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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2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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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송태섭이 원하는 대로 애한테 관심도 가져주고, 잘해주면 되겠지. 그럼 언젠가 그때 보여줬던 그 모습들. 한결 편해보였던 표정, 행동들. 다시 보여주겠지. 이명헌은 생각했음. 그럼 이제 어떻게 뭘 해줘야 할까. 여태까진 이명헌의 노력보단 우연하게 타이밍이 잘 맞았던 게 컸음. 이젠 진짜로 내가 먼저 다가설 때겠지.

[다음 내원일은.]

문자를 받은 태섭은 머릴 긁적였음. 갑자기 이걸 또 왜 묻지. 버스 타고 다니는 것 때문인가... 이젠 이혼한 사이에, 병원까지 이동하는 것따윈 별 상관 없지 않나.

[신경 안 써도 돼요.]
[언젠 애 생각 안 한다며.]
[그래서 이제 궁금해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면접 교섭권 병원갈 때 쓰라며.]

이 인간 한 마디를 안 지네. 말은 그렇게 나오면서도 마음이 복잡했음.
이런 도움 정도는 받아도 되는 걸까. 이러다 이게 익숙해져 또 나 혼자 착각하게 되면 어쩌지. 굳이 이 사람 도움따윈 받을 필요 없는데. 이제 혼자 척척 해내야지, 아기도 태어날 텐데. 그렇지만 이명헌도 아기 아빠인데. 이 아기는 나와 이명헌의 공동 책임인데. 하지만 아기는 내 배 안에 있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시간 알려주면 데리러 갈게.]

오랫동안 고민하다 도착한 문자를 보고선 태섭은 결심했음. 이 정돈 애기 아빠로서 해주는 거야. 어차피 병원 왔다갔다만 기사님이 도와주시는 거니까... 이 포함 이명헌의 선의는, 절대 착각하지 않는 거야. 그냥. 공동 양육자로서 대하는 거야.


병원 내원 당일, 태섭은 약속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음. 단지 입구 앞에서 보자고 했는데, 태섭이 사는 동 앞에 서 있는 차를 보고선 고갤 내저었음. 이럴 줄 알았지. 차는 이혼하기 전, 병원갈 때 탔던 이명헌의 출퇴근차. 그때처럼 비서가 운전석에서 내렸음. 태섭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며 비서가 열어준 문으로 타려는데. 태섭이 타려다 말고 차 안을 들여다봤음.

안 타고 뭐해?
당신이 왜 여기에...
왜냐니. 면접교섭권인데.
... 같이 간단 말은 없었잖아요.
데리러 간다는 말은 뭘로 들은 거야.
그거야...!

저번에도 당신은 안 왔으니까. 뒷말을 하려다 만 태섭은 그냥 차에 올라탔음. 비서가 차 문고릴 잡은 채 가만히 서 있는 게 신경쓰이기도 했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피할 상황도 아닌 것 같았음.

일단 차에 탄 태섭의 가슴이 쿵쾅거렸음. 진짜 이 인간이 갑자기 왜이래. 요즘은 진짜 진짜 뭘 잘못 먹었나보다. 가끔 한 번씩 돌아버릴 때가 있나봐...
저 좋을대로 생각한 태섭이 조용히 창밖만을 쳐다봤음. 명헌과 더 할 얘기도 없었거니와, 딱히 말을 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음. 

병원 입구에 도착하니 비서가 태섭 쪽으로 문을 열어주었고, 반대편에서 내린 명헌이 태섭의 곁으로 섰음. 대학병원으로 가는 게 아닌가. 별 이상 없으면 그냥 산부인과 가지 뭐하러 대학병원을 가요. 짧게 타박 아닌 타박한 태섭이 먼저 병원으로 들어섰고, 명헌은 뒤를 따르며 엘리베이터 버튼 눌러주기 같은 쓸데없는 보조만 할 뿐이었음.

병원으로 먼저 들어간 태섭이 데스크에 접수하는 동안 명헌은 한 발짝 뒤에 서 있었음. 잠시 앉아 기다려달란 데스크 직원의 말에 빈 대기석을 찾아 앉는 태섭을 따라 명헌이 어정쩡하게 옆 자리에 앉았음. 태섭은 명헌이 함께 있는 게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 듯 행동했음. 휴대폰을 잠깐 보다가, 옆에 꽂힌 육아 잡지 등을 보기도 하고.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도 한 번 봤다가 임신과 출산에 관한 책을 보기도 했음. 산부인과가 처음인 명헌은 힐끔 힐끔 태섭이 하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음. 가만히를 못 있네. 원래 이랬나. 그런 건 잘 못 느꼈었는데.

금방 태섭의 이름이 불리고, 몸을 일으키는 태섭을 따라 명헌도 진료실로 함께 들어갔음. 의사와는 이미 안면을 텄기 때문인지 가벼운 안부인사를 주고 받더니, 의사의 시선이 곧 명헌에게로 향했음. 그러다 어색하게 태섭에게로, 다시 명헌에게로. 두 사람의 관계를 파악하려는 듯 싶더니 의사는 조용히 진찰을 준비했음.

초음파부터 보겠단 말에 태섭이 알아서 척척 몸을 움직였고, 명헌은 여전히 뒷짐 진 채 태섭이 하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음.
저기, 동행인께서는 뒤로 잠깐 물러서주시겠어요? 
명헌이 두세발짝 뒤로 물러나며 단어를 곱씹었음. 동행인... 보호자가 아니라 동행인? 누군가 같이 오면 대부분 보호자라 칭하지 않나? 그 전에 송태섭이 아기 아빠는 없다고 말했으려나. 아무리 그래도 동행인, 같은 말은 쓸 리가 없는데.

