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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9 22:45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적비성은 내적 갈등에 빠져 있었다. 금원맹주에게는 드물다 못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비성의 세계는 단순했다. 아군과 적, 약한 것과 강한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범주로 분명히 나뉘었다. 하지만 이연화는 다소 복잡한 존재였다. 십 년 전의 이상이는 강력했으며 존중할 만한 적이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시점의 이연화는 강한 것과 약한 것, 아군과 적을 혼란스럽게 넘나들다가 어느샌가 서로 목숨을 주고받은 친우에 가까워졌다. 전보다 약해진 데다 적이 아니라 해도, 적비성에게 이상이는 늘 하나뿐인 호적수였으며 무공의 이해자였다. 그런 남자와 다시금 제대로 검을 주고받고픈 욕망은, 적비성에게 본능에 가까울 만큼 당연한 것이었다.
방씨 가문의 꼬마가 가져온 화봉초를 보았을 때, 적비성은 환희에 전율했다. 비록 방다병과 같은 결은 아니라 해도, 적비성 역시 남윤과의 전투가 끝난 후 점점 유령처럼 침잠하는 이연화를 향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갈수록 창백해지는 남자는, 무슨 말과 힘으로 붙들더라도 결국은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지는 모래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연화가 어떤 이유로든 거부한다면 정말 혈도를 짚어서라도 약을 먹일 작정이었지만, 생각보다 방다병의 개새끼 같은 눈동자가 잘 먹힌 것인지 이연화는 그리 길게 고민하지 않고 약을 먹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적비성은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리라 짐작했다.
"아비, 너 정말 백천원까지 따라올 거야? 함께 싸운 과거가 있으니 금원맹을 대놓고 적대시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네가 방문하기에 편한 곳은 아닐 텐데."
"백천원에 가서 뭘 할 작정인지, 네 속셈을 아직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지. 그걸 확인하러 갈 뿐이다."
객잔에 앉아, 적비성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방다병은 잠시 여행에 필요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술잔을 채웠다.
"네가 얘기했던 그 패배한 개들을 더 빨리 와해시키려는 거야. 금원맹이 피해를 볼 일은 없어."
"금원맹 때문이 아니야. 네가 변한 형질을 이용해서 뭔가 얼토당토않은 짓을 할 것 같으니 지켜보려는 거다."
"신뢰가 없구만. 왜 얼토당토않은 일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합리적인 일이었다면 이미 나나 방다병에게 얘기했을 테니까."
"합리적인 일이 아니라서 말하지 않은 게 아니야,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말을 아끼는 거지. 전략을 세우려면 여러 여건들을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어."
이연화가 능청스럽게 말하며 적비성의 잔을 채워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적비성이 예고없이 손을 뻗어 상대의 팔목을 쥐었다. 약간의 내력으로 상대의 몸을 익숙하게 확인하다가, 적비성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양주만의 기운이 한결 거침없이 빛나고 있었지만, 내력의 배치와 균형에 묘한 차이가 있었다. 이연화가 이내 익살스러운 소리를 내며 팔을 흔들었다.
"이거 놔, 적 맹주. 혼인도 안 한 사람이 밖에서 음인 팔을 이렇게 덥석 잡으면 오해받아."
"내력의 조화가 변했군."
"그럴 수밖에, 형질이 변했는데.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니었어. 며칠 동안 제대로 못 잤다니까."
이연화가 가볍게 불평했다. 그 팔을 놓은 적비성이 한쪽 눈썹을 들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 티도 안 내더니, 나름대로 고충은 있었나 보군."
"그야 당연하지. 십오 년을 양인으로 살다가 갑자기 음인이 됐잖아. 사실 아직 적응 안 돼, 조절도 쉽지 않고. 시간이 걸리겠지."
