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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7 22:26




"형이 먼저 결혼할 줄 진짜 몰랐어요"
"왜? 또 새우꺾기 좀 당해야 정신 차리지?"

아하하 하는 정우성의 웃음소리는 고등학교때랑 별반 다르지 않았어. 신현철은 다 큰 정우성의 머리에 헤드락을 거는 대신 술잔에 듬뿍 술을 따라줬지. 넘친다며 서둘러 술잔에 입을 가져가는 모습이 NBA에서 정상급을 달리는 선수라고 보기에는 정말 소박한 모습이었어. 

술잔이 한 잔 두잔 들어가다 보니 이야기의 화두는 결혼하는 신부 이야기에서, 우성이의 미국 이야기. 그리고 산왕 시절로 자연스레 넘어갔어. 

"형들 다 잘 지내나 몰라"
"야 동오도 곧 결혼할거 같던데?"
"아씨 이 형들이 나 돌아올때까지 기다린거죠? 축의금 받으려고?"
"몰랐냐? 야 축의금은 연봉에 10퍼인거 알지?"

웃음 소리가 연이어 끊이지 않고 정우성의 얼굴이 술기운에 살짝 붉어지고 신현철의 발음이 뭉툭해졌을 때, 자연스레 그 이름도 흘러나왔지. 

"명헌이 가끔 술취하면 네 얘기하더라"
"..."
"워낙 특이한 놈이잖아"

웃던 정우성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한번에 가셨어.



이명헌 중학교때부터 유명했겠지. 유별난 놈이라고. 
말투도 그렇고 하는 행동들도 범상치 않았지만 유별남 놈으로 불린 진짜 이유는 감정기복의 낙차가 동갑들에 비해서 월등하게 적기때문임. 
농구를 위해 태어났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일단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고 목표로 정한 이상 그 외에 방해되는 것들을 최소한으로 만드는 이명헌에게 있어서 자신의 감정마저도 방해요소 중 하나였음. 그렇다고 로봇처럼 뚝딱쾅 이런건 아니고 기뻐도 적당히 슬퍼도 적당히. 만약 이명헌이 40대 중후반을 보는 나이였다면 그렇게 크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겠지만, 한창 감정기복이 날뛰는 10대들 사이에 있으니 튀어보이는 것도 당연했음. 

산왕에 들어가 1학년 주전으로 우승을 했을 때도 이명헌은 슬쩍 웃는게 끝이었음. 다들 흥분에 뛰고 난리도 아닌데 이명헌은 그 사이에서 조용히 웃다가 다음 주 연습스케줄을 확인하러 가겠지. 이명헌 보다 나이 많은 선배들도 그래봤자 10대라 저놈은 진짜 특이하다며 혀를 내둘렀을거야. 

애인이나 사귀겠어? 

농구부를 탐탁치 않아하는 애들 중에는 그런 식으로 이명헌을 까내리는 애들이 있었음. 반에서 앉아 그런 말을 들을때면 신현철은 코웃음을 쳤지. 애인? 이명헌은 애인이 끊이지가 않았어. 다만 이걸 진짜 이명헌이 좋아서 사귀는 거냐고 묻는다면 신현철은 답변하기 애매했음. 말그대로 남녀노소 누구도 가리지 않았어. 신현철이 아는 애만 벌써 5명이 넘었으니까. 

후배들이나 선배나 이명헌이 성숙하고 특별해 보여서 좋다고 좋아했어. 남자애들은 또래 애들같이 시끄럽지 않아서 좋아했고 여자애들은 또래 남자애들같이 저질스러운 면이 없어서 좋다고 했지. 

말그대로 고백을 안받는 날이 없었고 이명헌은 고백을 받는 족족 받아줬어.  


"싫으면 거절해"

무표정하게 편지를 보고 있는 이명헌을 보고 신현철은 결국엔 한마디 했어. 보면 그렇게 좋아하는 거 같지도 않아. 일주일 만에 헤어진 적도 있고  삼일도 못간적도 있어. 점입가경은 헤어졌을 때조차 이명헌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어. 저럴거면 귀찮게 왜 사귀냐 싶은 게 신현철의 생각이었지. 

"어차피 딱히 좋아서 사귀는 것도 피곤하지 않아?"

