며 바닥으로 착지했다. 득달같이 따라오는 암기를 파사보로 피해내는 와중, 그는 역할을 다한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죽은 이의 연검을 하나 집어들었다. 내력을 받은 연검이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다.
금속이 어지럽게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남은 적들은 자아를 가진 화살처럼 끈질기게 이연화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하지만 이연화는 잡으려 애를 써도 그저 흩어졌다가 나타나는 연기처럼 그 사이사이를 누볐다. 그 연기는 시시때때로 날카로운 칼끝으로 변해, 상대의 몸을 찌르거나 베어냈다. 이연화의 눈에, 이 무리는 여럿이었으나 결국 하나의 큰 짐승과 비슷했다. 살아남고자 발악하며, 강점과 약점을 지닌 짐승. 그리고 이연화는 늘 상대의 급소를 빠르게 찾아내는 편이었다. 부상을 입은 자들, 그리고 개중 실력이 덜한 자들이 먼저 차례대로 그 칼에 쓰러졌다.
어느덧 장내에는 네 명의 적수와 이연화가 남아 있었다. 이연화의 백의는 어느새 삼분지 일 정도가 피로 물든 채였다. 흰 뺨에도 핏방울이 점점이 묻었다. 사방을 둘러싼 이들을 향해 감각을 곤두세운 채, 이연화는 무게중심을 약간 낮추었다.
"어떻게...어떻게 이렇게도...."
남은 넷 중 하나가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그 얼굴은 상기된 동시에 창백해 보였다.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오래 전이긴 하지만, 다수를 상대로 하는 싸움은 많이 해봤지요."
"정신 똑바로들 차리시오. 불구로 만들더라도 제압해야 하오!"
봉림이 이연화를 노려보며 씹어 뱉었다. 그 옆에 섰던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그 얼굴이 좌절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맹주, 지금껏 생채기 하나 제대로 내지 못했습니다." 그 낮은 속삭임을 듣고, 이연화가 짐짓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 추 공자. 거기 있었군요." 놀리듯 건넸지만, 물론 아무도 웃지 못했다. 봉림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말했다.
"이 냄새를 보면 모르겠소? 이상이도 정상은 아니오. 내력을 소모할수록 제어가 어려워지는 듯하니, 일단 시간을 끌어야 해."
감 좋은 놈 같으니라고. 이연화는 내심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지만, 겉으로는 대수롭잖은 태도를 유지했다. 부정해봐야 딱히 의미는 없을 터였다. 그들이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이곳은 짙디짙은 연꽃 냄새로 꽉 채워져 있었다. 이제 슬슬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느낌이, 희락기로 착각했던 그날과 비슷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양인들의 필사적인 체취 역시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럼 최선을 다해 보시지요."
몸 앞으로 칼을 들며, 이연화가 도발하듯 엷은 미소와 함께 건넸다. 흐트러진 호흡을 들키지 않으려다 보니, 숨이 목 안에서 막히며 조금 답답해졌다. 눈앞의 사람들과 달리, 이연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짧은 시선을 교환한 네 고수가 동시에 쇄도했다.
평소라면 그렇게 대처하지 않았을 터였다. 강수를 더 강한 수로 받아치는 것은 이상이가 즐겨하던 일이었지, 이연화의 방식은 아니었다. 몸이 멀쩡했다면 흐름의 묘리로 강공을 흘려낸 다음, 자신의 공세를 펼치기 가장 좋은 순간을 엿보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일각도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이연화는 첨예하게 집중하며, 몸에 남았던 모든 내력을 끌어모아 폭발시켰다. 동굴의 흰 나무 아래에서 검 없이 시전했던 상이태검의 절초였다. 흰 옷자락과 머리칼이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휘돌았다.
그야말로 벼락이 내리꽂힌 듯한 소리가 터졌다. 이연화를 상대로 그나마 버티던 네 명의 고수가 무작스럽게 나가떨어졌다. 이겼다는 감각에 취할 틈도 없이, 이연화는 매서운 눈으로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둘은 그대로 즉사했고, 둘은 숨이 붙어 있었지만 큰 부상을 입었다. 탈력감과 나른함이 즉각적으로 온몸을 휘감았지만, 이연화는 조용히 이를 악문 채 둘 중 하나의 앞으로 걸어갔다. 자리에 엎드렸던 여우, 비걸이 이연화를 증오와 공포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게...내게 붙들린 것도 계획이었소?"
대답 대신, 이연화는 그저 담담한 얼굴로 칼을 들었다. 냉담하고 오연한 조롱이 흘러나왔다.
"방심 한 번에 이 꼴이라니, 강호는 참 무서운 곳이지."
연검은 마치 중검과 같은 무게로 상대를 베어냈다. 절명한 자의 시신에서 흐른 피가 발에 닿기 전에, 이연화는 몸을 날려 봉림의 앞에 내려섰다. 봉림은 바닥에 피를 토하고는, 배를 움켜쥔 채 이연화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가 강렬하게 흔들렸다. 그 기저에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닌, 처절할 정도의 후회가 배어 있었다. 봉림이 웃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허탈하게 내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스럽구나. 한스럽다. 십 년 전, 우리의 주상을 잘못 점찍지만 않았더라면...지금쯤 남윤은 전에 없이 부흥했을 텐데."
