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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6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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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권태감에 찌든 기분으로 턱을 괴던 남자는 창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높고 화려한 도시의 빌딩은 숲처럼 조밀했고, 그 너머로 번잡한 도심을 감싼 하늘은 흐린 잿빛으로 가득찼다. 그때까지도 목석처럼 빳빳한 자세로 버티고 서 있었던 남자가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연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걸 놓칩니까?"



나직이 내뱉는 목소리는 격동하지 않았다. 분노로 떨리지도 않았고 증오로 흔들리지도 않았다. 다만 언제나와 같이 서늘했을 뿐이다. 감정을 쓰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 무미건조하고 냉정한 시선에 병원 응접실을 둘러싼 몇 안 되는 관계자들은 그 전부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다가 떠났다는 사실을 아직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직접 듣기 전까지는 보내줄 수가 없다. 설령 이유를 들어도 인정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던 노부유키는 정적이 내려앉은 풍경을 의욕 없는 눈길로 보다가, 뒤이어 건네받은 연구 보고서를 샅샅이 훑었다. 꾸깃, 꾸깃. 얼마 안 가 그의 손에 들고 있던 종이들이 별안간 우그러진다. 침착하고 세련돼 뵈던 몸짓은 이상하리만치 기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피식 날 선 웃음을 흘린다. 그것은 뜨거운 불길 같기도 하고 차디찬 비수 같기도 했다.



콰앙-!!!

영문을 알 수 없이 돌변한 그가 난폭하게 탁자를 주먹으로 쳤다. 어디선 힉, 하고 짧게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닥으로 내팽개친 기밀 문서들이 응접실 안에 낭자하게 흩어졌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다.



"연구 결과가 고작 이겁니까?"

"........."

"지금 이걸 믿으라고?"



오늘의 노부유키는 위험했다. 날붙이가 없어도, 사람 자체가 날붙이였다. 시선이 향하지 않아도 칼끝이 목덜미를 찌르는 것처럼 오금이 저린다. 넋이 나간 담당 의사는 그런 두려움에 움찔거리며, 저한테 다가오는 남자에게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석달 동안 누워있던 사람입니다. 이 같은 증세의 원인조차 알수 없다니 아무런 성과가 없잖습니까?"

"......저, 저희 의료진도 최선을 다 했으나....어쩔수 없....!!"

"씨발, 누구 앞에서 혓바닥을 함부로 놀리고 있는거야? 그렇다면 당신이 아는 게 무엇이지? 아는 게 없는데 어째서 당신을 살려둬야 할까. 응?"



노부유키는 의사의 멱살을 쥐어 잡은 채 끌어 올렸다. 그리고는 마치 인형을 던지듯이 가볍게 상대를 내던졌다. 덕분에 온몸에 충격을 받은 의사가 크윽, 앓는 소리를 하더니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바닥에 내려앉은 그림자처럼 어두운색 옷을 입은 노부유키는 마치 저승에서 굴러온 야차처럼 보였다.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지 제대로 생각해야 해. 조금만 있으면 그 머리통을 분리해 생각이란 걸 못 하게 할 참이거든."



노부유키의 냉담한 목소리를 들은 의사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자, 잠시만-!! 한가지....! 한, 한가지 근거가....!"

"대답해."

".....그, 그게....검증 되지 않는 가설이 있긴 합니다만........말도... 안되는....추측성 정보라....."



노부유키는 대뜸 구겨진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옆에 있던 비서가 대, 대표님, 하고 외쳤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저승차사처럼 남자게 다가간 노부유키가 주먹을 높게 쳐들었다. 상대는 꼼짝없이 죽는다 여기고 눈을 질끈 감았다.



"히익-!! 아이!! 아, 아이가-!!!"

".......뭐라고?"

"태내에 아, 아이가 있는 경우라면 모, 모든 의혹을 소상하게 규명 할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귓가를 울리던 웅성거림이 갑자기 잦아들었다. 일순 조용해진 공기 속에서 노부유키는 그늘진 눈으로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홍채에 새겨진 무늬까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그가 어서 말해보라는듯 채근했다.



".....마, 마치다님이 평범한 인간의 아이가 아니라 용의 알을 품고 있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깁니다."



의사는 긴장으로 말라가는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며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즈키 가문의 옛 문헌을 살펴보면 용의 알을 잉태하여 산란했던 사례가 있다고 합니다. 초대 황제가 그러했고, 황가를 잇는 자들중 소수정예가 그러했습니다. 제 예상이 맞다면 마치다님이 석달 동안 깨어나지 못한 이유도 여기 있을 겁니다."

