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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2 20:51
흰색 와이셔츠에 빨간 구찌 넥타이를 맨 곱슬머리의 남자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넣은 필립 모리스를 멋드러지게 쭉 빨아들였다. 입술 사이로 짙게 배어나온 담배 연기가 원경의 빌딩 숲을 배경으로 아롱거리다 허상처럼 사라졌다. 삭막한 콘크리트 바닥에 억지로 식물 몇 그루를 끌어다 정원을 흉내내어 놓은 건물 테라스 발코니의 난간에 양 팔꿈치를 올려놓은 채 송태섭은 제 옆의 남자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야 명헌이는 임자가 있잖아."
"정우성이 임자 없는 놈 골라 건드리나."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기 무섭게 태섭이 말을 받아쳤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이 퍽 시골 청년처럼 순박해 보여 이 삭막한 도시의 정경과는 그리 어울리는 그림 같지 않았다.



"하물며 결혼한 것도 아니던데."
"곧 하겠지. 그리고 중요한 업체 사람이잖어. 명색이 투자유치본부장인데 투자사 심기를 건드릴 순 없잖냐. 사내에서야, 뭐... 나도 소문 듣긴 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 좋게 봐주려는 건 여전하네요 대만 선배는."



태섭의 말에는 명백한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그것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는 대만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그러지 마라. 저러다 말겠지. 너도 본부장이랑 미국 지사 발령 동기잖어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 안 그래?"
"ㅋㅋㅋ동기? 본부장이랑 일개 팀장이 어떻게 동기가 돼? 내년 하반기에 상무 단다던데."
"에? 진짜? 와...본부장 된지 얼마나 됐다고? 사람들이 거절 않고 달려들 만 하네..."
"선배."



태섭이 담배를 입에 물고 대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만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다 의식적으로 등을 펴고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임마, 기죽지 마. 우성이야 진짜 특이한 케이스고 너도 네 라인 중에서는 빠른 편,"
"정우성이 선배한테도 자자고 했어요?"



대만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어? 뭐...... 그건, 그........."
"선배는 잤고?"
"아, 아니, 내가 그랬겠냐??? 내가, 난,"
"선배."



태섭이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다시 짙게 뱉었다. 잿빛 시멘트로 가득한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는 눈이 어딘가 몹시 서글퍼 보였다.



"걔가 사랑하는 거 이 실장 하나에요. 다른 사람 안 봐요. 그 새낀 선배 마음 하나도 몰라 모르고 관심도 없어."
"...난...."
"상처 그만 받고 자기자신을 좀 아껴요. 본부장이 이 실장 빼고 이 회사 온갖 사람들 다 건드리는 거 이 실장보고 지 좀 봐달라는 마지막 발악이니까. 낚인 사람만 불쌍한 거야. 이 실장이랑도 친한 사람이 왜 그런 걸 몰라요? 옆에서 보는 사람 짜증나게..."



대만은 말이 없었다. 태섭은 다 피운 개비를 옆 화단에 비벼 끈 후 다소 멀리 떨어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깔끔한 슈팅이었다.



"명헌이가 거기랑 만나면서부턴가?"
"누구?"
"지금.. 결혼할 사람."
"아."


태섭이 제 턱을 만졌다.



"KN증권 이정환이었나. 이름이."



태섭은 정장 바지 주머니에서 다시 담배 한 까치를 꺼내 물었다. 한쪽 발을 뒤로 빼어 구두 발끝을 땅에 붙인 채 라이터로 불을 피우는 모습이 어딘가 옛날 홍콩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대만은 생각했다.



"정우성이 원래 이 실장이랑 학교 선후배 사이였죠. 난 그땐 둘이 어떤 관계였는지 잘 모르고 솔직히 지금도 크게 관심 없지만 아는 사람은 알았다더라고. 근데 정우성이 미국 가면서 다 틀어진 거야. 좋으면 결혼하자 기다려달라 말이라도 하던가 멍청이가 사랑보단 야망이었나 보지. 그때 결혼했으면 여러 사람 안 피곤했죠. 본부장 지금 저러고 다니는데 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이참에 몸으로 꼬셔서 넘겨보자는 사람 투성이겠죠 이 회사에. 그게 안 되는 일인줄도 모르고. 안 그래요? 대만 선배."
"......"
"아무튼 정우성은 미국으로 갔고 가서 살다가 돌아와보니 다른 놈 꺼 돼있는거지 이 실장이."
"...그게 증권사 아들이고."
"회사에 어마어마한 투자금을 붓잖아요. 정우성이 능력이 있는 거지 갑부는 아니잖아. 아무튼 사연을 들어보면 걔도 불쌍하긴 해. 이명헌도 버텼다던데, 오래 짝사랑 했다고 들었거든."
"누가?"
"그쪽 아들이."



태섭은 대만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순박하고 잘생긴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태섭은 한동안 말을 걸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태섭아."
"네."
"너 혹시 명헌이 좋아했니?"



태섭이 담배를 빨다 말고 컥 하며 숨을 뱉었다. 눈물이 고인 눈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그를 대만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들으면 그런 결론이 나요?"
"아니.. 그 둘 얘기에 관심이 많길래."
"관심 없어요."
"ㅋㅋㅋ야 그렇게 술술 말해 놓고?.....너도 내심 명헌이 좋아해서 아쉬운 거 아니야?"



우리 둘 다 그 뭐냐... 짝사랑? 대만이 와하핫 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태섭은 한 손으로 제 머리를 천천히 쓸어넘겼다. 허리와 엉덩이를 뒤로 더 쭉 빼며 난간에 올려놓은 양 팔꿈치와 팔 위에 턱을 얹었다. 대만의 눈으로부터 제 얼굴을 가리고 서자 코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짝사랑 맞지."




방향은 틀렸지.












우성명헌 태섭대만 우성대만 정환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