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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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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헌은 송태섭의 표정을 보고 단숨에 알아차렸음.
처음엔 현철이 무슨 소릴 하나 싶었고, 두 번째엔 우리가 그렇게나 연기를 잘 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진짜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구나.

송태섭은 이명헌을 사랑한다. 그래. 그런데 아직도 문제가 안 풀린다. 왜 넌 이혼을 요구한 걸까. 왜 내게 임신을 숨긴 걸까. 사랑하는 사람과 부부로서 함께 살고, 아이까지 함께 키우는 게 더 행복한 거 아닌가? 너는 왜 사랑하는 내게서 벗어나려고한 걸까.

그 뒤로 송태섭을 만날 순 없었음. 애초에 아파트 단지 앞에서 기다려 만날 수 있는 확률 자체가 적었고, 그 애는 확실히 의도적으로 이명헌을 피하고 있었으니까. 


[양육권은 넘겼어도 면접교섭권은 있는 거 아닌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두고 하는 말론 부적절했을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었음. 비서를 통해 연락해봐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으니 직접 이야기할 수밖에. 그리고 이 방법은 송태섭에게 먹힌 듯 보였음. 두 시간 후에야 회사 근처 카페 이름이 적힌 답장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송태섭의 앞에는 청포도 에이드가, 이명헌의 앞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놓였음. 그리고 마주 본 두 사람. 송태섭의 표정은 마지막으로 본 얼굴과는 딴판이었음. 뭐랄까. 어디 한 번 해봐라, 같은 표정. 이명헌은 커피를 들어 마시며 그런 송태섭의 표정을 보곤 작게 웃었음.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하겠단 것도 아닌데. 경계하는 저 모습은 뭘까.

할 말 있어서 그런 문자 보낸 거 아니에요?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자 기다리던 송태섭이 먼저 말을 꺼냈음. 아직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이명헌이 테이블에 잔을 내려두고 다시 송태섭을 쳐다봤음. 

할 말 있는 건 아니고. 말 그대로 내 애 보러 온 건데.
... 이혼할 땐 그런 말 없었잖아요.
이건 차후에 청구도 가능하다더라고.

송태섭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표정으로 이명헌의 눈을 피했음. 그러다 확, 고개를 들어선. 

아기가 보고 싶었으면 병원 내원 때 같이 가면 되잖아요.
꼭 그래야 하나? 지금 난 내 애, 보고 있는데.
장난해요?

재밌냐고. 내 마음이 웃겨? 우리 아기가, 당신한텐 그저 나를 불러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애써 평정을 찾던 표정이 일그러졌음. 세웠던 상체를 등받이에 기댄 이명헌이 다른 곳에 뒀던 시선을 다시 송태섭에게로 돌렸음. 눈이 마주치자 다시 또, 그 표정.

내가 뭘 잘못 한 게 있었나?
...
못 해준 게 있어?
...
내가 내 애 한 번 못 볼만큼 너한테 잘못한 게 있냔 얘기야.


당신 진짜 아기가 보고 싶어서 온 거 아니잖아. 아니, 애초에 우리 애가 궁금하긴 해? 한 번이라도 당신이 우리 아이에 대해 관심이라도 가진 적이 있어? 언제부터 아기를 그렇게 끔찍이 생각했다고 그래. 내가 당신 사랑한다니까, 웃기고 신기해서 그런 거 잖아. 그래서 우리 아이까지 들먹이면서 이렇게 나 불러낸 거잖아. 소중한 내 아기가 당신한텐 그저 수단일 뿐이라면, 더더욱.


당신은 아빠 자격 없어요.

송태섭은 앞의 말을 꾸욱 삼켜내고 뒷말만 힘겹게 내뱉었음. 

저번에도 말했죠, 당신 자꾸 이러면 다들 미련 남은 줄 알아요. 그리고, 전부터 말 했어요. 장난 하는 거 아니라고. 더 이상 당신이랑 의미없는 말 주고 받기 싫어요.

송태섭은 이명헌을 잊기 위해서 이혼을 선택했고 더 이상 만나지 않으려 했지만, 이명헌에게 본인을 사랑하는 거냔 질문을 받은 후로 깨달았음. 여전히 그를 쫓고있다는 걸. 이혼한 후로 태도가 바뀌어 관심을 보이고 찾아오기도 하는 그에게, 자그마한 희망을 품었다는 걸. 그리고 느낀 죄책감. 나는 정말 이 아이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는 걸까. 아이를 지키기 위해 더욱 이혼을 서둘렀건만, 이제 와 다시 그가 보이는 작은 관심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걸까. 너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 마음 먹었으면서 여전히 내 마음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젠 정말, 이명헌을 끊을 때가 온 것 같았음.


아이 사진을 보고도, 당신은 사진을 왜 두고 갔는지만 궁금했죠. 우리 애가 잘 크고 있는지, 검사 결과는 어떤지, 심지어 남자 아이인지 여자 아이인지. 그것 조차 궁금해한 적 없었죠. 그리고 지금도. 아이 들먹이면서 정작 아기에 관한 얘기는 한 마디도 안 했잖아요.
이 정도면, 자격 없는 거라고 봐도 되겠죠?
앞으로도 궁금해 마세요. 그럴 거라고 기대도 안 하지만.

이명헌이 올려둔 음료에는 한 모금 입도 안 댄 채 보란듯이 몸을 일으킨 태섭이 새것으로 보이는 빳빳한 초음파 사진을 테이블에 텅 하고 올렸음.

나는 그래도, 당신이, 이번엔 정말 아이를 생각한 줄 알았는데. 이게 마지막이에요.

아이 얘기를 꺼내길래 조금이라도 기대했던 본인이 바보 같았음.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 사람을 갖고 놀기나 하고. 그래,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지. 송태섭은 그런 이명헌에게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았음.

태섭이 먼저 카페를 나서고, 답답함에 한숨을 내쉰 명헌이 테이블에 올려진 사진을 들어보았음. 안 주머니에 넣어뒀던 꼬깃한 사진을 펼쳐 그 옆에 대어보니, 아이의 크기도 꽤나 커져있었겠지.

실감이 나지 않는 걸 어떡하나. 송태섭과 나 사이에 애가 있다는 게. 지금 그 뱃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게. 미안한데 얘야, 나도 이젠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인정할게.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는데, 나도 내가 왜 이러는 지 모르겠고. 내 마음이 왜 귀찮은 짓을 하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고. 네 엄마를 어쩌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이젠 네가 궁금한가? 미안한데, 아직 확신이 없다. 근데 확실한 것 하나는. 장난친 적 없어. 술 마신 건 맞는데 취한 건 아니라는 말.

제정신이지만 술기운을 빌려 네 엄마를 찾아갔다는 말이라는 거. 네 엄마는 평생 몰라줄 것 같다.


명헌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