"확실한가?"

"용은 본능적으로 명맥에 대한 욕구가 크기 때문에, 주변 환경이 안정되지 못하거나 입지가 열악한 경우 모체를 조종하여 동면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시간동안 태내에서 자리를 굳히고 곧 태어날 준비를 하기 위해섭니다. 그러니까 마치다님이 깨어난 시점인 지금...."

"지금은?"

"..........사라진 마치다님을 한시라도 빨리 찾으셔야 합니다. 이, 이대로 두면 알이 곧 부화하기 때문에 위험,-!!"



노부유키는 쳐들었던 주먹을 돌려 아래를 향하게 고쳐 잡고 그대로 내리쳤다. 퍼억-. 주먹은 의사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뒤쪽 벽에 바스라져 꽂혔다.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벽의 잔해가 부스스 떨며 비명 같이 울었다.



"빌어먹을......."



노부유키가 눈을 부릅떴다.



"......그렇군. 나만 그 사람의 명줄을 빼먹는 게 아니잖아?"



혼잣말을 던지는 그의 음성은 서늘한 분노가 실려 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수태였고, 몇백년 만에 배출되는 용의 후사였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강해진다. 지금 스즈키 노부유키가 딱 그랬다. 그의 눈 아래에는 검푸른 색의 짙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마치다를 곁에 묶어둘 요량으로 선택했던 수단이 지금에 와서 충분한 반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자신은 결정은 틀렸다.

노부유키는 저와 저의 씨앗이 거머리처럼 느껴졌다.


 









* * * * *



"허이구, 쯧. 또 비가 쏟아져 버리는구만."



와이퍼의 속도를 한 단계 높인 택시 기사가 혀를 끌끌 찼다. 산속의 비탈길을 따라 오래된 택시가 마구 뒤흔들렸다. 마치다는 창백해진 얼굴로 차창 밖을 스치는 유령 같은 숲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우르르, 콰광!

눈이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택시 기사는 인적이 드문 지름길로 핸들을 꺾었다. 외곽으로 빠질수록 도로에는 차가 줄어들었다. 궂은 날씨를 무릅쓰고 외출을 감행하는 사람은 없어서 이내 도로는 텅텅 비었다. 빗줄기가 굵어져 바닥은 미끄러웠고, 젖은 도로는 라이트 빛을 받아 빗물이 번들거렸다. 까딱하면 사고가 날 것 같은 위험한 도로 상태에 평소보다 주의를 기울이며 전방을 주시하는 운전기사의 눈초리가 날카로웠다.



"...음?"



그 때, 택시 옆 쪽으로 시커먼 것이 훅 뛰어들었다. 젠장, 하고 기사가 욕설을 내뱉으며 급정거했다. 차가 좁은 비탈길에서 위태롭게 멈춰섰다. 그러자 정비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도로로 탓에 차체가 위아래로 한 번 크게 들썩인다. 동시에 진입을 방해하는 검은 세단의 차머리도 완전히 사선으로 돌려졌다.



"이봐-!! 하마터면 부딪칠뻔 했잖아!! 왜 운전을 그따위로-!!!"



택시 기사가 흥분하여 차 밖으로 뛰쳐나와 맞은편 차주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상대방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략적인 모습이 수상했다. 남자는 싸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검은 홑겹 옷만 입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비에 젖어 피부에 들러 붙었다.



"성가시게 방해말고 비켜."

"뭐, 뭐요?"

"내 것을 되찾으러 온것 뿐이니까."



남자는 자신의 앞에 있는 택시 기사를 뒤로하고 천천히 마치다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보통의 체격보다 더 커서인지 남자에게서 위압감이 상당히 느껴졌다. 거기다 짙은 턱선 때문인지 아니면 날카로운 눈매 때문인지 아무튼 그의 얼굴도 만만치 않은 인상이라, 마치다는 저도 모르게 남자가 다가오는 만큼 물러서고 싶은 기분이었다.



"당장 내려."



뒷자석 바깥에서 상체를 쭉 빼며 유리창을 내려다보는 자세가 몹시 위협적이다. 노부유키의 눈동자가 다시금 천천히 움직인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부의 농도처럼 짙게 일렁거렸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빛이 동공을 꿰뚫고, 박살 내고, 마음대로 들어와 명치가 뻐근할 정도로까지 헤젖는다.



".......좋은 말 할때 내려요."