가볍게 투덜거린 이연화가 입맛을 다시고는 술을 털어 넣었다. 상대를 가만히 응시하던 적비성이 팔짱을 끼었다. 시종일관 태연한 모습만 보이던 남자가, 자신의 앞에서 조금이나마 솔직해지고 있었다. 강호의 같은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탓인지, 이연화는 가끔씩 방다병보다 적비성에게 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꼬마 앞에서는 일부러 숨긴 건가?"
"내가 남 때문에 고생할 때에도 그렇게 울고불고 했는데, 자기 때문에 고생한다고 여기면 얼마나 괴로워하겠어. 반쯤은 이름뿐인 스승이지만, 제자한테 마음의 짐을 주고 싶진 않단 말이지. 그리고 뭐, 이게 벽차지독보다 낫다는 건 진심이니까."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뻔뻔하던데. 널 생산 수단으로 쓰겠다는 괘씸한 발상을 들었을 때에도 그렇고."
"음, 걔넨 방다병이 아니잖아. 좀 역하긴 해도 놀랍진 않거든. 그리고 어차피 변한 형질인데, 그런 놈들을 색출하는 데에 이용할 수 있으면 효율적이지 않겠어? 바꿀 수 없다면 빨리 받아들이고 최대한 활용해야지. 그래야 오래 살아."
이연화는 조금 씁쓸하게 말했지만, 그 눈은 방다병이 늙은 여우라고 부를 때처럼 빛나고 있었다. 적비성의 턱으로 힘이 들어갔다. 단 한 번도 이연화를 과소평가한 적이 없었으나, 지금은 어쩐지 마음이 착잡했다. 이연화가 연꽃 냄새를 풍겼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내적 갈등이 다시금 그 몸집을 키웠다. 잠시 고민하다, 적비성은 한숨처럼 이야기했다. 천기산장을 떠나기 전, 냄새를 조절하라며 이연화를 닦달했을 때보다는 한결 진정된 투였다.
"이상이. 네 꿍꿍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용하려면 네가 뭘 가졌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쯧, 여행할 때 그 이름으로 자꾸 부르지 말라니까...그런데 무슨 뜻이야? 내가 뭘 몰라, 갑자기 연꽃 냄새를 풍기는 음인이 된 거잖아."
이연화가 양팔을 슬쩍 들었다 놓으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적비성의 눈가가 꿈틀했다. 틀린 서술은 아니었지만, 그 말 안에는 사태를 진실로 이해한 자의 심각함이 없었다. 적비성이 잠시 머리를 굴리다 물었다.
"천기산장에 혼담을 넣었다던 그 치가 왜 그런 짓을 한 것 같나?"
"내가 전 사고문 문주였던 사람이니까? 나와 맺어지면 얻을 게 많다고 생각했겠지."
예상할 만한 답변이었으나 충분하지 않았다. 적비성이 상대를 빤히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연화의 얼굴이 괴상해졌다. 상대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적비성을 훑어보았다.
"뭐야, 왜 가끔씩 방소보를 보던 것처럼 날 봐?"
"잘 들어라, 이연화. 네 냄새가 이상하다고 했던 건 과장이나 빈말이 아니다. 넌 좀 달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후각이 있는 양인이면 대부분 네게 성적으로 끌릴 거다."
"적 맹주. 넌 예전부터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니까."
이연화가 코웃음을 치며 한 손을 휙 내저었다. 하지만 적비성은 조금도 웃지 못한 채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연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 정도야?" 이연화가 눈썹을 이상한 모양으로 찌푸리고는 물었다. 적비성은 바보를 보는 눈으로 이연화를 응시하며 문 쪽을 고갯짓했다.
"방가 도련님이 왜 그렇게 뿔이 났겠나? 널 불순하게 바라볼 놈들이 엄청나게 늘어날 테니 당연히 신경이 곤두서겠지. 저놈은 네가 양인일 때조차 싸고 돌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
"아니, 난 걔가 그냥 책임감을 과하게 느끼는 거라고 여겼지...그 정도인 줄은 몰랐네."
