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62284648
view 2328
2023.09.03 16:16
알오 ㅈㅇ


분주하게 거실을 누비던 대만이 욕실에서 나온 A를 발견하자 긴 다리로 겅중겅중 담을 넘듯 뛰어 냉장고 앞에 섰어. 아침 대충 먹고 출근해. 토스트 구워놨어요. 냉장고 문을 열어 꺼낸 우유팩을 식탁 위에 툭 올려놓더니 가볍게 쥔 주먹으로 식탁유리를 쿵쿵 쳤음. 잠이 덜 깬 A는 안경다리를 귓바퀴에 끼우고선 반쯤 감긴 눈을 깜빡거림. 대만이 꺼내준 우유를 컵에 따르는 와중에 일방적인 통보가 이어지는데, 닫힌 귀에는 제대로 들리질 않아 설렁설렁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었지. 대만은 꼬박꼬박 제 일정을 A에게 알려주고는 했어. 뻔히 그의 매니저가 A에게 스케줄을 보고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마 저 나름대로 남편 된 도리를 하는 중일 테지. 근성 있는 운동 선수답게 잊지 않고, 꾸준히. 

토스트를 삼분의 일 가량이나 씹는 와중에도 대만의 말이 끊기질 않음. A는 슬슬 이어지는 문장을 자를 기미를 살폈고. 나 오늘은 훈련 끝나고 고등학교 친구 만나고 올 거예요. 치수랑 준호. 늦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당신 먼저 자요. 이때다. A는 씹던 빵을 꿀꺽 삼키고 무신경한 투로 대꾸를 해. 농구부 친구들 맞죠. 운동 가방을 어깨에 든 대만은 뒤통수를 보이며 답하고. 응.

"당신 농구 말이야."
"어. 미안한데 나 이제 나가야,"
"이제 그만 하면 안 될까."

당장이라도 뛰쳐 나갈 것만 같던 대만이 우뚝 멈춰 서더니 통 움직이질 않아. 적막한 거실엔 토스트가 바스라지는 소리만이 들리고.
 
고개를 돌린 대만의 미간엔 주름이 잡혔어.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단전에서 끓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삭히는 모양이야. A는 화가 난 대만의 표정과 말투에도 아랑곳 않고, 마냥 평온한 얼굴로 손짓함. 얼른 가. 바쁘다면서요. 지금 바쁜 사람 붙잡고 헛소리 한 건 당신이잖아. 아예 쿵쿵대는 걸음으로 식탁 앞까지 다가오더니 손바닥으로 유리를 짚고서 허리를 숙였음. A는 티슈를 뽑아 입가를 닦고는 허리를 의자에 기대 가까워진 대만에게서 조금 거리를 뒀어.

"이번 재계약은 하지 말자."
"그걸 왜 당신이 정하는데?"
"대학 리그까지만 하자던 집안 어른들 설득한 사람은 나야. 내가 당신 앞길 막으려고 이러는 것 같아? 당신 몸 생각해서 하는 소리잖아."
"아직 3년은 더 뛸 수 있어. 그리고, 왜 지금 어른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얘기 돌아오고나서 하자. 나도 출근 해야하고."

어느새 토스트를 다 먹은 A는 그릇을 싱크대에 담가 놓고 아직도 황당한 나머지 인상만 찌푸리고 멀뚱히 서 있던 대만에게 말을 해. 뭐 해? 간다며. 대만은 분하다는 듯 주먹을 쥐고는 나중에 보자며, 현관문을 쾅 닫고 체육관으로 향했지.





대만은 국내 프로리그 농구스타이자, 저명한 재벌가 집안 오메가이기도 함. 윈터컵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 대만은 남들보다 늦게 오메가로 발현을 했어. 억제제 들이 붓고 경기 뛰느라 가족들한테 엄청 깨졌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까지 갈 수 있었지.