편지에서 천천히 머리를 든 이명헌은 신현철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어. 그리고 잠시 뭔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편지를 책상에 내려놨어. 

"거절하는 것도 피곤 베시"
"왜?"
"어차피 사귀는 사람이 없으면 누군가 계속 고백하고, 고백을 안받아 주면 받아줄때까지 귀찮 베시"

미간을 찌푸린 이명헌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신현철은 헛웃음이 터졌음. 인기 많은 왕자님이나 할법한 대사네. 그 웃음을 보고 이명헌의 미간도 살짝 펴지겠지 대신에 신현철의 표정이 대번에 굳음. 

"그리고 나도 성욕 있으니베시"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듣게 된 신현철이 표정을 구기자 이명헌은 덧붙일거야. 내가 뭐 로봇이라도 되는 거 같냐고. 느낄거 다 느낀다고. 

신현철이 얼마나 어디까지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이명헌의 성생활이 난잡한 것도 아니었어. 어찌보면 운동루틴에 가까웠음. 상대도 원하고 이명헌도 생각이 있으면 해소하는 정도. 그래서 이명헌은 ㅅㅅ자체를 엄청 좋게도 엄청 나쁘게도 생각하지 않았어. 사실 이런 태도때문에 헤어지는 것도 많았지. 무슨 목석마냥 신음도 안 내는 이명헌의 표정이 어른스럽다거나 조숙하다고 좋아했던 사람들은 이번에는 재미없다고 나가떨어졌거든. 

"그러다 병 옮는다"

한참을 침묵을 지키던 신현철 입에서 겨우 나온 말에 이명헌의 눈꼬리가 살짝 내려감. 웃는 건지 어색해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싫어하는 내색은 아니었음. 

그 후로 이명헌은 정 마음에 안드는 상대다 싶을 때는 신현철 옆에 섰어. 누가 고백한다고 불러내면 슬쩍 신현철을 봤고 신현철은 알아서 그 뒤를 따랐지. 다같이 운동  끝난 후면 빨리 가자며 불러주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요청한 적은 없지만 신현철은 이명헌의 마음이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지지대가 되어줬고 이명헌의 기량과 함께 팀의 기량도 올랐음.



그렇게 2학년.

이명헌은 아무 표정 없는 정우성을 만났음. 

입학 전에 누구랑 싸우기라도 한건지 노란 멍을 달고는 다 죽은 눈동자로 멍하니 있는 정우성은 목석과도 같았음. 훈련에도 잘 임하고 빼는 것도 없었지만 어딘가 사람에게 전혀 기대를 하지 않는 모습. 그런 모습이 신현철은 너무 신경쓰였겠지.

그냥 봐도 알 수 있는게 있었어. 현필이가 처음 초등학교에서 초반에 친구들과 잘 못어울렸을 때 집에 오면 저런 표정이었거든. 신현철은 그런 정우성을 눈짓하며 이명헌을 바라봤고. 이명헌 역시 신경쓰이는 건 마찬가지였는지 고개를 끄덕였어. 

훈련 끝나고 원온원을 하자고 부른 신현철의 배려 이후로 정우성은 서서히 밝아졌어. 흑연과도 같던 눈은 점차 생기를 띄었음. 신현철과 이명헌이 바빠서 훈련 끝나고 원온원 하자고 부르지 않았던 날, 얼굴을 붉히며 다가온 정우성이 쭈볏 쭈볏 원온원 오늘은 안해요? 라고 했을 때 신현철은 저도 모르게 정우성의 머리를 뻑뻑 소리나게 문질렀지. 

그동안 어떻게 버텨온 건지 정우성은 아이같은 면모가 있었음. 쉽게 기뻐하고 쉽게 슬퍼했어. 쉽게 삐지고 쉽게 화해했지. 이명헌은 자신과는 정반대의 정우성이 훌륭한 성적을 내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봤어. 그럴때마다 정우성은 이명헌을 향해 씨익 웃어줬지. 

3학년 초가 되었을 무렵부터는 이명헌에게 고백을 하는 이가 없었어. 대신 고백을 대신 전달해달라고 부탁하는 이가 많아졌지. 신현철 대신에 고백 장소에 따라가기 시작한 우성이를 보고 다들 그쪽으로 흥미가 돌아갔나봐. 이명헌은 딱히 씁쓸하다거나 아쉽다는 생각은 안 했어. 진짜 왕자가 나타났으니 모든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는게 당연하다고. 그 감정 기복이 큰 애가 참 힘들겠구나. 싶었지. 

