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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3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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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혼서류에 도장 찍어 준 건 엎질러진 일. 그냥 이혼 해주고 말면 더 이상 평화로운 일상이 깨지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런 생각하며 그냥 서재 소파에서 눈 감아버리는 이명헌. 

송태섭은 이제야 본인의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듯 점점 부푸는 배를 쓰다듬어 봄. 눈치보느라 그런 거였니. 아직 태명도 없는 아이에게 말 걸어보다 빼곡히 채워진 이혼서류를 한 번 내려다봄. 아이가 생기든 말든, 정말 상관 없나보구나.

한참이나 부부 침실로 들어오지 않는 이명헌에 늦은 밤 송태섭은 조용히 서재로 향함. 작게 두 번 노크해도 답이 없자 문 열고 조심스레 들어가봄. 불편하게 소파에서 자고 있는 이명헌 보고 한 시라도 빨리 나가야겠다 생각하는 송태섭. 담요 가져와 덮어주고 이명헌에게 주려고 했던 초음파 사진 옆에 둘까... 하다가 그냥 본인이 챙겨갈 듯. 어차피 아이에겐 관심도 없는 것 같으니.


다음 날 이혼 서류 제출한 송태섭은 바로 집을 보러 다녔음. 모아둔 돈은 많이 없지만, 지금보단 훨씬 집 컨디션이 안 좋겠지만. 여태껏 누리고 살았던 것들이 본래 내 것이 아니니까. 그래도 아이와 함께 살 것까지 생각해서 섣불리 아무데나 계약하진 않기로 함. 그 정도 늦어지는 건 이명헌도 이해해 주겠지.

그리고 이명헌의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옴. 송태섭은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했으나, 재산 분할, 양육비, 양육권까지. 전부 이명헌이 원하는 대로 될 수 밖에 없었음. 

내 배우자로 살면서 내가 요구한 건 다 해주었으니, 이 정도는 네가 받아 가는 게 맞다. 그 아이는 내 아이이니 내가 양육비를 지원 하는 게 맞다. 설령 내 아이가 아니라고 해도 우리의 결혼 기간 내에 생긴 아이이니 내가 책임지겠다. 또한 네가 원하는 것 같으니 양육권은 당연히 네가 가져라. 원한다면 주에 한 번이나 달에 한 번, 네가 원하는 대로 아이와 만나는 시간도 갖겠다.

내용은 부부의 이혼에 관한 게 맞는데, 듣다 보니 무슨 근로 계약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음.
송태섭은 본인이 왜 이혼을 결심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겠지. 나는 이 남자의 사적인 부분에 위치했음에도, 공적으로 밖에 대해지지 못했다는 거.

무기력한 기분에 그냥 알겠단 대답만 하고 끊은 송태섭. 이젠 무거워진 몸으로 집을 보러 다니기도 어려워 지금까지 본 집 중에 가장 괜찮았던 곳으로 계약함. 이명헌 회사 근처라 좀 신경이 쓰이긴 했는데... 마주치는 일은 없을 것 같으니 괜찮았겠지. 이젠 정말 집을 나갈 때가 되어서, 다음 날 출근하는 이명헌 붙잡고 오랜만에 얼굴 봤겠지. 

집 계약했어요. 일주일 뒤에 바로 나갈 수 있을 거예요.
... 그래. 

짧은 대화에 금방 찾아 온 정적. 그 정적을 깬 건 이명헌이었겠지.

내일 정기 검진일이랬나.

이명헌 입에서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건 처음이었음. 전부 변호사를 통해서 들었으니.

혼자 다니기 불편하진 않고?

의외의 말에 송태섭 눈이 조금 커짐.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지... 같이 가 주기라도 하려는 건가.

택시 타면 금방이에요.

혹시 궁금하면 같이 가도 된다는 말은 삼켰음. 쓸데없이 미련 남은 사람같고. 그 말 들은 이명헌은 내키지 않아도 같이 간다고 말 할 것 같았기 때문에. 아이에게만은 진정한 마음이었으면 해서. 

다녀와요.

문소리가 난 후에, 적막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송태섭은 천천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겠지. 그리고 이명헌이 퇴근할 시간이면 조용히 작은 방으로 가서 부은 다리를 문지르거나, 태교음악을 듣거나 침대에 누워 억지로 눈을 감았음.

정기 검진을 위해 집을 나선 송태섭은 집 앞에 주차된 이명헌 출퇴근용 차량을 보고 놀랐음. 진짜 같이 가려고 어제 물어본 건가? 당황해서 차를 보고만 있으니 운전석에서 이명헌 비서가 내림. 

병원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뒷자석 문을 열어주는데, 역시나. 차 뒷자석은 비어있는 상태였음. 그래, 그 사람이 그럴 리 없지. 꽤나 이명헌 답다 생각하며 올라 탄 송태섭은 멍하니 창밖을 보다 도착했단 소리에 에스코트 받으며 내렸겠지. 병원까지 동행하겠다는 말에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많이 힘들어하시면 부축까지 해드리란 지시가 있었다는 말에 조용히 뒤에 비서를 달고 갈 수밖에 없었음. 그리고 송태섭은 다시 한 번 이 남자의 진정한 배우자가 될 사람은 정말 행복하겠다는 절망적인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음. 

진료가 끝난 후, 송태섭은 새로 받은 초음파 사진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이명헌이 탔던 흔적도 없는 차 시트를 손으로 쓸어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명헌에게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라도 심어주고 싶은 묘한 마음에 꼬깃꼬깃 초음파 사진을 작게 접어 시트 좌석과 등받이 사이의 틈에 꾸욱 밀어넣겠지. 이건 네가 궁금해 하지도 않던 네 아이고. 난 지금 원하지도 않는 방법으로 배려를 받았고. 끝까지 나를 '배우자 송태섭'이 아닌 그냥 '배우자'로만 보는구나. 패배적인 감정을 꾹꾹 눌러담아서.


명헌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