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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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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과 투자자가 참관하는 비디오 회의에서 주요 배우 다섯 명이 첫 리딩을 하는 날이었음. 촬영 스케줄의 전반을 관리하는 스탭에게 연락을 받고 비디오 회의에 참여했는데 가입부터 마이크 설정까지 뭐하나 간단한 게 없었을듯. 다른 배우들은 매니저가 미리 셋팅해 줬겠지. 도와주는 사람 없이 이런저런 스케줄을 소화하는 게 쉽지 않았음.



감독과 배우들이 돌아가며 인사를 하고 마지막에 투자자인 노부가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표함. 노부는 그저 영화 제작에 돈만 대는 투자자가 아니라 그 바닥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사람이었지. 야구로 치면 특히 선구안이 뛰어난 사람이었음. 그가 투자하는 영화는 전부 흥행하고 그가 어떤 신인 배우에 대해 언급하면 그 배우는 꼭 1년 안에 대형 프렌차이즈 스타가 됐을 정도로. 혹자들은 노부의 회사가 투자한 영화는 줄거리도 안 보고 티켓을 끊기도 함. 마치다는 노부가 그정도의 사람인 걸 모르고 있었겠지. 리딩 하는 동안 중간중간 오가는 잡담에서 모든 배우들이 노부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걸 보고 내심 놀라기는 했음.



"오늘 리딩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주 화요일에 있을 크랭크인 때 간단한 인터뷰 촬영이 있으니 참고하시고요. 자세한 내용은 매니저 통해 공지하겠습니다."



감독의 말에 모두가 박수를 쳤고 투자자인 노부가 가장 먼저 로그아웃함. 마치다는 왠지 먼저 나가는 게 실례일 것 같아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었겠지. 여섯 개의 노시그널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드디어 리딩이 끝났다는 사실에 풀썩 엎드리는 마치다였을듯. 이마가 키보드를 아무렇게나 눌러 반복적인 신호음이 들려왔지만 그런 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음.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수치심이 뒤늦게 몰려와 마치다를 압박하기 시작했지. 노부가 소개해준 전문가에게 연기 레슨을 수차례 받았지만 내로라하는 배우들 앞에선 목소리를 곧게 내는 것조차 어려웠음.



불안한 마음에 마치다는 결국 노부에게 먼저 연락을 하기로 함. 너무 떨지는 않았는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연기가 너무 어색하거나 튀지는 않았는지. 많은 걱정을 문자에 실어 보냈지만 돌아온 답장은 간결했을듯. '처음이었잖아. 나아질 거야.' 결국 잘하지는 않았다는 거지. 마치다는 낭떠러지에 선 기분이었음. 리딩하던 순간을 떠올려 보면 감독과 배우들 표정이 나쁘진 않았거든. 그것만으로 위안을 삼아도 될지 아니면 마치다씨는 연기 경험이 적은데도 굉장하네요 라는 칭찬을 듣지 못했다는 것에 낙심해야할지 머리가 복잡해짐.



크랭크인까지 일주일이 남은 상황. 마음이 조금해진 마치다는 감독의 영화를 몇 개 찾아보기 시작했음. 영화를 관객의 마음으로 감상하지 못하고 분석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긴 했지만 덕분에 감독이 좋아하는 연기톤이나 분위기를 어느정도 캐치할 수 있게 됨. 근데 또 몰랐으면 쭉 모를텐데 감독에 대해 살짝 알게됐다고 생각하니 궁금한 게 더 늘어나는 거지. 저번에 호텔에서 노부가 감독에 대해 주절주절 말했던 게 떠올랐음. 물론 내용은 하나도 기억 안 나지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감독에 대해 잘 아는 분위기였지.



[잠깐 통화할 수 있어요? 감독님 작품 몇 편 봤는데 제가 감독님 취향을 잘 이해한 게 맞나 궁금해서요...]



