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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3 21:18

 

명헌씨는 참 재미없는 사람이네요. 

 

 

당신은 무슨 그런 말을 황금 같은 휴일 오후 네 시 사람으로 들어찬 카페 안에서 하나요? 따져 묻고 싶었지만 상대방이 자리를 뜨는 속도는 매우 빨랐고, 이명헌은 굳이 그를 붙잡고 이유를 묻는 등의 귀찮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명헌은 두어 번 나름 호감을 가지고 만나던 사람이 던져놓고 간 말에 제 인생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인간관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키와 덩치가 크고 운동을 하는 남자애라면 학창 시절엔 어떤 무리에 들어가 있어도 대충 잘 어울려 놀 수 있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선 아주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들었다. 직업은 농구선수. 취미는 예상 별점 2.5점인 영화 보기. 특기는 농구, 운동. 반려동물은 키우지 않지만 반려동물을 키우는 친구의 집에 갈 때는 미리 어떤 간식을 좋아하는지 물어볼 정도로는 좋아하고, 휴일엔 야외 활동보다 실내 활동을 즐기는 편. 팀 동료에게는 좋은 주장, 좋은 형, 약간 어려운 선배, 그치만 좋은 선수 등등의 나쁘지 않은 평을 받고 있고... 됐다. 

 

명헌은 사고하기를 포기했다. 다행인 것은 명헌의 집이 근처라는 것이었다. 명헌은 곧바로 집으로 가 몸을 씻어내고, 대충 옷을 꿰어 입고 베란다로 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주 오랜만에. 해가 넘어가기 직전의 늦은 오후, 명헌은 정말 간만에. 아주아주 오랜만에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형하고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요.

 

명헌은 궁금했다. 넌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어? 걔는 울다가도 나를 보면 곧잘 웃었지. 새침하게 빠진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모습이 재미있었어. 훈련을 도망가면서도, 결국 걸려서 혼나면서도 눈이 마주쳤을 땐 웃어보였고, 손이 스쳤을 때도, 스친 손이 신경 쓰여 얼굴이 홧홧해졌음에도, 괜히 어색한 공기를 깨려 뱀 지나간다는 헛소리를 해도. 걔는 잘난 얼굴로 웃어보였다.

 

형하고 있던 날들이 너무 재밌었어요. 

 

명헌은 우성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한다. 형 보고싶어서 어떡해요, 하면서 엉엉 울던 애의 덜자란 어깨를 끌어안아주면서 함께 울어버리고 싶던 마음을 참았다. 

 

너한텐 정말 좋은 기회니까, 뿅. 가서 잘 할거다, 뿅.

 

사실 명헌은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다.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라고, 보고싶을 땐 연락하라고, 나는 언제나 여기 있을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명헌은 미국에서 희열에 가득 찬 눈으로 웃던 우성을 생각했다. 

 

우성아, 잘 가, 뿅.

 

명헌은 웃었고, 정우성은 울어서 부은 눈으로 결국 마주 웃어주었다. 

 

 

우성아, 어쩌면 나는 그때 이후로 별로 재미있지가 않았나 봐. 명헌은 15년간 생각했다. 

 

연애사업은 지지부진했다. 누가 누구랑 연애를 하고 한 달 만에 깨졌네 마네 하는 새내기때는 운동하느라 바빴고, 프로 입단 이후에 겨우 몇몇을 만나긴 했다. 

 

먼저 호감을 표하며 다가온 건 그들이건만, 언제나 명헌과 잘 맞지 않는다, 명헌과 있으면 재미가 없다는 이유를 들며 그만 만나자는 말도 그들이 먼저 꺼냈다. 사실 명헌은 이게 그만 만나자는 말까지 들을 만한 무게가 있는 만남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애라고 생각했지만 명헌은 아니라고 생각한 만남 몇 번을 끝으로, 명헌은 코트 위의 노장 소리를 들을 나이를 맞이했다. 

 

 

명헌은 아주 오래 전 전달된 음성메시지를 기억한다. 14시간의 시차는 전화를 두렵게 하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재생한 음성메시지는 온통 울음바다였다. 다시 형하고 농구를 하고 싶어요. 형이 너무 보고싶어요. 형하고 있을 때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마지막에는 저도 부끄러웠는지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다시 형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끝으로 툭 끊겼다. 명헌은 한동안 그 눈물젖은 메시지를 돌려 들었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다시 메시지가 오는 일도 없었다. 명헌은 우성이 성공적으로 미국에서 자리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온 후로는 아예 메시지를 듣지 않았다. 이제 울지 않겠지. 많이 웃겠지. 생각하면서.


 

오랜만에 정우성을 생각하니 재미있다. 

 

명헌은 살짝 웃었다. 걔는 이제 나를 잊었을 거야. 보고싶다고 울던 시절도 까먹었겠지. 나는 아마 또 재미없고 지루한 만남을 몇 번 가지다가 재미없게 끝을 보겠지. 

 

다 타들어가 재만 길게 남은 담배를 눌러 끄고 뒤돌아섰다. 정우성도 이명헌을 생각할 때 그때 참 재미있었다고 떠올리기를 바라면서. 


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