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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5 23:44
먹은 음식이 엄청 맛있었다거나
누가 숙제를 도와줬다거나
팀원이 개쩌는 플레이를 했을 때 쓰는 극상의 감탄사임
동요라곤 1도 없는 무표정으로 무덤덤하게 내뱉는 통에 들은 사람이 놀라는 것도 처음 한두번 뿐, 다들 이명헌 또 저러네 하며 금방 익숙해짐
그런데 그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단 한명


“정우성.”
“…네, 선배”
“잘했다 베시. 결혼해야겠네.”
“예?”


결혼한다고? 나랑? 갑자기? 왜? 날 놀리는 건가? 저 선배 나 좋아했나? 저걸 갑자기 이렇게 다 듣는데서 말한다고? 왜? 선포하는거야 자기 결혼상대로 찜이라고? 뭐야? 아니 근데 갑자기 결혼이라고, 연애도 건너뛰고. 허참…내가 그렇게 좋나? 그런 티도 전혀 안났는데? 생각해보니 아까 표정도 그닥… 뭐지?


“…정우성!!!”
“네? 네? 우앗!”


상념에 잠긴 정우성 덕에 농구공은 튕겨져나가버렸고…
벤치 베시. 라고 말하는 이명헌의 얼굴은 아까 전과 다를 바 없어서 정우성을 더 고뇌에 빠지게 했음


결혼하자.
그게 한번이 되고, 두번이 되고… 횟수도 셀 수 없이 반복되는 동안 정우성의 머릿속은,



“정우성 나이스. 결혼해야겠다 베시.”
“혀, 형은 또 그런 소릴! 무슨 소리예요!”

또 말했어!! 이대로 소문 나는 거 아냐? 이러다가 연애도 못하는거 아니냐구…물론 농구에만 전념할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정우성, 골 넣으면 나랑 결혼하는거다 뿅”
“…벌칙 아니고요?”

왜 자꾸 저런 말을 하는거야. 남들 앞에서 도장찍고 싶을 정도로 내가 좋나? 그런다고 내가 좋아할 줄 알고? 생긴건 네모네가지고 입술이랑 말투만 둥그런 빡빡이선배는 내 취향 아니거든요



“정우성 오늘 좀 하더라?”
“ㅇㅇ. 결혼각 베시.”

뭐야, 나 없는데서도 결혼 얘길!!
근데 진짜 하려나…결혼. 성공한 운동선수들은 다들 이른 나이에 결혼하던데…그러면 같은 종목 선수들끼리 결혼하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아니, 뭐 명헌이형이랑 결혼하고 싶은 건 아니고…



“우성, 오늘 집중력 좋았다 베시. 결혼할래?”
“…”

뭐지, 방금 대답할 뻔 했어… 명헌이형은 왜 대답도 안 듣고 바로 가는거야? 내가 너무 거절만 했나… 그렇다고 내가 대답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명헌이형 정도면 꽤 괜찮기도 하고… 그런데 형은 날 계속 보고있었나? 연습경기 다른 팀인데도?



그러다 처음으로 둘의 합이 완벽하게 맞은 순간
이명헌의 그림 위에 정우성이 완벽한 획을 그어 득점한 순간,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동요 없는 이명헌을 마주한 정우성은, 마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우는 걸 느낌
제게로 온전히 쏟아진 신뢰, 저만을 위한 계산, 자신이 가려는 곳도, 자신이 가야할 곳도 꿰뚫은 듯한 그 판단
그것은 막 열일곱이 된 소년에게는 너무도 강렬한 감각이었고, 온 몸을 요동치는 혈액과 호르몬에 흥분한 뇌는

아, 나 명헌이형이랑 결혼해도 되겠다.

…라는 판단을 내려버림



…그래도 우리는 학생이니까. 아직은 이르고, 약혼이나. 흠흠. 연애부터 시작하면 어떠냐고 물어봐야지

그렇게 혼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정우성이었으나


“잘했다 우성. 역시 에이스 베시.”

“나이스 우성, 베시“


왜…
결혼하자고 안하지?