하지만 노부에게선 답장도 오지 않고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겠지. 마치다는 순간 이 사람이 너무 책임감 없게 느껴졌음. 스폰서를 해주네 마네 하면서 폼 잡을 땐 언제고 정작 필요할 땐 도움 될만한 코멘트 한 번 없으니. 근데 또 그날 호텔방에서 망섹 됐던 게 떠올라 한숨이 나왔을 거임. 내가 이 사람을 만족 시키지 못해서 스폰서 역할을 제대로 안 해주는 건가? 아니 애초에 스폰서 역할이란 게 뭐지? 이렇게 디테일한 것까진 관여 안 하는 게 보통이려나?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 사람을 너무 귀찮게 만들고 있는 거잖아. 큰 작품에서 배역 하나 맡게 해줬으면 이제 조용히 내 할 일 하면서 그 사람이 부를 때만 호텔로 가면 되는 걸. 혼자 생각이 너무 깊었다는 사실에 뒤늦게 허탈해진 마치다임.



드디어 디데이... 처음 찍었던 영화보다 훨씬 스케일이 커서 그런지 세트장 규모도 어마어마하고 보안까지 철저했음. 작은 마을처럼 꾸며진 세트장에서 마치다는 길 잃은 강아지 마냥 우왕좌왕 했겠지. 그나마 또래의 스탭이 챙겨줘 촬영장의 애물단지 취급은 면했지만 마치다 안에선 큰 어려움이 생겨나기 시작했지. 바로 연기력 차이였음. 상대 배우와 합을 맞추고 이 작품에 스며든다는 게 너무 낯선 거야. 자기를 제외한 모든 배우들은 어느새 배우가 아닌 작품 속의 역할 자체가 되었는데 자기만 여전히 신인 배우 마치다 케이타인 거. 내 대사를 치고 지문대로 행동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었음. 대사를 잊으면 어쩌나 하는 그런 건 고민 축에도 못 낌. 그냥 내가 이 작품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거든. 그렇다고 NG를 내는 중도 아니었지만 그게 정말 잘 하고 있어서 오케이 사인을 받은 건지 아니면 너 같은 낙하산한테 기대하는 바는 어차피 크지 않으니 넘어가자는 건지 확신이 안 섰음.



5분마다 자존감이 훅훅 떨어지며 마치다는 눈에 띄게 불안해졌겠지. 그때 세트장 입구에서 활기찬 인기척이 느껴졌을듯. 얼핏 보니 노부와 회사 직원들이 촬영장을 살피러 온 모양이었음. 미처 인사를 나누지 못했던 스탭들이 노부와 인사를 나누고 다른 배우들도 노부에게 다가가 저마다 한 마디씩 얹었을듯. 마치다는 그냥 조용히 촬영장 구석에서 대본에만 시선을 뒀고. 어차피 며칠 내내 문자도 씹고 전화도 안 받던데 뭘. 그냥 역할 하나 받았으니 닥치고 내 할 일이나 잘 해야지. 괜히 아는척 하며 곤란하게 만드는 짓따위 하면 안 되잖아.



투자자 입장에서 촬영장을 찾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보통 아래 직원들이 와서 살피고 가지 대표가 직접 방문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음. 감독도 그의 등장이 반가워 촬영을 중단하기까지 함. 이런 환대야 익숙하지. 그런데 마치다가 자기한테 오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조금 거슬린달까. 지쳐있는 모습이 신경쓰인달까. 자기도 모르게 자꾸 눈이 갔을듯. 몇 통의 문자 메시지에 답을 하지 않았던 게 뒤늦게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지. 밀당할 의도로 그런 건 아니었고 정말 일이 바빴음. 영화가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면 투자자도 일이 많아지거든. 물론 노부 회사가 영화 제작에만 투자하는 곳도 아니고 본업은 따로 있거든. 돈이 워낙 많아 자기가 사랑하는 영화 산업에 투자하는 것일뿐.



"아무 문제 없죠? 크랭크인인데 문제가 있으면 안 되죠."