이연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적비성은 한심스럽게 상대를 보았으나, 더 타박하지는 않았다. 음인으로서는 갓난아기나 마찬가지인 이연화가 그 사실을 몰랐다 하여 탓할 수는 없었다. 미간을 좁힌 채 잠시 생각하던 이연화가, 문득 놀란 얼굴로 적비성을 향했다.
"잠깐, 그럼 너도 그래서 자꾸 나타났다가 사라진 거야? 나한테 그런 쪽으로 동해서? 집중이 안 된다는 게 그런 뜻이었어?"
이연화가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적비성은 억울한 심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그 냄새 때문이다. 생리적인 반응을 어쩌란 말이냐?"
"진짜로? 난 네가 음인한테 반응 안 하는 특이체질 양인인 줄 알았는데."
"그랬다!"
적비성이 악문 잇새로 씹어 뱉었다. 적비성은 무정하고 강력한 손속으로도 유명했지만, 강한 양인이면서 음인의 체취에 꿈쩍하지 않는 특이한 체질로도 유명했다. 웬만한 양인들을 체취 없이도 홀리던 각려초조차, 적비성에게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만일 이연화가 각려초처럼 체취를 만발하며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며 팔을 감아 왔다면...어처구니없는 상상을 전개하다, 적비성은 자기도 모르게 객잔의 식탁을 꽉 움켜쥐었다. 모서리 일부가 그 손바닥 아래에서 뭉개졌다. 그 속사정을 알 길 없는 이연화의 눈이 둥그레졌다.
"뭐, 나한테만 그런 거라고? 정말?"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라. 그러니 네가 이상하다는 거야. 위기감을 가지고 노력해라, 이상이. 진심이다."
적비성이 칼처럼 검지를 뻗어 상대의 미간을 가리켰다. 그 눈동자가 십 년 전처럼 형형하게 타올랐다. 크게 뜬 눈으로 적비성을 바라보다, 이연화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없으면서도 맑은 웃음이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죽상이셨군요, 적 맹주. 나와 싸워야 하는데 자꾸 나한테 동하는 바람에 당황해 도망쳤다는 거잖아? 역시 만인첩을 다시 뒤져보는 게 어때. 아니면 좀 기다렸다가 방소보랑 싸워 봐." 놀리는 듯한 말에, 적비성은 그만 빠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며칠 동안 쌓였던 답답함과 울분이 새로이 치밀었다. 이연화가 아니라, 이 상황에 화가 났다.
"이럴 순 없다. 이렇게 회복하는 너와 검을 겨룰 수 없다니. 이런 걸 위해 약마를 닦달하고 내력을 쏟아부은 게 아니야."
"어쩌겠나,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진 않는 법이지. 너나 나나 그걸 받아들일 때가 됐잖아."
이연화가 흥얼거리듯 이야기하며 술잔을 새로 채웠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난 반드시 너와 겨룰 거다, 이상이. 네가 정 조절할 수 없다면, 내가 무뎌지면 될 일이지. 약마를 다시 닦달하면 방법이 나올 거야."
"그 노인장 좀 그만 괴롭혀. 지은 죄업에 비해 지나치게 고통받는 것 같아...그래서 너는 내게 혼담을 넣었다던 그 사람이, 정말 내게 동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천기산장에 초대받았던 하객이라고 했지. 그때 싸우는 너를 봤을 테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적비성이 불쾌감을 누르며 대답했다. 이연화가 허어,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보면 확실해지겠지. 알려줘서 고마워, 아비. 천기산장에서는 예의 때문에라도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덕분에 정확한 정보를 얻었네." 이연화가 퍽 성실하게 말했다(태도는 정말 감사하는 듯했는데, 그 내용은 어쩐지 깎아내리는 듯했다). 그리 즐겁지 않은 코웃음으로 대꾸하면서, 적비성은 차라리 백천원에 '문의'를 넣었다던 자가 정말 이연화의 말처럼 전 사고문주의 인맥과 능력을 탐내는 편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연화와 관련된 일은 무엇 하나 수월히 풀리는 법이 없었다. 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백천원 사람들은 물론 이연화를 반기면서도 크게 놀랐다. 이연화가 그들의 앞에서 체취를 풍기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음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산뜻하게 긍정한 탓이었다(방다병은 죄인처럼 쭈뼛거렸지만, 백천원의 원주들은 방다병이 어찌 됐든 벽차지독을 해독했다는 사실을 크게 치하했다). 교완만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연화를 살폈다.
