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호명헌 약우성명헌







이런 건, 좀. 
반칙 아닌가. 


"저기 있잖아, 나는 진짜 괜찮거든. 나는 어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달빛 아래, 고만고만한 주택가 한 구석에 자리잡은 자취방 옥상.
드래프트 지목을 앞두고 맥주 한 캔 나누며 건네는 고백이라니. 
상투적이다못해 진부해서 클리셰로도 안 쓰일 소재같은데. 

그러나 그 진부함조차 저 다정한 진솔함 앞에서는 마법처럼 청춘의 한 자락이 된 것 마냥 잘 어우러졌다. 


"....네가 이상한거다뿅."
"으응, 나도 알아. 그치만 명헌아 너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잠시 숨을 고르며 눈을 지긋이 맞춰오는 것이 영 간지러웠다. 


"세상에는 주인공의 이야기만 있지 않거든."
"...뿅."
"모두에게 주목받고 시련을 겪다가도 이겨내고 성공하는 이야기라거나... 아니면 첫 눈에 반하고, 서로를 운명이라 여기고, 불같은 사랑을 하는 그런 이야기는...음, 주인공을 위한 서사잖아. 너도 그렇고 대만이도 그렇고 동오도 그렇고... 다들 이야기로 따지면 멋진 주인공이겠지. 주인공에게는 그런 주인공에게 어울리는 이야기가 있는 거고."


술기운이 살짝 올라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뜬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는데, 잘 와닿지는 않았다. 
운동만 주구장창 해온 저에게는 지나치게 감상적으로만 들렸다. 
그랬는데. 


"...그런데 나는 조연이잖아."
"네가?뿅?"
"아무래도 그렇지? 뭐, 지금은 그만뒀지만 실은 나도 농구를 정말 좋아했거든. 내 입으로 말하긴 쑥쓰럽지만 노력이라면 우리 북산 녀석들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했을거야. 그치만... 명헌아 너도 알지? 나는 너희만큼 잘하지 못하고, 그건 앞으로도 안 바뀔 사실이잖아."
"그...하 권준호 내가 빈말은 못하는 거 알면서뿅."


투덜거리는 말에 시원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하하, 다 알지 그럼. 아무튼, 그래서 이렇게.. 나는 이제 농구를 하지 않아. 이건 너희들의 이야기에서 보자면 분명한 조연이잖아. 근데 있지, 명헌아 나는 지금 충분히 즐거워. 후회없이 내 학창 시절을 기꺼이 농구에 바쳤고, 그때의 열정 덕에 지금도 내 일상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그야...그렇지. 넌 진짜 좋은 의사가 될 것같은데뿅."
"그러니까. 어느 농구 영화의 주인공이 너희라면 나는 물론 조연이겠지만... 그렇다고 조연인 내 이야기가 마냥 재미없고 의미없는 건 아니거든."
"....아까부터 자꾸 당연한 소리를 하는데 너,"


"명헌아, 사랑도 똑같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한 마디 하려다가, 문득, 거짓말처럼 그 말의 뜻이 이해된다. 


"그건......"


속이 울렁거렸다. 진짜 울렁거렸다는 건 아니고, 그냥 느낌이. 


"어때 명헌아, 드라마 속 행복하고 잔잔한 조연커플이 되는 건 관심없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반사적으로 대꾸한다.


"....뿅."
"정우성 선수랑 오랫동안 사귀었지. 나도 알아. 그러다 고생도 많이 했고, 헤어진 것도 알아. 아 당연하지만 누가 말해준 건 아니고... 그냥 내가 너희랑 자주 만나다보니 자연스레 알게된거야. 음...나는 미국에 있지도 않고, 성격이 막 다채롭거나 하지도 않고, 음... 너보다 연하도 아니고..."


손을 하나씩 접어가며 조금은 괜히 난처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다가도 결국은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네온다. 