너희가 차라리 내게 접근했더라면, 사형은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이연화는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잠시 멈칫했다. 그 눈가로 어쩔 수 없는 고통이 희미하게 스쳤다. 그 모든 일들을 겪은 후에도, 이상이의 안에는 아직 선고도에 대한 회한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그 결과가 처참했다 한들, 함께했던 모든 시간을 도려내듯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연화가 발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 어깨가 순간적으로 작아진 것처럼 보였다.
"가정은 아무런 의미도 없지요. 이제 그만 끝냅시다."
봉림의 눈이 번쩍였다. 이연화의 집중력이 잠깐 흐트러졌다고 여겼는지, 아니면 마지막 발악인지 그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내력이 실린 비수가 이연화의 급소를 노리고 뱀처럼 달려들었다. 잠시 떨어졌던 눈길이 홱 올라왔다. 상체를 틀어 그 일격을 피하면서, 이연화는 마지막 남은 한 톨의 내력까지 끌어올려 상대의 등으로 장을 날렸다.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 일격은 봉림의 내부를 갈기갈기 찢듯이 터뜨려 놓았고, 신 만성도의 맹주라 자칭하던 자는 곧 토혈하며 쓰러져 부르르 떨었다. 붉은 혼례복 아래로 스멀스멀 피가 스몄다.
이연화는 묘한 허무함을 느끼며 그 시신을 바라보았다. 어떤 권력이나 야심을 가졌든, 이런 인간의 마지막은 늘 비슷했다. 하지만 시체를 보며 감상에 젖을 시간 따위는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연화는 잠시 휘청이다가, 자리에 풀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눈앞으로 이상한 빛이 깜박거렸다. 상대의 암습에 당한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끝남과 동시에, 내력이라곤 조금도 남지 않은 몸 안쪽에서 미칠 듯한 열기가 터진 탓이었다. 젠장, 이거 진짜 희락기 아니야? 이연화가 진땀을 흘리며 불길하게 생각했다.
그때, 밖에서 여럿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병력이 접근하는 기척이었다. 이연화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마 근처를 지나던 자가 전투의 소음을 듣고 병사들을 소집한 모양이었다. 아, 이거 안 되겠는데. 이연화가 낭패스럽게 미간을 좁힌 채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가 어찔하더니 다리 사이로 미끌한 감각이 쏟아졌다. 더 이상은 싸우기 어려웠다. 신음을 가까스로 삼키다가, 이연화는 자신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달아나려던 이를 발견하고 눈을 날카롭게 떴다. 이연화에게 걸렸다는 사실을 안 남자가 소리높여 외쳤다.
"여기야, 여기! 빨리들 와라! 얼른-."
남자가 말을 끝내기 전에, 이연화는 그 앞으로 날아가 빠르게 점혈했다. 그쯤이야 내력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소리를 들었는지, 병력의 기척이 더 가까워졌다. 이연화가 억지로 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밖에서 갑작스레 폭음 따위가 들려왔다. 문 앞까지 다가와 웅성이던 사람들이 화들짝 다시 몰려갔다. 다수의 비명소리, 몸뚱이가 바닥을 치는 소리, 병장기 섞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에게 공격받는 모양이었다. 백천원 사람들이 도착한 걸까? 이연화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가 다시 심각해졌다. 누가 왔든, 이런 상태의 자신을 보일 수는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부상을 당한 참이라면 모를까, 이런 꼴로 다른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잠깐 고민하다, 이연화는 살려달라 애원하는 자들을 거의 한 호흡에 점혈하고는 검을 들었다.
"여기...외부인이 모르는 비밀 통로 같은 것이 있습니까?"
이연화가 검으로 한 남자의 목을 가리킨 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흰 얼굴이 온통 불그스름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반사적으로 안색을 붉힌 남자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그...혼방에 있던 것으로 아오. 무, 문주가 계시던 곳의 침상 뒤편에...."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호흡을 제어하기가 어려워졌다. 몸이 이렇게 급속도로 이상해질 수도 있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곧 여기 들어오는 자들이 있다면...이연화는 안전하니, 걱정하지 말라 하시오."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남기고, 이연화는 비틀거리는 발로 뛰어올라 높은 곳의 창으로 몸을 날렸다. 이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잠시 몸을 감춰야 했다. 사람의 인기척이 없는 곳, 몇날 며칠이고 발견되지 않을 만한 곳으로 혼자 숨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와 동시에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 몸을 던져버리고 싶기도 했다. 전신을 잠식한 열기가 이성을 빠르게 태워버렸다. 이연화는 봉림이 먹인 약기운과 싸울 때만큼이나 고군분투하며 혼방을 찾았다.
심한 부상을 입고 은신처를 찾는 야생동물처럼, 이연화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침상 뒤의 선반을 짚었다. 하지만 어떤 것이 기관인지 살필 여력이 없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았고, 고열 때문에 제대로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선반의 기물 몇 가지를 더듬다가, 이연화는 곧 검을 떨어뜨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등으로 딱딱한 선반이 와 닿았다. 전신이 자글자글 타오르는 듯했다. 일견 달콤한 가면을 쓰고 찾아들었던 욕구는, 좀처럼 충족되지 않자 이제 발톱을 세워 사정없이 체내를 공격하고 있었다.