콕 찍어 마치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냐고 물을 순 없으니 모두에게 괜찮은 거죠? 하고 묻는 그였음. 다행히 분위기는 좋아보였겠지. 물론 표면적인 거고 속사정이야 다들 다르겠지만. 30분 정도의 시끌벅쩍한 시간을 보내고 노부는 직원들과 함께 세트장을 빠져나감. 세트장 규모에 감탄하는 척 뒤를 돌아보며 은근히 마치다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마치다는 땅만 보고 있었음.



리딩 때 안내받은 대로 배우들에게 짧은 인터뷰 요청이 있었음. 마치다에게 온 질문은 두 가지였는데 이렇게 대스타들과 함께 작품을 하게 된 소감이 어떤지, 감독에게 픽 당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였음. 첫 질문엔 느낀 그대로의 감정을 잘 말했지만 두번째 질문에선 조금 당황하고 말았겠지. 스폰서가 꽂아준 거라고 말 할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하기엔 뻔뻔함이 부족한 사람이었지. 결국 횡설수설하며 인터뷰를 마치고 드디어 퇴근 길에 오를 수 있게됨. 매니저가 없으니 스스로 짐을 바리바리 챙기고 세트장을 나왔지. 근데 큰 길가로 나가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누군가 마치다의 손목을 잡아 낚아챔.



"타. 밥 먹고 가."



직원들을 먼저 보내고 계속 세트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부였음. 마치다를 조수석에 태우고 말없이 차를 모는데 마치다쪽에서도 아무 말이 없으니 결국 견디다 못해 먼저 물꼬를 텄을듯.



"첫촬영 어땠어. 할만했지?"
"배 안 고파요. 그냥 전철역 앞에 세워주세요."
"안 고파도 먹어."
"......"



괜한 투정 같진 않았음. 진짜 지치고 힘들어 보였거든. 종일 굶었어도 허기짐이 안 느껴지는 날도 있잖아. 피로가 허기짐을 넘어선 날. 노부도 그런 기분을 알기 때문에 강요하고 싶진 않았지만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어쩔 수 없었음. 데려다 앉혀놓으면 구운 양파 쪼가리라도 먹겠지 뭐. 레스토랑 가장 구석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앞에 꽤 많은 음식이 차려졌음. 역시 마치다는 포크도 들지 않았을듯. 노부는 자꾸 권유하지 않고 조용히 자기 몫의 음식을 먹었음. 촬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어도 풀죽은 목소리로 아무 일 없다고 답할 뿐이겠지. 마치다는 지금 집에 가서 대본 연습도 해야하고 감독님 다른 영화들도 봐야하는데 이렇게 앉아서 여유롭게 밥이나 먹는 게 너무 짜증났음. 종일 긴장한 상태였고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까지 쌓여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인데 지금 눈 앞에 비싼 음식 펼쳐놓고 돈자랑이나 하는 이 사람이 지긋지긋한 거야. 한 아홉 시간 전에 샐러드 몇 입 먹었던 게 전부인데도 속이 울렁거렸음.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지.



"저 먼저 갈게요. 못 앉아 있겠어요."



노부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조용히 입을 열었음. 이미 마치다는 가방을 챙겨 자기 뒤쪽으로 지나쳐가던 참이었지.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잊지 마, 케이타."



마치다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고 잠시 노부 뒤편에 서있었음.