하루도, 이틀도, 그 다음 날도
결혼하자는 말만 하면 바로 대답할 준비가 된 우성인데 이제 이명헌이 절대 그 말을 안 하기 시작함 칭찬할때도 잘했다. 가 끝임

정우성은 슬슬 애가 탔음 왜 결혼하자고 안하지?
내가 그동안 싫다고만 해서 마음을 돌렸나?
그런데 정우성은 이제 이명헌이 좋단 말임 이명헌 아니면 결혼할 생각도 없고

그러던 어느날 정우성은 목격하고 말았음
연습게임 마치고 땀에 젖은 최동오에게 수건을 건네며 아키타 원빈. 역시 결혼하자 뿅. 하고 말하는 이명헌을

충격에 빠진 정우성은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앞에 섬. 아키타 원빈이라고? 동오형이 잘생겨서 결혼하자고 하는거야? 하지만 나도 산왕공고농구부창설이래 최고미남인데… 내가 나이도 더 어린데… 어떻게 나한테 결혼하자고 해놓고 바로 양다리를 걸칠 수 있지?
(신현철: 그거 이명헌 말버릇이라고 478번 말했다 정우성아)

첫 배신을 경험한 정우성은 거울앞에서 삐죽거리다 결국 눈물까지 보임
그날 온 신경이 이명헌과 최동오에 쏠려서 연습도 말아먹음 고개를 푹 숙인 정우성에게는 돌아오는 이명헌의 칭찬도, 결혼하자는 말도 없었음

이명헌 바보, 이 능력주의자, 외모지상주의자, 사기꾼, 카사노바 (?)…

제 쪽을 한번도 돌아봐주지 않는 동글동글한 뒷통수에 마음속으로 온갖 원망을 쏟아봤지만 끝끝내 밉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음


평소보다 느지막히 씻고 나오니 체육관은 텅 비어있고, 남은 비품을 체크하는 명헌만 남아있었음.
입술을 몇번 달싹이던 우성은
이대로 안되겠다는 생각에 주먹을 꽉 쥐고 명헌에게 성큼성큼 다가감.



“형, 왜 요즘 저한테 결혼하자는 말 안해요?”
“…내가 그랬나. 베시”
“뭐라구요?”


정우성은 이명헌의 말에 저도 모르게 울컥함 자기가 속을 끓이는 동안 이명헌은 아무 생각도 없었단 거잖음 게다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듯한 저 무심한 태도.


“형은, 왜 그래요? 자기가 먼저 결혼하자고, 내 맘 다 들쑤셔놓고”
“…우성?”
“지금은 왜 그렇게 말해요…”


이명헌이 한걸음 다가왔음. 그 눈썹 끝이 살짝 쳐진 얼굴을 하고, 정우성의 뺨을 손으로 감쌌음. 그 사이 물기가 축축이 묻어나는 걸 보니 저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나봄


“좋아해요. 좋아한단 말이에요. 형이 결혼하자고 하면, 할건데…”
“…”
“좋아하게 해놓고 물러서다니 비겁해요…”


정우성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도 용케 눈을 부릅뜨고 훌쩍거리며 말을 이어갔음
그걸 듣는 이명헌이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가슴이 더 죄는 듯 했지만…

정우성은 몰랐음
비슷한 시기에 자각해버려서 그 뒤로 결혼하자는 농담이 도저히 나오지 않는 이명헌의 속사정을…

그동안 가볍게 던졌던 결혼하자는 말에 조금씩 섞여있던 진심이 언제 이렇게 무거울 만큼 쌓였는지
깨닫고 난 뒤로는 그 말만 꺼내도 제 커져버린 마음을 들킬까봐 꾹꾹 눌러두었는데…
좋아하는 남자애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 앞에 서있는 걸 보자. 이명헌은 저도 모르게,


“우성”
“흐, 네?”
“…결혼은 안 돼 베시.”
“…네?”
“너도 나도 아직 학생. 결혼은 이르다 베시”

“…”
“그러니까 연애부터 어때.”


어… 멍하게 중얼거리던 정우성은 황급히 눈물을 닦음. 흐린 시야 너머 잠겨있던 이명헌은 이제 귀 끝을 살짝 물들인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음.


이게 뭐야. 원래 내가 하려던 말인데… 명헌이 형 때문에 엉망진창이 됐어. 너무해. 이명헌 너무…너무…


이명헌 너무 좋아!





그 이후

“어때요?”
“네가 최고다 뿅. 결혼해야겠다.”
“역시 그렇죠? 나하고만 결혼해야겠죠?”
“뿅.”
“그렇다는거에요 아니라는거에요? 형!! 기다려요!”

우성의 적극적인 마크로 이명헌의 ‘결혼해야겠다’ 말버릇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고 함


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