원래 음인의 희락기는 이렇게 아픈 건가? 아니면 내 몸이 이상한 건가? 이연화가 가슴이 터질 것처럼 빠른 숨을 몰아쉬며 손목을 보았다. 확 깨물어버린 탓에, 손목의 팔찌는 이미 어딘가로 모두 흩어져 있었다. 방법이 없네. 그런데 아파...너무 아픈데. 이연화가 고통에서 우러나온 신음을 낮게 흘리며 선반에 뒷머리를 쿵 댔다. 어찌나 괴롭던지, 벽차지독의 발작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시야가 더욱 부옇게 흐려졌고, 오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턱이 덜덜 떨렸고 호흡이 어려웠다. 몸이 부서질 듯한 감각에 두들겨 맞아, 이연화는 붉은 방 안에서 잠시 의식을 잃었다.
반쯤이나마 정신을 차렸을 때, 이연화는 늘어졌던 손을 움찔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이연화가 반사적으로 검을 찾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손길이 팔목을 쥐었다. 상대를 다른 손으로 공격하려 들다가, 이연화는 순간 멈칫했다. 상대의 체취를 맡은 탓이었다. 익숙한 냄새. 자신을 죽이려 들지 않을, 드물게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 본능적으로 그렇게 판단하자마자, 이연화는 상대의 팔을 꽉 마주잡았다. 힘들어. 말이 목구멍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대신 생리적인 눈물이 눈가로 흘렀다.
하지만 그 반응이 무언가를 전달했는지, 곧 부드러운 입술과 체취가 목으로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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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바로 서기가 어려웠다. 교완만의 독을 치료하고 일어섰을 때와 비슷할 만큼 어지러웠다.
하지만 자리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지금 팔을 붙든 손이 자신을 안아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머릿속이 뿌연 나머지 그 이유를 명료히 알 수는 없었으나, 그런 상황만은 죽어도 피하고 싶었다. 이연화는 정말 길게 느껴지는 길을 지나, 온갖 붉은빛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공간에 들어서며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의 광경도, 요란한 소리들도 어쩐지 한 꺼풀 멀게 느껴졌다. 오감이 자꾸 둔해져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내가 왜 이렇게 됐더라. 이연화는 내리깐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사고의 실마리를 잡았다.
이연화가 혼례복을 순순히 입자, 봉림은 매우 흡족한 눈치였으나 바로 안심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저항해 봤자 사지를 붙들고 억지로 옷을 입힌 다음 약을 더 먹일 것 아니냐. 인간의 마지막 존엄을 좀 지키자는데 그게 그렇게 이상하냐'고 이연화가 투덜거렸으나, 신 만성도의 맹주는 자신이 이연화를 믿든 믿지 않든 필요한 절차라고 이야기하며 술잔을 올렸다. 물론 모양만 멋드러진 술잔일 뿐, 이연화의 눈에는 그저 독사발이었다. 자신의 선택지를 재어보다가, 이연화는 바닥이 똑똑히 보이지 않는 호수에 뛰어드는 기분으로 훌쩍 잔을 비웠다.
망할 자식. 대체 미혼약을 얼마나 탄 거야? 술을 마시자마자, 이연화는 눈앞에 선 남자를 향해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눈을 떴을 때 느꼈던 탈력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술이 식도를 타고 완전히 넘어가기 전인데도 머리에서 힘이 풀렸다. 이연화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찍어눌렀다. 참지 못하고 난리를 피우면, 이런 난감한 꼴까지 감수한 의미가 없었다. 정신이 아득한 구덩이로 떨어지는 것처럼 끝없이 혼미해지다가 결국에는 멍해졌다. 이윽고 이연화가 총기를 잃은 얼굴로 앉아 있자, 봉림은 그 팔을 잡아 일으키고는 퍽 친절한 태도로 인도했다.
그래도 옛날 그 옷보다는 안 무겁네. 이연화가 실없이 생각했다.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혼례복을 입고 찬 물에 빠졌던 기억이 스쳤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였더라. 어디였지? 누구랑 같이 있었는데. 이연화가 기계적으로 발을 옮기며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이연화가 머릿속 물음표 하나를 붙들고 애쓰는 동안,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말소리들이 쏟아졌다.
"이상이."
"정말 이상이다."
"봉 맹주, 경하드립니다."
"계획의 결과가 궁금하여 미리 와 있었습니다만, 식에 참여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남윤의 계보가 이어지겠군요. 훤비와 풍아로의 후손이라니, 흠 잡을 데가 없습니다."
인도하던 손길이 자신을 자리에 앉혔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어, 장내의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였다. 이연화는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이며,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고자 애썼다. 하지만 시야가 너무 심하게 일렁여 그 머릿수조차 똑바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생각,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연화가 멍한 가운데 떠올렸다. 할 수만 있다면 얼음물에라도 뛰어들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을 왜 해야 하더라. 이연화가 다시금 멍하게 떠올렸다. 몸이 너무 무거운데, 잠깐만 누우면 안 되나...눈을 깜박 감았다가, 이연화는 자신을 둘러 안은 손을 보았다. 자신과 나란히 앉았던 누군가가, 기울어지던 몸이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잡아준 모양이었다.