"괜찮아? 아픈 곳은 없어?"
"음, 멀쩡해. 이제는 내력을 써도 피 토할 일 없어."
이연화가 싱긋 웃으며 양팔을 가볍게 벌려 보였다. 교완만의 입가로 엷은 미소가 번졌다. 여자는 그렁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연화의 팔을 쓸었다. "정말 다행이야, 상이." 그 너머에서 나타난 초자금은, 대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색하게 서 있었다. 적비성은 남자를 향해 내심 냉소했다.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적 따위는 없었지만, 전해들은 사실만으로도 상대를 싫어하기엔 충분했다. 적비성은 늘 스스로 강자가 되려 하지 않고, 강자의 발밑을 맴돌며 발꿈치를 물려는 잔챙이들을 경멸했다.
"문주, 백천원에 오신 연유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이든 명대로 하겠습니다."
석수가 정중하게 말했다. 이연화의 방문에 가장 먼저 허둥지둥 달려나왔던 운피구도 의아하게 물었다.
"서신에는 오시는 이유를 밝히지 않으셨지요. 혹시 남들이 알면 안 되는 일입니까?"
"으음, 그런 건 아니야. 오히려 많이 알아야 할 수도 있는 일이지."
"예?"
"나한테 혼담을 넣은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연화는 썩 재미있는 화제처럼 가볍게 이야기했으나, 주변의 누구도 재미있어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적비성과 방다병도 마찬가지였다. 석수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말했다.
"넣은 것이 아니라, 어디로 넣으면 될지 문의를 하더군요. 그리 허튼 생각을 하는 자가 있으니, 혹시 그놈이 문주를 직접 찾아갈 때를 대비하여 미리 알려드린 것뿐입니다. 직접 신경을 쓰실 가치가 없습니다."
"혼담을 본인에게 직접 얘기하는 것은 예가 아닐 듯하여, 일단 사고문 사람들에게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합니다. 문주께 달리 친족이 계시지 않으니 이쪽을 방문해본 거지요. 조정 관리의 아들로 집안도 훌륭하고 인상도 썩 나쁜 인사는 아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상황이 적절해 보이진 않았던 터라...일단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고 잘 타일러 보냈습니다."
둥그런 얼굴의 백강순이 난처한 얼굴로 설명했다. "주제도 모르는 놈. 하필 백천원 근처에 사는 놈이라, 거절하여 보냈는데도 선물을 들고 다시 오겠다더군요. 이곳에 다시 머리를 들이밀면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문주께서는 부디 마음 쓰지 마십시오." 석수가 원한에 찬 말을 씹어 뱉으며 험한 얼굴을 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이연화가 물었다.
"혹시 혼담을 넣으려는 이유가 뭐라고 하던가?"
"그 작자의 말로는-."
"이 선생-이 문주?"
석수의 대답을 끊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동의 시선이 그편을 향했다.
