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몇 년은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것만으로 벅차서 이 악물고 버티느라 그리움이면 족했고, 자리를 잡고 난 뒤에는 외로움을 달래는 가벼운 관계를 몇 번 가지면서 어느 순간, 남자끼리도 된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 있었겠지. 문화의 차이란 게 커서, 본국에 있었을 때는 전혀 고려해보지 않았을 부분들이 허물어진 것도 있겠고.. 또 이전의 자기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없는 미국에서의 생활이니까 본래 모습에 솔직할 수도 있었을 거고.

그러다 서른 넘어서 귀국하게 되는데, 자기가 알던 고향, 알던 사람들, 익숙한 환경이 십년이 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남아 있어서 조금 낯선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돌아오는 거.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마음 한 구석에 묻어두었던 정대만이란 사람에 대한 감정을, 그 시절에는 정확하게 이름 붙일 수 없었는데.. 이제는 어떤 건지 명확해진 상태면 좋겠다. 예전의 '그건', 단순히 농구를 다시 붙잡을 수 있게 만든 다정함이 아니라 아련함이었을 거고, 주먹을 주고 받은 아픔만이 아니라 극도의 흥분이었을 거고, 끝내주는 시합을 함께 한 동료애가 아니라 몸을 만지고 싶고, 허리를 붙잡고 싶은 성적 관심이었다는 걸 깨달은 거야.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연락을 꾸준히 주고 받았던 것도 아니지만, 국내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2년 쯤 전에 접은 뒤로는 소식조차도 제대로 모르지만.. 북산 시절 주전들 중에 모두와 간간히 메일을 주고 받는 치수를 통해 마침 국내에 다 모인 그 시절 농구부원들의 모임 자리를 가지게 되면 좋겠다. 

누구보다도 먼저 모임에 나간 송태섭, 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온 사람을 확인하고 약간 아쉬워하면서, 이 정도까지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게 자기도 신기하긴 할거야. 그렇다고 다시 만난 정대만한테 ... 여전히 이 곳에서 보통 남자처럼 살아갔을 사람에게 동성의 후배가 이성적으로 들이대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 건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지만. 그런 건, 얼굴을 보고 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상할 정도로 희망적인 상상을 하면서 계속 정대만이 오길 기다리는 거.

근데, 드디어 기다리던 얼굴이 보여서 자기도 모르게 엉덩이 살짝 들썩이며 인사를 하려던 차에 바로 뒤이어 들어온 준호가, 대만이의 웃옷을 받아서 옆에 걸어주고 옆에 나란히 앉는데, 어쩐지 살가운 인사도 못하고 그냥 다시 자리에 앉게 되겠지. 물론 사람 좋은 정대만이야, 야 이게 몇 년 만이냐, 너는 어떻게 연락도 안하고 그 먼 나라에서 그렇게 독하게 성공하고 그러냐, 하면서 반가움에 가득차서 말을 걸어왔지만... 태섭이는 그냥 뭐 .. 살아남느라 나름 바빴다고요. 하면서 실없이 웃고 말았을 뿐이고, 앉은 자리가 다른 테이블이다 보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네 명 위주로 대화를 나누느라 모임 내내 거의 말도 못섞으면서 말야.

하지만 송태섭은 자꾸 눈길이 정대만을 향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을 거야.
그리고 시선이 닿을 때마다 자기와 마주치는 눈이 대만이가 아니라 준호라는 것도.
대만이의 어깨나 허리, 손을 가볍게.. 정말 별 것 아닌 수준으로 닿는 다든가, 물, 반찬을 챙겨주는 그 모습이.. 태섭이가 마지막으로 알고 지낸 두 사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도.

많이 취했다며 잠시 바깥으로 나간 대만이와 곧 뒤이어 따라나선 준호를..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 뭔지 모를 마음으로 나선 태섭이는 그리고 자신의 그 합리적인 의심을 곧 확신할 수밖에 없었겠지. 아무리 둘이 지금 룸메이고 늘상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서 가깝다고는 해도, 그냥 동성의 친구 사이에 저런 혀를 섞는 키스를 하지는 않을 테니까.
전혀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변한 건 태섭이만이 아니었던 거지. 저 정대만이, 남자랑 다정하게 저러고 있는 걸 보자니... 정말 우습게도 오히려 자리가 뭘 하고 싶은지 확실해진 송태섭이겠지.

"아, 미친, 송태섭, 이건 비밀로 좀 해주라." 대만이는 태섭일 보자마자 놀라서 팍 떨어지며 난처해하고.. 준호는 "태섭이 입이 가볍지는 않잖아, 괜찮을 거야, 대만아." 라고 하면서 어쩌면 보란듯이 대만이 볼을 토닥이겠지. 그럼, 머리를 좀 긁적이던 태섭이 영문 모를 말 하나 하는데, 그거 대만이는 못알아듣고 준호는 알아들을 거 같다.

"대만 선배가 농구공 같이 보일 줄은 몰랐는데요... 비밀이야 당연히 지켜드릴 테지만, 걱정할 건 그게 아닐 거 예요."
고 피식 웃고 다시 들어가는 송태섭.. 느바에서 활약할 때 다른 팀 공 스틸해와서 패스 연결시키는 걸로 유명했어서 그게 나름의 선전포고인거 보고싶다.



태섭대만 태대 료미츠
준호대만 준댐 코구미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