"으음, 방소보. 나 괜찮아."
이연화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자신을 부축할 사람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코 끝으로 희미하게 맡아지는 체취가 낯설었다. 방다병이 아닌가? "아비?" 이연화가 혼몽한 정신으로 다시 불렀다. 하지만 이 냄새는 금원맹주도 아니었다. 그럼 누구지? 이연화가 반사적인 거부감에 등으로 힘을 주었다. 상대의 손을 빌어 겨우 바로 앉자, 하객들 중 누군가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봉 맹주. 약을 얼마나 쓴 겁니까? 식이 끝나기도 전에 기절하시겠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직접 동해대전에 참가하진 않았으나 이상이의 위명은 익히 들었으니까요. 아직 내공이 완벽히 돌아오지 않았다지만, 벽차지독에서도 풀려난 몸이지 않습니까. 사슬에서 풀어주려면 조금도 방심할 수 없지요."
나란히 앉은 남자가 이연화의 한 손을 잡은 채 예의바르게 말했다. 퍽 친밀한 태도였다. 이연화는 그 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좁혔다. 자신을 이런 거리에서 대할 사람은 매우 한정적이었는데, 귀에 들리는 목소리는 그만큼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고수도 방심 한 번에 이 꼴이라니, 강호는 참 무서운 곳이 아닙니까."
낮고 걸걸한 음성이 너스레를 떨듯이 말했다. 몇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봉림이 상대를 가볍게 치하했다.
"비걸, 자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수고해준 덕이지."
"성가와 서가의 그 멍청이들이 자꾸 맹의 결정을 의심하고 걱정하여 일이 수월하진 않았습니다만, 다행히 목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비걸이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 흥을 돋우려는 투로 이었다.
"금원맹주도 소식을 들으면 아주 속이 뒤집힐 겁니다. 이상이 일로 각 방주를 그렇게 괴롭혔는데, 숙적이 이런 상황에 처했을 줄은 모르겠지요."
"어룡우마방의 입장에서는,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원수입니다. 하지만 죽음보다 이런 삶이 더 힘들 테니 묵과하지요."
"그럼요, 그럼요. 천하의 영웅이라고 불렸던 자가 평생 방에 묶여 아이를 생산하게 되었는데,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여길 겁니다."
"설마 자진하려 들지는 않겠지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연화를 잡았던 손아귀로 힘이 들어갔다. 이연화는 그 손길을 뿌리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를 떠올리려 들 때마다 자꾸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봉림이 짐짓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원래 음인은 각인한 양인의 말을 거스르기 어려운 법입니다. 풍아로의 비술로 태를 건강하게 만드는 과정을 거쳐야겠으나, 그 이전에 각인하여 제 말을 잘 듣도록 길들여야지요. 혹시 알겠습니까? 미래에는 마음을 바꿔, 남윤의 재건에 도움을 주게 될지 말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홍복일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항이 심할 테고, 시간이 꽤 걸릴 텐데...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서, 인질을 구해놓는 게 어떻습니까? 그, 이상이의 제자라고 소문 난 공자가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제안했다. 이연화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이상이의 제자.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자니 퍽 낯설었지만, 그 말은 일종의 닻처럼 이연화의 주의를 잡아챘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물론 그런 변화를 알 길 없이, 사람들이 멋대로 떠들었다.
"천기산장의 소장주 말입니까? 그 청년은 이제 만인책에 오를 만한 고수예요, 잡아오려면 이쪽에서도 꽤 출혈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럼, 이상이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사람들이...아니, 그렇다고 백천원주들이나 금원맹주를 데려올 순 없지 않습니까?"
"적비성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어떤 남자가 신음처럼 말했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코웃음이 들렸다.
"우리가 이상이도 잡았는데, 적비성이라고 안 될 게 있습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복수해야 하는 대상인 것을요. 그자도 제 힘만 믿고 자만하다가 각 방주에게 잡혀 혼인당할 뻔한 적이 있잖습니까. 어떤 절세 고수라도 결국은 사람이고, 틈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계략을 잘 꾸민다면 방 공자든 적비성이든, 사고문 사람이든 잡아올 수 있어요."
"그렇다면 좋겠지만, 너무 우리를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황궁과 강호가 또 힘을 합치면 꽤 골치아파질 테니까요."
이연화의 왼편 손가락이 까딱했다. 몸뚱이는 여전히 물 먹은 솜처럼 늘어져 있었으나,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치열하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건 안 돼. 나는 친한 사람이 별로 없단 말이야. 이연화의 일부분이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그렇게 많은 사건을 거치면서도, 날 배신하지 않고 남아준 사람은 정말 별로 없다고. 이미 나 때문에 고통도 많이들 받았는데, 더 이상 힘들게 하면 되겠어. 이연화가 진땀을 흘리며 이성의 끈을 부여잡았다.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눈을 감으며 앞으로 몸을 숙이자, 봉림이 얼른 어깨를 잡아주었다. 볼 안쪽을 세게 깨물고, 이연화는 눈앞의 반상을 짚은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목에서 옥 팔찌가 빛나고 있었다. 올라오는 토기를 참는 척 왼팔로 입을 가리며, 이연화는 그 염주알을 세게 깨물었다. 소매 뒤편의 사정을 모르는 자들이 웃으며 조롱했다.