방다병보다 너덧 살쯤 많아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옷을 입은 모양새나 태도가 단정하고 발라 보였다. 키는 컸지만, 호리호리한 체형에 희고 말끔한 얼굴이 영락없는 서생의 풍모였다. 뒤에 선 하인 둘이 선물로 보이는 보따리를 안고 있었다. 이연화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낯선 청년의 낯빛이 확 타올랐다. "으. 이유를 굳이 물을 것도 없겠네." 어두운 얼굴의 방다병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방다병과 나란히 섰던 적비성은 매우 그답지 않게도, 무공이라곤 전혀 모를 남자를 작신작신 두들겨 팬 다음 절벽에 거꾸로 매달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적비성은 내적 갈등에 빠져 있었다. 금원맹주에게는 드물다 못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비성의 세계는 단순했다. 아군과 적, 약한 것과 강한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범주로 분명히 나뉘었다. 하지만 이연화는 다소 복잡한 존재였다. 십 년 전의 이상이는 강력했으며 존중할 만한 적이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시점의 이연화는 강한 것과 약한 것, 아군과 적을 혼란스럽게 넘나들다가 어느샌가 서로 목숨을 주고받은 친우에 가까워졌다. 전보다 약해진 데다 적이 아니라 해도, 적비성에게 이상이는 늘 하나뿐인 호적수였으며 무공의 이해자였다. 그런 남자와 다시금 제대로 검을 주고받고픈 욕망은, 적비성에게 본능에 가까울 만큼 당연한 것이었다.
방씨 가문의 꼬마가 가져온 화봉초를 보았을 때, 적비성은 환희에 전율했다. 비록 방다병과 같은 결은 아니라 해도, 적비성 역시 남윤과의 전투가 끝난 후 점점 유령처럼 침잠하는 이연화를 향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갈수록 창백해지는 남자는, 무슨 말과 힘으로 붙들더라도 결국은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지는 모래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연화가 어떤 이유로든 거부한다면 정말 혈도를 짚어서라도 약을 먹일 작정이었지만, 생각보다 방다병의 개새끼 같은 눈동자가 잘 먹힌 것인지 이연화는 그리 길게 고민하지 않고 약을 먹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적비성은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리라 짐작했다.
"아비, 너 정말 백천원까지 따라올 거야? 함께 싸운 과거가 있으니 금원맹을 대놓고 적대시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네가 방문하기에 편한 곳은 아닐 텐데."
"백천원에 가서 뭘 할 작정인지, 네 속셈을 아직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지. 그걸 확인하러 갈 뿐이다."
객잔에 앉아, 적비성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방다병은 잠시 여행에 필요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이연화가 피식 웃으며 술잔을 채웠다.
"네가 얘기했던 그 패배한 개들을 더 빨리 와해시키려는 거야. 금원맹이 피해를 볼 일은 없어."
"금원맹 때문이 아니야. 네가 변한 형질을 이용해서 뭔가 얼토당토않은 짓을 할 것 같으니 지켜보려는 거다."
"신뢰가 없구만. 왜 얼토당토않은 일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합리적인 일이었다면 이미 나나 방다병에게 얘기했을 테니까."
"합리적인 일이 아니라서 말하지 않은 게 아니야,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말을 아끼는 거지. 전략을 세우려면 여러 여건들을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어."
이연화가 능청스럽게 말하며 적비성의 잔을 채워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적비성이 예고없이 손을 뻗어 상대의 팔목을 쥐었다. 약간의 내력으로 상대의 몸을 익숙하게 확인하다가, 적비성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양주만의 기운이 한결 거침없이 빛나고 있었지만, 내력의 배치와 균형에 묘한 차이가 있었다. 이연화가 이내 익살스러운 소리를 내며 팔을 흔들었다.
"이거 놔, 적 맹주. 혼인도 안 한 사람이 밖에서 음인 팔을 이렇게 덥석 잡으면 오해받아."
"내력의 조화가 변했군."
"그럴 수밖에, 형질이 변했는데.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니었어. 며칠 동안 제대로 못 잤다니까."
이연화가 가볍게 불평했다. 그 팔을 놓은 적비성이 한쪽 눈썹을 들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 티도 안 내더니, 나름대로 고충은 있었나 보군."
"그야 당연하지. 십오 년을 양인으로 살다가 갑자기 음인이 됐잖아. 사실 아직 적응 안 돼, 조절도 쉽지 않고. 시간이 걸리겠지."