A와는 대학 때 부모님 모임에 따라 갔다가 만나 결혼까지 한 케이스임. 사실 집안끼리 맺어주려고 만든 자리이긴 했다만 대만은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다지 신경도 안 쓰고 있었지. 상대 집안에선 우성 오메가 데려올 수 있으니 좋고, 대만의 집안에선 애가 농구에 반쯤 눈이 돌아 있는데 괜히 기업을 잇는 알파 장남 만나는 것보단 차남한테 보내는 게 낫겠다 싶어서 얼른 식 진행했고. 다만 상대 집안에선 대만이 농구를 한다는 걸 그닥 마음에 들어하진 않았지만, A는 달랐음. 대만에게 농구 계속 해도 된다고 우리 집 신경 안 써도 된다 한 사람이었고, 그건 대만이 반쯤 홧김에 결혼을 결심한 이유이기도 했음.

근데 그런 인간이 갑자기 농구를 때려치우래. 그것도 나가기 직전 바빠 죽겠는데 아침 밥상머리에서 재수 없게. 대만은 머리를 벅벅 긁은 손으로 치수의 등을 두들기면서 한숨을 푹푹 쉼. 치수야. 넌 결혼하지 마라. 진짜 내맘대로 되는거 좆도 없다...

"이유는 뭐라 하시든?"
"몰라 시댁에서 애 얘기 했겠지 뭐. 아 그냥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낳고 복귀 해버려?"
"아직도 네가 얌전히 가정에 헌신하길 바라는 그쪽 집안도 대단하군."
"하하 치수야... 아 맞다, 대만아. 태섭이가 얼마 전에 귀국 했거든. 오늘 시간 된다던데, 불러도 되지?"
"엉? 송태섭?"

뭐야. 너 송태섭이랑도 연락 했었냐? 몇 년 전 대만의 결혼식에서 봤던 게 마지막이긴 하지만 부르지 못 할 이유야 없었어.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고 첫 만남은 할 말이 없지만 농구부에서 사이도 나쁘지 않았고. 졸업 하고 각자 제 살 길 살다 보니까 살짝 멀어진거지, 절연한건 아니었음. 게다가 태섭은 nba를 진출 했으니 거리가 멀어진만큼 소식 듣기도 더 어려웠고.

쟤는 참 넉살도 좋다. 대만은 태섭에게 연락 한다는 준호를 보면서 구시렁거렸고 고기를 마저 구우며 다른 대화 주제를 꺼냈음. 농구 얘기나 뭐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문이 열리고 진짜 송태섭이 온거야. 못 본 사이에 뭔가 더 듬직해진채로. 대만은 놀라 입을 떡 벌리고 야 너... 송태섭 맞아? 여러번 되물었음. 태섭은 자연스럽게 빈 자리에 앉으면서 젓가락을 꺼내들고 눈썹을 한번 위로 들썩거렸지. 왜요. 저 그대론데. 대만은 태섭이 팔뚝을 주먹으로 한 번 쿵 쳐보고 낄낄 웃었어. 야 이새끼 팔뚝 봐. 갈수록 단단해지네. 운동 너만 하냐고 진짜.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도 여럿이 있어서 그런가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즐거웠지.

왁자지껄 한창 떠들다가 식사자리 정리하고 치수랑 준호 택시 타는 것까지 본 대만은 문득 제 옆에 삐딱하게 서 있던 태섭이 보고는 고갤 갸웃거림. 너 집에 안 가냐? 태섭은 식당 뒤 높은 건물을 가리키며 호텔을 잡았다고 했어. 가족들 이사를 앞두고 있어서 집이 난장판이래. 게다가 이젠 다 큰 아들 집에 가는거 별로 안 좋아하더라구요. 대만은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문자 자판을 치면서 대꾸를 했지. 원래 가족들이란 멀리 떨어져 있어야 사이가 좋아지는 법이란다...

"남편분하고 멀리 떨어져 있어야 사이 좋아지세요?"
"말도 마라. 집 들어가서 싸울 생각 하니까 벌써 골 아프다. 아. 그 양반 S대 나와서 나 말빨로는 개 발리는데..."
"농구해서 이기는 사람 말 들어주는 걸로 하세요 그럼."
"그 농구 때문에 싸울 예정이란다."