"형, 받아오지마요. 난 안 사귄다니까?"

편지를 건냈을 때 정우성은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어. 손안에 뻘쭘하게 남은 편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던 이명헌이 교복 자켓 안으로 손을 옮기자 정우성은 잽싸게 손을 뻗어 그 편지를 낚아챘지. 

"제가 다 거절하니까 형한테 그러나봐요. 그러지 말라고 할게요"
"좀 재수없뿅"
"그러게 우성이 좀 재수 털리는데?"

그렇게 말하는 신현철은 웃었어. 

"왜 웃어 뿅?"
"웃겨서"
"뭐가요!"
"그냥. 드라마 보는 기분이다."

어리둥절해 하는 이명헌 앞에 귀가 붉어진 정우성이 신현철을 쏘아봤어. 신현철은 콧노래를 살짝 흥얼거리며 그런 정우성 쪽에 시선을 두었지.  둘의 시선 속에서 아무것도 캐치 못한 이명헌은 뚱한 얼굴로 신현철 옆 벤치에 앉았어.

"아무나라도 사람 사귀어 보는 것도 좋아 뿅"
"얘는 아무나는 힘들걸?"
"저는 아니...아 현철이 형!"

어느새 얼굴이 달아오른 정우성이 신현철의 등을 팡팡 때렸고 그걸 귀엽다는 듯이 맞아주던 신현철은 "6대다" 하더니 그대로 헤드락을 걸었어. 살살 걸린 팔안에서 정우성이 팔딱팔딱 뛰며 잉잉 우는 소리를 냈지. 

"난 힘들던데 뿅"
"뭐가?"

신현철의 되물음에 벤치에서 팔다리를 쭈욱 늘려 기지개를 편 이명헌이 아무렇지 않게 말함. 성욕 배출이 안되니까 힘들다고.

그와 동시에 정우성이 꽤애애액하고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신현철은 뭐라 대꾸도 못했을거야. 낚시로 갓잡은 활어마냥 팔딱팔딱 뛰는 정우성이 신현철의 팔에서 벗어나 이명헌 앞에 섰어.

"형 그렇게! 그렇게 아무랑 막!! 그런!!"
"우성...시끄럽 뿅"
"아니 형 생긴거랑 다르게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런 사람이라니 상처 뿅..."

발을 동동구르며 정우성이 말을 고르는 동안 체육관 문을 열고 도감독이 들어와 이명헌은 자리에서 일어났음.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이익 소리만 내던 정우성은 이명헌이 앉았던 신현철 옆자리에 털썩 주저 앉겠지. 귀부터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정우성은 볼을 잔뜩 부풀리고 이명헌을 흘겨봤어. 이명헌은 그런 정우성의 시선을 느꼈는지 한번 힐끗 보고는 피식 웃었음. 

그러니까 이건 쌍방인거구나. 

드라마를 옆에서 관전만 하려던 신현철은 구원투수가 되어보기로 했어. 이명헌의 절제된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상대로 정우성은 적임자라고 판단했거든. 물결치지 않는 이명헌의 마음은 평온하기보다는 억지로 그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수조를 들고 몸부림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어느 정도의 물결은 모두에게 있는 것이고 그걸 이명헌이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랬어. 

결심이 선 신현철은 옆에 앉은 정우성 머리 위에 큰 손을 뚜껑 덮듯이 턱하고 올렸어. 정우성이 왜욧! 하는 얼굴로 돌려봤고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올려 웃었지. 

"너 오래 끌면 놓친다"

주어 없이 목적어 없이. 신현철은 간략하게 말하며 정우성의 정수리를 다시 한번 큰 손바닥으로 문질렀어. 




그렇게 아주 조금 뒤를 밀어준 것 뿐인데 우리의 에이스는 운동뿐만 아니라 연애에 있어서도 에이스였음. 

"아 진짜 제발 너네 뭐했는지 내가 알게 하지 좀 마"

넌더리치는 신현철 앞에서 정우성은 그저 헤실헤실 웃으며 이명헌을 꼭 껴안고 있었음. 그 앞의 이명헌 표정만 보면 별다를 거 없었지만 저 상기된 정우성의 표정과 입술을 자꾸 메만지는 모습이 신현철을 열받게 했지. 상상되잖아. 저 표정 좀 보라고. 