"문주께서 빨리 눕고 싶으신가 봅니다."
"맹주, 빨리 혼방에 드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이빨 아래로 피 맛이 배었다. 염주알과 함께 손목의 피부를 물어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 작은 상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연화는 목을 넘어간 쓴맛에 매달리며 두어 차례 기침을 뱉었다. 곧 시원한 불이 체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괴이한 느낌이었으나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연화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온몸을 짙게 채웠던 텁텁함이, 마치 장대비 아래의 모닥불처럼 덧없이 사라졌다.
"문주, 괜찮으십니까?"
봉림이 퍽 모순적이게도 염려스러운 투로 물었다. 하지만 이연화는 금방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뜬 채, 이연화는 소매 아래편에서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바라보던 봉림이 의아하게 귀를 가까이했다. "문주?" 남자가 불렀다. 하지만 이연화는 그 목소리 대신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흔, 마흔하나. 모인 자들을 훑어보며 숫자를 세던 이연화가 천천히 등을 폈다. 바르다 못해 꼿꼿한 자세였다. 봉림의 눈이 커졌다. 소매를 내리고, 이연화는 문에서 가장 가까이 앉았던 사람을 가리키며 맺었다.
"마흔둘."
장내가 일순 고요해졌다. 조금 전까지 떠들어대던 것이 거짓말처럼, 모인 이들은 말을 잃어버리고 아연해졌다. 불신과 경악의 시선이 한 점으로 모였다. 자리에 똑바로 앉은 남자는, 약에 취해 비틀거리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날선 눈을 하고 있었다.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옥처럼 보였던 염주알들이 군데군데 뭉그러지고 끊어져 있었다. 즐겁게 들릴 만큼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연신침의 선물이 참으로 신묘합니다. 감쪽같지요? 이 염주알들은 정교하게 위장된 해독제들입니다. 몇 가지 응급상황에 대비한 약함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뭐 댁들이 내게 쓸 약이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위험을 감수할 순 없을 테니 결국은 산공독이나 미혼약, 아니면 희락기를 앞당기는 약을 쓰겠지. 적 맹주처럼 경맥을 끊어두면 어쩌나 걱정하긴 했는데, 다행히 팔다리만 묶어 두셨더군요. 운이 좋았지요."
이연화가 싱긋 웃었다. 물론 그 웃음을 웃음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연화가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서자, 하객들 중 몇이 앉은자리에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몸을 물렸다. 벌떡 일어선 봉림이 더듬거렸다. 그 얼굴이 당혹으로 희게 질려 있었다.
"왜, 왜 더 일찍 도망갈 수도 있었는데-."
"그러게요. 왜일까요?"
이연화가 놀리듯 되물었다. 그 시선이 장내에 모인 사람들을 훑었다. 까만 수정구슬처럼 보이는 눈이었다. 누군가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검을 잡았고, 누군가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연화가 엷고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눈까지는 닿지 않는 웃음이었다.
"중요하신 분들이 마흔둘씩이나, 이리 제발로 모여주실 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 사람들을 불러! 거기 문간에 너, 당장 나가서-."
발작적인 지시는 끝나지 못했다. 이연화의 손에서 출발한 잔이 화살처럼 그 머리를 때린 탓이었다. 두개골을 박살낼 작정은 아니었기에, 남자는 쓰러져 경련할 뿐 사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놀란 소리를 지르며 물러났다. 이연화는 뒷짐을 진 채 자리에서 훌쩍 뛰어올라, 문간에서 벌벌 떨던 꼬마의 앞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붉은 혼례복이 펄럭였다. 조금 전까지와 딴판으로, 이연화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허리를 약간 굽히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얘야, 아까 나랑 약속했었지. 가져왔니?"
얼빠진 얼굴로 이연화를 바라보던 아이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곧게 뻗은 나뭇가지 하나를 건넸다. 이연화는 나뭇가지를 받아 휘둘러보고 싱긋 웃었다.
"그래, 튼튼해 보이는 걸로 잘 골랐네."
"이, 이것도요."
아이가 얼른 이연화의 머리장식을 내밀었다. 혼례에 쓰이는 화려한 것이 아닌, 이연화가 잡혀왔을 때 하고 있었던 물건이었다. 이연화는 아무렇지 않게 머리장식을 바꾸고, 백의 위에 걸쳤던 붉은 혼례복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검처럼 휘둘러 들자, 혼례를 치르는 사람이 아닌 방랑 검객과 같은 풍모가 느껴졌다. 이연화가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이제 너는 나가렴. 네 방으로 돌아가서, 나나 백천원 사람들이 올 때까지 나오지 말고 숨어 있어." 아이가 푸르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를 내보내고, 이연화는 문을 등지며 홱 돌아섰다. 얼어붙은 이들을 향해, 이연화가 빙그레 웃었다. 그림 같은 미소였다. 그는 찾아온 환자들을 정리하는 의원처럼 자신의 앞을 가리키며 공손히 말했다.