"싫어....."

"케이."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시선이 마치다의 정수리 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어느덧 남자의 시선이 붙박인 채로, 마치다의 어깨가 살짝 움츠렸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 공기 중에 드러난 살갗과 옷 아래에 가려진 부분까지. 온몸의 털이란 털이 삐쭉 일어서는 기분이었다.



"지금 당신 몸 상태가 어떤지 알아? 당장 내려요. 지금 바로 병원에 가야 하니까."

"닥쳐-!!! 싫다고 했잖아!! 싫어!!!"



노부유키의 입가에 음영이 드리웠다. 그의 드높은 자존심, 타협을 모르는 완고함, 남에게 고개 숙일 줄 모르는 오만함과 고귀함. 그런 것들이 그의 꽉 다물린 입술에 묻어 있었다.

하지만 살짝 찌푸린 듯한 그의 무표정 속에서 기민한 갈등의 징후가 고여있다. 끝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힘주어 주먹을 짓누르고 있는 손가락이라든가, 마른침을 삼키기 위해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는 목울대 같은 것이.



"......그래, 빌어먹을. 내가 졌어."

"........"

"어떤 요구든 들어 줄 테니까 화내지 말아요."

"........."

"어떻게 하면 내게 돌아와 줄래요? 이제 홀몸도 아니고, 영영 내 곁을 떠날수 없다는 것쯤은 당신도 잘 알잖아."



그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설득은 안타깝게도 상대에겐 전혀 먹히질 않았다. 이런 어설픈 회유조차 오히려 독이 된것 일까. 마치다의 등골에 송곳같은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갑자기 시간의 유속이 거꾸로 과거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 이제부터 케이는 짐승의 짝이 되는 겁니다.

- 오늘 밤, 형님께서 천룡을 수태하시면 제가 참으로 좋겠습니다.



우르르콰쾅-!!!

새파란 불빛이 번쩍하고, 천둥이 사납게 울었다. 또 다시 과거로 회귀하여 걷잡을수 없는 죄악의 늪에 빠지는 기분이다. 앙칼진 그것은 누군가 자비 없이 내리친 채찍 자국 같기도 했고, 간악한 뱀의 혓바닥이 휘감겨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미친 말에 매인 올가미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길고 시퍼런 빛이 흉살과 함께 저를 향해 쇄도하는 상상을 했다. 그 원죄가 자신을 숨 쉴 구석 하나 없이 꽁꽁 얽어매 시커먼 심연의 배 속으로 처박는 상상을 했다.

마치다는 눈을 뜰 수가 없이 어지러웠다. 귀가 먹먹했다. 세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낯설고 불쾌한 감각들이 자신을 감싸며 뒤흔들고 스쳐 지나갔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이 감각을 견뎠다. 이제 이 감각이 뭔지 안다. 수 천년전 황제로 부터 시작된 언령의 파동이 기어코 여기까지 흘러 들어나와 저를 괴롭히고 있었다.

도망 쳐야해. 지금 당장 과거로 부터 시작된 저주에게서 달아나야해.

마치다는 뒷자석에서 운전석으로 순식간에 몸을 날려 핸들을 잡아 냈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빛이 강렬하게 쏘아져 택시의 내부가 빛으로 환히 밝혀졌다. 마치다는 두 눈을 멀게 하는 빛을 피하지 않았다.



"비켜."



두사람의 시선이 비로소 마주쳤다. 노부유키는 상대의 눈이 평소와 다른 빛으로 번뜩이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착시일 수도 있다. 지금처럼 강렬한 불빛을 머리 위에 이고 있는 그는, 실로 오랜만에 보았다. 빛 아래 드러난 검은 눈동자 속에는, 은밀한 밤의 장막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 박혀 있었다. 머리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날카롭게 부서져 나간 한 조각. 그것은 증오였고, 분노였고, 그 두 가지로 단단히 벼려진 무정함이었다.



"비켜-!!!! 비키라고-!!!!"



빠아아앙-!

마치다는 클랙슨을 울렸다. 빗소리 때문에 도로를 울리는 클랙슨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노부유키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마치다는 미친 듯이 클랙슨을 울렸다. 그러나 쏟아지는 장대비가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젠장-!!"



결국 마치다는 목을 죄는 급박함 속에서 살 방법을 찾아 엑셀을 밟았다. 시동이 걸린 택시가 빗물을 튀기며, 노부유키를 피해 역으로 방향을 꺾는다. 방향을 돌린 택시가 건너편 도로로 침범했다.