"저한테 배역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무나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잖아요. 배우로 성공하려 노력하는 누군가는 저 때문에 이 기회를 잡아보지도 못했겠죠. 그래서 전 책임감을 갖고 끝까지 이 역할 잘 해낼거예요. 그런데... 이거 어거지로 그쪽이 저한테 떠먹인 거지 제가 먼저 원했던 일이 아니거든요. 그러니 스폰을 관두던지 말던지 그건 그쪽 마음대로 해요. 감독한테 날 빼라고 입김 넣으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꼭 남의 옷 뺏어 입은 것 같고 기분 별로였거든요."
"앉아서 얘기해. 나 목 돌아간다."
"우리 관계를 잊지 말라는 협박은요. 제가 이 관계를 더 원하고 있을 때 통하는 협박이에요. 사실 제가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면 스폰이고 뭐고 진작에 당신 곤란해졌을 거잖아요. 어쨌든 배우 앞 길 닦아주신다고 큰 영화에 꽂아주셨고...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망각하고 덥석 응해버린 제가 멍청한 거지만... 그쪽한테, 그리고 다른 스탭들이랑 배우들한테 피해 안 주려고 열심히 하는 거라고요. 그때 호텔에서 있었던 일도 그렇고요. 절대 낯선 남자랑 하룻밤 보내는 게 저한테 익숙한 일이라거나... 배우로 성공하기 위해 이 악문 게 아니라 멍청한 제가 자초한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벌린 거예요... 그게 다예요. 그쪽이 지금 당장이라도 절 영화에서 빼고 스폰 관계를 취소하신다고 해도 저는 정말 괜찮다고요. 그러니까 협박하지 마세요."



레스토랑을 나오니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겠지. 이미 촬영장에서 노부의 차를 타고 꽤 먼 거리를 왔기 때문에 오히려 집에 가까워진 상태였음. 우산을 사거나 택시를 잡을 필요는 없는 거리. 그래서 그냥 비를 쫄딱 맞으며 집까지 뛰어갔지.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렸고 마치다는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결국 가방으로 머리를 덮는 일도 포기했음. 주머니 안에선 핸드폰 진동음이 계속 울렸지만 이 빗줄기에 폰을 꺼내고 싶지도 않았고 절반 이상의 확률로 노부의 전화일 게 뻔하기에 그냥 무시했을듯.



결국 감기에 걸린 채로 다음날 촬영장에 나타난 마치다를 감독이 꾸짖었겠지. 몸관리도 결국 자기 관리라고. 이래서 매니저 없는 배우 쓰는 걸 싫어하는 거라고. 이 말은 결국 노부 때문에 내가 널 쓴 거지 너처럼 근본 없는 애는 내 영화에 쓰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음. 할 말이 없었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다가 그냥 감기에 걸린 채로 촬영에 들어감. 오늘만큼은 또래의 스탭도 마치다를 옆에서 챙기기가 눈치 보였을 거임. 동료 배우들도 눈치만 보고 있고. 그야말로 미운오리새끼 꼴난 거지. 붉어진 눈가와 코끝은 메이크업으로 대충 가릴 수 있다쳐도 코맹맹이 소리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을듯. 평소라면 문제 없을 발음도 자꾸만 막히고 대사 전체가 꼬이는 일이 반복 됨. 잠시 촬영을 쉬기로 하고 감독은 마치다에게 제발 감기약이라도 사먹고 오던지 어떻게 해보라며 소리쳤음. 그때 상대 배우가 자기 매니저를 시켜 감기약을 사오게 했지. 마치다는 그 약을 받아먹고 대기실에서 한 시간 정도 쪽잠을 잤음. 신인 주제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 당돌하다고 해야할지 한심하다고 해야할지. 모두가 마치다 얘기 뿐이었을 거임. 그런데 오늘도 촬영장을 살피러 왔던 노부네 직원이 자초지종을 듣고 바로 노부에게 연락할듯.



"촬영이 잠시 중단된 것 같아요. 그 신인 배우가 감기에 걸려서 지금 대기실에서 자고 있대요. 약도 안 먹고 그냥 촬영장에 온 모양이에요. 분위기 안 좋아요. 벌써부터 이러면 정해진 날까지 촬영 끝내는 게 가능할까요?"



전화를 끊은 노부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렇게까지 누굴 신경 써본 게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을 거임. 화가 나기도 하고 걱정 되기도 하고. 근데 매니저도 회사도 없는 사람을 그런 현장에 던져 놓은 게 자기니까 마냥 마치다 탓만 할 수도 없음. 게다가 감기 걸린 건 자기 때문이기도 하니까. 결국 직원에게 오늘 촬영이 몇 시쯤 끝나는지 알아내라고 한 뒤에 시간 맞춰 촬영장으로 감. 약국에서 감기약을 사고 차에 타면서 무슨 팔자에도 없던 아들 하나 키우는 기분에 고개가 절로 저어졌겠지.