"자, 일렬로 서서 얌전히 혈도를 짚혀 주시면, 죽이지 않고 백천원에 인계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그 말대로 금방 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연화가 한쪽 입매를 살짝 올렸다. 완벽히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하나, 여전히 심후한 내력이 전신을 휘감았다. 긴 머리칼이 슬쩍 떠올랐다가 내려왔다. 그 표정이 싸늘해지면서, 줄곧 느긋하던 분위기가 일변했다. 십 년 전의 동해대전에 참전할 때와 비슷한 얼굴로, 이연화는 다양한 표정을 지은 면면들을 향해 쏘아붙였다.
"하지만 이 문을 나가 달아나려 든다면, 그 명은 오늘까지다."
냉랭한 선언과 함께 줄기줄기 피어오르는 살기에, 모인 자들의 얼굴로 귀신을 마주한 듯한 두려움이 스쳤다. 봉림이 내력을 섞어 고함을 쳤다.
"다들 뭐 하고 있소! 어떻게든 제압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해!"
주춤거리던 이들 중, 반절 정도가 각자의 무기를 쳐들고 달려들었다. 나머지 절반은 무림인이 아닌 듯, 얼른 뒤편으로 빠져 덜덜 떨기 바빴다. 뒷문이 없느냐고 허둥대던 꼴을 보다가, 이연화는 한쪽 다리를 뒤로 빼며 숨을 멈추었다. "안 돼, 피해!" 누군가가 외쳤지만, 그 외침에 모든 사람이 반응하지는 못했다. 백천원 앞마당에 쳐들어온 자들을 일거에 정리했던 검격이, 장내의 공기를 무정히 갈랐다.
개중 고수들은 몸을 피하거나 무기로 어찌어찌 막아냈으나, 그러지 못한 자들은 가슴팍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열다섯이 남았군. 이연화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뛰어오르며 생각했다. 나부낀 머리카락 끝이 천장에 가볍게 닿았다. 열다섯이면, 최악은 아니네. 이연화가 힐끗 밖을 보았다. 어쨌든 이곳에는 눈앞에 모인 사람들 말고도 무장 병력이 있었으니, 그들이 소란을 알아채고 집결하기 전 상황을 정리하는 편이 나았다. 또한 지금의 자신은 내력을 편안하게 펑펑 써가며 싸우기 곤란한 처지였다. 속전속결. 이연화는 결심하듯 생각하며 나뭇가지를 들었다.
그 나뭇가지에서 조금 전과 같은 검격이 두 번, 세 번째로 터져 나오자 또 다섯이 줄었다. 폭음 같은 소리가 거푸 이어지며, 연회장의 집기들이 무참히 갈라지고 부서졌다. 비명과 신음이 난무했고, 새로운 혈흔이 바닥에 뿌려질 때마다 뒤로 도망친 자들이 볼품없는 소리를 질러댔다. 이연화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남은 열 중 셋은 부상을 입었고, 셋은 비틀거렸으며 넷은 멀쩡했다. 앞으로 열을 상대하자면, 이제는 조금 신중해져야 했다. 큰 공격을 거푸 퍼부은 탓으로 내력이 많이 소모되어 있었다. 형질이 바뀐 이후로 정말 조금의 내력도 남지 않을 때까지 심신을 소모해본 적은 없었지만, 마지막 기억을 돌이켜볼 때 아주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나랑 억지로 결혼하겠다는 놈 앞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그게 정말 최악이지. 이연화가 내심 코웃음을 치듯 생각하며 바닥으로 착지했다. 득달같이 따라오는 암기를 파사보로 피해내는 와중, 그는 역할을 다한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죽은 이의 연검을 하나 집어들었다. 내력을 받은 연검이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다.
금속이 어지럽게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남은 적들은 자아를 가진 화살처럼 끈질기게 이연화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하지만 이연화는 잡으려 애를 써도 그저 흩어졌다가 나타나는 연기처럼 그 사이사이를 누볐다. 그 연기는 시시때때로 날카로운 칼끝으로 변해, 상대의 몸을 찌르거나 베어냈다. 이연화의 눈에, 이 무리는 여럿이었으나 결국 하나의 큰 짐승과 비슷했다. 살아남고자 발악하며, 강점과 약점을 지닌 짐승. 그리고 이연화는 늘 상대의 급소를 빠르게 찾아내는 편이었다. 부상을 입은 자들, 그리고 개중 실력이 덜한 자들이 먼저 차례대로 그 칼에 쓰러졌다.
어느덧 장내에는 네 명의 적수와 이연화가 남아 있었다. 이연화의 백의는 어느새 삼분지 일 정도가 피로 물든 채였다. 흰 뺨에도 핏방울이 점점이 묻었다. 사방을 둘러싼 이들을 향해 감각을 곤두세운 채, 이연화는 무게중심을 약간 낮추었다.
"어떻게...어떻게 이렇게도...."
남은 넷 중 하나가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그 얼굴은 상기된 동시에 창백해 보였다.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오래 전이긴 하지만, 다수를 상대로 하는 싸움은 많이 해봤지요."
"정신 똑바로들 차리시오. 불구로 만들더라도 제압해야 하오!"