"우성 무거워 뿅"

밀쳐내는 대도 그저 좋다고 이명헌의 침대에 발랑 뒤집어지는 정우성을 보니 신현철은 아까 먹은 저녁이 다 올라오는 기분이었음. 

"우리 방에서는 안 된다"

엄포를 놓는 것밖에 신현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이 무렵의 정우성은 감정면에 있어서 안정을 찾았어. 그렇다고 기복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이명헌이 조금만 통제를 해주면 금새 평정심을 찾았지. 문제는 이명헌이었어. 

사귀고 나서 얼마 간은 괜찮은가 싶더니만, 인터하이를 준비할 무렵에는 어딘가 불편해보였지. 정말 알고 싶지 않았지만 팀 내의 정신적 지주가 무너지는 건 원치않은 신현철은 기숙사 방에서 불을 끄기 전, 둘의 연애사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넌지시 물었어.

"무슨 일있어?"

대답을 안하는 이명헌을 그냥 두면 좋았을 걸. 한 번더 물어보고 나서 신현철은 자신의 오지랖이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지. 

"정우성이 버거워...뿅..."
"걔가 좀 개같은 면모가 있긴 하지"
"... 침대에서도 그렇더라..뿅.."

소리를 지르려던 신현철은 대신 혀를 깨물었어. 진짜 알고 싶었던 정보다 명헌아. 물어보기를 먼저 물어봤으니 대화를 이어나가야 하는데 신현철은 말이 안 나와 불을 끄고 침대에 가서 눕는 동안 시간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하나뿐이었어. 하지만 이걸 계속 말해보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건지 이명헌은 예의 그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음. 신현철은 피눈물이 흘렀지. 

"이런 적은 없는데...뿅..."
"..."
"내가 내가 아닌 거 같아...뿅...통제가 안돼..."
"..."
"남자랑도 몇번 해봤지만 기절한 적은 없는데...신음이 그렇게 나올 수 있..."
"명헌아"
"뿅?"
"자자..."

말을 뭔가 더 하려던 이명헌은 입을 다물었어. 신현철은 그날 꿈속에서 난잡하게 뒹구는 두 장정이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불경과 성경을 리믹스로 외우며 잠에 들어야했지. 

신현철이 예상하지 못한 건, 정우성은 이명헌의 마음에 잔잔한 살랑바람이 아닌 태풍이었다는 거였음.

정우성은 코트뿐만 아니라 이명헌의 감정 위에서도 훨훨 날아다녔어. 

몇번이나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쾌락에 몸부림치며, 이명헌은 평온한 감정을 유지하기 힘들어했어. 맹물만 마시던 사람이 갑자기 달달한 주스를 마시기 시작했으니, 확 오른 혈당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명헌이 여전하다 생각했지만, 신현철은 이명헌이 혼란스러워하는게 눈에 보였겠지. 

정우성과 함께하는 이명헌의 얼굴에는 웃음이 늘었고 그만큼 그 감정의 낙폭에 힘들어했어. 

단순히 함께 한다는 만족감과 머리끝까지 끌어올려진 쾌감 후에 다시금 마음의 평정심을 돌리는 일은 쉽지 않았지. 하물며 정우성이 이제 곧 미국으로 떠날 거라는 발끝까지 떨어지는 듯한 우울감이 함께 한다면. 

이명헌은 정우성을 너무나도 좋아했어. 그래서 감정은 하루에도 몇백번씩 널뛰기를 했음. 너무 좋아서 없으면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 불안해졌고, 함께 있을때는 너무 좋아서 침착해지기 힘들었음.

걱정되는 것도 있었지만 엄연히 연인간의 문제인데 신현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어. 엄밀히 말하자면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그저 이명헌이 조금은 편해지도록 농구부 일을 도와주는 것 정도였지. 

어쩌면 이건 좀더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야 할 문제였을텐데도. 




북산에게 지고 정우성은 미국으로 떠나게 됐어. 이명헌은 패배 후에도, 돌아가는 버스에서도, 정우성 송별회때도 단 한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음.  이명헌 답다 생각되면서도 신현철은 묘한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어. 1학년때의 목석같던 이명헌이 아니라, 혼이 나간 사람같았거든. 막 입학했던 정우성처럼. 