"꼴이 그게 뭐야. 배우 얼굴이 왜 그래."
"밥 안 먹어요... 가세요..."
"밥 안 사줘. 집에만 데려다 줄테니까 타."
"그냥 택시 탈 거예요."
"태워다 준다는 사람 두고 왜 택시를 탄대."



결국 오늘도 노부 손에 이끌려 조수석에 타는 마치다겠지. 네비에 찍은 주소까지는 한참 남았고 하필 퇴근 시간에 걸려 도로가 꽉 막힌 상태임. 마치다는 차창에 기대 바깥을 보다가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느낌. 택시도 아니고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자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꾹 참아보려 애쓰는데 그럴수록 고개는 더 힘없이 꺾일 거임. 괜히 편하게 자라고 말 걸면 더 정신 차리려 난리 칠까봐 가만히 내버려두는 노부였음. 그렇게 꾸벅꾸벅 조는 마치다를 태운 차는 목적지에 가까워졌고 기가막히게 집 근처에 오니 눈이 떠졌을듯.



"죄송해요 완전히 잠들어 버렸어요."
"괜찮아."
"태워주셔서 감사해요."
"이거. 들어가서 약 먹고 푹 자. 내일은 나아서 촬영 가야지."



마치다는 조금 망설이나 싶더니 노부에게 올라가서 커피 한 잔 하고 가시겠느냐 묻겠지. 자길 위해서 한 시간이나 운전해 데려다 줬는데 그냥 보낼 수 없잖아. 집이 워낙 초라하고 먹을 것도 없긴 하지만 커피 한 잔 정도는 대접할 수 있으니까, 예의상이지 뭐.



"이제와서 스폰서 대접해 주려고?"



저쪽에서 먼저 호의를 보이는 게 처음이니까 노부는 됐다고 거절하기 아쉬워 괜히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했지. 그렇다고 냉큼 그러자고 하기도 민망하고. 근데 입장 차이때문인지 마치다는 그 말이 분위기 전환용 농담처럼 들리지 않아 생각에 빠졌음. 그리고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지.



"스폰서 대접을 할 거라면 몸을 대지 커피를 왜 주겠어요 제가... 그냥 이건 인간적으로 감사해서... 아픈 저를 위해서 여기까지 운전해주셨으니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아 싫으면 됐어요."



조수석 문을 확 열고 나가는 마치다를 다급하게 붙잡으며 노부는 자기 안전벨트도 풀 거임.



"갈게. 마실게."



그렇게 엘레베이터도 없는 5층짜리 건물 꼭대기까지 헉헉대며 올라간 노부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풀썩 앉았음. 마치다도 오늘은 컨디션이 컨디션인지라 허리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겠지. 오늘따라 계단이 왜 이렇게 높은지.



"조금만 쉬고... 커피 타드릴게요... 집이 좀 더럽죠... 자세히 보지 말고 그냥 눈 감고 계세요..."



마치다가 커피 캡슐을 찾는다고 주방 찬장을 들쑤시기 시작함. 커피를 좋아하지 않아서 예전에 선물 받은 게 어디에 있는지 사실 기억 나지 않았거든. 그러는 동안 노부는 허락도 없이 소파 테이블에 놓인 종이 뭉치들을 들여다보았음. 허락이 필요하다기엔 너무 보란듯이 펼쳐져 있긴 했지만, 그것들을 손에 쥐고 펄럭이니 마치다도 힐끔대며 그거 그냥 두시라고 한 마디 했을 거임. 그 종이들은 딴 게 아니라 대본 분석하면서 필기한 내용이었음.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보고 분석한 것도 있고 노부가 투자한 영화들의 공통점을 나름 정리해본 내용도 있었겠지. 그걸 보면서 노부는 마치다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을듯. 얼굴 반반한데 길 터주는 사람이 없어 성공 못한 신인에서, 내가 더 가치를 두고 케어해줘야 할 배우란 걸 느끼게 된 거지. 내가 쉽게 배역을 물어다 줬지만 그것 이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구나. 이런 사람이 성공하면 좋은 배우가 될텐데.