오늘은 어떻게, 좀 걷다 오셨어요? 아기가 또 안 움직이면 얼굴 보기가 힘든데.
아... 오늘은 차 타고 왔어요. 얼굴 못 보려나. 아, 오기 전에 달달한 주스 마시고 오긴 했는데...
그럼 아기가 잘 움직일 수도 있겠네요. 볼까요?

뒷짐진 채 선 명헌이 화면이 재생되기 시작하는 모니터를 바라봤음. 태섭에게 두 번 받았던 사진과 비슷한 모습.

다행히 오늘은 팔로 안 가리고 있네요. 움직임도... 응. 많이 보이고요. 오늘은 입체 초음파로 아기 얼굴도 같이 볼게요. 드디어 얼굴 보시겠어요.
진짜요? 다행이다.

화면을 주시하던 명헌의 눈이 태섭에게로 돌아갔음. 눈이 반짝 빛나며, 숨길 수 없는 미소를 띤 채 화면의 아기를 보는 송태섭.

아기가 주먹 꼭 쥐고 있네요. 지금 뭐 힘을 주고 있나~ 아니면 뭔가 결심을 했나? 

의사 선생님의 능청스런 말에 태섭이 웃음을 터뜨렸고, 명헌은 여전히 태섭을 보고 있었음.

아직 크기는 주수에 비해 좀 작아요. 근데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아요. 전체적으로 좀 작은 편이고...

아기가 작단 소리에 웃음 띠던 얼굴은 어디가고 금세 먹구름이 내려앉았음. 걱정할 정도는 아니래도 신경이 쓰이는지 심각한 표정의 태섭을 보던 명헌이 손을 들어 턱을 쓰는 척 웃음을 감췄음. 이제보니 정말, 표정에 모든 게 드러나는 구나.

아기 심장소리 들을게요.

쿵쾅쿵쾅쿵쾅쿵쾅.

처음 들어보는 우리 아기의 심장소리. 친구 중 하나는 이 소릴 듣자마자 눈물을 흘렸더랬지. 명헌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클래식을 감상하기라도 하듯 가만히 소릴 들었음. 이게, 송태섭 뱃속에 살아 숨쉬는 나와 송태섭 아기의 심장소리라고. 친구의 마음이 이해됐음. 벅찬 기분. 생명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

태섭도 그때 흘긋 명헌을 쳐다봤음. 애 보러 왔다면서 괜히 딴짓이나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며 장승처럼 선 명헌을 봤는데. 어딘가 생각이 많아보이는 표정이었음. ... 그래, 이명헌도 사람이지. 제 자식 이렇게 살아있단 증거로 예쁜 심장소리 들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게 이상하지. 태섭도 괜히 마음이 몽글해졌음.

이번엔 아기 얼굴 볼게요. 입술이 엄청 도톰하고 예뻐요. ... 산모님도 입술이 좀 도톰하신 편이니까...

고갤 돌리던 의사의 시선이 명헌의 입술에 닿았음. 그러더니 급하게 말을 덧붙이며 기계를 움직여 다른 각도로 아이의 얼굴을 비춰줬음.

네, 어. 웃고 있네. 기분 좋은 일이 있나. 산모님 아기 한 번 불러주시겠어요?
아가야...
어구, 귀여워라.

태섭이 부르니 반응을 하는 건지 아기가 꿈틀댔음. 처음 보는 입체 초음파 사진에 웃고 있는 얼굴이라니, 태섭도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음.

너무 귀엽다, 그쵸.

그쵸? 태섭은 본인이 말하고도 순간 입을 다물었음. 옆에 선 명헌에게 본인도 모르게 의견을 물은 것에 대해 속으로 자책했음. 같이 왔다고 진짜 부모라도 된 것처럼, 뭐야. 이러면 또 나 혼자 기대하는 애 같잖아. 

그러게, 귀엽네.

돌아오는 대답도 없어 순간 민망해진 태섭이 명헌을 쳐다봤음. 턱을 매만지며 화면을 보는 모습이 묘하게 화면 속 아이와 닮아 보이기도 했음. 특히 그 두툼한 입술이.
태섭은 그 후로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음. 아이의 상태에 대한 간단한 소견을 듣고, 진료를 끝낸 후 초음파사진 찍은 것도 받아 나왔음. 태섭이 배를 닦으며 정리하고 나오니 이미 명헌이 데스크에 수납을 끝낸 상태였음.
다시 차에까지 올라타고 나니 태섭이 아까부터 사진을 만지작거리던 게 눈에 띄었음. 

나도 한 장 줬으면 하는데.

명헌의 말에 놀란 듯 보이던 태섭이 위에 있던 입체 초음파를 명헌에게 건넸음. ... 여기요. 이건 당신 가져. 난 이거면 돼.
손수 태섭의 손에 들렸던 것과 바꾼 명헌이 사진을 안주머니에 고이 넣었음.

벌써 밥 시간인데.
같이 저녁이나 하고 들어갈까?
너 먹고 싶은 걸로.

이 정도면 진심이 조금이라도 전해졌을까. 내가 건넨 오늘 하루의 시그널을 넌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노력의 시작이 나쁘진 않은 것 같음. 기분이 좋아진 명헌이 손가락으로 차 문의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음. 

명헌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