가볍게 투덜거린 이연화가 입맛을 다시고는 술을 털어 넣었다. 상대를 가만히 응시하던 적비성이 팔짱을 끼었다. 시종일관 태연한 모습만 보이던 남자가, 자신의 앞에서 조금이나마 솔직해지고 있었다. 강호의 같은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탓인지, 이연화는 가끔씩 방다병보다 적비성에게 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꼬마 앞에서는 일부러 숨긴 건가?"
"내가 남 때문에 고생할 때에도 그렇게 울고불고 했는데, 자기 때문에 고생한다고 여기면 얼마나 괴로워하겠어. 반쯤은 이름뿐인 스승이지만, 제자한테 마음의 짐을 주고 싶진 않단 말이지. 그리고 뭐, 이게 벽차지독보다 낫다는 건 진심이니까."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뻔뻔하던데. 널 생산 수단으로 쓰겠다는 괘씸한 발상을 들었을 때에도 그렇고."
"음, 걔넨 방다병이 아니잖아. 좀 역하긴 해도 놀랍진 않거든. 그리고 어차피 변한 형질인데, 그런 놈들을 색출하는 데에 이용할 수 있으면 효율적이지 않겠어? 바꿀 수 없다면 빨리 받아들이고 최대한 활용해야지. 그래야 오래 살아."
이연화는 조금 씁쓸하게 말했지만, 그 눈은 방다병이 늙은 여우라고 부를 때처럼 빛나고 있었다. 적비성의 턱으로 힘이 들어갔다. 단 한 번도 이연화를 과소평가한 적이 없었으나, 지금은 어쩐지 마음이 착잡했다. 이연화가 연꽃 냄새를 풍겼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내적 갈등이 다시금 그 몸집을 키웠다. 잠시 고민하다, 적비성은 한숨처럼 이야기했다. 천기산장을 떠나기 전, 냄새를 조절하라며 이연화를 닦달했을 때보다는 한결 진정된 투였다.
"이상이. 네 꿍꿍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용하려면 네가 뭘 가졌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쯧, 여행할 때 그 이름으로 자꾸 부르지 말라니까...그런데 무슨 뜻이야? 내가 뭘 몰라, 갑자기 연꽃 냄새를 풍기는 음인이 된 거잖아."
이연화가 양팔을 슬쩍 들었다 놓으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적비성의 눈가가 꿈틀했다. 틀린 서술은 아니었지만, 그 말 안에는 사태를 진실로 이해한 자의 심각함이 없었다. 적비성이 잠시 머리를 굴리다 물었다.
"천기산장에 혼담을 넣었다던 그 치가 왜 그런 짓을 한 것 같나?"
"내가 전 사고문 문주였던 사람이니까? 나와 맺어지면 얻을 게 많다고 생각했겠지."
예상할 만한 답변이었으나 충분하지 않았다. 적비성이 상대를 빤히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연화의 얼굴이 괴상해졌다. 상대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적비성을 훑어보았다.
"뭐야, 왜 가끔씩 방소보를 보던 것처럼 날 봐?"
"잘 들어라, 이연화. 네 냄새가 이상하다고 했던 건 과장이나 빈말이 아니다. 넌 좀 달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후각이 있는 양인이면 대부분 네게 성적으로 끌릴 거다."
"적 맹주. 넌 예전부터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니까."
이연화가 코웃음을 치며 한 손을 휙 내저었다. 하지만 적비성은 조금도 웃지 못한 채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연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 정도야?" 이연화가 눈썹을 이상한 모양으로 찌푸리고는 물었다. 적비성은 바보를 보는 눈으로 이연화를 응시하며 문 쪽을 고갯짓했다.
"방가 도련님이 왜 그렇게 뿔이 났겠나? 널 불순하게 바라볼 놈들이 엄청나게 늘어날 테니 당연히 신경이 곤두서겠지. 저놈은 네가 양인일 때조차 싸고 돌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
"아니, 난 걔가 그냥 책임감을 과하게 느끼는 거라고 여겼지...그 정도인 줄은 몰랐네."