그러나 저 멀리서 대형 트럭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두사람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트럭은 그대로 마치다가 운전하는 택시를 향해 달려왔으며, 전방의 택시를 발견하지 못한 듯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졸음 운전을 하던 트럭 운전사는 갑자기 끼어든 택시 때문에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케이....?"



그리고 그 순간, 얼음을 짓씹어 삼킨 것처럼 배 속 깊은 곳에서 냉기가 차올랐다. 노부유키는 싸한 명치 부근을 한쪽 팔로 감싸 안았다. 낯선, 하지만 어딘지 낯익은 감각이 그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번갈아 할퀴고 지나가며 찌르르 관통했다. 그것은 과거의 반복을 거듭하며 이어지고 있는 끈질긴 숙명, 시시각각 아가리를 쩍 벌리며 닥쳐오는 불길한 징조였다.



"안 돼-!!!!! 멈춰-!!! 케이-!!!!!"

"큿-!!!!"



노부유키의 다급한 음성이 메아리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다는 멈추지 않고 반대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도망칠 계획이었지 사고를 내려 한 건 아니었기에, 택시는 간발의 차로 트럭을 피하고 인도 쪽으로 미끄러졌다. 계획은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쏟아지는 폭우와 젖은 도로까지는 통제하지 못했다.

끼이이이익-!!!

운전기사가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대형 트럭은 젖은 노면을 그대로 미끄러졌고, 마치다가 모는 택시 역시 멈추지 못하고 반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속도를 늦추려 마치다는 브레이크를 끊어 밟았다. 하지만 통제를 벗어난 차량은 빗물에 미끄러져 대형 트럭 쪽으로 돌진했다. 두 차량이 마찰을 잃고 도로를 나아갔다.



"케이-!!!!!!!!! 안 돼-!!!!!"



마주 보는 두 헤드 라이트 불빛이 강렬하게 번지고 폭우가 하얗게 부서졌다. 부딪힌다. 눈부신 빛 한가운데로 가라앉는 찰나가 느리게 흘러갔다. 핸들이 더는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 기어에 금이 가기 시작할때였다.



쿠-웅-!!!!!!



거대한 충격이 마치다의 몸을 흔들었다. 종잇장처럼 무참히 구겨진 보닛이 움푹 파이면서 앞뒤로 몸이 휩쓸려 튕겼다. 강렬한 빛을 받은 옆 얼굴은 선이 번져 흐릿했고, 머리카락이 가닥으로 뭉쳐 천천히 휘날렸다. 마치다는 몇 번이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 봤자 보이는 풍경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호흡이 약하게 이어지는 동안, 의식이 점점 멀어지고 감각이 둔해지는 와중에도 피부에 닿는 열기는 상당했다.



".......흐, 으....."



반쯤 부서진 헤드라이트 불빛이 손끝을 비췄다. 본능적으로 배를 잡으려는 모양새였지만 허공에 뜬 하얀 손은 이미 무력하게 추락하고 만다. 늘어진 손가락은 이제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 쓰러진 그의 몸은 안전벨트에 매달려 축 늘어졌고, 운전석 밖까지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빗물에 섞여 들었다.



삐이-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



폭우가 들이치는 사고 현장에선 자동차 경고음만이 사납게 울렸다. 그러나 누가 귀의 고막에 밀랍을 껴 넣은 것처럼 모든 소리가 아득하고 멀고 흐리게 들렸다. 마치다의 눈이 서서히 감겨왔다. 천천히, 천천히,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의식이 구덩이로 뚝 떨어졌다.





















* * * * *



[왜 나야? 왜 하필 나지?]



마치다의 질문에, 심연속 저편에서 누군가가 대답 한다.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운명입니다.]

[운명?]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운명. 억겁처럼 쌓인 원죄가 후생까지 침적되어 종적으로 남는 운명. 마음속 웅덩이에 물이 고이듯, 한때 신수(神獸)였던 남자의 갖가지 사념이 당신의 혼백으로 엉켜드는 것입니다.]

[그것 참 지독하네.....]

[죽지 않는 이상, 혹은 죽은 이후에도 당신은 도망칠 수 없어요, 부인...]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뻘건 붉은 어둠이 아가리를 벌렸다. 새빨간 눈을 번쩍 뜨고 악취 풍기는 아가리를 잡아 벌려, 떨어져 내리는 그를 짓씹었다. 날카로운 이로 아드득, 아드득, 집어 삼켰다.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