그에 반해 정우성은 몇번이나 엉엉 울었어. 패배해서, 이제 이명헌과 자주 못 만나서, 이명헌이 아쉬워하는 것 같지 않아서. 누가봐도 마음깊이 슬퍼하는 사람이었지. 감정을 파악하기 쉬운 정우성과 대화하는 것은 신현철에게 일도 아니었어. 

"흑...형은 제가 없어도 괜찮은가봐요"
"...아닐걸"

신현철은 혀를 찼어. 이제 모레면 떠나는 정우성은 눈물이 그칠 줄 몰랐고, 이명헌은 무슨 생각인지 매일 같이 일찍 잠이 드는 바람에 이 투정은 전부 신현철 몫이었지. 

"명헌이는..."

말을 할까 말까 몇번을 망설이던 신현철은 입을 몇번씩이나 움찔거렸어. 

"명헌이는 그냥 이런 상황에 면역이 없어"
"흐엉...그건 말이 안돼요. 그럼 저는요? 저는 있을 것 같아요?"

그러게. 맞는 말이네. 에이스의 핵심을 짚는 말에 신현철은 다시금 할 말을 잃었음. 어쩌면 보는 것과 다르게 정신적으로 성숙한 쪽은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우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정우성의 히끅 소리가 커질 때마다 신현철은 한번씩 손으로 정우성의 등을 쓰다듬었음. 벤치에 앉아 처량하게 우는 모습에 지나가던 학생들이 힐끗거리면 눈짓으로 그냥 보내는 것도 신현철의 역할이었지. 

"전...흑...형이 정말 좋아요..."

꾹꾹 울음을 뭉친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진심이 너무나도 짙어서 신현철은 감히 맞장구조차 칠 수 없었어.





우성이가 지나고 몇달도 채되지 않았을 때.  

"헤어졌뿅"
"뭐?"
"왜 그렇게 놀라뿅. 헤어지고 사귀는거 처음봐 뿅?"

태연히 몸을 풀며 말하는 이명헌 앞의 신현철은 당황스러운 소식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음. 제 연애사도 아닌데 너무 깊이 연루되어 있었나 미국에 있는 정우성의 당혹스러움이 전염되는 느낌이었지. 

"왜?"
"왜긴 뿅. 그냥"
"명헌아 -"
"연습 뿅. 대회 얼마 안 남았어."

이명헌은 몸을 다 풀더니 손뼉을 치며 부원들을 모았어. 언제나 보던 주장의 모습으로. 신현철은 얼마간 돌아가지 않는 머리에 멍하니 서있다가 도감독의 휘슬소리에 겨우 몸을 움직였음. 

절대로 헤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어. 아침드라마처럼 정우성네 아버지가 돈을 주며 헤어지라고 권하고 거절하자 물을 뿌리는 그런 상황이 아닌 이상. 이 둘은 물리적거리에도 절대 헤어질리가 없었어. 그런데 분위기상 이명헌이 먼저 헤어짐을 고했어. 

"미안하다 명헌아"
"뭐가 뿅"
"그냥"
"집중 뿅"

신현철은 더이상 이명헌에게 정우성에 대해 묻지 않았어. 정우성 역시 신현철에게 연락을 하긴 해도 이명헌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언급도 하지 않았지. 즐거웠던 셋의 기억을 온전히 간직한 건 자신뿐이라는 생각에 신현철은 미묘하게 괴로웠어. 





그러니까 지금 10년만에 복귀한 정우성과 작은 술집에서 술을 기울이며 이야기하게 된 것도, 이명헌이나 정우성을 위함이 아닌, 신현철 본인의 죄책감에서 비롯된거야. 

"네 이름만 나오면 눈물을 뚝뚝 떨구는게 누가 보면 사별이라도 한 줄 알겠더라"

신현철은 술을 한잔 더 주문하고 쥐고 있던 술잔의 술을 한번에 비웠어. 