왜요? 태섭은 그냥 순전히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대만은 마른 세수를 하다가 징징 울리는 진동음에 핸드폰을 꺼냈지. 야 잠만 나 전화 좀. 태섭은 왠지 그게 남편인 A의 전화일 거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음.

먼저 자라니까. ...아 그걸 오늘 얘기 해야해요? 나 술 마셨는데. ...아니 내가 애도 아니고 당신보다 몸 더 살뜰히 챙기는 운동 선수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그리고 미리 얘기해두는데 난 관둘 생각 없으니까 그리 아세요. 어. 응. 금방 갈게. 알겠어요.

눈치 빠른 태섭은 왜 싸울 예정인지 굳이 더 묻지 않기로 하였지. 전화를 끊은 대만이 야 태섭아, 하고 태섭을 불렀어. 태섭은 한쪽 손은 주머니에 꽂은 채, 남은 한손으로 대만을 툭툭 치더니 인사를 했어. 선배 저도 이제 갈게요. 어. 어어, 응. 그래. 잘 가라. 연락하고. 슬슬 가야한다고 말을 꺼내려는거 같길래 태섭이 먼저 선수를 쳤지. 잽싸게 종종걸음으로 지내던 호텔에 간 태섭은 결혼식 때 보았던 A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음. 정대만이랑... 진짜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주 어렵게, 귀한 분을 모셔보았습니다.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놀라게 한 농구의 귀재. NBA에서 크게 활약 중인 농구선수 송태섭씨를 모셔보았습니다. 반갑습니다, 송태섭씨."
"예. 초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농구선수 송태섭입니다. 뉴스룸에 얼굴을 보여서 놀라실까 염려되어 미리 말씀 드립니다. 저 사고는 치지 않았어요, 여러분."

비시즌이라 귀국했더니 인터뷰 제의가 제법 많이 들어온 태섭은 그 중 굵직한 몇 가지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어. 이번엔 정장을 갖춰 입고 저녁 뉴스 인터뷰를 찍으러 온 거고. 답답한 넥타이에 경직된 몸을 풀려고 가볍게 농담을 던지니 앵커도 하하 웃어주었음.

뉴스라 조금 긴장을 하긴 해도 인터뷰 해본 짬이 몇인데. 태섭은 금방 적응을 해서 수월하게 인터뷰를 할 수 있었음. 촬영은 금방 끝나고 생방송이 아니라 다행이라며 마지막까지 너스레를 떤 태섭은 앵커에게 악수를 권했음.

"오랜만이네요 송태섭씨."

카메라 불 꺼지니 드디어 아는 체를 하네. 태섭은 미소를 지은 채로 대답했지. 예, 오랜만이네요 A씨.

"결혼식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그러네요. 정대만 선배도 결혼식 이후 아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아아.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들 만난다는 자리에 태섭씨도 계셨었구나..."

태섭은 목 끝까지 채운 넥타이를 살짝 내렸음. 저 양반은 참 대단하지. 어떻게 저리 잘 갖춰 입고 번듯하게 있을 수가 있냐. 태섭은 빳빳한 A의 정장을 쳐다보았음. 

저 평생 언성 한 번 안 높여봤을 것 같은 사람이... 태섭은 도무지 A와 대만이 다투는 모습이 상상이 가질 않았음. 정확히는 대만이 A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한다거나, A의 언변에 넘어가 말을 듣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진짜 안 어울린다.

태섭은 뉴스룸에 있던 모든 스탭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방송국을 빠져나오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어. 구구절절한 이별 노래 가사가 들리길래 컬러링 구리다고 구시렁대고 있었는데 마침 전화를 덜컥 받아버린거야. 태섭은 여보세요? 하는 소리에 다짜고짜 물었지. 선배 지금 뭐 하세요.

연락 하랬으니까 정말 연락 했수다. 농구 한 판 합시다. 어. 나랑 둘이서요. 원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