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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2 02:24
주어 : 우성명헌


그냥 뭔가..얘네 둘 다 T라 납득가는 설명과 적절한 안전장치가 부여되기만 하면 정략결혼 존쿨하게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역할 수행할 것 같다는 얕생...

낮에는 정우성 다른 1, 2학년들이랑 똑같이 뒷짐지고 주장형이 하는 말에 옙!!! 알겠슴다!!! 그렇슴다!!!!! 하는데 밤에는 건조한 얼굴로 형, 이제 잘 시간 됐어요 빨리 와요 하면 이명헌 조신하게 금방 갈게뿅 하고 총총 잰걸음으로 둘이 쓰는 방에 들어가는 상상...
산삼즈 자세한 얘기까진 모르고 그냥 둘이 부모님들끼리 아는 사이다, 원래 집안끼리 인연이 있다 그 정도만 들었어서 야 명헌아 너 정우성 아는 애라고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니냐ㅋㅋㅋ가볍게 얘기하는데 이명헌 그 말에 화들짝 놀라더니 더 각잡고 낮에는 주장형 얼굴로 정우성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돌돌 굴리다가 밤에는 입 불퉁 나온 정우성이 형, 얼른. 딱 거기까지만 말하면 새초롬히 눈 내리깔고 뭔가를 각오한 얼굴로 따라가는 상상....

하..산삼즈 졸업할 때까지도 얘네 결혼한 사이인 거 모를 거 같애...
정우성 보내고서 반년 후 이명헌 졸업식날 정우성은 당연히 못 오는데 광철미사 꽃다발 들고 찾아와 며느리 챙겨주는 거 그저 명헌이네 부모님하고 친하시니까 같이 오셨으려니....같이 온 건 맞음 친하진 않음 오히려 우명 결혼 전엔 좀 편한 사이였는데...원래 사돈끼린 좀 불편하기 마련임.

이명헌 대학 가서도 기숙사는 물론이요, 다른 애들하고 하우스 쉐어조차 안 하고 불편하게 멀리서 꾸역꾸역 왕복 세 시간씩 걸려 학교 다니는 상상...근데 심지어 자기네 집 본가에서 다니는 것도 아님 얘 정우성(없는 정우성)네 집에서 대중교통 두 세번씩 환승해가면서 학교 다녀.
본가보다야 가깝다지만 너 그 정도 거리면 자취하는 게 낫지 않냐 소리 1학년 1학기 부터 끊임없이 나오는데 이명헌 들은 척도 안 하고 개강파티며 엠티 무슨 축제 뒷풀이 싹 다 중간에 스리슬쩍 빠져나가고 어쩌다 술 좀 과하게 받아 마신 날엔 어김없이 냉수로 얼굴 벅벅 씻고 집에 들어가는데 다들 그거 얹혀사는 후배네 집 부모님 신경쓰여 그러는 줄이나 알지, 시부모님 어려운 며느리인 줄 누가 상상이나 함.

근데 진짜 보고 싶은 게 뭐냐면 그러고 살다가..모종의 이유로 이 정략결혼을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는 날이 오는 거란 말임.
그 사이 정우성 미국에서 두어 번 짧게 들어오긴 했음 그때마다 형이랑 오롯이 시간 보내기도 했음 이명헌 군소리 없이 서방님 본국 계신 모든 시간 당연하다는 듯 충실하게 정우성한테 전부 다 바쳤음.
근데 더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없어졌을 때....갑자기 헤매기 시작하는 둘 보고싶다....
이제 굳이 이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는데, 우리가 계속 이래야 하나? 아니, 계속 이래도...되나?

명헌이형 불편함 감수하면서 굳이굳이 자기 가족들도 아닌 시댁에서 돌아돌아 통학하는 거 아는 정우성, 갑자기 눈치가 보여. 형도 운동선수인데, 몸 축나는 거 기꺼울 리가 없는데. 내가 먼저 형 이제 편하게 기숙사 들어가도 된다고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그런 생각은 드는데, 이상하지. 말이 안 나옴. 기숙사 거기 다른 남자들도 있잖아요....
정우성 그 얼굴 그 능력으로 미국에서라고 인기 없을 리 없는데 제대로 뭘 해주지도 못하는 저한테 나름 의리 지킨다고 외로운 타지 생활 가운데 누구 만나지도 못하는 거, 사실 퍽 안 됐다고 예전부터 생각했던 이명헌. 이제야말로 너 편한대로 좋은 사람 만나 타국에서 의지하며 지내라고 해줘야 하는데 그게 왜 안 되는지....스스로도 좀 의아함.

어영부영 그러는 동안 착실히 시간은 지나가.

