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60385251
view 2482
2023.08.22 23:42
https://hygall.com/560191988

의사 나가고도 이명헌 병실 앞에 한참 앉아있었을 듯. 송태섭이 임신 사실 숨긴 게 이해가 안 됨. 우리의 결혼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얽힌 단단한 비즈니스고, 그 중에서도 임신은 가장 큰 결속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일 텐데. 대체 왜 숨긴 걸까. 
진짜 아주머니 말대로 안정기에 접어들면 말하려고? 그렇다 치기엔 이미 안정기 접어든 지는 오래임. 게다가 아까 의사와 나눈 대화로 봐서는 병원도 한 번 간 적 없대. 마치 누구한텐 절대 들키기 싫단 듯이...

이렇게 얼굴 마주보고 있는 게 오랜만임. 이명헌 짐가방 옆에 내려두면서 딸린 의자에 앉음. 송태섭 눈 어디로 둘 지 모르고 멍하니 창문가나 바닥 무늬나 세고 있겠지... 그러다 이명헌이 먼저 말할 듯.

퇴원 전에 엑스레이라도 찍어보지. 뼈에 금이라도 갔으면...
아니요. 괜찮아요. 저 멀쩡해요. 아픈 곳 없어요.

나름대로 돌려말하려고 마음 썼다가, 이명헌 성질에 그런 거 안 맞아서 그냥 직구로 말해버림.

임신한 건 왜 말 안 했어?

의사도 임신은 모르는 눈치길래 이명헌도 모를 거라 안심했더니, 이미 다 알고 있는 거였음. 송태섭 여태까지 병원도 못 가고 감춰왔는데...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뾰족한 대안도 없고. 입 꾹 다물고 있는 송태섭 보고 답답한 이명헌이 먼저 다시 얘기 꺼낼 듯.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숨겼냐고. 병원도 안 갈 정도로.
....
네 배에 아이 있는 거, 내가 몰라야 할 이유는 뭔데.

송태섭 말 할 생각 없는 듯 더 입 꾹 닫음. 이명헌은 답답해 미치겠지... 임신 5개월 차에 소식 들은 것도 충격인데 병원도 안 갔대, 그러면서 자꾸 이혼하쟤. 대체 송태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도 안 잡히고. 이젠 좀, 짜증날 정도임. 

병원 온 김에 진료 받고 가. 

그러고 송태섭 퇴원 때까지 얼굴 한 번 안 비췄을 듯. 
근데 이건 이명헌 나름의 배려임. 안 그래도 불안정한 상태인 환자 더 들쑤시고 싶지 않아서...
슬프게도 이혼 외치는 송태섭이 여전히 바라는 건, 어찌됐건 우리 같이 아이 키워보자는 확신, 믿음 같은 거였겠지.
산부인과 혼자 가서 아이 멀쩡한 지, 초음파부터 피검사까지 받아야 했던 진료 전부 끝내고 온 송태섭 떨리는 마음으로 집 돌아감. 다행인가, 이명헌은 출근했는지 집에 없었겠지. 

이명헌 퇴근할 시간 되니 어떻게 이 사람 얼굴 보고 이야기 해야 할지도 모르겠음. 애 가졌으니까 이혼 안 해준다고 하면? 애초에 안 들키는 게 목표였는데 지금 이혼이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함. 임신 사실 숨긴 게 잘한 행동도 아닌데 당당히 이혼 요구해도 되나 모르겠음. 복잡하게 이런저런 생각하고 있으면 이명헌 돌아오는 소리 들림.

그래도 인사하러 현관 나가면, 평소보다 차가운 표정의 이명헌 서 있겠지. 눈인사만 하고 들어가는 뒷모습 보다가 물 한 잔 마시고 먼저 식탁에서 기다릴 것 같다. 
이젠 알게 됐고, 그래도 아빠니까. 아기 사진이며 상태 어떤지 오늘 진료 본 내용 말해주려고 했음. 근데 마주한 건 이명헌 얼굴이 아니라 하얀 종이였겠지. 합의이혼서류.

이게...
이혼하자며. 
저기, 이명헌 씨.
이건 나보다 네가 더 원하던 거 아니었나?

송태섭이 식탁에 뒤집어 올려둔 초음파 사진 위로 이혼서류가 떨어짐. 이명헌 밥 먹지도 않고 옷 갈아입고 바로 서재로 들어가는 소리 들림. 그래, 내가 그토록 원하던 게 이거였는데. 이깟 종이 한 장 써주는 거였는데. 



이명헌은 서재로 들어가서 눈 가린 채 소파에 그냥 누워버렸음. 이혼하긴 지금이 적기임. 큼지막한 건들은 전부 해결됐고 일도 잘 풀려서 구설수 없이 높은 위치 올라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묘하게 이혼해주기 싫은 마음도 듦.

이명헌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삶 살아왔고, 본인도 적당히 권력 욕심 챙기면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고. 일도 꽤나 잘 맞아서 원해서 시작한 일이 아님에도 커리어적으로 욕심도 많이 생겼음. 쥐고 태어난 게 좋아서인지 조금만 노력해도 남들보다 쉽게 뭔가를 이뤄낼 수 있었던 이명헌 그렇게 재밌는 삶을 살아보진 못했을 것 같음. 재밌는 삶을 살고 싶다고도 생각 안 해왔을 듯. 

결혼도 마찬가지임. 결혼은 사랑을 기반으로 한 우정, 팀플이라고들 하는데. 다른 목표가 뚜렷하다면 사랑따위 없어도 가능한 거 아닌가. 상대한테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고, 나는 원하는 것을 얻고. 그거면 된 거 아닌가.

결혼 상대로 처음 만난 남자는 이 결혼이 꽤나 내키지 않은 것 같았지만, 곧 별 사건사고 없이 적응해나가는 것 같았음. 적당히 평화롭고, 적당히 잔잔하게. 분명히 평소와 같은 나날들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이명헌은 송태섭이 어딘가 엇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음. 잔잔하고 평화로웠던 이명헌의 일상이 깨지기 시작한 거임. 큰 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이혼해달라는 말에 가타부타 말하기 싫었던 이명헌 큰 프로젝트 끝나면 이혼해주겠다고 했음.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꽤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만족 못하는 부분이 있겠거니 했음. 마주칠 때마다 묘하게 잠겨있는 눈빛도, 표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묻진 않았음. 어차피 이혼할 거니까. 애초에 결혼 같은 건 귀찮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냥 쭉 그렇게 살 걸 그랬다 싶음. 결혼으로 얻는 이득은 포기해도 이명헌한텐 크게 아쉬울 거 없었으니까. 

근데, 이혼하자던 그 와이프가. 알고보니 임신을 했다네? 그걸 다섯 달이나 숨기고 있었다네? 그러면서 무슨 이혼을 하잔 건지. 생각할 수록 왜인지 짜증이 남. 

내 인생은 대부분 잔잔했고, 평화로웠는데. 나도 그런 내 인생이 마음에 들었는데. 갑자기 본인 인생 헤집어놓는 송태섭이 짜증나서. 그 애가 원하는 이혼 같은 거 해주기 싫은 마음이 자꾸 듦.


명헌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