"나랑 만나면 단조로울지도 몰라. 지금까지처럼 연애가 막 스펙타클하지도 않을거고, 너를 엄청 재밌게 해주거나 그러지도 못할테고. 그치만, 네가 필요할 때 항상 네 옆에 있어줄게. 그건 약속할 수 있어. 내가 너한테 첫 번째가 아닌 것도 괜찮아. 난 그런 거에 익숙하거든."
"권준호, 진심이야? 네가 얼마나 손해보는 관계인데-"
"이게 왜 손해야. 너를 만날 수 있는데."


거리낄 게 없는, 안정적인 사람의 꽉찬 직구라는 건 처음 받아봐서. 
하늘 위로 깜박거리는, 아마도 비행기 불빛일 것을 바라보다 입 속으로 말 몇 마디를 굴리다 천천히 답했다. 


"야. 권준호. 너, 아니 너 똑똑한 놈이니까 그럴 린 없겠지만. 다시 생각해봐라. 너 충분히 좋은 사람인 거 잘 알아서 하는 말이거든? 내가 뭐라고 니가 세컨드를 자처하면서까지 만나? 너 혹시 뭐, 나한테 동경, 동정 이런 건 아니고?"
"그건 아니고 명헌아."


드물게 단호한 말이 들려왔다. 권준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나는 널 좋아하는 게 맞아. 네가 코트 위에서 빛나길 바라고, 또....그만큼이나 언제 어디서나 즐겁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힘든 일이 있을 땐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싶고, 좋은 일이 있을 땐 축하해주고 싶고."


제법 긴 연애를 하는 동안 내가 막연히 바래왔던 그 일들을, 내게 해주고 싶다고 말하는데. 


"네가 최선의 선택을 하길 응원하되 한번 결정하면 기꺼이 그걸 믿고 존중해주고 싶고. 그냥 네 편이 되어주고 싶었어. 네가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해도 그냥 맞장구쳐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어. 명헌아, 사람들은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하지 않아?"
"보통, 보통은 그렇지뿅."
"그럼 난 널 사랑하는 거네."
"......낯간지럽게."
"그래도 좋잖아. 날 사랑하진 않아도, 너도 나 좋아하잖아. 아니야?"
"...권준호, 나 빈말 못한다고 말했다뿅."


제 손 위로 가볍게 겹쳐오는 손이 기껍다. 


"내가 성격이 좋진 않아서 미리 말해두는데, 미국에서 연락오면 나 뒤도 안 돌아보고 갈 수도 있다뿅."
"괜찮아. 그러다 만약 돌아오게 되면 내가 플래카드 들고 마중나갈게."
"...너랑 데이트하다가 정우성이 부른다고 산왕 동창회갈 수도 있는데 진짜 괜찮냐뿅."
"좀 서글프긴 할텐데 그럼 나도 북산 동창회 열지 뭐."
"진짜 한마디도 안진다뿅."
"으응, 이 정도는 해야 이명헌 남자친구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결국 참았던 웃음을 쿡 터트리자 마주보는 얼굴에도 웃음이 걸린다. 


"좋아뿅. 그거, 조연커플이라는 거. 해보자뿅. 대신 내가 원하면 날 놔줘뿅. 나도 그럴테니까뿅."
"그래. 명헌아 근데 그거 알아? 이런 커플은 보통, 마지막화에 결혼하는 걸로 끝난다?"


아, 그러니까, 이렇게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반칙이라니까.
그러나 나는 그 고의적인 파울에도 기꺼이 넘어가고 만다. 









활활 타오르는 불같은 사랑을 하다 재만 남은 줄 알았던 이명헌한테 드넓은 잔디밭마냥 평화롭고 잔잔한 사랑이란 것도 있다고 알려주는 권준호 어떤데...
이렇게 쭉 이어져서 정말 결혼엔딩나도 좋고...
아기연하가 이제 호수같은 사랑을 할 줄 아는 상태로 성장해서 돌아와도 좋고.. 그때 이명헌이 진짜 다시 흔들리는데 권준호 진짜 괜찮다고 보내주면서도 이명헌 자리 남겨두는 그런 것도 좋고 아니면 스스로도 흔들릴 줄 알았던 이명헌 안정형 연애에 이미 물들어서 굳건한 것도 좋고... 
어떻게 해도 맛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