"인터하이에서 그렇게 탈락했을 때도 안 울고, 뭘 해도 안 우는 놈이 그렇게 우니까 내가 당황해서 얼마나 쩔쩔맸는지"

그 가게 손님들이 남자친구 울리지 말라고 하는 통에 진짜 버리고 가고 싶었다니까. 신현철은 소리내어 웃었어. 정우성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신현철은 새로 나온 술잔을 들어 정우성 코앞으로 가져갔음. 갑자기 훅 다가온 신현철의 주먹에 멍하던 정우성이 미간을 좁히며 뭐예요라고 툴툴거렸지. 

"이게 명헌이 마음이야"
"뭔 소리야. 너무 취한거 아니에요?"
"들어봐"

신현철은 대화를 피하려는 정우성의 팔목을 붙잡았어. 사뭇 진지한 표정의 신현철을 보고 정우성 역시 일어나려던 자세를 고쳐 잡고 얼굴을 마주했음. 

"걔는 이렇게 아~무런 미동조차 없는 표면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대"

그렇게 말하고 신현철은 술잔을 살짝 흔들었음. 가득차 있던 술잔의 표면이 옅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좀더 파동을 주자 금새 밖으로 넘쳤어. 

"나는 너희가 동류라고 생각했어"

넘쳐 반은 없어진 술잔을 테이블 위에 소리내어 올려 놓은 신현철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음. 정우성은 말없이 옆의 티슈를 뽑아 신현철에게 건냈어.

"근데 알고 보니 이명헌은 호수였고, 정우성은 흐르는 물이었던거지"
"...알겠으니까 형 이제 그만 일어나요"

"우성아"

신현철은 다시금 일어나려는 정우성의 팔을 잡았어.

"미안하다"
"형이 왜 미안해요. 미안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명헌이 한 번만 붙잡아줘"

어색하게 쓰게 웃던 정우성이 입술을 꾸욱 다물었음. 

"걔 지금 사람꼴이 아니다. 너 가고 10년간 쓰레기같은 새끼도 만나고. 은퇴가 빨랐던 것도-"
"알아요. 부상이잖아요. 선수들 부상이 얼마나 흔한데"
"아냐! 들어봐. 잠자리에서 니 이름 불렀다가 폭행으로 병원 실려가서 입은 부상이야. 내가 몇번이나 말려도 말을 안들어. 그냥 끈떨어진 인형같아."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신현철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어. 그 숨의 무게가 무거워 정우성은 신현철의 숨이 들어가고 나오는 동안 숨도 못쉬고 바라만 봐야했어.

"너때문이니까"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어. 

이명헌을 계속 10년간 봐왔어. 괜찮은 사람 소개해준다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아무 사람이나 닥치는 대로 만나다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러면서도 애정을 갈구 했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았어. 부상으로 안타까운 은퇴를 하고, 코치의 길로 접어든 이명헌은 산왕 주장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억지로 평온을 유지하려 애쓰다 결국 말라버린 이명헌은 텅빈 마음을 채우려는 듯 연애에 있어서 엉망진창이었음. 

왜 그러는지 한마디도 안하다 겨우 털어놓았던 말이 그거였지.

'견디기 힘들었어... 다 헤집어 놓고 그냥 갔어. 그럴거면 날 그냥 내버려두면 좋았잖아. 그냥 가버릴거면...'

그렇게 인생에 흘리지 않던 눈물을 한번에 쏟아내듯 이명헌은 신현철 앞에서 펑펑 울었음. 

'그 이상 메달리면 걔한테 해가 될것 같아서 못 메달렸어. 그래서 끊어냈는데. 끊어내면 금새 다른 걸로 채울 수 있었는데 아니었어.'

'걔가 아니면 안 될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다시 걔를 붙잡아'

신현철은 시선을 한번 돌려 눈물을 참았어. 꼴사납게 남의 연애사로 울고 싶지 않았지. 

"....시발..."

아직도 앳된 정우성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와 절로 눈이 크게 떠졌음. 정우성은 멋대로 테이블에 놓였던 신현철의 폰을 가져가 몇번 건드리더니 귀 옆에 가져갔어.  

"씨발! 이명헌 너 어디야!!!!!!!"

귀청 떨어지는 소리에 안심이 되는 자신이 이상하다 생각하며 이번에도 신현철은 패스하듯 정우성의 등을 밀었음. 

키가 작아 혼자 겉돌던 신현철에게 공을 던져주던 이명헌처럼. 
 





쓰고 보니 신현철의 우울이네

캐붕주의