이연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적비성은 한심스럽게 상대를 보았으나, 더 타박하지는 않았다. 음인으로서는 갓난아기나 마찬가지인 이연화가 그 사실을 몰랐다 하여 탓할 수는 없었다. 미간을 좁힌 채 잠시 생각하던 이연화가, 문득 놀란 얼굴로 적비성을 향했다.
"잠깐, 그럼 너도 그래서 자꾸 나타났다가 사라진 거야? 나한테 그런 쪽으로 동해서? 집중이 안 된다는 게 그런 뜻이었어?"
이연화가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적비성은 억울한 심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그 냄새 때문이다. 생리적인 반응을 어쩌란 말이냐?"
"진짜로? 난 네가 음인한테 반응 안 하는 특이체질 양인인 줄 알았는데."
"그랬다!"
적비성이 악문 잇새로 씹어 뱉었다. 적비성은 무정하고 강력한 손속으로도 유명했지만, 강한 양인이면서 음인의 체취에 꿈쩍하지 않는 특이한 체질로도 유명했다. 웬만한 양인들을 체취 없이도 홀리던 각려초조차, 적비성에게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만일 이연화가 각려초처럼 체취를 만발하며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며 팔을 감아 왔다면...어처구니없는 상상을 전개하다, 적비성은 자기도 모르게 객잔의 식탁을 꽉 움켜쥐었다. 모서리 일부가 그 손바닥 아래에서 뭉개졌다. 그 속사정을 알 길 없는 이연화의 눈이 둥그레졌다.
"뭐, 나한테만 그런 거라고? 정말?"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라. 그러니 네가 이상하다는 거야. 위기감을 가지고 노력해라, 이상이. 진심이다."
적비성이 칼처럼 검지를 뻗어 상대의 미간을 가리켰다. 그 눈동자가 십 년 전처럼 형형하게 타올랐다. 크게 뜬 눈으로 적비성을 바라보다, 이연화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없으면서도 맑은 웃음이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죽상이셨군요, 적 맹주. 나와 싸워야 하는데 자꾸 나한테 동하는 바람에 당황해 도망쳤다는 거잖아? 역시 만인첩을 다시 뒤져보는 게 어때. 아니면 좀 기다렸다가 방소보랑 싸워 봐." 놀리는 듯한 말에, 적비성은 그만 빠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며칠 동안 쌓였던 답답함과 울분이 새로이 치밀었다. 이연화가 아니라, 이 상황에 화가 났다.
"이럴 순 없다. 이렇게 회복하는 너와 검을 겨룰 수 없다니. 이런 걸 위해 약마를 닦달하고 내력을 쏟아부은 게 아니야."
"어쩌겠나,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진 않는 법이지. 너나 나나 그걸 받아들일 때가 됐잖아."
이연화가 흥얼거리듯 이야기하며 술잔을 새로 채웠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난 반드시 너와 겨룰 거다, 이상이. 네가 정 조절할 수 없다면, 내가 무뎌지면 될 일이지. 약마를 다시 닦달하면 방법이 나올 거야."
"그 노인장 좀 그만 괴롭혀. 지은 죄업에 비해 지나치게 고통받는 것 같아...그래서 너는 내게 혼담을 넣었다던 그 사람이, 정말 내게 동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천기산장에 초대받았던 하객이라고 했지. 그때 싸우는 너를 봤을 테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적비성이 불쾌감을 누르며 대답했다. 이연화가 허어,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보면 확실해지겠지. 알려줘서 고마워, 아비. 천기산장에서는 예의 때문에라도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덕분에 정확한 정보를 얻었네." 이연화가 퍽 성실하게 말했다(태도는 정말 감사하는 듯했는데, 그 내용은 어쩐지 깎아내리는 듯했다). 그리 즐겁지 않은 코웃음으로 대꾸하면서, 적비성은 차라리 백천원에 '문의'를 넣었다던 자가 정말 이연화의 말처럼 전 사고문주의 인맥과 능력을 탐내는 편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연화와 관련된 일은 무엇 하나 수월히 풀리는 법이 없었다. 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백천원 사람들은 물론 이연화를 반기면서도 크게 놀랐다. 이연화가 그들의 앞에서 체취를 풍기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음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산뜻하게 긍정한 탓이었다(방다병은 죄인처럼 쭈뼛거렸지만, 백천원의 원주들은 방다병이 어찌 됐든 벽차지독을 해독했다는 사실을 크게 치하했다). 교완만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연화를 살폈다.