"그거 보지 마세요."
"이미 다 봤어.저기, 촬영장 오가기 불편하지 않아?"
"좀 멀긴 한데 적응하고 있어요."
"차 필요 없어? 아니면 촬영장 근처에 집을 얻어줄까?"
"......"



커피잔을 건네던 마치다는 눈썹을 찌푸렸음.



"왜."
"그냥 인간적으로 감사해서 드리는 커피라고 했어요. 그렇게 스폰서 같은 말만 골라서 하지 마세요."
"당신이 인간적으로 감사한다고 해서 내가 스폰서가 아닌게 되는 건 아냐. 이거 보니까 내 생각보다 훨씬 노력하는 것 같길래 기특해서 뭐 하나라도 해주고 싶어 그렇지. 뭐가 좋아? 둘 다라는 말은 하지 말고. 나도 아직 그쪽한테 차랑 집 다 해줄만큼 신뢰가 높진 않으니까."



마치다는 진심인 게 분명한 노부의 얼굴을 보고 오히려 당황했을 거임. 이 사람은 돈이 얼마나 많은 걸까.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어차피 면허증도 없고..."
"면허도 안 따고 뭐했어 도대체."
"어차피 차 살 일 없을 것 같아서 안 땄어요."



그 뒤로 별 말 없이 커피만 마시던 노부가 이제 가봐야겠다며 어색한 인사를 건넨 뒤 집을 나섰고 마치다는 그가 마신 커피잔을 닦으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힐 거임. 엄청난 사람에게 선택 받았구나 싶은 기분. 그리고 이 사람을 지나쳐간 신인 배우가 도대체 몇이나 될까 하는 궁금증. 어차피 이 영화가 끝나면 다신 영화계에 발을 들이지 않을 생각이긴 하지만 일단 맡은 일은 끝까지 해내야 하니 촬영 하면서 어려운 게 있으면 이 사람에게 말해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 어지간해선 남한테 힘든 얘기 안 하는 성격이긴 해도... 스폰서라며... 나는 배역을 얻었고 저사람은 나를 멋대로 이용할테고. 시작은 어땠을지 몰라도 일단 나는 이 일을 잘 해내고 싶으니까. 그리고 내 노력을 비웃지 않는 걸 보니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



다음날 촬영장에 가기 위해 부랴부랴 씻고 옷을 입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려 나가보니 낯선 남자가 우두커니 서있었겠지.



"누, 누구세요?"
"아, 대표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오늘부터 매니저를 일을 하게 된..."
"매니저요?"
"네. 스케줄 관련된 것부터 건강까지 다 제가 관리하게 됐으니 촬영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감기는 다 나으셨는지 대표님이 꼭 보고하라고 하셨어요. 지금 컨디션 어떠세요?"



마치다는 커다란 눈을 꿈뻑이며 느릿느릿 컨디션이 아주 좋다고 대답했고 매니저는 준비 끝나실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소파에 얌전히 앉았을듯. 어리둥절한 채로 양말을 신는데 핸드폰 진동음이 짧게 한 번 울릴 거임.



[그렇게 잘 하려고 노력하는데 자기 관리 못해서 맨날 혼나기만 할 수는 없잖아. 이제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연기만 잘 해.]



마치다는 그 문자 메시지를 받고 울컥 했을 거임. 살면서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후원을 넘어선 응원의 마음이 느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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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마치
2023.12.20 00:42
ㅇㅇ
센세 보고싶다...
[Code: 8583]
2024.01.22 02:35
ㅇㅇ
모바일
센세 어나더ㅠㅜ
[Code: 65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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