어느덧 베테랑 프로 선수가 된 이명헌 매번 국대 불려 나가는 동안 정우성은 두어번 구단 측의 거부로 국제 대회를 놓치고 그러다 겨우 협상 타결해서 20대 후반에야 처음으로 형하고 같이 뛰게 된 국대는 안타깝게도 메달권을 코 앞에 두고 4강 진출에 실패하게 되는데.
정우성은 아쉽지만 다음 대회를 기약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동안 이명헌은 생각이 많아짐. 다음 대회엔 어쩌면 정말 메달을 딸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근데 그 때까지 기다리는 게 정말 옳은 일인지.
정우성이 아무리 불세출의 뛰어난 선수라 해도 그건 국내 기준에서나 통하는 말임. 본고장에서 아시안 선수가, 심지어 군면제 리스크가 아직 남아있는 선수가 재계약 시 어쩔 수 없이 입게 될 불이익을, 이미 미국에서 충분히 기반을 다진 정우성이 굳이 감당해야 할 필요가 더는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을 고심 끝에 내린 이명헌, 그 옛날 주장형처럼 한낮에 정우성 불러내 뒷짐지고 형 말만 가만 들으라 해.

- 왜 또 분위기 잡는데요, 무섭게.

정우성도 이제 나이 먹어서 그런다고 이명헌한테 진짜 주눅들진 않는데, 그냥 맞춰주느라 열중쉬어 자세 취하고서 애정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웃고 있는데 그 눈에 담긴 애정을 못 읽는 이명헌.

- 이혼하자, 정우성.
- 네...?
- 진작 이랬어야 했다 삐뇽. 가서 현지인 만나. 되도록 빨리 재혼해. 너 이제 낭비할 시간 없다.
- ...형, 그게 무슨 소리예요?
- 지금이라도 귀화하라고, 그쪽으로. 제대로 된 가정도 만들고 삐뇽. 원래 그러고 싶어했잖아, 우성.
- 형, 나는 이게 지금 대체 무슨 소리인지...
- 이제 그만 손해 봐도 된단 소리야.

그동안 잡아둬서 미안했다, 더 일찍 손 뗐어도 됐는데. 하고 돌아서면서 이명헌 갑자기 되게 서글퍼짐.
분명 자기도 처음엔 원한 게 아니었는데, 그리고 나름 손해를 봤는데,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에 말이 서방이지 곁에 있지도 않은 정우성 상대로 기혼자의 예를 지킨답시고. 근데 막상 이 순간이 오니까 사과해야 하는 건 결국 이쪽인 거임. 정우성의 20대와 이명헌의 20대는 가치가 다르다는 걸 스스로 입증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게 비참하고 서글픈데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도 슬프고.

정우성 당연히 진작에 훨훨 날아갔어야 했음. 그쪽에서 더 좋은 사람 만났으면 자리 잡기도 쉬웠겠고, 정서적으로도 빠르게 안정 찾았을 거고, 국대 문제로 이렇게 구단하고 티격태격 할 일도 없었을거고, 군문제로 머리 썩을 필요도 없었을텐데. 그런 거 다 생각하고 따져보면 정우성이 이명헌에 비해 더 손해 본 게 맞아서...애가 착해빠져서 이 상황에서도 먼저 형, 저 이제 제 인생 좀 살아볼게요. 형도 잘 살아요, 하고 끊어낼 요량은 못 되는 거 알면서 미적미적 끌었던 게 이쪽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그래서.

이명헌 추적추적 돌아서서 이런저런 절차같은 거 떠올리는 걸로 도피함. 합의니까 변호사까지 구할 필욘 없겠고, 이혼 서류 수리 되는 데는 얼마나 걸리지. 합의이혼이여도 필수 조정 기간은 있다고 했던 것 같기도. 일단은 집부터 구해야겠고, 빨리 이사하려면 포장 이사도 알아봐야 하는데...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뒤에서 한껏 가라앉은 동굴 저음이 이명헌 붙잡음.

- 이명헌, 거기 서. 나 봐요, 빨리.

이명헌 멈춰 서긴 하는데 차마 돌아볼 엄두는 안 나겠지.

- 나 보라고. 빨리! 남편 말이 우스워?

다그치는 말엔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데 동시에 울음기가 섞여 있어서. 허울만 좋은 남편을 바라보는 가짜 마누라가 아니라 어린 에이스 달래주던 그 주장형으로 돌아가 겨우 몸을 돌리는 이명헌, 바보처럼 줄줄 울고 있는 정우성 보고 말문 막히는데...

- 이혼이 어떻게 그렇게 쉬워요.
- 우성아.
- 결혼했잖아요, 우리 부부잖아요. 평생 약속 아니예요?
- 우리 그거 어릴 때, 아무 의미 없는 결혼이었고...너도, 분명.
- 싫다고요, 싫다고. 이명헌, 나랑 결혼했잖아. 줬다 뺐는 게 어딨어!!

정우성 바락바락 악쓰는데, 애초에 준 기억도 가물하지만 제가 정우성에게 빼앗는다는 말에 합당할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는 게 더 놀라워 이명헌 벙쪄있으면 아끼는 장난감 빼앗기기 직전인 어린애마냥 허겁지겁 이명헌 간절하게 그러안고 연신 고개 부비면서 중얼거리는 정우성.

- 그깟 군대가는 게 걱정돼? 내가 앞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는 대상은 형뿐이야...형뿐이라고요....





뭐 그래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ㅇㅇ
우성명헌 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