"괜찮아? 아픈 곳은 없어?"
"음, 멀쩡해. 이제는 내력을 써도 피 토할 일 없어."
이연화가 싱긋 웃으며 양팔을 가볍게 벌려 보였다. 교완만의 입가로 엷은 미소가 번졌다. 여자는 그렁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연화의 팔을 쓸었다. "정말 다행이야, 상이." 그 너머에서 나타난 초자금은, 대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색하게 서 있었다. 적비성은 남자를 향해 내심 냉소했다.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적 따위는 없었지만, 전해들은 사실만으로도 상대를 싫어하기엔 충분했다. 적비성은 늘 스스로 강자가 되려 하지 않고, 강자의 발밑을 맴돌며 발꿈치를 물려는 잔챙이들을 경멸했다.
"문주, 백천원에 오신 연유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이든 명대로 하겠습니다."
석수가 정중하게 말했다. 이연화의 방문에 가장 먼저 허둥지둥 달려나왔던 운피구도 의아하게 물었다.
"서신에는 오시는 이유를 밝히지 않으셨지요. 혹시 남들이 알면 안 되는 일입니까?"
"으음, 그런 건 아니야. 오히려 많이 알아야 할 수도 있는 일이지."
"예?"
"나한테 혼담을 넣은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연화는 썩 재미있는 화제처럼 가볍게 이야기했으나, 주변의 누구도 재미있어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적비성과 방다병도 마찬가지였다. 석수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말했다.
"넣은 것이 아니라, 어디로 넣으면 될지 문의를 하더군요. 그리 허튼 생각을 하는 자가 있으니, 혹시 그놈이 문주를 직접 찾아갈 때를 대비하여 미리 알려드린 것뿐입니다. 직접 신경을 쓰실 가치가 없습니다."
"혼담을 본인에게 직접 얘기하는 것은 예가 아닐 듯하여, 일단 사고문 사람들에게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합니다. 문주께 달리 친족이 계시지 않으니 이쪽을 방문해본 거지요. 조정 관리의 아들로 집안도 훌륭하고 인상도 썩 나쁜 인사는 아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상황이 적절해 보이진 않았던 터라...일단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고 잘 타일러 보냈습니다."
둥그런 얼굴의 백강순이 난처한 얼굴로 설명했다. "주제도 모르는 놈. 하필 백천원 근처에 사는 놈이라, 거절하여 보냈는데도 선물을 들고 다시 오겠다더군요. 이곳에 다시 머리를 들이밀면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문주께서는 부디 마음 쓰지 마십시오." 석수가 원한에 찬 말을 씹어 뱉으며 험한 얼굴을 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이연화가 물었다.
"혹시 혼담을 넣으려는 이유가 뭐라고 하던가?"
"그 작자의 말로는-."
"이 선생-이 문주?"
석수의 대답을 끊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동의 시선이 그편을 향했다.
방다병보다 너덧 살쯤 많아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옷을 입은 모양새나 태도가 단정하고 발라 보였다. 키는 컸지만, 호리호리한 체형에 희고 말끔한 얼굴이 영락없는 서생의 풍모였다. 뒤에 선 하인 둘이 선물로 보이는 보따리를 안고 있었다. 이연화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낯선 청년의 낯빛이 확 타올랐다. "으. 이유를 굳이 물을 것도 없겠네." 어두운 얼굴의 방다병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방다병과 나란히 섰던 적비성은 매우 그답지 않게도, 무공이라곤 전혀 모를 남자를 작신작신 두들겨 팬 다음 절벽에 거꾸로 매달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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