봉림이 이연화를 노려보며 씹어 뱉었다. 그 옆에 섰던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그 얼굴이 좌절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맹주, 지금껏 생채기 하나 제대로 내지 못했습니다." 그 낮은 속삭임을 듣고, 이연화가 짐짓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 추 공자. 거기 있었군요." 놀리듯 건넸지만, 물론 아무도 웃지 못했다. 봉림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말했다.
"이 냄새를 보면 모르겠소? 이상이도 정상은 아니오. 내력을 소모할수록 제어가 어려워지는 듯하니, 일단 시간을 끌어야 해."
감 좋은 놈 같으니라고. 이연화는 내심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지만, 겉으로는 대수롭잖은 태도를 유지했다. 부정해봐야 딱히 의미는 없을 터였다. 그들이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이곳은 짙디짙은 연꽃 냄새로 꽉 채워져 있었다. 이제 슬슬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느낌이, 희락기로 착각했던 그날과 비슷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양인들의 필사적인 체취 역시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럼 최선을 다해 보시지요."
몸 앞으로 칼을 들며, 이연화가 도발하듯 엷은 미소와 함께 건넸다. 흐트러진 호흡을 들키지 않으려다 보니, 숨이 목 안에서 막히며 조금 답답해졌다. 눈앞의 사람들과 달리, 이연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짧은 시선을 교환한 네 고수가 동시에 쇄도했다.
평소라면 그렇게 대처하지 않았을 터였다. 강수를 더 강한 수로 받아치는 것은 이상이가 즐겨하던 일이었지, 이연화의 방식은 아니었다. 몸이 멀쩡했다면 흐름의 묘리로 강공을 흘려낸 다음, 자신의 공세를 펼치기 가장 좋은 순간을 엿보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일각도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이연화는 첨예하게 집중하며, 몸에 남았던 모든 내력을 끌어모아 폭발시켰다. 동굴의 흰 나무 아래에서 검 없이 시전했던 상이태검의 절초였다. 흰 옷자락과 머리칼이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휘돌았다.
그야말로 벼락이 내리꽂힌 듯한 소리가 터졌다. 이연화를 상대로 그나마 버티던 네 명의 고수가 무작스럽게 나가떨어졌다. 이겼다는 감각에 취할 틈도 없이, 이연화는 매서운 눈으로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둘은 그대로 즉사했고, 둘은 숨이 붙어 있었지만 큰 부상을 입었다. 탈력감과 나른함이 즉각적으로 온몸을 휘감았지만, 이연화는 조용히 이를 악문 채 둘 중 하나의 앞으로 걸어갔다. 자리에 엎드렸던 여우, 비걸이 이연화를 증오와 공포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게...내게 붙들린 것도 계획이었소?"
대답 대신, 이연화는 그저 담담한 얼굴로 칼을 들었다. 냉담하고 오연한 조롱이 흘러나왔다.
"방심 한 번에 이 꼴이라니, 강호는 참 무서운 곳이지."
연검은 마치 중검과 같은 무게로 상대를 베어냈다. 절명한 자의 시신에서 흐른 피가 발에 닿기 전에, 이연화는 몸을 날려 봉림의 앞에 내려섰다. 봉림은 바닥에 피를 토하고는, 배를 움켜쥔 채 이연화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가 강렬하게 흔들렸다. 그 기저에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닌, 처절할 정도의 후회가 배어 있었다. 봉림이 웃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허탈하게 내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스럽구나. 한스럽다. 십 년 전, 우리의 주상을 잘못 점찍지만 않았더라면...지금쯤 남윤은 전에 없이 부흥했을 텐데."
너희가 차라리 내게 접근했더라면, 사형은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이연화는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잠시 멈칫했다. 그 눈가로 어쩔 수 없는 고통이 희미하게 스쳤다. 그 모든 일들을 겪은 후에도, 이상이의 안에는 아직 선고도에 대한 회한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그 결과가 처참했다 한들, 함께했던 모든 시간을 도려내듯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연화가 발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 어깨가 순간적으로 작아진 것처럼 보였다.
"가정은 아무런 의미도 없지요. 이제 그만 끝냅시다."
봉림의 눈이 번쩍였다. 이연화의 집중력이 잠깐 흐트러졌다고 여겼는지, 아니면 마지막 발악인지 그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내력이 실린 비수가 이연화의 급소를 노리고 뱀처럼 달려들었다. 잠시 떨어졌던 눈길이 홱 올라왔다. 상체를 틀어 그 일격을 피하면서, 이연화는 마지막 남은 한 톨의 내력까지 끌어올려 상대의 등으로 장을 날렸다.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 일격은 봉림의 내부를 갈기갈기 찢듯이 터뜨려 놓았고, 신 만성도의 맹주라 자칭하던 자는 곧 토혈하며 쓰러져 부르르 떨었다. 붉은 혼례복 아래로 스멀스멀 피가 스몄다.
