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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5 02:11
대만태섭

정대만 본인은 여자만 되는 줄 아는데 그 후배가 미국 가고부터는 사귀는 여자애들 전부 그 후배 같은 애만 골라서 사귀고 있음. 물론 알고 그러는 건 아니고 무의식 중에 그러는 거임. 분명 흰 피부에 생머리인 여자를 좋아했던 남자가 어느샌가 까무잡잡한 피부에 곱슬인 여자만 만나는 것도 무의식의 결과물이었음. 그러면서 송태섭이랑도 연락 계속 이어나가겠지. 거의 3주에서 한달 사이로 주고받는 편지가 오지 않을 때 즈음엔 대만이가 수화기를 들 테고.

너는 선배가 전화하게 만들거냐?

탓하는 말투에 멋쩍은 태섭이 목소리가 노이즈에 섞여 넘어오는데 아아아 됐고. 그거 다 핑계야. 라고 타박하면서도 입꼬리는 잔뜩 올라가겠지. 그러다 며칠 늦은 편지가 우편함에 꽂혀있는 걸 보고는 선배를 기다리게 만들고 말이야. 중얼거리지만 그저 후배를 향한 애정이라고만 생각함.

각별한 후배 사랑에 여자친구들이 태섭이 존재를 아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지. 자기가 말하는 그 후배라는 애, 나도 보고싶어. 여자친구의 말에 태섭이 같은 곱슬머리를 귀로 넘겨주고 태섭이처럼 한쪽 귀에만 달린 피어싱을 만지작대면서 그 녀석 미국에 있어서 언제 올 지 몰라. 라며 웃겠지. 그런데 정대만의 여자친구들이 송태섭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음. 자신도 자주 못 보는 송태섭을 굳이 여자친구들한테까지 보여줄 필요를 못 느꼈으니까. 보통 태섭이가 한국으로 왔을 때 일정은 가족과 보내는 이틀, 북산 모임을 위한 하루, 그 나머지는 모두 정대만의 차지로 이루어졌거든. 둘이서 시간 보내기도 모자란데 뭐하러 그래. 언제나 태섭이 일정의 사흘 이상을 차지하면서도 모자란 대만이었지.

태섭이가 한국 들어오기도 전에 헤어지거나 태섭이가 한국에 오는 날이 결정되면 그 즈음에 맞춰서 헤어지는 것도 그런 마음에서 그랬는데 본인은 모름. 2년 사귀면 오래 사귀었지. 그렇게만 생각하는 정대만은 그 2년의 연애가 태섭이가 2년만에 한국에 들어온 날이라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도 몰랐음. 북산들 틈에 앉아있는 송태섭을 봤을 때 그제야 뭔가 가득 찬 느낌이 드는 것도 그저 오랜만에 본 후배가 너무 반가워서라고 생각하는 사람한테 뭘 바라겠어.

선배 여자친구는요?
헤어졌지.
물어볼 때마다 헤어졌대.
진짜야. 2년 만났으면 많이 만났잖아.

당연하게 대만이는 태섭이 옆에 앉았고 태섭이가 대만이의 애인에 대해 물으면 늘 그랬듯이 헤어졌다고 대답하는 패턴 속에서 대만이가 한 마지막 말을 듣고 표정이 묘해지는 태섭이었지.

태섭이가 미국으로 돌아가면 늘 그런 것처럼 태섭이 닮은 여자애를 찾아서 사귀는 나날을 보내다가 시간이 흘러 다시 태섭이가 한국으로 들어올 때 즈음 헤어진 후 북산 모임을 가진 날이었음. 언제나 당연하게 여겨졌던 태섭이의 옆에 다른 남자가 앉아있었지. 그것도 남자친구가. 대만이는 처음으로 태섭이 맞은 편에 앉아 차오르는 화를 애써 소주로 식히다가 문득 송태섭의 남자친구에게서 위화감을 느꼈음. 반듯하지만 묘하게 저와 비슷한 눈썹과 입매를 가진 남자. 머리색은 밝고 눈동자는 새까맸으나 정대만은 송태섭이 누구를 투영해 이 남자를 만났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음. 그저 맞은 편에 앉아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왜 자꾸 송태섭과 눈이 마주쳤는지. 깨닫자마자 입가가 불량하게 올라갈 수 밖에 없었음. 앙큼한 새끼네, 이거. 자기가 여태 사귄 여자애들의 생김새는 생각도 못하면서 자기 닮은 사람이랑 만나는 태섭이는 기막히게 알아차리는 미친놈은 화가 가라앉을 수 밖에 없었음. 그리고 우연처럼 또 마주치는 눈. 대만이는 태섭이를 향해 여유롭게 웃어보였지. 마치 정대만 같은 사람은 네 눈 앞에 정대만 하나 뿐이라는 것처럼.



아 이러고 사귀는 것도 바로 못해서 빙빙 돌다가 아무튼 끝에는 사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