이연화는 묘한 허무함을 느끼며 그 시신을 바라보았다. 어떤 권력이나 야심을 가졌든, 이런 인간의 마지막은 늘 비슷했다. 하지만 시체를 보며 감상에 젖을 시간 따위는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연화는 잠시 휘청이다가, 자리에 풀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눈앞으로 이상한 빛이 깜박거렸다. 상대의 암습에 당한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끝남과 동시에, 내력이라곤 조금도 남지 않은 몸 안쪽에서 미칠 듯한 열기가 터진 탓이었다. 젠장, 이거 진짜 희락기 아니야? 이연화가 진땀을 흘리며 불길하게 생각했다.
그때, 밖에서 여럿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병력이 접근하는 기척이었다. 이연화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마 근처를 지나던 자가 전투의 소음을 듣고 병사들을 소집한 모양이었다. 아, 이거 안 되겠는데. 이연화가 낭패스럽게 미간을 좁힌 채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가 어찔하더니 다리 사이로 미끌한 감각이 쏟아졌다. 더 이상은 싸우기 어려웠다. 신음을 가까스로 삼키다가, 이연화는 자신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달아나려던 이를 발견하고 눈을 날카롭게 떴다. 이연화에게 걸렸다는 사실을 안 남자가 소리높여 외쳤다.
"여기야, 여기! 빨리들 와라! 얼른-."
남자가 말을 끝내기 전에, 이연화는 그 앞으로 날아가 빠르게 점혈했다. 그쯤이야 내력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소리를 들었는지, 병력의 기척이 더 가까워졌다. 이연화가 억지로 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밖에서 갑작스레 폭음 따위가 들려왔다. 문 앞까지 다가와 웅성이던 사람들이 화들짝 다시 몰려갔다. 다수의 비명소리, 몸뚱이가 바닥을 치는 소리, 병장기 섞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에게 공격받는 모양이었다. 백천원 사람들이 도착한 걸까? 이연화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가 다시 심각해졌다. 누가 왔든, 이런 상태의 자신을 보일 수는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부상을 당한 참이라면 모를까, 이런 꼴로 다른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잠깐 고민하다, 이연화는 살려달라 애원하는 자들을 거의 한 호흡에 점혈하고는 검을 들었다.
"여기...외부인이 모르는 비밀 통로 같은 것이 있습니까?"
이연화가 검으로 한 남자의 목을 가리킨 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흰 얼굴이 온통 불그스름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반사적으로 안색을 붉힌 남자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그...혼방에 있던 것으로 아오. 무, 문주가 계시던 곳의 침상 뒤편에...." 이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호흡을 제어하기가 어려워졌다. 몸이 이렇게 급속도로 이상해질 수도 있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곧 여기 들어오는 자들이 있다면...이연화는 안전하니, 걱정하지 말라 하시오."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남기고, 이연화는 비틀거리는 발로 뛰어올라 높은 곳의 창으로 몸을 날렸다. 이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잠시 몸을 감춰야 했다. 사람의 인기척이 없는 곳, 몇날 며칠이고 발견되지 않을 만한 곳으로 혼자 숨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와 동시에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 몸을 던져버리고 싶기도 했다. 전신을 잠식한 열기가 이성을 빠르게 태워버렸다. 이연화는 봉림이 먹인 약기운과 싸울 때만큼이나 고군분투하며 혼방을 찾았다.
심한 부상을 입고 은신처를 찾는 야생동물처럼, 이연화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침상 뒤의 선반을 짚었다. 하지만 어떤 것이 기관인지 살필 여력이 없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았고, 고열 때문에 제대로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선반의 기물 몇 가지를 더듬다가, 이연화는 곧 검을 떨어뜨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등으로 딱딱한 선반이 와 닿았다. 전신이 자글자글 타오르는 듯했다. 일견 달콤한 가면을 쓰고 찾아들었던 욕구는, 좀처럼 충족되지 않자 이제 발톱을 세워 사정없이 체내를 공격하고 있었다.
원래 음인의 희락기는 이렇게 아픈 건가? 아니면 내 몸이 이상한 건가? 이연화가 가슴이 터질 것처럼 빠른 숨을 몰아쉬며 손목을 보았다. 확 깨물어버린 탓에, 손목의 팔찌는 이미 어딘가로 모두 흩어져 있었다. 방법이 없네. 그런데 아파...너무 아픈데. 이연화가 고통에서 우러나온 신음을 낮게 흘리며 선반에 뒷머리를 쿵 댔다. 어찌나 괴롭던지, 벽차지독의 발작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시야가 더욱 부옇게 흐려졌고, 오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턱이 덜덜 떨렸고 호흡이 어려웠다. 몸이 부서질 듯한 감각에 두들겨 맞아, 이연화는 붉은 방 안에서 잠시 의식을 잃었다.
반쯤이나마 정신을 차렸을 때, 이연화는 늘어졌던 손을 움찔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이연화가 반사적으로 검을 찾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손길이 팔목을 쥐었다. 상대를 다른 손으로 공격하려 들다가, 이연화는 순간 멈칫했다. 상대의 체취를 맡은 탓이었다. 익숙한 냄새. 자신을 죽이려 들지 않을, 드물게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 본능적으로 그렇게 판단하자마자, 이연화는 상대의 팔을 꽉 마주잡았다. 힘들어. 말이 목구멍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대신 생리적인 눈물이 눈가로 흘렀다.
하지만 그 반응이 무언가를 전달했는지, 곧 부드러운 입술과 체취가 목으로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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